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강-건방진,유다왕(왕하14장8-14)-2ki010121
19. 건방진 유다왕 (왕하 14:8-14)
8 아마샤가 예후의 손자 여호아하스의 아들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오라 우리가 서로 대면하자 한지라9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유다 왕 아마샤에게 보내어 이르되 레바논 가시나무가 레바논 백향목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네 딸을 내 아들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 라 하였더니 레바논 들짐승이 지나가다가 그 가시나무를 짓밟았느니라10 네가 에돔을 쳐서 파하였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니 스스로 영광을 삼아 궁에나 거하라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하느냐 하나11 아마샤가 듣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올라와서 유다왕 아마샤로 더불어 유다의 벧세메스에서 대면하였더니12 유다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한지라13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벧세메스에서 아하시야의 손자 요아스의 아들 유다 왕 아마샤를 사로잡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을 헐고14 또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은과 모든 기명을 취하고 또 사람을 볼모로 잡아가지고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 평생의 듣던 말씀, 주 예수 사랑을 다시 한번 깨닫는 말씀을 통해서 파악하는 그러한 시간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사랑의 깊이와 높이를 충만히 느끼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민족마다 사람마다 각기 믿는 하나님은 여러 종류이며 다 다릅니다. 그래서 많은 하나님 속에서 진짜 하나님을 파악한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가짜 하나님을 믿다가는 진짜 하나님께 심판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가짜 하나님만 섬기다가 진짜 하나님께 된 통으로 당하는 거지요. 진짜 하나님과 가짜하나님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늘 정리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진짜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난 분이 진짜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나타내느냐 하면은 하나님 자체에 대해 사람들이 크게 잘못 보고 있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생각하기를 저 사람은 죄인이야, 저 사람은 죽어도 마땅해 라는 모습으로 참 하나님은 등장하는 사건이 십자가 일이며 사건입니다. 우리가 상식으로 생각해 볼 때에는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훌륭하시고 착하시고 누구보다도 어지시고 등등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러한 하나님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러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정작 나타나신 하나님은 도리어 사람들로부터 물매를 맞고 쫓김을 당하고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싫어버린 바가 되고 사람들이 근처에 오지 말라고 배척의 대상이 되는 그러한 분으로 우리 앞에 갑자기 나타난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평소에 생각해둔 그런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인간들이 본성적으로 품고 있는 하나님은 악마가 만들어 준 하나님입니다. 이 민족, 저 민족 많은 민족들은 추상적으로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습니다. 조물주를 섬기면서 소나무 밑에서 아기를 낳게 해달라는 것들이 모든 민족에게 다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저기에서 무작정 하늘을 향하여 비는 하나님은 엉터리 하나님이고 실제로 인간 앞에 나타난 하나님은 십자가로서 자기의 것을 보여줄 것을 다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 당사자가 십자가에 달렸다 라는 이 말은 이제부터 우리 인간을 심판하고 정죄 하는데 있어 두 말 못한 증거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온전한 의로움을 도리어 죄로 간주하는 이 왜곡된 인간들의 심성을 십자가를 통해서 부끄럽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보아라 너희들이 이렇게 착한 심성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그 착한 심성이 결국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내 몰아 쳤잖아. 그러니까 너희들이 엉터리잖아"라고 새로운 방식으로 심판을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가 보여주는 하나님의 솔직함 앞에서 "아 우리의 이 마음구조 자체가 문제가 있구나" 라는 점을 제대로 파악할 줄 알아야 합니다. 도대체 내 마음속에 어떤 잘못이 있기에 하나님을 십자가로 내 몰 수밖에 없는가 말입니다. 이러한 상당히 심도있는 난처한 것을 가지고 우리 심성에 파고들어 갑니다. 사무엘상 2장에 보면 가슴 뜨끔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30절에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이 여기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진짜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로 이 점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학을 의논하고 구원에 대해서 일가견을 갖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 돌아가는 것을 다 알고 예수가 어떠니 성령이 어떠니 교회가 어떠니 한 소리들 할 소양과 양식을 있다고 자부하지요. 그러나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성경 지식도 신학 지식도 아니에요. 상식 선에서 교회가 어떠니 하는 등등도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정말 나를 존중히 여기느냐는 것입니다. 네가 한국 교회 개혁을 이야기할 때 진짜 나를 한국 교회 그 자체보다 더 존중히 여겨서 개혁이 어떠니 등등을 이야기하느냐고 하는 것이지요. 정말 나를 존중히 여기느냐 아니면 너 자신을 존중히 여기느냐를 한번 따져보자는 겁니다. 교회 제직회에서 손들고 바른 소리하는 것 좋아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걸식 자들 밥 퍼주는 것도 좋은 행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좋은 행위 나쁜 행위를 묻는 것이 아니고 정말 너 자신보다도 나 하나님을 더 존중히 여기느냐 아니면 나를 무시하고 또 무시하느냐 하는 점을 간파하려고 하십니다. 사람이 몸이 아프면 누구를 존중하게 되나요? 아니지요. 내 몸이 지금 아픈데 누구를 존중하고 싶은 마음이 들겠습니까? 하나님을 존중한다고요? 하나님이 내 몸을 아프게 했는데 하나님을 존중하게 될까요? 모든 일이 잘 될 때는 막 자기가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 같아요. 하나님을 높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따지어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말고 또 누가 있을까요. 내가 가장 귀하고 존중스럽지요. 이런 정신상태를 가지고 교회 목회를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무관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욕보이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안 속아 넘어 가는 분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무시한다"고 동네마다 고래고래 욕한다는 것만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길 때가 바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은 어쨌든 간에 너 자신 보다 나를 더 존중히 여길 것인가를 그 어느 상황에서도 묻고 계십니다. 성경을 외우고 성경상식을 다 알고 설교를 유창히 하고 아무리해도 사람 마음속에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챙겨버리면 우리 하나님은 기분이 참 안 좋겠지요. 다른 사람은 속아 넘어 갈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 흉내기에 감동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오직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말씀을 가지고 다가오십니다. 이제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우리들에게 좋으신 설교나 교훈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타나셔서 우리를 낯뜨겁게 하고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조차 십자가를 죽게 만든 그 마음의 동기가 이미 우리 마음속에 큰 어른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하나님이라고 불러 보지만 어디까지나 이용해 보려고 부르는 것이고 실제로는 우리 속에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악마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가 하면 일체의 우리의 잘, 잘못을 묻지 않기로 하셨던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기 때문에 이왕이면 그들이 지니고 있는 선악 지식을 가지고 너를 구원하겠다 라는 그런 작전을 철회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다른 방법을 사용하시는가?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고 우리를 마음을 낮추게 만들고 우리를 낯뜨겁게 만든 그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을 네가 진정으로 사랑하느뇨? 묻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사랑하면 영생이고, "에이!"라고 싫고 귀찮다고 외면해 버리면 지옥이다 라는 새로운 심판기준을 우리 앞에 덜렁 제시해 버리시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꼭대기에 십자가가 달린 겁니다. 그것은 새로운 기준으로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을 구분 짓겠다는 것입니다. 나의 잘, 잘못을 일체 묻지를 않겠다는 겁니다. 심방을 하면서 장로님과 여러 가지 신앙적으로 토론을 했습니다. 예수 믿고 죄를 안 짓겠다는 그 의욕도 죄이고, 또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니 죄를 짓겠다는 것도 그것도 죄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십일조를 해야 된다며 설쳐도 죄가 되고 십일조는 구원과는 상관이 없기에 안 해도 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도 죄가 되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지금 하나님 보시기에 독생자를 바라보아야 할 두 눈동자를 가지고 지금 어디를 바라보는가 하면 하나님이 묻지도 않으시는 자기의 행위에 대해서 계속 두 눈동자가 가 있고 방향이 다르니까 그 방향 다름이 하나님 보시기에 괘씸하기 짝이 없는 겁니다. 예수 믿고 죄를 안 짓겠다는 것도 결국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것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행위를 존중히 여기고 자기의 행위를 가치 있게 보는 거예요. '하나님, 나 예수 믿고 괜찮아졌지요' 라는 것은 죄가 되는 겁니다. 주님보다 자기를 더 존중히 여기니까요. 그 다음에 구원과 십일조는 상관이 없기에 십일조를 안 해도 된다는 것도, 주님이 주신 그 사랑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 애초에 예상한 구원 작전이 딱 들어맞아 떨어져 평소에 챙기고 싶은 것을 챙겼고 얻고 싶은 것을 이제 얻도록 처신한 자기 행동에 감탄하게 되니 이것도 자신을 더 우상시 하는 그것도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양쪽 다 뭡니까? 예수님의 고귀한 사랑이 고마운 것보다도 자기 자신이 벌린 어떤 처세술에 고마워하고 자기 자신의 행동의 아주 규모 있음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아~ 나는 왜 이리 머리가 좋을까"로 자기 자신을 감상하면서 말입니다. 바로 이럴 때 죄가 되는 겁니다. 일반적인 죄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나쁘다고 생각한 그것을 했을 때 죄가 된다고 생각하지요. 그리고 우리가 착하다고 여기는 그것을 할 때 선이 되잖아요. 그러니 까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우리의 머릿속에는 그것 정도 밖에 안 되는 겁니다. 내가 나쁜 놈이지만 착한 일도 한 적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나의 행한 일 중에 나쁜 것만 골라 가지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 용서를 빌어 보련다 라는 식으로 우리들이 생각을 할 때에 이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더 존중히 여긴 죄가 됩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주님을 경멸이 여긴 뜻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왜 주님이 십자가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가 라는 것으로 그리고 인간의 근원적인 죄 뿌리를 들추어내는 식으로 오늘 말씀으로 접근해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구약을 보면 짜증이 나지요. 왜 짜증이 나는 가 하면 우리 역사가 아니잖아요. 옛날 남의 역사지요. 그러나 구약은 남의 역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소위 안다는 작자들의 행세가 이것 밖에 안 된다는 것을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 앞당겨서 갔던 사람들이에요. 남쪽과 북쪽나라 둘로 깨어 졌습니다. 솔로몬의 신앙이 결국 세상 쪽으로 나아가니까 하나님께서 나라를 둘로 쪼개었습니다. 같은 여호와를 믿는데 나라가 두 개가 되어 버렸습니다. 마치 지금 우리나라처럼 말입니다. 둘 다 서로 정통이라고 우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둘 다 정통으로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식으로도 하나님 앞에 자신이 정통이라고 하며 인정받고자 하여 둘이 힘 겨루기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싸워 가지고 이긴 쪽은 하나님이 인정한 나라이고 진 쪽은 하나님의 저주가 임해서 졌으니 진짜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생각하면서 힘으로 겨루기 합니다. 그래서 오늘 8절에 보면 남쪽의 나라가 먼저 시비를 겁니다. 이러한 시비 거는 자세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심리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 하는 논리들은 인간의 모든 욕망은 그 밑바닥에 전쟁 의지로 가득 차 있고 그 전쟁 의지에서 승리함으로서 사람 사는 재미와 쾌락과 기쁨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학자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사람의 기본 속성 속에는 전쟁 심리가 들어있고 전쟁은 남과의 싸와서 이길 때에 생의 생기를 얻게 됩니다. 인생을 사는 보람을 얻는 겁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언급한 옛날 사고 방식은 무엇인고 하면 사람은 밥을 먹고 살아가는 것이 기본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단순히 짐승이 아니잖아요. 동물과 차이나는 더 큰 차이점이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승부욕 입니다. 이유 없이 그냥 만나고 관계가 있는 타인하고 붙어서 싸워서 지면 슬퍼하고 이기면 기뻐하는 것이 하루일과의 전부예요. 매일 같이 그렇게 반복되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 전쟁하는 것이 다 이런 욕구가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깡패만 사람 치는 것만 좋아하는 줄로 알지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의 수많은 전쟁들을 축소해서 스포츠 정신으로 바뀐 겁니다. 나는 삼성 라이온즈 편 현대 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컴퓨터 게임을 밤새도록 하는 그것도 모두 인간성의 본능을 바깥으로 터뜨린 것입니다. 일종이 이러한 욕구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게임이 나온 겁니다. 전쟁을 한다는 것은 인간성의 본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 성경이 전쟁으로 복잡한 것 같지만 사실 우리 모습입니다. "어이 한번 붙자고"라고 남쪽 나라 왕이 이야기 할 때 북쪽나라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요. "네 같은 레바논의 가시나무가 건방지게"라고 대꾸합니다. 14:9에 보면,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유다 왕 아마샤에게 보내어 이르되 레바논 가시나무가 레바논 백향목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네 딸을 내 아들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라 하였더니 레바논 들짐승이 지나가다가 그 가시나무를 짓밟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 인가하면 "레바논의 가시나무 같은 놈이 이 고귀하고 숭고한 북쪽의 백향목에게 감히 대들다니 내가 지나가는 들짐승이 너의 가시나무를 짓밟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또 10절에 "네가 에돔을 쳐서 파하였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니 스스로 영광을 삼아 궁에나 거하라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하느냐 하나"라고 되어 있지요. 네가 에돔을 쳐서 한번 승리하더니 기가 살았구나. 자기 주제 파악도 못하고 시시한 놈을 이겼다고 나에게 도전을 해? 요즈음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서로 싸울 때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요. 둘 다 똑 같다고요. 이것도 우리는 또 하나의 스포츠를 보고 있지요. 누가 이기나 한번 보자. 인간사라는 것은 간단한 겁니다. 누구든 나를 존중히 여겨주면 어제의 원수가 내 친구가 되고 과거에 아무리 잘해도 나를 경멸이 여기면 내 원수가 된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법칙으로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너도 나도 모두가 하나의 작은 신이 되고 그리고 신들의 모임, 어두움의 자식들의 모인 과정에서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버린 십자가 사건이 터져 버리니까 진짜 제대로 하나님을 알고 있는 자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죄를 근원적으로 파악하게 되는 겁니다. 주여 저는 나밖에 몰랐으며 나만 즐거우면 되는 줄만 알았습니다. 이 죄인은 정말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죄인이군요 하고 말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자기의 죄의 고백이 터트려 집니다. 남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안 속아넘어갑니다. 우리는 스스로 교만한 그 재미로 살아가는데 주께서는 교만과 정 반대로 전혀 교만하지 않는 분을 보내어서 우리 죄로 인해 돌아가시게 해버리시니까 우리는 정말 다른 차원에서 하늘나라의 죄 규정을 알게 된 것입니다. "주여. 내가 진정 죄인이로소이다 누구 앞에서의 죄인이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나를 존중히 여기지 않겠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만 존중히 여기겠습니다."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여기의 본문에 나오는 교만의 행위를 남의 이야기로 듣지 마세요. 바로 우리 이야기로 들으세요. 11-12절에 보니까 드디어 전쟁을 벌어집니다. " 아마샤가 듣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올라와서 유다왕 아마샤로 더불어 유다의 벧세메스에서 대면하였더니 유다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한지라" 또한 14절에 보니 왕창 망하고 예루살렘의 고귀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주신 그 보물이 몽땅 빼앗기는 겁니다. 하나님이 무서운 징벌이고 심판인 겁니다. 옛날에 이스라엘이 교만하니까 힘으로 징벌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어떻게 징벌했는가 하면 바로 십자가라는 낯선 모습으로 징벌을 합니다. 십자가가 무슨 징벌이 됩니까 라고 반문하시겠지만 그 의미를 알아야합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 제직회를 하는데 목사는 자기편이 몇 명인가를 꼽습니다. 장로님은 장로님대로 자기편을 헤아리지요. 사람들이 누가 이기는가 하고 시끄러운데 그 중에서 한 사람 어제 처음 나온 그 한사람이 주여 내가 이 편 저편 아무 의미가 없고 단지 내가 아는 것은 우리를 구원해 준 주님의 귀한 생명만 있으면 됩니다, 라고 했을 때 그 사람 표는 몇 표가 되겠습니까? 그 사람 자기 자신의 표 밖에 없겠지요. 한 표도 없는 그런 낮은 자가 표 많이 끌어 모은 다른 패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하나의 강한 힘이 된다는 것이 십자가의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게 하겠다는 겁니다. 어느 칼이 더 센가가 아닙니다. 칼 쓰는 자는 무조건 다 날린다는 겁니다. 어느 칼이 더 날랜가를 묻는 것이 아니고 칼 쓰는 자는 다 망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정신 상태가 주님 바라보는데 있지 아니하고 자기 행위를 바라보는데 거는 사람은 다 망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26장 52절을 보면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검으로 승리하라는 것도 아니고 검으로 패배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검을 의지하고 검을 사랑하겠다는 인간은 인간마다 다 검으로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하나님 자체가 다르면 안됩니다. 내 힘이 되어주소서 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지 힘 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자기 주제 파악을 해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아무 존재가 아닌 것을 ,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북쪽이 이겼네요? 여기서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는데 그 심판이라는 것은 이러한 교만한 것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러면 교만했으니까 심판을 하고 또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내가 교만한 저 남쪽을 심판을 했으니 나는 괜찮은 자이지요. 라는 북쪽도 쳐버립니다. 남쪽 치고 북쪽 치고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 곧 사랑이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은 예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도둑질을 안 했습니다 라는 것도 성경은 의로 보지 않는 다는 겁니다. 나 탐내지 않았습니다 라는 이것도 하나님께서 의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차원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랑을 원하고 있습니다. 즉 네가 그 사람을 사랑했는가를 묻고 계시는 겁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5장 13-14절에 나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구체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부인이 교회에 나오는데 남편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술만 먹으면 엉터리 같은 인간이 되어서 자기 부인을 패는 겁니다. 그럴 때 그 부인은 너무나 속이 상하고 한이 맺혀서 하나님 저는 예수님처럼 남편에게 대들지 않고 맞기만 했습니다. '저 착하지요. 천사지요. 저 잘했지요. 하나님께 영광 돌렸지요' 라고 하는 자체가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주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 그 남편을 사랑하느냐? 저는 얻어맞기만 했는데요 라는 것이 결코 자기 정당성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피해자인데요 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피해자이든 어떻든 너 남편을 사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따지는 것은 자기 행위를 먼저 생각하지요. 옛날 유교 집안에 여자가 시집을 가면 온갖 법도가 너무 많지요. 이것, 저것 다 지켜야 되는데 만약에 하나 못하면 완고한 남편이 잔소리하면서 그 아내를 마구 무시하지요.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입니다. 진짜 하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나? 이것을 묻습니다. 고전 16장22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네가 완벽하냐를 묻는 것이 아니고 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사랑해? 라고 묻습니다. 만약 우리가 고백하기를 "예 사랑합니다"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그런 사랑가지고 남들 대하도록 해"라는 것이 하나님의 지시입니다. 그것이 율법의 완성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차원의 생활입니다. 잘, 잘못을 묻는 것은 떠나버렸다 이 말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미 그 잘, 잘못을 따짐을 받는 그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욕망이 어디서 멈추나요? 사랑할 때 욕망이 멈춥니다. 욕망을 금지한다고 해서 욕망이 멈춰지는 것이 아닙니다. 중들처럼 아무리 머리를 깍아도 소용없습니다. 욕망을 절제하고 줄인다고 해서 어제의 욕망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5년 뒤에 또 튀어나옵니다. 술 끊었다고 장담 못합니다. 언제든지 다시 마실 가능성이 있습니다. 욕망은 욕망의 금지로서 중지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차원에서 찾아야 합니다. 나 예수 때문에 자유 얻었어. 이 얻은 신나는 자유성, 그 자유성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진정한 사랑의 선물입니다. 욕망을 가지고 욕망을 조절하려고 하지 마세요. 절제하려는 그것이 또 다시 욕망으로 등장합니다. 절제하는 자아가 우상으로 등장합니다. 그것이 또 남하고 승부를 하지요. 당신 절제 많이 했나? 내 보다 절제를 못했군요. 주여 내가 이겼습니다. 바로 이것이 교만이요, 스포츠 정신입니다. 남을 이김으로 말미암아 사는 재미를 느끼는 또 하나의 악마의 화신입니다. 그러면 사랑은 무엇입니까? 용서입니다. 용서받은 나를 우상시 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나를 용서해 주었냐는 것입니다. 그 용서 해주신 분을 귀히 여기고 고마운 마음을 가질 때, 그게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에 사랑의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이 나오는데 12장 16절도 같은데, 거기에 보면 마음을 낮은데 두라고 했습니다. 13장 8-9절에 보면 서로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면 다른 것이 다 묻히는 겁니다. 나는 간음을 안 했습니다 보다도 나 그 사람 사랑합니다 라고 해야 정상입니다. 왜 사랑합니까? 주께서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께서 사랑했는데 그 사랑 때문에 남을 사랑한 거예요. 시편 131 편에 보면,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참 심령은 남하고 이기려는 심정이 아닙니다. 저는 젖 뗀 아이같이 엄마 품에 고요히 앉아서 기대고 있는 그 영혼이 저의 영혼입니다 라고 해야 진짜 신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경쟁 많고 피곤한 이 세상 경쟁 없이 살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경쟁에 이긴 자기를 존중히 여기지 마시고 경쟁에 이기든 지든 전혀 승부에 묻지 않으시고 우리를 한없이 사랑해 주시는 그 십자가에 달린 주님의 피 흘린 모습을 여러분 머리 속에 완전히 새겨서 그 용서의 기쁨으로 여러분의 여생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가짜 하나님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잘나야 구원받는다. 완벽해야 천당 간다' 라는 이러한 가짜의 하나님 앞에 주님께서는 고요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줄줄이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그 피는 우리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서 일부러 흘러주신 줄 압니다. 우리는 그 모습 앞에서 용서받지 못 할 자가 용서받은 이 행복감에 잠기게 해 주시고 젖뗀 아이가 어미의 얼굴을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보도록 하여주시고 이웃도 용서하며 사랑할 수 있도록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