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8:9-13/추가된 방언
추가된 방언 2007년 1월 10일 본문 말씀: 이사야 28:9-13 (사 28:9)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뉘게 지식을 가르치며 뉘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사 28:10)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사 28:11)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사 28:12)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사 28:13)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로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게 하시리라』 사람은 궁극적으로 자신만은 배반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마저 배반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베드로는 자신만큼은 포기하지를 않았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들이 신의 이름으로 정신적으로 도배하다시피 뒤덮고 살아도 툴툴 털어버릴 경우를 당하면 끝까지 남는 알갱이는 결국 ‘나’라는 자기 덩치 뿐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의 본성은 너 나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그러합니다. 구약 이스라엘 나라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바입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이 그들에게만 주어졌을 때, 그들은 특권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유일한 제사장 나라, 복의 나라는 자기네 이스라엘 뿐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또한 그렇게 믿고 지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에 원하는 바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망할 줄은 그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이스라엘의 전 역사는,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도배를 해도 결코 하나님이 원하는 천국을 이룰 수 없고 멸망하게끔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로서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론하고, 하나님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시킬 때, 인간은 궁극적으로 오로지 자기에게만 충실하다는 그 심성으로 해석하기에 정작 그 말씀의 본 뜻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식으로 해석을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거짓 설교자에 의한 거짓 신학이 유다 나라 전체에 난무하여 멸망을 자초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바입니다. 사람이란 최종적으로 어디까지나 자기 편이 되기에, 귀한 하나님의 예언이나 계시도 자기를 좋게 하는 식으로 해석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타고난 인간의 본성입니다. 성격이 유발나게 악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현상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러합니다. 따라서 엉터리 설교자에 의해 유포된 하나님 말씀이 대중적으로 환영을 받고 환호를 받고 ‘아멘’ 소리로 화답받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당연히 일어나는 일이 됩니다. 사람이란 자신의 찬양해주고, 옹호해주고, 높여주는 덕담은 그 말씀을 누가 했느냐에 개의치 않고 대환영해 줍니다. 갈라디아서 1:10에 보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멸망당해야만 하는 유다 나라 내부에서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나 듣는 자가 아무 좋은 화합된 분위기 가운데서 반대없이 화기애애 한 것은 서로가 자기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기에 분주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분위기에 대해서 참된 선지자 되시는 이사야는 가차없이 그들의 허구성을 지적합니다. 아무리 자기네들 끼리 ‘아멘’, ‘할렐루야’로 화답해도 하늘의 하나님께서 해석하시는 바에 의하여 인간들의 해석은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마치 ‘쏼라 쏼라’하는 이방민족의 뜻없는 사투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낫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이 일을 가지고 인간들은 구구절절 자신을 배반하지 않는 자기 위주의 해석을 내놓기 마련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 인간의 고통스럽게 감당해야 하는 만 가지 질병을 낫게 하려 하십니다’라고 단정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8:17에 나오는 말씀인, ‘우리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 지셨도다’라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십자가 사건을 진정한 의의를 염두에 두시고 예언조로 일으키신 사건으로서,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병이나 일들은 인간이 지은 죄로 인해 일어난 병이요 일들이기에, 십자가 희생이 성공적으로 성사되면, 예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게는 두 번 다시 눈물도 없고, 아픈 것도 없고, 죽음도 없는 세계로 합세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똑같은 말씀을 놓고서도 자신을 궁극적으로 배반이 불가능한 인간성을 보여주는 자가 해석해 버리면 이렇게 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드리는 기도의 효험과, 능력을 인정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제가 바라기는 병을 고칠 때마다, 내가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 맞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되는 순간이기를 빕니다”라는 식이 됩니다. 즉 예수님이 귀한 것이 아니라 그 예수님을 믿어주는 나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 이것이 바로 유다 나라,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으로부터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로서 가미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망할 수 밖에 없는 이스라엘에 특별히 말씀을 먼저 주신 것은, 천국이란 일체 인간의 공로가 섞일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즉 천국은 곧 인간의 공로가 일체 가담될 수 없고, 순전히 예수님의 공로만이 존재하고 넘쳐지는 세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천국 속으로 인도함을 받으면서, 말씀에 대한 다음 두 가지 작업의 대상이 됩니다. 첫째는, 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오해할 수 밖에 없는가 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유다가 멸망했다고 해서 말씀 성취가 도중에 멈춰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비록 인간은 실패할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자기가 내세운 말씀을 책임지고 성취해 나는 식으로 역사는 진행됨을 알리시는 겁니다. 그 증거가 바로 오늘 본문 말씀 속에 담겨 있습니다. 망해야 하는 유다 나라 내부에서 설교자들인 사람들이 듣기 원하는 내용을 담아 제멋대로 해석해서 자기네들 끼리 의사소통을 유지하지만, 바로 그런 유다 나라를 가차없이 쳐들어와서 굴복시키도록 하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유다 나라를 쳐들어온 앗수르 나라의 설교자들이, 유다 설교자들과 대중들을 희롱하듯이 같이 ‘쏼라 쏼라 ’하면서 도저히 못 알아 듣는 식으로 설교를 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것은 신약 시대 특별한 오순날에 성령의 초자연적인 현상이 주어지면, 성도들은 모두 한결 같이 기존의 유대 정신을 공박하고 부끄럽게 만드는 방언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젊은 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 이들은 꿈을 꾸고, 자녀들은 예언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방언의 내용은 모두 한 공통점으로 모아지게 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구원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 내용이 천국 안에 적용되는 원리와 일치됩니다. 왜냐하면 천국에는 일체의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사람은 못 들어오는 새로운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만이 천국 입성을 가능케 하는 ‘새언약’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로서 모든 성경 해석을 할 수 있어야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늘 주님은 배반하지만 우리 자신은 배반할 줄 모릅니다. 바로 이런 죄악을 피로서 덮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