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4월 13일 강의 (고린도후서 4장)
안산 4월 13일 강의 (고린도후서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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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9-27 10:30
ansan070413
안산강의 2007년04월13일(고린도후서 4장)
자, 고린도후서 4장 할 차례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서 두 가지 층이 달라지죠. 하나는 뭐냐 하면 영적인 해석, 영적 차원, 영적 층이 있고, 그 다음에 문자적인, 육적인 층이 있었죠. 육적인 층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죠. 문자로 해석한다는 말은 ‘문자로 밖에 해석이 안 된다’는 뜻이죠. 이것은 성경을 해석하면서 ‘아, 너는 내 백성이 아니야’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이렇게 건지기 위한 책이 아니고 내 백성 맞느냐 아니냐를 구분하기 위한 책입니다. 성경을 던져주고 ‘해석해 봐라!’. 육적인 해석이 나오면, ‘아! 내 백성이 아니구나!’. 하고 영적인 해석이 나오면 ‘성령이 너와 함께 있구나!’, 이렇게 구분하는 겁니다.
이러한 구분은, 현재 신약에서 사도바울이 이러한 구분을 하는 것은, 이미 구약에서 전 세계 모든 민족 가운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가운데 언약의 민족이 따로 있죠. 이것이 뭡니까? 이스라엘이 아닙니까. 이스라엘에게만 여호와께서 나타나고 다른 숱한 민족이 있지만 이들에게는 그냥 우상 신만이 있을 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만 하나님의 백성이고... 이 말은 다른 민족은 백성입니까 아닙니까? (백성이) 아니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 쪽에 대해서 어떻게 하죠? 저주하죠. 저주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배반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을 저주해 버리죠.
하나님은 결국 이스라엘에게만 자신을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다른 민족은 자동적으로 그 자리에서 지옥 가는,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인 것을 폭로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까 걸어오다가 버스 정류장 앞에서 동전 100원을 주웠는데... 그것을 보면서 이 전도라는 것이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전도란 이렇게 줍는 겁니다. 여기 고물(장수)하는 사람도 있지만 여기 길에 동그랗다고 다 줍지는 않아요. 돈과 돈 아닌 것을 구분하잖아요. 전도란 무엇이냐, 예수님께서 깔아 놓은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사람만 이렇게 주워요.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은 주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울 때, 우리는 동전 100원이 떨어져 있을 때 ‘앗, 돈이다!’ 하려면 돈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되듯이, 영적인 층이 있는 사람만이 그게 진짜 백성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지 육적인 사람은... 육적인 사람의 특징이 무엇이냐? 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잘 해주면 자기편이 되고 자기에게 못 해주면 나쁜 사람이 돼요.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말은 ‘너만 달랑 구원 받으라’는 뜻이 아니고 돈을 줍듯이... 이 세상에 하나님의 백성이 있어요, 그 백성을 주워서 함께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러려면 성도는 항상 영적인 안목을 갖추고 있어야 돼요.
돈도 아닌데 돌맹이 주워 놓고 돈을 주웠다고 하면 이것은 미친놈이죠. 돈이냐 아니면 그냥 자갈이냐를 구분하려면 먼저 돈이 뭔지를 알아야 되듯이, 귀한 줄 알아야 되듯이 영적인 층에 있는 사람은 항상 세상을 볼 때에 영적인 층과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중요해요.
전도한답시고 만약에 돈 내밀어서, 일당 주어 교회에 오게 되면 그 온 사람이 육적인 사람이 와 버리잖아요. 그러면 줍는 것이 아니잖아요. 돈 주우라고 했는데 돌맹이만 주머니에 가득하면 그 것을 다 갖다 버릴 것 아닙니까?
그래서 사람을 전도할 때 돈을 주고 전도해서도 안 되고 어떤 혜택(구제나 자선사업)을 주어서 전도해도 안 되는 이유가 주께서는 하나님의 구원받을 백성이 따로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지남철(자석)에 딸려 나오듯 영적인 특징을 사람들에게 미리 깔아 놓았어요. 그런 사람을 도와주고 돈 주고 해도 되는데, 돈 주면서 당신 영적인 사람이다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은 돌맹이를 돈으로 어떻게 만듭니까? 무슨 수로 만듭니까? 안 되죠.
추접스러워도(?) 돌이고, 더러워도 돌이고 아무리 잘 해 주어도 돌인데. 안 되죠. 되질 않는 겁니다. 그래서 평소에 성도는 영적인 안목을 늘 24시간 유지를 해야 됩니다. 본인이 유지할 수 없습니다만, 성령께서 늘 유지하게 하죠.
어떻게 유지하냐 하는 것은 계속 나오기 때문에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제가 여기 3장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3장에(혹시 지난 강의 듣지 못한 분들은 인터넷에 안산강의란에 올려져 있으니 들으시기 바랍니다.) 영적과 육적을 제가 나눈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이 나누어 놓았습니다.
사도바울이 나눈 것은 뭐냐 하면, 모세 이야기에서 보면, 처음부터 구약성경에 보면, 택한 백성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택한 백성이 따로 있는데, 택한 백성이 안 택한 백성이 될 수도 없고 안 택한 백성이 택한 백성이 될 수 없어요. 왜냐? 선택권이 택한 백성에게 없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에게 선택권이 없습니다. 선택 될 뿐이지 선택권은 없어요. 선택될 권리는 없습니다.
요한복은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물 길러 왔다가 물동이를 버리는 사건이 벌어져요. 물 길러 왔으면 물 길어 집에 가면 되잖아요. 그런데 물동이를 버리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물동이 버리면서 뭐라 합니까?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 하잖아요. 보세요, 처음에 예수를 만나기 전 까지는 자기는 메시아는 생각도 안하고 물만 길러 왔어요. 메시아를 진짜 만났으면 그 딴 물 긷는 것은, 육적인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 나처럼 영적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먼저 찾아오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물동이 버려두고 마을 동네에 들어가서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워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예요. 너무 좋아서 이야기 하는 겁니다. 반가운 애인 만나는 것보다 더 반가와요. 이것은 인류가 만류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한 건수 올리면 보험회사에서 나오는 수당보고 하는 것이 아니예요. 9명 데려오면 1명 네 것은 공짜로 해줄게, 하는 적금 펀드 넣는, 회원 모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말릴 수가 없어요. 왜? 영적인 것에 속한 사람이 영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것은 말려도 안 됩니다. 관심사가 영적인 것에 가 있기 때문에 육적인 것에는 관심사가 없어요.
이 세상에 자기 혼자가 아니라 자기를 찾아오신 예수님이 있다면 그 다음부터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것이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거든요. 혼자 사는 게 아니란 말이죠. 혼자 사는 것이 아니란 말은 ‘이제부터 그 분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이라는 것은 바로 전에 육적으로 있을 때 받은 사명과는 전혀 달라요. 육적인 사명은 무엇을 하게 되면 전부 내 것이 돼요. 끌어 모으면 다 내 것이 된다고요.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요. 포대기(포대,넝마) 예를 들었어요. 사람들이 복음을 안다고 하니까 여기에다 복음, 십자가, 언약 이런 것들을 여기 포대기(포대)에다 막 집어넣어요. 자기는 여기 있고, 여기 포대기안에 언약도 집어넣고 십자가도 집어넣고 복음도 집어 넣어가지고 자기를 살리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당신 얼굴을 보여라’, 하는데 얼굴은 안 보이고 이것들을 자꾸 집어넣는 거예요. 이래가지고 구원받았다고 보는 겁니다. 자꾸 챙기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십자가라는 것이 무어냐 하면 황산입니다. 황산은 손에 닿으면 타버려요. 그렇잖아요? 황산은 모든 것을 태워버립니다. 여기 컵도 녹아버립니다. 십자가는 황산입니다. 닿으면 죽습니다. 십자가가 들어왔다는 것은 나는 죽어나가는 것이죠. 전에 살아 있을 때는 이것도 내 소유, 내 소유 했는데 이제는 주님과 십자가와 함께 있다는 것은 나는 황산에 녹아서 살이 뻘겋게 타서 아주 죽어버렸어요. 죽고 그 안에서 주님의 사명, 영적인 사명이 튀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마리아 여인의 특징이예요. 물 길러 왔다가 물동이 버리는 것 보세요. 자기 할 일도 모르잖아요. 물 길러 온 것은 생각도 안하고 메시아 만났다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동네방네 ‘메시아 만났다!’ 외친다 말이죠.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메시아 만났다!’ 하면 아마 ‘그 메시아가 뭔데?, 뭐하는 물건, 얼마짜리인데?’ 할 겁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당시의 메시아라는 것이 뭐냐? 그 민족의 유일한 소망이었어요. 메시아 오면 로마에서 벗어나서 이사야에서 약속한 대로 세상이 완전히 골프장이 되죠. 잔디밭에 어린양들이 뛰어 놀고 더 이상 일하지 않더라도 힘들게 살지 않더라도 죽음이 없고. 사망이 없고. 영원한 축복된 생명을 누리는 곳. 그 것을 얻는다는 것은 온 지구를 얻는 것 보다 큰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잊을 수가 없고 메시아가 온다는 소망 때문에 온갖 고초를 다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를 여자가 만났다고 하니까 얼마나 놀라운 빅 뉴스입니까. 그러나 육적으로 메시아를 생각하는 사람은 그 여자가 전하는 메시아를 받아들이겠습니까? 안 받아들이겠습니까? 안 받아들이죠. 처음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와 내가 메시아라고 했을 때에도 그 여인은 받지를 않고 거부했거든요.
그래서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사도 바울이 이렇게 나누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육적인 사람에게는 상상도 못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도저히 이해가 전혀 될 수 없는 그러한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자, 이렇게 제가 3장을 이야기 한 것은 이제부터 더 충격적인 이야기가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4장을 한 번 봅시다.
4장 2절에 보면 (고후 4: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고후3장에서 사도바울은 그야말로 납득이 가지 않는, 육적인 사람에게 전혀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것이 짜증이 날 거예요. 왜냐하면 의사소통이 되어야 뭐 전도랍시고 할 수 있는데, 지금 사도바울이 이야기 한 것은 육적인 사람에게 납득이 안 되잖아요. 방금이야기가 이해가 안 되잖아요? 그죠?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지금 뭐냐하면 왜 우리가 납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도저히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것이 고후4장에서 큰 어려운 문제가 뭐냐 하면, 이 세상 신이 이 종교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지금 우리 속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종교라는 껍데기가 뒤집어 씌어 있습니다.
왜 사도바울이 납득이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 하면은 신이라든지 메시야라든지 무슨 소리를 해도 이게 종교라는 이 두꺼운 껍질을 통과해서 주의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왜냐하면 종교를 누가 쥐고 있습니까? 세상 신이 종교를 쥐고 있거든요.
이게 오늘 고후4장에 보세요.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이렇게 되어 있지요. 방금 제가 이야기 한 이것이 참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이죠. 이것은 도저히 묵어주지도 않죠???(이해가되지 않죠?).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 처음 만날 때도 예수님 차버렸잖아요. 나 물 길러왔지 그 따위 소리 듣기 싫다고. 물만 길으면 되었지. 영원히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물 주세요, 했다가 자기 과거 이야기 한 뒤에 얻어터지고 난 뒤에 충격 받고 난 뒤에 메시아 만났다 이렇게 나오잖아요.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사람들이 종교라는 것이 어디에서 나왔냐하면, 여러분 여름철이 되면 땀 냄새 나는 사람들이 있죠. 그 냄새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본인에서 나오잖아요. 방구 낄 때 방구냄새는 본인이 피우잖아요. 종교라는 것이 냄새입니다. 누구 냄새? 내 냄새. 나의 냄새예요.
내가 영원히 죽지 않고 죽어서 좋은 나라 가려고 하는 그 냄새가 종교라는 두꺼운 층을 형성하였고 이곳에서 악마가 이미 이것을 장악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무슨 소리를 해도 종교 층에서 (하나님 말씀이) 튕겨져 나가죠.
이게 오늘 날 교회 아닙니까? 교회 목사들 아닙니까? 악마가 쥐고 있는 종교, 그들이 누굽니까? 교회 목사들 아닙니까? 이 사람들이... 육적이고 문자적이예요, 전부 다. 교인들에게 ‘이거 하시면 구원 받습니다’ 하고 있단 말입니다. ‘말씀 지키면 구원 받습니다’ 한 단 말이죠. 그것은 복음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그들은 무엇이냐 하면 성경 말씀을 줄 때 성경말씀을 아무리 줘도 이 두꺼운 종교 층에서 이것을 뭐로 해석합니까? 영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뭐로 해석해요? 문자적으로 해석하죠, 문자적으로.
문자라는 것은 뭐냐 명령, 지시 아닙니까? 교육 아닙니까? 명령, 지시, 교육이거든요. 훈련. 이런 것들은 문자 아닙니까?. ‘안되는 놈이 어디 있어 하면 다 되게 되어있지.’ 이것이 교육이잖아요. 훈련이잖아요. ‘안되는 것이 어디 있어 열심히 반복하면 하게 되어 있지.’ 이것이 교육이고 훈련이고 수련이잖아요. 자기 억제고 관리이고. 그것을 오늘날 종교 단체에서 하고 있잖아요.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수련하고 훈련하고 교육받는 그 당사자도 ‘너는 맨 날 그래도 소용없다!’ 이것을 통보해 주는 것이 복음 아닙니까. 아까 복음이, 십자가가 뭐라고 했습니까? 황산이죠. 몸에 닿으면 같이 죽어버리잖아요. 네가 죽을 놈이란 말이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을 놈이예요. 예수님도 죽었는데 그래 우리는 안 죽을 놈이겠어요?
우리가 살아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덩달아서 사는 것이지 우리 힘으로 산다는 게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살 수가 없어요. 우리 힘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내 힘으로 나를 영적으로 만들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영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나를, 스스로 나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예요. 나라는 자체를 포기 못합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음으로 끌려가요. 죽음으로 끌려간다고요. 사람이라는 것은 과거의 산물인데 근심걱정이 다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다 과거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10살이 되었는데 교통사고가 나서 기억을 잃었다. 그래서 한 10년쯤 의식불명하다가 나이 20년 지나 스무 살 때 깨어났을 때 그동안 자기 엄마가 죽었다는 것을 스무살 깨어날 때 알겠습니까?
‘우리 엄마가 죽었어.’ 처음 들었을꺼예요. 그러나 열 살부터 스무 살까지 그대로 살았던 사람은 자기 엄마가 죽은 것을 알겠죠. 슬픔이라든지 기쁨이라든지 전부 어디에서 나오냐하면 과거의 산물입니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라고 하는 것은 이미 지금 없는 것이거든요. 없잖아요. 사람이 걱정 근심하는 이유가 뭔가하면 과거의 환상때문이예요. 환상. 기억 속에 있는 환상 때문에 걱정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과거는 없는 거예요. 그런데 과거하고 비교하니까 자꾸 걱정이 되는 거예요. 사람이 기대한다는 것은 뭐냐? 과거가 있기 때문에 기대를 합니다. 기대를 하게 되면, 기대를 한다는 것은 걱정 근심을 불러 모으는 거예요. 성경에 보면 우리 마음속에 귀신이 나오고 난 뒤에 귀신이 나갈 데가 없어 친구 불러서 일곱 귀신이 들어온다는 말이 있죠. 그죠?
사람이 걱정 근심이라는 것이 사람이 기대하고 희망을 가지면 걱정근심 일곱 귀신 다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중국집에 가서 짬뽕, 자장면, 이렇게 곱빼기, 복음밥... 있으면 뭘 먹을까 갈등이 일어나잖아요? 뭘 먹을까. 자장면 시켜놓으면 짬뽕이 맛있어 보이고, 짬뽕 시키면 자장면 시켜 놓은 게 맛있어 보이고 , 먹으면서도 걱정 근심 갈등을 일으키죠. 제일 좋은 중국집이 뭔지 알아요? 그냥 주방장이 주는 대로 쳐먹어! 이게 제일 좋은 중국집이예요 ^^ 그냥 주는 대로 먹으면 되는 거예요.
영적인 세계에서는 그것이 자유라는 겁니다. 주는 대로 먹는 거예요. 자신의 과거에 연연할 필요가 없고 과거는 지나 간 거고. 미래에 기대를 하는 것도 과거가 있기 때문에 기대를 하는 하거든요. 우리가 기대를 하는 것도 내 것이 있기 때문에 기대를 하는데, 미래라 하는 것은 주님이 주신대로 미래를 만들어요. 내 미래가 아닙니다. 주께서 주시는 미래가 따로 있어요. 왜 그 걱정근심을 하느냐 말이죠.
전부다 그러다 보니까 이런 층에서 성경을 보니까, 종교라는 층을 뚫지를 못하는 겁니다. 왜냐? ‘나’라는 것을 자꾸 견지하다보니까. 유지하려다 보니까. 종교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신도 들어있고 하나님의 약속도 들어있고 온갖 것이 다 들어 있잖아요. 이것을 뚫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게 다 가짠데. 전부다 가짠데. 악마가 쳐놓은 굴레인데. 경계선인데.
4장4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다 같이 읽어볼까요. 그 중에 이 세상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비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 악마가, 세상 신이 바보 아닙니다. 악마는 창세기 3장에서 유일하게 여자의 후손과 한 판 붙을 대상이예요, 유일하게. 하나님의 뜻은 간단합니다. 여자의 아들하고 뱀의 후손하고 싸우는 거예요. 끝났어요. 이것 외에 하나님의 뜻은 없습니다.
뭐 의사 될까요? 판사 될까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나에서 일어나는 것은 어떤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예요. 나에게 벌어진 일. ‘내가 몸이 아픈데 어떻게 할까요?’. 주님께서 ‘그것이 주의 뜻이 아니고 예수님과 마귀하고 싸우는 것이 주의 뜻이라’ 하고 끝나요. ‘집에 쌀이 떨어졌는데 죽을까요?’. ‘죽던지 말든지 니 마음대로해라.’ 중요한 것은 예수님하고 마귀하고 싸우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는 것이 주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택한 자를 건지는 것이 주의 뜻이예요.
그래서 저는 이야기 합니다. 오늘날 소위 교인들이 복음을 안다고 해 놓고는 자기 방어에 집착해요, 자기 방어. 자기에 집착해요. 그 넝마(포대)에다가 자기를 집어넣고 막 집어넣는 거예요. 그래서 얼굴 좀 보자고 하니까 자꾸 기어들어가는 겁니다. 아프면 파스 붙이면 되는데 파스를 떼려고 하는 거예요, 자꾸. 부끄럽다고. 복음 붙이고 말씀 붙여 (놓고서) 자기 아프게 자꾸 고개를 숙이는 거예요.
거북이 알죠. (거북이를) 쑤시면 얼굴을 내미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합니까? 그 두꺼운 갑옷 속으로 자꾸 기어들어가죠. 오늘날 교인들하고 똑같아요. ‘이것이 잘못이다’라고 쑤시면 쏙 들어가 버려요. ‘이것도 잘 못이다’ 그러면 ‘예, 저는 죄인입니다.’ 이레 나오는 것이 아니고 얼굴을 내미는 것이 아니고 ‘저 복음 압니다’ 하고 쏙 집어넣고 자꾸 집어넣는 거예요. ‘저 성경 많이 압니다’, 하고.
지독한 자기 아집이죠. 이런 인간들이 모여서 교회라고 하니 교회가 될 리가 있습니까? 결국 교회라고 하는 것은 자기 돈 자랑하는 것 밖에 더 됩니까? 돈 자랑. 권력 자랑하는 것 밖에 더 됩니까.
이처럼 예수님과 세상 신의 공통점은 뭐냐하면 마귀하고 예수님 빼 놓고 인간들은 병신이다, 라는 것은 둘 다 알아요. 인간들은 자기 위에 악마의 껍데기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세상 신이라는 껍데기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 밖에 몰라요. 그래서 성경 주고 해봐야 육적인 해석 문자적 해석밖에 안 나오는 겁니다.
이 종교의 층을 어떻게 뚫어요. 모든 게 다 종교인데. 신이고 예수고 다 종교인데. 다 종교 용어 아닙니까. 십자가 이런 것. 무슨 수로 이것을 뚫습니까. ‘저 뚫었는데요’ ‘뚫었으면 영적인 사람 주우러 다녀야지, 평생을’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 집착, 자기 아집, 점점 더, 그것을 쪼그라든다 하는데, 점점 쪼그라들어요.
전에 성경공부 참석했다가 한 2년만에 오랜만에 만났다 말이죠. 요새 뭐 하십니까? 예 복음에 기뻐서, 이렇게 안 합니다. 하는 일이 바빠요, 이러거든요. 하는 일이 바쁘다 이 말은 결국 뭐냐하면 ‘심 봤다! 메시아 만났다!’라는 그런 기쁨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죠? 사마리아 여인처럼 지금 되지 못했다 말이죠.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 만나기 전까지는 그저 남자 갈아치우는데 분주했지요. 어떤 사람이 성경 공부에 참석하다가 몇 년 뒤에 왔다. 나중에 와 보면 뭐 하냐 하면 자기 옷 갈아 치우는데. 지금보다 더 좋은 옷, 지금보다 더 넓은 아파트 이것 갈아 치우는데 분주해요. 예수님 만났다, 기쁘다, 이런 소리 안 합니다.
만약에 진짜 영적인 사람을 만났으면 ‘아, 목사님 그 때 성경공부 너무 좋았습니다. 그리웠습니다’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이미 영적인 것에 관심을 끊은 사람은요, 쪼그라들어요. 쪼그라들어요. 희미한 등불 밑에 쪼그려 앉아서 ‘그때 참 좋은 것 했지만, 지금 세상에 나와보니까 말씀대로 안 되던데요. 성경 말씀으로 해결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러면서 앉아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목마를 수밖에 없는 물만 길러 온 거예요. 목마르지 않는 물을 봐야 영적인데, 그 사람은 지금 한 때 성경공부 했다 뿐이지 계속해서 지금 목마른 샘을 파고 있은 거예요. 그러니까 나 잘났다 자기 방어에 집착하고 있지, 예수님 만났다! 좋다! 뛰어다니는 그런 사람은 아니더란 이 말이죠. 그러니까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갇혀있어요? 세상 신에 갇혀있는 거예요. 바울이 지금 그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복음의 광채라 하는 것은 그 광채 이야기가 영적인 광채이거든요. 영적인 광채는 인간을 어떻게 하느냐, 여기 3장 17절에 보면 인간을 어떻게 합니까? 무슨 용어가 나와요? 2자로. 자유죠 자유. 자유케하는 자유. 어떤 때 자유냐 하면, 자기 방어 안하면 무조건 자유입니다, 자기 방어가 없으면, 자기 집착이 없으면 그것이 다 자유입니다. 그러니까 누구한테 부림받으면 누구한데 사용당하면 그게 바로 자유입니다. 관심사가 영적인데 있는 사람은 자유 안 할 수가 없어요.
세상에 100원짜리 돈 주우러 다니는 사람보다 더 자유로운 사람이 또 있을까요? 흘린 돈을 누가 못 줍습니까? 그리고 그 주우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그러니 얼마나 자유로워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유 아니냐 하면, 집에서 돌맹이 가지고 100원짜리 돈 만드는 사람. 이것은 괴롭습니다. 되지도 않는 일을 돈을 만들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만들어 놓은 영적인 일이 있는데 자기 집에서 영적인 사람되려고 애쓰는 것, 이것처럼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셨을 때 기뻤지, 그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 깊이 파서 물을 계속 뜬다고 자기 목마른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사마리아 여인이 좋아했던 것은 뭐냐하면, 영생이라는 것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구나, 그것을 알게 된 거예요. 그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마지막 날 추수하러 오는데 추수할 때 너희는 아무 것도 수고하지 않은 것을 그냥 추수하면 된다, 내 뒤만 따라오너라. 이렇게 제자들에게 이야기 하셨어요.
마지막 날 추수는 줍는 것이다. 누구같이? 사마리아 여인같이. 그런데 주우려면 영적인 자유가 있어야 돼요. 마귀한테도 얽매이지 않아야 돼요. 마귀한테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은 뭐냐하면 자기 중심주의에서 벗어난다는 말이예요. 자기 중심주의. 자기 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나 밖에 모른다’에서 ‘나는 모른다’로 바뀌어야 합니다. 나 밖에 모르는 것에서 벗어나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내가 나를 몰라 봐. 내가 누군지 몰라. 이런 자유가 있어야 돼요.
왜 자기를 몰라? 자기에게 관심이 없으니 자기를 모르지요. 키가 얼마인지 몸무게가 얼마인지 모르겠어. 자기에게 관심이 없으니까 몸무게도 키도 모르지요. 뭐한테 관심 있는데? 주님한테 관심이 있지. 이것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지금 그런 이야기, 사도바울이 지금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사도바울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없어요. 거의 없다 말이죠. 다만 하나님께서 미리 영적으로 깔아 놓아 사람.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바울이 에베소나 고린도에 갈 때 뭐라 했습니까? 영생 주기로... 그 다음 뭐라 했습니까? 작정. 영생주기로 작정한 사람. 이게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이러겠어요.
영생 주기로 작정한 사람. 또는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음이라. 다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 백성이 딱 정해져 있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전도하실 때 이렇게 했습니다. 내가 전한 이 이야기는 소위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은 알지 못하고,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은 다 가리고 이것이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에게만 나타남을 감사합니다. 옳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뒤의 말은 뭔지 알아요? 이와같이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선택받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예수님이 전한 이야기를 무슨 말인지 무른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도저히 못 알아듣게 되어있다, 이래 되어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자기 밖에 모르니까. 자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니까. 이것이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나와 있는 뭡니까? 세상 신이 그 얼굴을 팍팍 가려버렸어요.
여기 안산에도 전에 황사가 일어났습니까? (예) 지난 일요일 날, 그죠? 전국에서 대구가 제일 심했어요. 낮에 시커멓었으니까. 황사가 심해지면 흑사가 되어버려요. 흑사란 아주 시커멓다는 뜻이예요. 굉장히 짙었어요. 희미합니다. 오늘 날 길가는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인생 우에 사나? 희미하죠. ^^ 희미한 평생 황사입니다. 평생 황사예요. 애기 아빠한테 물어보세요? 우에 사나? 황사죠. ^^ 이유도 없고 목적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안개 낄 때 차를 몰아보면 목적이 없어요. 갈 때 까지 가 보는 거예요. 10센티가면 10센티만큼 늘어 날 뿐이예요. 그처럼 우리 인생은 황사 속에 질주하는 차와 같이 위험천만입니다. 어느 길이 어느 길인지 몰라요. 그냥 황사 속을 뚫고 지가 가는 겁니다. 하루하루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살아가면서 주름살 생기고 머리 빠지고 하는 거예요. 왜 죽는지도 몰라요. 죄 값이 사망인 것도 몰라요. 자기 앞에 안개에 가린 절벽이 있다는 것도 몰라요. 그저 남들처럼 갈 때 까지 그냥 가 보는 거예요.
옆에서 영적인 이야기 해 봐야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왜? 오늘 본문에 보니까 왜? 본인이 아이큐가 낮아서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에 뭡니까? 4장4절에 세상 신이, 악마가 눈을 흐리게 했지요. 눈에 황사가 끼게 했다니까요. 악마가 눈에 황사끼게 했으니까 성경을 봐도 육적인 해석밖에 나올 수 없는 겁니다. 나이 먹은 것을 자랑할 필요 없어요. 나이 먹은 만큼 황사를 많이 겪었었다는 경험을 많이 했다는 것 뿐이예요.
백 날 나이 먹으면 뭐 합니까? 맨 날 황사인데요. 10미터 간다고 황사가 없어집니까? 그 자리에 가도 맨 마찬가지인데. 안개가 우리 무서워 물러가는 안개가 어디 있어요. 안개보다 더 짙은 것이 악마의 안개입니다. 현미의 노래가 생각이 나요. 밤안개 ^^. 밤♬안♬개♪ ^^
밤 안개가 어떻다고요? 자~욱 하죠. 밤 안개가 자~~~욱 하잖아요.
이 시대가 대구면 대구, 서울이면 서울, 안산이면 안산... 모든 게 지금 자~~욱 해요. 그저 5미터 앞에 보이는 게 뭐 FTA 보이고, 북한 핵 보이고, 박지성 축구하는 거 보이고 이승엽 야구하는 그것만 보이지, 자~~욱해요. 10미터 앞도 이야기 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교회에 가도 마찬가지예요. 교회에서 ‘기도하면 5미터 정도 뚫을 수 있을 걸?’ 이렇게 하고 있어요. 복 주어서 당신이 요구하는 5미터 가도록 하나님의 능력으로 5미터 더 가게 해준다는 거예요. 복 준다, 이 말이예요.
제가 주일날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이 소위 재산에 몇 십억 있어야 안심이 되겠느냐, 5천억? 6천억? 하나님의 약속을 알면 그 것 만큼 평안한 사람 없어요. 하나님의 일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으로 해서 결정났어요. 이기는 쪽이 가져가게 되어 있어요. ‘우리 집에 왜 왔니 왜왔니 가위바위보!’ 할 때 다 가위바위보 하는 것이 아니고 대장만 해요. 대장이 이기면 이기는 쪽이 상대방 쪽을 가져갑니다.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예수님께서는 지금 남의 집에 악마의 집에 찾아 왔어요. 마귀가 하는 말이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하잖아요. 마태복음 8장에 나오잖아요. 예수여 아직 우리가 멸망할 때가 아닌데 왜 왔습니까 안합니까. 돼지 치는 마을에 갔을 때 그 때 귀신아 나가라 하니까 나갈 데가 없어요, 하니까 돼지에게 가라, 돼지 떼에 올라가서 바다 속에 다 빠져 죽었잖아요.
돼지를 죽이는 그 마귀가 악령이 지금 이 자욱한 안개처럼 모든 사람 등어리에 다 타져 있어요. 어디로 가야할지도 몰라요. 타면 눈이 멀어버리니까. 눈이 감겨서 인생의 목적도 없어요. 그냥 짐승같이 살아요. 희미하게 그냥 퇴근해서 술 한잔 먹고 들어오고. 그 뿐이예요. 그저 이슬먹고 살죠. 무슨 이슬? 참 이슬. 참이슬 먹고 살고. 참이슬이 생명수라. 소주가 생명수지 딴 거 없어요.
산다는 것에 대해, 왜 사는지 생각해 본적도 없어요. 그냥 자욱한 황사니까, 황사. 결혼 왜 했습니까? 왜 애 낳았는데. 5미터 가니까 앞에서 5미터까지 따라가는데 까지 가다 보니까 애 낳게 된 거예요. 주님께 기도해서 애 낳은 것 아닙니다. 왜 기도해서 애를 안 낳느냐하면 주님께 기도해 봤자 네가 애 낳는 것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는 것과 무슨 상관인데... 이렇게 이야기해버리니까, 재미없으니까 기도 안 하죠.
소유는, 이 땅의 소유는, 영적인 100원짜리 돈, 영적인 사람을 소유할 때에는 그 소유를 향하여 자기를 포기하게 만듭니다. 자기 자신에게 더 이상 얽매이지 않게 만듭니다. 더 이상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그런 소유는 영적인 소유인데 그것이 성령이죠. 육적인 소유는 자기 자신을 더욱 더 방어하고 철저히 수호하고 자기 집착에 매달리게 만듭니다. 나중에 자기 자신과 더불어 폭파하죠. 그것이 자살 아닙니까. 자기 자존심과 함께 자살하죠.
이 고린도후서에서, 고린도전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항상 사도바울이 변함없이 이야기 하는 것은 뭐냐? 너는 영적인 사람이냐 육적인 사람이냐? 딱 두가지만 물어요. 다른 것은 안 물어요. 네가 얼마나 착하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너 영적인 사람 맞아? 아니면 영적인 사람 아니야? 너는 뭐야? 그린도교회 다닌다고 인정 안 해줘.
영적인 사람의 기준은 뭐냐? 고린도전서에서는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인데 십자가의 특징은 무엇이냐? 어리석음이죠. 철저한 어리석음이죠. 어리석은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이 되었다? 어리석은 인간이 되기로 작심했다는 뜻입니다. 남이 나를 등신이라 해도 나는 그것을 기쁘게 받기로 작심했다는 뜻입니다. 남들이 어리석다고 하는 십자가를 뗏목으로 여기고 올라탔으니 세상에 그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 있죠? 그 천국 간 강도가 얼마나 어리석어요. 안 믿는 사람이 보면, 둘이 놀고 있네, 안 그러겠습니까? 둘이 곧 죽어가면서 예수여 저를 용서해 기억해 주소서, 예수님이 네가 오늘 밤에 나와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할 때 십자기 밑에서 안 믿는 사람이 보면서 둘 다 놀고 있네. 아이고 잘 논다. 마지막 최후의 발악을 하는구먼. 그러니까 똑똑한 강도는 뭐라 했습니까? 에이라. 둘이 맞박을 때려버릴라. 그래 사기치지 말고, 죽어서 좋은데 간다고 차기치지 말고 지금 네가 메시야거든 우리를 못에서 빼내어 살게 해봐라, 그러면 내가 믿을 께. 이러잖아요. 그게 얼마나 육적인 해석이고 문자적인 해석입니까.
지금 악마를 이기는 것은, 고린도후서 3장 말씀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이것은 복음의 광채가 뭐 별로 좋아해지지를 않아요.
5절 봅시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참~ 이 한 마디...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이 한마디에 뿅 갑니다. 왜냐하면 복음 전하는 사람은 이 굴욕을 밥 먹듯이 당해야 돼요. 주님께서 복음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굴욕당하게 하는 이유가 뭐냐하면 예수님의 가신 길이 처음부터 끝까지 굴욕이었어요. 태어 날 때부터 죽을 때 까지. 한 순간도 예수님이 굴욕 안 당한 적이 없어요. 침 뱉음을 당하고, 심지어 가장 굴욕적인 것은 일가 친적들로부터 배척당할 때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배척당하고 어머니가 자기를 몰라 줄 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가 물로 포도주 만드는 그러한 재주꾼, 마술꾼으로 온 줄 아느냐. 철저하게 굴욕의 길을 갔다 말이죠.
자, A 지점 -> B 지점 -> C 지점 -> D 지점... -> 십자가에 도착했다고 하면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영은 우리로 하여금 이 예수님이 가신 코스, 이 A, B, C, D... 이 코스를 그대로 성령을 가지로 우리를 동행해서 그대로 밟게 하십니다. 쭉 밟게 하시면서 A라는 지점에서 ‘봐, 마리아가 나를 오해해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니까 그렇게 오해했던 대목이야’ B라는 지점은 ‘세상에 베드로가 잘난 체 한다고 몇 번이나 용서해 줄까요 이 정도면 될까요? 이따위 소리해댄 지점이야’,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영적으로 성경을 볼 때마다 ‘아이고 이것은 나 보고 한 이야기구나’. C란 지점에서 말이야 풍랑 일어가지고 죽겠다 할 때 그 때 잠자는 나를 깨울 때 예수님에게 제자들이 책망을 들었죠. 왜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 바다 풍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은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생명이잖아, 이렇게 책망하실 때가 이 대목이야. D 지점은 성전세 없을 때 물고기 아가리 벌려서 준 거야.
또 이 지점은 베드로가 나를 세 번씩 부인할 때 닭이 울던 대목이야... 쭉 성경 말씀 전체를 통해서 영적인 해석으로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할 때 구석구석마다 뭐냐하면 우리의 부족하고 우리가 이렇게 나 밖에 모르는 인간이구나.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를 가지고 십자가 능력으로 한 걸음 두 걸음 이미 구원받은 신분으로서 구원받은 티를 내려고 우리로 하여금 굴욕적인 삶을 살게 하시는구나. 인생이란 그렇구나 하는 것을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성령이 함께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렇게 굴욕적인 거예요. 아주 우사스럽게 만들어요. 나 밖에 내 세울게 없게 만들어요. 심지어 우리로 하여금 아예 교도소 가게 만들기도 하고. 기대하는 사람에게 실망스런 결과를 낳게 만들기도 하죠. 우리를 향해 기대하는 많은 시선들이 있는데 그런 시선들을 낙담케하고 실망케하는 그런 사건들이 우리에게 덮치죠. 그렇게 덮치게 되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방어가 안 되고, 자기 집착이 안 되는 사람에게는 그런 수모가 들어와도 ‘주여 저는 예수님보고 기뻐했지 언제 내 자존심보고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 걸 확인하게 되고. 반면에 육적인 사람 같으면 ‘참 이래도 내가 예수 믿어야 되나’, 하는 식으로 자기 본색을 드러내게 마련이죠.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인간은 결국 자기의 본질대로 돌아간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아무리 신앙인 흉내를 내고 교회에 다니고 복음 복음 이야기 하지만 결국은 자기 본색은 속일 수 없어요. 결국에는 자기 얼굴로 되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뭐 사람하나 꼬실려고 심방 천 번 댕기고 일당 주고 특별히 감사기도 더 그 사람 위해 백날 기도해도 자기 본색대로 다 돌아갑니다.
그런데 평소에 말씀에 관심도 없어서 내 팽개쳐 놓았었는데 결국 말씀으로 돌아오는 것은 주께서 그렇게 돌아오게 하신 거예요. 잃어버린 100원짜리예요. 한 마리의 양으로 오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라는 것이 양이라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양이라면 내가 양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지 말고 누구 덕분으로 지금 이런 코스를 밟고 있느냐 그 분의 고통과 아픔과 그 분의 굴욕을 증거하는 그런 모임이어야 그것이 교회입니다.
우리 지금 몇 명 안 되잖아요. 하지만 두 세 사람이 있는 곳에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하는 것이 어디에 나오죠? 마태복음 18장 19절에 나오죠. 그러니까 굴욕적으로 모임의 숫자를 확 빼버리는 거예요. 누가요? 주께서. 그렇게 해서 다시 한 번 마태복음 18장 19절 잊어버렸던 말씀을 다시 찾아서 하는 겁니다. 주님은 자기 말씀밖에 몰라요. 우리 사정은 고려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책임지고 우리를 구원해 내기 때문에 우리가 좋던 싫던 주님은 말씀가지고 들이대게 되어 있고 그 주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내가 떠나고 싶어도 주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아요. 주님께서는 찾아오셔서 자신의 굴욕적인 삶에 우리를 동참케 하십니다. 내가 싫다 해도 찾아오시고 강제로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이 그 두꺼운 층을 뚫고 들어오십니다.
다시 그림을 봅시다. 우리 인간들이 있잖아요. 인간 위에 무슨 두께가 있습니까? 악마의 두께가 있지요. 이것을 우리 힘으로 솟뚜껑 같은 이것을 우리 힘으로 안 되지요. 종교를 생각해도 소용이 없지요. 종교생활 신앙생활 아무 소용없어요. 뭔가 영적인 것이 뚫고 들어오죠. 뚫고 들어오면, 한 번 보세요. 영적인 것이 뚫고 들어오면 무엇까지 뚫고 들어왔어요? 악마의 층을 뚫고 들어오죠. 그러면 뚫고 들어와서 우리 속에 있다면 우리 속에서 뭐도 발생됩니까? 악마의 층이 이런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죠. 뚫고 들어왔으니까. 통과했으니까. 어떤지 아시겠지요? 통과했으니까.
삼겹살이 몇 겹 살입니까? 삼겹살은 삼겹살 아닙니까? 삼겹살을 이렇게 칼로 자르면 겹이 하나가 아니고 세 겹 다 보이죠. 이미 영적인 데서 악마 층을 뚫고 들어왔으면 이 뚫고 들어 온 사람은 뭐도 알아요? 예수님도 알고 성령님도 알지만, 뭐도 알아요? 악마의 정체도 알지요. 그리고 악마의 정체가 그동안 나로 하여금 나만 위하고 내 위주로 내 방어 위주로 살도록 누가 일했다? 악마가 일 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고백하게 되겠지요.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그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하잖아요. 당신 성도 맞아요? 맞습니다. 그러면 자기 죄를 이야기 해야지, 자기 죄. 내 죄가 뭔데요? 그동안 악마하고 짝짜꿍 했잖아요. 무슨 죄? 성경 공부했다고 구원받았고, 십일조 했다고 복 받았다고... 지금 악마의 이야기 아닙니까. 영적인 것은 뭡니까?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자기의 ‘너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일방적인 선언으로 우리가 선택되어 통과된 것이 영적이라면 나머지기 전부는 뭐예요? 그 것 빼고 나머지는 전부 뭡니까? 육적인 거죠. 다 육적인 거죠. 성경공부 했다고 자랑하고 전도했다고 자랑하고 전부 다 자랑은 뭡니까? 악마가 만든거죠.
그래서 그렇게 받은 사람은 뭡니까? 예수님 좋다고 물동이 버려두고 물동이 깨지는 굴욕이잖아요. 우리도 물동이 버리도록 해야 되는데 우리는 물동이 포기안하잖아요. 그러면 주께서 발로 차버리죠. 이단 엽차기로 차버리면 그때서 주께서 하셨군요, 하면서 감사하죠.
사람이 자기한테 안 매이면 그 보다 더 위대한 자유자는 없습니다. 최고의 자유인은 자기 자신에게 안 얽매이는 사람이여야 해요. 자기 자신에게 안 얽매였다는 말은 뭐냐? 나를 쥐고 흔드는 분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자인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하나 고린도후서를 설명해 보면 이 말씀이 얼마나 대단한 말씀인지...
그 다음에 봅시다. 5절. 참 진도 나가기 아깝다 정말^^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요, 벌써 이것은 뭘 말합니까? 사도바울을 뭐가 쥐고 있다? 성령이 쥐고 있다 이 말 아닙니까. 그 다음에 다 같이.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뭐만 앞장세웁니까? 예수 그리스도 주 되심이죠. 그냥 미쳤죠. 한마디로 미친 사람이죠.
오용익 목사님이 우리교회 오후 예배에 참석해서 설교를 하셨어요. 몇 주 전이죠. 시간있으면 그 설교 한 번 들어보세요. 오 목사님이 사마리아 여인보고 미친년이라고 했어요. 들어봤어요? 그 설교 얼마나 잘 했어요. 나는 왜 그렇게 ‘미친년’이 될 수 없느냐 말이죠, 왜? 나는 왜 그렇게 정상인 되려고 그렇게 애쓰느냐 말이죠, 나를. 이것은 내가 생각한 ‘나’를 따로 챙겨 놓았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에서 말하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싸운다’는 그런 생각하는 ‘나’라는 생각은 안 들고, 내가 생각한 ‘나’가 따로 있는데 그것을 어디서 만들어내느냐 하면, 과거에 생각해 놓은 내가 있기 때문에 그 과거의 틀에서 못 벗어나서 과거에서 좀 더 향상된 현재의 나를 자꾸 꾸미고 미래를 꾸미다 보니까 자기가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미친년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갈수록 정상인 되기를 원하죠. 더덕더덕 파스 붙인 사람이 아니고, 파스가 하나도 없는 정상인 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온 몸 전체에 파스가 붙은 그런 병든 자를 부르러 왔다.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주님께서 만든 코스대로 돌면 알 수 있죠. 굽이굽이마다 죄인 아닌 것이 없어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전부 다 누구보고 이야기해요? 다 나보고 이야기해요. 제자들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다 나 보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여기 영적으로 생각한다는 그 아이디어가 하나의 좋은 예인데요, 어떤 조각가가 있는데 어떻게 조각하는지 잘 한번 보세요. 어떤 여자분(모델)을 조각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사진을 찍어요. 사진기로 사진을 찰칵 찍어요. 그러면 사진 한 장 나왔죠. 한 면만 나왔죠. 그 다음에 약간 각도를 틀어서 또 찍어요. 그러면 두 장 나왔죠. 계속 뒷면도 또 찍어요. 이렇게 한 사람을 찍는데 400장을 찍어요.
400장 전신을 다 찍어놓고, 그 다음에 조작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여자와 비슷한 스티로폼을 가지고 윤곽은 없고 형태만 있는 여자를 만들어요. 그리고 여기에 아까 찍은 사진을 다 갖다 붙여요. 그러면 수평적으로 있던 사진이 뭐가 되어요? 부풀어 오르죠. 입체가 되겠죠? 그런 조각가가 있어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은 수평적으로 납작한 평면에 살 때에는 우리가 죄인인 줄 몰라요. 그런데 주님의 영적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는 죄인으로 풍선처럼 부풀어 오릅니다. 어느 구석 죄가 안 부풀어 오른 것이 없어요. 전부 다 죄입니다. 바늘로 찌르면 삐리리 소리나며 터져버립니다.
영적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을 죄인으로 만들어서 그 죄의 파스, 예수님의 피죠, 예수님의 피의 공로와 능력만 온 우주에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채용하는 겁니다. 그럴 때 무슨 소리가 나오느냐, 고린도후서 4장 5절의 복음이 나와요. 내가 자랑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누구를 자랑한다? 예수님의 주 되심을 증거한다. 이것이 영적으로 부풀어야 나올 이야기입니다. 수평으로 딱딱하게 되면 안 나오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막 바람을 집어넣어요. 성령 자체가 바람 아닙니까. 우리에게 바람을 집어넣어요. 수평으로 납작할 때에는 우리가 잘 난체 하다가, 갑자기 성령이 오니까 우리가 뭐가된다? 죄인이 되어버리고 그러면서도 우리의 윤곽에 나타나는 것은 주의 십자가 피의 공로가 드러나게 됩니다.
납작한 파스가 부풀어지면 파스가 늘어나게 되어서 부풀어진 파스가 되죠. 그것을 주께서 원하십니다.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사도바울의 모습이죠.
7절 봅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 보배를... 애가 있는 부모에게 보배는 누구입니까? 애 밖에 없죠. 돈 잘 버는 남편이 있을 때, 돈 못 버는 남편 말고, 보배는 누구입니까? 남편이죠. 돈 잘 벌고 살림 잘하는 여자를 두고 있는 남편에게 보배는 누구입니까? 아내가 되겠죠. 그래서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 다 거품이라는 거죠. 그것은 나를 위한 아내이고, 나를 위한 자식이고, 나를 위한 남편이었잖아요. 주를 위한 남편과 아내는 아니었다, 이 말이죠.
진짜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은 우리 안에 보배가 들어있어야 되요,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이 들어 있어야 됩니다. 나는 예수님 만났다! 메시아 만났다! 세상 끝장 낼 그 분을 내가 직접 만났다! 나는 그 분 보고 싶어 미치겠다! 그것 말고 더 큰 보배가 어디 있습니까.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다 거품인데.
짓밟으면 빵 터져버리는 다 거품이죠. 새우깡 큰 봉지 다 먹고 난 다음에 밟아 보세요. 뻥 소리가 나지요. 그것처럼 우리는 지금 새우깡 빈봉지 한 가지 뿐이잖아요. 안에 보배가 있어야지요.. 안에 보배가 없고 그냥 자욱한 황사예요, 황사. 이 몸 가지고 이 몸이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까? 그런데 가치가 있데요. 누가 그러는데? 그건 몰라. 그냥 느낌이야. 나 안 죽어야돼. 왜? 몰라. 그냥 안 죽고 싶을 뿐이야.
이것이 전부다 육적인 세상이고 이것이 전부다 문자적 해석을 하고 있는 세상이예요. 살기 위해서 교회가고 복 받기 위해서 교회가고 예수는 뒷전이고 자기 밖에 모르고 그냥 안개 걷히는 고 재미. 하루하루 살았다 또 내일도 살자. 안개 헤치고 가는 그 재미. 그런데 그것은 목마른 물을 긷는, 그러면서 헤치는 세월 속에 몸은 늙어져서 다 망가지고 어디로 가는 것도 모르고 넓을 길로 가고 있고. 좁은 길로 안 가고 넓은 길로 가면서 좁은 길로 가고 있다고 우기며 있고.
7절을 봅시다. 우리가 이 보배를 가졌은즉 능력이 심히 큰 것이... 어디에 있고요? 하나님에게 있고. 누구한테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있지 않죠. 이런 고백을 우리가 언제 해 봤냐 이 말입니다. 몇 년 만에 해 보았냐 말이죠. 우리는 이런 고백하기도 싫잖아요. 7절에 이렇게 만들어 줄 까봐 겁나가지고.^^ 이것이 언제 적 고백이냐 말이죠.
그저 포대기에 이 말씀 주어 담으면 구원받는 줄 알았지요? 이 말씀이 우리를 죽입니다. 이 말씀이 황산 용액이예요. 몸에 피부에 닿으면 다 타버립니다. 이 말씀은 염산이고 황산이예요. 애가 아파 울고 있을 때 이 말씀이 주어지면 애고 뭐고 메시아가 중요하지 애가 중요한가! 이런 마음으로 우리가 영적으로 부풀어 올라야되요. 우리가 다시 한 번 서랍에 있는 파스 꺼내서 지금 여기가 문제군요 하면서 파스를 붙이는 온 파스를 다 붙여야 되요.
8절 봅시다. (고후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여기에 보면 답답한 일, 우겨쌈을 당하는 것, 핍박... 전부다 그동안 누가 써 먹던 겁니까? 그동안 이 세상에서 우리를 두껍게 둘러싸고 있었던 악마가 그동안 써먹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에 전부 다 굴복했었단 말이죠. 그런데 성령이 오니까 이 두꺼운 층을 뚫고 성령이 오니까 우리는 어떻게 되었어요? 당하면 더 커지고 부풀어 오르는 거예요. 답답한 일도 답답한 일이 아니고 낙심하지도 아니하고...
여러분 낙심한다는 것은 이미 내가 없는데 무슨 낙심이 됩니까. 낙심할 내가 없는데 무슨 낙심이 되겠어요, 낙심 안되죠. 중국집 주방장이 주는대로 먹으면 되지 왜 자기가 자장면 짬뽕을 고릅니까. 주는대로 처 먹으면 되었지. 내 인생 이렇게 되어야 하고 내년도 계획은 이래야 되고...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라. 내년도 계획이 어디있어요.... 주는 대로 처먹지... 무슨 계획이 있어요.
여러분 꽃 봉우리는 법대로 핍니까? 법 없이 핍니까? 법 없이 그냥 피워요. 화단 만드는 자재나 규격은 법대로 해요. 하지만 생명은 우리 말 안 들어요. 그냥 피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생명은 그냥 핍니다. 그 생명 앞에 우리는 그대로 깨어져야 하지요.
그 다음 말씀, 핍박을 당하여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야,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 안에는 내 것 말고 다른 사건이 있어야 되요. 우리가 일으킨 사건 말고 다른 사건. 지금 손 목사님 가정에서 성경공부하는 것은 손목사님에게 육적으로는 이익 될 것이 없어요. 하지만 다른 사건이 있어서 허락했다고 저는 이래 믿습니다. 좋게 이야기 해야지 또 물 안 주면 곤란하니까 ^^
우리가 우리를 장악한 것 말고 다른 것이 와서 장악되어야 돼요. 내가 내 인생되면 곤란합니다. 그것은 지옥가는 인간입니다. 나 말고 다른 분이 장악하셔야 됩니다. 그 이야기예요. 성경에 나와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내가 내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것도 아닌데 왜 낙심합니까. 전부 남의 것 가지고. 그 주제 넘는 이야기 아닙니까? 남의 것 가지고 자기가 왜 낙심합니까? 우리는 종이면서... 주인이 시킨대로 하면 되지요.
망해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보세요 예수 죽을 때 그냥 죽은 것이 아니고 코스가 있잖아요. 이 가는 코스가 우리 속에 있으면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몸에 버짐 나타나고 여드름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에는 내 속에 나만 있지 않고 나를 장악하고 계신 다른 분이 계시다는 것을 드러내는 그런 생명이 있는 사람이 누구야! 나 그 100원짜리 동전이라고 생각하고 돈 주우러 왔다’고 사도바울이 지금 돈 주우러 온 거예요. 이 말씀 고린도후서를 들이대면서, ‘너 같은 형제 맞아?’ 하면서 우리에게 묻고 있는 거예요. ‘네가 돌맹이야 아니면 하늘나라에서 보내 준 동전이야’ 하고 묻고 있는 겁니다. ‘동전 맞습니다’, 한다면 우리는 사도바울의 말씀에 동참해야 되요. 이 사도 바울의 말씀을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주께 감사합시다, 하고 이렇게 해야되요.
마지막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11절에 우리 산자가 항상 예수를 위해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하심이라.
항상 살았다고 여기면 어디에 넘겨져야 돼요? 주님한테 넘겨져야 돼요.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죽이고 죽은 우리 육체에 주님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안 되면 그 사람은 이단입니다. 그리고 이단을 용서하지 마세요. 주님이 용서하지 않는 이단을 내가 왜 건방지게 이단을 용서합니까? 이단에 대해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성도라는 뜻이예요. 이단마저 용서한다는 것은 지금 정신 상태가 자기한테 와 있다는 뜻입니다. 나 원수도 사랑한다. 나 이웃도 사랑한다, 자기 자랑하려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용서하고 용서하지 않고 못 정합니다. 복음이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개 돼지예요. 그 말은 복음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를 귀하게 보란 말이죠. 우리가 굴욕적인 삶을.. 왜 지금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우리는 평생 굴욕적인 삶을 살게 되어 있어요. 굴욕적인 삶을 살 때 자기가 자기 자신을 천대시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꼬라지 하고는 에이 이러고 사느니 자살하지.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포기 할 때가 있다고요. 이러면 안되요.
우리는 우리를 포기할 자신이 없어요. 왜?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니니까. 우리가 질그릇 아닙니까. 질그릇 안에 무엇이 담겨있다 했습니까? 보배라고 했지요. 보배의 귀중함을 알아야지 질그릇의 천함을 왜 자꾸 탓하냐 말이죠. 결국 질그릇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질그릇 안에 보배가 없다는 것 밖에 더 됩니까? 그죠? 질그릇 밖에 없으니까, 꼬라지 이러니까 죽어야지, 이래 된다 말이죠.
여자들이 남편과 이혼한 뒤 자살 충동을 느낀다고 합니다. 여자로 태어나서 불우한 과거를 딛고 결혼 했더니만 남편이 이렇게 다른 여자와 바람났구나, 참 죽고 싶구나. 결국 그 사람에게 평생 담아온 보배가 무었이예요? 평생 자기가 그릇이라 여기고 담았던 보배가 뭡니까? 그것은 자기 과거의 이상형 밖에 더 되요? 그리고 그 사람이 평생 성경보면서 해석한 것이 무슨 해석이예요? 육적인 해석이고 문자적 해석이었죠.
오늘 주제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굴욕을 즐겁게 당합시다. 굴욕을 즐겁게 당하시고 보배가 중요하지 그릇은 안 중요해요. 보배없는 그릇은 딸그락 소리만 나지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보배 있습니까? 심봤다! 하고 예수님 봤다! 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주께서 자유케하신 성령님의 은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주께서 보배 주셔서 평생 안개속에서 살아온 것보다 더 귀한 것을 주신 것인데, 우리가 이것을 우리의 안목에 가려버리고 천시해 버리고 마치 없는 둥 사라진 둥 살아왔었습니다.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늘 깨닫게 해 주시고 굴욕을 당할 때마다 우리가 우겨싸임을 당할 때 마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우리를 죽이는 것이 주의 뜻인 줄 알아서 제발 우리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주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09-22 09:21:22 녹취 : 조현창
관리자(IP:220.♡.176.169)
09-09-27 10:41
안산강의 070413 고후4장 요약
2009-09-23 11:10:16 이름 : 신직수
창조주가 죽었는데
피조물이 안죽을 수가 있겠는가
모두 죽는다.
창조주의 피가 인간들을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창조주는 마귀에게 마귀에 걸맞는 권한을 주었는데
그 권한이라는 것이
주 예수의 권한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
그래서 신자든 불신자든,
인간들에게는 종교라고 하는 두꺼운 마귀의 층이 덮혀 있다.
그래서
십자가의 활동이란,
인간들은 절대 뚫을 수 없는 마귀의 층을 뚫어
영적 해석을 하는 자기 사람들을 살려 자기 일을 하게 하고
육적 해석을 하는 자기 쫄따구들을 마귀와 함께 몰아버리시는 일을 하신다.
이것이 십자가의 활동이다.
육적 해석, 문자적 해석을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명령법으로 생각하여 교육, 훈련, 수련쪽으로 몰아
자신들의 비전을 이루는 식으로 삶을 산다.
이것이 마귀로 하여금 덮어쒸우게 만든 창조주의 층이다.
영적해석을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강조법으로 생각하여 모든 말씀이
주께서 이루셨고 주를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