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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09강-인간을,조정하는,힘(왕하8장7-15)-2ki001029강의열왕기하

9. 인간을 조정하는 힘 (왕하 8:7-15) 엘리사가 다메섹에 갔을 때에 아람 왕 벤하닷이 병 들었더니 혹 이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 여기 이르렀나이다 왕이 하사엘에게 이르되 너는 손에 예물을 가지고 가서 하나님의 사람을 맞고 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나의 이 병이 낫겠나 물으라 하사엘이 드디어 맞으러 갈쌔 다메섹 모든 아름다운 물품으로 예물을 삼아 가지고 약대 사십에 싣고 나아가서 저의 앞에 서서 가로되 당신의 아들 아람 왕 벤하닷이 나를 당신에게 보내어 가로되 나의 이 병이 낫겠나이까 하더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너는 가서 저에게 고하기를 왕이 정녕 나으리라 하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저가 정녕 죽으리라고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저가 부끄러워하기까지 쏘아보다가 우니 하사엘이 가로되 내 주여 어찌하여 우시나이까 대답하되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할 모든 악을 내가 앎이라 네가 저희 성에 불을 놓으며 장정을 칼로 죽이며 어린 아이를 메어치며 아이 밴 부녀를 가르리라 하사엘이 가로되 당신의 개 같은 종이 무엇이관대 이런 큰 일을 행하오리이까 엘리사가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네가 아람 왕이 될 것을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저가 엘리사를 떠나가서 그 주인에게 나아가니 왕이 묻되 엘리사가 네게 무슨 말을 하더냐 대답하되 저가 내게 이르기를 왕이 정녕 나으시리라 하더이다 그 이튿날에 하사엘이 이불을 물에 적시어 왕의 얼굴에 덮으매 왕이 죽은지라 저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열왕기하 8:7-15)
『주님께서 기도로서 본을 보여 준 것처럼 우리가 어떤 기도가 바른 기도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삶인지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발견하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선물로 제공된 것입니다. 이 땅에서 어떤 근거를 가지고 발굴해 낼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보니 성경에서의 신앙이라는 것이 상당히 허황되어 보이고 황당해 보이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아무 연결점이 없는 이 땅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벌어져도 전혀 개의치 않고 믿을 수 있는 그 믿음, 이것을 보고 성경에서는 신앙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이세상의 사람들은 신앙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 없이 사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과연 우리는 신앙이 있는지, 그리고 진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신앙 없이 살아가는 사람과 비교하기 위해 한번 들여다보면 아주 큰 차이가 나겠지요. 이런 큰 차이를 통해서 우리는 간접적으로 자신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세상사람들은 저런 식으로 살아가는구나,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식이 아니고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데 과연 그 세상사람과 성도사이에 어떤 큰 개입이 있으며 차이가 있느냐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해 봅시다. 지난 시간에는 어떤 아주머니 이야기를 했는데 그 아주머니는 터 잡고 잘 살던 땅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말 듣고 떠났다가 7년만에 다시 본 땅에 돌아와서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그 땅을 찾게 된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성도의 삶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면 정 반대로 대비되는 삶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힘을 발휘해서 그 발휘된 결과를 가지고 그 토대 위에 서서 살아가는 인생, 바로 비신앙적인 인생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다시 천천히 말씀드리면 자기가 힘을 발휘해서 그 발휘한 힘에 의해서 얻어진 그 토대를 기대면서 살아가는 인생, 이것이 불신앙, 세상 사람들의 불신앙의 특징입니다. 방금 제가 세상 사람들의 불신앙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그것만 딱 떼어서 보니깐 어떻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모습과 너무나 일치되지 않습니까? 신앙이라는 것과 불신앙이 우리는 확연히 차이 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보니까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신앙생활이라고 여겼던 바가 도리어 불신앙일 수도 있음을 알 수 있지요. 그래서 오늘 말씀은 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죠. 불신앙이라고 규정했던 것이 바로 내가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이라면 그러면 참 신앙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불신앙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참 신앙은 어디서 발견되는가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찾는 계기가 됩니다. 참 신앙에 대해서 우리가 창세기 22장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일이 나오지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칩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이 다시 살아요. 자기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쳤는데 도로 산다 말입니다,. 분명히 자기의 바탕을 내 세운 것이 아닙니다. 이건 내 것이야, 내 것이니까 결국 내 소유로 돌아와야 돼 하고 여긴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유마저 버렸는데 그것이 다시 돌아오더란 말이지요. 보냈는데 다시 내 곁으로 오더라 말입니다. 이걸 믿을 때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있는 것 하나 안 놓치려 하는데 오히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우리 것이라 여기는 것을 버리고 포기하도록 만들고 그것을 은혜로 변하여 새롭게 다가오도록 합니다. 버렸는데 새것으로 다가오고 분명 죽었는데 다시 사는 것, 이것을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불신앙이라는 것은 내 힘으로 얻은 업적에다가 그것을 죽기 살기로 붙들고 그것을 의지하고 기대 사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정의를 내렸습니다 만은 둘 중에서 차이점이 잘 이해가 안 되고 있지요. 로마서 4장에는 이것이 믿음이다 이것이 진짜믿음이다라는 믿음의 모델 케이스가 나옵니다. 그 사람은 누구냐 하면 믿음의 조상이라고 별명이 붙여진 아브라함이 나오지요. 믿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믿어야 진짜 믿음이고 이렇게 믿어야 구원되는 믿음이다라고 모델을 제시하지요. 여기 보면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은 행위로 구원받지 않고 오직 약속을 믿는 것으로 구원받는 방식이 나옵니다. 분명히 행위와 믿음을 뒤섞지 않습니다. 행함과 믿음은 섞일 수 없는 별개로 하나님께서 간주하고 있다는데 우리는 주목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행함은 어디에 동원되기 위해서입니까? 곧 율법입니다. 즉 구원이란 율법을 행함이 아니라 그리고 하나님의 법을 내 행위로 지켜 냄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신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으로만 가는 사람만 모아서 천국을 이루어내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 아까 불신앙적인 이야기를 세 번씩이나 정의를 내렸는데 다시 말씀드리면 불신앙이란, 내 행위로 말미암아 얻어진 결과를 내가 죽기 살기로 기대어 사는 모든 것은 불신앙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4장 18절에 보면 이와 반대되는 현상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바랄 수 없는 중에,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기대하게 된 거예요. 기대도 아예 안 했는데도 말입니다. 기대한다는 말은 어떤 우리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목표를 내 욕심과 의지에 의해서 생겨 난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신앙이란 바로 이 기대치 즉 내 의지에 의해서 내 임의로 만들어 낸 것을 바라는 그런 식의 마음가짐이 아니라 말입니다. 내가 이건 꼭 원하고 싶다 내가 이건 꼭 갖고 싶다고, 내가 원했던 것을 소망하는 것은 소망이 아니다 말입니다. 나는 기대도 하지 않고 예상치도 않고 바라지도 안 했는데 뭔가 하나님 쪽에서 새로운 소망을 만들어 나에게 일방적으로 던졌고 집어넣었고 또 하나님의 나름대로의 계획이 나의 계획을 철수시켜 버리고 배척해 버리고 우리 속에 쏙 들어와서는 네 계획 포기하고 이 계획만 의지해라 이런 식으로 작용을 하더란 말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아브라함이 아들이 없는데 100세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아브라함이 평소에 아들이 없어서 환장을 했습니까? 아들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살겠다는 것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두 부부의 다짐이었습니다. 아들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아들 주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이지 아브라함과 사라의 생각이 아니에요. 그런데 일방적이 바랄 수 없는 소망을 우리에게 집어넣고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이것을 믿나? 네가 이것을 믿나 라고 우리에게나 아브라함에게 다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믿습니다 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의인이 되고 구원을 받은 것이에요. 종교란 것은 자기가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이런 것을 추려서 신에게 간구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에게 조목조목 따져 가면서, 하나님 이것은 내 소망입니다. 이것은 우리 가정에 필요한 것이고, 나의 장래에 그리고 미래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들어주세요. 이것이 바로 이방 종교잖아요. 누구든지 감 잡고 만들어 낼 수 있는 일반 종교가 다 이러합니다. 이런 포부 달성을 위해서 자신이 해낼 수 있다는 행위, 즉 기도나 교회 충성이나 헌금을 아깝다 하지 않고 하거나, 목사의 지시에 따르거나, 스스로 선하다고 여기는 착한 행실과 자기 절제를 해서 나름대로의 의와 정당성을 확보해 놓으려고 애를 쓰잖아요. 즉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내 종교 행위로 말미암아 얻어질 업적에 기대를 걸고 그래서 확보했다고 여기는 업적이 평생 안 깨어지고 무사하게 나를 끌고 갈 수 있도록 하나님을 찾잖아요. 이것이 바로 불신앙이에요. 신을 찾고 신의 존재를 누구보다도 인정한다고 해서 신앙이 아닙니다. 신을 불렀든, 예수를 불렀든, 삼위일체를 불렸든, 그것은 신앙에 넣어 줄 수 없고 신앙이라는 것은 누구를 부르느냐가 아니라 부를 때 부른 내용이 나에게서 나왔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이냐가 관권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기를 성경에 나와 있는 이것을 믿어야지 너의 소박한 소망이나 기타 등등 딴 것은 믿지 말라는 지시를 받아야 그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불신앙과의 차이가 이토록 현격합니다. 성경에 나오고 있는, 신앙으로 생활했던 성도들은 모두 예상치도 않는데 난관과 어려움에 봉착합니다. 난관과 어려움에 봉착해 놓고 그들이 나중에 고백하는 말이, 모든 게 하나님이 그저 주시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경우를 모르면 부담스럽게 여깁니다. 우리 생각은 무엇인고 하니, 왜 하나님은 병 주고 약 주는 식이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마시고 아예 병을 안주고 약도 필요치 않는 편안한 상태로 우리를 인도하면 우리 자신들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모두가 이런 형편이기를 원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기에 몰아 넣어 버리지요.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합니까? 야! 내 인생도 여기서 끝장이구나. 그것도 한번이 아닙니다. 끝장 그리고 끝장 그 다음에 끝장 이런 식으로 우리를 인도 해 나갑니다. "사니 뭘 하겠어 차라리 죽고 싶다". 이런 마음이 생기도록 자꾸 유도하시지요. 그런 위기를 유발시키는 가운데,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이 무엇을 목표로 살아왔나를, 우리의 목표를 수정케 하십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것, 믿는 것, 사랑하는 것 그 모든 대상이 교체되기를 원하십니다. 바꾸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신앙이라는 것이 바랄 수 없는 가운데 믿었다는 로마서 4장 18절 말씀과 같은 패턴으로 나가지요. 같은 형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데 바랐으며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의 죽은 태를 보고서도, 죽은 자 같음을 알고서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이 견고해 졌다했습니다. 죽은 태를 보고 거기서 산 아이가 나올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은 왜냐하면 평소에 내가 그런 경험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이건 하나님의 약속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연습해서 숙달시켜 영생을 제공하는 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저 단순하면서도 단호하게 자신의 약속을 던져주고서는 이것을 믿나 안 믿나 그 양단간의 결정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전 번에 너 몇 번 해보니 잘 되었어? 이번에도 예상문제를 많이 풀었으니까 본 문제를 풀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영생을 주시는 게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이 심어준 성령의 선물, 믿음이 없이는 도저히 그걸 못 믿게 할, 못 믿을 수밖에 없는 그리고 세상에서의 일상적인 상식으로 도저히 믿기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믿으라고 합니다. 제가 아까 예배 시작 때 읽었던 데살로니가전서에 보면, 주께서 천사들의 나팔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친히 구름 타고 강림하시리니 산 자가 죽은 자보다 앞서지 못하리라 죽은 자가 먼저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되고 그 다음에 살아 남은 자는 공중에 끌려 올라가서 주를 영접해서 그 다음에는 같이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라는 약속을 하나님께서 제시했습니다. 이런 약속이 어디에서 생겨낫습니까? 우리의 아이디어로 이 약속이 생겨났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만든 아이디어가 분명 아니잖아요. 그런데 데살로니가전서 보면 분명히 본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그런 내용이 이 성경 속에 이처럼 들어있는 이 순간에도 세상에서는 이에 못지 않은 분명한 사건과 사건들이 연속으로 터집니다. 어제 뉴스에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21명 중 17명의 신원교회 교인들이 죽었습니다. 제가 그곳에 설교한 적도 있고 장로님 동생이 계시는 교회지요. 그 신원 교회 교인들이 놀러가다가 죽은 사건은 신문 방송에 났고 그런 신문 방송에 난 것을 저와 여러분들 똑똑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이 터졌다는 이 순간에도 성경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보면 분명히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는 자가 다시 사는 내용도 들어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이 둘 중에 우리는 어느 것이 더 실감나는 현실입니까? 아니 현실이 되어야 하고 나의 일로 여겨져야 합니까? 우리에게 다그치는 바는, 너는 어느 것을 믿을래 하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온다 말입니다. 우리가 신원교회 교인이고 그 여전도회 회원들의 남편이고 자식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아내가 죽은 것도 사실이고 데살로니가전서 4장의 말씀도 사실이라면 둘 중에 어느 것을 가지고 우리가 마음에 평화를 얻고 소망을 얻고 믿어야합니까? 차라리 신원교회 교인 그 남편은 아마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차라리 이런 식으로 믿음을 시험하시지 말고 아예 그런 사건을 안 일으키면 내 마음이 얼마나 편할까요? 라고 말입니다. 누구나 사고를 당해 보면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항변하고 싶은 것입니다. 제가 오늘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구구한 서론이 긴 것은 오늘 본문의 내용이 뭐냐하면 불신앙인이 하나님을 쳐다보는 마음자세가 어떠했으며 그 결과가 어떠한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에 들어가 봅시다. 오늘 본문에 아람 왕 벳하닷이 병이 들었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병이 심상치 않아요. 그런데 마침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곁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엘리사는 그냥 엘리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사람. 우리가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사람이 누구에게 지시했다고 했습니까? 어떤 가난한 과부를 만났다고 했지요. 하나님의 사람이 아주머니를 만나서 뭐하고 했습니까? 그나마 있는 땅덩어리를 버리고 가라 했지요. 고향을 버리고 친척을 버리고 가라고 했지요. 하나님의 사람이 기껏해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에게 하는 소리가 떠나라고 합니다. 이 땅을 버리고 7년 만에 돌아오라고 합니다. 그때 어떤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갔다오니까 땅은 남의 땅이 되었고 그래서 아주머니는 왕에게 빌면서 내 땅을 돌려주세요 라고 합니다. 그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왕하고 이야기 안하고 있었더라면 땅이 그 사람에게 돌아갈 수도 없었을 거에요. 하필 아주머니가 이야기 할 그 시점에 게하시하고 왕하고 이야기하면서 그 죽은 아이가 살았단 말인가 하나님은 도대체 어떻게 아이를 죽여놓고 살리고 정말 너의 하나님은 대단한 하나님이네,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하면서..... 그런데 그 아주머니가 누구지라고 묻는 대목에서 아주머니가 왕에게 발견된 것입니다. 그러자 임금은 특별히 공무원 한 사람을 보내어 전적으로 업무를 전담해서 땅을 되찾게 했잖아요. 바로 그런 일의 중심에 서 있다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이 벳하닷이라는 아람 왕이 찾아가서 하나님의 사람이여 내 병이 나겠습니까? 라고 물은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아직도 불신앙적인 토대 위에서 지금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불신앙적인 토대 위에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불신앙이 무엇입니까? 제가 지금 여섯 번째로 이야기 하고있습니다. 불신앙이 뭐냐? 그것은 내가 행한 것을, 내가 행한 업적을 그것에 기대어 한 평생 살려는 것이 불신앙입니다. 쉽게 예를 들면, 내가 신학교에 나와서 목사 되고 난 뒤에 그 목사라는 것을 직업 삼아 한 평생 밥 먹고서 잘살려는 이 병신 같은 사람, 이것이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어서 없는 아이가 기적적으로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적으로 생긴 이삭을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창세기 22장에 보면 도로 죽이잖아요. 네 아들 이삭을 바쳐라. 바치고 나니 죽은 아들을 도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린다 이 말입니다. 그걸 우리인생에서 몇 번 일으킵니까?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몇 번입니까? 매일같이 죽을 때까지 있을 겁니다. 이 불신앙적인 벳하닷이 하나님의 사람을 무엇으로 봤나하면 물로(?) 본 것입니다. 당신 도사 맞잖아요. 물론 도사지요. 내 병이 낫겠나 죽겠나 이렇게 물은 것입니다. 만약 여기 서 있는 제가 죽을병이 걸렸다면 여러분들은 새벽에 이렇게 기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근호 목사가 죽겠습니까? 낫겠습니까? 저 사람이 죽으면 사모는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복잡한 것이 많겠지요. 바로 이런 관심사가 불신앙적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도사보다 더 한 사람입니다. 어느 정도 도사인지 10-13절에 나옵니다. "엘리사가 가로되 너는 가서 저에게 고하기를 왕이 정녕 나으리라 하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저가 정녕 죽으리라고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저가 부끄러워하기까지 쏘아보다가 우니 하사엘이 가로되 내 주여 어찌하여 우시나이까 대답하되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할 모든 악을 내가 앎이라 네가 저희 성에 불을 놓으며 장정을 칼로 죽이며 어린 아이를 메어치며 아이 밴 부녀를 가르리라 하사엘이 가로되 당신의 개 같은 종이 무엇이관대 이런 큰 일을 행하오리이까" 자 여러분, 왕을 대신하여 신하가 찾아왔는데 신하 이름이 하사엘입니다. 그냥 왕의 말만을 전달하는 그 신하를 보고서 엘리사가 갑자기 우니까 그 신하가 하는 말이 왜 우십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언자 엘리사가 이렇게 답변합니다. 너 장래를 보고 운다 이랬거든요? 저 장래가 어떻게 되는데요. 너가 우리 이스라엘 민족을 작살 낼 놈이야. 너 나쁜 놈이야. 너 왕도 죽이고 말이야. 하니 하사엘이 제가 왜 그럽니까? 저는 그런 마음은 지금 추호도 없습니다. 하지만 결국 엘리사 말대로 되잖아요.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도사입니다. 그 사람의 미래를 알아요. 이 정도 실력을 갖고 있으니 병이 난 벳하닷 왕이 그걸 무시할 수 있습니까? 오, 하나님의 사람이여, 내 병이 낫겠습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으라고 신하를 보낸 것입니다. 그 답이 나옵니다. 10절에 "엘리사가 가로되 너는 가서 저에게 고하기를 왕이 정녕 나으리라 하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저가 정녕 죽으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예언은 이런 의미는 아닙니다. "네가 정녕 죽으리라 그리고 부활하리라" 이건 아니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불신앙은 자기 행한 것을 기대를 걸지 결코 자기가 예상치도 안한 하나님의 뜻에 기대를 거는 것이 아닙니다. 즉 내가 죽는다는지 내가 실패한다든지 내가 낭패 당한다든지 이런 것이 시급해서 하나님이나 예수를 찾지 하나님이 제시한 약속을 나의 운명으로 새롭게 받아들이기 위해서 교회 나오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속에는 결코 사사로운 개인적인 인생 목표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목표들은 그저 "나는 무조건 살아야 돼 나는 살아 남아야 돼 세상은 멸망해도 나는 안 죽어야 돼"라는 이걸 전제로 하고서는 신이시여. 하나님이여, 예수여, 성령이여, 부처여. 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대한 하나님다우신 답변은 이러합니다. "네가 정녕 살리라 그러나 네가 정녕 죽으리라" 이게 보편적인 불신앙적인 하나님의 토종비결이에요. "너 그렇게 살고 싶나? 오냐 너 산다 그러나 너 죽는데이"라는 뜻입니다. 진짜 참 신앙인에게 있어 신자의 죽음이란 그 자체도 이미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 이행의 한 과정으로 순하게 받아드립니다. "너 죽어야 된데이 하지만 너가 죽어야 너가 산데이 죽어야 살리라 이 약속을 너 믿느냐?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시는 하나님인데 너 하나님을 믿느냐?"라는 것입니다. 믿기 위해서 너 죽어야 하고 너 없어져야 돼! 왜?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는데서 영생을 얻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불신앙은 맨날 신을 찾는 그 모습이 신이시여. 내 형편이 나아지겠습니까? 신이시여. 내 가족이 화평하겠습니까? 행복하겠습니까? 신이시여 내 장래가 얼마나 오래 살겠습니까? 그래 그래 너 마음대로 해 줄게 너 산다. 그러나 너 지옥이야 알겠어? 여러분 하나님이 예상하고 있고 예수님이 예상하고 있는 바가 우리의 예상이기를 저는 원합니다. 여러분 인생의 끝에 서서 지나간 여러분의 인생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천국의 문에 서서 다시 과거를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여러분들은 천국이 이토록 좋은 것인지를 모르고 세상에서 좀더 오래 버티어 보려고 그 얼마나 추잡고 더러운 짓을 많이 했는지…. 여러분, 제가 말하는 추잡고 더러운 짓이 딴 게 아니에요. 내 자존심을 위해서 나를 살려야 되겠다 나는 내 밖에 모른다 이것이 추잡고 더러운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것이 가장 추잡고 더러운 것이 아닙니까? 나는 죄인 아니야 나는 잘 난 놈이야. 내 행함에 의해서 나는 선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복을 받아야 마땅해 이게 정신이 바로 추잡고 더러운 짓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게 한국교회 의 실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어제 어느 모임에서 누구랑 이야기하는 가운데서 들은 이야기인데, 어느 교회 당회장을 뽑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얼마나 가슴이 답답하고 아픈지 지금도 가슴이 이렇게 아픕니다. 복음도 알고 훌륭한 목사님이 계신대도 불구하고 장로님들이 자기하고 나이 차이가 난다고 그걸 포기하고.... 얼마나 한국교회가 복음을 싫어합니까? 더 나아가서 내가 지난 날 세웠다고 여기는 그 행함의 업적을 얼마나 기대를 많이 걸고 있는지 결국 이런 불신앙이 온 복음조차 걷어차 버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즉 나는 복음을 원하지 않고 교회 부흥을 원합니다 하는 식이지요. 더 나아가서 "나는 예수를 원하지 않고 교회를 원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신다는 것은 자기의 기대한 바하고는 너무 다르니까 부담이 되어서 그만 신앙 없는 체로 그대로 버티다 죽고 싶은 거예요. 목회자 뽑을 때도 결국 최종적으로 불신앙적쪽으로 선회해 버리더란 말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 이 땅을 찾아들어도 누가 존경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엘리사는 불신앙 세계에서도 존경받고 신앙인에게도 존경받지만 그것은 존경하는 그 기본 태도가 달라서 그러합니다. 하나는 자기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주의 종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내가 어떻게 병이 낫겠습니까? 엘리사가 하는 말이 "이 동네는 우째 자기만 살라카노. 권력만 쥐고 자기만 돛대가 되려고 하는구나. 그래 살아라 하지만 너는 너하고 똑같은 놈에게 당할거야. 그래 산다 하지만 곧 죽는다"라는 것이 엘리사의 예언입니다. 14절에 보면 그 내막이 나옵니다. "저가 엘리사를 떠나가서 그 주인에게 나아가니 왕이 묻되 엘리사가 네게 무슨 말을 하더냐 대답하되 저가 내게 이르기를 왕이 정녕 나으시리라 하더이다 그 이튿날에 하사엘이 이불을 물에 적시어 왕의 얼굴에 덮으매 왕이 죽으매..." 신하가 왕의 권력을 왜 탐냅니까? 그리고 남을 죽인다 이건 무엇입니까? 너가 죽어야 내가 살아 남는다는 뜻이 아닙니까? 이것이 불신앙이잖아요. 내가 어떤 소망이 있고 희망이 있는데 너 때문에 가로막힌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고물이 새차를 가리니까 새차가 기분 나쁘다는 식이지요. 불신앙의 이러한 속성 더러운 생리 살고자 하는 이 더러운 생리가 뱀처럼 독사처럼 우글거리는 세계에서 아무리 교회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의 사람을 우대하고 신의 이름을 높이고 예배를 드리고 전도하고 선교를 하고 찬양을 한들 그것이 천당 가겠습니까? 지옥가지. 그게 신앙으로 변화되겠어요? 가짜 신앙이 뭔지 오늘 본문에 똑똑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옛날에 중국에 바보가 있었습니다. 밭에 일을 하는데 농사를 짓는데 얼마나 게으른지 씨만 뿌려놓고 아무 것도 안 합니다. 얘야 농사를 왜 이런 식으로 짓느냐 왜 이렇게 안 자라? 하니까 그 다음날 그 바보 같은 아들이 와서 하는 말이, "아부지예, 많이 키워 놓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어떻게 하루만에 많이 크지?"하고 의심하면서 직접 밭에 가보니 정말 많이 컸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큰 것이 아니라 뽑아 놓았어요. 마구잡이로 풀 뽑듯이 조금도 위로 당겨놓은 것입니다. 이것을 조작이라 하죠. 이게 식물을 살리는 것입니까? 죽이는 것이지요. 자기가 농사 잘 짓는 다는 폼을 내기 위해서 한 행위가 결국 그 싹은 죽여놓았는데 자기는 키워놓았다고 합니다. 교회 10년 다녀도 20년 다녀도 믿음이 크지가 않거든요? 크지 않으니까 교회에서 하는 짓이 이 짓이에요. 목사들이 하는 1년 스케줄이 뭐냐하면 서리 집사를 장립 집사 시켜주고 장립 집사는 장로 시켜주고 그런데 여자는 소외되거든요. 여자는 어떻게 출세 시켜줄까 해서 성경에도 없는 권사를 만들어 가지고 서리 집사를 권사 시켜주고 권사 시켜놓았는데 권사도 나이 들면 미안 하니까 명예 권사 만들어 가지고 교인들이 오랫동안 마일리지 즉 성과급 주는 것 말이지요. 오랫동안 다녔으니까 우리 당회에서 다른 것은 보상 못하고 직분 승진 시켜 주는 이 재미라도 주어야 이 교회에 계속 붙어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만약 다른 교회로 가면 그 직분 얻기 위해 새로 다 갖다 바쳐야 되니까 쉽게 다른 교회로 옮기겠습니까? 이 짓 하면서도 자신들은 교인들의 신앙을 키워놓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 입장에서 보면 피아노 새로 들이지요, 교육관도 새로 지을 수 있지요. 그러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사업에 매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과연 하나님이 이런 약속을 우리에게 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우리가 기대하는 포부에 불과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약속한 적도 없는 그것을 왜 우리들의 소망 달성으로 교회에서 부축입니까? 왜 사람들에게 헛된 소망심으로 교회 붙들어 매려고 합니까? 이게 얼마나 큰 엉터리 신앙입니까 말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적도 없고 데살로니가전서에도, 로마서에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다른 교인들이 우리 박사교회 교인들보고 참 훌륭하다고 이야기를 많이 해요. 목사님보다 교인들이 훌륭하다하는데 왜냐하면 우리 교회 같으면 장로 안 주면 벌써 나왔을 텐데 그 장로도 안 시켜주는데 버티고 있는 것 보면 참말로 믿음이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정말 이 말이 놀리는 말인지 칭찬인지....저도 헷갈립니다.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분명하고 단호하게 다짐을 하고 다짐을 했어요. 뭐라고 다짐을 했느냐하면 요 18:36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라고 예수님이 하신 것을 지금 이 대한민국에 속해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믿습니까? 이게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 나라에 속하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이 나라에서 요구하는 출세라는 것 진급이라는 것 발전이라는 것 성공이라는 것 역시 믿지 않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안 믿으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남는 것이 있다면 하나밖에 없지요. 그건 은혜입니다. 지금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없던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려서 생겨진 열매가 주님의 열매, 나다 말이지요.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말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두 제자의 엄마가 하늘나라에 높은 데 앉으려고 했을 때 다른 제자들이 화가 나서 네만 제자냐하면서 싸웠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가 마신 잔을 네가 마실 수 있느냐 이렇게 하셨습니다. 내가 마셔할 쓴잔을 네가 마실 수 있느냐? 세상 권세자들은 권력이라는 것을 소망으로 삼지만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오히려 한 알의 밀알로 주러왔다 이 말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자기 아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버릴 때에 있는 거에요.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헛된 야심을 분명히 버리기를 요구는 것인데 그 버린 현장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열매가 그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 동안 왜 안 보이느냐? 세상 것이 너무 크게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것이 크게 안 보이고 그것이 가리워왔던 거에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꾸 괴롭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자꾸 괴롭혀서 주님이 주신 약속을 흐릿하게 만들고 가리게 만들고 그걸 민민하게 만들고 있는 둥 없는 둥 만들기 때문에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거울을 깨끗하게 닦는 것처럼 우리 욕심에 의해서 잉크 같고 연탄 같은 시커면 죄 때문에 막혀져 있는 것을 날마다 닦아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실망케 하고 낙심케 하고 낭패케 하고 그런 일을 자꾸 유발시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신원교회에서 열 몇 분이 죽으셨는데 그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고 갈 때 사고 나지 않도록 그 교회 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이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정말 기도의 응답이 이루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응답대로 그분들이 먼저 가셨어요. 살아 남은 자를 부끄럽게 하는 거지요. 먼저 가셨어요. 어디 가셨는지는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살아 남은 자의 슬픔으로 이어졌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 누구든지 죽일 권리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평소에 왜 몰랐습니까? 사전에 몰랐습니까? 성경에 보면 분명히 나는 죽일 권리도 있고 살릴 권리도 있다 했는데... 물론 죽을 권리로만 인해 하나님을 두려워만 하지 맙시다.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희망을 삼읍시다. 날마다 하나님은 나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늘 희망으로 삼기 때문에 우리는 당당하게 죽을 때는 죽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믿음이 아니겠어요? 이게 바로 신앙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세상이 사람의 원리와 원칙 사는 원칙은 전혀 신앙과 관계 없음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이란 우리의 계획과 뜻을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포기하고 주님 주신 것으로 만족하고 즐거워하고 환란 중에 기뻐하는 것인 것으로 압니다. 다시 한번 부족하고 믿음 없는 저희들을 위해서 귀한 생명을 바쳐서 천국백성으로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깊은 속마음을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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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4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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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