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2:13-17 (성도의 고난)
계 12:13-17 (성도의 고난)
이름 : 우리교회(IP:122.47.57.22)
본문: 요한계시록 12장 13-17절
제목: 성도의 고난
http://222.231.1.74/~woorich1/성경강해/요한계시록-2006/056강-계12장,13-17,(성도의,고난)-rev070401.hwp
이근호
07-04-01 18:29
성도의 고난
2007년 4월 1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2:13-17
(계 12:13)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 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계 12:14)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계 12:15)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계 12:16)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계 12: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사람에게는 사는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목숨마저 주저없이 털어넣을 수 있는 영원한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가수는 노래부르기 평생을 바치겠노라고 마음 속에서 선언을 하지만 몇 년을 바쁘게 이리저리 뛰다보면, 스스로 지치게 마련입니다. 신물이 난 지경일 것입니다. 심지어 늘 버릇처럼 해오던 가정주부의 하루 세 끼 상차리기도 지겨울 그런 날이 옵니다.
목숨까지 아낌없이 바치려면 사람이 결정짓는 명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명분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여자’라는 표현으로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왜 여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그리고 용으로부터는 공격을 받는 처지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녀에게는 ‘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가 평생토록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는지 상관없이 아들만 있다면 생명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보실 때, ‘아들이 있나 없나’의 여부를 가지고 판정하십니다. 그 외는 안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희한한 용어들, 즉 용이라든지, 뱀, 여자, 아들, 땅, 남은 자, 광야 이 모든 용어들은 모두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함입니다. 특히 한 남자로서 등장하신 예수님은 자기를 잉태한 여자를 가지고 아들에 속한 사람임을 알려주십니다. 즉 성도란 예수님을 잉태란 마리아와 같은 운명을 지닌 자라는 겁니다.
처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것은 본인의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말씀이 그녀에게 도착하니 그녀는 예수님을 잉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힘입니다. 이처럼 하늘 나라를 볼 자들은 성령의 힘이 도착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마리아가 말씀 성취의 도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마리아가 임신했을 때, 처음에 마리아는 자신의 정당성을 방어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천사가 사실을 말해주니, 그녀는 “말씀대로 하옵소서”라고 순응했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임신 사실만 기적이라고 보아서는 아니됩니다. 오늘날 성령이 임해서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인 것을 믿는 것도 동일한 기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성도는 본인이 원하는 일생을 살 수 없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임신해 있는 그 말씀의 뜻대로 이끌림받을 뿐입니다. 즉 어떤 사람이 성도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그에게 도착하게 되니 그 사람은 곧 ‘말씀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주도권이 말씀이 가져가 버린 처지입니다.
마리아의 예를 들면, 가나 지방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그녀는 살짝 예수님의 능력을 빌어서 해결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예수님에게 핀잔을 들어야 했습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지적받았습니다. 즉 예수님이 이 땅에서 오신 것은 사람들의 이용물이 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오신 겁니까?
예수님은 포도주를 가지고 설명하십니다. 이전 포도주보다 나중 포도주가 더 낫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고대하는 것보다 예수님이 제대로 열리게 하셔서 주시는 그 세계가 더 놀랍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포도주같은 붉은 색깔의 피가 그 나라를 열게 하시는 겁니다. 이로서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라는 원칙이 마리아의 오해를 통해서도 드러나게 됩니다.
오늘날 성도가 ‘여자의 후손’이 되는 것은 마리아에게 생긴 일과 그 이후의 과정과 결과가 모두 그대로 동일하게 우리에게 쏟아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 보니 ‘독수리의 두 날개로 받아’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예수님아 아직 어릴 적에 유다 나라의 헤롯 왕이 예수님과 그 일가족을 살해하기 위해서 모의합니다.
이 사실을 미리 안 천사가 마리아 가족에 찾아와서 애굽으로 피신시킵니다. ‘독수리’란 출애굽기 19:4에 나와 있는 말씀인데, 이것은 인간적인 그 어떤 힘이 관여해서 애굽에서 탈출 성공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은 독수리를 조종할 수 있습니다. 독수리가 가는대로 갈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가진 여자는 용의 공격을 피해 광야로 내려가게 됩니다. 과연 ‘광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광야란 신명기 8장에 보면, ‘마음을 낮추기 위한 낯선 공간’입니다.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아예 성도 전체를 ‘없음’의 토대 위에서 이동하게 하는 겁니다. 옛날 광야시절에는 물과 양식과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지독한 ‘없음’에서 오는 자립성이 무너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음을 낮출 수 밖에 없는 형편에서 하나님의 다음 계획에 순응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광야는 옛날처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한 ‘없음’이 아니라 사단의 공격을 집중으로 받게 되므로서 오는 ‘없음’입니다. 즉 지금 이 세상은 두 개의 공간층이 형성되어 혼재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법적인 온전함을 따지는 공간입니다. 법적으로 완벽함으로 추구해서 보다 완벽할 수도록 사람대우 해주는 세계입니다.
하지만 온전함이란 곧 깨어지기 싶다는 말이 됩니다. 오랜 기간 동안의 금주선언도 한 잔의 맥주로 인해 와르르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법이 들어옴으로서 이 세상은 망해야 될 세상임이 확연히 윤곽을 드러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은 저주받는다”라는 식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법을 주시면서 “법 아래 있기에 저주받을 세상이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율법 외의 한 의가 등장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즉 법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득 찬 공간입니다. 예수님의 대신 죽으신 화목제물이 ‘사랑이 충만한 공간’을 만들어내셨습니다. 이로서 악마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 하여금 그 사랑을 무효화시키겠다는 식으로 회유하기 시작하고 구박하기 시작합니다.
즉 악마는 말합니다. “생명을 스스로 챙겨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아들이 있는 여자의 남은 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말씀이 찾아올 때 다 챙겨서 가져다 주었다”고 말입니다. 성도의 남은 생이란 수시로 이런 음성을 듣는 인생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에게 주도권이 있음을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느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