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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8강 나오미의 아들 (룻기 4장 13-17절)성경룻기

8강 나오미의 아들 (룻기 4장 13-17절)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64)

관리자(IP:125.♡.50.66)

16-02-29 22:34

룻기 1996 (8)

이근호 본문말씀: (룻기4:13~17) 나오미의 아들

(4: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4: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찌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4: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
(4:16)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4:17)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맨 앞 부분 설교는 녹음되지 않았습니다. 녹음 상태로 녹취가 어려운 단어는 공란으로 남겨두었음을 양해바랍니다.)
흔히 사람들은 교회 목회자의 O은 교회에서 일어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이렇게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그것은 바로 죄의 OOOO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라 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대번에 그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간주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까 우리 교회 잘 났잖아’하고 자기의 교만의 근거가 될 수 있겠습니다. 또는 사람은 어떤 자기가 한 것이 있고 자기가 살고 있는 장소에서 뭔가 일어나면 그것을 가지고 남한테 자랑하고 싶어서 주체를 못해요. 항상 ‘야, 자랑거리 또 생겼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렇게 여기니까 교회에서 신기한 일 한 두 가지 없으면 이건 뭐 기가 죽어서 도저히 살 수가 없어요. ‘나 사십일 금식해서 은혜 받았다. 너는 못 받았지? 이 믿음이 약한 자여!’ 이런 식으로 남들과 대조하면서 자기가 잘난 맛에 우쭐대는 맛에 살아가면서 하는 말이 ‘이건 신의 계시다, 신의 계시다!’ 그렇게 하는 겁니다.

또 교회 목사들도 그런 사람들을 이상하게 잘 구수리고 이용해서 경쟁을 붙여서 교회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것 가지고 서로 아귀다툼 경쟁하기에 바빠 가지고 하나의 기존 사회에서 사업 꾸리는 그런 방식을 그대로 행하고 있어요, 그대로. 잘한 놈 떡 주고 못한 놈 대접해서 잘한 식으로 모으면 그들이 시간 바쳐 몸 바쳐 돈 바쳐서, 교인들이 교회를 위해서 시간 바쳐 돈 바쳐 몸 바쳐서 충성하면 하늘나라의 상급이 크다고 이렇게 사기를 치고 있습니다. 이게 뭐냐? 내가 이런 식으로 교회 세웠다는 거예요. 이건 하나님의 계시가 틀림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계시는 성경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죄악들이 모여서 경쟁 현장에서 발견되는 그러한 종교적인 그런 퇴폐 깊은 현상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닙니다. 성경은 오히려 사람들이 그걸 계시로서 묶어 가지고 꽃다발 만들 가능성이 있다 조심해라. 오히려 그것을 미리 아시고 거기에 기운을 빠지지 않도록 굉장히 주의를 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사고 납니다. 성경에 보면 그냥 보통 살아가는 보통 삶의 인간들의 삶이 들어 있지요. 희한하고 괴상망측한 그런 걸로 연속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냥 서로 좋아해서 결혼하고. 그런데 그 결혼이 하나님의 계시에 입각해서 잘 정리 정돈 되어서 우리에게 또 하나의 계시로 준다구요. 그런 겁니다. 결혼하는 것이 무슨 신기한 일입니까? 남녀가 서로 정다워서 결혼 하는 것이 무슨 계시이겠습니까? 뭔가 결혼하면서 화끈하게 뭐 축복 준다 그게 계시이겠어요? 그냥 보통 사랑하는 사람들의 결혼인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택한 자의 결혼이 하나님의 하나의 계시 덩어리로 작용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되는 것은 그냥 평상적인 인간들이 평상적인 너무 밋밋하지 않느냐 할 정도로 밋밋한 삶을 살아가는데, 그 삶 속에서 하나님의 참된 뜻이 거기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것 그 자체를 긍정하지 마시고 그걸 우호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잘났다고 보지 마시고 성경에 비춰 볼 때 내 삶이 어떠한 본질을 가지고 있는가 어떠한 바탕 위에 내가 지금 내 삶이 전개 되고 있는가 그것을 한 번만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가라 하는 마태복음 16장 있잖아요? 얼른 보면 저 목공소에 가서 나무 하나 다듬어 가지고 십자가 어깨에 메고 오라. 메기 싫으면 스카치테이프로 붙이든지 본드로 하든지 줄줄이 전부 다 하나씩 메고 질끈 새끼줄로 해가지고 메고 오라 뭐 이런 뜻으로 쓰여 있지만, 십자가 진다는 것이 우리가 상상하는 그러한 어떤 그 자학적이고 괴상망측한 희한한 일 그런 것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십자가 진다는 말은 그냥 보통 살아가는 거예요. 지금 내가 교회 가는데 시어머니가 머리털을 쥐어뜯어 가지고 내가 완전히 대머리 됐다. 그건 머리채 뜯기는 거지 십자가가 아닙니다. 내가 교회 헌금하는데 남편 몰래 십 만원 헌금했다고 남편이 술 먹고 들어와서 남편이 얼마나 때리는지 주여. 목사님 저 십자가 졌습니다. 그 헌금하는데 남편하고 의논해서 해야지 지가 그렇게 돈 다 내고 되겠어요? 의논을 해서 내야지. 그걸 뭘 잘했다고 그게 뭐 십자가라 그러면서 그런 것을 자기 긍정, 자기를 이렇게 미화 시킵니까? 그러니 그냥 보통 살아가는 그것이 십자가예요. 마치 예수님께서 보통 밥 먹듯이 그냥 밥 먹고 그냥 잠 주무시고 하는 것처럼 그게 십자가예요.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십자가란 뭐냐? 남 같이 똑같은 삶을 사는데 그 끄트머리가 영생의 길로 가거들랑 골인되거들랑 그 앞에 있던 모든 것을 십자가의 길로 간주하시기 바랍니다. 혼자 신앙 잘난 척 하고 기도 많이 하고 금식 많이 하고 전도 많이 해도 그것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교만케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피보다도 자기 잘난 맛에 자기가 남보다 신앙이 더 뛰어나다고 그 뜨거운 더 훌륭한 맛에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십자가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고 엉터리 길로 지옥의 길로 간 것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까 우리 장로님 답변하신 것처럼 놀라운 신앙 이예요. 나 한국 교회 그런 신앙 처음 봤어요. 우리 대신 누가 십자가 진 사람이 없고 예수님만 십자가 진다고 했는데 이것은 따봉 이예요, 따봉. 정말 왜냐 하면 우리가 십자가 지는 줄로 알지만 우리가 십자가 지는 게 아닙니다. 대신 짊어지는 분이 따로 계세요. 우리가 나나 그리고 십자가지지 않는 나와 십자가 대신 짊어지는 그 분과 우리가 확실히 분리시켜야 됩니다. 분리시켜줘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잘난 맛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내 대신 죽음의 십자가 지신 주님을 바라보지요. 그 관계를 가지고 믿음이라 하지요, 믿음. 그걸 믿음이라 합니다.

만약에 내가 잘나서 내가 십자가 진다면 이건 믿음이 아니고 자기 오기고 자기 열심이지요. 자기중심이라니까요. 이것은 바로 믿는 것이 아니고 자기 노력의 열성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치 그저 불교 승려들이 머리 빡빡 깎고 나는 모든 것을 떠나서 절에 산 속에 들어간다. 남들 보기에는 고상해 보이고 거룩해 보이지요. 그러나 “당신은 누구를 믿습니까?” 그러면 “나는 내 자신을 믿습니다. 본인은 나를 믿습니다” 이럴 것 아니겠어요? “친구야, 잘났다 정말!” 이렇게 되는 거죠. 믿음이라 하는 것은 자기를 안 믿는 거다 말이죠. 자기를. 자기한테 어떤 의미와 가치를 두지 않는 거예요. 십자가 대신 지고 가는 분은 따로 있는 겁니다.

제가 이쯤 이야기하면 이근호 목사 뭐 최고라 해도 목사님 이제는 우리 십자가는 별개의 문제고, 십자가 대신 지고 가니 이걸 가지고 포터라 해요. 포터. 히말라야 산 등산할 적에 그 네팔인 짐 대신 짊어 져주는 포터 있지요? 카라반 올라 갈 때 포터가 짐 지고 우리는 십자가 지고서 랄랄라 부르면서 올라가는 걸로 생각하는데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대신 짊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뒤에서 포터나 붙여 준다는 뜻이 아니고, 그 대신 진 십자가에 우리가 참여가 되어서 우리가 십자가 통째로 진다 이 말입니다. 아 이거 말이 좀 어려워졌네요. 미안합니다.

더 쉽게 이야기 합시다. 바다 밑에 가면요, 제가 제주도 바다 밑에 어느 상황을 칼라로 찍어서 TV로 방영한 것을 봤는데, 제주도 바다 밑에 뭐가 있느냐? 오징어가 있습니다. 물론 오징어가 제주도 바다 밑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오징어를 제가 가만히 보니까 오징어 머리는 하나인데 발이 열 개예요. 이거 처음 알았지요? 그걸 가지고 현재 한국에서 뭐라 그러는지 압니까? 다양성이라 그래요, 다양성. 그러니까 진리에 이르는 길은 한 길이 아니고 여러 가지 길이라 이렇게 보는 겁니다. 절에 가도 천당 갈 수 있고, 기독교 아니라도 예수 아니라도 자기 선함 착한 일하면 된다. 이것을 가지고 다양성,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해가지고 다양성을 서로 인정해주자. 그거 존중하고 공경해 주자 그래야 통합적인 그런 이상적인 사회를 구성 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발이 열 개가 되는 것이 내가 관찰을 해보니까 제주도 앞 바답니다. 해보니까 아무리 열 개의 다리가 자세히 보니까 지 맘대로 인 것 같지만 머리가 이끄는 데로 딸려가요. 우리가 예수님을 뭐라 캄니까 교회에서? 머리라 하지요? 그러니까 오징어 머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예수님께 붙어있는 귀요 코요 발 아닙니까? 다양성이거든요. 우리는 열 개의 오징어 다립니다. 다리가 하는 말이 “아, 예수님 참 땀 흘려 수고하네! 예수님, 욕보십니다. 나는 내 맘대로 놀 테니까 나는 내 맘대로 갈 테니까” 우리가 제가 방금 한 말을 그런 식으로 여러분이 잘못 생각할 수가 있는데 그렇게 생각마시라 이 말 이예요. 왜냐 하면 아무리 우리가 각자 은사가 다르고 몫이 다르다 할지라도 방향은 역시 십자가의 길로 딸려 갈 수밖에 없는 방향입니다. 머리는 저 동쪽으로 가는데 아니 같이 붙어있는 오징어 다리가 서쪽으로 갈 수가 있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계속해서 그 머리에 붙어있는 다리라면 아무리 우리가 바람둥이(?)라도 그 방향만큼은 십자가 지고 가는 주님을 따를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십자가 지는 것은 주님입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 지는 방향으로 우리를 잡아당기는 것도 역시 주님이십니다. 알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자신이 십자가 졌다고 이야기 하지 맙시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대해서 우리가 성경을 보시면 성령께서 주의 영께서는 주님의 십자가가 얼마나 우리한테 귀한 것인지 그것이 곧 영생인 줄을 우리한테 크게 확대시켜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는 날이 갈수록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가 더욱 더 감사하게 되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구태여 이 십자가에 안 달려도 우리가 보통 밥을 먹고 장사하고 잠자고 시집가고 장가가도 그 자체가 남들 보기에는 하나의 계시의 역할을 합니다. 어떤 역할? 십자가에 죽어가는 예수님이 너희들 편에 살아있다는 계시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의 O를 계시라고 말하는 게 아니고, 우리 속에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이 모습, 그 모습이 우리한테 계시가 된다 이 말이죠. 우리가 계시가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이 계시다. 그것을 그 관계를 누가 보여 주는가 바로 오늘 성경에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성경만이 계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 있는 하나님의 보통 사람 살아가는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 우리는 알아서 아, 이것이 진짜 하나님의 모습이구나라는 것을 차곡차곡 정리할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한 번 봅시다. 오늘 본문에 보면,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 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래 되어 있지요. 누가 말했습니까? 성경이 쉽다고. 제가 방금 읽었던 12절 가운데서 진짜 쉬운 말이 한 마디도 없어요. ‘여호와께서’ 여호와가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소년 여자’ 이건 쉽다. 이건 쉽지요? ‘네게 후사를 주사’, 후사 후손 이것도 쉽다고 칩시다. ‘네 집으로 다말’ 다말? 다말 뭐 알아야지? 다말이 누군지. 그 다음에 ‘유다’, 유다라 하니 우리 가룟 유다밖에 생각 안 나잖아요. 이 유다가 누군지요. 그 다음에 ‘낳아준 베레스’, 베레스? 베레스가 누굽니까? 베냐민도 아니고. 베레스? 베레스가 누구예요? 미국의 흑인 야구 선순가? 그러니까 성경 한 줄 한 줄을 읽을 때마다 다 의미가 담겨 있는데 우리가 워낙~ 무식해서 어느 성경도 모르기 때문에 ‘에, 여 뭐 우린 뭐 그냥 넘어가요! 그냥 넘어가면 되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그러지 말자 이겁니다. 그래서 이 12절의 말씀을 설명하면서 오늘 설교를 끝내고자 합니다. 잘 들어 보세요. 끝내야 된다는 얘기를 해줘야 주무시지 않으니까.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 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러분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이 소년 여자가 자식을 낳을 때 그 자식은 누가 낳게 했습니까? 1)남편, 2)아내, 3)하나님 몇 번 입니까? 하나님이 낳게 하신 거예요. 여러분 이거 아시지요?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게 오늘날 한국 교회 실정 이예요.

성경에서 ‘여호와께서’란 말이 나오면 여호와께서만 할 수 있지 다른 사람은 엄두도 못내고, 못한다는 의미에서 여호와께서를 집어넣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냐 하면은 ‘아이고 성경을 믿는 사람들 겸손 하기도. 지가 해놓고 나다 영광을 돌리려고 ‘여호와께서 하셨습니다’ 이러면 다른 사람들 보기에 ‘아이고 믿음 좋아라. 지금 지가 해놓고. 세상에, 우리가 저 믿음 본받아야 돼. 지가 해놓고 여호와께서라고 끝까지 여호와께 돌리는 것 보니까 아이고 정말 참 훌륭한 믿음이네’ 우리는 그런 식으로, 한국 교회는 그런 식으로 겸손을 티를 내는 식으로만 이렇게 해석한다 이 말이죠. 진짜 여호와께서 했다고 안 믿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은 여호와가 안 보이니까. 세상의 모든 움직이는 것이 사람의 손에 의해서 움직여지니까 일단 우리가 겸손의 티를 내자. 안 보이지만 여호와의 몫은 여호와가 했다고 하자. 하지만 역시 한 것 우리 아니냐. 꼭 이런 식으로 따지고 그런 식으로 해석 하는 경향이 많아요.

예를 들어서 제사를 지내는데 ‘조상님, 그저 받으소서. 이렇게 음복을 해가지고 상에 해가지고 그저 올해도 남산 마루 달은 잘 뛰놀고 그저 재수 좋다고 제사를 안 드립니까’ 그 집 손자가 있다가 “할아버지” “왜?” “그런데 지금 아무도 없는데 누구보고 그 캄니까?” “그래 아무도” 그 술 잔 그케도 우리 할아버지 혼자 다 먹고 우리 아버지 다 먹는데 그 뭐 귀신이 먹는다고 누가 그렇게 합니까? “그래도 그래 니 말 맞는데 그래도 그래 하는 것이 전통이니까 우선 그래 놓고 그래 놔야 혹시 또 재수 온 붙을 줄 우에 아노?” 그런 식으로 자꾸 해석을 하더란 말이죠.

실제로 여호와께서 한다는 말을 믿는 사람이 극히 드문 거예요. 드물다 이 말입니다. 제 딸 이름이 진주입니다. 성은 제 성 따라서 이진주인데 “이진주는 누가 낳았습니까?” 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했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당장에 그 자리에서 진주는 울 것이고 “그거는 기본이고, 목사 딸이니까 기본이지. 기본이고, 야 누구 닮았습니까” 이래 이야기 하더라 말이죠. 그러니 과연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거리감, 그 차이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것은 단지 말뿐인 이상적인 이야기고 실제 현실은 과연 우리가 부부가 낳은 것이 과연 실제인가.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이요’ 그래 돼 있다 말이죠. 여러분 나중에 지금 이렇게 우리가 앉아 있어도 나중에 주님과 얼굴을 마주하겠나? 주님과. 주님과 얼굴을 맞덴대요. 그것이 이상적인 우리가 그냥 지어낸 상황입니까? 안 그러면 실제 상황입니까? 만약에 실제 상황을 믿는다면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부끄럽게 여기고 예수님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못하지요.

계속해서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이라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을 믿음이다 고 되어 있다고요. 보이지 않는 것. 그런데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을 누가 방해하는 줄 압니까? 꼭 얼렁거리고 앞에 보이는 것들이 방해하고 있어요. 보이는 것들이. 모든 것들 자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했다는 것은 너의 믿음의 겸손에 불과한 것이고 실제로 돌아봐선 니가 한 것이 아닌가. 자꾸 해석을 달리 하도록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돼버리면 성경에서 여호와께서 십자가에서 했다는 것이 공중에서 붕 떠가지고 저 하늘 저 편으로 날아가 버려요.

자,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무엇을 했습니까? 4장10절을 봅시다.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취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 그 이름이 그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함에 너희가 오늘 날 증인이 되었느니라’ 룻이라는 이 여자와 결혼을 한다는 이 사실 아주 밋밋하고 보통 일어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보아스는 뭘로 봤습니까? 보아스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기적으로 본 거예요. 이 얘기는 지난 시간에 했지요. 결혼 같은 것이 그 사람에겐 보아스에겐 기적이었다구. 여호와께서 지금 나한테 기적적으로 진짜 살아계시는 여호와께서 나한테 룻이라는 여인과 혼인하게 했다. 이것을 특별한 뜻을 두고 의미를 두는 것입니다.

자 아야기가 길어지니까 다시 여러분들이 지금 이야기 하는 취지를 모르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마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우리가 지금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어떤 분인가 하면 룻과 보아스가 결혼을 해서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는 분이다 그런 뜻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계시다 이 말입니다. 교회 성장하는 것이 그게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그러니까 보통 살아가는 삶이 계시인데 특별한 어떤 그런 게 담겨 있는 거예요. 그러면 11절 봅시다.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가로되 우리가 증인이 되노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12절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 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걸 설명해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마친다는 이야기 두 번이나 했어요.

자, 여기 세 명의 여자들 등장하죠. ‘라헬, 레아, 다말’ 이 세 명의 여자가 세상의 어떤 여자와 달라요. 여기 세 명의 여자는 모두 아기를 못 낳는 여자입니다. 그걸 아셔야 됩니다. 다말은 물론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여자이지만 아기를 못 낳도록 조치를 인간들이 그렇게 한 거지요. 세 명 다 여자가 아기를 못 낳는데 여러분 만약에 아기를 낳았다면 그 아기는 하나님이 낳은 아기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생식 기능으로 낳은 아기입니까?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 때문에 낳은 아기라 말이죠.

라헬은 누구냐? 야곱의 본 처입니다. 사랑했던, 첫사랑이죠. 레아는 뭐냐, 그 라헬의 언니인데 덤으로 보너스로 끼워서 들어 온 여자예요. 그러니까 진짜 여자 차지하기 전에 먼저 언니를 덤으로 하나 끼워줘 가지고 둘이 같이 살아 줘라. 그렇게 해서 이렇게 레아 라헬 두 여자가 만난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두 여자가 아기를 못 낳습니다. 마치 리브가가 아기 못 낳고 그리고 사라가 아기 못 낳은 것처럼. 아기를 못 낳는 여자 같으면 그러면 야곱에게 맺은 하나님의 계시인 하늘의 별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자손이 번창 하겠습니까? 못 하겠습니까? 자손이 번창 할 수 없지요, 아기 못 낳는데. 그렇다면 만약에 야곱에게 아기가 많은 자손이 태어났다면 이것은 누구 자손입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 이 말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아기 못 낳는 여자와 결혼시켜 가지고 하나님이 간섭하사 아기 낳게 해 가지고 그래서 왜 자손을 많이 퍼뜨리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왜 그렇습니까? 단순히 손자가 보고 싶어서? 자식이 보고 싶어서?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럼 뭐야? 하나님은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하나님인 것을 다른 사람에게 계시로 보여주기 위한 목적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게 제 말씀의 결론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있는데서 더 보태주고 있는 것을 더 발전시키는 것. 그런 하나님으로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예요. 그건 엉터리 하나님입니다. 보통 다방하고 그 저 고급 호텔의 다방하고 달라요. 고급 호텔의 커피숍에 가면, 조선 호텔 같은데 저는 안 가 봤습니다만은 그 광고 문안에 보니까 ‘커피 더 먹고 싶으면 더 따라 줍니다’ 뭐 이런 게 있더라 말이죠. 그러니까 다방에서 커피 열두 잔 마실 것 같으면 계속 그 돈 내고 열두 잔 마셨다 말이죠. 계속 따라 주니까. 먹어도 된다 이 말이죠.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현재 가지고 있는 내 자식 내 부모 내 친척 이 사람들이 있는데, 거기다가 복을 줘 가지고 지금 내 친척이 더 잘 되고 더 많이 번성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해서 하나님께 돈을 바치고 십일조 내고 헌금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엉터리 하나님 이예요. 이건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예요. 이건 갓바위 입니다, 갓바위. 이건 거짓된 하나님 이예요.

하나님은 반드시 어떤 일을 하실 때는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겁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야곱한테 결혼시키실 때 아기 못 낳는 여자하고 결혼 시키는 것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아기를 많이 가지느냐 못 가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니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 사고방식을 완전히 때려 부셔버리고 바꿔라, 바꿔라 말이지요. 하나님은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것입니다. 10절을 다시 읽어 봅니다.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취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자. 사도행전 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이 없느니라’ 우리는 생각합니다. ‘하나님, 지금 내 이름으로 가지고 있는 이 집값이 올라가게 하시고, 내 이름으로 가지고 있는 이 땅값이 올라가서 부자 되게 하옵소서 억만장자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은근히 기대 합니다. 하나님은 내 이름이 아닙니다. 우리 이름을 죽이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을 수가 없다는데. 내 이름이 아니다 말이죠.

죽은 자를 이끌어 내는 것은 하나님의 주특기입니다.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것입니다. 내 이름이 아닙니다. 다른 이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이름에는 관심이 없어요. 왜?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일본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데 일본이 이야기하는 홋카이도 저 북쪽에 있는 것은 누구거냐, 거기에는 관심 없습니다. 왜? 우리는 일본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내 이름으로 가지고 있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 캄니다. ‘주여, 주여!’ 캄니다. 여러분 그거 다 엉터립니다. 그거 하나님 아니예요.

하나님은 내 이름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이름부터 시작합니다. 그것이 진짜 하나님 모습입니다. 그저 거 등기이전하세요. 내 자식을 내 자식이라 하지 말고 주님의 이름으로 등기이전 하시기 바랍니다. 내 부동산 내 집을 내 이름으로 하지 마시고 주님 이름으로 등기 옮기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거기에 하나님의 자비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른 이름으로 복 안 줍니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에만 복 주게 되어 있어요. 바로 그것이 진짜 하나님. 그 자격으로 계속 구원하는 거예요.

아기 못 낳는 여자와 결혼했다. 남편 된 입장에서는 참 답답하지요. “여보, 내가 누구고? 내가 당신 애기 못 낳는다고 당신한테 이혼 제기하고 내가 옛날 케케묵은 보수주의자인 줄 아느냐? 내가 그렇게 눈 안 트인 그런 남자인 줄 아느냐? 여보 내가 아기 못 낳아도 내 당신 죽을 때까지 끝까지 당신 사랑할게” 하고 돌아서서는 ‘그저 아들 하나만 주면 좋은데...’ 그러면 여자가 “여보 그러면 씨받이라도...” “조선시대가? 무슨 씨받이, 때려 치와라. 당신 아기 안 낳아도 딸 아들 없어도 내가 당신 사랑할게” 그러나 돌아서선 ‘그래도 자식 있으면 더 좋지’ 우리가 하나님 입장 생각하지 않고 저 아기 못 낳는 여자 왜 저렇게 좋을까? 아, 진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려주기 위함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될 텐데 그게 아니라 내 가족 내 가문을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 ‘아이고, 왜 나를 비참하게 만들지 우리 아버지가 아들 보는 날만 손꼽아서 기다리고 우리 아버지가 지금 연세가 많아 가지고 손자보고 죽겠다는데 왜 아직도 아들 없지’ 우리는 자꾸 그것을 자기 기초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신이시여 도우소서’ 자꾸 그런 식으로 기도한다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기초로 해서 시작하지 인간들이 자기를 중심으로 한 일은 하나님께서 그걸 개입 안 하고 그것을 부숴버리고 파괴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제가 다말, 라헬, 레아 이야기를 한 거예요.

끝으로 다말 이야기할게요. 끝으로 세 번 나옵니다마는. 다말이야기 할게요. 다말은 유다가 이 다말이라는 며느리를 쫓아냈어요. 왜 쫓아 버렸나 하면 행실이 나쁘다고. 사실 행실 안 나빠요. 그런데 그 다말이라는 며느리 와 가지고 집안의 아들 둘 다 죽었습니다. 아들 죽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이 못 되게 해서 죽였는데 그 시아버지는 그걸 누구 탓으로 돌리는가 하면 며느리 탓으로 돌리는 거예요. 며느리 니가 나빠서 우리 집안 잘못됐다. 아들 하나 있지만 니하고 결혼시키면 또 망하겠다싶어 쫓아냈습니다. 쫓아냈는데 다말은 그렇지 않아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유다한테 하나님은 없는 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데서 살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조치로서 당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나 유다는 아직 그런 시근 없습니다. 그렇게 있는데 유다가 내려오니까 그 다말이 창녀로 변장해 가지고 시아버지하고 같이 관계를 맺었습니다. 관계를 딱 맺어 놓고, “얼마고? 지금 네 오만 원이가, 칠만 원이가?” “칠 만원 오 만원 치와 뿌고 도장과 지팡이나 주이소” “참, 별난 뭐 창녀 다 있네. 그래 가가라” 이렇게 하고 딱 달아났거든요. 이렇게 달아 놓고 나중에 임신을 했다구요, 임신을. 임신을 해놓고 나중에 시아버지 하는 말이 “우리 집안에 가문을 더럽히려고 세상에 며느리가 온 동네 다 우리 가문에 먹칠한다고. 죽여 버려라. 그것도 그냥 죽이는 게 아니고 불에 태워 죽여라” 이렇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어요. “니가 이렇게 행실 나쁜 줄 내가 진작 알았다. 니가 이렇게 못된 줄 내가 처음 알았다. 그러니까 대체 어느 놈이 너한테 이런 아기를 배게 했노? 이 아이 아비가 어느 놈이고?” “이 사람인데요” 하고 지팡이와 도장을 내놨어요. 그러니까 으악 하고 고함지를 수밖에 없어요. 왜? 자기가 그 아기 아버지가 된 거예요.

자 그렇다면 왜 이렇게 황당하고 난처한 부끄러운 마치 성인소설에나 나올 이야기가 왜 거룩한 성경에 왜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인간들이 평소에 상식 수준에 가지고 있던 그 하나님의 관점이 너무나 잘못 되었다는 거예요. 우리가 저 더럽다고 욕하는 그 죄인이 사실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 때 시아버지가 하는 말이 “너는 옳고 내가 나쁜 놈이다. 네가 나보다 더 옳다” 하면서 그 아기를 후대에 아들로 올린 거예요. 그러니까 그 가문에서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겠습니까? “아이고 꼬라지 좋다. 며느리하고 관계해가지고 세상에 그 아들을, 우리 같으면 수표 한 장 해가지고 야, 쉿! 니 입 다물어. 우리끼리만 아는 거야. 그래 큰 거 두 장, 너 미국에 이민가라” 라고 솔직한 자기 선에서 처리할 텐데. 그런데 오히려 그 며느리를 자기 아내로 삼고 그 자식을 자기 자녀 삼는 이유가 뭡니까? 그 며느리, 그 장자가 바로 하나님의 계시의 흔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다. 이것이 참된 하나님 이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자 그렇다면 진짜 네 번째로 마지막으로 결론내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선 여러분의 죄 때문에 죽은 다말입니다. 행색 나쁜 창녀 다말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합니까? 부끄러워합니까? 여러분 생각에 “아이고 목사님 뭐 신자치고 다 자랑스러워하지요” 여러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자랑스러워한다 이 말은 ‘나는 얼마나 나쁜 놈인지 예수님이 내 대신 돌아가실 정도로 나는 멍텅구리고 나는 사악한 놈이고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다’라는 그것을 자랑하는 것과 동일한 상황 이예요. 십자가를 믿는다 이 말은 예수님이 살아계신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 박혀서 피 흘리신 그 십자가를 자랑한다 이 말은 그 정도로 난 쪼다며 나는 얼마나 큰 죄인인지 나는 유다인지 다말 같은 죄 없는 예수님이 내 대신 돌아가셨다 그것을 자랑하고 자기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찾습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찾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십자가를 통해서만 비로소 인간은 죄인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통한 그 분이 진짜 하나님이지,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찬양했던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온유하시고 그런 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은 이 땅에 어떻게 있었어요? OOOO하나님을 사람들이 오해해 가지고 죽이고 말았어요. 우리는 죽어 넘어진 그 하나님을 진짜배기 하나님으로 이 시간 다시 한 번 가슴 속에 받아들입시다. 받아들이는 동시에 나 때문에 죽었던 처참한 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읍시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교회에서 지 자랑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머리되신 그 오징어 머리되신 예수님만 자랑하며 우리는 거기에 딸려가는 열 개의 오징어 다리로서만 족하면서 항상 머리되신 예수님만 보여주는 것, 이것이 진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살아가는 보통 삶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여자를 그리고 대가 끊어질 수밖에 없는 룻을 이렇게 붙여준 것은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사라를 발견케 해주시고 이 죽어야 마땅하다는 지옥가야 당연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해서 우리 자랑하지 말로 지옥가야 되는 우리를 위해 대신 죽고 십자가 피 흘리신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자랑할 수 있는 거듭난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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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506건 중 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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