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차한 변명
구차한 변명 편지 (20030721)동성애자 교회어제 동성연애자교회에 다니는 분 덕분에 많은 공부가 되어서 실질적으로 그런 분 처음 만나보는데 말로만 듣던 기독교 문화 선교의 실태를 알게되는 기회가 되었고, 또 그런 부류의 허상을 다시한번 정리해보고자 합니다.영숙 누님도 직접 보셨겠지만 어제 그분은 자기를 위한 교회가 있다는 것에 너무 감격한 나머지 그런 교회에 대한 저의 시각을 아주 속좁은 성경해석이요 흑백논리로 몰아가는 형태요 그것 때문에 많은 동성연애자들이 교회에서 당하는 소외 때문에 그들의 교회존재로 기존 교회의 편협된 시각을 좀 더 넓게 보도록 하는 차원에서 자신들의 교회를 정당성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누님도 아시다시피 어제 저는 동성연애자들을 비난한것이 아니라 동성연애자라는 교회 간판이 구지 필요하냐 라는 차원에서 언급했지만 서로가 대화의 출발점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하다보니 그런 일이 있었고 심지어 살기가 오고가는 언어를 통해 우리는 이미 수십억을 죽이고도 남는 패역한 우리 모습을 새삼 알게 되는 기회가 아니였나 생각해봅니다.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나타난 교회로써 기존 교회의 편협된 사고로 소외당하는 자가 따로 또 교회를 세우고 그 소외를 극복하거나 서로의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들의 교회 정당성이 사람들의 보다 넓은 사고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주장하지만, 결국 그 속에는 아주 깊은 죄악이 흐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이 주님 이름을 들먹이면서 늘 자기가 만들어 낸 믿음을 과시 할려고 한다는 겁니다.이런 점을 그분이 못알아 들을리는 없습니다. 어제 그분은 제 방송을 끝까지 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태도를 바꾸어 저를 자신의 포용력으로 감싸서 저에게 친구라는 표현으로 동성애자교회 입당 예배를 초대하였으나 저는 거부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분이 말하는 친구라는 표현에 저는 동의 할수가 없었고, 제가 제 스스로 동성애자교회 입당예배에 참여하여 하나의 공부할 기회를 삼는 입장에서 간다면 몰라도, 친구로써 받는 초대에는 응할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거부했습니다.친구란 적어도 목숨 바칠 곳이 동일하다는 겁니다. 그 사람의 목적하는 바에 목숨거는 것이 같은 것이 친구일진데. 어제 대화를 누님이 느꼈듯이 목숨 바치는 대상이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그분과 저는 친구가 될수 없는 입장입니다. 믿는 예수님이 다릅니다. 또 어제 그분과 죄인이라는 부분에서 서로의 해석이 달랐는데 그분은 예수님이 죄에서 해방 시키러 왔기에 이제 예수 믿는 자는 죄에서 해방 되었기에 더이상 죄인이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구원만 챙기만 되지 당신같이 복잡하게 믿을 필요 있느냐? 왜 성경을 당신 눈에만 끼어 맞출려고 하느냐? 왜 여기 있는 사람을 독단 독선으로 몰도록 하느냐? 흑백논리로 몰고가지 말라? 자기 구원만 챙기면 끝나지 왜 미혹 하느냐?자 여기서 저는 그럼 죄인이 아니라 의인입니다 라는 주장에 저도 반대를 하지 않습니다만, 그럼 그 의인 됨이 주님의 공로입니까? 아님 그런 주님의 하신 일을 믿어준 믿음있는 나 자신의 공로입니까? 라는 질문을 아니할수 없습니다. 주님이 인간 구원에 목적을 두고 일하셨나요? 모든 종교의 목적은 인간 구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언약 완성이 목적이기에 성경은 인간 구원이 주제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주제입니다.(요 5:46)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만약 믿어준 나의 공로가 아니고, 오직 주님의 공로라면 오늘 일어난 내 죄에 대해서는 어떤 해석을 해야합니까? 우리는 늘 죄를 짓는데 말이지요? 죄 안짓는 의인은 없죠(롬 3:10)어제 그런 죄 2003년 7월 21일 죄, 22일 오늘 죄, 24일 내일 죄, 25일 모레 죄, 이것은 어떤 입장에서 봐야 합니까? 오히려 전에는 주님의 공로를 몰랐을 때는 이 죄에 늘 정죄 당하는 모습으로 살수 밖에 없어, 율법의 행함으로 자신을 방어해 볼려고 했으나 오히려 더 깊은 죄악으로 몰고가서 율법 지키는 나 자신이 교만이라는 죄로 인해, 그 은혜는 더더욱 알길이 없는 죄 아래 놓여있게 되는 경우였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하랴? (롬 7장 - 8장)(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그러나 이제는 주님을 믿음으로 주님의 공로만을 의지해서 보니 어제의 죄 오늘 죄 내일 일어날 죄가 나를 정죄함에도 불구하고 그 죄가 쏘는 방향을 주님이 자기 자신에게 화살 방향을 돌려서, 마귀의 모든 정죄(송사롬 8:33)를, 율법의 모든 저주를, 예수님이 그 죄를 모두 감당하시는 대신적 저주를 받음으로 우리를 용서하는 십자가의 저주를 대신 받으시는 그 그리스도의 사랑 깊이 넓이(엡 3:19)를 알아가게 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죄가 멀리 다라난 것이 아니라, 죄는 여전히 내 앞에서 밀까불듯이 까불지만, 주님의 은혜를 그 십자가의 사랑을 이래서 아 주님이 죽으셨구나 를 알게 되는 그 은혜에 동참하게 된다는 겁니다. (결국 죄란 주님이 해결할 문제이지 우리가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해결하신 주님을 믿어준 나의 대견스러운 믿음도 결국 또 죄 아래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그와 똑같이 언약의 성취도 우리 손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언약(약속)은 주님만이 지킵니다. 성취합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롬 1:17/히 10:38) 자 그럼 죄가 공로가 있는 겁니까? 죄가 자랑꺼리가 됩니까? 아닙니다. 은혜를 더하게 할려고 죄를 더 지어야 합니까? 그럴수 없습니다.(롬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자랑 되어야 할것은 오로지 십자가의 사랑 뿐입니다(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사람은 화냄을 통해서 그 사람의 목적, 그 인생의 주인, 그 삶의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분명히 생명책에 기록된자가 장애인이든 강도든 문둥병자이든 트렌스젠더이든 개같은 이방인이든 기생 라합이든 창녀이든 거지 나사로 이든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든 구분없이 모든 이에게 차별없이 생명책에 기록된자는 그들이 존재하기 전부터, 트레스젠더가 되기 전부터,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하기 전부터, 동성연애자 되기전부터, 태어나기 전부터 구분없이 생명책에 기록된자는 자기 백성은 반드시 구원하시는 분이다는 겁니다. 왜냐 그들이 바로 아들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롬 8장 28-31절) 이 말씀을 수도없이 반복하고 강조하고 중요하게 언급했습니다만, 오히려 기쁘고 감사함이 넘치기는커녕, 저를 정죄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너무 기뻣습니다. 아 사도바울님이 알게된 사도행전의 결론이 이거구나 또 실제상황이 저에게 적용되어 너무 너무 기뻣습니다.(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그렇기에 예수님 이름의 권세로 제자들이 마귀를 쫏아내니 마귀가 떨어진 것을 보고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마귀가 떨어지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니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보고 기뻐 하라고 하신 것처럼. 내 소외성 때문에 기존 교회의 불편성을 해소하기 위한 나를 위한 교회의 탄생, 흑백논리에서 벗어난 좀 더 넓은 시각을 갖게 해주는 교회 존재로써 기뻐하는 그분의 주장에는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을 위해 목숨 바친 십자가의 사랑이 아주 당연한, 예수님을 당연히 날 위해 목숨 바쳐야 한다는 그런 당연성으로 주님의 피를 모독함에 있어서 주저함이 없었기에 어제 말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에 대한 교회론에 그분은 동의 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도 노골적으로 성경공부를 방해한 그 강퍅함에 내어버려둘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동안 저와 나눈 말씀이 늘 실제상황으로 접할 좋은 기회였다고 봅니다.이제 본격적으로 아주 짧게 주님이 세우신 교회에 대해 어제 말한 내용을 정리 하겠습니다.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 집사님이 증거하는 교회의특징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교회가 아니고, 주님의 피로 세운 교회를 주장한다는 겁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교회는 교회 자체 존재를 기반으로 하기에 하나님도 주님도 교회를 위해 있는 분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피로 세워진 교회는 주님의 피만 증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신부인 스데반은 그 피를 주장하다 신랑이 간 길을 따라갑니다. 머리가 그 길을 갔기에 몸도 따라 간 것을 실제상황으로 보여준 말씀입니다.오늘날 교회가 가장 무시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이 예수님의 피를 주장하던 스데반을 죽이는 것처럼, 교회가 교회를 핍박하는 시대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기뻐하고 감사한 것은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백성을 위해 화목제물이 되시고 우리가 죽인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셔서 부활 했다는 그 놀라운 사실이 믿겨지기에,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증거하는 입술로써 주님의 용서를 전하는 가장 행복한 자입니다. 주님의 용서를 전하는 하루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사랑은 아무데나 있지 않습니다 오직 여기에 있습니다. 화목제물 그래서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라는 찬송가의 고백이 죄인의 입술에서 울려퍼지는 겁니다.(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