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9;1-4/슬픈 아리엘
슬픈 아리엘 2007년 2월 7일 본문 말씀: 이사야 29;1-4 (사 29:1) 『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의 진 친 성읍이여 연부년 절기가 돌아오려니와』 (사 29:2) 『내가 필경 너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니 네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 (사 29:3) 『내가 너를 사면으로 둘러 진을 치며 군대로 너를 에우며 대를 쌓아 너를 치리니』 (사 29:4) 『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며 네 말소리가 나직히 티끌에서 날 것이라 네 목소리가 신접한 자의 목소리 같이 땅에서 나며 네 말소리가 티끌에서 지꺼리리라』 이 세상의 모든 국가나 민족은 있은 데서 생겨난 국가들이고 민족들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습니다. 없는데서 생겨난 나라요 민족입니다. 이 세상의 나라들은 소위 씨족 중심으로 처음 형성됩니다. 씨족 사회가 부족 사회가 되고 부족 사회가 부족 국가가 되어 고정된 왕 혈통이 정해지면 그것으로 왕국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은 그 구성원들의 혈족의 가치를 보여주기 위한 나라들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말씀에 의해서 새로 생겨난 나라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언약’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동행하십니다. 그래서 만약 이스라엘이 비언약적으로 나가면 그 이스라엘은 언약에 준해서 반드시 망해야 하는 겁니다. 비록 나라는 망하지만 언약은 더욱더 생생하게 그 위력을 온 세계에 나타내게 됩니다. 이 점은 오늘날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신약 시대의 성도는 하나님과의 계약 상대자가 아닙니다. 성도를 위해서 나서시는 계약자가 따로 계십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성도의 입장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등장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도에게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 성도를 대신한 일생과 공로를 갖고 계신 예수님께서 친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나서시기에 우리 성도는 그 분의 ‘대신’하시는 공로로 구원되는 겁니다. 즉 홀로 인생을 살아가야 되는 그런 성도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반드시 예수님께서 대신 책임을 지시는 인생을 살아가는 그런 성도만이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자신의 책임지고 해결해야 하는 그런 자는 성도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요한일서 2:1에 보면,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스스로 자기 인생을 책임져야만 하는 인간보다 더 불쌍한 존재는 또 없을 것입니다. 즉 대언자가 없이 사는 인간들은 아무리 호사스럽게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을 일생을 보내는 자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자기가 하는 기도와 헌신과 노력의 효력을 의지하고 사는 자들도 불신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참된 성도는 자신을 믿는 자가 아니라 ‘우리의 대언자’를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 분 예수님만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표하는 대언자이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뭘해도 예수님의 공로로 돌리게 됩니다. 소위 남들 보기에 잘 된 일도 주님의 공로이고, 남들 보기에 망했다는 사태가 일어나도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나라가 되라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리엘이란, 예루살렘의 별명입니다. 하나님의 용맹을 드러내는 도성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크게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오해란 다름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한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즉 자기네들이 품고 있는 욕망이나 소망이나 소원이나 기대감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언약을 잘못 해석하는 이유는, 육적인 안목을 가지고 해석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원래 하나님의 언약이란 인간의 죄와 관련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약을 접하면서도 자신의 죄를 먼저 고려하기는 커녕 자신의 소원과 욕망의 성취를 먼저 고려하기 마련입니다. 즉 예루살렘이라는 도성이 자신들이 기대한 행복의 조건을 위해 존재하는 도시로 여기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있는 줄로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죄와 관련되어 나타납니다. 인간의 죄를 들추어내고 보여주는 것이 언약의 위력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자체가 언약의 이런 위력을 보여주기 위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중심부인 예루살렘이 적으로부터 무너지도록 조치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있는 그것으로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설마 중심이 무너질 리가 있을 것이라고 경솔하게 설쳐대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입장에서 보면,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중심적 가치를 지닌 곳은 없습니다. 인간들은 각자 자신이 살고 있는 그곳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중심 센터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치 오늘날 교회마다 한결같이 자기네들 교회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중심지라고 선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이런 생각들이 육적으로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을 이해하니 생겨날 현상들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기적으로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결코 망하지 않는 그런 도성 안에 놓여있다고 자부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육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여전히 자아를 신과 교제하는 중심센터로 인정하고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의 일을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홀로 다 하십니다. 요한복음 6:37-39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목사가 열심히 심방한다고해서 택하지도 않는 인간이 구원될 리가 없고, 또 택한 백성이 심방하지 않았다고 구원 안 될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목사에게는 자아의식이 강렬하기에 마치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 구원될 자가 구원되어야 하는 것처럼 여길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소위 목회에서 오는 염려와 불안과 걱정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은 차라리 주님이 친히 하시는 일을 훼방하는 식이 됩니다. 목사는 구원에 근심할 입장에 있지 못합니다. 목사가 목회에 대해서 근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마치 자기 일처럼 착각을 일으킨 경우 뿐입니다. 즉 자신이 하는 일에 스스로 보람을 자기 쪽으로 회수하고, 그 성과로 즐거워하겠다는 의식이 결국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을 휘젖은 셈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 한복판이 마치 폭격하듯이 주위의 군대들을 동원하시는 것처럼, 오늘날 성도들의 마음 가운에 구멍을 뚫는 천공작업을 쉬지 않고 하십니다. 쓸데없는 염려와 걱정은 모두 ‘나’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사람이 ‘나’ 중심으로 생각하면 그 ‘나’로 인하여 반드시 타인과 비교하게 됩니다. 그리고 타인만이 아니라 시간대별로 과거의 자신이나 혹은 미리 고대해보는 화려한 자아의 미래상과 현재 모습을 수시로 비교하게 됩니다. 거기서 자아의 가치를 결정지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의 대언자, 우리의 대신 책임지시는 구속자의 가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복음의 가치가 훼방하는 원수로 살지 맙시다. 주님께서는 필요에 따라 우리 마음 한가운데 구멍을 뚫으시되 때가 되면, 그것조차 하나님의 일관된 책임 담당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런 영적인 안목으로 성경을 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욕망 달성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죄와 관련된 하나님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