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강-예루살렘에,대한,공격(왕하21장10-18)-2ki010527
37강-예루살렘에,대한,공격(왕하21장10-18)-2ki01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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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예루살렘에 대한 공격 (왕하 21:10-18)
21:10 여호와께서 그 종 모든 선지자들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21:11 유다 왕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케 하였도다
21:12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제 예루살렘과 유다에 재앙을 내리리니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21:13 내가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합의 집을 다림보던 추로 예루살렘에 베풀고 또 사람이 그릇을 씻어 엎음 같이 예루살렘을 씻어 버릴찌라
21:14 내가 나의 기업에서 남은 자를 버려 그 대적의 손에 붙인즉 저희가 모든 대적에게 노략과 겁탈이 되리니
21:15 이는 애굽에서 나온 그 열조 때부터 오늘까지 나의 보기에 악을 행하여 나의 노를 격발하였음이니라 하셨더라
21:16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유다로 범하게한 그 죄 외에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가에서 저 가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
21:17 므낫세의 남은 사적과 무릇 그 행한바와 범한 죄는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1:18 므낫세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궁궐 동산 곧 웃사의 동산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영광의 주를 뵈려고 주께로 가야 되는데 저희들 마음 속에 무거운 것들이 있다면 이 시간 그 무거움을 제거해 주시고 깨끗하고 빈 마음을 가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세상을 살 때에는 사람만상대하고 사람들하고만 좋게 지내면 만사가 다 O. K 인데 성경을 보면 사람만 만나고 사람만 다루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대단한 심적인 부담을 갖게 됩니다. 사람 다루는 것은 제법인데 하나님과는 사람 다루듯이 가지고는 못 논다는 것 때문에 은근히 부아가 나기도 합니다. 차라리 하나님과 안 만나고 따로 놀 수 없을까 하는 상상도 해 봅니다. 사실 요모조모 따져 봐서는 인간이 인간을 만나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기죽을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서면 우리는 모든 기를 접어 넣어야 합니다. 자존심이 무너지는 거죠.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서면 모든 것이 부족하기 마련임을 우리가 느끼니까요.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 안 보이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생기지요. 사실 교회 안가면 지옥 간다는 협박만 없어도 구태여 억지로 교회 나올 이유가 없지요.
우리 장로님 기도하시면서 모든 게 컬컬하고 답답하다고 하셨는데 사실 성경대로 하면 이 세상은 껄끄러울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엉망진창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그 한도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모든 게 혼란스럽지요. 교회라는 곳도 마찬가지이고 나라꼴도 실망스럽습니다. 돈 있는 자만 설쳐대는 판국은 못 봐 줄 정도입니다. 모든 게 더럽고 껄끄럽고 답답합니다. "원래 세상은 이런 곳이야" 하고 마음을 포기하고 사니 그나마 살 수 있지 그렇지 않고서는 잔뜩 기대를 하고 사면 힘이 들어 못살 곳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비정상이다'는 점이 도리어 세상답습니다. 성도는 세상의 더러움에 너무 신경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느 근거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가 하면 지금 오늘 본문 므낫세라는 왕이 통치하던 시절도 오늘날 못지 않게 더럽고 답답한 지경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거기에는 선지자들도 있다는 점도 사실입니다. 이들 참 선지자들은 결코 안 껄끄럽습니다.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모두다 깔끔합니다. 신선합니다. 온통 사람들이 더럽게 살아도 참된 선지자는 또렷하게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 우리도 이런 식으로 살면 되잖아요. 우리는 세상에 깊이 연연하다보니 기대치에 못 미쳐 세상이 더럽다고 불평을 하시는데 세상 더러운 것을 비판하지 마시고 "이 더러운 세상에 이토록 깨끗하게 사는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도 다 있구나 아이구 반가워라 참신해라"라는 쪽으로 보자는 겁니다. 여름에 온 나라가 무더워도 그 가운데 있는 얼음 공장만큼은 춥듯이 더운 날씨를 마냥 탓해봤지 소용없고 얼음공장에 기대를 가지고 얼음 공장의 일관성 있음에 감탄해야 합니다. 이 쪽이 더우면 더울수록 저쪽의 시원함은 보다 완벽한 시원함으로 확 다가오죠.
우리는 선지자들이 활동하는 오늘 본문 말씀을 소낙비처럼 듣자는 말입니다. 선지자들이 하는 일은 어떤 일이고 하면 천사와 같은 일을 합니다. 여기서 제가 천사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창세기19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라는 성이 있었습니다. 그 성에 천사 두 명이 나타났습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목사님, 이 현대 문명 시대에 천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따지고 싶지요. 그러나 성경에 있다는데 전들 어쩌겠습니까? 그냥 사람들끼리만 살면 좋겠는데, 그리고 놀랠 일이 없는데 난데없이 천사가 불쑥 등장했었습니다. 이 비슷한 경우로 민수기에 보면 당나귀가 말을 합니다. 믿을 수가 없지요, 그러나 말을 했다고 성경에 나오는 걸 어쩌겠습니까. 여러분, 신선하지 않습니까? 당나귀가 말을 하고 천사가 나타나고 별난 일도 있군요. 천사가 나타났다는 말은, 답답한 입장에서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답답한 세상의 허점과 한계를 발췌해 내는 것은 이 세상을 경영하는 정치가들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사까지 찾아낼 능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신앙 인이라면 이 껄끄럽고 답답한 세상 속에서 천사들을 아울러 인정할 수 있고 그 천사들의 말도 아울러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 신선한 마음이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이란 바로 세상 더러움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남이 못 믿는 것까지 신선하게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천사가 이 땅에 왕래했다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왔을까, 혹은 와서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에 귀 기울 릴 줄 아는 것이 신앙이에요. 오늘날 흔히 교회에서 신앙이라면 바르게살기, 착하게 살기, 사람답게 살기, 부모 효도하며 살기, 구제 많이 하며 살기, 어려운 사람 돌보기 같은 것으로 몰아 놓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신앙도 아니요 신앙의 열매도 더더구나 아닙니다. 그런 것은 가정교육을 잘 받아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자 여러분에게 간단히 문제를 하나 내어 드리겠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만약 어떤 사람이 산에서 태어나서 아무도 만난 적 없이 산에서 혼자 살다가 결국 산에서 죽은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 사람, 죄지었습니까 안 지었습니까? 흔히 생각하면 그 사람 죄 지은 적 없다고 하시겠지요. 그럼 그 사람 천당 갈 수 있겠네요? 그 사람에게는 십자가도 필요 없고 복음도 필요 없고 천사의 이야기도, 선지자도 필요 없겠네요? 이게 사실이면 우리도 산 속에 들어가서 가만히 있으면 천당 갈 수 있겠네요?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가를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이유는 어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죄인이다 는 점을 공론화 시키기 위한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달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건강한 자 때문에 온 것이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건강치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애초에 신앙이 없는 사람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맨 날 하는 소리가 "목사님 저는 착하게 살려고 지금도 애쓰고 있는데요"하는 식입니다. 이런 사람의 어른은 차라리 산 속에 홀로 태어나서 혼자서 살다가 홀로 죽은 그 사람입니다. 이게 바로 비 신앙이고 불 신앙입니다. 마귀가 혼신의 노력을 다 하면서 막고자 하는 소식은 예수님이 죄인을 위해서 왔다는 소식입니다. 그리고 악마는 인간에게 긍정적 사고 방식을 심어줍니다. "너만큼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어 가능하단 말이야!" 즉 신앙 없이 살아 봐 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 들어가면 므낫세 왕이 악한 일을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악한 일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나쁜 짓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이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12-13절을 보면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제 예루살렘과 유다에 재앙을 내리리니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내가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합의 집을 다림보던 추로 예루살렘에 베풀고 또 사람이 그릇을 씻어 엎음 같이 예루살렘을 씻어 버릴찌라"라고 하나님의 징벌에 대해 언급해 놓았는데 므낫세가 지은 죄는 한 마디로 말해서 우상숭배입니다. 우상 숭배란 무엇인가? 왜 우상을 자기 옆에 두는가 하면 자기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 둔 거예요. 우상이란 우상을 신봉하므로 서 내가 진정 누군 지를 잊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본질을 감추는 한 방식이 곧 모든 우상 숭배의 특징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들은 저 교회 문만 나가버리면 이상스럽게 하나님을 잊어버리지요? 주님 생각이 안 들지요? 왜 그런고 하면 교회 안에 들어 왔을 때는 반강제적으로 내가 누군 지를 말씀을 통해서 일러주는데 교회밖에 나가면 사람만 만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은 자연적으로 못 보게 됩니다.
우상이라는 것은 뭐냐? 내 자신을 못 보게 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내 자신을 심도 있게 말입니다. 내가 어느 정도 엉망인지 못 보게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 많다고 한다면 많은 돈에 정신이 팔려서 그것으로 인해 나의 본질을 잊어버립니다. 내가 얼마나 썩었으며 왜 내가 죽어야 하며 내가 왜 주님 아니면 지옥가야 하는지를 그 많은 돈으로 인해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이게 세상에서 사람 사는 풍경들입니다. 이처럼 여러분 자신을 감추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교회 문 앞에서 여러분들을 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바로 이런 점을 획기적으로 지적하고 전환하는 놀라운 내용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저는 마태복음 16장 16-18절을 잘 많은 감동을 받습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여러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말을 베드로의 자기의 능력으로 할 수 있었습니까? 그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은 뭐라고 하더냐 라고 물었습니다. 그럴 때 제자들은, 사람들은 이러쿵저러쿵 합니다 하고 반응을 소개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계속 묻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할 때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이 정도만 해도 얼마든지 베드로를 칭찬할 수 있겠는데 말입니다. 즉 "베드로야 너 참 대단하구나" 이렇게 되어야 정상인데 그 뒤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닙니다. "그것을 알게 한 것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다"라고 하십니다. 자... 이렇게 되면 베드로는 그만 무능력자, 곧 바보가 되는 겁니다. 비로소 자기 주제 파악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십 년 교회 다녀서 이것을 알았다든지 내가 20년 교회 다녀서 이걸 알았다든지" 하는 식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자는 아직도 신앙 안으로 못 들어온 사람입니다.
"이 세상을 보면 정말 답답하고 껄껄하고, 또 내 자신을 봐서도 한심스럽고 답답하고 껄껄하다"고 내뱉어봅니다. 자, 사실이 그렇다고 해서 뭘 어쩌겠다는 말입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착하게 살고 최선을 다하여 바르게 살면 천당 간다? 이건 신앙도 아닙니다. 신앙이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아버지가 여러분의 마음 속에 쏙 집어넣어 주신 게 있어야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더럽고 껄껄하고 답답하고 나 역시 같이 답답고 더러워도 어떻게 해서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 맞습니다"라는 말이 감히 이런 고백이 튀어나올 수 있을까요? 세상이 이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게 제자 훈련해서 될 문제입니까? 이것이 성경 공부해서 나올 문제입니까? 기도하고 헌금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결과이겠습니까? 이런 것들은 인간의 노력이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므낫세 왕이 정말 나쁜 짓을 많이 했다고 나오면 흔히 안일하게 이 본문을 읽고서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 나는 이런 나쁜 짓은 안 해야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백하시면 신앙이 아닙니다. 므낫세 왕은 바보예요? 하나님을 모릅니까? 그는 우리가 아는 만큼 아는 자입니다. 그럼에도 본인이 최선의 노력을 다해도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 우선인데 어떡하란 말입니까? 우리는 별 겁니까? 므낫세 왕은 곧 우리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므낫세가 아니라 그 므낫세에게 바른 소리하는 선지자들입니다. 이들은 마치 천사와 같은 일을 합니다.
천사들이 소돔과 고모라에 나타날 때에 마을 사람들이 낯선 사람이 나타났다고 많은 불량배들이 손 좀 봐 주겠다고 시비를 걸고 나섰습니다. 그 때 롯이라는 아저씨가 천사 둘을 자기 집으로 피신시켰습니다. 밖에서 불량배들이 낯선 사람 내놓아라고 행패를 마구 부립니다. 그래서 롯이 불량배에게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나에게 두 딸이 있어 당신들에게 줄 터이니 이 사람들 대신 내 딸을 겁탈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불량배들이 막무가내로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 때 천사가 기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불량배들이 갑자기 눈이 어두워지면서 어느 것이 문인지 분간도 못하고 헤매다가 돌아갔습니다. 그 천사 둘이 롯에게 한 이야기가 뭐냐하면 "이 곳을 떠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니 이곳을 떠나되 단 주의할 것은 절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아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해서 롯은 진담으로 받아질 수가 있었는데 이상스럽게도 롯의 사위는 같은 말을 듣고도 진담으로 안 받아지더라 이 말입니다. 정말 이상하죠.
제가 지금 설교를 하면서 어려운 점이 바로 이런 점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설득시켜 가지고 신앙이 없는 사람을 신앙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내는가 라는 것인데 이 문제는 완전히 이 목사의 손을 떠난 이야기입니다.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지금 천사가 와서 설교를 하는데 어떤 사람은 그 말을 곧이 듣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서도 "내가 손 좀 봐야 되겠네. 혼내어 줄까 보다"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결국 천사라는 것은 이 세상에 참된 신앙이 있음을 전제로 하여 하나님의 참 뜻만 딱 전달하면 임무 끝입니다. 천사가 누구한테 기죽거나 천사가 누구에게 협박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제가 군대를 제대하면서 제일 후회되는 일은, 군의 상관이나 고참들이 사실 아무 것도 아닌 허수아비에 불과한데 그 때 뭐가 겁나고 무서워서 그들의 말에 꼼짝도 못했나 하는 점입니다. 내가 진작 제대 이 기분을 알았으면 마냥 그들에게 빌빌 기지말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바른 소리를 좀 할건데 하는 후회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지자라는 자들이 어떤 존재인가 하면 세상의 그 어떤 높은 인간이든 왕이든 상관치 않고 꿈쩍하지 않고 자기 할 소리 다 하는 사람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도성을 떠나라 불 심판이 일어난다." 라는 말씀 전달에 조금도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롯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라는 게 있으니까 이 천사의 말을 듣고 조금도 겁나지 않고 마음먹기를 "떠나면 되겠네. 끝" 이었습니다. 롯에게는 아주 간단명료한 문제였습니다. 뒤도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롯의 사위는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제가 지금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 말씀이 그대로 가슴에 와 닿는 사람이 이것이 신앙 인입니다. 아무런 주저함이 없고 겁날 것도 없는 기쁨, 이 감정, 이 느낌, 이것이 신앙입니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외과 수술을 하는데 의사와 간호사가 죽이 척척 받아야 일이 됩니다. 의사가 "가위!"라고 했는데 간호사가 톱을 가져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앙이란 빈 서랍처럼 하늘에게 내려준 것이 그대로 착착 쌓여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답답하고 껄끄럽고 컬컬한 이 세상에 아직도 신선하게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려면 이처럼 신선하게 해야 합니다. 아주 시원하게 말입니다. 나 하나라도 자유를 누리면서 나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고백할 수 있는 그러한 당당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미 제대한 사병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이 더러운 세상에서 제대할 때가 있을게 아닙니까. 이게 안되니 우리는 외부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세상이 더럽다고... 하지만 사실 이런 불평, 불만을 누가 유발합니까. 그것은 본인이 믿음이 그러합니다. 그러니까 자꾸 남 핑계대면 안됩니다.
특히 오늘 본문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유다로 범하게 한 그 죄 외에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가에서 저 가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 신앙이 있는 선지자가 이 땅에 살 때는 억울한 죽음도 당 할 수 있고 비난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의 일이 잘되면 하나님께 복 받은 자이고 일이 잘 안 풀리면 하나님께서 저주받았다는 이 말에 여러분들은 절대로 속아넘어가면 안됩니다.
로마서 8:35-37에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저주가 아니다 이 말입니다. 진짜 저주는 본인이 느껴요.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도 은혜도 귀찮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고 싶을 때 그것이 바로 저주입니다. "나는 구세주도 귀찮다"라는 것이 바로 저주입니다. "나는 내 힘으로 살 거야" 라는 것 자체가 저주입니다. 이것이 므낫세의 형편입니다. 신앙이란 곧 주위의 어떤 변화나 상황이나 형편에 대해서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이라는 생각만 나고 그 외 모든 것에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선지자나 천사나 세상의 사소한 일에 신경 쓰는 자가 아닙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질문하기를, "목사님 저는 구원받았는데 너무나도 착하고도 착하고 너무나 잘해 주셨던 우리 어머니께서 예수님을 안 믿고 돌아 가셨습니다. 제가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이 가슴 아픈 것을 어떻게 해결했으면 좋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 사람이 자기 어머니를 생각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착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람은 지금 자기 의로움과 착함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만 알고 나머지에는 미련한 자가 되는 게 좋습니다. 어머니가 어떻게 되든 아버지가 어떻게 되든 거기에 대해 바보가 되시기 바랍니다. 신경 쓸 것도 없는 것이 바보이고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는 것이 바보입니다. 제발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왜 우리는 이렇게 되지 못할까요? 그것은 바로 이런 원리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녁을 집에서 실컷 먹고 왔는데 또 자기 앞에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음식 먹기 싫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의 어머니는 예수를 믿으라는 말을 자식이 했어도 자기 나름대로 자신이 훌륭한 여인이요 지혜로운 여인이요 칭찬 받은 여인으로 인정하면서 스스로 배불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여인에게 다음과 같은 주의 말씀 즉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여인이 바로 므낫세 왕이요 우상숭배자입니다. 아마 신문 펴들고 어지간히도 남 비판하면서 어떤 쾌감 같은 것을 즐겼을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훌륭한데 이 여자는 춤바람 나다니!"하면서 말입니다.
여러분.. 선지자처럼 사세요. 결국 언제 가는 헤어질 것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그 누가 뭐래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면서 바보처럼 남은 생애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너무 똑똑해서 탈이고 양심이 고아서 탈이고 심지어 너무 종교적이고 신앙 좋은척해서 탈입니다. 이 모든 것 버리게 해주시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 앞에 "제가 여기 있나이다"하고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천사 같은 자유로움을 허락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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