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30:15-18 (하나님의 기다림)
사 30:15-18 (하나님의 기다림)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64)
본문: 이사야 30장 15-18절
제목: 하나님의 기다림
http://222.231.1.74/~woorich1/성경강해/이사야-2005/081강-사30장,15-18,(하나님의,기다림)-isa070328.hwp
이근호
07-03-28 20:55
하나님의 기다림
2007년 3월 28일 본문 말씀: 이사야 30:12-18
(사 30:15)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
(사 30:16)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한고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한고로 너희를 쫓는 자가 빠르리니』
(사 30:17)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영 위의 기호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사 30: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위급한 사태가 닥쳐올 때 도망칠 생각부터 먼저 한다는 것은 평소에 늘 혼자 지내는 습관 속에 있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참으로 하나님과 늘 교제하고 있었는지를 들추는 내는 방식으로, 막강한 적들로 하여금 자기 백성을 공격케 하십니다.
유다 나라가 평소에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을 자주 부르고 제사를 드려도 막상 적들이 대규모로 쳐들어왔을 때,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도망치기 바쁩니다. 이것은 순전히 자기를 위한 인생을 살아오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은, 그 믿음 가지고 우리 자체를 즐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주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외부로 알리라고 주신 믿음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그런 믿음도 없으면서 있는 척했던 자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의 불신앙이 여지없이 노출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사실 예수님께서 일단 거쳐 갔던 무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겪었던 각양 일들을 예수님은 자기 백성에게 알려주고 싶으신 겁니다.
마치 미술가가 자신이 혼신의 힘에 다해 완성해놓은 전람회장을 가장 가까운 자들에게 손목잡고 일일이 설명해주고 자랑해주고 싶은 심정으로, 우리 예수님도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자나쳐 왔던 경우들을 설명해 주고 싶어하십니다. 이 세상은 전체가 예수님에게 수난과 고난을 가했던 유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럴 때는 이렇게 극복하셨고, 저럴 때는 저렇게 돌파했다는 점을 자기 백성의 손을 잡아 일일이 알려주고 싶어하십니다. 인공적인 성지순례지란 일종의 장사하기 위한 관광지이지만,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인도하시는 성지순례지란 딴 곳이 아니라 우리의 전 일생 모두입니다.
주님 가신 코스를 통해서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해서 자신에게 용서와 사랑과 영생이 주어졌는가를 알려지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애야, 저곳은 안식일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논쟁한 장소이고, 이곳은 간음한 여인이 그저 용서받은 곳이고, 저쪽은 도마라는 제자가 내 옆구리와 내 손목을 만져본 자리요, 저 쪽은 내가 해같이 광채를 내면서 변화된 장소고, .그리고 이곳은 내가 40일 금식한 곳이야”.. 하시면서 이런 식으로 예수님께서 당한 수난의 의미와 우리를 결부시키십니다.
이럴 때 참으로 주님과 상관없는 자들은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점점 예수님을 포기하고 잊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주님께서 데리고 다니시면서 주님의 공적과 업적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자들은 인생을 살면서 각가지 부딪치는 사건들을 통해서 ‘과연 내가 누군가’라는 되묻는 물음을 가지는 계기가 됩니다.
즉 성도는 늘 자신이 자기에게 질문의 대상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누군가? 나는 왜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밥을 먹고 숨을 쉬는가?”라고 자기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사람이 자기에게 질문을 던지지 아니하면 짐승이나 개처럼 타인만 보이면 자기 유리한대로 물려도 덤벼들 것입니다.
누가복음 17:20-21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천국을 설명하시면서, 독단적으로 자기 자신의 영역에만 국한 시키는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너희’, 즉 ‘인간’을 천국 속에 삽입시켜서 설명하십니다.
즉 “천국은 내 안에만 있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천국은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시므로서 특별히 천국에 포함되는 ‘너희’가 따로 존재할 수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따라서 이미 천국 안에 들어온 사람의 일생이란 더 이상 자기를 위한 일생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성도는 처음부터 ‘실패자’로의 주님으로부터 인도받는 사람입니다.
다니엘 3 친구의 경우를 보면, 그들은 대 제국의 공직자로서 복무했습니다. 상당히 인정받고 안정된 직업일 수가 있습니다. 자기 생계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을 장소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왕이 난데없이 어떤 법을 제정합니다. 그 법이란 바로, ‘금신앙에서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풀무풀 속에 들어가 죽어야 한다’는 법입니다.
과연 다니엘 세 친구는 평소에 법에 준해서 안정을 취했던 자들인가요 아니면 법이 저촉받지 않고 주님의 능력에 의해서 살아간 사람일까요? 그 증거는 난데없이 죽어야 하는 사태가 쳐들어왔을 때입니다. 다른 사람 같아서면, 도망쳤을 것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니엘 세 친구는 평소에도 법의 힘을 의지하는 자들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과 영생이 주어지는 힘 속에서 살아온 자들입니다.
이들이 풀무풀 속에서 어떻게 살아있는가를 보면 압니다. 결국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법의 지배에서 사랑의 지배로 이끌어내신 겁니다. 이것이 바로 현실입니다. 믿음이란 자기의 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끌어내신 분의 능력을 믿는 겁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바로 성도의 운명입니다. 왜 성도는 더 이상 자신을 믿어서는 아니되는 겁니까?
여호수아 20장에 보면, ‘도피성’ 제도가 나옵니다. 도피성이란, 하나님에 의해 일어난 사고로 인하여 사람을 난데없이 죽여버린 살인자가 자기 동네에서 보복을 당할 처지에서 안전하게 빼내어 줄 목적으로 제사장이 기거하는 곳에서 살게 합니다. 즉 비록 그 사회에서는 죄인으로 낙인찍었지만 제사장과 함께 있는 한 죄인이라는 비난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살인자는 제사장이 죽고 난 뒤에는 자유의 몸으로 도피성에서 나와 당당하게 원래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행했느냐 하면, 성도는 한 순간에도 하나님의 은혜없이 살아간 적이 없음을 계속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인간은 원래 죄인입니다. 새삼스럽게 죄인이 아니라 처음부터 죄인입니다.
따라서 전혀 하나님으로부터 보호 받을 대상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님 덕분입니다. 따라서 독자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한 순간에도 주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천국을 갈 수 없음을 느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