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강-남은자,만이,구원(왕하17장7-18)-2ki010318
27. '남은 자' 만이 구원 (왕하 17:7-18)
17:7 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17: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여러 왕의 세운 율례를 행하였음이라17:9 이스라엘 자손이 가만히 불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를 배역하여 모든 성읍에 망대로부터 견고한 성에 이르도록 산당을 세우고17:10 모든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목상과 아세라상을 세우고17:11 또 여호와께서 저희 앞에서 물리치신 이방 사람 같이 그곳 모든 산당에서 분향하며 또 악을 행하여 여호와를 격노케 하였으며17:12 또 우상을 섬겼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치 말라 명하신 일이라17:13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로 이스라엘과 유다를 경계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하고 또 나의 종 선지자들로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17:14 저희가 듣지 아니하고 그 목을 굳게 하기를 그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던 저희 열조의 목 같이 하여17:15 여호와의 율례와 여호와께서 그 열조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과 경계하신 말씀을 버리고 허무한 것을 좇아 허망하며 또 여호와께서 명하사 본받지 말라 하신 사면 이방 사람을 본받아17:16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를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 성신을 숭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17:17 또 자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복술과 사술을 행하고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 노를 격발케 하였으므로17:1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심히 노하사 그 앞에서 제하시니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의의 면류관을 생각해 볼 때에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세상에 무엇보다도 말씀이 없어 목말라 하는 저희들의 심정을 위해 주께서 주신 말씀이 저희들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시간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스라엘 나라의 상황을 알자면 출애굽기 32장에 나타나 있는 사실부터 아셔야 합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라는 분이 시내 산 위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출발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출발은 집안이나, 종족, 부족들이 한데 뭉쳐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혈통으로 다져진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과 맹세하신 그것이 지상에 실현될 때 거룩한 나라로 실현된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 나라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는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작품을 유지하고 이어가는 뼈대가 무엇인고 하면,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았던 율법과 유례와 말씀과 법도가 되겠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날 그 시점에 이미 그 시내산 꼭대기에서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이스라엘 국가 상은 정립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산에 올라가 그 사이에 산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우리가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산 위에서 하나님이 정립하신 이스라엘 나라와 신 밑에서 인간들이 지어낸 나름대로의 이스라엘 나라가 어떻게 틀리는지를 조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라 하나 만들자고 나왔던 자들입니다. 그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사람들끼리 모여서 만든 게 금송아지입니다. 물론 금송아지를 신으로 모시자고 만든 게 아닙니다. 신은 물론 여호와 하나님이지요.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 봐야 하는 것은 그 여호와 하나님을 인간들은 어떤 식으로 모시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곳에서 춤추며 뛰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산밑의 행위에 대해서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하나님의 반응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라고 9절-10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산밑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뛰노는 그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나서서 진멸하고 그 대신 모세로부터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직접 대면했던 '너' 라는 모세의 나라와 모세가 없던 사이에 우상을 만들었던 사람들의 땅과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세 편이 되면 구원받겠고 모세가 산 위에 있을 때 밑에서 엉뚱한 짓을 한 사람은 지옥 가겠구나 라고 간단하게 생각하고 마음먹을 수가 있겠지요.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산밑에 있던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는데 그들이 어떠한 마음과 어떠한 자세로서 금송아지를 만들었는가를 좀 더 자세히 알아 봅시다. 출애굽기 32장 5-6절에 보면,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금송아지를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모르는 자들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여호와를 몰랐습니까? 아닙니다. 여호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온 자들이 누구입니까? 그들 본인이잖아요. 그들은 홍해 강가에서 큰 찬양과 감사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친히 만나와 메추라기를 얻어먹었던 대상들이 그들입니다. 여호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잘 섬기고 모시겠다고 나름대로의 자기들의 마음을 열심히 표했는데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그들에게 진노하시고 그들을 내 나라로 간주하지 않고 지옥백성으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나왔다는 말입니다. 자, 여호와를 아는데도 말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여호와에 대한 감사와 고백을 한다할지라도 하나님 당사자는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인정치 못하겠다 이렇게 나섰다는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나라가 나라답게 된다는 조건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여호와를 알면 되잖아 하고 우리는 쉽게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더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알고 성의를 표해서 찬양과 예배드리고, 여기 보면 뛰논다 했으니까 부흥회를 열고 예배와 제물을 드리고 양을 바치면 되는 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라고 우리는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출애굽기 32장에 8절에 보면 그 이유가 나와있습니다. "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이 본문에 나오는 '자기를 위하여' 가 문제입니다. 산밑에 있는 사람들은 모세처럼 직접 하나님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대단한 분인지 생각도 못하고 그저 오순도순 모여 있는 인간들인 자기네들의 얼굴들이 제일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한 것은 좋다. 그래서 그 좋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를 드리자.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을 위해 것이다."라고 여기는 마음 자세를 가진 거예요.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기 때문에 자기 생각을 할 겨를이 없고 자기 생각에 몰두 할 마음가지도 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 너무나 엄청난 하나님과 독대하고 있으니까 몸둘 바를 모르지요. 그런데 산밑에 있는 이 사람들은 눈에 뜨이는 것이 자기 몸밖에 없잖아요. 자기 형제 친구 친척들뿐이다 는 말입니다. 모두 돌아가며 같은 마음을 가졌는데 그 한 통속이 된 마음이 바로 오직 나를 위한 하나님 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모세가 직접 만났던 그 하나님의 화를 돋우는 진멸 받아 마땅한 엉터리 같은 사고 방식이었다는 것을 성경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우리가 흔히 우상이라는 것은 형체를 가지고 우상이라고 하는데 오늘 본문에 들어가서 보면 9절-10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가만히 불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를 배역하여 모든 성읍에 망대로부터 견고한 성에 이르도록 산당을 세우고 모든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목상과 아세라 상을 세우고"라고 되어 있지요. 하나님이 인간사회를 볼 때에 무엇으로 보는가 하면 '신앙구조'를 가지고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 사람을 보는 것과 다르지요. 하나님이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분석할 때에는 이 인간들이 어떤 신앙 구조 속에 매어서 살아가느냐 그런 쪽으로 접근해 가는 겁니다. "저 신앙 없는데요?"라는 소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16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를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 성신을 숭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 이 말씀의 내용처럼, 우상이라는 것이 송아지냐 곰이냐 가 근본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위하여' 인간은 우상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모세가 없던 산밑의 자리에서 인간들이 금송아지를 빚은 정신과 일치됩니다. 이게 바로 우상의 근원입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를 볼 때에 '나' 라는 존재는 별거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 라는 것이 별거 아님에도 불구하고 산밑의 인간들은, 손에 만져지고 눈에 보이는 것 중에 자기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 없더란 이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최고다 그런 뜻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별로이다' 라는 의식이 곧 '자기를 위하여 우상 만들기'로 이어지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이 신앙 구조상 당연한 일입니다. "나만 챙기면 되지 하나님에게까지 신경 쓰기에 곤란하다"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우상의 시발점이 됩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여러분에게 하게 되면 혹시 여러분은 속으로 생각하시기를, "그렇게 하면 신앙의 수준이 너무 높습니다. 내가 언제까지 노력해야 그 정도 높은 신앙 수준에 다다를 것인가" 라고 할 건데 여러분, 구약 성경을 성의있게 봅시다. 홍해 바다 갈라진 것이 인간의 힘으로 되던가요? 기적이지요. 홍해가 갈라져서 무장도 되어 있지 않던 대군이 아무 힘쓴 것도 없이 탈출에 성공한 것도 기적이고 그 기적 이후에도 계속해서 기적이었어요. 구약 때 홍해 갈라진 것만 기적이 아니라 신약 때 예수님을 만나 뵙지도 못했으면서도 보지 않고 믿는 이 사실도 기적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은총이다 이 말입니다. 기적에 의해서 신앙이 여문다는 생각은 안 하고 자꾸만, 그 정도 신앙이라면 수준이 굉장히 높아야 될텐데 얼마나 신학을 공부하고 얼마나 신앙 생활을 해야 그 수준이 되겠습니까 하고 자꾸만 자기 쪽에서 따라잡으려고 시도합니다. 그런 식으로는 절대로 따라 잡히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 따라 다닌 사람이 어디 한 두 명이었겠습니까. 참으로 많았습니다. 수천 명이나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따라온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열두 제자도 다 도망했습니다. 그 말은 무엇인고 하면 이 몸뚱이로 예수님의 몸체에 백 미터나 오십 미터를 따라 다닐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과 가까이 있은들 예수님이 잡힐 때 무슨 옳은 소리를 했습니까.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인데요.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따라 붙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불쌍한 병든 여인이 예수님의 옷 가를 만졌을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나의 옷을 만졌느냐"고 했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답변이 아주 일색입니다. "예수님, 여러 명이나 만졌습니다. 아예 떠밀었습니다." 그렇지요. 예수님의 육체를 만지고 떠밀고 난리였겠지요. 요즘 말하면 팬들이었겠지요.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고 옷을 만진 자는 그 수많은 무리 가운데 단 한사람이었습니다. 그 불쌍한 여인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기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요즘에는 교회가 많아서 탈 이예요. 교회가 너무나 많으니까 아무 교회에 나가서 적을 올리면 천당 갈 줄 아는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때 교회가 유혹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가 지옥으로 이끄는 큰 유혹거리라고 말입니다. 교회가 우상이라고 한 것은 옛날부터 나온 이야기이고,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교회가 금송아지이고 교회가 바벨탑이고 교회가 매혹거리고 교회는 제 2의 자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를 없애고 난 뒤에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라는 질문에 뭔가 답변 할 게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첫 걸음입니다. 교회를 없애 버리고 교회도 없는데 당신은 무엇을 믿을 거요? 자, 여러분들이 알라스카나 아프리카 오지에 갔다고 칩시다. 그곳은 교회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없는데 당신은 무엇을 할 겁니까. 그것이 신앙에 사실 첫걸음입니다. 교회 없으니 하나님 믿지 말지 뭐.. 그렇게 했던 것이 옛날 애굽에서의 히브리인들이었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다가오기 전에 그들은 애굽이라는 막강한 세속 권력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우상을 믿는 그 나라의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노예 생활을 하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라면 자기 백성을 사람답게 살도록 만들어 주셔야지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느냐"하는 식으로 모세에게 대들었던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그 자리에 주저 앉았던 자들이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전신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거룩한 하나님 산밑에까지 오게 된 것이 무슨 힘이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기적과 기적의 연속적인 이끄심이었습니다. 하지만 내내 그들은 눈에 보이는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광야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저 육체 밖에 없었던 거지요. 그저 모세에게 달려들고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백성들에게 그들이 예상치도 못한 곳까지 끌고 왔습니다. 어디까지? 바로 모세가 하나님을 직접 처음 만났던 곳까지 말입니다.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하나님은 모세와 만났습니다. 그 불타는 떨기나무가 있던 호렙산 밑까지 인도한 겁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은 인도한 자는 정작 모세가 아니라 나 여호와이다"라는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인간을 의지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인간을 의지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모세를 의지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되고 더 나아가서 자신도 각자 의지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나는 별거 아니다 생각을 가지고 말입니다. 여러분이 타인보다 더 귀합니까? 여러분 자신이 고귀해서 교회 나올 것 같으면 교회 나올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보다 더 고귀한 분이 계시기 때문에, 또 그 분의 기적에 의해서 우리가 천국에 간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그분을 보는 것 같이 섬기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온 겁니다. 마치 시내 산 산밑에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시내산 밑에 왔으면 모세를 불러내었던 그 모세가 있는 산 위를 쳐다 봐야합니다. 그곳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고 거기서 무슨 말씀이 터져 나오는지 거기서 무슨 지시와 명령이 쏟아져 나오는지 봐야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산밑의 군중들은 그걸 쳐다보지 않고 나름대로의 여호와를 위한다는 축제를 벌린 것입니다. 산밑에다가 교회 지어놓고 부흥회를 하더란 말입니다. 그들이 금가락지를 빼 내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 헌신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금가락지 빼도 어디까지나 자기를 위해 뺀 것입니다. 앞으로 자기를 위해서 백 배나 더 챙길 것을 생각하고 뺀 것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헌신한 것입니다. 금가락지 빼 낸 만큼 금가락지 세배 네 배를 더 얻고자 하는 자기를 위한 반대 급부를 생각한 거예요. 이것이 장난이지 과연 천국의 본 모습입니까? 개인주의이고 이기주의에 불과합니다. 이런 인간이 혹시 천국에 가게 되면 그 천국은 인간의 공로가 높아지는 세계가 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이스라엘 사회를 인간들의 신앙 구조 차원에서 봤는데 여기에는 한결같이 남 흉내내는 식의 종교성이 전부였습니다. 그들의 신앙 구조 안에는 나름대로의 법칙이 있었는데 남 흉내내기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고 그 사람의 가는 길을 그대로 따라 가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성공했다고 하면 그 사람을 따라가면 자기도 성공하는 줄 아는데 바로 산밑의 인간들의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시내산 계명을 내리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간들끼리는 어떤 차이점도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잘 사는가, 못 사는가, 잘 생겼는가, 못 생겼는가, 그런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중요한 것이지 받는 쪽이 금 그릇인가 돌그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받았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똑같이 보는 거예요. 하나님의 명령이 담긴 자는 살고 하나님의 명령이 담기지 않는 자는 죽고 이렇게 간단한 원리에 의해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산밑의 신앙 구조가 그대로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의 시대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한아름 안겨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율법을 가지고 여전히 자기를 위한 말씀으로만 이해 할 게 뻔합니다. 누가 복을 더 많이 받았나를 경쟁하기 위해 율법을 동원할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심보가 그대로 노출된 채 숱은 백성들은 산당에서 우상 섬기기에 열중이었습니다. 비록 주의 말씀을 지킵니다, 순종합니다 라고 말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자기를 위한다'는 기본 신앙구조가 마음속에 있는 한 그 사람은 우상 숭배자입니다. 이 이야기가 골로새서 3장에 나옵니다. 5절에 보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하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절에 가서 탑돌이하고 조상 제사를 드리는 것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가만히 불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를 배역하여 모든 성읍에 망대로부터 견고한 성에 이르도록 산당을 세우고 모든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목상과 아세라 상을 세우고 또 여호와께서 저희 앞에서 물리치신 이방 사람 같이 그곳 모든 산당에서 분향하며 또 악을 행하여 여호와를 격노케 하였으며" 또 " 자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복술과 사술을 행하고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 노를 격발케 하였으므로"라고 나오지요. 여기에 나오는 복술과 사술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으로 점을 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서울 미아리에 점장이 집이 많고 많지만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지 않았다"라고 버틴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자기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겠다는 것, 답답해서 무엇을 해야겠다는 그 것 자체가 벌써 우상 숭배 인 것입니다. 탐심은 우상 숭배인 것입니다. 서울 교인들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보면 미아리 점장이 집에 교회 집사님들이 그렇게 많이 온다는 겁니다. 물론 자녀 결혼시킬 때 노골적으로 교인 체면에 궁합보고 하는 것은 드물겠지만 혼담이 오고 가면서 뭔가 장래가 알고 싶어 장난삼아 점장이를 찾아 간 답니다. 맞으면 기쁨 두 배이고 안 맞으면 기도 제목이 생기겠지요. 기도 제목이 새로 생기니까 자신의 기도 생활에 자극이 되지 않느냐고 구실을 답니다. 어쨌든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니 이래도 보고 저래도 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일체 사주 팔자 안 보면 그 사람은 신자일까요? 여기 본문 9절에 보면 모든 높은 곳에 산당을 세웠습니다. 마치 갓바위처럼 말입니다. 푸른 나무 아래서는 아세라 상을 세우고, 아세라 상은 부부 신입니다. 바알은 남편이고 아세라는 아내 신입니다. 아세라의 특징은 정성의 강도에 따라서 복이 증가한다는 규칙이 있습니다. 정성을 지극히 바치면 신이 그 만큼 복을 주고 성의가 없으면 그 만큼 주지 않을 거라는 흥정 심리가 바탕이 되어 있어 주고받고 합니다. 그런데 산 위에 모세가 만났던 그 여호와께서는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별거 아니기 때문에 그저 여호와를 증거하고 여호와를 드러내는 그릇으로만 족하지 내가 어떻게 잘되고 못되고는 별 문제가 안 된다는 겁니다. 아까 말했듯이 여호와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똑같은 존재로 여겨집니다. 장애자나 눈먼 자나 똑 같이 인정된다는 거죠.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어떤 봉사가 길을 지나가는데 그것을 보고 제자들이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 질문 있습니다. 저 사람이 봉사된 것이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자기 부모 때문입니까?" 그럴 때 주님의 대답은, "그것은 자기 죄도 아니고 자기 부모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장님 된 사람과 장님이 안 된 나를 차별화 시키고 장님 안된 나는 하나님께 복을 많이 받아서 장님이 안 되었고 저 장님 된 자는 하나님의 벌을 많이 받아서 저러하다 이러한 신앙 구조를 가지기 쉬운데 이 신앙구조가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바로 시내산 밑에서 나온 겁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산밑에서 형성된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봉사한다는 이 말도 사실은 그 봉사의 결과가 자기 이름을 드높이고 자기 영광의 몫을 타인과의 차별지게 얻겠다는 심보라면 우상 숭배자에 해당됩니다. 물론 봉사하는 본인도 섭섭하게 들릴 것이고 봉사된 가족과 친척들도 섭섭하게 들일 것입니다 마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신자나 아니냐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하면 화를 내면서 하나님 믿는 사람은 신자가 아니고 자기 인생에 화를 안 내면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신자라고 생각합니다. 화를 낼 수 있는 자체가 우리에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시편 135편을 보면 "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니 여호와 자신을 위하여 자기 백성을 택했다는 겁니다. 봉사가 되었든 절름발이가 되었든 개인적인 문제, 그건 별거가 아니고 무엇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된 겁니다. 시편 23절은 모두 알지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여기에 봐도 '자기 이름을 위하여'가 나오지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목자가 되신 거예요. 우리의 출세와 영광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런 가르침은 산밑에서 만들어진 우상교회에서나 외치는 설교예요. 우리는 홍해 강가에서 이미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시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죽은 자이고 죽음으로 끝나는 자가 아니라 지옥으로 가야될 자들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이를 갈며 통곡 할 자입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믿음이 아주 좋아서 산 것이 아닙니다. 내 이름보다 더 중요한 이름이 찾아 올 때 그때서 사는 겁니다. 우리의 자존심이 곧 우리 이름이 아닙니까? 내 자존심보다 더 중요한 자존심이 노크를 하고 문을 열고 우리 안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기적의 인생을 끌고 가면 시작되는 겁니다. 우리는 자꾸 하나님을 믿을 때 다른 인간을 비교하면 부러워서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을 도용하고 하나님을 차용하고 등쳐먹는 속성이 있어요. 아가씨들이 미용실에 가서는 여성잡지에 나오는 머리 스타일로 자기도 똑 같이 해 달라고 요구하지요. 성형외과에 가서 성형을 하는 이유도, 이 세상에 자기 혼자서 산다면 다른 사람의 얼굴을 탐낼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얼굴을 뜯어 고칠 이유가 없겠지요. 바로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그 때 자기는 자기에게 관심이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곳에는 자기 밖에 없으니까 남과 비교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오 주여! 라는 감탄사만 나온 겁니다. 모세가 경험했고 체험했던 그 하나님은 거룩한 이스라엘 나라의 출발점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모세가 봤던 그 하나님에 의해서 불림을 받았다는 것 그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 외의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소경이냐 절음 발이냐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나를 불러내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나를 아신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로마서 8장에도 보면,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자를 천사와 같이 영광스럽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참여 된 자가 성도입니다. 그게 신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자가 되고 싶긴 한데 안되어서 걱정이지요 라고 하시겠지만 그것은 기적에 속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것을 다른 말로 나오고 있는데, 1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심히 노하사 그 앞에서 제하시니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인간이 감히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섬기자고 하겠습니까? 인간은 다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다 같은 성품, 자존심, 성깔을 지녔는데, 성품이 아무리 좋아도 건드리면 폭발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인간에게 물어보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누구를 남기는 방식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남기는가? 제거할 자는 제거하고 남기는 식으로 남기는 방법입니다. 무엇을 제거하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로 이스라엘과 유다를 경계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하고 또 나의 종 선지자들로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에도 수많은 선지자나 선견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요. 그러면 그 말씀에 삐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선지자를 욕하는 자도 죽이려고 하는 자도 있을 겁니다. 선지자 추방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런 가운데 웬 은혜인지 기적인지 산 위에서 모세가 들었던 하나님 말씀이 맞다 우리는 그래야 산다 라고 그 말씀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게 기적이고 오늘 본문에 남긴 자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남겨졌다는 이 말씀은, 똑같은 말씀을 들은 데도 불구하고 "맞다 그거야 그것이 신앙이야" 라고 하면서 왠지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무슨 수로 그런 높은 신앙을 나는 못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여기서 제거될 자와 남겨지는 자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이 두 종류 밖에 없으니, 즉 제거 될 사람과 남은 자가 있으니까 한쪽은 지옥이고 한쪽은 천당이 된다는 이 말입니다. 죽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이 지상에서 골라내는 작업을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자를 통해서 실행하시는 과정에 있습니다. 산밑이냐? 산 위냐? 내가 하나님의 도구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내 똘마니이냐? 둘 중에 하나를 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이냐, 아니면 나라는 존재 자체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피조물이냐? 둘 중에 하나 라는 말입니다. 내가 다니던 교회가 불타버려도 혹은 교회가 없는 지역에 가도 천당 가는 것과 상관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없어도 내 마음속에 주님이 살아있다면 그것은 모세요 산 위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오늘 무엇을 해야 됩니까? 내일 되면 또 하나님 오늘은 무엇을 하면 되나요? 날마다 궁지렁 궁지렁 하나님께 물어가면서 살아갑시다. 이 궁지렁을 두 글자로 '기도'라고 하지요.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느냐고 물어가면서,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의 밖에 없으니 주의 의를 산밑에 있는 처소와 직장에서 내가 삶으로서 하나님의 엄연히 존재하심을 저는 증거하는 재미로 살겠습니다. 이것이 탐심이 없는 참된 신앙입니다. 골로새서 3장을 다시 한번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라고 합니다. 여기에 보면, 위에 것과 땅에 것이 분명히 있다고 하며 우리는 죽은 자로서 살아간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땅에 것은 탐심이며 우상 숭배자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도 "이제부터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삶이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시 한번 보게 되면,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사술과 복술과 점을 치고 우상을 숭배하고 그리고 선견자들이 우상 숭배한다고 나무라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를 위하여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하나님도 안 보이고 나에게 잘해 주는 신은 어떤 신이라도 나의 진리이고 나의 신앙이고 나의 종교이다 라고 생각했던 그 이스라엘 사람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다 찾아내었는지 철저하게 선지자를 보내어 다 제거하고서 다만 유다는 남겼다는 것입니다. 그 남은 자 속에 저와 여러분이 합류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잘되라고 교회 나왔다가 이것이 우상숭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잘되라고 하나님이 계시고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도구가 되고 하나님에 대한 증거가 되라고 이 각박하고 지옥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과 주님이 살아계신 것을 증거하라고 파견된 줄 믿사오니 자신의 처신을 비관하지 말고 화를 내지 말며 불러주신 은혜와 그 미래상에 대해서 너무나 감사하고 감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