대구 4월 16일 들뢰즈의 [주 름]
대구 4월 16일 들뢰즈의 [주 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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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4월 16일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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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2-20 19:31
대구070416주름
07 대구강의 4 - [주름] 질 들뢰즈 저, 이찬웅 역, 문학과 지성사(서울: 2004)
07,04,1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들뢰즈의 '주름' 이라는 책인데, 이것을 서평까지 한 이유는, 사람들이 성경을 대하면서 기존 신학에서 미쳐 답변하지 못하고 남겨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때 신학자들이 대답하기가 곤란하면 인용하는 구절이 있는데, 베드로후서 1장 20절 말씀 말이다.
(벧후 1:20)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벧후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자기들이 논리적으로 풀려고 하다가 모르겠다 싶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문제이기에 건방지게 인간들이 그것까지 손을 대면 안 된다고 말이다. 그렇게 스스로 경계선을 치고 하는데, 하지만 성경전체를 볼 때 그렇게 하나님께서 더 알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그럴 때 써먹으면 안 되고, 십자가라는 것이 인간의 지혜로 되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과 베드로 - 성령을 안 받으면 모르지롱 !!
사도바울의 경우에, 그는 자기가 몰라서 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이야기해봐야 너희들이 알아듣지 못한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십자가의 그 풍성한 깊이와 넓이를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말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성령이 오게 되면 자기가 이야기하는 것을 다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전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베드로 사도의 경우에도, 이미 위에 보았지만 함부로 사사로이 풀지 말라는 것은 손도 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샛별이 떠오르는 사람에게는, 즉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것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니 말이다.
◈ 중세철학 - 육의 사람을 영의 사람으로 !!
그런데 과거 중세철학은, 그 당시는 철학이 곧 신학이었는데, 그들은 육의 사람을 영의 사람으로 바꾸어주어야 한다는 책임감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래서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의 공통점을 '이성' 이라고 보고, 물론 이 이성은 각각 수준이 다르고 말이다.
다시 이야기를 해보자면, 영의 사람과 육의 사람의 공통점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이성' 인데, 이 이성은 수준이 높은 것과 낮은 게 있는데, 그렇다면 육에 속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성의 레벨에 따라서 영에 속한 사람이, 그들의 낮은 수준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가 있는데, 그러한 역할을 성직자나 신학자들이 해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라이프니츠는 철학자로 분류되지만, 그 당시로 봐서는 신학자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 신의 뜻을 인간의 언어로 !!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 "아니, 성령으로 거듭나야지 인간의 이성으로 어떻게 되는가?" 라고 퉁명스럽게 내뱉어버려도 되는데, 하지만 그렇게 하지 말고, 라이프니츠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낮은 수준에서 높은 수준으로 올리려고 얼마나 논리적인 틀을 어떤 식으로 추가했는지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들의 애쓴 흔적을 말이다.
사실 이런 점이 상당히 중요한데, 과학은 하루가 다르게 발달하지만 성경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이 변함이 없고 인간의 정신적 틀이 변함이 없다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어쩌면 집중적으로 신의 뜻을 인간의 언어로 표출해내려고 시도했던 그들의 노력이 가상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엄청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논리적 체계로서 진리를 담으려고 하는데, 물론 복음을 담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복음은 물론 십자가 복음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진리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은 어떻게 흘러가고 신은 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했는지, 그런 모든 것을 전부 다 의미한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진리니까 말이다.
◈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전부가 곧 진리 !!
이 진리는 '참(眞)' 이라는 것인데, 참된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참된 일이고, 그러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전부를 다 담아낸다면 진리를 모두 다 담아내는 것이 된다고 하는, 그런 사고논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분명하게 계시고 그분이 하시는 참된 일이 있는데, 그런데 그것을 만약에 모른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직무유기라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말이다.
그러나 지금 성령을 받은 사람의 관심사는 무엇인고 하니, 천국이 분명히 있는데, 이 천국에 어떻게 들어가는지에 대해서 단호하게 양보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복음을 아는 하나님의 성도라고 한다면,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분명히 천국이 있고, 그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을 본인이 알았다면, 이 세상에서 그것을 증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이 하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만약에 천국이 없다고 하면 지금 우리가 하는 이런 주장들은 모두 사기이지만, 그러나 천국이 있고 방법이 다면 우리는 천하보다 더 중요한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인데, 다른 누구를 부러워한다든지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일하심을 제대로 알아야 !!
물론 지금 성령을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고, 그러나 옛날에 신학을 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과 같이 천국이 있고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는 신이 있었고, 이렇게 신이 있으면 신이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온 우주의 움직임이라면, 그 전체를 다 담아서 설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그 당시의 봉건사회에서 왕들이 아무리 반대해도 신학자들은 기죽지 않고 연구를 해왔는데, 그들이 그렇게 목숨을 걸고 연구한 것들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려고 하는 '주름' 이라는 책에 나오는 라이프니츠의 신학이고 철학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그들은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다루었다는 것이다. 물론 복음은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신이 어떻게 일을 하셨는지를 인간세계를 통찰해서 전체를 모두 담아내려고 했는데, 그런 노력만큼은 가상히 여기고 인정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가요?
◈ 오늘은 야무지게 '주름'을 좀 주름잡자 !!
오늘 비도 오고 참석한 사람도 소수정예(?)이고 하니, 교재를 천천히 읽어나가면서 제대로 한번 공부해볼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이제 교재를 처음부터 한번 살펴보자.
** 이 책은 명목적으로는 바로크 예술과 관련지어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분석한 책이다.
여기에 '바로크' 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그 의미는 '화려함' 이라기보다는 '자유분방함' 이라는 뜻이 강한데, 그 이전에는 예술을 하더라도 신의 뜻대로, 즉 법대로 거기에 맞추어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신의 뜻을 이탈하게 되면 악마적이고 말이다. 그런데 바로크 시대에 와서는 융통성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미술이나 그런 예술분야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에도 영향을 미쳐서 문학 등에서도 인간의 자유스러움이 용납이 되는 시대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당시가 군주제도에서 왕이 다스리는 시대이기에, 즉 왕 하나에 모든 것이 매여있는 시대이었는데, 그런데 그 이전은 봉건시대로서 영주가 각 지역을 다스렸는데, 왕은 돌아가면서 하고 말이다. 왕이 다 알아서 하는 전제군주의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 라이프니츠, 너도 아부했는가?
그런데 이 시대는 왕 하나에 다 얽매이기에, 국가는 좀 안정이 되겠지만, 반대로 독재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독재성이 강하다는 것은 교회도 왕권 밑에 있게 된다는 말이고, 신학을 하던 무엇을 하든지 간에 왕에게 아부하게 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즉 왕이 요구하는 데로 신학이 전개된다는 말이다. 이 '주름'이 바로 그런 시대에 활동했던 라이프니츠를 분석한 책이라는 것이다.
교재를 계속해서 보자.
** 하지만 정작 저자가 전하고 싶은 바는, 현대 사람들에게도 난제로 간주되고 곤란한 질문으로 분류되는 의문점들을 감추지 않고 라이프니츠의 논리 안에서 전시하고 해결점을 제공해 보겠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이렇게 "이것은 풀리지 않는 신의 영역이다" 라고 했을 때, 말은 그렇게 해도 신의 영역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다 알아야만 속이 시원한데, 겸손하게 "인간이 어떻게 아는가? 하나님만이 알지" 라고 말은 하지만, 그러나 뒤에 가보면 다 캐내서 나름대로 해석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의 영역이 무엇인가? 교재를 계속해서 보자.
** 그 중의 몇 가지를 나열하면, '아담이 범죄했는데 왜 후대사람들까지 그 벌칙에 동참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나, 또는 '영혼은 신체(물질)와 어떤 관련성을 갖는가' 하는 문제나, '신이 자연을 창조할 때 어떤 식으로 창조했느냐' 하는 문제나, '같은 인간들이 공통점을 지니고 교류가 가능하면서도 왜 각 개인은 따로 자기만의 고유함을 가져야만 하느냐' 하는 문제나, '인간에게 있어 감각적인 것이 어디에서 끝나고 신앙적 지성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 하는 문제나, '신의 지속적 창조를 과연 인간이라는 주체자가 행하는 의로운 행위로 환원시킬 수 있느냐'와 같은 문제가 과연 우리 인간 쪽에서 해결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 질문하는 인간이 나왔다 !!
그들이 첫째로 말하는 신의 영역은, "아담이 범죄를 했는데 왜 후대 사람들까지 그 벌칙에 동참해야 하는가?" 라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성경구절 몇 개를 가지고 해결하려는 것은 그들에게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아담이 범죄를 했는데 왜 후대 사람들까지 그 벌칙에 동참해야 하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성경구절을 몇 개 갖다대는 것은 의미가 없는데, 그 당시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한데, 누가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가? 성경자체가 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하고 있는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런 질문자체가 없고 말이다.
이런 질문자체가 성경에 없다면 성경구절을 갖다대어 봐야, 성경구절은 그 구절 나름대로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나온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담이 범죄를 했는데 왜 후대 사람들까지 그 벌칙에 동참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있는 것이 아니라,
◈ 폴틸리히 - 인간이 질문하고 성경이 답변한다 ??
폴틸리히는 여기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데, "인간이 질문하고 성경이 답변한다" 라고 말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가 않는데, 성경은 성경내부에 질문자가 있는 것이지, 성경외부에 있는 인간이 질문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성경내부의 질문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고 말이다. 즉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질문하고 답변하고, 이렇게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고 한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왜 심었습니까? 없었으면 따먹지 않았을 텐데" 라고 하는 것은 성경내부에서 하는 질문이 아니라, 인간들이 하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마귀를 만들었습니까? 그리고 능력이 있으면 인간에게 찾아오지 못하도록 해야지요. 하나님이 왕이라면 마귀가 타락하는 것을 막아야지 말입니다" 라는 것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 성경은 인간의 질문에 노코멘트 !!
성경내부에서는 그런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했다가는 혼이 나는데, 욥의 친구들처럼 말이다. 그렇게 혼을 내면서도 그 이유는 설명하지 않고 말이다. 이 세상에서 질문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인데, 우리 인간은 질문할 자격조차 없다는 것이다.
질문을 하다가는 얻어맞게 되어있는데, 예를 들어서, 선생님이 "애들아, 숙제해" 라고 하면 학생들은 하면 되지, "선생님, 제가 왜 해야 되지요?" 하다가는 곧 바로 라이트훅이 날아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질문이 필요 없는 피조물인데, 이 피조물 속에는 하나님의 질문과 답변만 담기면 된다는 것이다.
◈ 주께서 주신 진리만 반사되면 OK !!
어제 오후설교도 그런 것인데, 주께서 주신 진리가 되받아서 반사되어서 나오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건방지게 "콩 내놔라, 팥 내놔라" 할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후설교를 좀더 이야기해보면, 사람이 뭔가 부러운 것이 있다는 것은 자기에게 미흡한 것이 있다는 말인데, 즉 미흡한 것을 부러운 것으로 채우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전도서에 나오는 지혜의 경우에 도대체 부러운 것이 없다는 말이다. 소위 '지혜서' 라고 하는 잠언이나 전도서나 아가서의 저자들이 세상적으로 그 무엇을 부러워하는 느낌을 주었느냐는 것이다. 그런 것이 전혀 없는데, 마치 세상을 통달한 것과 같이 말이다. 그래서 "자슥아, 나에게 한 수 배워" 라는 식이라는 말이다. 모세의 경우에도, 모세가 무엇을 부러워했는가? 바로의 아들자리도 포기했는데 말이다. 그 엄청난 세손 자리를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부러움과 기대를 가지고 "그것을 좀 가르쳐주세요" 라고 했을 때, 사실 우리는 그런 질문자체를 이야기할 입장이 전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데, 즉 말씀이 '가라' 라고 하면 가고, '오너라' 라고 하면 오면 되는 것이지, 즉 그것을 되받아서 반성(?)하면 된다는 말이다.
◈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만 !!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그러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귀가 예수님을 광야에서 시험하는 대목에 나오는데, 마귀가 예수님에게 하나님을 시험해보라고 할 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나는 아버지의 뜻대로만 할뿐이지, 내가 무엇을 어떻게 더 하고 말고 하는 것은 내 소관이 아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그냥 아버지의 뜻대로만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귀에게 말하기를, "너도 오직 하나님에게 굴복하고 절하라" 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귀는 자꾸만 예수님이게 "나에게 절을 하시오" 라고 하는데,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영광이 좋아서 마귀에게 절을 하고, 또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예수님에게 뭔가 미흡한 점이나 남을 부러워할 만한 것이 있다면 몰라도, 그러나 예수님은 광야에서 배를 움켜잡고(?) 금식을 하면서도 전혀 부러운 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냥 아버지의 뜻만 이루면 끝이라는 말이다. (그래도 배는 조금 고팠지 싶은데...)
하지만 예수님 말고 다른 인간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질문을 던지면서 호되게 꾸지람을 당할 각오를 하고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에서 어떤 해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아하, 나의 이런 질문이 완전히 한방 얻어맞을 질문이구나" 라는 것을 발견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해답이라면 해답이고 말이다.
◈ 1. 아담이 범죄를 했는데 왜 우리가 벌을 받아야 하는가?
그러니 "아담이 범죄를 했는데 왜 우리가 벌을 받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그 질문자체가 그야말로 매를 쌓아놓는 질문인데, 그러니 여기에다가 대놓고 "성경말씀인 로마서 5장에 보면 아담이 범죄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라고 해도,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 질문은 또 질문의 꼬리를 물고 !!
왜 소용이 없는고 하니까, 로마서 5장에서 아담이 범죄해서 그 죄가 우리 인간에게 왔기에 아담만이 아니라 우리도 벌을 받는다고 해도, 성령을 받은 사람은, 즉 자기 죄를 주님 앞에서 아는 사람은 이런 질문자체가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러나 자기의 죄성을 모르는 사람에게 성경구절을 대봐야 거기서 질문이 또 나온다는 것이다. "아하, 그렇구나. 세상에 내가 죄인인 것을 모르고" 라고 나오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당장에 연이어서 하는 말이 "글세 목사님, 제 말이 바로 그것인데, 목사님은 로마서 5장을 통해서 설명을 하셨는데, 아담이 범죄를 했으면 그에게 국한되어야지 왜 우리에게 또 미쳐야 하느냐고, 로마서 5장에 나오는 것을 제가 물었잖아요" 라고 말이다.
그러니 "왜 우리가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벌을 받아야 하는지, 그리고 왜 로마서 5장에 그런 내용이 나오는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라고, 그렇게 또 질문에 질문을 달고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것들이 다 "왜 그렇게 했느냐?"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가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 다니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고, 제가 궁금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범죄를 저질렀으면 그 아담으로 책임을 끝내야지, 그런데 그것을 왜 우리에게 연결시켜서 덮어씌웁니까? 로마서 5장에 나오는 대로 말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다.
◈ 문제는 언제나 '자아의 존재' !!
이렇게 나온다면 천 목사님은 과연 뭐라고 답변하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문제의 밑바탕에는 '자아의 존재'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나니까" 라는 데서 출발을 하니 이런 질문들이 마구 쏟아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는 이것을 마치 황산처럼 녹여버린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마치 의사가 암 조직을 없애듯이 그렇게 잘라내고 태우고 녹여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상대방에게 이야기해버리면, 듣는 사람들의 태도가 둘로서 확연하게 나누어지는데, 거부하는 쪽은 확실히 거부하고, 다른 쪽은 십자가에 대해서 새롭게 알고 너무 너무 좋아서 감격해한다는 것이다. 이 십자가는 지식을 하나 더 획득했다는 차원이 아니라, 곧 자기가 부서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말이다.
지금 우리가 이런 문제를 이야기했는데, 이것은 라이프니츠가 신학적으로 어떻게 푸는지를 살펴보고, 성경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논리로, 즉 아까 말한 수준이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는 것으로 풀어낸다는 것이다. 물론 정답일 수는 없지만 한번 살펴보자는 말이다. 정답은 아니지만 논리의 반박이 안 되는데, 그래서 라이프니츠가 위대한 철학자라는 것이다.
◈ 2. 영혼은 신체(물질)와 어떤 관련성을 갖는가?
이제 교재에 나오는 두 번째의 질문에 들어가서, "영혼은 신체(물질)와 어떤 관련성을 갖는가?" 라는 것인데, 그리고 "신이 자연을 창조할 때 어떤 식으로 창조했는가?" 라는 것인데, 모두가 이 3가지의 문제와 관련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을 보니 칸트 생각이 나지 않습니까? (전혀 안 나는데...)
◈ 칸트 - 신, 자유, 영혼 !!
칸트는 인간의 이성으로 접근할 수 없는 3가지의 문제를 제시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신'과 '자유'와 '영혼' 인데, 칸트가 신과 자유와 영혼을 이야기할 때, 이것들을 인간이 감히 풀 수가 없다는 취지에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물론 그런 면도 있지만, 신과 자유와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이것을 '물(物)자체' 라고 해서,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되지 않고 그냥 직관이고 믿음의 대상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칸트가 굉장히 겸손해 보이는데,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신과 자유와 영혼이라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칸트의 경우에 어떤 논리를 전개하면서, 자기의 논리가 막히게 되면 항상 신과 자유와 영혼으로 빠져버리면 해결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공리(公理)' 같은 것이 되는데, 예를 들어서,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 라는 것은 증명이 안 되는데, 증명이 되는가요? (ㅋㅋ) 그러면 다른 것으로 예를 들면, "점은 면적도 없고 크기도 없다" 라고 했을 때, 이것은 증명될 문제가 아니라 일단 그렇게 정해놓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모든 것을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또 유클리드 수학에서는 "나란히 가는 평행선은 만나지 않는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현대수학에서는 그것이 무한대로 만난다는 것이다.
칸트가 말하는, "우리 직관으로 알고 있다" 라는 것은, 신과 자유와 영혼에 대해서는, 즉 "신이 주신 것이기에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비참하게 볼 자격이 없다. 고귀한 존재로 보아야 한다"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체를 신격화시키는 근거로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를 계몽주의 철학자라고 하는데, 이 '계몽' 이라는 것은 수준이 낮은 무지한 인간을 깨우치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아프리카의 식민지 정책에 중요한 사상이 되는데, 그래서 '선교하자' 라는 것이 '계몽하자' 라는 것으로 다시금 태어나는데, 선교가 곧 계몽이고 계몽이 선교이기에, 말을 듣지 않는 놈들은 때려죽어도 된다는 것이다. 즉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유럽으로 끌고 와도, 그것도 일종의 계몽이니 하나님께서 주신 신의 사명이고, 그런 것들이 모두 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같은 인간들이 공통점을 지니고 교류가 가능하면서도 왜 각 개인은 따로 자기만의 고유함을 가져야만 하느냐' 하는 문제나, '인간에게 있어 감각적인 것이 어디에서 끝나고 신앙적 지성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 하는 문제나, '신의 지속적 창조를 과연 인간이라는 주체자가 행하는 의로운 행위로 환원시킬 수 있느냐'와 같은 문제가 과연 우리 인간 쪽에서 해결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 4. 인간들은 교류가 가능한데, 왜 개인은 따로 고유함을 가져야만 하는가?
여기서는 "인간들이 공통점을 지니고 교류가 가능한데, 왜 개인은 따로 자기만의 고유함을 가져야만 하는가?" 라는 문제인데, 이것을 누가 대답할 수 있나요? 같은 인간이 서로 공통점이 있는데, 코 하나, 입 하나, 귀 두 개, 이렇게 공통점이 있는데, 그렇다면 '너와 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 덩어리로 살아야 하는데, 왜 한 몸이라고 하는 부부끼리라도 자기 개성을, 자기 고집을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 반갑다, 친구야. 정말 ??
흔히들 "친구야, 반갑다" 라고 하지만, 그러나 친구는 외로울 때, 몸이 아플 때, 심심할 때 친구이지, 자기가 엄청 바쁠 때는 번거롭다는 것이다. 번거로우면 자기의 장애물이 되고 말이다. 그러면 친구를 좀 멀리하다가 자기가 다시 외로우면, "친구야, 반갑다" 라고 해서 가까이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왜 인간은 같은 한 집에 살면서도, 같은 식구이면서도, 즉 남편이고, 아내이고, 자식이면서도, 왜 자기 개성을 계속해서 고집해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도대체 어디서 어디까지가 '나'인가?" 라는 것이다. 물론 각자의 신체는 구분이 잘 되는데, 남편이 배가 고프다고 해서 마누라가 배가 고픈 것이 아니니 말이다. 이것이 조금 전에 말한 두 번째 질문과 해당이 되는데, 영혼과 신체가 서로 관련성이 있다는 것이다.
제가 질문을 던지면 답변을 좀 하면 좋은데, 그래야 서로가 힘이 나니 말이다. 이렇게 영혼과 신체가 관련성이 있는데, 그렇게 관련이 있다면 신체가 개별적이라면 영혼도 개별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구별이 되면 자를 때 도대체 어디서 잘라야 하느냐는 것이다.
◈ 신체와 정신을 두부 자르듯이 !!
예를 들어서, 친구 사이에 영화보기를 좋아한다면, 물론 영화를 볼 때는 자르면 안 되는데, 사실 자를 필요가 없는데,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한 사람은 냉면을 먹자고 하는데, 다른 한 사람은 돈까스를 먹자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또 갈라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체가 갈라지는 것은 몸뚱이라서 뻔히 아는데, 그런데 이 신체와 관련된 것이 곧 정신인데, 이 신체가 갈라지듯이 정신도 갈라진다고 하면, 그러면 이 정신은 어디서 어디까지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잘라야 하고, 그리고 왜 그렇게 잘라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부부사이에도 왜 통장을 따로 챙겨야 하느냐는 말이다.
도대체 정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구분을 지을 수 있는가? 식빵을 보면 마치 낙타 등처럼 골이 들어간 부분이 있는데, 왜 그렇게 만들었는고 하니 그 부분을 잘라서 먹으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 정신과 친구의 정신을 구별할 때, 식빵처럼 그렇게 구별해서 자를 수가 있다면, 즉 "이것은 나의 정신이고, 그것은 너만의 개별적인 독특한 정신이다" 라고, 그렇게 자를 수가 있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말이다. 그것을 한번 답변해보라는 것이다.
◈ 신의 뜻을 모른다는 것은 직무유기 !!
이것을 두고 "라이프니츠는 참으로 씨잘데기 없는 소리를 하는데" 라고 하면 그 양반이 화를 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라이프니츠에게는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나왔는고 하니, '신'에게서 나왔다는 말이다. 그러니 신의 뜻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직무유기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모든 것들이 신에게서 나왔으니, 그것을 제대로 이야기해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 당시 독일은 전 국민이 모두다 신자이고, 태어날 때부터 유아세례를 다 받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교육자이자 철학자이자 신학자로서, 모두 신자인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답변해주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신학자들은 그야말로 목숨걸고 연구를 하는데, 요즘 같이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신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그들은 양보 없는 진지함이 있었다는 것이다.
야, 이거 뭔지 몰라도 진짜 맛있네. 다음 주에도 먹어봤으면...
그렇다면 지금까지 여러 가지 이야기한 것들에 대해서 라이프니츠는 어떻게 답변을 했는지, 그것이 궁금한데 그 밑에 나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재를 보자.
** 그런데 이러한 난제들의 해결책은 각기 따로 풀어낼 필요가 없는데 그 이유는 신의 창조 행위로 다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창조 행위가 바로 '주름과 차이성'이다. 신은 사건을 통해서 창조하신다. 이는 모든 존재물들은 그 안에 신의 창조적 사건들을 품고 있다.
◈ 하나님의 창조행위, 그 한방으로 !!
라이프니츠가 말하기를, 신의 창조행위로 그런 궁금증들이 다 해결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번 보세요. 지금 "나는, 나는, 친구는, 친구는, 정신은, 정신은, 물질은, 물질은, 영혼은, 영혼은" 라는, 이런 것은 전부다 하나의 존재, 존재, 존재, 그러게 대상을 각각 구별을 해서 했는데,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행위' 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행위 말이다. 존재가 아닌 행위로서 다 풀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존재와 행위의 차이점이 드러나는데, 즉 '창조행위' 라는 것이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사건' 이고 말이다.
◈ 자, 이 손으로 말씀드리자면 !!
어렵게 설명할 것 없이 진짜 쉽게 하자면,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손이 있는데, 이것을 미리 앞당겨서 라이프니츠 식으로 말하면, 손은 이렇게 손가락이 5개이고 한 덩어리인데, 이것을 라이프니츠는 어떻게 보는고 하니, 이것을 단자로 보면 손은 이렇게 '주름 층'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주름 층이 5개이면 손가락이 5개이고 말이다. 그러니 한 층, 한 층마다 하나님의 사건이 입혀지고 또 입혀지고 입혀져 있다는 것이다.
프라이드 치킨을 찢어보면 각각 하나 하나의 근육질이 한 층 한 층 벗겨지는데, 물론 갈비도 그렇고 말이다. 마찬가지로 라이프니츠는 주장하기를, 우리의 존재를 하나님의 사건이 꾹꾹 눌려서 단단하게 고정되는데 동원이 된 것인데,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했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그 사건을 일으킬 때 주름진 것을 탁탁 건드려서 자극을 주게 되면, 그것이 한 겹 한 겹 드러날 때마다 감추어진, 즉 농축된 손의 본성이 탁탁 드러난다는 것이다.
손은 그냥 손에 불과한데, 예를 들어서, 그림을 그릴 때 손은 그냥 손인데, 즉 움직이는 근육덩어리에 불과한데, 이 손이 붓을 들고 아름다운 그림이 나오게 되면, 손이 없으면 그림이 안 되니까 말이다. 그러니 손이 가지고 있는 주름이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주름인데, 즉 하나님이 창조해서 증여한 것이라는 말이다.
◈ 이정우 교수님, '쟁여'가 뭐예요?
이 '쟁여' 라는 개념은 철학자인 이정우 교수가 쓰는 표현인데, 꼬깃꼬깃 꼬불쳐있는 것이 하나님의 새로운 아이디어나 사건이 오게 되면 신의 사건에 반응을 해서, "아니, 나에게서 이런 그림이 나오네. 다른 사람들은 벌벌 떨면서 하는데, 나는 반듯하게 나오네. 좌악, 좌악, 야 진짜 신기하게 그어지네. 내가 봐도 참으로 하나님의 신기한 행위를 보여주는 놀라운 사건이네" 라는 것이다. 교회용어를 사용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라고 말이다.
여기에서 "'나' 라는 존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해버리면, 전제가 무엇인고 하니, '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손은 누구의 것이 되는가? '나'의 것이 된다는 말이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뭔가를 기대하고 있는데, 아까 말한 그 서너 가지의 질문들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나에게 속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속하는데, 어떻게 나에게 속한 나 자신이, 나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에게 속한 말씀에 응답하고 성취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인데, 조금 전에 한 질문들이 말이다.
◈ 라이프니츠 - '나' 라고 하는 것을 없애라 !!
여기에 대해서 라이프니츠는 그렇게 질문하는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그러니까 여기에 있는 '나' 라고 하는 것을 없애라는 말이다. '나' 속에 이미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행위와 사건이 이미 있는,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그러한 한시적이고 임시적인 '나' 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고 사건을 만들 때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것을 아는데, 쉬운 예를 들면, 아침에 아이가 학교에 가려고 "엄마, 빨강양말을 어디에 치웠어요?" 라고 하는데, 엄마가 대답하기를 "니하고 양말하고 무슨 상관이고" 라고 하면, 그 아이는 자기가 돈을 벌어서 양말을 직접 사서 신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의 양말을 씻어서 서랍 속에 가지런히 놓아둔 사람이 누구인가? 엄마인 것이다. 할머니라고? 그것을 누가 아는가? 아들이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이 엄마에게 묻는데, 자기 양말을 어디에 두었는지 말이다. 즉 이미 알고 묻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가 "응, 둘째 서랍에 들어있단다" 라고 하면, 그 아들은 둘째 서랍을 열어서 빨강양말을 꺼내는데, 바로 그렇게 끄집어내는 것을 두고, "신의 행위가 나를 통해서 작용하고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빨강양말을 꺼내는 것이 자기 솜씨인가? 아니라면 엄마 솜씨가 발현된 것인가? 그 빨강양말을 꺼내는데 향긋한 섬유린스 냄새가 풍길 때 엄마의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 인간이 움직일 때마다 쟁여된 사건들이 !!
그래서 라이프니츠는 인간이 이렇게 무엇 하나 움직일 때마다 펄럭 펄럭 냄새가 나는데, 그 냄새가 무슨 냄새인고 하니, 우리는 미처 몰랐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차곡차곡 재어서 쟁여해준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들이, 우리의 행동이 하나 하나 움직일 때마다 펄럭 펄럭 하나 둘 튀어나올 때,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우리 피조물을 통해서 원하시는 사건의 의미라는 것이다.
어때요? 정말로 그럴 듯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제가 조금 전에 말하기를,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대답은 물론 정답은 아니지만 반박이 안 된다고 했는데, 그런데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을 복음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제 복음과 복음이 아닌 것이 이해가 됩니까?
◈ 라이프니츠의 주장이 누구 주장?
이 라이프니츠의 주장이 바로 오늘날 소위 아주 건전한 교단에 속했다고 하는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하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은혜롭다고 하는 교회들 말이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그런 교회들이 다 이단이라는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이단인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은혜롭게 보여도 십자가로 출발하지 않고 무엇으로 출발하는가? 신의 존재로 시작해서 신의 행위로 끝내는데, 이것은 철학의 하나님이지, 결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공부를 하지 않고서, "어디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신학에 비교하는가?" 라고 해버리면, 자기가 실컷 준비해서 은혜롭게 설교를 했다고 하더라도, 자기는 나름대로 아무리 건전하다고 우겨도 그것은 라이프니츠의 주장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 라이프니츠의 '주름'과 '차이성' !!
그런데 신의 행위에서 두 가지가 무엇인고 하니까, 방금 제가 설명한 것은 한 가지만을, 즉 '주름'만 이야기했는데, 그 뒤에 나오는 하나가 바로 '차이성' 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들뢰즈가 주장하는 라이프니츠 철학의 핵심이 바로 이 '주름과 차이성' 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성' 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을 설명하면 또 은혜가 넘치는데,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이근호가 신을 알면, 신은 이근호보다 작을 수가 있다" 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내가 다 아는 신이라면, 결국 신은 내 안의 신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신을 알려고 하면 다른데 가면 안 되고 '나'에게 와야, 즉 '나'에게 와서 배워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신을 다 아니까 말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여기에 이근호가 있고 저기에 천 목사님이 있는데, 천 목사님도 나름대로 알고 있는 신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각자가 이성적인 수준의 차이가 있는데, 다른 사람이 모르는 것을 자기가 알 경우에, 사실상 다른 사람이 '안다, 모른다' 정도가 아니라 이렇게 집합적으로 해서, "어느 원이 더 큰가?" 라는 문제까지 들어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알고 있는 계란 만한 크기의 신과, 이렇게 내가 알고 신 중에서 어느 신이 더 큰가?" 라는 것이다. 그러면 작은 쪽은 당연히 큰 쪽에 포함이 되는데, 그렇게 포함이 되어도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큰 쪽이 작은 쪽으로 가버리면, 큰 것을 잘라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작은 것에 크기를 맞추려면 말이다.
◈ 정 목사님의 고민 - 어디를 자를까?
바로 이런 에로사항이 정석훈 목사님이 당면한 문제인데, 정 목사님이 서울의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데, 어제 전화가 왔다는 것이다. 자기의 설교를 교인들은 대부분이 좋아하는데, 그런데 지난 주 새벽기도시간에 "이제 좀 고만해라" 라고 당회장 목사가 고함을 지르더라는 것이다. 제발 복음을 그만 전하라고 말이다. "영적으로 풀지 말라는 말이야" 라고 하면서, 그것도 설교도중에 말이다.
정석훈 목사님의 설교는 아빠방에 다 올라와 있는데, 수위가 점점 높아진다 싶더니만 얼마 전 새벽에 드디어 터졌다는 것이다. 꼭 화평교회를 보는 느낌인데, 사태가 그렇게 되면 "이시, 어디서 당회장이"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일단 정 목사님은 자기가 깎아서 한번 맞추어보겠다는 것이다. 각자의 원의 크기가 서로 다르니 말이다.
◈ 신이 자신의 다양성을 잃어버린다면?
지금 라이프니츠가 무엇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고 하니까, 어떤 특정 인간이 신을 알아버리면 신은 그 사람 속에 다 포함이 되어서, 결국 신은 자신의 다양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신은 항상 신을 안다고 하는 인간보다는 커야 하는데, 논리적으로 말이다. 그러면 그 큰 것을 다 안다고 하는 이 놈보다는 신이 더 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이근호' 라는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을 또 다른 사람도 알고 있을 것인데, 예를 들어서, 이렇게 A와 B가 있다면, A가 알고 있는 것이 있지만 미처 모르는 것을 B가 알고 있고, 그리고 B가 모르는 것을 C가 알고 있고 말이다. 그 다음에 D, E, F,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나가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신은 어떤 개인보다도 훨씬 더 큰데, 그리고 개인은 그 신을 다 잡아먹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 신과 인간의 그 차이만큼, 참된 신이다 !!
다시 말해서, 인간이 "나는 신을 다 안다" 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신다와지는데, 맞지요? 그러니 A와 B는 당연히 차이가 나야 하고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차이가 난다는 것은, 신은 그 차이가 나는 만큼 참된 신이라는 것이다. 차이가 난다는 것은 말이다.
그러니 제 아무리 인간이 똑똑하고 많이 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정한 인간에게 그야말로 독점적으로 몰아주는 식으로 모든 것을 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렇게 되어버리면 신은 그 사람의 똘마니가 되니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의 차이성을 보면, 여기에서 라이프니츠가 "아담이 범죄했는데, 왜 후대 사람들까지 그 벌칙에 동참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를 어떻게 푸는지를 살펴보면, 조금 전에 이야기한 것은 네 번째 질문인, "같은 인간들이 공통점을 지니고 교류가 가능하면서도, 왜 각 개인은 따로 자기만의 고유함을 가져야만 하는가?" 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무튼 나름대로 해결이 되었고 말이다.
◈ 한진영님이 바라보는 '현실' !!
이제 두 번째로 한 개인을 생각해보면, 이 사람은 2006년 11월 5일에 십자가의 복음을 알았는데, 혹시 한진영씨가 십자가 마을 사이트에 오늘 아침에 올려놓은 '현실' 이라는 글을 읽어보셨는지? 제가 그것을 읽고 얼마나 감동이 되던지, 제 평생에 그런 글은 처음 보았는데, 너무 좋아서 우리교회에도 올리고 또 그 밑에 헌사, 즉 바치는 글이라고 해서 적고 했는데, 제가 지금까지 쓴 모든 글과 제가 읽어본 그 어떤 철학책에 있는 글보다 더 뛰어난 글을 써놓았다는 것이다. 아주 짧은 글이지만 너무 좋아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라고 했는데, 집에 가서 한번씩 읽어보라는 것이다.
아무튼 그분은 2006년 11월 5일에 복음을 알고 나무나 감탄을 했는데, 그러면 2007년도의 십자가가 그 십자가와 동일한 십자가인가? 만약에 그것이 동일한 십자가라고 하면 이 십자가는 이 사람에게는 갇힌 십자가라는 것이다. 즉 그 사람의 관리 아래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이 사람은 신의 대리자가 되고 신은 더 이상 이 사람에게 파고들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2007년도의 신은 또 간여를 해야 되는데, 어떻게 간여하는고 하니까, 다양성으로 간여한다는 것이다. 그 말은 2006년도에 알았던 신과는, 그 신에다가 '+알파'이던 다른 무엇이 되었던 간에, 아무튼 차이가 나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차이성을 어떻게 해야 하는고 하니, 분명히 아담이 범죄했는데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아담의 범죄를 어디까지 잇게 하는고 하니, 오늘 우리가 있는 2007년도까지 연결시켜놓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담의 범죄를 잇게 하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는 것이다.
◈ 다시 질문, 아담의 범죄를 왜 우리까지 감당해서 벌을 받아야 하는가?
조금 전에 질문이 무엇인고 하니, "아담의 범죄를 왜 우리까지 감당해서 벌을 받아야 하는가?" 라는 것인데, 그렇게 질문하는 자체가 아담의 범죄를 현재 우리가 알고 있다는 뜻인데, 그런데 하나님은 "노, 니는 몰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이 범죄한 것을, 즉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그것만 알고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마치 우리가 몰래 감나무에 올라가서 감을 따먹은 것처럼 같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그렇게 같다고 보는 것 자체가 신의 다양성을 모독한다는 것이다.
참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예를 들어서, 주일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교복을 뒤집어 입고서, 과수원에 가서 "따먹지 마세요" 라고 주인이 적어놓은 팻말을 무시하고 사과를 몰래 따먹었다고 하면, 그런데 그 아이는 교회에서 들은 것이 있는데,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그 아이는 자기가 사과를 몰래 따먹은 것과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똑같은 행위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동일시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신의 다양성을 모독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 라이프니츠 - 신의 다양성을 모독하지마 !!
그래서 라이프니츠는 "착각하지마. 니가 알고 있는 죄는 죄가 아니야. 그것은 니가 소규모적으로 알고 있는 죄에 대해서만, '아마 이게 죄일 걸' 라고 착각한 것은 작게 생각한 것이고, 니 자식이나 손자가 죄 짓는 것도 처음부터 하나님의 다양성 속에 있는 아담의 죄 속에 다 들어가 있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풍성한 신의 다양성인데, 그러니까 "나의 죄와 나의 자식놈의 죄가 모두 따로 따로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따로 되어있다고 해서 자식놈이 "아버지가 죄를 지었는데 왜 내가 벌을 받아야 합니까?"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 앞에서는 '너와 나'가 따로 따로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이런 '따로, 따로' 라는 것이 신이 말한 죄라는 개념 속에 하나로 묶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신의 풍성함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우리를 죄 짓게 하신다" 라는 것이다. 신의 풍성함을 알리기 위해서, 즉 신이 죄라고 할 때에 그 죄라고 하는 개념의 풍성함을 말이다. 그러니 라이프니츠를 시시하게 여기다가는 큰코다친다는 것이다.
◈ 부산경남팀, 철학자들마다 모두 최고래 ??
재미있는 것은 우리 부산경남 성경공부에서 '50인의 신학자' 라는 교재를 가지고 공부를 좀 했는데, 목사님들이 강의를 들으면서 반응이 무엇인고 하니, 칸트를 강의하면 칸트가 최고라고 하다가, 피이테를 강의하면 피이테가 최고라고 하다가, 쉘링을 강의하면 이제 쉘링을 뛰어넘을 놈은 없다고 하다가, 헤겔이 나오면 헤겔이 최고이고, 하이데거가 나오면 또 하이데거가 진짜 최고라고 하고 말이다.
그렇게 들뢰즈, 레비나스, 라캉 등이 줄줄이 나오는데, 이들이 과거에 무슨 철학적 주장이 있었는지 모르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즉 노가다 판에서 술 한잔 먹고서 취중진담이라고 철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깊이 있게 과거의 것을 다 섭렵하고, 즉 헬라철학을 공부하고, 거기에다가 자기의 것을 더해서, 즉 수준 높은 이성으로 완벽한 진리를 파악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차이성' 이란 말이다.
◈ 영혼은 신체(물질)와 어떤 관련성을 갖는가?
지금 "영혼은 신체(물질)와 어떤 관련성을 갖는가?" 라는 것이 아직 해결이 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다른 문제들은 자기들 나름대로는 해결을 했다는 것이다. 교재를 계속해서 보자.
** 그런데 이러한 난제들의 해결책은 각기 따로 풀어낼 필요가 없는데, 그 이유는 신의 창조 행위로 다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창조 행위가 바로 '주름과 차이성'이다. 신은 사건을 통해서 창조하신다. 이는 모든 존재물들은 그 안에 신의 창조적 사건들을 품고 있다.
이것은 아까 손을 가지고서 설명한 것인데, 손에 있는 잔주름을 가지고 이야기했는데 말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기억이 좀 나지요?
** 따라서 피조물들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움직인다. 그 움직임의 양상이 '주름 접힘'과 '펼쳐짐'과 '말아 넣어짐'이다.
◈ 피조물은 가만히 있는 법이 없다 !!
이것이 진짜 중요한 대목인데, 사람들이 이것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목사님, 인간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면 집에서 가만히 있으면 되겠네요" 라는 질문 아닌 질문을 항상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라이프니츠은 말하기를,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움직인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본인이 가만히 있고 싶어도 신의 창조행위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가만히 있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항상 부지런을 떨도록 한다는 말이다.
◈ 그 움직임의 양상 곧 '주름 접힘'과 '펼쳐짐'과 '말아 넣어짐' !!
그런데 그 움직임의 양상이 '주름 접힘'과 '펼쳐짐'과 '말아 넣어짐' 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까, 그 어떤 인간이 움직여도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준 주름의 본성은 사람마다 차이가 나는데, 그것이 아까 말한 차이성인데, 왜 차이가 나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신이 다양성이라는 말이다.
아무튼 사람마다 각각 다른데, 하지만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해도 그 사람은 자기 본성 밖으로 튀어나간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저의 경우에도, 이근호를 보라는 것이다 성질이 급한 것은 그 어디를 가도 급하다는 것이다. 밥 먹으러 식당에 가도 상대방은 아직 물도 마시지 않았는데 나가버리고 말이다.
◈ 이근호 목사의 성질 죽이기 !!
지난번에 안산에서 성경공부를 마치고, 손 목사님하고 같이 식사를 했는데,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맛있게 먹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그런데 목사님은 아직 서울로 가려면 시간이 좀 있으니 같이 일어나자고 하는데, 그래도 저는 서울에 기다리는 식구들이 많아서 일어나려고 하니, 아마 손 목사님은 이때 화가 약간 났지 싶은데, 본인은 물로 아직 안 마시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할 수 없었는데, 조금만 더 지체하면 차가 많이 막하니까 말이다.
물론 손 목사님은 자기가 데려다준다고 하지만, 정작 본인이 그 시간에 한번도 차를 몰고서 서울로 가본 적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막상 운전을 해서 가보니 장난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제야 기분이 조금 불리면서 "좀더 빨리 나올 걸" 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냥 처음부터 빨리 보내주었으면 서울까지 운전을 안 해도 되었는데 말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이렇게, 아무튼 이러한 성질이 급한, 이런 인간의 본성은, 조금 전의 경우에는 급하다고 하는 서울모임이라는 핑계거리(?)라도 되었지만, 사실은 그런 급한 일이 없어도 급한 사람은 항상 급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양성 때문에 말이다.
라이프니츠가 이렇게 "움직임의 양상은 주름 접힘과 펼쳐짐과 말아 넣어짐이다" 라고 한 것에 대해서, 현대인들은 라이프니츠는 이미 DNA를 알았다고 말들 하는데, 지금 이것은 조금 전에 말한 "영혼은 물질과 어떤 관련성을 갖는가?" 라고 하는 질문과 무관한 것이, 즉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물질을 알아야 영혼을 안다는 것인데, 왜 그런고 하니까, 여기에서 라이프니츠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는 것이다.
* 물질을 누가 만들었지?
* 하나님.
* 그러면 물질을 누구 힘으로 움직이지?
* 하나님.
* 그러면 인간에게 영혼이 생기는 것은 누구 때문이지?
* 하나님.
* 영혼은 무엇을 통해서 표현하지?
* 물질.
* 물질은 누가 움직이지?
* 하나님.
* 영혼의 움직임은 무엇을 통해서 하지?
* 물질.
◈ 물질의 움직임이 곧 영혼의 움직임 !!
그렇다면 이제 해결이 되었는데, 물질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통해서 영혼의 움직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물질의 움직임이 곧 영혼의 움직임이니 말이다. 사실 조금은 속는다는 기분이 들기도 한데, 그 이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물체라는 것은 한시적인데, 플라톤적 사고방식이니 말이다. 그리고 영혼이라는 것은 따로 노는 동네가 있는데, 영혼은 영혼끼리 놀지 물질하고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되면 물질존재가 따로 있고 영혼존재가 따로 있으니, 논리적으로 서로가 결합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 - 물질과 영혼은 노는 동네가 달라 !!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는 따로 놀아도 기분이 좋은 것이, 이것이 죽을 때 문제가 수월하게 풀리기 때문인데, 만약 물질과 영혼이 결합되어버리면 죽을 때 물질이 사라지면 영혼도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처럼 말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영혼을 신의 영역에 둠으로 말미암아서, 물질은 신의 영역이 아니라 재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을 때 분리가 되어서 영혼은 영혼끼리 노는 동네에 가면 된다는 것이다.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 품에 안기듯이 말이다.
◈ 인간은 왜 의식을 잃으면 모르는가?
이러한 점은 분명히 수월한데, 그 다음에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이렇게 영혼이 물질의 영향을 받지 않고 따로 논다고 하면, 만약 어떤 사람이 잠을 깊이 잤다든지, 교통사고가 나서 충격을 받아서 얼마 동안이나마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을 때 영혼이 물질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하면, 자기가 과연 몇 시간을 잤는지, 얼마나 의식을 잃어서 헤매고 있었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아, 내가 한 달을 의식을 잃고 있었지?
* 아니, 어떻게 아십니까?
* 응, 육체는 의식을 잃고 있었지만, 영혼은 따로 놀기에 내가 다 봤지.
* 우와, 맞네.
정신과 육체가 따로 분리가 된다면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데 실제로는 어떻게 하는가? 육체가 다친 교통사고에서 깨어나면 "아니, 여기가 어디지?" 라고 한다는 말이다. 정신도 함께 다친 것인가?
* 여기가 어디지요?
* 모르겠습니까?
* 모르겠는데요.
* 그때 교통사고가 나서 이렇게 병원에 왔잖아요.
* 그래요?
* 한 달 동안이나 의식을 잃고 있었어요.
* 오, 이런.
* 좀 쉬세요.
언제 기억이 나는고 하니, 물질인 육체가 회복이 되니 비로소 정신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아는 것은 처음에 차에 부딪칠 때와 나중에 깨어나서이고, 그 중간에 있었던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혼이 말이다. 그러면 인간의 영혼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영혼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구 말이 맞는가?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니라 라이프니츠의 말이 맞다는 것이다.
◈ 사랑이 뭐길래 - 컨디션 !!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서로 사랑하는 청춘남녀가 있는데, 자기는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그 여자친구에게 약속시간에 늦었다고 잔소리를 한번 듣고 나서는 그만 정나미가 확 떨어져서 "에라이, 니 없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라고 하면서 헤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두어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보고 싶어서 "미안해.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한번만 봐도" 라고 하면서 용서를 구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사람에게 있어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는 영혼적으로도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잔소리만 하나 들어도 그 사랑이 확 날아가 버리고, 다시 외로움이 찾아오니 옛 사랑이 다시금 그리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랑이 어디에 종속되는가? 자기 육신의 컨디션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 인간은 왜 이렇게 시시각각 다른가?
이런 문제가 어제오늘의 고민거리가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니, 이것을 신학적으로 풀어서 그 해답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의 문제라고 여겨서 말이다. 그렇다면 라이프니츠가 어떤 해답을 주는지 한번 보자는 것이다.
다시 교재를 살펴보자.
** 그 종(種)에게 부여된 전개의 정도까지만 펼치는 능력에 의해서 그 개체는 정의가 된다. 이것을 '조형력'이라고 한다. 즉 외부의 힘에 관계없이 스스로 펼쳐나갈 수 있는 힘이다. 이 힘을 라이프니츠는 '영혼'이라고 말한다
◈ 조형력 - 그 힘은 바로 영혼 !!
여기서 조형력이란, 원래의 힘으로 다시 되돌아가려는 힘인데, 즉 외부의 힘에 관계없이 스스로 펼쳐나갈 수 있는 힘이란 것이다. 우리가 기계 같으면 때리면 그냥 얻어맞지만,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에 당연히 "왜 때리노" 라고 하면서 반항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나름대로의 힘이 따로 있다는 것인데, 왜 이렇게 자체적인 힘이 따로 있고 물질과 관련되었다고 하는고 하니, 라이프니츠는 이 힘을 두 글자로 '영혼' 이라고 말을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 프로이드 - 영혼을 에너지로 !!
라이프니츠의 이러한 경향은 20세기초에 들어와서 프로이드가 인간의 의식을, 인간의 마음, 즉 영혼을 에너지의 원리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 에너지의 원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 하나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인데, 즉 물이 떨어지는 위치 에너지를 댐을 쌓고 전기를 만들었을 때, 전기 에너지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이 떨어지는 위치 에너지가 그대로 형태만 바뀔 뿐이라는 것이다. 외부에서 에너지가 들어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열역학 제1법칙과 제2법칙 !!
이것이 에너지보존의 법칙(열역학 제1법칙)인데, 프로이드는 이것을 인간의 욕망(리비도)에다가 적용시켜서 욕망의 에너지라고 했는데, 그러면 인간의 욕망이 하지 말라고 누르면 에너지보존의 법칙에 의해서, 즉 욕망의 한쪽을 누르면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변형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뭔가 실패했을 때, "내가 참아야지" 라고 해놓고, 돌아서서 '에이시손(?)' 이라고 하면서 발로 찬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인간의 영혼도 에너지 법칙에 따른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물질법칙과 동일하다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열역학 제2법칙인데, 갈수록 활용 가능한 에너지는 줄어든다는 것이다. 즉 가면 갈수록 질서에서 무질서로 간다는 것이다. 질서에서 혼돈으로 말이다. 쓸모 있는 질서가 점점 더 줄어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에너지의 효율이 떨어진다는 것인데, 쓸모 없는 에너지가 아닌 쓸모 있는 에너지의 효율이 말이다.
◈ 라면을 실컷 먹어봤으면 !!
이것을 인간의 욕망에 적용시키면, 처음에 맛있는 돈까스를 먹으면 "야, 참 맛있다" 라고 하다가, 자꾸 먹으면 별로 맛이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 라면이 나왔을 때 사람들이 그야말로 '뿅' 갔다는 것이다. 왜 '검정 고무신' 이라는 만화영화에도 보면 나오지만, 사람들은 라면만 먹고살게 해주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 당시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비쌌고 말이다. 요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