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강-힘을,의존한,결과(왕하17장1-6)-2ki010311
26. 힘을 의존한 결과 (왕하 17:1-6)
17:1 유다 왕 아하스 십 이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구년을 치리하며17:2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더라17:3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올라와서 호세아를 친고로 호세아가 신복하여 조공을 드리더니17:4 저가 애굽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해마다 하던 대로 앗수르왕에게 조공을 드리지 아니하매 앗수르 왕이 호세아의 배반함을 보고 저를 옥에 금고하여 두고17:5 올라와서 그 온 땅에 두루 다니고 사마리아로 올라와서 삼년을 에워쌌더라17:6 호세아 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취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할라와 고산 하볼 하숫가와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
『사론의 꽃과 같이 정결하고 순결하게 우리에게 다가오신 주님.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오늘도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수님 당시에, 예수라는 분이 이 세상에 나타나실 때에 과연 이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필요로 했습니까? 아닙니까? 사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와 소수의 무리 외에는 예수라는 분이 인생에 있어서 그렇게 도움된다고 결코 보장할 수 없었습니다. 요즘 미국에는 한국상점을 터는 강도들이 많습니다. 권총에 장전을 해 가지고 한국인을 죽이고 돈을 강탈하는 사건이 종종 일어납니다. 강도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권총 들고 예수님의 인중을 겨누면서 "돈 내놔" 라고 했을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줄 것은 현찰이 아니고 생명의 물을 주러 왔다"고 했을 때 강도가 그 이야기 듣고 예수님을 돈보다 더 중요한 분으로 받아드린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강도의 눈앞에서는 예수가 되었던 누가 되었던 자기에게 돈이 되는 인간만 가치 있는 인간이고 그렇지 아니하면 예수든 누구든 가리지 않고 들고 있는 권총을 그 자리에서 발사할 것입니다. 즉 돈이 안되면 얼마든지 없애 버려도 무방한 존재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권총강도가 사람을 함부로 죽이듯이 오늘날 예수님이 필요치 않는 자에게 있어서 예수라는 존재는 있어도 그만 없어져도 그만인 그런 눈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인생 마감이 십자가 처형으로 끝났다는 것을 압니다. 요즈음 식으로 표현하자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다지 필요치 않아서 그냥 개죽음으로 안겨 주었다는 말이 됩니다. 아마 권총 강도에게 예수님을 맡겼다면 권총으로 쏴 죽였을 것입니다. 전적으로 예수님을 원치 않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그 예수라는 분이 교통 사고로 죽으나 강도에게 총 맞아 죽으나 십자가에 달려 죽으나 별반 차이 나지 않는 문제에 불과합니다. 자... 여기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과연 우리에게 예수님이 꼭 필요하신 분입니까? 그 당시 사람들도 필요치 않았는데 오늘날 우리가 왜 예수라는 분을 필요로 해야 합니까? 이점을 심사숙고 해보신 적 있습니까? 그 당시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예수님이 불필요하다고 여기고 십자가 처형, 즉 요즈음 말로 말해서 권총 강도에게 총 맞아 죽는 식으로 죽으신 분인데 그런 분이 이 시대에 와서 갑자기 필요한 존재라도 된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실질적으로 그 당시 사람에게 경제적으로 사회 안정을 위해서도 하등 도움이 되지 못되었다는 결론이 나 있는데, 이러한 예수님이 지금 이 시대에서는 입장에 바뀌어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꼭 필요하다는 그 어떤 증거라도 새로 추가된 게 과연 있습니까? 없잖아요! 여러분, 제가 왜 예수님 이야기를 자꾸 끄집어내는가 하면은 바로 신앙이라는 것이 신의 존재를 믿고 안 믿고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놓고 그 예수님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관한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불필요한 존재로 동의했던 그 당시 사람들은 어느 시대의 사람들 못지 않고 신의 존재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구원되었겠습니까?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심성상 모든 인간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여러 가지 표현 방식만 다르다 뿐입니다. 이런 신의 존재를 수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신앙의 핵이라고 보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가 하는 이점이 바로 신앙의 핵심입니다. 어떤 분들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많이 합니다. "목사님 그러면 내가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이런 질문을 대하면 저는 괴롭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뭔가 한다는 그것으로 인하여 나 자신을 살리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되묻는 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왜 당신은 누구를 의지할 생각을 안하고 자꾸만 자신의 행위로 인하여 자신을 살리는 방식만 고수하느냐 말입니다. 그러니까 "목사님 제가 어떻게 살면 잘 사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질문해야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목사님 저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거든요. 그런데 그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입니까?"라는 질문 말입니다. 우리 자신이 전적으로 의지하는 분이 따로 없으면 매일 생각하는 것이 자기 문제로 돌아서게 됩니다. 내가 마음을 푹 놓고 나의 미래, 운명, 생명까지 의지 할 만한 분이 없기 때문에 믿을 것은 내 밖에 없다는 결론에만 붙잡혀서 살고 있거든요. 그것은 옳은 신앙 태도가 아닙니다. 제가 그런 분에게 답변할 만은 이것뿐입니다.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말씀드리면 그 쪽에서 하시는 말씀이 "의지 할 분이 없는데 어떠합니까?"라고 되물으시겠지요. 제가 "예수님이 있지 않습니까?" 한다면 그 쪽으로 무어라고 대꾸하겠습니까? "예수야 있겠지만 그 예수가 내게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제가 묻는 것은 내가 얼마나 성실하게 살아야 하며 얼마나 깨끗하게 살아야 신께서 나를 도와주는가를 묻고 있는 겁니다. 예수만 의지한다는 것은 저는 동의 할 수 없습니다." 아마 이런 식으로 나올 공산이 크지요. 여러분 정말 예수란 분이 그때 그 당시 사람들이나 오늘날 우리 교회 사람들에게 그렇게 필요치 않는 분입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불필요합니까? 기도로서 그분과 상의하며 의지할 마음이 조금도 생기지 않는 것입니까? 내 모든 것을 그분에게 맡길 의향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신앙 세계에 아직 속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 근거가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백부장이 나옵니다. 백부장은 요즘 계급으로 하자면 중대장쯤 됩니다. 이러한 백부장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병이 난 종을 고쳐 달라고 하며 그가 하는 말이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8-10) 자... 보세요. 여러분, 이 중대장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했나 하면 주님께서 크게 칭찬했습니다. 즉 그 백부장이 예수님보고 하는 말이, "예수님 귀찮게 그 귀한 육신을 직접 움직여서 저희에게로 오실 필요 없습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저도 종이 있어 내 마음대로 그들이 움직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도 주님의 종이 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종으로 인정해 주시옵소서. 시키기만 하시옵소서 저는 그저 제 주인님의 시키움에 대상이 된다는 것만 해도 즐겁겠습니다"라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습을 보시고 다음과 같은 대단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신앙에 관한 평가입니다. "이만한 믿음을 본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나 오늘날 교회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다 수용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행동하기를 "신이시여 저 어때요?"하고 자기 신앙을 신앙의 대상을 삼고 신에게로 나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읽었던 마태복음에 나오는 백부장은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들이 반기지도 않는 구체적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진해서 예수님이 종이 되겠다는 행동이었습니다. 자신의 자립성보다는 그 자립성과 주관까지 그분에게 양보한 것입니다. 여러분, 백부장쯤 되면 그 당시 사회에서도 대우받는 직업인입니다. 무엇이 모자라서 자기 주장을 버리면서 남의 종이 되겠다고 함부로 나서겠어요. 추상적인 신이나 믿고 있으면 되지 왜 남들이 반기지도 필요치도 않는 예수라는 분의 종으로 서슴없이 되려고 합니까? 바로 이것인 신앙입니다.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 분의 종이 되어서 그분의 뜻대로만 살면 된다고 백부장은 편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필요치 않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는 십자가라는 것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심성이 있으니 예수 없이도, 혹은 예수의 종이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출이 바로 십자가 사건으로 터진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이처럼 자기 자존심이나 오기 같은 것도 내던지면서 예수님이라는 분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기대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그 부활의 영광을 통해서 자신의 영광을 내다보면서 소망을 두면서 아무 일없이, 물론 여러 가지 일들이 많이 일어나겠지만, 잔잔한 연못처럼 그런 마음으로 그분에게 기대며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바로 이러한 믿음을 예수님은 보시고 과연 이 시대에 이만한 믿음을 가진 자가 있구나 하고 감탄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 그 시대나 오늘날 시대나 신앙 찾아보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달리 말씀드리자면, 자신이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자기 상대를 찾아 아낌없이 편하게 의지하고 기대면서 사는 이러한 상태가 찾아보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교회 위기를 늘 심각하게 간주해서 항상 이야기하는 사람인데요, 요즘 교회가 어디까지 위기에 와 있는가 하면, 신앙과 복음과 진리를 교회 내에서조차 전한다는 것이 무모한 짓을 하는 것처럼 깜짝 깜짝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내가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구나. 사람들이 축복 축복을 원하고 그것을 달라고 오신 분들에게 신앙과 십자가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내가 엉뚱한 자리에게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그런 기분이 든다 말입니다. 교회 부흥과 성장만 기대하는 사람들 앞에서 "여러분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라는 신앙의 문제를 끄집어내기가 보통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말 못하는 그런 교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복음조차 추방해 버리는 요즈음 교회가 과연 그들이 스스로 예수님의 종이 되려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도리어 예수님을 자기 교회 부흥을 위한 종으로 끌어당기려 하겠습니까? 교회가 주님에게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백부장처럼 예수님만을 쳐다보는 기쁨이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눈을 돌리고 거기서 기쁨을 얻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교회 아닙니다. 복음이 없는 단체가 무슨 교회가 되겠습니까! 교회 부흥한다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자들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본인들이 오로지 복음과 주의 종이 되겠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백부장과 같은 신앙자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받습니다. 교회가 예수님으로부터 눈 돌리는 현상을 저는 과감하게 이것을 '현실'이다 고 정의 내리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도 현실을 현실로 똑바로 바라보며 나오고 있더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현실에 안 맞고 도움이 안되는 비현실적 내용이 나오면 전혀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자... 지금이 오늘 본문 속으로 들어가야 될 지점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현실을 철저하게 현실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름이 호세아라는 왕입니다. 호세아라는 왕을 지금부터 소개하겠는데 여러분 자신들과 차이가 나는지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차이점이 안 날 가능성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자가 얼마나 현실적으로 사는 자인지 한번 봅시다. 1절에서 4절까지 읽어보면 "유다 왕 아하스 십 이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구년을 치리하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더라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올라와서 호세아를 친고로 호세아가 신복하여 조공을 드리더니 저가 애굽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해마다 하던대로 앗수르왕에게 조공을 드리지 아니하매 앗수르 왕이 호세아의 배반함을 보고 저를 옥에 금고하여 두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호세아가 통치하던 이스라엘 나라에 남쪽과 북쪽 양쪽으로 두 강국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쪽은 호랑이 같은 왕국이라면 저쪽은 사자 같은 무서운 왕국이 성립되어 있는데 그 둘 사이에 새끼 토끼와 같은 이스라엘이 놓여 있는 것이지요. 자.. 여러분 이것은 현실입니다. 양쪽의 두 나라가 으르렁거리면서 언제 누가 먼저 저것을 잡아먹지 하며 노리고 있는 이것이 바로 현실입니다. 자기와 자기 나라가 너무나도 아주 연약하다는 이 사실이 또한 냉혹하고 엄연한 한 현실입니다. 그리고 왕으로 돈을 해결하려고 했는데 남쪽, 북쪽 양쪽 다 뇌물을 바치려니 그만한 경제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양다리 걸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것도 또한 현실입니다. 저는 지금 오늘 설교에서 계속 현실이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며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실을 현실대로 분명히 인정하고 받아드리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왕도 또한 역시 현실적으로 대처합니다. 어떻게 했나하면 둘 중에 어느 한 쪽으로 택해서 그 나라에게만 맹종을 맹세하기로 했습니다. 보다 뇌물을 적게 주어도 될 나라를 판단해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뇌물을 독점적으로 챙겨간 나라가 그 변질을 가만 보고만 있겠습니까? 군기 빠졌다고 대번에 쳐들어오겠지요. 흰토끼 같은 아무 힘도 없는 이스라엘을 공격해서 유린해 놓고 가버렸습니다. 자. 현실이 바로 이렇습니다. 호세아 왕도 누구보다도 현실을 잘 알기 때문에 제대로 대처한다고 한 것이 하나님이 세운 나라를 이런 꼴로 만들로 말았습니다. 호세아 왕에게 있어 하나님의 말씀이란 그저 추상적이요 비현실에 불과합니다. 자기 나라는 작고 주위의 나라는 크다는 것이 현실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현실에 대해서 신앙으로 대체할 수 없었다는 것이 오늘 호세아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은근 슬쩍 남쪽 나라를 의지해볼까 하다가 북쪽의 앗수르 왕이 쳐들어와 그만 나라가 이것으로 끝장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왕 본인도 모진 고생을 하게 됩니다. 4-5절에 보니까 왕은 삼년 동안이나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나라는 졸지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과연 하나님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왕이라면 말입니다. 저는 여기서 여러분에게 제안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기초를 새로 닦아보자는 것입니다. 그것도 엄연한 현실을 마주 보면서 말입니다. 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호세아 왕은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까, 안 하려고 합니까? 호세아 왕에게 있어 신앙은 어디까지나 나중 문제였습니다. 현실이 우선이지 신앙이라는 취미 생활은 항상 나중 문제였습니다. 어쨌든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한국에 엄청난 많은 목사들이 배출되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목사 되기 전에는 목사 시험에 합격해서 자격증이나 따 놓기 위해 공부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목사가 되고 난 뒤에는 그들의 화제 거리가 무엇인고 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깊이 느끼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 많이 아는 등등의 것들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목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밥 먹고사느냐, 돈 되는 직업으로 전환될 수 있느냐 라는 것이 관심사입니다. 죽음이라는 벽이 매일 같이 만난다는 그들 목사에게나 여기 계시는 평교인에게나 마찬가지로 엄연한 현실입니다. 끊임없이 죽음과 각자 자신과 매일 마주치고 살아야 하는 것이 바로 기습한 현실 문제입니다. 과연 이러한 실제적 현실 속에서 하나님에 관한 문제가 무슨 시급한 문제가 되겠습니까? 사람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우선 내가 살아남아야 되겠다 것입니다. 호세아 왕이나 우리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호세아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현실 안에서 요령과 해답을 찾고자 한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태도를 비난 할 만한 자격이 우리에게도 있을까요? 남쪽과 터 보려다가 북쪽나라가 더 세어서 그 나라에게 거덜난 것입니다. 이처럼 현실 세계는 힘과 힘의 그물 구조로 짜여져 있습니다. 인간이 되어서 살려고 한다면 필히 누구의 종이 되더라도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 또한 현실입니다. 힘센 강자에게 서슴없이 고개 숙여 그 자의 종으로 관계를 맺고 살아야 비로소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숙명이고 운명인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 자리에서는 순수한 신앙의 밀치고 들어갈 여지는 아예 없는 거지요. 신앙이라는 것은 가위로 잘라내어 버리고 그 자리에다 힘의 권력 구조라는 현실감을 집어놓고 사는 것입니다. 혹시 나중에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에는 교회 다니는 취미 생활도 괜찮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오시기 전에도 아무 때고 예수님이 오신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현실에 있어 항상 뒷전에 될 것이 뻔하고 동시에 도움도 안 된다고 하면서 언제든지 십자가에 못박아 버릴 심령들입니다. 물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우선이기에 예수님은 반드시 천덕거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 현실적인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 여기서 성경이 덧 붙여서 무어라고 이야기 더 하시는지를 봐야 합니다. 1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로 이스라엘과 유다를 경계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 하나님께서는 계속 선지자를 보냅니다. 왜 그러하십니까? 그것은 호세아 왕이 철저히 현실주의자이니까 그러한 것입니다. 즉 "호세아야 그 힘센 남쪽, 북쪽나라를 누가 보낸 줄을 네가 아느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코앞에 닥친 일을 내가 나서서 해결 해 주어야 내 목숨이 부지된다 라는 고정된 관념에만 코 박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 무수하게 보내신 선지자의 말을 들지도 보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내 문제를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뿐이고 정작 내가 의지해야 될 분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죄입니다. 여기서 저는 신약 성경의 한 구절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에베소서 2:1-2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우리는 흔히 현실을 보면서 주장하기를 "내가 믿을 것은 오직 내 머리와 내 이 두 손뿐이다" 라고 주장하지만 이 본문에 보면 네가 어떻게 살던 결국 악마에게 순종하고 있는 생활이 전부라는 것입니다. 3절을 더 보게 되면,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호세아 왕처럼 결국 인간은 누구에게든지 종노릇하며 살 수 밖에 없다는 그 현실 감각 자체가 곧 힘에 굴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악마에게 끌려 다니는 인생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만드는 악마의 술책이다는 것이 하나님의 지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마귀를 이 땅에 설치도록 허용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악마의 하수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성을 그대로 설명해 주시는 우리는 늘 죽는 다는 것, 실패한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아무리 본인이 큰 소리쳐도 마귀에게 매여 있는 꼴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소리 쳐도 자기 보다 더 센 자가 오면 자진해서 고개를 숙이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을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역시 신약 성경인 히브리서 2:14-15를 또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같이 혈육에 속하신 것은 우리가 혈육에 속해가지고 이 몸뚱이가 죽음으로 해체될까봐 겁이 나서 벌벌 떨고 있는 그런 마귀에게 매여 있는 것을 풀어 놓이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것입니다. "봐라 나도 같이 육신을 갖고 있었지만 부활로서 해결했잖아"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 더 이상 죽음을 무서워하지 마라는 겁니다.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현실에서도 무서울 게 없다는 말입니다. 악마보다 더 센 예수님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있잖아 나는 죽어도 살았잖아. 너도 죽어도 나처럼 산다. 죽는데 겁내지 말고 나만 의지하고 살아라: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이유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부활이고 생명이니 라는 사실을 백부장이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남들이 돌아보지 않는 예수님을 따르고 종이 될 것을 결심한 겁니다. 저는 그것을 두 자로 믿음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추상적인 믿음을 가지고 자기 논리를 가지고 따져서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나는 이제 제대로 영원히 사는 자가 되었구나 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것도 내 힘, 내 머리가 대단해서 살게 된 것이 아니라 내가 의지해야 될 분으로 인해 그 분이 대단해서 영원히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틀려서 못 믿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런 백부장 같은 신앙인이 될까봐 우리가 또 두려워하고 있더란 말입니다. 이것이 근본 문제점입니다. 하지만 "저도 백부장처럼 예수의 부하가 되는 것이 정말 소원이고 부럽습니다. 내 인생이 언제 그렇게 됩니까"라고 소망을 드러내는 자라면 그 사람은 이미 신앙인입니다. 반면에 "저는 적당하게 교회에 다니겠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부하가 되지 않겠습니다" 라는 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호세아 왕과 같은 자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호세아를 보고 악하다고 했습니다. 호세아가 흉악 무도한 범죄자라고 악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문제 해결을 내 손에서 처리하려고 하고 의지하지 않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신앙에 대해서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잘 나옵니다. "신앙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1절에 나옵니다. 신앙의 선배들은 결코 보이는 것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 마음을 두었기에 눈에 보이는 현상에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즉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 같이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는 현상에 흔들리면 안돼요. 흔들리면 믿음이 아니고 자기의 신념입니다. 현상은 조금 있으면 없어질 것들입니다. 믿음은 보이는 현상에 토대를 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의사가 각종 환자와 상대하고 검사가 각종 죄수와 상대하는 것처럼 우리는 지금도 평상시에 누구와 상대를 해야 되는데 물론 이것은 현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자들에게 의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힘을 가졌다고 기대해서도 아니 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영생을 줄 수 있고 부활을 줄 수 있는 그분을 의지해야 바로 신앙입니다. 오늘 주보에 보면 신명기 20장이 나오는데 한번 살펴봅시다. "네가 나가 대적과 싸우려할 때에 말과 병거와 민중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라고 적혀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시기를,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숫자가 많고 더 힘이 센 겁나는 상황을 자꾸만 만나게 하시면서 과연 네가 아직도 믿음이 있는지 여부를 묻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을 믿지 말아라 는 것입니다. 비록 너 앞에 수많은 적들이 오더라도 너를 지키는 천군 천사가 더 많다는 것을 엘리사가 게하시를 보고 한 이야기에 나옵니다. 네 눈에 보이는 아람 군대보다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천군 천사가 보이지 않느냐라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어야지 네 눈에 보이는 현상에다가 겁을 내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관된 사상은 출애굽기에도 나옵니다. 출애굽기 15:2-4에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시이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여기에 보면 '여호와가 힘이시다'고 되어 있는데 여러분, 여호와가 과연 손에 잡힐 물건이나 됩니까? 쇠로 만든 겁니까? 돌로 만든 겁니까? 손에 잡히지도 않고 시장에서 살수도 없고 카메라에 포착도 안되고 눈앞에 나타나지도 않는데 여호와가 나의 힘이라는 겁니다. 내가 의지해야될 분이고 나를 구원하실 능력이라는 겁니다. 내 대신 마귀와 싸워주시는 하늘의 용사라는 겁니다. 어디 세상에 그런 믿음이 있습니까? 대단한 믿음이 아닙니까. 그러니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고 바라는 겁니다. 바로 백부장이 예수님을 볼 때에 아무 것도 볼 것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묵시적으로 동의했습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예수님은 별 볼일이 없는 분이지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고 교회 내에서도 동일할 정도입니다. 나에게 힘도 안되고 용사도 안되고 구원도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백부장은 예수님을 믿었잖아요. 또한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매달렸던 강도 한 사람도 아무 힘도 없는 예수를 믿는 그 순간 네가 오늘 나와 낙원에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 신앙의 기초를 다시 쌓읍시다. 믿음이 뭡니까? 돈으로 구원을 받습니까? 권세로 구원을 받습니까? 교회 목사가 여러분을 구원해 주던가요. 거대한 교회가 여러분들을 구원해 주던가요. 여러분들의 신앙 연륜이 구원해 줍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힘과 머리가 구원해 줍니까? 여러분의 오기가 여러분을 구원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주의 이름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의지할 만한 괜찮은 한 분을 마음에 모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을 좋아하고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죽더라도 아무 미련이 없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저는 믿음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욥은 돈이 날라 가고 자식이 죽어도 뭔가 의지하는 분이 있었기에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오늘 날 저희들이 정말 예수님을 믿어도 되나 하며 흐릿하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구주가 있고 그 구주가 나를 영생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확고하게 믿고 살아가는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