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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7강-하나님의,도움(왕하13장1-9)-2ki010107성경열왕기하

17강-하나님의,도움(왕하13장1-9)-2ki010107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64)

17. 하나님의 도움 (왕하 13:1-9)

1 유다 왕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의 이십 삼년에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 칠년을 치리하며
2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좇고 떠나지 아니하였으므로
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노를 발하사 늘 아람 왕 하사엘의 손과 그 아들 벤하닷의 손에 붙이셨더니
4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므로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셨으니 이는 저희의 학대 받음을 보셨음이라
5 여호와께서 이에 구원자를 이스라엘에게 주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였으나
6 저희가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좇아 행하며 또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그저 두었더라
7 아람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진멸하여 타작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고 마병 오십과 병거 십승과 보병 일만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두지 아니하였더라
8 여호아하스의 남은 사적과 모든 행한 것과 그 권력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9 여호아하스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그 아들 요아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천지를 창조했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인하여 저들이 심장이 뛰고 우리의 생명이 제공된 줄 압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말씀의 내막이 무엇인지 이 시간 다시 한번 깨닫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성경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는 책이 아니라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에게 주는 책입니다. 달리 말해서 새로운 피조물에게 주신 책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새롭게 피조물로 된 자만이 이 성경책이 이해가 됩니다. 그것은 성경에 나와있는 천국의 내용이 실제의 천국의 내용과 똑같은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성경을 조금이라도 봐야 됩니다. 성경 속에 이러한 내용이 천국 속에서 통용되고 있는 바로 그 원리이구나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되지요. 새로운 피조물이라 새롭게 지음을 받았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보게 됩니다.
지금 이 시간에 제가 저 자신과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변화에 대해서 여러분이 어떤 차이점을 느끼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새로운 피조물임을 무엇으로 아느냐 말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짐작을 하느냐 말입니다.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새사람이다'는 누구나 이야기를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진짜로 저는 새로운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장담합니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게 하는 그 무엇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여러분들이 갖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베드로 후서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는데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러분 이 말이 실제적인 것으로 믿어집니까?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에게는 그것이 믿어집니다.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은 시간의 흐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늘 그런 자세로서 살아가고 있는 새로운 피조물에게만 "아~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맞구나"라고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와있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에게만 이해가 되는 거예요. 새로운 피조물이란 '나라는 인간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인간인데 어떻게 나 같은 인간이 용서함을 받았을까'하고 놀라는 이런 면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내가 그 누구로부터도 사랑 받지 못할 자이고 사랑의 받을 자격도 없는 자인데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사랑해주시니 이것이 웬 떡이냐 라고 놀라는 이러한 고마움을 가질 때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스스로 느끼신다면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만약에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었다면 나는 무슨 생각에 잠겨서 이 현실 세계를 제대로 점검할까요? 만약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면 나는 지금쯤 이 세속적 현실감에 목숨을 바치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안 믿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나는 놀랍게도 새롭게 나타난 현실에 즉 다른 불신자들이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는 그 현실에 내 목숨을 바치고 자랑스럽게 살아보겠다는 마음이 밀려들어오게 되지요. 안 믿는 친구는 이해를 못하지요. 저 친구가 왜 저럴까 하고 말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아닌 안 믿는 사람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겠지요. 세상적인 현실감각을 가지고 남들이 나를 분석하면 한 사람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남에게 기 안 죽을 만큼 얼마든지 살아가는 자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자가 유독 하나님 앞에서는 저토록 저 자세 인가를 안 믿는 친구는 이해를 못합니다. 새로운 현실 속에 하나님의 앞에서 비추어 볼 때, 우리 자신들은 도저히 천국 갈 수 없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가 세리며 창기며 강도며 도적이며 탐심이 가득한 그렇고 그런류의 인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를 우리한테 주입시켜 우리를 의인되게 하시고 구원받지 못할 자를, 용서받지 못할 자를 우리에게 용서했습니다. 자... 이런 변화로 인해 우리를 지켜보던 우리 주위의 안 믿는 친구에게 우리는 복음 증거를 할 수 있는 겁니다.
옛날에 크린트이스트우드가 주연한 '이것이 법이다'는 영화에 보면 정말 주인공은 타인을 용서해 주지 않았어요. 국가가 범죄자를 너무 풀어준다고 분통해 하면서 스스로 경찰 배지를 반납하고 자기가 직접 총을 들고나서는 그런 류의 영화였습니다.
자, 이점에 대해 우리도 동일하게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할 소지가 있습니다. 왜 오늘날 교회가 바른 교회가 되지 못하나 혹은 왜 세상이 이토록 악하고 범죄가 넘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방관만 하느냐? 왜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 대접을 못 받고 악하게 사는 사람이 활기를 치고 사는 것을 그냥 두시는가 라는 오해 말입니다. 그래서 "아, 나 혼자라도 나서야지!"라는 다짐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마치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인 것처럼 오해할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식의 새로운 피조물이라면 예수님께서 채찍을 맞을 이유도 없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질 이유도 없습니다. 차라리 예수님께서 오셨다면 여기는 박격포 여기는 수류탄 등 람보처럼 나를 따르라고 하면서 베트남에 가서 베트콩 다 죽이면서 설치는 식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보고 "야...영웅이고 우리의 참 메시야다 정말 대단하다"라고 대 환영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생각이 불신세계가 생각하는 잘못된 현실관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문제는 교회에 충실하다는 현 자아의 생각에도 이런 불신세계의 생각이 그대로 표출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왠지 이런 메시야를 보면 그 메시야와 하나님을 향하여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하나님 참 잘했습니다. 나쁜 사람들 죽여야지요."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이 제시한 현실 속에 나타난 메시야가 다음과 같이 언급하십니다. "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말입니다. 정말 전혀 예상치도 못한 낯설기 짝이 없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야말로 세리나 창기나 믿을 만한 소경이나 절뚝발이나 문둥병자나 믿을 메시야로서 이 땅에 와 버렸기 때문에 잘나고 똑똑하고 사회정의를 밝히는 사람들 모두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새로운 피조물'이 무엇을 뜻하는지 재 정립해야 합니다. 정말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이 상식적인 면에서 사회정의나 경제정의나 환경문제 민주제도 세우고 도와주는 것들이 아니고 바로 말씀 자체가 직격탄으로 내 자신을 향해 날아와 터지면서 나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가를 십자가 앞에서 늘 검증시킴을 당하는 자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과 그렇지 않는 사람의 차이점은 현실감을 보는 눈이 달라서 그러합니다. 예수님 안 믿는 사람이 믿는 다는 것은 기껏 잘난 사람이 우대 받고 똑똑하고 착한 사람이 대우받는 현실이라면, 진짜 신앙인이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의인은 하나도 없고 몽땅 죄인 밖에 없다는 사실, 그것을 새롭게 내가 받아야 할 현실로 받아드리는 여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저 하나님과 연관 있다는 것을 뭉쳐 모았다고 해서 천당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이 현실관이 혹은 각자 자신들이 보는 현실관이 과연 성경과 부합되느냐 안 되느냐의 차이점입니다.
성경에 새로운 세계가 있습니다 라고 강조해도 안 믿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현실관에 같이 적응하려고 애쓰다보면 진짜 현실관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심지어 새로운 피조물로서 현실을 살 생각은 안하고 현재 안 믿는 사람이 주장하고 만들어 낸 그 현실에 같이 호응해서 맞추어 가려고 심지어 신앙까지 내어버린다면 이는 진짜 현실을 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말을 심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현실에 부합되는 새로운 현실관입니다. 공중의 새를 하나님께서 기르신다는 예수님의 주장이 새롭게 거듭난 사람에게는 누구나 갖고 있어야 할 현실관이고 믿음이라고 예수님이 이야기하고 계신 겁니다.
또 28절에 보면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백합이나 들풀이나 우리나 공히 오로지 하나님에 의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이 바로 신앙 인이 가져야 될 본래의 신앙이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안 믿는 사람은 어떤 자입니까? 31절에 보니까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를 염려하는 그것은 거듭나지 못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못한 신앙 인이 아닌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갖고 있는 현실관이라는 말이죠.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 염려하는 것들.. 이처럼 성경은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뚜렷하게 구별이 됩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요. 참새를 보면서 자기와 똑 같은 신세라고 여기는 사람은 신자입니다. 참새야 너만 하나님에 의해서 먹고 사는 줄 아느냐? 나도 하나님에 의해서 먹고 살아왔다 라고 직접 현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됩니다. 들에 있는 들풀을 보면서도 "초라한 들풀아 솔로몬의 모든 영광보다 네가 더 크다는데 너만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큰 줄 아느냐 나도 솔로몬의 영광보다 못지 않단다 비록 지금은 내가 아무 것도 걸친 것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이것이라도 나에게 주신 거야" 라는 마음을 가질 때 그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한 사람이에요.
자꾸 "신앙이 모호합니다. 성경이 어렵습니다" 라고 저에게 말씀을 하시는 분이 많은데요, 그런 핑계를 대지 마세요. 성경은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만 모호하지 않습니다. 뚜렷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성경을 모르느냐? 그것은 새로운 현실관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것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는 말씀 속에서 안 믿는 자들이 내세우는 현실관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신자와는 달리 신자가 구하는 것은 뭐냐? 마태복음 6:33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겁니다. 기도하고 간구하고 찾으라는 말입니다. 무얼 말입니까? 그의 나라와 하늘나라와 예수님의 의를 구하라는 말입니다. 거기에 매료되고 거기에 반해서 어쩔 줄 모르고 나 같이 용서받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할 자에게도 예수님의 의 때문에 내가 하나님 나라에 백성이 되었구나에 완전히 반해버린 사람, 그런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뭐가 모호하며 불투명합니까.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세상의 현실관을 그대로 수용하면 우리에게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요. 하나님은 뭐 하십니까? 저들이 저렇게 악한데 벌주지 않고 가만히 왜 계십니까? 아...나는 괜찮은데 저 놈은 나쁜 자입니다 라는, 이렇게 될 공산이 많아요. 기존의 안 믿는 자들의 현실을 보면 '하나님 가진 자는 더 가지고 없는 자는 왜 굶어 죽습니까? 이래도 하나님이 자비롭습니까?' 하고 데모할 가능성이 많아요. 얼마 전에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이 합병 반대한다고 데모했지요. 그 가운데 믿는 자가 몇 명이겠습니까. 그들이 왜 데모할까요? 어떤 이들은 대꾸하기를 "목사님 그 사람들은 그 나라 의를 구하기 위해서 데모 한 것이 아닐까요?"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마는 원 세상에, 그 나라의 의를 위해서 꼭 그런 식으로 데모해야만 하는 겁니까? 그들이 무엇 때문에 모여서 집회를 했습니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위해서 데모를 했잖아요. 그래도 이런 운동을 예수님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나요? 나는 직장에서 잘려도 좋다는 나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인데 라는 생각으로 모든 세상일을 보던가요?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아직도 나 자신의 현실관을 못 갖고 있는 거예요. 성경에서 말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것을 현실로 안 받아드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교회 다니니까 새로운 피조물이겠지 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내년을 맞이해서 (내년이 별로 의미는 있겠습니까마는) 다시 한번 우리의 현 자기의 주소를, 내가 지금 새로운 피조물에 자기의 발을 딛고 있는지 아니면 옛 피조물에 발을 딛고 있는지 한번 돌아봅시다. 지금 현재 내가 산 것만 해도 왠 기적이냐 라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 나라의 의에 대해서 주신 것에 고마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방인과 성도의 차이점이 옛날 유대나라에는 어떻게 이방인과 성도가 구별되었던가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여호아하스 왕이 있었는데 이 왕이 살만하니까 2절에 보니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라고 있습니다. 자.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라는 구절이 있는데 만약에 가위를 가지고 '여호와 보시기'라는 대목을 잘라 봅시다. 잘라 내어 보면 무엇이 같이 없어 지느냐하면은 '악을 행하여도'라는 대목이 같이 없어져요. 즉 하나님이 존재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잔소리한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에 악이 생성되지만 아예 하나님 자체를 걷어 치워버린다면 악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다만 실수한 것, 부족한 것, 최선을 다해도 미흡한 것들만 우리 뇌리에 남게 되지요.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악이라는 개념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의 품성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실제 그대로의 하나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동원 시켜버리면 그 앞에 설 자가 없습니다.
성경 말씀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사람이 모든 율법 지켜도 하나를 어기면 전부를 어기는 것이다." 제가 여러분을 보고 완벽 하라고 하던가요. 완전 하라고 하던가요. 아닙니다. 주제파악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아까 공부시간에 장로님께서 강의 하셨지만 99마리의 괜찮은 양을 놔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찾으러 온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현실은 99마리의 괜찮은 양들만 모아서 단합대회를 열어서 조직을 만들고 힘을 모여들기를 기대하는 것이 이방 사람들의 현실이에요. 얼마나 다릅니까! 스스로 자기가 잃어버린 양이라고 나설 사람이 있겠습니까? 나는 잃어버린 양이다 라고 동의할 그만한 겸손함이 있습니까? 혹시 우리는 이런 핑계는 대지 않습니까? 내가 잃어버린 양이라고 하니까 동의를 하겠습니다만 저 양보다는 내가 낫지요. 그지요 하나님? 이럴 가능성도 많다 말입니다. 전적으로 잃어버리지는 않고요, 예를 들면 "저는 한 마리의 양으로서 목자를 찾기 위해 세시간이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니 나는 참된 양 맞지요?"라고 나올 가능성도 있지요.
잃어버린 양이 맞기는 맞는데 하고서는 뒤에 붙는 것이 많아요. 아닙니다. 여러분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의 자세가 아닙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나 아니냐는 오늘 본문에서 드러나는데 여기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노를 발하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단군의 나라와는 달리 직접 참 하나님이 본격적으로 관여하시는 나라입니다.
오늘 중국에서 오신 분이 세 분 계시는데 중국하고도 달라요. 이스라엘 외의 그런 나라는 가만히 놔두어 버려요. 무슨 짓을 하던 간에 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만큼은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언약에 어긋나는 짓을 할 경우에는 거기서 즉각 반응이 나타납니다. '더 악을 행했더니만 노를 발하사' 노를 발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여기 보니까 '아람왕 하사엘 손과 그 아들 벤하닷의 손에 붙이셨더니'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적도 없는 이방나라를 포진 시켜 놓았다가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범죄를 할 때에 이방인들을 즉각 투입 시켜 가지고 그들의 지배 하에 놓이게 해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그 다음에 4절에 보면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므로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셨으니 이는 저희의 학대받음을 보셨음이라" 또 열왕기하 13:5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에 구원자를 이스라엘에게 주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였으나" 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보냈습니까? 구원자를 보내시는 거예요. 여러분 기독교라는 것은 간단합니다. 옛날 하나님 백성들이 구원이라는 개념이 생긴 이유가 뭐냐 하면 애굽이라는 바로의 이방나라에 잡혀서 꼼짝 못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라는 구원자를 보내주셔서 그들이 그저 구원받았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은 완벽도 아니고 완전도 아니에요. 그러면 무엇인가? 너희들이 옛날 애굽에 있을 때에 어떠했으며 지금 애굽에서 나와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에 살게 되었는데, 이 땅의 생활을 가능케 하는 그 토대가, 그 기초가 무엇인가를 네가 아느냐를 묻는 겁니다. 네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된 기초가 너의 발 밑에 깔려 있느냐는 것입니다. 즉 구세주를 믿나, 너 자신을 믿는가를 묻고 있는 거지요.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자기 힘을 믿고 나왔습니까? 그들이 홍해를 건너기 위해서 보트를 만들었습니까? 총칼을 들고 전쟁에 대비해 있었습니까?
출애굽기 14장 14절에 보면 깜짝 놀랄만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제발 가만히 있으라는 말입니다. 누가 대신해서 싸우나요. 여호와께서 홀로 싸우신다고 합니다. 자..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구원의 효과는 네가 갖고 있는 것보다 월등하다는 겁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온 자가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될 만한 대단한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되게 하시고 다시 새로운 피조물을 새로운 피조물로 되게 하는 그 토대이며 기초입니다.
집사님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아무 것도 안 했는데 구원받았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해야만 됩니다. "전도 열심쟁이 때문에 구원되었습니다"라는 말은 참 신앙적 고백이 못됩니다. 전도 자체가 무슨 구원의 능력이 됩니까? 그 때 모세 때에 홍해의 갈라짐이 구원의 능력이지 그 갈라진 바닷길을 걸어가는 씩씩한 발걸음이 구원의 능력입니까? 헌금이 무슨 구원이 되겠습니까? 이웃사랑이 무슨 구원의 능력이 됩니까? 그러면 무엇가지고 구원되었습니까? 이점은 다른 현실로 봐야합니다. 즉 남들에게 시시하게 여겨지는 구세주만이 가진 그 능력이 바로 구원의 능력입니다.
만약 어떤 분이 말하기를 "자네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한 말을 하네?"라고 해도 여러분은 이렇게 답변하셔야 합니다. "이상해도 할 수 없어요. 저는 새로운 피조물을 받아드리며 그 나라 의를 구합니다. 그 나라 의가 나를 구원했어요. 새로운 현실에 나는 목숨을 걸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디다 목숨을 걸었습니까? 제가 얼른 보기에는 여러분은 안 믿는 사람들이 현실관에다 목숨을 걸은 것 같이 보입니다. 그들의 눈에 낙오자로 안 비치기 위해서 혹은 웃음거리가 안되기 위해서 쓸데없는 경쟁과 비교를 하고 있어요. 바로 여호아하스가 악을 행했다는 것은 2절에 보면 좀 어렵습니다만 "여로보암의 죄를 좇고"라고 되어 있지요. 여로보암이라는 사람이 열왕기상 13장에 보면 어떤 죄를 지었나 하면 "여호와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라고 했습니다. 나한테는 구원자가 필요치 않다는 것이 여로보암의 죄입니다. 왜? 나는 착하기 때문에, 나도 나름대로 의로운 부분이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구원한다는 하나님을 거부한다는 겁니다.
뭔가 해야되는 것이 있어야한다는 것이 여로보암의 죄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에게 어떤 벌을 내리시는가 하면, 너와 똑같은 사고 방식이 여기 있노라하고 옆에 포진되어 있던 아람군대 즉 이방나라, 그러니까 전혀 구원과 상관이 없는 그 나라로 통해 다시 한번 지배당하게 하고 통치 받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들과 이스라엘이 한 통속인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네가 주장하는 그것이 이방나라와 다를 바가 없지 똑 같지?" 그때 이 요호아하스가 어떻게 했습니까? 5절에 보니 구원자를 하나님께서 보내지요. "그들이 간구 하매.. 주여. 우리에게 우리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구세주 보내주소서!"
여러분, 세상에 이만큼 마음이 낮은 자 있겠습니까? 나중에 보면 또 마찬가지로 이방적 사고 방식을 갖습니다마는, 이스라엘 자체가 지금 보여 주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구세주를 보내주소서 하나님이여 우리를 제발 구원해주소서"는 탄성은 완전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알기 때문에 구세주를 요청하지요. 바로 이런 점을 뭐라고 하는가하면 거듭난 사람, 새로운 피조물이라 합니다. 지금 우리들이 평소에 얼마나 고집이 센지 어지간히 당해도 새벽기도에 안 나옵니다. 왜 안 나오는가? 새벽 기도에 가서 설교 들어봐야 늘 듣던 소리 아닙니까? 마음을 낮추어라. 네가 걱정하는 것도 욕심이 아닌가. 똑 같은 소리인데 .. 교회 가기 전에 벌써 정답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알면서도 이 진실을 안 믿는가? 그것은 불신자의 현실관에 빠져서 못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현실관에 준해서 자신이 남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고 싶어합니다. 만약 우리가 세리나 창기가 되어서 "주여 맞습니다. 나는 주님으로 감사합니다"라고 참으로 고백한다면 이것은 제대로 현실을 파악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쪽 세계에서 볼 때에 나는 얼마나 높은 점수를 받을까 에 집착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의 현실세계에서는 소위 실패라는 것은 인생 낙오자가 되는 것이지만 믿는 세계에서 실패라는 것은 구세주를 외면하는 여로보암의 죄가 되는 것이 곧 실패입니다. 이처럼 실패의 개념도 성공의 개념도 다릅니다.
마지막으로 줄줄이 사탕으로 실패한 명단을 공개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 얼마나 실패했는가 한번 보세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 다음에 히 11:11에도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줄 앎이라" 라고 되어있고, 히 11:13에는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히 11:14에는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라고 되어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말하는 노아 또 아브라함, 야곱, 요셉, 그리고 모세, 사도 바울, 야고보, 베드로, 스데반 집사, 거지 나사로, 한결같이 줄줄이 사탕같이 이 땅에서 실패자의 연발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낙원에서 편히 쉬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셋째 하늘을 구경하고서 너무 좋아 빨리 죽고 싶다고 했습니다. 셋째 하늘이 그리워서 그 나라의 의를 사모하더란 말입니다. 자기는 굶어 가면서 말입니다.
여러분 과연 자신이 신자 맞습니까? 새로운 피조물이 맞습니까? 그렇다면 구세주가 진짜 좋아지는 구원자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현실 속에 잠기는 남은 생애를 지나면서 그 새 현실에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걱정하고 근심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바로 남을 생각하는 현실에 낙오자가 될까 싶어서 실패자로 찍힐 까 싶어서가 아닙니까? 그러나 거지 나사로가 죽을 때도 거지였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에 그 나라 의를 구하는 새로운 현실에 우리의 목숨을 걸고 모든 마음을 맡겨서 다시는 겁내지 않고서 기죽지 않는 생활을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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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4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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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