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30: 1- 3 (세상 바라보기)
사 30: 1- 3 (세상 바라보기)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60)
본문: 이사야 30장 1- 3절
제목: 세상 바라보기
http://222.231.1.74/~woorich1/성경강해/이사야-2005/079강-사30장,1-3,(세상,바라보기)-isa070314.hwp
이근호
07-03-14 21:09
세상 바라보기
2007년 3월 14일 본문 말씀: 이사야 30;1-3
(사 30: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패역한 자식들이여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신으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으니 죄에 죄를 더하도다』
(사 30:3) 『그러므로 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 것이라
현대인들은 보통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원합니다. 남이 옆에 있으면 귀찮아합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하루 종일 붙어있으면 부담되기도 합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때로는 떨어져서 혼자 있고 싶기도 합니다. 이처럼 현대인들은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는 그렇지 못합니다. 단 한 번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빼돌리는 경우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감시 하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왜 하나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너희들 마음대로 애굽의 그늘 밑에 들어가려고 하느냐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유다 나라를 나무라고 있습니다.
자율이라든지, 자립이라든지, 독자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닌 것이 이스라엘 나라입니다. 현대인들의 안목으로 보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가 매우 답답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늘 철저하게 간섭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연하다는 듯이 유다 나를 그렇게 다루십니다.
실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 관계로 맺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독자적인 행동이 허용되는 그런 하나님의 백성은 아예 없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예속 관계로 묶여야 제대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생활 방식과는 너무나 판이합니다. 하나님 앞에는 인간의 자존심은 허용될 수 없습니다.
레위기 25: 55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꾼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꾼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오늘날 개인주의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현대인들은 자기 운명은 자기가 선택한 사항에 의해서 결정지으려 합니다.
하나님 믿는 것도 본인들이 결심한 결과이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자립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레위기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은 아예 하나님의 품꾼입니다. 쉽게 말해서 소작인이라는 말입니다. 땅 주인은 따로 계시는데 그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늘 세금을 바쳐야 할 처지에 있습니다.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는 관계입니다. 주인을 버리면 땅에서도 쫓겨갑니다. 살고 싶으면 그 땅의 주인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소작료를 바쳐야 하는 겁니다. 어느 인간치고 자진해서 소작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다들 독립적인 신분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나라 자체가 원래 주인으로 인하여 생겨난 나라입니다. 주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그 주인을 스스로 자신이 주인행세 하겠다면 주인으로부터 저주받을 땅 위에 지금 백성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의 말을 안 듣겠다는 것은 그들이 딛고 있는 그 땅에서 멸망당하고 추방되어야 합니다.
특히 소작인은 자기를 위하여 살아갈 수 없는 자입니다. 땅 주인을 위해서만 존재할 이유가 있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현대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신들이 자립적인 입장에서 자기들이 믿게 될 하나님은 자기들이 골라 낸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처지와 동일한 위치에 있어야 오늘날에도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온 이 땅이 도대체 어떤 땅이길래 애굽을 부러워해서는 아니되는 땅입니까?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은 광야를 거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들어올 수 없는 땅입니다. 원래 이 땅에서 살던 자들은 ‘광야’의 경험이 없기에 다 추방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이라고 할 때에는 광야의 경과까지 포함시켜서 논해야 합니다.
광야에 서 있어봐야 비로서 약속의 땅의 약속은 빛납니다. 하지만 광야를 잊고 약속의 땅에 서게 되면 저 멀리 애굽 나라가 부러워집니다. 도중에 광야 의식이 누락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광야없는 약속의 땅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광야를 거치지 않는 자는 약속의 땅에 발을 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일단 약속의 땅에 들어온 자들은 지금 다시금 애굽으로 내려가고 싶어합니다. 물론 광야를 거치지 않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광야란 어떤 곳입니까? 광야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기에 철저하게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는 곳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희망이란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만 발생합니다.
거기에 비해 절망이란 가능성이 꽉 막혔을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광야란 하나님에 의해서 강제로 무장해제 당하는 곳입니다. 최소한의 양식조차도 자기 손으로 생산해 낼 수 없게 만든 곳이 광야입니다. 평소에 자력으로 버티던 자들은 이 광야에서 심한 절망을 맛봐야 합니다. 주변 환경은 인간이 이용하기에 불가능합니다.
즉 광야란 이 불가능성으로 치장해 놓은 곳입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그대로 지니고 나온 인생관이나 세계관이나 하나님관도 모두 버려야 할 곳입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인간들은 자기만의 고유한 인생 계획과 목적이 수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래 계획이나 목적이란 뭔가 중심점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축으로 하여 형성시켜 나가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시는 광야에는 중심점 자체가 전혀 없습니다. 즉 자기 마음에서 미래에 대한 설계도가 작성될 수 없게 하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매일같이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절망을 경험해야 함을 요구하는 인도 방식입니다.
애굽 나라에서 잘나갔던 자신의 주특기가 이 광야에서 자신을 살려내는 밑천으로 작용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는 달리 의지할 게 없습니다. 광야를 지나오면서 벌어진 전쟁에서 이스라엘 쪽에서 제대로 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밟고 정복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철저하게 소작인의 자리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원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원래 자신의 땅을 차지하시겠다는데 있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으로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기만의 계획이라든지 희망 같은 것은 일체 용납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나섭니다. 이는 광야 단계를 잊었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광야 때는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각 개인이 갖는 미래 계획도 다 무용지물입니다. 이곳 광야에서는 백성들에게 그 어떤 중심점도 제공해주지 않았습니다.
광야에는 위도 따로 없고, 아래도 따로 없습니다. 앞도 따로 없고, 옆이나 뒤편도 따로 없습니다. 그 어떤 지점에 있던지 상관없이 하나님은 자기 방식으로 백성들을 무장해제 시켜버립니다. 만약 자기 것을 고수한다면 계속 절망을 맛볼 수 밖에 없게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광야를 잊은 약속의 땅을 용납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벌렸던 하나님의 일도 광야로 백성들을 이끌어내면서 시작됩니다. 약속의 땅에서 미래를 생각하면 기껏 애굽나라가 목표요, 세상 중심이요, 애굽 나라의 화려함이 이상적인 이스라엘 나라의 모델로 보일 것입니다. 물론 중간에 광야를 누락시키는 과오가 생긴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다시 약속의 땅을 보게 합니다. 광야에 놓여 있지 아니하면 약속의 땅은 보이지 않습니다. 애굽 나라는 자립심을 고취시키는 곳입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늘 실패의 가능성이 인간을 괴롭히는 곳입니다. 거기에 비해 광야에서 바라본 약속의 땅은 그저 소작인으로 머무는 행복과 안정감을 제공합니다. 쉽게 말해서 더 이상 ‘실패’가 없는 신분이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은 현재 그 사람이 광야 땅에 서서 광야의 절망감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것이 없으면 아예 실패로 인한 두려움도 격정할 사항이 아닙니다. 주인이 따로 있는데 왜 우리가 걱정합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나 책임자가 아님을 명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