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호 : 언어사용의 함정] 2006-11-03
[이광호 : 언어사용의 함정] 2006-11-03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언어사용의 함정 - 아래 몇분(특히 오용익 님)의 글을 읽고
이광호 (Homepage) 2006-11-03 10:52:17, 조회 : 170, 추천 : 8
인간은 스스로 자기 언어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완전히 부패하여 죄악에 빠진 인간의 한계이지요.
죄인인 인간은 스스로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할 수없는 존재입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면서 사실은 그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기를 자랑하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앞세워 자기의 신앙을 자랑하려는 어설픈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효도’를 강조하게 되면 그것은 자기가 효자라는 점을 은근히 자랑하는 것 아닐까요? 교회에서 기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자기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은근히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것을 의도하고 있는가 의도하지 않고 있는가 하는 점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진정한 효자는 ‘효’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가 천하의 불효자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깨닫는 자이며, 주님 안에서 진정으로 기도하는 자는 기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기도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자일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많이 이야기하는 것과 십자가로 인한 복음에 대해 올바른 깨달음을 가지는 것 사이에 일치적 연관성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칫 십자가를 많이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을 십자가를 중요시하는 훌륭한 신앙인의 자리에 놓게 된다는 점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즉 그것이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짓는 한 수단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강조하는 순간, 스스로 자신을 십자가를 중요시하는 훌륭한 신앙인의 자리에 놓게 됩니다. 십자가의 사역은 인간의 언어에 달린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사역 자체에 있는 것이지요. 그 앞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처절한 저주아래 놓여 있을 따름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역 자체가 아니면 모든 인간들은 저주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것이지요.
인간들 가운데 누구는 신앙이 더 좋거나 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인간들 가운데 특별히 지혜로운 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주님께서 스스로 취하신 십자가의 은혜에 감격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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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언어사용의 함정 - 아래 몇분(특히 오용익 님)의 글을 읽고
이근호 2006-11-03 11:11:31, 조회 : 161, 추천 : 1
이 세상에 기도해놓고서는 그것을 은근히 기도했다고 의식하지 않을 자가 없다는 점을 놓치면 안됩니다.
즉
기도해놓고서,
1. 은근히 기도한 것을 드러내지 않는 자=십자가를 제대로 아는 자= 지식으로만 아니라 실제로 십자가 영을 받은자
2. 은근히 기도한 것을 드러내는 자= 십자가를 근성으로 받아들였지만 실제로는 가짜 인자
라는 구분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2 번'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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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언어사용의 함정 - 아래 몇분(특히 오용익 님)의 글을 읽고
이석원 2006-11-03 23:29:12, 조회 : 86, 추천 : 0
모든 사람이 2번에 해당된다면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지요? 기도하지 말라는 말씀인지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근호 목사도 분명 2번에 해당될 텐데요, 그래서 이근호 목사는 기도 안하시는지요? 기도해봤자 2번 아닌가요? 2번에 해당되는 기도는 아예 주님께서 듣지도 않으실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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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언어사용의 함정 - 아래 몇분(특히 오용익 님)의 글을 읽고
이근호 2006-11-04 01:10:12, 조회 : 84, 추천 : 0
주님은 성도에게 기도하지 않을 수 밖에 없게 하시고, 그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기도와 비교케 하십니다.
이로서 성도는 죄인으로 드러나며 그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근거가 주님의 십자가에 기도로만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이 기도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용서와 기도하심에 대해서 감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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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인으로 토론을 제안합니다...
최명규 2006-11-03 11:05:22, 조회 : 106, 추천 : 3
두분 이근호, 이광호 목사님의 신학의 차이(복음의 차이)에 대해서
함께 모여서... 그리고, 관심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토론을 하면 좋겠습니다..
젊은 목사와 성도들도 배울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서로 싸우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약 10여년 전에 대구에서 '성령론'에 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서로의 차이를 알게 되었고... 좋은 기회였습니다..
온라인에서는 좀 피할수가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오프라인에서는 피할길이 없다는 점이 장점입니다..
동의하시면 답글을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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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토론과 방법적인 문제
이광호 (Homepage) 2006-11-03 11:08:36, 조회 : 166, 추천 : 6
제가 이근호 목사님과 어떤 신학적 토론을 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었군요. 글쎄요... 그것을 통해 진리가 좀더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여러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건전한 신학적 토론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금 생각하고 진리에 좀더 가까이 접근해 갈 수 있는 기회기 제공된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입니다.
단, 정당한 토론을 위해서는 분명한 룰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특정한 몇 사람이 신학적 토론을 하게 된다면 분명한 룰과 사회자(?)가 있어야 합니다. 토론자가 일방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마구잡이식으로 뱉아내면서 토론하게 되면 결과는 의미없는 천박한 자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룰과 질서가 있는 토론의 장이 마련된다면 복음을 드러내는 괜찮은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근호 목사님과 토론을 하게 된다면 분명히 서로 다른 주장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 목사님의 신학적 주장이 성경적으로 옳고 저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면 그 토론을 통해 복음의 의미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니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굴복시키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지요.
만일 이러한 일이 여러 사람들에게 유익이 된다고 판단하시면 누군가 주선해 보십시오. 분명한 룰과 함께.... (토론을 추진하게 된다면 토론자들이 주어진 룰에 동의할 때라야 그것이 성사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룰이란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그야말로 예입니다.)
1. 중립적인 사회자가 있을 것(사회자는 편파적이지 않으면서 신학적 식견이 토론자들 보다 못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어느 한 편이 주어진 주제에서 심하게 벗어나게 되면 그 점을 상기시켜 줄 수 있어야겠지요.... 질서유지와 함께.....)
2. 하나의 주제를 정할 것(어떤 주제이든.... 차례로 다른 주제를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3. 한 사람이 말하고 다음 사람이 말할 것(마치 탁구나 테니스 경기를 하듯이.... 중간 중간 사회자가 적절한 코멘트를 할 수 있겠지요)
4. 하고자 하는 자기 주장의 분량을 정할 것(예를 들어 한번 말할 때 마다 A4용지 한매 이내에서 할 것 등....)
5. 인신공격은 하지 말 것(상대의 말을 인용하여 강도높은 신학적 비판을 할 수 있으되 자기주장을 주로 펼칠 것.... 시장에서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니까....)
6. 서로간 토론과 답변을 할 수 있는 시한을 정할 것(예를들어 즉시 치고 받는 식이 아니라 하루에 한번씩 말할 것..... 그리고 늦어도 이유없이 이틀을 넘기지 말 것 등등...... 이는 토론자의 신중함과 함께 관전자들에게도 생각할 기회를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7. 토론 기한을 정할 것(예를 들어 한 달 동안 토론 한다든지...... 아니면 두 달? 그것으로 부족하면 기간을 연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사실 이런 토론이 꼭 있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아래 몇 분이 그것을 기대했다고 하니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번이 아니라 나중에라도 혹 신학적 토론의 기회가 되면 이런 정도의 룰은 있어야 서로간 유익한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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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신학적 토론과 방법적인 문제
이근호 2006-11-03 11:16:54, 조회 : 135, 추천 : 2
주님께서 사회 보신다면 그런 식으로 토론를 진행시키실까요?
공정? 편파적이지 않는 사회자? 인신공격이 아닌 용어?
도대체 누가 이런 것을 분간할 잣대를 지닌단 말입니까?
이런 것은 다 욕심이 아닐까요? 구약 선지자들이 이런 요구에 부합할 경우에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습니까?
그냥 '우리 주님께서는 이러이러하게 일하셨습니다'라는 사실만을 증언하면 그만입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 주심만으로 감사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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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신학적 토론과 방법적인 문제
최명규 2006-11-03 11:28:30, 조회 : 117, 추천 : 0
제가 공부하는 세상 학문인 사회학에서는 학회에서 토론을 이런식으로 합니다..
예
분과 : 종교사회학
주제 : 교회의 세속화
발표자 : 홍길동, 최명규
토론자 : 홍길동-임꺽정, 최명규-최성민
토론자의 역할은 발표자의 내용에 대한 차가운 분석과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토론자는 미리 발표자가 발표할 내용을 받아서 분석을 해서 옵니다.)
토론자에 대한 답변 : 발표자가 합니다..
이후에 발표자끼리 질문과 답변을 하는 시간들을 가집니다...
그리고, 사회자가 마무리를 하고 마칩니다..
사실 두분의 신학적인 견해에 중립적인 사회자는 찾기가 어렵지만,, 사회자가 진행의 입장만 취하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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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신학적 토론과 방법적인 문제
이근호 2006-11-03 11:45:38, 조회 : 119, 추천 : 0
사회학을 공부하신다니까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토론회가 되었던 뭐가 되었던, 기본적으로 '돈' 문제입니다.
그리고 권력문제입니다.
즉 '내 편'이 이 토론회장에 몇 명이나 우굴거리냐에 신경쓰게 되어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마지막 죽을 때했던 그 토론회에 스데반 집사패가 몇 명 모였을까요?
설사 있더라도 그의 죽음을 뜯어말릴 실권자가 과연 있었던가요?
그냥 늘 복음 전한다 생각하고, 혹시 그런 기회 있으면 '감사합니다'라는 마음으로 참여하면 되는 겁니다.
주인공이 되지 않고 청중이 주인공이 되더라도 그것도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육체의 열매 가운데 추악한 '분쟁 마음'도 포함되어 있음을 유념해야 될 것입니다. (갈 5:20/롬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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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신학적 토론과 방법적인 문제
최명규 2006-11-03 11:55:31, 조회 : 124, 추천 : 0
두분의 글을 보니
동의를 하시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저는 아직 30대 중반의 목사입니다..
이근호 목사님도 이광호 목사님도 잘 모르는 분들입니다...
사회자를 구하는 일도 만만치 않습니다...
혹시 추천할만한 분이 계시면 추천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차후 토론의 주제와 형식, 장소(저의 교회도 무방, 아니면 이근호목사님 교회에서 한번, 이광호 목사님 교회에서 한번)에 대해서는 의논을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두분이 동의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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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신학적 토론과 방법적인 문제
이근호 2006-11-03 12:10:36, 조회 : 148, 추천 : 0
>우리 교회에서는 주관하지는 않습니다. 귀하께서 전 벌려놓으시고 초청하는 형태로 하시면 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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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신학적 토론과 방법적인 문제
함상권 2006-11-04 02:22:03, 조회 : 89, 추천 : 0
이근호 목사님과 이광호 목사님의 토론 환영합니다.
근데 한가지 문제는 신학적인 얘기를 한다는 것은
서로 자기입장을 주장하는것이 강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나 두분이 토론에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다면
앞으로 좋은 토론 문화가 생겨 날 것으로 기대됩니다.
좁은 소견인데 한가지 제안을 합니다.
주제가 있으면 그 주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만을 주장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상대방 주장을 묵살하거나 언성을 높일 필요없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만 하면 될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한 입장이 옳고 너는 틀려 그런 식이 아니면 될것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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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저는 신학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근호 2006-11-04 11:43:20, 조회 : 92, 추천 : 1
제가 토론회 초청받는다면,
왜 이단들이, 복음은 말하지 않고 신학을 앞장 세우는가를 말해주려고 합니다.
그것은 신학을 정립하여 소지하므로서
십자가 복음의 지적에서 자기 만이 비켜갈 수 있으며,
또한 그 신학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와 정당성을 한꺼번에 확보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 밥벌이도 당당할 수 있다고 대외적으로 알리겠다는 심보 때문입니다.
신학으로 흡수되는 복음은 . 본인들이 여지껏 복음을 전혀 믿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명명백백하게 드러내어주는 현상입니다.
모든 신학을 깨는 복음이 아니면 그것은 참 십자가 복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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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복음과 개혁주의 신학과의 차이점
이근호 2006-11-03 11:48:25, 조회 : 129, 추천 : 3
죽자"와 '바르게 살자"는 극과 극입니다.
한쪽은 매일 '죽자'이고 한쪽은 매일 '살자'입니다.
'죽자'고 하는 것이
흔히들 말하는 개혁주의신학이 아닙니다
개혁주의신학은, 일단 내가 살면서 잘해보자는 겁니다.
왜냐하면 일단 내가 살아야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비로소 성립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일단 내가 살아야 그 '산 자아'가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든지, 선한 일을 위하여 새롭게 지음받은 자로 행세하든지, 거룩하게 살아야 된다는 명령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십자가 복음은,
주님이 살아있는 한 구태어 내가 곧 살고자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단지 사는 것은 내가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살아있기에 살아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러한 관계가 주님 보시기에
'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모습이요, 새롭게 지음받은 자의 모습이요, 거룩한 관계를 보여주는 모습이요, 온유와 화평 및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모습니다.
이런 것이 외부로 드러내는 방도는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주님 안에서 죽고 또 죽어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즉 십자가 복음에서는 '성도의 성화론'는 없고 '주님의 성화론'입니다.
주님께서 거룩케 하시는 거룩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 안에 있는 자도 '자아'가 있는데 그 '자아'는 늘 주님에 의해서 죽어지는 '자아'로 움직이고, 살고 있는 겁니다.
자아의 죽음을 자아의 사라짐이나 해체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그런 것은 '의식 철학'에서 주장하는 겁니다. 성경적으로 봐서 그 어떤 인간도 마지막 때에 무덤에서 몸을 입은채 호출 당하기 마련입니다. 한번 피조물은 영원한 피조물입니다.
즉 불교의 '무아론'처럼 자아의 사라짐은 없습니다.
성도의 자아는 예수님의 새언약 피를 증거하기 위한 자아입니다.
따라서 성령님께서는 성도안에서 '죽음의 힘'을 늘 가동시켜 늘 성도로 하여금 죽이고, 그로 인해 그 성도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생명이 밖으로 증거되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
개혁주의 신학은, 자아실현, 곧 인간을 신으로 승격하는데 초점이 있기에 죽는 것도 처음 예수 믿었을 때만 죽었다가 시간이 흐르면 다시는 되살아나 (거듭나서) 두 번 다시 죽는 것도 없이 본격적으로 자아가 말씀 성취의 행동대장이 되어 펄펄 살아 그 동안 미진했던 말씀지키기에 제대로 완벽을 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열심히, 부지런히, 정신 차려서, 진지하고, 성의있게 말씀을 지키면 말씀이 지켜진다는 겁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지키도록 힘을 실어준다는 겁니다.
그렇게해서 지켜서 얻어낸 자기 만의 의로움으로 성도는 하늘 나라에서 차등지게 상을 나누어 갖는다는 겁니다.
이 의로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얻어낸 의로움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의나 예수님의 공로만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만'의 의가 따로 장만 못한 자는 아무리 예수님의 공로만 의지해도 구원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설사 구원되더라도 '부끄러운 구원'일 뿐이라는 겁니다.
즉 구원의 종류가 둘로 나뉘어지는 겁니다. '부끄러운 구원'이 따로 있고 '자랑스런 구원(?)'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욕먹이는 구원관이죠. 예수님이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구원관입니다.
그런데도 만약 이런 개혁주의 식으로 성도를 안 가르치면 성도는 태만에 빠지고 방종에 빠져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성도가 못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 지키기에 있어 우선 성공 사례를 많이 가진 목사들은 칼빈의 주장처럼 필히 일반 평신도 위에 군림해서 그들에게 가르치는 스승이 되어야 하고, 그 스승의 자리와 제자들이 자리는 영적 권위로서 격리되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목사가 돈 내라면 잔말말고 돈 내라 라는 겁니다.
교회 돈 갖다바치면 거듭난 자요, 돈 안 갖다 바치면 아직 거듭나지 않는 자라는 겁니다.
만약 이러한 목사의 권위에 복종 안하면 세례고, 성만찬이고 참여할 자격이 박탈당해도 마땅하고,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하며 교회에서 나간 자는 칼빈의 주장대로 지옥갈 자라는 논리입니다.
이 모든 개혁주의 이론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목사 말 들으면 천국가고, 목사 말 안들으면 지옥간다" 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모든 일은 일단 목사를 거쳐서 일하시기에, 목사가 모든 영적 권위를 위임받은 위치에 있다는 겁니다.
이로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점은 없습니다.
단지 목회자의 다수성에서 벗어나 일인 최고 목사를 수하에 모든 위임된 영적 권위를 효율적으로 통합했다는 것 뿐입니다.
어느 성도가 성령받았는지 아니받았는지는, 목사가 사전 심사할 수 있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 모든 사태가, '살고자 하는 자가 살게 되는 자이다'라는 원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죽기 위해서 사는 자가 정말 살아있는 자'이다는 목사가 되었던 평신도가 되었던 상관없이 누구에게도 발생되는 기적의 성령의 사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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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없으면. . .
최은성 2006-11-04 04:25:04, 조회 : 103, 추천 : 0
>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 . .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 . .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 . .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을찌라도. . . .
사랑이 없으면 . . . . . . . . . . . . . . . . . . .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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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사랑이 없으면. . .
박윤진 2006-11-04 08:28:59, 조회 : 105, 추천 : 0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상한 심령이 있는 자는
자신이 정의한 별도의 사랑을 소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이미 사랑이 나를 소유했기 때문에........
이것은 단순히 주어와 목적어를 바꾸어 나온 것이 아닙니다.
육과 영의 처절한 분리에 관한
언약의 피뿌림에서만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흔적이 모든 시비와 다툼에서
자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퀴벌레나, 암세포의 죽음에 관해 딱하게 생각하는 것을
어찌 감히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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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사랑이 없으면. . .
김헌식 2006-11-04 08:45:33, 조회 : 108, 추천 : 0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갈 6:17)
두렵기도하고.........한편으론 부럽기도 한 말씀의 인용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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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행위를 하다가 엄마에게 들킨 기분
박윤진 2006-11-03 23:41:00, 조회 : 152, 추천 : 8
바퀴벌레가 살충제에 죽어간다. 다리 전부를 이리저리 휘젓다가 죽었다.
그 바퀴벌레가 불쌍한가?
세상이 하 수상하여 바퀴벌레의 마지막 모습에 눈물 짓는 이 있을지 모르니
비유를 바꾸어보자
암세포가 항암제의 공격으로 점차 죽어간다.
암세포의 죽음에 연민을 느끼는가?
어떤 암세포가 책을 썼다.
그리고 다른 암세포가 그 책을 비평했다.
의사는 누구 편을 들어줄까?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
의사가 암세포 중 누구의 손을 들어주어야 하는 운명의 길에 서 있는가?
의사가 많은 암세포의 환호와 찬사를 기대하는가?
의사가 암세포 중 자신의 뜻을 잘 아는 놈들을 찾고 그들에게 기대하고 의지하는가?
예수께서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셔서 이 암세포에게는 이렇게 저 암세포에게는 저렇게
마구 해석되어 그들을 기쁘게 하고 뿌듯하게 하고 잘나게 하심이 얼마나 적절한 처사인가?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니 말이다.
이보다 완벽하게 육과 영을 분리해 낼 수 있을까?
의사는 피흘리고 있는데
암세포들은 너무 점잖하다.
누가 암세포고 누가 의사인지 모르겠다.
가장 치사하고 조렬한 방법으로 싸워라!
내가 내 글에 경이롭고 감탄하고 은혜받아라!
설득하고 토론하고 수정하여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라!
그래야 주님의 십자가 언약만이 옳았음이 더욱 선명하게 들어나지 않겠는가!
육은 더욱 육이 되어 영을 상상하고 강간하라!
마음껏 자위하라!
하나님의 아들의 버려짐 앞에서 변명치 못하리라!
누가 십자가의 무게를 버티겠는가!
버티면서 버티면서 자신의 변신을 꿈꾸는 자여, 좀 더 힘을 내라!
성령이 너를 새사람으로 만드시리라!
암세포여 비전을 가지라! 의사가 되리라!
의사의 죽음이 너를 새롭게 하리라!
이 글을 적고 있는 네 놈은 암세포 아닌가벼?
말이 통하고 글이 해석되니 이것도 암세포의 언어의 유희 아닌감?
물론 맞다.
자위행위 하다 엄마에게 들킨 기분이 든다.
그런데
창피함을 충분히 잊게 하는 이 시원함! 톡 쏘는 듯한 시원함!
숨길 것이 없어져 버린 가벼움!
십자가에 꽉 눌려버린 자유함!
훨훨 날아갈 것 같다...................
암세포를 암세포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암세포는 의사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
누가 의사 말을 정확히 알아들은 암세포인지에 대해,
구경하고 편가르지 말고
왜 의사가 죽을 수 밖에 없었는지 대해,
암세포는 왜 암세포 일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해,
육과 영은 왜 항상 피를 동반할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해,
예수의 흔적을 더듬어 보면 안될까?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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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표현에 있어 과한 느낌이 듭니다만 ....
이근호 2006-11-04 08:43:04, 조회 : 128, 추천 : 2
글의 취지는 이러한 것으로 보입니다.
무슨 주장을 하거나, 설교하거나 남에게 권면할 때나, 글을 쓰거나 무슨 신학을 말할 때도 반드시 '나도 또한 이러이러해서 악성 암세포일 수 밖에 없는 입장입니다'라는 것을 밝혀주지 아니하면 그 신학이 어떤 신학이든, 어떤 성경 이해든지간에 사람을 죽이는 '독약'일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저자는 '자신의 죄인됨'을 밝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밖에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근거로 자신을 죄인이라고 규정짓는다면, 그렇게 규정짓는 그 겸손이 자신의 의로움이 누적될 것이 뻔하고, 더욱 무서운 일은, 예수님을 빙자해서 결국 '자신의 구원받았음'을 증거하는 '자아의 대단함의 증인'으로서 이것 역시 십자가를 공로를 훼손시키는 독같은 것이 된다는 겁니다.
명백히 육적인 이단이면서, 영적인 사람으로 위장하는 그 행태가 너무나 구역질 나서, '자위'라는 구역질 나는 표현을 쓴 것으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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