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강-평안하뇨(왕하9장21-26)-2ki001126
12강-평안하뇨(왕하9장21-26)-2ki001126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64)
12. 평안하뇨? (왕하 9:21-26)
2000, 11, 26 이근호
요람이 가로되 메우라 하매 그 병거를 메운지라 이스라엘 왕 요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가 각각 그 병거를 타고 가서 예후를 맞을쌔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토지에서 만나매 요람이 예후를 보고 가로되 예후야 평안이냐 대답하되 네 어미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요람이 곧 손을 돌이켜 도망하며 아하시야에게 이르되 아하시야여 반역이로다 예후가 힘을 다하여 활을 당기어 요람의 두 팔 사이를 쏘니 살이 그 염통을 꿰뚫고 나오매 저가 병거 가운데 엎드러진지라 예후가 그 장관 빗갈에게 이르되 그 시체를 취하여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지라 네가 기억하려니와 이전에 너와 내가 함께 타고 그 아비 아합을 좇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이 아래 같이 저의 일을 예언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젯날에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또 말씀하시기를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 시체를 취하여 이 밭에 던질지니라 (왕하 9:21-26)
『할렐루야! 우리가 영원히 주님을 찬양해야 되고 감사해야 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말씀을 통해서 찬양을 받아야 합당한 분이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성경의 예언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라는 것이 성경에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에도 나옵니다.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지라 네가 기억하려니와 이전에 너와 내가 함께 타고 그 아비 아합을 좇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이 아래 같이 저의 일을 예언하셨느니라'.... 여기서 '예언하셨느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 예언이 도중에 취소되거나 수정되는 일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언된 대로 따라서 세상일은 진척될 뿐입니다. 그것을 저는 비밀성이라고 한 마디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비밀성, '비밀' 이라는 말을 제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알 만한 사람만 알게되고 그 비밀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부하게 될 것이다" 라는 바로 두 가지의 양면적 반응이 동시에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이 비밀성입니다. 기독교는 뭐냐? 비밀입니다. 복음은 뭐냐? 역시 비밀성 속에 싸여 있습니다. 비밀이라는 것은 세상사람의 노력 여하에 따라 누구나 안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다 알만한 것이 들어있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알만한 사람은 알고 나머지 사람은 필히 그 비밀을 시시한 걸로 외면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이 비밀성을 따라 충실히 수행했던 한 사람의 예를 들겠습니다. 그 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집에서 잔 사람이 아니고 광야의 들판에서 잠을 잔 사람입니다. 옷도 짐승의 털옷을 입고 괴상한 복장을 하면서 살았고 음식도 사람들이 평상시 먹는 음식이 아닌 생식을 했으며 마치 세상에 추방된 자처럼 세상과 이탈되고 격리된 채 별개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광야에서 살았던 사람이 세례요한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외치던 소리는 한 마디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방문을 하신다"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방문한다는 이 말 자체는 얼마나 좋고 기쁜 소식입니까? 우리 인간을 만드셨고 모든 산천과 동물들을 만드셨고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시고 오늘도 교통사고에서 보호해 주시고 이 모든 것을 손수 홀로 해 내시는 그 하나님이 마치 연두 순시하는 것처럼 사람이 사는 이 세상을 직접 눈으로 보겠다고 이 땅에 오신다는 데 우리는 얼마나 기쁘고 즐겁게 반겨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인간에게는 큰 문제가 됩니다. 즉 죄 지은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죄 때문에 멸망 될 수밖에 없고 저주받을 수밖에 없다는 이 현재 사실이 중요합니다.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겁니다.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하나님이 이 땅에 온다는 사실을 알고 사전에 뭐를 해야 하는가 하면 죄 씻어 줄 것을 각오한 회개 자로서 이 땅에 오시는 하나님을 만나러 나가게 해야한다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례요한은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풉니다.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하나님이 장차 이 땅을 방문하신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해야만 정당한 일이 되는 겁니다. 죄 있는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에 회개하는 자세로서 용서해 달라고 오신 주님 앞에 엎드려 꼼짝못하고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의 넓은 자비로 자비심으로 불쌍히 여겨서 하나님 앞에 죄 지은 것을 용서해 달라고 용서의 예식. 절차가 바로 세례식입니다.
여러분, 제 삼자가 볼 때에는 이것은 어디까지나 세례요한의 일방적 의식구조에서 나온 사고 방식의 일종으로 보입니다. 세상만사가 잘 돌아가고 있고 모두들 사고 팔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흥겹고 즐겁게 평온한 대로 세상이 잘 돌아가는데 난데없이 세례요한이 나타나 가지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깝다'고 외칠 때에 누가 그것을 진실 된 이야기로 받아드리겠습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천국 복음은 비밀성을 간직한 비밀스러운 양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비밀스럽다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그대로 믿으신다면 그걸 수용하신다면 이 세상에서 다른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남들이 아무리 애써도 깨닫지 못한 그 심오한 비밀을 깨달았으니 나라는 인간이 따로 이 세상에서 이름을 내려고 아등바등 애쓸 필요가 있습니까.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하늘의 비밀이 도리어 특정인에게만 조용히 알려져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시는가를 그 내막을 알게 되었으면 사실 우리는 챙길 것 다 챙긴 셈입니다. 더 이상 나 자신을 PR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세례요한이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비밀을 미리 알았을 때에 만약 어디 좋은 회사에서 직장을 알선해 준다든지 고수입을 보장해 줄 테니까 우리 회사 이사로 오라 할 때에 세례요한이 회개식, 세례식을 그만두고 그 회사에 갔겠습니까? 세례요한의 기쁨은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하나님의 예언을 미리 알아차려서 이것을 남에게 나누어주는 그 기쁨, 거기서 나오는 그 기쁨이 세례요한의 인생을 전부 장악했고 점령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어떤 출세욕이라든지 나이 먹어가면서도 욕심 내는 것, 어떤 책에는 그것을 노욕(老慾)이라고 하는데, 세상을 향한 어떤 복수심, 나도 인간답게 사는 것을 한 보란 말이야. 이만큼 된 놈이다라고 남에게 으스대고 싶은 그런 과욕도 없이 남이 모르는 하늘의 비밀을 미리 알았으니 이 비밀 속에서 흥겨워하고 즐거워했던 자가 세례요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세례요한을 세상사람들이 어떻게 대우했던가요. 결국은 세례요한 남들이 보기에 처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것도 계집아이의 간청에 의해 권력자가 세례요한을 가차없이 죽이는데 돼지처럼 목을 베어서 쟁반에 담겨 나오는, 사람들에게 치사스럽고 만인의 웃음거리가 된 그런 죽음을 당했습니다. 세상권력자에게 대든 놈은 이같이 된다는 것을 시범을 보인 양 처참한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함부로 내 앞에서 예언을 하지 말라는 협박처럼 보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비밀이라도 내 앞에서 까불지 말라고 점을 사전에 경고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충실한 종, 누구보다 순종했던 종이었던 분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이 땅에 남자가 많지만 그 중에 최고는 세례요한이다라고 칭찬했던 세례요한마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처참한 몰골로 최후를 맞이하도록 허락했습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콩닥콩닥 가슴이 뜁니다. 하나님, 설마 저마저 세례요한처럼 처참하게 죽이게 놔두지 않겠지요. 설마 저마저 세례요한처럼 흉한 모습으로 최후를 맞이하도록 내팽개치지는 않겠지요 라고 하면서 앞당겨 걱정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소름이 낄 정도로 이 세상권력이라는 것이 무섭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세상권력의 무서움, 공포심보다도 한 술 더 떠서 "하늘의 비밀은 이 세상의 권력을 이긴다."는 점을 과감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도 이 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입어서 하나님 심판을 대행하는 자가 자신이 심판할 자를 정확하게 찍어서 예후라는 장군이 있는 곳으로 돌진하는데, 이 장군의 사명수행 앞에는 거칠 것이 없습니다. 누가 감히 사명 받은 심판 집행 자를 막겠습니까. 그런데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채, 소위 막강한 권력이라는 것을 쥐고서 그 권력 속에 숨어 자기 자존심을 걸고 하나님의 예언조차 막아보려는 그런 인간이 여기에 나옵니다. 그 이름이 뭐냐하면 요람이라는 사람입니다.
21절에 "요람이 가로되 메우라 하매 그 병거를 메운지라"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기 위해서 자기 앞에 달려오는 자 앞에서 요람이라는 왕은 자기 딴에 권력, 군대를 모아 가지고 포위해라 못 오도록 하라하면서 "예후야 아무 일 없지? 그지? 평안하지?" 라고 먼저 묻습니다. 그런데 그 이러한 사전 회유책은 17-19절을 보면 이미 요람이 알고 있습니다. 예후라는 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나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 나에게 달려온다는 정보를 이미 접수했어요. 이 사실을 접하면서 요람 왕이 기겁을 해서 빨리 나가서 조치를 해야겠다고 먼저 자기 파수 군을 보냅니다. 그것이 진짜 긴가 민가 해서 말입니다. "예후 장군님 별일 아니겠지요 그지요?"라고 묻습니다.
왕하 9:17에 "이스르엘 망대에 파수군 하나가 섰더니 예후의 무리의 오는 것을 보고 가로되 내가 한 무리를 보나이다 요람이 가로되 한 사람을 말을 태워 보내어 맞아 평안이냐 묻게 하라" 라고 되어있는데, 파수군이 "예후여 아무 일 없지요 그렇지요?" 했을 때 예후는 "저리가!"라고 물리칩니다. 왕하 9:18에 "한 사람이 말을 타고 가서 만나 가로되 왕의 말씀이 평안이냐 하시더이다 하매 예후가 가로되 평안이 네게 상관이 있느냐 내 뒤로 돌이키라" 라며 그를 보내버립니다.
이 하나님의 예언이라는 것은 인간의 아부나 미소지움을 동원해서 어떻게 무마해 보려고 애써도 하나님은 조금도 동요되시지 않고 예언하신 대로 실시되어 버립니다. 그래야 하나님다운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답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말은 일획 일점의 빈틈없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에 우리는 기쁨을 걸고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야, 하나님이 이렇게 대단한 분이구나. 내가 모시는 하나님이 이처럼 자기가 하신 약속을 끝내 주게 지키시는구나"라는 점에 희망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후가 들고 오는 하나님의 예언 실시는 무슨 일 때문일까요? 요람 왕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요람은 벌벌 떨고 예후는 기세 등등해서 사명을 감당하려고 하는가 말입니다.
21절 다시 읽겠습니다. "요람이 가로되 메우라 하매 그 병거를 메운지라 이스라엘 왕 요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가 각각 그 병거를 타고 가서 예후를 맞을쌔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토지에서 만나매" 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에 보면, 나봇의 토지에서 만나매라고 되어있습니다. 나봇의 토지, 나봇이라는 자가 갖고 있던 토지 즉 포도원에서 하필이면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자인 예후와 심판을 당해야 될 요람이 딱 마주친 장소가 하필이면 전에 죄를 지었던 그 자리입니다. 22절에 보면 "요람이 예후를 보고 가로되 예후야 평안이냐 대답하되 네 어미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라고 되어있지요. 즉 하나님 앞에 씻지 못할 죄를 지어놓고 어떻게 네가 이 땅에서 평안을 찾느냐? 네는 제발 주제 파악을 하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람과 사람끼리 보면 너도 못난 놈 나도 못난 놈이니 서로 잘못에 대해서 평화롭게 묻지 않고 눈감는 것이 서로의 평화를 위한 묵계처럼 통하지요. 그런데 이러한 인간들끼리의 묵인이 하나님께 통합니까? 안 통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예언대로 할 것 같으면,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예언이 그냥 흐지부지 될 예언입니까? 마지막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신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바로 이런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방문하시는 것은 하늘의 뜻을 달성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인데 그 예언의 내용은, 꼭 심판할 자를 찾아내어 기어이 심판을 하겠다는 거예요.
흔히 잘못 생각하기를, 예수 안 믿고 죽더라도 죽으면 징벌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닐까하고 여기시지만 요한복음 5장에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이미 죽었어도 그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기까지 하시면서 기어이 심판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입니다. 그것을 능지처참이라고 합니까?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어 가지고 네가 이 세상에 살 때에 예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으며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네가 어떻게 생각했느냐. 세례요한이 그 이야기 할 때에 너 어떻게 생각했나? 끝까지 책임을 추궁하겠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말입니다.
죽는다는 것으로 하나님 면전에서마저 은퇴되는 것이 아니요,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오히려 사태를 분명하고 명확하게 합니다. 더 이상 오도가도 못하고 하나님 코앞에 등장되어 심판 받는 입장에 놓이도록 운명지어진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살아 있을 때도 하나님 권한 속에서 못 빠져 나오고 죽어서도 하나님 심판 앞에서 벗어 날 길이 없습니다. 협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옵니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심판 앞에 서리라고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예언을 전할 때 그 때 그 사회는 요즘 사회와 다를 바 없는 사회입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다같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세상 돌아가는 것이 아무 일 불편함이 없습니다. 물론 때로는 구급차마저 교통사고를 내어서 아홉 명이 죽기도 하고 때로는 불이 나서 몇 명 죽기도 하고 재산이 날아가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전체적인 면을 수면으로 비유하자면 수면에 물방울 몇 방울이 찰랑 찰랑하는 정도입니다. 한전도 파업하고 한국통신도 파업하고 구조조정 열풍에 나라 전체가 떠들썩하지만 그래도 대다수는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있습니다. 조금의 문제는 있지만 전제적으로는 정상적이라는 평가를 우리가 스스로 내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역시 믿을 것은 인간세상 뿐이다라고 서로들 격려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그 틈새를 비집고 예수님의 심판이 어떠니 예수님이 재림 때에 천사와 함께 구름을 타고 온다느니 지혜로운 처녀가 기름을 준비해서 신랑을 맞이했다느니 인자가 올 때에 두 사람 중에서 한사람을 데려가고 한사람은 남겨 두었다느니, 두 사람이 밭을 갈 때에 한사람은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한사람은 심판을 받는다느니 하는 예언은 마치 낯선 소식처럼 들리게 마련입니다. "그래 배부르고 여유 있을 때 교회나 나갈까. 교회 다니는 취미도 취미생활로서는 괜찮은 거지 뭐" 하는 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서 쏟아진 예언의 말씀이 이런 세상을 그냥 두지 않고 들쑤시고 있는 거예요. 동시에 이 세상은 예언을 논하고 말하는 진짜 종들을 무참하게 짓밟아버리고 말씀자체가 이 땅에 유포되지 않도록 조치하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현상마저 하나님의 계시와 예언 안에 이미 포함된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종의 수난과 순교와 고난의 발생 그 자체가 바로 이 세상이 멸망대상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나봇의 포도원에 대해 열왕기상 21장에 다시 돌아가서, 그 포도원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을 알아야 되는데 그래야 나봇의 죽음에 대해서 하나님이 예언하실 정도로 관심 둔 그 뜻을 알겠지요.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나봇이 왕궁 옆에 훌륭한 포도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포도원은 어떻게 얻어진 것인고 하면 하나님께서 나봇의 종족에게 대대로 내려가도록 주신 것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가나안 땅,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지켜 내어서 공짜로 얻은 땅입니다. 그 사사기나 여호수아에 땅 분배에 대해서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땅을 분배하는데 있어 그들의 노력의 여하에 따라 땅을 주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구원해주신 사람 숫자에 준해서 땅을 결정했습니다. 숫자가 많은 지파에게는 땅을 많이 주고 숫자가 적은 지파에게는 땅을 적게 주고 특히 하나님의 일만하는 자에게는 아예 땅이 없이 48개의 도피성, 파견지만 주고서 아예 유산이 없도록 했습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이 땅에 생산되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덕분이기 때문에 레위지파만큼은 땅 없이도 이 땅에 살 가치가 있음을 핵심적으로 보이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지파들은 자신의 수확물에서 맏물을 하나님께 가져오너라 했는데 그것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모든 십일조는 땅이 아예 없는 레위지파가 받았고 레위지파는 또한 제사장에게 받칩니다. 제사장과 땅이 없는 레위지파는 그것으로 생계를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삼 년마다 실시된 십일조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운명적으로 과부 된 자나 고아가 된 자 에게 하나님께서 무상으로 자비를 베풀도록 조치했습니다. 온 나라가 십일조를 꼬박 꼬박 내어서 전체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제사가 유지되도록 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고 하면 이 땅은 항상 하나님의 소유의 땅이고 너희들은 다만 품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임대차 계약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레위기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땅을 분배할 때는 우리 조상이 위대해서 얻은 땅이 아니라 그 땅 위에 사람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살아가야 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농사지을 때 제때 비가 내리고 수확하고 제때에 곡식이 잘 익고 잘되는 것도 이것도 하나님의 거저 주는 은총에 의해서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맥추절이고 수장 절입니다. 맥추절이라는 것은 하나님 덕분으로 보리 농사가 잘 되어서 감사합니다 라는 뜻이요, 수장절은 마지막에 모든 농사가 모두 하나님의 덕분입니다 라는 것을 기리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이라는 것은 원래 우리가 이 땅에 들어 온 것이 어린양의 피 때문입니다 라고 양 잡아드리는 절기입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매일같이 상번제라고 해서 아침에 양 한 마리 잡고 저녁에 양 한 마리 잡아 정기적으로 제사 드립니다. 그러니 예배를 드리고 제사 드린다는 말은 이미 내 몸은 내 몸이 아니올시다 라는 뜻이 예요.
오늘날 예배처럼 주일날만 예배드리고 흩어져 버리는데, 이러면 안 됩니다.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일날 11시만 들여다보고 가십니까? 수요일예배는 주님이 안 계십니까? 비록 우리가 교회에 매일 못 오더라도 아침마다 눈뜨면 하나님 오늘도 눈뜨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눈뜨게 해 주신 것이 다 하나님의 힘입니다 라고 경건 되게 마음먹어야 합니다. 즉 내 몸은 오늘도 내 것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내 운명도 내 운명이 아니고 말입니다. 어떤 분들은 저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반발하실 것입니다. "목사님 요즘 그렇게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가 노력해서 살아가지요. 그리고 자기 영광이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입니까"라고 하는데 오늘날도 역시 그런 신앙이 있는 사람이 드문 것처럼 옛날 그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그런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하지만 그 드문 가운데 한 사람 나봇이 있었습니다. 왕이 협박조로 다가가서 "나봇아, 네 포도원 참 좋구나 나 다오"라고 해도 나봇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버텼고 왕이 말하기를 "'내가 돈을 줄테니까 나에게 팔아라"라고 했을 때도 과감하게 "'못 팝니다 우리 조상이 돈주고 얻은 땅이 아니고 하나님이 은혜 성을 지속적으로 남기기 위해 주신 것이기에 팔고 싶어도 못 팝니다. 우리 후손들이 여전히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누리는 것입니다"라고 나왔습니다. 나봇은 일종의 계시 전달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사태가 이렇게 되니 아합 왕이 상심했습니다. "내가 그냥 달라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땅으로 바꾸어준다는데 말이야. 내가 그래도 명색에 이 나라의 왕이 아닌가. 그런데 저 나봇이 내 말 안 듣고 내 권위를 무시하고 말이야"라고 낙담을 했습니다. 그때 이세벨이라는 아내가 있었지요.
오늘 본문에도 나옵니다. 왕하 9:36 "돌아와서 고한대 예후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그 종 디셉 사람 엘리야로 말씀하신 바라 이르시기를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고기를 먹을찌라"에 나오는 이 이세벨입니다. 이 여자는 남편을 충동질하고 부추겨서 권력을 남용시킵니다. 말 안 듣는 자를 모함까지 해서 죽이도록 합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나봇이 돌아다니면서 왕을 욕한다는 거짓을 유포하여 그 나봇을 죽입니다. 오로지 진짜 하나님의 은혜만을 감사하고 더 욕심을 내지 않고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라는 식으로 사는 나봇을 이세벨이 주동하여 아합이 합작해서 죽였습니다. 나봇이 죽고 난 뒤에 그 때 선지자인 엘리야가 예언합니다. 하나님이 다 보고 계셨다 반드시 너희들도 이 나봇의 포도원에 그 죄 지은 장소에서 처참한 죽음을 당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마침 요람과 예후는 하필 그 장소에 딱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원수가 외 나무 다리에서 만난 식이죠. 그렇게 해서 22절에 보면 "요람이 예후를 보고 가로되 예후야 평안이냐 대답하되 네 어미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하고 도망하니 활을 쏴서 죽여버리지요. 염통을 꿰뚫고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왕하 9:26에 보니까 이런 무서운 말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젯 날에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여기 보니 "보았다"는 무서운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눈을 만드신 이가 모든 것을 보지 못하겠습니까? 문제는 단순히 봤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보시고 저주를 퍼부었다는데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늘에서 볼 때에 어떤 행위는 저주받을 행위로 보고 어떤 행위는 저주 안 받을 행위로 보실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시니까 그 당시에도 간음자, 살인자, 도적질한 자가 그렇게 많을 터인데 어떻게 하나님은 그 중에 딱 짚어 이런 일에 대해서 저주를 퍼부어야 될 죄라고 규정하셨는가 말입니다. 일부러 찾아가서 활을 쏘고 염통을 꿰뚫을 죽일 그런 처참한 죄로 몰아 넣을만한 그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 땅의 죄 없는 의인에 대한 배척과 학대와 천시 같은 죄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고 그 비밀을 알고 있고 그 비밀에 대해서 기쁨을 갖고 있는 사람을 그 사람을 무시하고 공격해보세요.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공격하는 것이 됩니다. 제가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중 누가 설교해도 나올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즉 "나는 하나님만 있으면 부러울 게 없어라"라는 설교를 했다고 칩시다. 어떤 전도사가 와서 이런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하고 나니 듣고 있던 어떤 집사님이 하는 말이 "전도사님 설교를 왜 그렇게 합니까?" 전도사님 왈,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기에 이렇게 설교했는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집사님 말하기를, "그렇게 하면 교회가 안되지요" 전도사님이 말하기를 "그러면 어떻게 설교하면 됩니까?" 집사님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돈만 주시면 부러울 게 없어라 이렇게 설교해도 되지 않습니까?" 듣고 있던 전도사님이 반박하면서, "아니, 집사님 그렇게 설교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요." 집사님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니더라도 그렇게 설교해야 교회가 되지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만 있으면 부러울 게 없어라"라는 말이 틀렸습니까? 틀려서 싫어합니까 아니면 맞기 때문에 싫어하십니까? 하나님의 뜻이 맞기 때문에 싫어하는 거예요.
우리 마음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뜻이면 무조건 싫어하는 그런 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나봇이 죽었듯이 예수님이 피를 흘렸습니다. 이 땅을 방문하신 예수님에게 우리는 무엇으로 돌려보내었습니까 환대해서 보내었습니까 아니면 죽음으로 보내었습니까? 예수님은 그 고난의 길로 사시다가 사람들의 배척으로 인해 죽음으로서 이 땅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생활을 하셨습니까? 아니지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자비를 안 베푸시던가요? 그러면 왜 우리는 예수를 싫어합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지적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싫어하는 것입니다. 나봇은 일부러 왕의 죄를 지적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왕이 먼저 죄성을 가지고 나봇에게 접근을 하니까 나봇은 "아닙니다. 그게 아닙니다"라고만 했는데 왕을 나봇이 미워서 하는 말이 "나봇이 돌아다니면서 험담이나 했다"고 모함하고 죽여버렸습니다.
교회에 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이가 강단에서 "하나님만 있으면 부러울 게 없어라"라고 설교하면 "그래 나는 비록 그렇게 못 살지만 네 말은 하나님의 뜻 그대로야. 네 말이 맞다 내가 회개할게"라고 되어야 이래야 정상이 아닙니까?
오늘날 복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습니다. 성경은 지금 돈 2만원만 주면 가죽옷 입혀서 잘 찍혀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성경을 싫어하지요. 세례 요한을 목을 베어 죽이고 예수님을 창으로 찔려 죽이고 손에 못을 박아 죽이고 싶은 심정이 그 당시 유대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내부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란 무엇인가? 세례요한의 위치에 서서 "우리 주님께서 다시 세상을 방문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걸 앞두고 요단강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주여 우리 죄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주여, 이것도 죄고 저것도 죄입니다."라고 용서를 구해야합니다. 이곳이 교회입니다. 그 역할을 우리가 해야합니다. 세례요한 역할을 말입니다. 요람 왕이 평안을 구하지만 예후는 말합니다. "죄를 지은 주제에 무슨 평안을 찾느냐" 라고 합니다.
정말 우리가 진정한 평안을 찾습니까? 그 진정한 평안은 요한복음 20:19-21에 있습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평안이라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셔야 됩니다. 주님이 주시면 정말 "주님 이외에는 부러울 게 없어라"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날 알아주시고 날 사랑한다는 그 소식, "너는 용서받았어. 너는 구원받은 거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바로 네가 그 대상자야 너는 당첨되어서"라고 말입니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오셔서 하시는 말씀의 취지는 가롯유다는 제 길로 갔지만 나는 너희들에게 이렇게 찾아 왔잖아 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꽉꽉 닫혀 있는 우리 마음을 노크도 하지 않으시고 그냥 들어오셔서 "아무개야 평안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는 것같이 나도 너희들을 보내노라. 성령을 받아라" 세상 권력이 무섭고 세상 통치자가 무섭고 세상 사람이 무섭고 안 믿는 사람이 주는 공포 속에서 오금을 떨면서 서 있는 우리들, 돈 없어 돈 있는 자가 무섭고, 권력이 없어 권력 있는 자가 무서워서 감히 고개조차 쳐들지 못하는 우리, 퇴출을 당할까봐 벌벌 떨고 구조조정 당할까봐 벌벌 떨고 못 먹고 살까봐 벌벌 떠는 우리들을 향하여 남들이 알지 못하는 하늘의 비밀을 간직한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평안하라 당당해 남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잖아" 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들이 잘 먹고 잘 살아도 두 사람이 반을 가는데 한 사람만 결국 데려감을 당하고 두 사람이 잠을 자고 결국 한 사람만 그 천국의 비밀을 품에 안고서 공중으로 끌려 올라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비밀과 약속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권력자로 인하여 방해받지 않고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것 때문에 죽었고 예수님은 이 약속 때문에 돌아가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다음은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도 이 약속, 이 비밀 간직하시고 세상 것 때문에 부러워하지 마시고 주님의 놀라운 비밀의 축복에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자가 없고, 정말 전하고 싶어도 사람들의 눈치가 보여서 눈총을 겁내면서 벌벌 떨며 세상 것을 사랑한 저희들 아니옵나이까? 심판주가 오시기 전에 알아서 회개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셔서 주님과 화목한 사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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