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두 제자
Re..마 10: 1- 6 (12 제자의 등장)
이름 : 이근호(IP:)
열 두 제자
2003년 8월 3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0:1-6
10:1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10:2 열 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10:3 빌립과 0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10:4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10:5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10:6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성경의 처음에는 창조 이야기가 나옵니다. 중간쯤 보면 예수님이 오셔서 씻어 준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세상이 심판받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에 담긴 내용이 과연 우리 자신을 통해 실제 현실로 전환될 수 있을까요? 아니, 그렇게 되고픈 마음이라도 있으신 것입니까?
신자는, 이제부터 예수님께서 시킨대로 살겠다고 다짐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우선 예수님께서 엄연히 살아계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마치 지금 여러분 옆에 앉아 계신 분이 분명히 살아있는 물체인 것처럼 말입니다. 과연 살아있는지 없는지, 이름을 불러보시겠어요?
그럴 필요없을 것입니다. 딱 보시면 압니다. 그 다음으로 그 분은 뭔가 분주하고 일에 열중하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지금 옆에 계신 분이 여러분에게 명령이나 지시를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별 신경 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들의 옆에 예수님이 앉아 계신다면 부지런히 우리에게 지시와 명령을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지만 그 아버지라는 분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은 분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일하시니 우리도 일하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자가 불신자의 차이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실제로 시킨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시키신 일이 바로 성경의 줄거리를 차지하는 그 이야기입니다.
교회라는 것이 이렇게 해서 생겨납니다. 즉 말씀 속에 내용이, 글자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 튀어나와서 교회가 됩니다. 따라서 교회가 먼저 있고 그것을 유지하면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먼저 계시고, 그 예수님의 지시와 명령에 따라 아직도 살고자 자들이 있다면 교회는 존속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형상 교회라고 이름 지은 단체는 있는데 실질적으로 예수님의 지시와 명령에 무감각하고 아무런 교제가 없는 자들이 모였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사교단체일 뿐입니다. 그저 안면 있는 사람들끼리 친하게 지내고 싶어 모인 것에 불과합니다. 외로움이나 해소해 보려는 것은 고작 목적이겠지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하면, 오늘 본문에 보면, 12제자가 어떻게 뽑혔느냐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우선 감투 하나 쓰고 보자는 식으로 덤벼드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 그룹에서는 이런 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제자됨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됨의 자질 같은 것도 없습니다. 제자되기 위한 요건 같은 것도 없습니다. 제자들의 제자됨은 하등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관심은 오직 하나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자신의 일입니다. 그것 뿐입니다. 집 주인이 집수리를 하기 위해 목수와 계약을 하는데 집 주인의 입장에서 최종적으로 중요하고 관심갖는 것은 하나 뿐입니다. 그 목수의 가정 형편도 아니요, 출신 지역도 아닙니다. 성격 좋으냐 나쁘냐도 아닙니다. 목수 자격증이 있느냐 없느냐도 아닙니다. 내 집 제대로 수리하느냐 못하느냐입니다. 그것 뿐입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을 통해서 제자 입장을 옹호할 생각을 아예 먹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 세상의 노사관계에서는 일방적으로 사용자 편에서만 생각해서는 아니된다는 말이 있지만 예수님 나라에서는 노동 운동이 허용이 되지를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새로운 세계를 만드시려고 합니다. 현 인간들이 붙잡고 죽어라고 안놓으려고 하는 이 인간 세계를 개선하려고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건축 리모델링이 아닙니다. 아예 철거해 버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다 새 질서. 새 나라를 건설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의 전도 태도를 잠시 봅시다. 사도행전 24:24-25에 보면,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벨릭스라는 사람은 총독입니다. 총독이 현재 자신이 무게있게 지배하는 그 국가 체제를 스스로 부정할 리는 없습니다. 총독 입장에서는 사도 바울에게 기대하는 것은, '내 나라에서 괜히 시끄러운 일을 만들지 마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전혀 그 총독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 있어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지시와 명령을 내리는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형편을 고려해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은 단호합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내가 그 사람을 부인하리라"하든지 혹은 "누구든지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이점이 중요합니다.) 나를 위하여 죽는 자는 살리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동업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누구하고도 타협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순전히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이 받은 사명만 감당할 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런 예수님의 취지에 전혀 호응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일에 차질이 생길 것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제자들이 받은 권능은 제자들의 자질이나 재주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겁니다.
누가복음 10:17-20에 보면,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모든 성도들은 다 이런 권세를 받아야 합니까? 여러분 이런 권세없는 성도는 아예 성도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12:28-29에 보면,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를 세간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탈출이 불가능한 무능력한 세간으로 말입니다. 세간을 마음대로 손댈 수 있는 분이 곧 세간인 우리의 주인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성령의 권능을 안 입고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성도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지 한국 교회 교인들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백화점에는 누구나 고객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백화점 문 열고 들어와서 물건 구경하면 곧 손님인 것입니다. 그러나 백화점 사장의 아들되는 것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집안이어야 하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가정 형편이나 사정이나 그런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아니하시고 일방적으로 뽑아서 권능을 주신 것은 오늘 본문 5-6절에 나오는 취지를 달성코자 한 겁니다.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권능의 종착점은 병고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 추방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참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상해 낸 나라이거나 민족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에 뜻에 의해서 나타나는 기적의 사람들만 모인 나라입니다.
이스라엘만이 거룩한 제사장 나라요, 언약의 나라요 하나님이 기대하신 그 나라입니다. 골로새서 1:1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은 권능 안 받고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 나라의 백성으로 가입한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를 알려주기 위하여 예수님은, "그 나라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흔히 얻고자 하는 영광은 사실은 썩어 문드려질 영광입니다.
여러분 쉰 밥 먹을 수 있습니까? 없지요. 쉰 밥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패한 밥이기 때문입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세상 영광이란 예수님께서 거절하신 영광이요 부패할 수 밖에 없는 영광입니다. 진정한 영광이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5:11-12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그동안 우리는 이 영광을 얼마나 사모했습니까? 어쩌면 피해 달아나지는 않았습니까? 죽어도 좋은데 가기는 원하면서 그것은 영광스러운 고난의 직분과 더불어 미리 주어진다는 사실을 왜 잊어버리려 하십니까!
스데반 집사를 보세요. 그는 죽어가면서도 그것을 도리어 영광스러운 일로 여겼습니다. 내심 자신의 처지가 자랑스러워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13에 보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직접 권능을 받지 않으면 이런 자리에 포함될 수 없습니다. 이 제자됨의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분인지 차라리 인생 끝날때까지 모질게 서름받고 수난을 받고 욕얻어 먹음을 당해도 좋으리 만큼 영광스럽습니다.
여러분 우리 거꾸로 삽시다. 세상을 다르게 봅시다. 이런 자만이 예수님의 권능이 임해있기에 그 사람의 이름이 하늘에도 적혀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울 때 안울 때도 구분못하는 저희들입니다. 예수님의 주신 것은 옆으로 밀쳐놓고 자기 원하는 것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통곡한 우리들이 아니옵니까? 정신을 고쳐 먹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