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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5강-자기를,위한,종교행위(왕하16장10-16)-2ki010304성경열왕기하

25강-자기를,위한,종교행위(왕하16장10-16)-2ki010304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64)

25. 자기를 위한 종교 행위 (왕하 16:10-16)

16:10 아하스왕이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단을 보고 드디어 그 구조와 제도의 식양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었더니
16:11 아하스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모든 것대로 단을 만든지라
16:12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와서 단을 보고 단 앞에 나아가 그 위에 제사를 드리되
16:13 자기의 번제와 소제를 불사르고 또 전제를 붓고 수은제 짐승의 피를 단에 뿌리고
16:14 또 여호와의 앞 곧 전 앞에 있던 놋단을 옮기되 새 단과 여호와의 전 사이에서 옮겨다가 그 단 북편에 두니라
16:15 아하스왕이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하여 가로되 아침 번제와 저녁 소제와 왕의 번제와 그 소제와 모든 국민의 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를 다 이 큰 단 위에 불사르고 또 번제물의 피와 다른 제물의 피를 다 그 위에 뿌리고 오직 놋단은 나의 물을 일에 쓰게 하라 하매
16:16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왕의 모든 명대로 행하였더라

『하나님 이 시간 초막에 거해도 그곳이 하늘나라가 될 수 있도록 말씀을 통해서 저희들의 심령을 밝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성경은 진리 문제를 거론하고 나섭니다. 진리가 다른 곳이 아닌 성경 안에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인정하십니까?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곧 진리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과 상관없이 흔히 진리라고 내세우는 것들은 모두 "내 몸이 곧 진리입니다"라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내 몸이 진리이기에 내가 편한 대로 사는 것, 이것이 최후의 도착되는 지점입니다. 나에 관한 것, 이것이 진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는, "예수님이 진리이시기에 하나님마저도 예수님 중심으로 세상 우주를 움직이고 운행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진리를 바로 이해한다면 그 본인도 예수님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 옳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내 몸이 최종 진리인지 아니면 내 몸 말고 몸 밖에 진리가 따로 있는지는 우리가 어떻게 결정 지울 수 있습니까? 그것은 구원이라는 것이 우리 몸 밖에 다른 이로 인해 구원되느냐 아니면 내 몸을 내가 알아서 구원시키느냐로 결정되겠지요. 만약 우리 몸 말고 다른 곳에 진리가 있다면 그 진리가 능력을 주셔야 우리가 구원될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고 내가 알아서 내가 열심을 내어서 내가 나를 건진다면 진리란 것은 내 몸이 진리가 되겠지요.
여기서 더 나아가 저는 단호하게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만약 우리들이 다른 곳에 계신 분에 의하여 구원된다면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그 진리에 목숨을 바쳐야 됩니다. 그것이 흔들림이 없는 인생입니다. 진리도 아닌 것에 한평생 매여서 산다는 것은 자기와 함께 망하는 거지요. 예를 들면, 자기 몸 유지를 위하여 한평생 충성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항은, 내 몸을 가지고 타인의 몸, 타인을 이기려고 하지 말고 진리를 찾아야 됩니다. 내가 몸을 바쳐도 손해보지 않고 멸망으로 인도하지 않을 확실한 진리를 찾아서 거기에 몸을 던지고 살아야 됩니다. 이처럼 진리에 몸을 담고 사는 것을 성경에서는 간단하게 말해서 '의지한다'고 합니다.
"당신은 누구를 의지하고 삽니까?" 라고 묻는다면 대답이 "나를 의지하지요."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신앙이 없는 사람이고 "당신은 누구를 의지합니까?"에 대해 "나는 예수님을 의지하며 그분 없이는 못 살겠으며 죽을 때에도 나는 예수님 만날 것만 고대할 겁니다." 이렇다면 그는 신앙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 이토록 중요한 무엇을 의지하느냐의 문제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아하스라는 왕이 있는데 스스로 하나님 믿는 나라에서 하나님 믿는다고 자처하는 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믿는 나라의 신앙 분위기 속에 놓여 있다 할지라도 실제로 하나님을 의지하느냐 아니면 자기 자신을 의지하느냐에 따라 삶에 큰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아하스왕은 무엇을 의지하는지 10절을 같이 봅시다. "아하스왕이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단을 보고 드디어 그 구조와 제도의 식양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었더니"
자칭해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믿는 왕이라고 하는 이 작자가 어느 나라에 출장을 갔느냐 하면 그 당시에 최고의 영토와 힘을 가진 대국 앗스르라는 나라에 갔습니다. 거기서 누구를 만나는가 하면 디글랏 빌레셀이라는 최고로 교만하고 건방진 통치자를 만납니다. 만나서 이야기하고 하는 가운데 무엇을 보게 되는가 하면 그 나라의 통치자와 민중들이 신봉하는 종교와 신과 그 신을 모시는 성전의 구조를 낱낱이 보게 됩니다. 그것을 본 아하스왕은 그 식양과 모습에 반해버리고 말랐습니다. "바로 이 신이야! 이런 신을 믿고 이렇게 제사하고 섬기니 이 나라가 이토록 크게 번창하는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여호와는 백날 믿어도 별 볼일 없다. 우리가 믿는 여호와라는 신이 참으로 진짜 이 신보다 더 강하다면 필히 이 신을 믿는 나라보다 오히려 더 강해야되지 않는가? 라는 생각도 가졌을 것입니다. 최고로 강력하고 선진국이 섬기고 있는 신과 그 성전을 보니 여호와라는 신과 성전은 아마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입니다. 너무나도 엄청나게 큰 성전에다가 제사 방법도 여호와가 가르쳐준 것과는 다릅니다. 다른 방식으로 제사를 드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막강한 군사력과 선진국이 되었으니까 이제 우리도 바꾸어야 되겠다 바꾸어서 지금까지 믿던 종교 방식을 없애고 이 큰 나라가 자기 신을 섬기는 식으로 여호와를 섬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하스 왕은 실행에 곧장 옮겼는데 성전의 설계도를 도면대로 그대로 본국에 있는 종교 책임자 우리야라는 제사장에게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유다 나라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성전은 설계도면 대로 완전히 바꿔져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동편에 있어야 할 놋 제단도 북편으로 옮깁니다. 제사 제도를 앗스르 식으로 다 바꾸었습니다. 형식이고 뭐고 모두 말입니다. 이제부터 큰나라 되기 위해서 큰 나라 종교를 믿기로 한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 자체를 개조했습니다.
자 여러분, 이 본문이 여기 성경에 등장하는 이유가 뭐냐하면 우리가 사는 주위의 분위기가 아무리 기독교 분위기고 여호와 분위기라 해도 사람의 근본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입니다. 한시라도 세상 식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가려고 하지 않을 순간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을 다스리고 어떻게 은혜를 주시는지를 모르니까 괜스레 자기 식으로 접근하려고 합니다. 기분 따라 형편 따라 제멋대로 섬기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의 종교와 이방종교의 차이점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여호와의 성전의 구조는 무엇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새 언약과 관련지어져 있습니다. 언약, 다른 말로 말해서 약속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오로지 약속에 말입니다. 눈에 띠는 형식이나 현상에 의해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무 모습도 없는 채로 오직 말씀으로만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딱 깨어보면 그 안에 약속이 들어있고 언약이 들어 있다 이 말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빛을 만들 때 무엇으로 만들었습니까? 오직 말씀 한마디로 빛이 있으라 할 때에 빛이 있었습니다. 요한 복음 11장에서 마리아 마르다 자매의 오라비 나사로를 살릴 때에 예수님께서 마리아 자매에게 헌금을 받았습니까 어떻게 제사를 받았습니까? 예수님께서 무덤 앞에 서서 그냥 그 죽은 나사로의 시체를 향하여 말씀을 하셨지요. "나사로야 나오너라!"만 외쳤습니다. 그랬더니만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난 시체 나사로가, 걸어나오는 나사로가 되어 불쑥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이래도 예수님이 보통인간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그 자체에 창조능력과 구원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능력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믿지 안 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중요한 말씀을 하셨는데 "나는 이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음을 보이게 하기 위해서 왔다, 곧 죄를 사하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선행을 하고 윤리 도덕을 쌓는다고 죄를 사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 외부에 있는 어떤 초월자가 그분이 갖고 있는 자기만의 권능으로 우리를 구원해 내십니다. "이제 죄 없어!" 하면 그 순간부터 죄 없이 되는 그러한 창조력으로 말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어지는 창조력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발휘될 때 그때 비로소 구원이 되는 그런 형식으로 구원하는 것이 여호와의 종교가 표방하는 언약의 구원입니다. 말씀의 능력이다 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나오는 아하스왕은 제도와 조직과 제사 법을 수정하게 되면 신의 능력을 자동적으로 차지할 수 있으리라고 여긴 것입니다. 인간도 얼마든지 해 낼 수 있는 제도와 관습과 종교 형식가지고 신의 능력을 따내려고 부질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종교 현상이라는 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보이는 것에 의미를 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에서 흘러나오시는 능력이 우리 마음에 와 닿아서 우리가 건짐을 받는 겁니다. 이 능력의 말씀의 내용이 뭐냐하면 바로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이 약속입니다.
언약이 무슨 형식이 있답디까? 말씀에 무슨 형식이 있답디까?. 말씀이라는 것이 눈에 보입니까? 제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여러분 눈에 'ㄱ'이 보이고 'ㄴ'이 보입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여호와의 말씀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구원받는 것은 말씀을 듣고 믿으면 그것이 구원이에요. 무슨 형식이 필요합니까? 형식을 붙으려고 쓸데없이 시도를 하지 마세요. 여호와의 성전이라는 것을 이용해서 군사력을 키우고 막강한 국가적 힘을 모으기 위해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도 모르고 이 아하스 왕은 유다 나라의 왕으로서 자기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힘이 막강해 승리하기를 바라겠지요. 마치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타인을 만나면 늘 이기려고 하듯이 말입니다. 사람들을 만날 때 상대를 꺾으면 그것이 곧 승리인 줄 아는데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의 존재 취지는 힘을 끌어당기는 수단이 아닙니다. 힘을 길러 다른 나라를 이겨야 내 나라가 존재하고 된다는 것은 이방나라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면 본래의 이스라엘의 성전의 취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사야 6장에 나옵니다. 성전의 취지는 '거룩'입니다. 여기서 이사야 6:1-3까지를 읽어보겠습니다. "웃시야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 선지자가 늘 가던 성전에 들어가 보니 평소에 자기가 늘 대하던 성전과는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갑자기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 자욱한 무서운 영광과 함께 들어차면서 새로운 성전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진짜 성전, 즉 하늘나라 성전을 말이죠. 모형으로서의 성전이 아니고 모형이 실체가 되는 그 순간 안에 이사야가 놓여지게 된 것입니다. 지상의 성전이 아닌 하늘 나라의 진짜 성전을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온통 거룩이었습니다. 천사들이 그 거룩 안에서 겸손하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찬양하면서 감히 하나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여섯 날개를 자기 몸을 최대한도로 가리면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거룩해서 얼굴과 발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토록 엄청나게 황홀하고 감격스러운 것이 진짜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런 분인데 누가 감히 그 앞에 설자가 있습니까? 이것이 진짜 성전입니다. 이 대목을 보면서 거룩하지 못한 인간이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래서 거룩하지 않는 인간은 사실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 취급을 못 받습니다. 본인은 세상에서 각종 칭찬과 부러움과 유명세를 떨었는지도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지 않는 인간은 백년을 살든 이 백년을 살든 악마의 하수인 취급 밖에 못 받습니다. 이 땅에 그 사람이 교회에서 무슨 직책을 가졌든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살았든, 인류에 어떤 공헌을 남겼던, 학문으로 어떤 추앙을 받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전혀 인간 취급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거룩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고 거룩한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완전하게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이 연기가 가득하고 무서움이 가득한 진짜 성전에 누가 감히 설 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사야 6:4-5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화로다 나여! 나는 망한 놈이라는 것입니다. 진짜 성전에 들어가 보니 이사야 선지자는 자기 자신이 망한 놈인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가 진정 누구인가를 알게 된 최초의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 이게 자기 자신이요 곧 인간입니다. 자기가 자신을 향하여 "화로다!"라는 정의 외에는 달리 내릴 말이 없다는 것이 진정한 자기 진단입니다. 인류의 수천 년 역사 속에서는 인간들은 아직도 인간이 뭐냐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어디서 나오며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연구하고 있는데 성경은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 망하게 될 자이다. 망할 자로서 흙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 거룩한 곳에 오니까 X-레이를 찍듯이 비로소 나의 모든 것이 비추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이사야는 자신의 내부를 비추어 보니 망하게 될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이사야가 슬펐겠습니까 아니면 짜증을 내었겠습니까 아니면 실망했겠습니까 아니면 자기에 대해서 기뻐했겠습니까? 이사야는 너무 너무 기뻤습니다. 한평생 자신을 위장하며 자신의 추악한 모습으로 감추며 살았던 자기, 이런 자신의 위선은 자기 스스로도 벗길 수 없는 가면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는 삐에로처럼 내 마음대로 못하는 나 자신. 그런데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속 시원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나니까 이사야가 얼마나 좋았던지 그 다음에 보세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누구를 보낼꼬?"라고 할 때에 제가 가겠나이다 라며 이사야는 죽음의 길을 자청해서 나섭니다. 선지자가 이런 믿음의 결단을 내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좋은 주택을 주고 연봉을 많이 준 줄 아십니까?
이사야 20장에 보니 이사야는 이 거룩한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 때문에 속옷바람으로 맨발로 삼 년 동안 거리를 헤매면서 예언을 해야되는 계시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월급 주면서 하라면 어떤 이가 이 일을 하겠습니까? 자기가 본 것. 발견 한 것, 찾은 것이 있기에 또한 진리를 알고 자기 자신이 진정 누군인가를 알았기에 발가벗고 맨발로 복음을 전해도 그것을 마다하지 않고 기쁨으로 전했습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은 위대하고 하나님은 거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아하스 왕이 만들어내고 제조해낸 성전에는 뭐가 있습니까? 과연 이런 거룩이 나타납니까?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는 자세가 나오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신을 달래고 뇌물을 주고 아부를 하면서까지 저 앗스르 왕처럼 축복 받아서 나의 힘이 될 수 있느냐라는 이러한 욕심과 탐욕으로 뭉쳐진 가짜 여호와 종교만 나오겠지요. 이것이 무슨 하나님의 거룩이 있겠습니까. 이런 종교성은 하나님 가지고 장난치는 것이지요. 그저 자신이 끌어 모은 힘으로 남을 이기겠다는 야심만 가진 집단이 무슨 교회가 됩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농락하는 집단이 무슨 교회입니까. 여기 본문에 보면 놋제단을 북쪽으로 치워 버렸는데 " 또 여호와의 앞 곧 전 앞에 있던 놋단을 옮기되 새 단과 여호와의 전 사이에서 옮겨다가 그 단 북편에 두니라"라고 되어있지요.
성전 안에 동서남북의 방향 따라 기구를 배치하는 것은 인간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을 때 동쪽에 놋제단이 있도록 했습니다. 왜냐하면 동쪽에 출입구가 나와 있고 그 동쪽이라는 곳에서 장차 메시야가 오시는 것입니다. 에스겔 43장에 보면 동쪽에서 영원한 왕이 오시게 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왕이 오시는 것을 바라기 위해서 성막에서는 동쪽에 문이 있고 문을 열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놋제단이 되도록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내막도 모르고 그 제단을 치워 버렸잖아요.
메시야를 지향하는 율법을 제거한 셈입니다. 이는 메시야를 가리는 악마적 행동입니다. 성전에 안에 있는 제단의 의미는 이사야 6장에서도 나옵니다. 6-7절에 보면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 서사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 말이 무슨 말인고 하면 죄를 씻어주는 불은 다른 불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단에서 피어낸 그 화저의 불로만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단에는 내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아무 죄 없이 대신 희생을 당하는 단입니다. 내 죄를 없애기 위해서 제물이 죽었던 현장에서 나온 그 무서운 불만이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습니다. 다 의미가 있는 겁니다. 배치를 함부로, 장난 삼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어떻게 하면 거룩을 생산할 수 있느냐 하는 곳입니다. 너무나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거룩하지 못한 인간은 스스로 구원에 보탬이 되지 않는 존재로 취급받는 곳이 제단입니다. 그렇지만 도저히 거룩하지 않는 인간을 거룩되게 만들어 내는 장치가 또한 성전이며 이 성전이 멀리 내다본 것이 새 언약입니다. 지금 우리가 땅에서 어떤 위치에 있느냐 내가 얼마나 돈이 있느냐 하는 이것은 하늘나라에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당 짓는데는 중요한가 모르겠습니다만 하늘나라에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하나님은 언약, 약속으로 구원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네가 그것을 믿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면 성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제가 히브리서 9:12를 앍겠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또 20-22절도 읽겠습니다. "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
즉, 피로서 거룩하게 되고 피로서 정결케 되는 장소가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또 히브리서 10:8에 보면,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10절이 하이라이트인데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여기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 새 언약 때문에 거룩을 얻어 거룩한 자가 된 거예요. 순전히 예수님 때문입니다.
진리는 우리 몸에 있는 것이 아니지요. 진리가 우리 몸밖에 있지요. 우리는 몸 밖에서 날라 온 구원의 능력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지요.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존재하듯이 그리고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듯이 하나님의 언약하신 그 말씀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이지요. 구원이란 말씀에서 나오고 그 말씀을 들음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을 우리가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거지요. 하나님의 언약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매료됩니까? 그것에 마치 어떤 효과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까? 복음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한 자가 됩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가 당당하게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죄 씻음 받고 거룩한 사람이 되며 하늘나라에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지요.
이것보다 더 귀한 보물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세요. 지구상에 어떤 보물이 이것보다 귀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결혼할 때 예물을 받을 때 반지 속의 보물이 귀하던가요, 아니면 반지 주위를 싸고 있는 세공부분이 귀하던가요? 보석이 빠지면 세공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귀한 것이 뭐냐? 하나님의 약속이고 언약이고 우리를 죄를 씻어주고 거룩하게 만들어내는 예수님이 흘리신 피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최고 중요한 겁니다.
누가복음 10장 38-40절을 봅시다. "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여기에 마르다와 마리아가 나옵니다. 언니가 말씀만 듣는 동생이 못 마땅해서 예수님께 부탁을 하지요. 자기를 도와주라고. 언니는 한창 예수님 영접에 신경쓰 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어떠한 거룩한 선물을 주는지 우리가 그것만을 쳐다보고 받아들일 때 가장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충성을 하고 아부를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충성을 하셨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섬겼고 예수님께서 자기를 쪼개고 찢으신 것을 우리가 귀하게 생각하고 아주 고귀하게 여기는 것을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교계에 한번 돌아보면 사람들의 관심사가 복음의 내용에 관심이 없고 교회에 관심이 있습니다. 교회는 내용물이 아닙니다. 수단에 불과한 교회에 사람들은 관심이 너무 많은 겁니다. 사과 바구니에 사과가 들어 있어야 사과바구니가 되는 겁니다. 바구니만 들고서 거룩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교회란 것은 교인 숫자와 상관없습니다. 거룩이 무슨 숫자로 결정되겠습니까! 거룩하다 거룩하다 그것이 현실로 나타날 때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 거룩 앞에서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제단에서 흘려 나오는 이 피로 말미암아 너를 씻어 주마". "나를 위해서 누가 갈 수 있나?" "주여 제가 가겠나이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야 교회가 된다는 말입니다. 알맹이도 없고 껍데기만 있고 거룩이 나오지 않는 것이 무슨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가짜 교회와 진짜교회의 차이점은 딱 하나입니다. 결국 교회가 유지되어야 된다는 쪽으로 나가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사이비이고 가짜입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복음만 있으면 돼"하면 교회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만 있으면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입니다. 어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여러분들이 매료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보았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을 한 번 살펴봅시다. 거기에 엉터리 성직자가 나옵니다. 그 사람은 우리야 제사장인데 그는 아하스 왕이 시키는 대로하는 인간입니다. 여러분, 옛날의 제사장이라면 말씀을 백성이나 왕에게 가르치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 율법을 거의 완전히 외우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이 시키니까 왕이 시키는 대로 얼른 가짜 성전을 만들어버립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제사장 본인도 복음이나 언약된 피보다는 힘을 원하고 있었던 겁니다. 거룩한 성직조차 권력에 하수인 혹은 노리개가 된 것입니다. 세상 권세자들과 똑같이 흉내내고 있는 겁니다. 누가 힘이 더 센가에 정신이 팔려있지, 주여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누가 이 죄에서 나를 건져낼까 여기에 관심 있는 제사장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란 힘을 축적하면 안됩니다. 힘으로 다른 교회나 종교나 교단을 꺾으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복음을 전파하면 그만이지 나름대로 힘을 모아서 저쪽교회 저쪽교단을 친다면 그것은 사이비 단체입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야지 왜 나름대로 힘을 모아서 다른 쪽을 칩니까. 이것이 말만 여호와이고 , 말만 언약이고, 말만 예수님 피를 이야기하지 실제로는 힘을 모아 괜찮은 '나의 교회'를 하나 갖겠다는 탐심에 지나지 않습니다. 힘을 모을 대로 모아서 나도 사람답게 살아보겠다는 이러한 꿍꿍이 때문에 일어나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꿍꿍이들이 모여서 부흥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된 게 아니라 절간이 부흥된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여러분들이 사는 것이 진리 위에서 사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몸과 가정이 진리입니까? 여러분은 누구를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 자신만 의지하며 사십니까? 자신을 힘을 축적해야 됩니까? 아니면 누군가를 목숨 바쳐 의지하십니까? 내가 누구를 의지하는 것하고 내 힘을 모으는 것하고 이 차이점을 모르겠습니까? 목사가 교회를 키우려고 힘을 모은다면 그것은 이단 중에 이단입니다. 목사가 의지 할 것은 예수님의 피뿐이며 그것을 증거하면 끝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을 구원한 것은 언약, 하나님의 약속이지 교회란 이름의 종교단체가 아닙니다.
오늘 주보 3번을 보세요. 제사장이 되었으면 이러한 왕의 망발을 저지하든지 아니면 순교하든지 해야 될텐데 우리야라는 제사장은 군말 없이 지시대로 하고 있습니다. 목숨 건 사명감 없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들이 하나님께 목숨 바쳤다는 주장은 사기입니다. 자기는 살고 싶어서 목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뿐입니다. 남들처럼 말이죠. 그러니 이런 인간에게 마귀가 이런 일들을 시키는 겁니다. 오늘밤에 죽어도 너 영혼 낙원에 있으리라 라는 것이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죄 사함의 권세에서 근거를 하고 있다면 여러분 이제 죽는다 산다라는 인생 자체에 대해서 너무 무거운 짐을 느끼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이 얼마가 남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제발 한 순간만이라도 홀가분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시는 남은 세월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리가 무얼 더 의식하겠습니까? 십자가의 능력으로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그 거룩하고 거룩한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우리가 무슨 욕심을 내겠습니까? 바라기는 박사교회 모든 성도들이 한 순간을 살더라도 아무 짐이 없는 속시원한 자유인으로 살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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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4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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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