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2장 10-12절 제목: 성도의 승리22.231.1.74/~woorich1/성경
계 12:10-12 (성도의 승리)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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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7-03-25 13:23
성도의 승리
2007년 3월 25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2:9-12
(계 12: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계 12: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계 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계 12: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러한 안목을 가지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읽고, 보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세상을 해석해 내어야 할 성도들이 도리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되지 못해서 안스러워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에게는 적이 있어야 합니다. 적을 잃어버리면 사명감도 잃어버립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때에 악마와 싸워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교인들은 자신이 싸울 적을 두지 않고 두리두리 사이좋게 지내고자 하는데 열중합니다. 구약 성도들의 특징은 그들이 메시야를 고대했다는 겁니다. 메시야란 하늘과 땅 사이의 중보자를 의미합니다. 나에게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말은 곧, 나 이대로는 도저히 하늘 나라에서 볼 때에 희망없다는 말이 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모였다하면 메시야 이야기가 화제거리였습니다. 메시야가 곧 오신다는 겁니다. 요즈음 같이 각자 자기 자랑하기 위해서 모인 자들이 아니라 메시야 중심으로 뭉치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들이 메시야 오심을 고대한다는 것은 이미 이들은 나름대로 ‘길을 나선’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길을 떠난 자들입니다. 다시 돌아갈 고향이 이들에게는 더 이상 없습니다. 자기 아비의 본토, 친척 집을 떠난 아브라함도 다시 돌아갈 고향을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자신이 객이요, 나그네요 이방인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돌아갈 곳은 두고 온 고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장만해 놓으신 하늘 나라 성입니다.
한 번 길을 떠난 길손은 두 번 다시 뒤돌아봐서는 아니됩니다.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자는 하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왜 남들이 다 좋다고 여기는 이 세상을 떠나고 싶어할까요?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9:23-25에 보면,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을 대하게 되면 차마 꿈과 희망에 부풀어있는 어린 청소년에게 읽어줄 수 없는 구절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너무 폭력적이라서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이 세상에서 유황불로 싹쓸이 된다는 안목으로 세상을 보는 길손들이 두 번 다시 자기 고향을 그리워하겠습니까? 미련없이 앞만 보고 좁은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도를 이 세상의 귀신들은 가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어떻게하든지 메시야의 관계를 끊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메시야에 대한 원망과 미움입니다. 일곱 귀신이 들어간 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끊임없이 불평과 원망을 털어놓게 됩니다. 즉 “당신을 잘 믿어 죽어서 좋은데 가겠다는데 당신이 나의 신앙에 도움되는 식으로 후원해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보다 잘 믿어보겠다고 열심내어보지만 예수님 당신이 내 사업과 내 건강을 뺏아갔기에 나도 더 이상 예수님을 안 믿기로 했다”라는 식으로 원망합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은 예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한 고난도 받기 위해서”랍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참 성도는 어떻게해서 예수님을 원망하지 않고 죽기까지 복종할까요? 봄 철에 파릇파릇 밭 이랑에서 쏫아나오는 냉이나 달래랑, 쑥갓이나 고사리 순 같은 것은 아주머니들에게 유혹거리입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조금만 캐겠다는 의지로 조금씩 캐나가지만 그 옆에, 그 옆에 계속해서 뽑아날 냉이가 보인다면 한정도 없이 쪼구려 앉아서 냉이 캐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사랑에 이끌리는 사람들은 남들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고 매시야의 미리 용서하심에 매료되어 계속해서 그 사랑의 깊이를 더해갑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에게 푹 빠지는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 남들이 죽인다고 협박해도 개의치 않고 푹 빠지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 속에 귀신으로 가득차 있는 자들은 자꾸만 메시야에게 원망하는 식으로 나아가지만 참된 성도는 갈수록 예수님의 사랑에 더 깊이 빠집니다. 이것은 자신이 중보자 없이 도저히 못살겠다는 사실을 갈수록 더욱 절절하게 느끼게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나아만 장군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아람나라의 군대장군이었습니다. ‘존귀한 자’라고 성경에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그 존귀한 자가 졸지에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우리는 손톱에 가시가 박혀도 예수님에 대해서 온갖 원망의 소리를 다 내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일시적인 병이 아니라 평생을 결정짓는 병이 들었을 때 얼마나 자기를 만든 신을 원망했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잡혀온 작은 소녀의 말을 듣고 엘리사 선지자를 만나려갑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아예 그 나아만 장군은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엘리사에게 있어 세상적인 존귀함이란 그저 그 사람의 자존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몸을 담그라고 합니다.
처음에 엘리사는 그 제의를 거절합니다. 자기 나라의 강물이 아무래도 요단강보다는 더 깨끗해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하들의 강권에 의해 그 강물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나았습니다. 그는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이 내리시는 사랑의 능력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인간의 행함과 흥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참된 성도는 자기 자신을 압니다. 악마는 원래 하늘 나라에게 하나님 옆에서 인간들의 죄를 낱낱이 밝혀내어 고소하는 임무를 맡은 천사입니다. 선악과에 대해서 전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 인간이 스스로 알고 있는 양심의 가책보다 더 철저하게 우리의 죄를 드러내는 일을 하던 천사였습니다.
그런데 그 천사는 어느날 하나님에게 대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갖고 있었던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해서 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인해 무조건적으로 죄인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그는 납득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악마는 자신이 품고 있는 그 심성으로 오늘날 우리들의 영혼을 들쑤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자들로 하여금 양심에 준해서 메시야의 관계를 청산하고 끊고자 합니다. 자립해서 인단답게 떳떳하게 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사랑에 반기를 들어라는 겁니다. 바로 이 악마의 오늘날 성도의 적입니다. 이 적을 놓치지 마세요. 적을 모르면 십자가 의의도 모르는 법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평생 다가도록 악마의 정죄로부터 우리가 용서받았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