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강-말씀의,복수(왕하10장15-24)-2ki001210
14강-말씀의,복수(왕하10장15-24)-2ki0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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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말씀의 복수 (왕하 10:15-24)
15 예후가 거기서 떠나가다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이 맞으러 오는 것을 만난지라 그 안부를 묻고 가로되 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진실하냐 여호나답이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가로되 그러면 나와 손을 잡자 손을 잡으니 예후가 끌어 병거에 올리며
16 가로되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 하고 이에 자기 병거에 태우고
17 사마리아에 이르러 거기 남아 있는바 아합에게 속한 자를 죽여 진멸하였으니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18 예후가 뭇백성을 모으고 이르되 아합은 바알을 조금 섬겼으나 예후는 많이 섬기리라
19 그러므로 내가 이제 큰 제사를 바알에게 드리고자 하노니 바알의 모든 선지자와 모든 섬기는 자와 모든 제사장들을 한 사람도 빠치지 말고 불러 내게로 나오게 하라 무릇 오지 아니하는 자는 살리지 아니하리라 하니 이는 예후가 바알 섬기는 자를 멸하려 하여 궤계를 씀이라
20 예후가 바알을 위하는 대회를 거룩히 열라 하매 드디어 공포하였더라
21 예후가 온 이스라엘에 두루 보내었더니 무릇 바알을 섬기는 사람이 하나도 빠진 자가 없이 다 이르렀고 무리가 바알의 당에 들어가매 이편부터 저편까지 가득하였더라
22 예후가 예복 맡은 자에게 이르되 예복을 내어다가 무릇 바알 섬기는 자에게 주라 하매 저희에게로 예복을 가져온지라
23 예후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으로 더불어 바알의 당에 들어가서 바알을 섬기는 자에게 이르되 너희는 살펴보아 바알을 섬기는 자만 여기 있게 하고 여호와의 종은 하나도 너희 중에 있지 못하게 하라 하고
24 무리가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려고 들어간 때에 예후가 팔십인을 밖에 두며 이르되 내가 너희 손에 붙이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도망하게 하는 자는 자기의 생명으로 그 사람의 생명을 대신 하리라 하니라
『주님과 우리사이의 사랑은 그 누가 알겠습니까. 깊고 깊은, 넓고 넓은 그 사랑을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다시금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늘 성경에 보면 바알을 섬기는 자와 여호와를 섬기는 자를 하나님께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사람을 둘로 구분한다는 자체가 우리 인간 무리를 기분 나쁘게 하는 겁니다. 흑과 백 , 희고 검은 사람을 구분하고 양과 음, 어둠과 빛 된 자를 구분한다는 것, 세상을 같은 지역에서 마음 맞대고 거주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사이의 끈끈한 정을 하나님께서 매정하게 둘로 쪼갠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우리 사이에서 날카로운 긴장을 조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갈등이 새롭게 발생될 수가 있습니다. 형제이면서 결국 형제라 할 수 없는 사이로 끝나 죽어서 영원히 갈라서야 할 그러한 운명에 우리들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 정말 대단히 살벌하지 않습니까?
성경말씀에 보면 두 사람이 잠을 자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남겨둔다고 했습니다. 잠 잘 때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잠을 잘 때에는 마음 맞추어서 잤을 텐데 하나님께서는 어이하여 그 애틋한 정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시는 지 우리는 냉정한 심사를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 세상을 축복과 저주의 질서로 재편성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사람은 저주받는 거예요. 그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양과 염소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는 양과 염소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눈물이 나와요. 왜 눈물이 나오는가 하면 도대체 인간은 똑 같은 인간인데 염소 같은 인간은 무엇이며 또 양과 같은 인간은 무엇입니까?
오늘 저녁에 무슨 일이 있는가 하면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습니다. 여러분 평화상이라는 것이 누구에게 주는 것입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를 날카롭게 구분 지었다는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평화상입니까? 아니면 두루뭉실 같은 우리 인간이 서로 사이 좋게 잘 지내게 했다는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평화상입니까?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이 왔을 때 과연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노벨 평화상을 주겠습니까? 내가 말하노니 염소는 왼편에, 양은 오른편에 그리고 염소는 영원한 지옥 불에, 양은 영원한 영생의 나라에, 이렇게 외치고 가르치는 예수님께 노벨 평화상을 과연 수여하겠나 말입니다. 인간의 평화를 깨고 너무 살벌하게 세상을 만든 주모자가 될 것이다 라고 평가하면서 아마 더 나아가서는 죽이고 말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결국 평화를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죽었습니다만.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 한 사람을 죽여 옛 평화를 회복하겠다고 유대인들이 주장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알을 섬긴다는 이유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여호와를 섬기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죽여라.... 참 아무리 하나님이라지만 약하디 약한 인간에게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이 안 든다고요? 물론 요즈음 교인들이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아예 관심조차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 죽은 사람들 가운데는 단지 하나님은 여호와를 섬기지 않을 뿐이지 성품상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착하게 하고 자기 부모에게 효도하는 가정과 사회에 봉사하고 이바지하고 자식을 위해서 새벽부터 밤늦도록 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단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는 그 사실 빼놓고 말입니다. 그러나 전혀 이러한 개인적인 자질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여호와를 섬기지 않고 안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영원한 형벌을 내린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고린도전서 16장2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를 자꾸 윤리적으로 몰아가고 또 기독교를 인류공영에 이바지하는데서 그 본래의 가치가 있다는 식으로 해석을 해나가는 사람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사람에게는 원래 수준 차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착한 만큼 복 받는다는 것이 얼른 생각하면 공평한 것 같지만 그러나 좀 더 내부적으로 파 헤쳐보면 공평치 못합니다. 왜냐하면 날 때부터 사는 여건이 여의치 못해 남들이 착한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만큼 갖지 못한 사람들이 사람마다 차이납니다. 그러면서도 결국 단지 착한 일을 적게 했다는 근거로 지옥 가는 것이 도리어 불공평합니다. 잘 들어보세요. 차라리 성경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되는 것이 공평합니다. 즉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봤습니다. 공평하게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 한에서 멸망치 않는다라고 하셨거든요. 그 어떤 인간도 하늘에서 보내주신 독생자를 믿지 않는 자에 한해서 지옥간다는 것이 더욱 공평한 상황이 아닙니까? 저를 믿는 자에 한에서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영생을 이룬다. 차라리 이것이 얼마나 확실하게 공평한 것입니까. 왜나 구요? 모두가 죄인이니까 그렇죠. 교도소에 가보세요. 날 때부터 부모를 잘못 만나서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 그저 자기의 짐승적인 욕망으로 살다보니까 훔치고 남을 죽이고 성질 난다고 살인해서 교도소에 간자들이 많잖아요. 그 사람들이 남들보다 날 때부터 성질이 이상스럽게 포악해서가 아니라 제가 보기에는 그들의 부모 밑에서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면 설마 사람을 죽이고 술 먹고 난리를 치고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배웠다고 해서 좋은 사람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직폭력배에 들어가서 문신을 새기고 그런 쪽으로 빠지지는 않을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나 공평한 거예요. 독생자를 주셨으니, 즉 하나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이것이 얼마나 공평합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에게 이 공평이 공평으로 받아 드려지지를 않고 문제성 있는 하나님으로 외면하는 것은 제각기 자기 잘 난 맛에 사는 그 재미에서 안 벗어나려는 교만 때문입니다. 이러한 죄가 하나님의 자비를 스스로 가로막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비를 구할 대상으로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말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일관되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믿음으로 구원받는데 문제는 진짜 하나님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곧이곧대로 믿느냐하는 겁니다. 성경에서 양과 염소가 나누어지고 두 사람이 자다가 하나는 지옥에 하나는 영생에 들어가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그런데 자.. 이것을 너희가 믿느냐라고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독생자가 되시는 분의 말씀을 믿으면 구원받는, 너무도 간단한데 말입니다 문제는 과연 그것을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더 축약해서 말씀드리자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과연 믿는가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구원 싸움은 이것입니다. 행함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 인 것입니다. 믿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융통성 있게 하시면 안되나요? 하는 식으로 믿기를 대체하려고 덤벼듭니다. 제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다 해주실거니까 하나님 안 믿어도 봐 주세요 예? 이래 나오는 것입니다. 즉 내가 내 할 것 다 하겠다는 이 사실을 나는 믿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레갑 족속이 나옵니다 15절을 봅시다. "예후가 거기서 떠나가다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이 맞으러 오는 것을 만난지라..." 레갑의 아들이 나옵니다. 자, 레갑의 가문이 어떤 가문인지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이 레갑의 아들은 요즘 사회 같으면 왕따 당해도 천 번 만 번 당해도 마땅한 자들입니다. 레갑의 아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우선 간접적으로 말씀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요즘 와서 저는 히브리서 11장을 보면서 우리 박사교회나 다른 교회, 그리고 저나 여러분들을 보면서, 대조해서 다시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믿는 자는 이렇게 살았느니라 라는 것이 히브리서 11장인데 제가 아까 말씀 드렸듯이 하나님 편에서 해 줄 것은 다 해 주었다, 이미 지옥은 있는 것이고 취소 될 수 없는 것이고 천당도 있는데 믿는 자에게는 문제 될 것이 없다, 독생자를 믿으면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 이 히브리서 11장에 나와 있는 대로 믿는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대개 보면 자칭 잘 믿는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이 어느 정도 믿음이며 어떤 게 믿음인가 하는 점을 확인해 봅시다.
여기 11장 24-26절에 보니까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라고 되어 있지요.
자, 이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믿음이 뭐냐 하면 세상이 주는 부귀 영화를 마다하고 세상이 주는 부귀영화보다도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의 상을 더 귀하게 여기고 가슴 뿌듯하게 여기는 그것을 믿음이라 하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많은 분들이 속으로 생각하실 거예요. "목사님 저도 압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여러분이 과연 이 사실을 사실임을 믿고 사는 가가 문제인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자꾸만 히브리서 11장을 곁눈질을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분명히 성경에 믿음이라는 것이 이런 식이 믿음이고 이런 수준이 믿음인데 어떻게 교회와 세상은 이런 수준의 믿음이 없느냐 하는 거죠. 전부 다 믿는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모세처럼 바로의 공주의 아들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을 받는 것을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가 받는 그 능력을 세상의 모든 부귀와 명예와 출세와 성공보다도 더 큰 보배라 여겼다. 자...이것을 두 자로 말해서 믿음이라고 하는데 그런 믿음이 있는 자를 과연 교회 안에서 구경할 수 있을지 라는 쪽으로 생각이 가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35-38절에 보면 거기에도 또 믿음이 나오는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세상이 감당치 못한 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믿는 자', 이것은 세상이 갈지도 못하는 자 라는 말과 같은 말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제가 10년 전부터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세례를 줄 때 시험을 칩니다. 자 다음에 이대로 살 것 같으면 O표하고 그렇지 않으면 X표해 보라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교회 와서 세례와 학습을 받을 때 다 거쳐왔을 거예요. 그런 시험을 치르게 하면서도 과연 내가 목사로서 건방지게 이런 시험을 쳐서 되겠는가 라며 갈등을 합니다. 그러나 행여나 믿음이 새로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저들의 마음 자체가 "목사님, 제가 지금 세례 받는 것이 장난 삼아 받는 것이 아니고 목숨걸고 받는 겁니다. 저는 세상이 감당치 못할 그런 인간이고 싶습니다."라는 고백을 자신이 확인할 수 있다 싶어서 실시하곤 했습니다.
이 분들이 O표할 때 무슨 마음으로 했겠습니까? 목사 때문에 억지로 O표 했나요? 아니겠지요. 세상이 감당치 못할 정도의 신앙인이 되어서 톱에 켜는 것과 모든 악형을 구차히 면하고자 하지 않는 다짐으로 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세상아 내 것을 다 가져가도 좋은데 단지 하나는 터치를 하지 마라 나는 세상이 주는 부귀영화보다 하늘나라 받을 천국은 족히 비교할 수 없다. 나는 그것 하나는 꼭 쥐고 있다. 나는 하늘나라를 포기 못한다!"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래야 과연 세상이 감당치 못할 자가 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렇게 세례를 받아놓고서는 사회에 나가서는 이 눈치 저 눈치 모두 다 보고, 행여나 내가 손해 볼까봐 자진해서 미리 아부하기 바쁘면서 그러면서도 교회에 와서는 나는 믿는다고 하니 자연적으로 저는 다시금 히브리서 11장을 곁눈질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 본문을 찢어버릴까 아니면 매직으로 지워버릴까?"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성경에서의 믿음은 이것이 믿음인데 이상하게도 한국교회의 믿음은 완전히 다른 것을 믿음이라고 우기니 정말 헷갈리는 거예요. 저걸 믿음이라 하니 이것이 안 맞고 이것을 믿음이라 하니 저것이 안 맞고 믿는 사람은 없고 ....저가 엉뚱한 곳에 저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이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시대나 마찬가질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레갑의 아들, 레갑의 족속들이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등장합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 나라가 겉으로는 모든 백성이 믿는 자라고 서로를 알고 있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엉망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여호와인데 속으로는 바알을 섬기는 겁니다. 날 때부터 할례 받고 결혼할 때 성직자에게 주례 받고 죽을 때 성직자에게 장례까지 맡겨버리는 그런 인생의 틀을 유지하지만 이러한 할례식이나 결혼할 때나 임종시 말고 나머지 인생은 전부 다 세상적인 종교로 가득 채운 채로 살아가는 그런 이중적인 생활을 한 거예요. 여호와는 형식뿐이고 성전에 나오는 것도 그러하고 요즈음 교회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대부분은 여호와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이방 종교 식으로 무엇이든지 동원하는 그런 식으로 살아갔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겉으로는 기독교인데 속으로는 무속신앙이지요. 다른 말로 기복신앙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저는 액땜목회라고 합니다. 액을 떼우기 위해 교회 나와주는 것 같은 것이지요. 교회 안 나오면 한 주일 내내 재수 안 좋고 교회 나와주면 이상하게 재수 좋은 일 생기더라 그래서 내 재수 좋아라고 교회 다니는 이 바알 종교 이것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일부가 아니고 이스라엘 전부였습니다.
썩어 빠진 믿음만이 가득 찬 이 나라에 별난 자가 있었습니다. 홀로 하나님을 믿는 특수한 가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레갑 가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눈총 받았겠습니까. 남들 다 신앙 버리는데 자기는 무슨 돛대라고 신앙을 지킵니까? 집안 가족들 모르게 살짝 교회 다니는 아주머니들 많습니다. 남자들은 바쁘다고 안 다니지만 도시에 가면 많습니다, 우리교회는 남녀가 비슷비슷하지만 다른 교회가면 여자들이 월등하게 많거든요. 여성들이 교회활동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믿음이 좋아서 그렇다고 하기는 힘듭니다. 그것은 남편 바라보다가 남편을 더 이상 바라볼 가치 없다고 여기고 세상을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교회나 정 붙이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체념이라 합니다.
그런데 레갑 가족은 어느 정도로 심하게 하나님만 찾았는가 하면 예레미야 35장에 그 내막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계시를 줍니다. 예레미야야, 저 레갑 족속에게 가서 슬쩍 시험해봐라 하나님의 뜻인데 포도주를 마시라고 해봐라 라고 합니다. 35-37절에 "내가 레갑 족속 사람들 앞에 포도주가 가득한 사발과 잔을 놓고 마시라 권하매 그들이 가로되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영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도 재배치 말며 두지도 말고 너희 평생에 장막에 거처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우거하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렇게 살아야 믿음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레갑 자손은 일종의 특수부대인데 하는 일은 뭐냐하면 결국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모든 사람이 신앙이 다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안 떨어지는 믿음이라는 있는데 이런 믿음이다 라는 특수한 삶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기 위해 선택된 족속이 레갑 자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조치이지요. 이 사람들은 민수기 6장에 나오는데 나실인이 헌신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나실인이라고 하는 하나님께 특별히 바쳐지는 자들이 따로 있는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고 생포도나 건포도를 먹지말고 죽은 자를 손으로 만지지 말고. 등 등 여러 가지 교정이 나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까 레갑 자손도 집을 짓지 말고 텐트생활하고 땅도 갖지 말고 그냥 버티라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만 찾고 가만히 있는 겁니다.
군에 갔다 온 남자들은 아시겠습니다. 군에 가면 고생입니다. 그래서 군에 빠지려고 하지요. 전방에 가면 고생이 더 심합니다. 훈련이 많으니까요 . 후방에는 쉽습니다. 전방에서 고생하는 아들을 부모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 내 아들 전방에 보내지 말고 저 불굴사 산에 산불방지나 하게 해 주세요 라고 하겠지요. 산불 방지를 하면 책도 마음대로 볼 수 있고.. 물론 그렇게 근무태만하면 안 됩니다마는 어쨌든 상관들에게 하루 종일 시달리고 지배받는 것 보다 나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달리 생각이 듭니다. 한창 혈기왕성한 20대 초의 젊은이를 산불 방지한다고 하루종일 망원경 들고 혼자 있다면 그것도 못할 짓일 것 같아요. 몽둥이로 맞더라고 같은 처지의 병사들과 살 비비는 것이 낫지 혼자서 하루종일 어떻게 있겠습니까?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보세요 목사님, 아무 것도 안하고 신앙생활에만 전념할 수 있으면 저는 참 좋겠어요" 하시겠지만 글쎄요, 아무 것도 안하고 있어 보세요 어떤가? 못삽니다. 채소 재배도 아니하고 아무 농사도 않고 자기 집도 없고 그냥 맨 날 기도만 하고 성경만 보세요. 어지간한 사람은 못 견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어렵고 힘든 사명을 받은 자들이 레갑 족속이라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에게 예레미야가 슬쩍 떠봅니다. "어이, 보소. 하나님의 계시가 새로 나에게 떨어졌는데 당신들 술 먹으라고 권하라 하시더이다"라고 말하지요. 그로나 레갑 자손은 단호합니다. "우리 술 못 먹습니다. 이것이 우리 가문의 대대로 운명입니다."
예레미아 35장12-14절을 보면,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너는 가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내 말을 들으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겠느냐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그 자손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한 그 명령은 실행되도다 그들은 그 선조의 명령을 순종하여 오늘까지 마시지 아니하거늘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부지런히 말하여도 너희는 나를 듣지 아니하도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예레미야가 슬쩍 떠보는 것은 이 사람 교회 안 나오고 저 사람 교회 안 나오고 신앙 다 버렸는데 너도 예수 믿지 말라 라는 그런 풍토가운데서 히브리서 11장처럼 세상이 주는 부귀 영화 보다는 하늘나라 천국을 사모하는 그런 특수한 사람이 있더란 말입니다.
오늘 설교 내용은 하늘나라의 심판의 기준이 뭐냐를 따지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둘로 나눈다고 했습니다. 둘로 나누어서 한쪽은 지옥 보내고 한쪽은 천국 보내는데 그 둘로 나누는 기준이 뭐냐 하면 그 기준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믿는다는 것이 요즈음 누구나 다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 믿는다고 자처하는 이 이스라엘은 망하고 만 겁니다. 예후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곧이곧대로 심판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식으로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참 이상하다 나 유아 세례 받았고 주례도 목사님이 하셨고 죽을 때도 장례식을 목사님이 할건데 왜 내가 지옥에 가야 되지?"라는 것과 같습니다. "아, 하나님을 믿으려면 저렇게 한결같아야 돼 저것이 참 믿음이 아닌가" 라는 점을 익히고 배운다는 것입니다.
자, 정의를 내려봅시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남이 변질될 때 변질되지 않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옆 사람 변질 될 때 나 홀로 변질 안 되는 겁니다. 다 타락 할 때 사람이라는 것은 사회적 존재라서 자연적으로 그 분위기를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의 믿음은 어떤 분위기 속에서도 유지할 수 있는 믿음이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독생자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고 구원을 받습니다. 지금도 이 소식은 변함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거예요. 그런데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진리는 변함이 없는데 왜 예수 믿는다는 그 믿음은 변하느냐 말입니다. 그것이 답답하다 말입니다. 하나님이 뭘 하라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뭐를 요구했습니까? 돈을 바치라고 하셨습니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요즘 김용옥 철학자가 TV에서 강의하고 있는데 지난번에 이런 강의를 했습니다. "제가 기독교에 대해서 이제는 그만 치고 싶은데 한가지는 분명하게 하고 싶습니다. 뭔가 하면 신앙을 빙자해서 헌금을 강요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종교라도 사교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좌석에서 박수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큰 사기꾼 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교회가 작으면 어떻습니까? 교회가 작으면 구원이 그냥 지나가 버립니까? 십자가의 죽으심이 큰 교회만 위하여 죽으셨나요? 사람들이 얼마나 믿음이 없는지 예수는 안 믿고 교회는 믿어요. 교회를 믿으니까 마귀가 그 교회에서 권력자로 행세하며 신앙 자체를 변질을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만 쳐다보고 있으니 그것이 시험거리가 된 것입니다.
너도 교회 믿나? 나도 교회 믿는다. 다 교회 믿는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교회 안 믿고 예수 믿는 사람 나와보라고 한다면 이들이 바로 오늘날의 레갑 자손입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합니까? 우리의 구원의 기준은 교회가 아니고 예수님입니다. 목사님 교회 믿는 것이 예수 믿는 것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라고 반문하시겠지만 마찬가지가 아닙니다. 교회라는 것은 하나의 조직이고 집단이기에 그 집단 속에서 내가 집단을 이용할 가치가 있는 반면에 예수님은 이용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복종해야 되고 고개 숙여야 될 분인데 어떻게 같습니까? 평소에 현대인이 좀 배웠다고 따집니다. 예수를 따지고 하나님을 따지면서 이게 뭐야 하며 건방지게 따지는데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 나 때문에 돌아가신 분이라면 고개 숙이는 자가 진짜 믿는 자며 영생 받은 자입니다. 부처 앞에 고개 숙이지 않고 김대중이나 사람에게 고개 숙이지 않고 고개를 숙인다면 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뿐임을 자각하는 그 사람이 세상이 감당치 못한 사람인 것입니다. 환란과 핍박이 오더라도 세상의 부귀 영화 보다도 예수님을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지요.
레갑의 역할을 예수님이 하시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교회는 뭐냐하면 교회 속에는 경쟁이 있습니다. 누가누가 잘 하나를 목사가 유도해서 부추기죠. 저 사람은 헌금하는데 너는 왜 안 하느냐 면서 경쟁을 유발시키지요. 교회에서는 잘 난 사람은 잘 난 사람끼리, 못난 사람은 못난 사람끼리의 질서를 형성 시켜 가지고 세상 조직과 다를 바 없는 단체로 변모시키는 겁니다. 영혼의 자유는 억압당하고 난 데 없는 높은 자라고 자처하는 자가 등장해서 사람들을 명령하지요. 또 그것을 쉽게 용납하는 분위기입니다. 물론 높은 사람은 좋겠습니다만 못난 사람은 교회에서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니까 김용옥씨가 하는 말이 모든 교회가 돈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어떤 이유로 해서든지 신앙을 빙자해서 돈을 갈취하는 것은 사교다 했습니다. 즉 사이비교, 이단 종교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어서 예후라는 사람이 레갑과 손을 잡고 심판을 나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레갑이 그 당시 신앙 점검의 기준 점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3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나리라 하시니라"
예후가 하는 일은 예후가 개인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었고 뜻대로 순종을 한 거죠. 예후가 하는 일을 개인이 한 것이라 생각지 말고 나중에는 예후도 믿음이 없었습니다만 하나님의 일이라 보았기에 레갑 자손은 예후의 손길을 허락한 것입니다. 여기서 예후는 바알 섬기는 자를 떠봅니다. 예후가 하는 말이 나도 바알을 섬기려하니 바알 제사를 믿는 자는 다 나오너라 24절을 보면 바알 믿는 자를 다 죽입니다. 이것 다 속임수지요. 자, 이러한 속임수를 써 가지고 다 훑어 내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고 하면 마지막 심판 때에는 한사람도 숨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의 본색을 위장해서까지 숨길 만한 그러한 여지를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녀도 심지어 목사가 되어 있어도 그것이 믿음이 아니예요 이것은 교회라는 조직을 위해서 자기가 먹고 사려는 위선일 수가 있습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다녀도 생활의 과속도가 붙어서 종교라는 습관이 될 수 있습니다. 생활 습관처럼. 그것도 믿음이 아닙니다. 유혹과 시험이 자꾸 옵니다. 떠보는 것이지요. "남 다 떨어졌어. 지금 예수 믿는 사람이 네 주의에 거의 사람 없잖아 또 어떤 사람은 너 교회에 몇 년 다녔는데 장로도 못되었나 다른 교회가면 너는 장로 다 됐다. 너는 장로도 안 되었네." 하여튼 예수 말고 다른 것 가지고 자꾸 흔들어 놓는 것, 바로 이런 데서 우리들의 본색이 나옵니다. "그래 없다. 나는 죄인이다 아무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끝까지 믿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독생자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 나는 그것을 양보할 수 없어" 바로 이런 고백을 하나님은 요구하십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는 쉽게 나옵니다마는 밖에 나가면 어렵습니다.
다시 한번 촉구합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쪽 방면의 책을 보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신이 있어서 신이 만든 것이 아니고 사람이 만든 것인데 종교가 나쁜 것은 아니다. 종교라는 것은 어려운 자들에게 도와주고 사랑을 하기에 참 좋은 거다 하지만 어떻게 종교가 너의 절대가 될 수 있고 너의 전부가 될 수 있는가? 신도 인간을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인간을 위해주어야지 신이 되어 가지고 지옥을 만들어 가지고 인간을 둘로 쪼개고 예정하시고... 라는 이런 신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믿음이 좋은 사람은 믿겠지만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의 평균치 신앙은 못된다. 그러니 예수를 믿더라도 광신도처럼 믿지 말고 그저 종교는 취미처럼 슬근슬근 믿어야지. 이래야 정서적으로 안정적이고 남들 보기에도 네가 정상적으로 산다는 평가를 받지. 그런데 신앙이 좋다는 네 말대로라면 아무리 착하고 부모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남 어려운 사람 신장, 간을 다 떼어주고 해도 결국 예수 안 믿는 것 때문에 지옥 간다 말인가? 그게 자비로운 사랑의 하나님의 뜻인가 매정하게도. 냉철하게 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냐?"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답변해야 합니다. "네가 예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그런 식으로 핑계를 대지 말라 어쨌든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 주님 이외에는 다른 구세주가 없다. 너나 나나 지금 살아가고 있는 다 주님의 뜻이며 은총의 결과이다. 즉 세상 모두는 하나님께서 예수님 중심으로 만들어 놓았다."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만 찾는 예수 사랑에 빠져 정신이 없는, 주님의 사랑이 세상의 모든 고민을 다 물리칠 수 있는 그런 믿음을 갖고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절대적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에 빠져 보세요.
빠져 보시면 그 동안 여러분들의 고민거리 걱정거리가 아무 것도 아닌 거예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 모든 것이 고민거리가 되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날 사랑해 주는 분이 있다면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아무 것도 문제가 안 되는 거예요. 괜히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 핑계 저 핑계 대지 마세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것이 처음이고 끝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자식에게 부모의 사랑이 전부이듯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면 우리한테 일어나는 일들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실패해도 사랑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지막 때가 되어서 이런 주장도 나오고 저런 주장도 나오고 온갖 주장들이 다 튀어나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것은 교회가 웅성거리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믿고자 하는 것은 늘 사랑을 주고받았던 가족이 아니라 정말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죽으신 그 주님을 사랑을 인정하고 수용합니다. 주의 사랑으로 죄인의 괴수인 저희들을 구원해주신 그 사랑을 평생이 다 가도록 감사 감사하면서 세상을 모두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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