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강-나아만,장군(왕하5장8-14)-2ki000903
01강-나아만,장군(왕하5장8-14)-2ki000903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64)
1. 나아만 장군 (왕하 5:8-14)
2000년 9월 3일, 주일오전, 이근호 (박사교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어 가로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저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왕하 5:8-14)
옛날에 어떤 장군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장군님은 아람이라는 이스라엘 변두리에 있는 나라에 사는 존귀한 장군님이었습니다. 장군님은 그 나라에서 주인처럼 행세하며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장군인데 그 장군님은 불치병, 즉 문둥병이라는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 문둥병을 사람의 힘으로 고칠 수 없어 고민을 하고 있던 중, 이스라엘과의 전쟁 중 생포해 온 유대인 계집아이 하녀로 데리고 있는데 그 작은아이의 말이 "주인님! 주인님! 주인님의 병은 우리나라의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고칠 수 있습니다."라고 얘기를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아만 장군은 각양가지의 선물들을 성의를 다해 준비를 하여 엘리사를 만나러 이스라엘에 들어가게 됩니다.
5장 5절에 보면 "아람 왕이 가로되 갈찌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나아만이 곧 떠날 쌔 은 십 달란트와 금 육 천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아람장군은 선지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이스라엘 왕을 만나러 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이스라엘 왕이라는 자는 아람장군이 오니까 그 온 아람장군을 어떻게 해석을 했나하면 병 고친다는 것을 핑계삼아 이스라엘을 공격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 즉 시비를 걸려고 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인간이 문둥병을 고칠 수 있나 라는 생각과 그 문둥병은 하나님의 저주로 생긴 병인데 어떻게 사람이 나서서 하나님이 저주한 문둥병을 고칠 수 있나 라는 생각에 고민에 빠졌습니다. 가능한 일이라면 이스라엘 왕이 나서서 최선을 다 하겠는데 사람의 능력을 초월한 엄청난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에 대해 아람장군이 너희들 내 병을 못 고치겠지 그러니까 너희들 우리나라에 항복해라라는 이런 식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시비 걸려고 온 것이 분명하다고 이스라엘 왕은 생각했습니다.
8절에 보니, 왕은 병은 못 고치고 그렇다고 가라고 할 수도 없어서 너무 고민이 되어 옷을 찢으며 울었다고 했습니다. 엘리사가 그 소식을 듣고 왕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왕이여 그 사람을 나한테 보내면 안되겠습니까? 라고 전갈을 보냅니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의 일행은 엘리사를 만나게 됩니다.
방금 까지 말씀드린 이 내용이 성경에 나타난 실제 일인데 그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난치병을 안고 나아만 장군은 이스라엘 선지자를 찾아 왔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고 이방나라 사람이며 아브라함 혈통이 아니고 이방나라 혈통을 가진 자 입니다. 과연 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혜택이 돌아 갈 수 있겠느냐 라는 생각을 우리가 먼저 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아브라함 자손에게만 주어지게 되어 있는데 이런 경우 즉 이방사람에게 하나님이 과연 자비를 베푸실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 봅시다.
이것을 생각해 볼 때 어떤 이는 하나님의 자비가 해당되지 않는다 와 또 어떤 이는 하나님의 자비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하나님이 베풀겠다하시면 베푸는 것이다 라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냥 베풀어 버리시면 택한 백성이라는 것과 충돌이 일어나겠지요. 나는 택한 백성만 고친다했는데 하나님의 자비를 이방사람에게 주어버리면 하나님이 선택했다는 원리가 도중에 깨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하신 말씀을 스스로 번복하시는 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 나아만 장군의 병을 고친 진짜 의도가 어디 있나를 알아봅시다.
문둥병이란, 그 당시에는 곧 죽음의 병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서도 간혹 문둥병자가 생겼었습니다. 문둥병이 생기면 그 환자를 그 마을에서 쫓아내었습니다. 왜? 저주받았기에! 그래서 쫓아내었고 행여나 하나님의 자비심으로 깨끗해 졌다면 다시 마을 안으로 합류를 해 주었습니다. 그 일은 대 제사장이 가끔씩 돌아보면서 하였습니다. 대 제사장은 병을 고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자와 아닌 자를 분류하기 위해서 마을을 돌아보았습니다. 병이 호전되어가고 있으면 하나님의 자비가 임했구나 라며 다음에 다시 한번 보고서 정상인 것을 확인해 주며 마을에 들어가 살 것을 허락했는데 이때 그냥 아무 일 없이 그냥 산 것이 아니고 오른 귀뿌리와 오른쪽 손가락과 오른쪽 발가락 끝에 짐승의 희생의 피를 발라서 마을 속에 들어오게 한 것입니다.
왜 짐승의 피를 오른 귀뿌리와 오른쪽 손가락과 오른쪽 발가락에 바르느냐하면 당신의 문둥병이 낫게 된 것은 당신의 행함이 아니라 이 피를 흘리신 흠 없는 희생된 제물에 의해서 나중에는 예수님의 피가 되겠지요, 이 흠 없는 제물의 피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바뀌게 해서 당신은 자비와 사랑의 혜택을 입은 자로서 들어오게 되었으니 당신의 공로가 아니라 당신의 오른쪽 귀뿌리 오른쪽 손가락 오른쪽 발가락 등의 끝에 묻은 그 피를 모든 사람들에게 주목케 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 장자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죽지 않고 살았거든요?
이스라엘 장자들이 안 죽고 산 이유는 어디 있었나하면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기 때문에 애굽인들의 장자들은 다 죽어 넘어갔지만 이스라엘 장자들은 살아 남았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이스라엘 장자들은 자기들의 소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 장자가 있다는 것은 옛날의 어린양의 피가 아직도 우리 가정에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 가정에 있던 장자가 한곳으로 모아져 지파의 장자가 되는데 그 지파가 레위지파가 됩니다. 레위지파는 어린양의 피를 표출 해내는 그런 장자 지파로서 역할을 하며 제사를 드리고 제사의 제물을 잡고 성막을 지키며 보존하고 수선하고 등 성전에 전념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레위지파는 땅을 가지지 못합니다. 너희의 땅은 하늘나라에 있으며 하늘나라가 너희의 재산이며 유산이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레위지파의 출신자가 누구냐 하면 대 제사장입니다. 대 제사장이 제사장 될 때는 아까 말씀드린 문둥병자가 문둥병이 나아 마을에 합류할 때 오른쪽의 귀뿌리, 손가락, 발가락 끝에 피를 발랐듯이 제사장의 위임식 할 시에 오른쪽 귀뿌리에 피를 바르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날 와촌교회 임직식 때에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둘러서서 안수를 했습니다. 옛날에는 그런 방법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피를 바른다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요즘에도 제대로 하려면 어디 피를 구해서 피를 뿌리면서 당신은 피로 인해서 삽니다 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만은 예수의 피가 어디 구할 수가 있어야지요. 인터넷 띄워서 광고해 봐야 흠 있는 사람의 피만 있지 흠 없는 예수의 피는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흠 없는 예수의 피는 하늘나라에 있으니 당신에게 하늘나라 예수의 피가 묻혔다고 간주하고 장로로 집사로 임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을 제사장에게 오른쪽 귀뿌리와 손가락 발가락 끝에 피를 바르는 것은 마을 사람들 너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진노의 대상이며 마을에서 쫓겨나가 살아야 될 것이지만 대 제사장이 대표로서 저주를 담당했기에 여러분들도 저주에서 축복의 사람으로 됩니다 라며, 우리는 피안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피의 민족입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민족이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들어 갈 때의 방법은 어떠하였습니까? 요단강이 활짝 열렸습니까? 아닙니다. 요단강이 약속의 땅의 문을 열어 준 것은 사람을 보고 열어 준 것이 아니고 그 어린양의 피를 보고 열어 줍니다. 그 어린양의 피가 묻혀 있는 법궤 그 법궤를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요단강 한 복판에 서니까 갑자기 홍수처럼 넘치던 요단강이 벽이 생기며 물 흐림이 멈추어 길을 엽니다. 그 맹렬한 요단강도 어린양의 피가 묻힌 언약궤를 들이미니까 그 언약궤 앞에 멈추며 약속의 땅과 약속 아닌 땅과 완전히 구별되는 새로운 세계에 그들은 발을 딛게 됩니다. 요단강의 기능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 눈에 안 보이는 영원한 세계를 구별하는 커텐 역할을 합니다. 커텐 이쪽의 세계는 하나님 약속의 세계 저쪽은 세속의 세계, 그런데 세상의 세계에서 약속의 세계로 함부로 들어올 수 있습니까? 안됩니다. 어떻게 들어갈 수 있습니까? 바로 어린양의 희생의 피, 즉 거룩한 피가 흘려져야 그 피를 의지하는 자만이 세속의 세계에서 약속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어느 누구도 약속의 세계를 넘나 보지도 못하고 들어가지도 못한다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문제는 엘리사가 살고 있는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스라엘일까요? 죄송합니다만, 이스라엘은 전혀 이스라엘답지 못하며 약속에 땅에 기거하면서도 약속의 하나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약속의 땅에 합당한 정신과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서 원래 문둥병을 이스라엘에서 일으켜야 할텐데 그들이 생각하는 저주받은 이방나라 어떤 장군에게 문둥병이 들게 합니다. 놀랍게도 그 나아만 장군이 자기나라에서 고치던지 해야 할텐데 철도 없고 나이 어린 소녀의 말을 듣고 여호와의 자비심을 호소하기 위해서 왔다는 사실, 여러분 이것을 이해하겠습니까?
몇 년 전에 저희 사택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은해사 근처의 어느 무당의 전화인데 그분은 교회에 다니고 싶다며 교회신자 초보가 해야할 책자를 부탁하는 전화였습니다. 전화 중에 기독교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얘기를 하며 예수님을 증거하며 교회에 오고 안 오고는 당신의 자유지만 책을 보내드리지요 라고 하며 책을 보내드렸습니다. 그때 제가 생각을 한 것은 박사교회 성도님들은 왜 저에게 궁금한 하나님말씀에 대해서 전화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어찌된 일인가? 박사교회 성도님은 도사인가? 신학 박사들인가? 복음을 다 아시는 일인가? 이는 박사교회 위기성이 아닌가? 왜 은해사 골짜기 무당 아주머니가 전화를 하는가 말입니다. 하나님은 순수한 것을 원합니다. 왜 우리는 놓칩니까? 우리는 순수한 것을 놓치면서 교회에 다니니까 신앙 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순수하지도 아니면서... 나아만 장군보세요. 자기나라는 신이 없습니까? 옛날에는 어디에도 신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를 가장 크게 아니 그것만 부각시키는 이스라엘이 자기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상한 일이며 신기하며 놀라운 일이죠!
오늘날 우리 곁에 종교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많은 종교 가운데서 하필이면 예수 피로 인하여 천국 간다는 희귀망칙한 종교, 인간의 행위를 전적으로 배제하고 주님의 행위만을 극히 찬양하는 희한한 종교를, 그것도 자생적인 종교가 아닌 수입된 외래 종교, 그 복음을 우리가 듣게 되었다는 것을 처음에는 얼마나 순수하게 들었습니까? 그 순수함을 왜 우리는 짧은 인생동안 못 끌고 갑니까? 참 답답합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라는 것이 전도사가 되고 목사가 되면 왜 되지 않습니까? 순수함이 왜 사라집니까?
여러분 순수함이란 자기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순수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욕심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의를 이렇게 내리고 싶습니다. 인간의 징벌은 다른 것이 아니고 욕심이 꺾기지 않는 것. 이것이 최고의 징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밤잠을 못 이루게 하고 두고두고 나를 쑤시고 아프게 하는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욕심이 생기면 순수시대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면 나는 문둥병자다, 어디 괜찮은 피 없나, 어디 요단강 없나, 순수하게 언약궤를 찾고 순수하게 요단강 찾고 순수하게 하늘에 계시는 예수님의 피를 찾는 그런 맘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14절 보면 나아만 장군의 피부가 어린아이처럼 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어디 피부만 어린아이와 같이 되었겠습니까? 7번 씻는 그 마음은 어디 어린아이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 나아만 장군이 이스라엘 선지자에게 치료를 받았다는 이 말은 아람군대가 다 구원받았다는 뜻이 아니고 이스라엘아 너희들은 무엇 하느냐? 개 같은 이방인이 구원을 받는데 너희들은 순수함을 어디다 두고 있느냐? 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보고 하는 말입니다. 욕심이 돼지처럼 가득 들어있고 그 욕심 안 채워 준다고 하나님에게 대 들고 있고 천부여 손들고 옵니다 라는 순수함은 없으며 나도 잘난 사람이요 하며 서로 비교한다면 저주받은 이방인들과 다를 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에 보면 하나님께서 화목제물을 세우사 화목제물인하여 저희 죄를 저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그것을 우리보고 의라고 합니다. 무엇보고 말입니까? 예수의 화목제물을 보고 말입니다. 이 고맙고 고마운 이 고귀한 선물을 우리가 어떻게 여겼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아만 장군을 보내신 것은 이스라엘을 다시 한번 축복하기 위해서 보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축복을 할까요? 엘리사가 직접 만나서 눈으로 보여 주면서 과시했을까요? 아닙니다. 엘리사는 자기를 만날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나아만 장군은 기가 찹니다. 의사가 환자를 진찰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사는 환자를 만나서 진찰을 해야 된다는 나아만 장군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단지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을 하라는 말만 전해 옵니다. 나아만 장군은 요단강 물만 좋은가 우리나라 강은 더 좋다고 하며 실망합니다. 직접 만나 여호와를 부르며 병을 낫게 할 것을 기대한 나아만 장군은 무척 화를 냅니다. 왜 요단강을 소개한 것입니까? 나아만 장군의 개인 병을 고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요단강을 건너서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촉구하기 위해서 요단강에 가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4장을 보면 저의 말을 이해하기 쉽습니다. 출애굽기 4장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기 위해서 모세에게 기적을 보여 주십니다. 네 손을 품속에 넣어 보라, 그렇게 했을 때 품속의 손은 문둥병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인도해 내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은 문둥병 환자처럼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애굽인과 마찬가지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품속에 넣었다 뺐을 때 다시 깨끗해 졌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일어난 이후에는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용서받은 백성입니다. 애굽사람은 용서받지 못한 백성인 반면에 이스라엘은 저주가 풀린 백성이며 이것은 출애굽기 16장에서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라 합니다. 만약에 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옛날에 애굽에 떨어진 재앙이 그대로 떨어지리라 나는 치료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면 치료하는 하나님은 무슨 뜻입니까? 원래 잘났다 라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못났는데 치료의 대상이 되었다 저쪽은 치료의 대상이 아니 되었다 라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요단강 물에 문둥병이 깨끗해 졌다는 이 말은 현 이스라엘아 너희도 깨끗케 해 주었지만 지금 왜 그 사랑을 잊어버렸느냐? 왜 상실해 버렸느냐? 이 말입니다. 그리고 요단강에 7번 잠근다는 뜻은 7번 행위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로 생길 때 일어나는 행위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치료하는 것이 아니고, 치료한다면 상처에다가 어떻게 할 것인데 그런 것들을 무로 돌리고 새로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7일만에 창조했습니다. 없는데서 만들 때 하나님께서 동원하시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면 몇 번 용서해야 하나의 문제에서 7번 용서할까요? 했을 때 7번에 77번 하라는 말씀은 인간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어떤 도움이나 협조를 받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7번이라는 것은 너희들의 공로 협조 없이 하나님 은혜로만 새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요단강 물이 어떤 무기질이 들어 있어서가 아니라 요단강 물은 이스라엘을 겨냥하기 위해서이고 7번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새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게하시가 문병에 걸립니다. 게하시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까? 이방인은 깨끗함을 받고....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보는 입장은 무엇인고 하면 커텐 안쪽이냐 커텐 바깥쪽이냐 라는 관점입니다. 우리가 이만큼 열심히 했으니까 우리에게 행운과 축복을 주소서가 아니라 커텐 안쪽이냐 바깥쪽이냐 인데 우리가 열심히 했으니 라는 것은 우리가 커텐 바깥쪽, 즉 아직까지 세상에 있을 때 사고 방식입니다. 손을 얹어서 병을 고치고는 아직 하나님 세계를 알지 못한 때의 사고방식입니다. 커텐 안쪽에서의 사고 방식은 무엇인고 하면 인간의 모든 노력이 뭉쳐져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 자기 창조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함을 받는다는 이 사실, 이 사실만이 하나님 세계에 통용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 하면서 걱정 고민되는 것이 많지 않습니까? 그럴 때 여러분은 이것을 생각 해 보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3장15절에 '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 보면 악마의 머리를 누가 칩니까? 악마의 머리를 여자의 후손이 치지요. 후손이 누구이냐 하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악마의 정수리를 침으로 말미암아 영생과 구원이 주어졌습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 한번 들어보세요. 우리가 행한 것 없지요? 우리가 아무 것도 안 했지요? 우리가 행하기커녕 예수님이 우리에게 물어 보시지도 않고 똑바로 악마의 정수리를 쳐버리니까 악마의 사슬에 매였던 우리가 해방을 얻는, 커텐 안쪽의 우리 세계, 하늘나라의 원리 원칙 아닙니까! 왜 우리가 인생에 고민합니까? 우리가 고민하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내가 무얼 하지 않아서 벌을 받고 , 화를 입고 등 내 행위와 벌받는 것과 연관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깥쪽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처에 손을 얹고 하면 나을텐데.... 커텐 안쪽, 요단강 이쪽 하늘나라 세계에서는 인간의 행함 때문에 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 되신 예수님께서 악마를 쳐 부신 대가로 우리에게 복이 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악마를 이길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벌써 악마를 이겼습니다.
에베소서 4:8에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예수님이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은 악마의 결과를 그냥 갖고 계신 것이 아니고 " 내가 죄를, 마귀를, 율법을 이겼다."의 영향력과 효과를 우리에게 은사로 선물로 주셨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물 받은 사람은 자기가 잘나서 선물 받았다 하지 못하지요. 예수님이 다 하셨다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지요. 이것이 참 된 하나님의 자녀다 이것이 하나님 예수님 증인이 된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입니다. 바로 이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르니까 나아만 장군으로 하여금 계집아이로 인해 순수한 마음으로 깨끗하게 나음을 받게 됩니다.
사실 이것이 이방사람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 믿는 우리에게 다 해당되었었는데 우리는 그 동안 너무 태만하고 오만하고 교만하고 이 순수함을 우리가 그만 놓쳐 버린 것입니다. 성경의 풍성한 은혜를 우리는 쉽게 짓밟아 버린 것입니다. 감사할 줄도 모르고 고마워 할 줄도 모르고 욕심이 되어 가지고 남에게 이기려고 하는 데만 정신이 팔렸지 천부여 손들고 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빈 마음으로 옵니다, 이런 순수한 마음가짐으로 되지 않는 우리가 문제가 많지요. 우리에게 나아만 장군이 왔다는 이것은 바로 굿하는 사람이 우리교회에 왔다는 그런 일과 똑 같이 취급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을 무시하고 놀릴 것이 아니라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사실이 이러한 일들을 보고하는 말씀이구나 하며 깜짝 놀라야 됩니다. 강도가 우리교회 오거든 또 내 돈 줘야 하는 구나가 아니고 세상에 강도가 구원받다니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일이 이런 일이구나 라고 생각하세요.
오늘 본문 나아만 장군이 깨끗함을 입었다는 것은, 나아만 장군은 우리나라에 엘리사 장군이 같이 계셨으면 얼마나 좋을 까 하고 생각을 하겠지요. 보세요 늘 있어봐라 얼마나 귀찮은지. 여러분 엘리사가 우리 가운데 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늘 계십니다. 얼마나 여러분이 그 사실에 대해서 고마워하고 감사했습니까? 제가 세리요, 강도요, 창녀입니다. 이런 순수한 마음으로 여러분 신앙 생활 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엘리사가 정말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있다는 그 고마움과 감사한 마음을 다 잊어버리고 오히려 이방나라가 왔을 때 두려워하고 떨리면서 시비 건다고 오해했던 그 욕심 많던 마음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이제부터 욕심이 가득 찬 그 마음속에 예수님의 피, 용서하시는 화목제물 피가 우리의 마음속에 가득 채우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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