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호 목사님의 서평에 대한 저자(이광호)의 견해] 2006-11-02
[이근호 목사님의 서평에 대한 저자(이광호)의 견해] 200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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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님의 서평에 대한 저자(이광호)의 견해
이광호 (Homepage) 2006-11-02 18:47:54, 조회 : 175, 추천 : 3
이 목사님, 저의 견해를 주의 깊게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난번 부산에서 있었다는 강의도중 이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왜 나한테 호응을 얻으려고 해요. 그 사고방식으로 목사를 해요? 이런 소리 여러분들은 많이 듣지만 그 사람은 간만에 듣잖아요. 간만에 들으라고 하는 거예요. 또 그 사람한테 그 소리하지 않습니다. 사람 조지고 또 조지면 너무 잔인하니까 안하는데, 여러분들은 속으로 많이 듣지만 그 사람은 오랜만에 들어요. 참석 안해요. 우리 모임에. 사랑인 줄 알아야 해요. 세상에 그런 사랑이 어디 있어요?”
(이 목사님으로 부터 호응을 얻을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추호도 없음을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도리어 목사님께서 원하시던 바였던가 하는 마음이 듭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기를 권하시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목사님 말씀처럼 제가 목사님의 호응이나 얻으려 한다면 목사 하지 말아야겠지요? 그것은 목사님 주변에 있는 다른 목사님들도 깊이 새겨 들어야 할 말씀이리라 생각합니다.)
이 목사님의 말씀처럼 저도 이 목사님께 대한 진정한 사랑의 마음으로 이런 말씀을 드린다는 점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목사님께서도 간만에 이런 말씀을 듣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비아냥대거나 다른 불순한 마음은 없습니다. 서로간 더욱 낮아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과 이 목사님께서 말쑴하시는 그 '사랑' 때문입니다.
서평을 하시려면 적어도 저자가 사용한 용어(단어)와 문장을 통한 전체적인 문맥을 올바르게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저자의 의도를 동시에 파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서평을 할 수 없으며 해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 목사님께서는 저자의 책들에 대한 전체적인 문맥파악을 제대로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저자의 의도를 결코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목사님의 글에 저자의 의도와 상관이 없는 내용을 저자의 주장인 양 쓰고 있는 것이 많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서평을 하시려면 정확한 독서가 있은 후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이 목사님께서도 자신의 저서를 읽는 독자들이 저자의 의도를 잘 파악하며 읽기를 바랄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저에 대한 일종의 편견을 가지고 책에 기록된 문장 일부를 자의로 인용해 이 목사님의 주장을 보완했을 따름입니다. 그건 서평이 아니라 타인의 저서를 통한 자기주장 세우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느끼기로는 이 목사님께서는 자기주장에 동의하지 않으면 일단 반대편에 두고 일방적으로 짐작하기 때문에 그런 식의 서평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는 저의 글에 대해 누가 어떤 혹평을 한다 해도 저는 그것 자체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무지한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한들 그것은 대수로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이나 세속주의자들이 저에게 어떤 심한 말을 한다 해도 신경쓰지 않습니다. 단, 저의 글을 서평하려면 정확한 독서를 했을 경우에만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목사님께서는 그 점에 있어서 저의 책을 성실하게 독서하셨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닐 뿐 더러 불특정 독자들에 대한 일종의 기만일 수 있습니다. 독자들에게 저의 책에 대해 사실과 다른 불건전한 편견을 미리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상이 목사님의 서평에 대한 저자인 저의 간단한 견해입니다. 나머지는 관심있는 독자들에게 맡겨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사용한 용어 가운데 거슬리는 부분이 있으면 성숙한 자세로 소화하셨으면 합니다. 혹 불쾌한 표현이 있다면 그것을 저의 사랑의 표현으로 받아 주십시오.
나중에라도 지난번처럼 또 우연히 만나게 되면 성숙하나 자세로 얼굴을 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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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근호 목사님의 서평에 대한 저자(이광호)의 견해
오용익 2006-11-03 07:34:02, 조회 : 129, 추천 : 2
이광호 목사님의 글 제목을 보면서
이제야 논쟁다운 논쟁이 진행되나 싶어 참으로 반가웠는데 클릭을 해보니 그게 아니라 너무 실망이다.
내가 표현한 논쟁다운 논쟁이란
예를 들어 이근호 목사님이 내가 받은 복음은 이런 복음입니다 라고 하면
이광호 목사님도 내가 받은 복음은 이런 복음입니다 라고 전개될때 비로서 성립한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그게 아니었다.
내가 두분의 주고 받는 글을 보니
이근호 목사님은 계속해서 이런식이다(참 미련하게 시리)
내가 받은 복음은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는 복음인데
그 십자가만 자랑하지 아니할수 없기에
이 지상의 모든 인간은 그 십자가만 자랑하는 그 인간일지라도 무조건 십자가가 규정하는 대로
죄인의 자리에 서지 않을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말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자란
십자가 복음외에 자기인격이나 자기자존심을 챙길 어떤 여지도 있을수 없다는 거다
정말 십자가에서 출발된 복음이라면
사도 바울이 복음전하는 같은 태도가 나올수 밖에 없다는 거다.
내가 전하는 복음외에 다른 복음 전하면 나라도 저주 받는다는 그 태도 말이다.
사도바울이 저주의 대상에 포함시켰을때 그 저주란 어떤 저주일까?
오직 십자가만이 언약의 완성(새언약)이기에 완성된 새언약만 증거하는데
새언약에 들어가서 보니,
이 지상의 어떤 인간도 아니 천사라도 따로이 자기 자존심 챙기고 자기체면 챙기고, 자기신학을 챙겨도 되는
어떤 근거도 없이 무조건 죄인임이 판명났기에
완성된 새언약으로
이 지상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모든 이론과 사상을 파하는 식으로 복음은 전해질수 밖에 없고
그 파해져야 될 이론과 사상에 물들지 않은채 깨끗하게 살아줘서 구원받을 인간 없기에
(십자가안에 있으니 바르게 살아줄수 있다가 아니라,
도리어 십자가안에 있기에 그점을 더욱 뼈저리게 알아가는 것이 아닌지)
반드시 복음전도자는 완성된 새언약의 위력에 의해서 사용되기를
나는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하면서 오직 의는 십자가의 피밖에 없다고 십자가 자랑하는 복음이 개진될수 밖에 없기에
반드시 죄인으로 들어가야 할 자리에
자기체면이나 자기 자존심이나 자기 신학이나 복음 전하는 자기 열심이나 수고를 개입시킨다면
나는 마땅히 저주받아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내가 틀리지 않았다면 사도바울과 이근호 목사님의 복음개진의 논리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아직 이광호 목사님은 자기가 받은 복음이 뭔지를 제대로 개진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이광호 목사님께서 이렇게 해주기 바란다.
'내가 쓴 책에서 내가 제시한 복음은
이런 복음인데 이런 부분을 당신이 오해했다'든지
'이런 부분을 제대로 보았다'든지의 서평을 개진해줘야 논쟁다운 논쟁이 진행될것이 아닌가
제발 그러기를 바란다.
그래야 후배들이 배울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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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맞습니다..
우인숙 2006-11-03 07:53:31, 조회 : 119, 추천 : 0
어제 해야할 업무가 많이 밀렸는데도 게시판만 열어놓고 있었는데
결국 크게 실망하고 말았습니다...그래도 많이 배웠습니다.
한 분은 자기의 인격이나 미움 탈것이나 전혀 개의치 않고 십자가만 증거하고
한분은 고상한 인품을 풍기면서 논리와 예의범절과 학자적인 자존심으로..
기차의 두 레일이 만날수 없듯이 서로 딴세상 얘기를 하고 있는걸 느꼈습니다.
오 목사님 ...오늘 울산 가시죠? 동참 못해서 무척 아쉽고요..너무 피곤 하실테니
내일 안 오실거면 광주 집에서 주무시고 가십시요..저는 없지만 비밀번호 아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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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목사들의 논쟁에 대하여
이가노 2006-11-03 01:33:21, 조회 : 157, 추천 : 5
무척 공통점이 많은 두 목사님의 논쟁에 대한 소견
1. 이*호 이*호 , 처음에는 무슨 형제 지간인 줄 알았네, 쳇!....
2. 기존 교단에서 퇴출(?)당할 정도로 비판정신이 투철( 한 성깔하는 사람들)
3. 지지자들이 대부분 인텔리겐차 수준(음 ~ 나를 포함해서...ㅠㅠ)
4. 일단 돈이나 명예 같은 것 밝히는 저질 먹사는 아니라는 점
5. 자신의 주장에 대해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고집쟁이 (글 봤지요~)
6. 그래도 차이를 지적하라면....글쎄....
중간 글자가 다르고.....
근은 주걱으로 누룽지 박박 긁어도 모자라
솥이 뚫어지도록 긁어버려 적을 많이 만든다(특히 창작비판의 일인자...^^이것이 그의 매력이다)
그러나 결론은 명쾌하다!!! 속을 시원~하게 해 주지, (박영선 신학에 조금 영향을 받았다고나 할까...)
광은 학자답게 논리 정연하다, 특히 강의나 대담 시 제일 설득력이 강하다
나름대로 개혁주의적 신학자로서 인정받고 있다, 한 자존한다 (고신에서 샛별같은 존재...)
7. 두 분의 논쟁에서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를 저마다 자랑한다고 우기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결론 - 이근호와 이광호는 바보 목사다
(바라볼수록, 보고싶은 목사님들...
왜냐, 이 시대 혼탁한 한국 신학계에 샘물과 같은 존재들이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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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목사들의 논쟁에 대하여
이가노 2006-11-03 01:33:21, 조회 : 158, 추천 : 5
[re] 바보목사들의 논쟁에 대하여
최은성 2006-11-03 03:17:33, 조회 : 146, 추천 : 0
>
시기는 성미가 비꼬인 상태가 아니고 모든 기능을 혼란시키는 성미의 이상 상태(異常狀態)이다.
그것은 사단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그는 하늘에서 첫째가 되기 원하였다.
그러나, 그가 구한 모든 능력과 영광을 소유할 수 없게 되자, 하늘 정부를 반역하게 되었다.
그는 우리의 첫 조상을 시기하여 그들을 범죄하도록 유혹하고 그들과 모든 인류를 파멸당하게 했다.
시기하는 자는 다른 사람들의 훌륭한 특성과 고상한 행동에 대하여 눈을 감는다.
그는 탁월한 것을 언제나 헐뜯고 그릇되게 나타내고자 한다.
사람들은 이따금 다른 결함들을 고백하고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시기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바랄 것이 없다.
사람을 시기하는 것은 자기가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므로,
교만은 어떤 양보도 하지 않을 것이다.
시기하는 자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자 하면,
그는 자기가 시기하는 대상에 대하여 더욱 가혹해지고 너무도 흔히 불치의 상태가 되어 버린다.
시기하는 자는 가는 곳마다 독소를 퍼뜨려서 친구들을 이간시키고,
하나님과 인류에 대한 증오심과 반역심이 일어나게 한다.
그는 자기 스스로 탁월한 목표에 도달함에 있어서 용감하고 극기적인 노력을 함으로써가 아니고,
있는 곳에 그대로 서서 다른 사람들의 노력에 돌려야 할 공로를 감소시킴으로써
자기가 가장 선하고 가장 위대하다는 인정을 받고자 한다. . . . . .
손해를 끼치기 좋아하는 혀,
이야기하라 나도 이야기하리라고 조잘거리는 혀를,
사도 야고보는 지옥 불에 견주어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어느 곳으로나 횃불을 퍼지게 한다.
흠없는 사람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험담을 퍼뜨리는 자는 어떤 일에 관심을 갖고 있는가?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이미 쓰러져 가고 있는 자들의 희망과 용기를 빼앗고 있으면서도
그 자신의 악한 일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추문을 좋아하는 자신의 성향(性向)에 몰두하는 일에만 관심을 쏟는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자들까지도 순결하고 정직하고 고상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에 대하여 눈을 감고, 불쾌하고 기분 나쁜 것은 무엇이나 모아서 세상에 알려 준다. . . . . .
모든 사람을 좋게 생각하라
형제를 헐뜯는 비난의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그 비난에 동조하게 된다.
그러나, "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라는
질문에 대하여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 " 하는 자라 (시편 15:1-3).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말해 주는 자가 적당한 기회를 얻기만 하면 그 허물을 들어 주는
자기의 허물도 서슴없이 말할 것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기억할 것 같으면 험담의 풍조는 예방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 특별히 우리 형제들을 좋게 생각하되, 그 외에 달리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나쁜 소문을 급하게 믿지 말아야 한다.
그런 소문들은 흔히 시기와 오해로 나돌게 되거나, 과장이나 사실의 부분적 전달에 연유될 수도 있다.
질투와 의심을 일단 품게 되면, 그것은 마치 엉겅퀴의 관모(冠毛)처럼 널리 퍼져갈 것이다.
어떤 형제가 곁길로 나간다면, 그 때는 바로 그대의 진정한 관심을 그에게 보일 때이다.
친절하게 그를 찾아가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구원을 위하여 지불하신 값(십자가)을 상기시키면서 그와 함께,
그리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렇게 함으로 그대는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고 허다한 죄를 가리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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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목사들의 논쟁에 대하여
이가노 2006-11-03 01:33:21, 조회 : 158, 추천 : 5
[re]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오용익 2006-11-03 08:14:25, 조회 : 135, 추천 : 2
제가 보기에
두분의 공통점은
두분다 십자가앞에서 죄인이라는 점인데
두분의 차이점은
한분은(이근호목사님)
십자가외에 다른 복음은 없기에 정말 십자가로 거듭난 사람 같으면 십자가만 자랑할것이 아니냐
하는 주장입니다.
교회가 없다든지
혹은
교회를 개혁하자 아니라
십자가에서 새롭게 창조된 교회는 십자가(새언약의 완성)를 증거하기 위해 존재하기에
십자가에서 눈돌려서 다른 것을 쳐다보는 것은 교회답지 않다는 겁니다(갈 3장 1절 이하에).
십자가에서 눈을 돌리게 되면 사람에게 남는 것은 자아의 완성을 위한 달음박질뿐이기에
중립상태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십자가를 훼방하는 적그리도가 될밖에 달리 길이 없다는 것이고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도라도
언제나 자기를 위한 달음박질을 할수 밖에 없는 죄인의 습관을 자기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는데
십자가의 공로로 사도바울처럼 날마다 죽여주시는 사랑을 받아 회개하게 되는데
그래서 성도는
그 크신 사랑 곧 십자가의 고마움을 더욱 크게 알아가기에 그 십자가 외에 달리 다른 것을 증거할수는 일체 없다는 겁니다.
또 한분은(이광호목사님)
십자가에 의해서 거듭났으면 거듭난 사람다운 면이 발휘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단지 십자가만 자랑하는것으로
되어서는 안되고 아울러서 바른교회, 바른신자가 되는것 까지 포함시켜 줘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기준으로 볼때 두분의 주장은 다른 정도가 아니라 서로를 대적하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다른 복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물쩡 대충 같은 것이라고 할수 없습니다.
잘못 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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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목사들의 논쟁에 대하여
이가노 2006-11-03 01:33:21, 조회 : 158, 추천 : 5
[re] 바보목사들의 논쟁에 대하여
서동훈 (Homepage) 2006-11-03 10:08:37, 조회 : 120, 추천 : 2
한 분에게있어서는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이 다른 한 분에 의해서는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된다면 극과 극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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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그럼요- 십자가 복음과 개혁주의 신학의 차이점
이근호 2006-11-03 10:45:05, 조회 : 130, 추천 : 2
"죽자"와 '바르게 살자"는 극과 극입니다.
한쪽은 매일 '죽자'이고 한쪽은 매일 '살자'입니다.
'죽자'고 하는 것이
흔히들 말하는 개혁주의신학이 아닙니다
개혁주의신학은, 일단 내가 살면서 잘해보자는 겁니다.
왜냐하면 일단 내가 살아야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비로소 성립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일단 내가 살아야 그 '산 자아'가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든지, 선한 일을 위하여 새롭게 지음받은 자로 행세하든지, 거룩하게 살아야 된다는 명령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십자가 복음은,
주님이 살아있는 한 구태어 내가 곧 살고자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단지 사는 것은 내가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살아있기에 살아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러한 관계가 주님 보시기에
'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모습이요, 새롭게 지음받은 자의 모습이요, 거룩한 관계를 보여주는 모습이요, 온유와 화평 및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모습니다.
이런 것이 외부로 드러내는 방도는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주님 안에서 죽고 또 죽어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즉 십자가 복음에서는 '성도의 성화론'는 없고 '주님의 성화론'입니다.
주님께서 거룩케 하시는 거룩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 안에 있는 자도 '자아'가 있는데 그 '자아'는 늘 주님에 의해서 죽어지는 '자아'로 움직이고, 살고 있는 겁니다.
자아의 죽음을 자아의 사라짐이나 해체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그런 것은 '의식 철학'에서 주장하는 겁니다. 성경적으로 봐서 그 어떤 인간도 마지막 때에 무덤에서 몸을 입은채 호출 당하기 마련입니다. 한번 피조물은 영원한 피조물입니다.
즉 불교의 '무아론'처럼 자아의 사라짐은 없습니다.
성도의 자아는 예수님의 새언약 피를 증거하기 위한 자아입니다.
따라서 성령님께서는 성도안에서 '죽음의 힘'을 늘 가동시켜 늘 성도로 하여금 죽이고, 그로 인해 그 성도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생명이 밖으로 증거되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
개혁주의 신학은, 자아실현, 곧 인간을 신으로 승격하는데 초점이 있기에 죽는 것도 처음 예수 믿었을 때만 죽었다가 시간이 흐르면 다시는 되살아나 (거듭나서) 두 번 다시 죽는 것도 없이 본격적으로 자아가 말씀 성취의 행동대장이 되어 펄펄 살아 그 동안 미진했던 말씀지키기에 제대로 완벽을 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열심히, 부지런히, 정신 차려서, 진지하고, 성의있게 말씀을 지키면 말씀이 지켜진다는 겁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지키도록 힘을 실어준다는 겁니다.
그렇게해서 지켜서 얻어낸 자기 만의 의로움으로 성도는 하늘 나라에서 차등지게 상을 나누어 갖는다는 겁니다.
이 의로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얻어낸 의로움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의나 예수님의 공로만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만'의 의가 따로 장만 못한 자는 아무리 예수님의 공로만 의지해도 구원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설사 구원되더라도 '부끄러운 구원'일 뿐이라는 겁니다.
즉 구원의 종류가 둘로 나뉘어지는 겁니다. '부끄러운 구원'이 따로 있고 '자랑스런 구원(?)'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욕먹이는 구원관이죠. 예수님이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구원관입니다.
그런데도 만약 이런 개혁주의 식으로 성도를 안 가르치면 성도는 태만에 빠지고 방종에 빠져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성도가 못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 지키기에 있어 우선 성공 사례를 많이 가진 목사들은 칼빈의 주장처럼 필히 일반 평신도 위에 군림해서 그들에게 가르치는 스승이 되어야 하고, 그 스승의 자리와 제자들이 자리는 영적 권위로서 격리되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목사가 돈 내라면 잔말말고 돈 내라 라는 겁니다.
교회 돈 갖다바치면 거듭난 자요, 돈 안 갖다 바치면 아직 거듭나지 않는 자라는 겁니다.
만약 이러한 목사의 권위에 복종 안하면 세례고, 성만찬이고 참여할 자격이 박탈당해도 마땅하고,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하며 교회에서 나간 자는 칼빈의 주장대로 지옥갈 자라는 논리입니다.
이 모든 개혁주의 이론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목사 말 들으면 천국가고, 목사 말 안들으면 지옥간다" 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모든 일은 일단 목사를 거쳐서 일하시기에, 목사가 모든 영적 권위를 위임받은 위치에 있다는 겁니다.
이로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점은 없습니다.
단지 목회자의 다수성에서 벗어나 일인 최고 목사를 수하에 모든 위임된 영적 권위를 효율적으로 통합했다는 것 뿐입니다.
어느 성도가 성령받았는지 아니받았는지는, 목사가 사전 심사할 수 있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 모든 사태가, '살고자 하는 자가 살게 되는 자이다'라는 원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죽기 위해서 사는 자가 정말 살아있는 자'이다는 목사가 되었던 평신도가 되었던 상관없이 누구에게도 발생되는 기적의 성령의 사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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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사는 삶과 소위 바르게(?) 사는 삶
이근호 2006-11-03 06:56:43, 조회 : 119, 추천 : 2
거꾸로 사는 삶
1. 모든 사람을 이왕(벌써) 죽은 자로 보는 것
2. 이런 장례식장 같은 세상에서 그들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 피를 바라보는 것 밖에 없음을 전하는 것
3. 그들이 찾기에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안 찾더라도 찾아가서 전하는 것
소위 바르게 사는 삶
1. 자신의 반듯함에 전력을 다 기울이는 삶
2. 이왕 구축된 반듯함에 흠집 없기 위해 남들로부터 공격을 심하게 당하지 않으려고 사수하는 삶
3.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자만 상대하는 삶
4. 혹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순교(?)까지도 각오하는 삶
악마가 지배하는 이 세상 인식에서 '거꾸로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삶'이요, '바르게 사는 것'이 '거꾸로 사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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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꼭 그렇게만 적용될까요
김헌식 2006-11-03 07:12:50, 조회 : 110, 추천 : 0
저는 그러한 "공식" 자체를 세우는 그 자체가 바로 율법이요 죄라 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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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꼭 그렇게만 적용될까요
오용익 2006-11-03 07:39:50, 조회 : 127, 추천 : 1
꼭 그렇게만 적용시키는 분이 예수님인데 어쩌란 말입니까?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빌 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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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꼭 그렇게만 적용될까요
김헌식 2006-11-03 08:47:42, 조회 : 110, 추천 : 1
"중심" 이 문제라 봅니다. "공식" 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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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꼭 그렇게만 적용됩니다
오용익 2006-11-03 09:43:39, 조회 : 113, 추천 : 2
좀 풀어서 설명해 주실수 있는지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못알아듣겠습니다.
무슨뜻으로 "중심"인지
무슨뜻으로 "공식"인지를 설명해 줘야 알아들을 것이 아닙니까?
제가 <거꾸로 사는 삶과 바르게 사는 삶--->이란 글을 제가 보니 너무 맞는 이야기로 적극 동의해 주고 싶은데
그럴 맘이 없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닌가요?
그래서 꼭 그렇게만 적용될까요? 라고 반문하신것이 아닌가요?
그 이유는 그게 공식이고 율법인것 처럼 보인다는 거고요.
제가 여쭤 보겠습니다.
누가 그렇게 살아 달라고 부탁했습니까? 왜 "공식"이야기가 나오고, "율법"이야기가 나옵니까?
예수님이 자기사람을 그렇게 살게 하신다는데 우리가 뭐길래 그걸 막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보다 강합니까?(고전 10:22),
고후 1: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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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꼭 그렇게만 적용될까요
김헌식 2006-11-03 08:47:42, 조회 : 110, 추천 : 1
[re] [re] 꼭 그렇게만 적용될까요
김헌식 2006-11-03 09:41:40, 조회 : 113, 추천 : 2
목사님,
제가 만약 이곳에 글을 쓰기를
" 저는 죽어서도 구원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생각합니다 "
라는 투의 글을 쓴다면 목사님은 어떤 답글을 과연 쓰실까요 ?
혹시 저를 두고 " 아 ! 당신은..... " 하고 칭찬하지는 않으실련가 두렵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혹시나 이곳이 이러한 의미에서의 "공식화" 가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우려됩니다.
"중심" 이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모두들 알고계신 말을 다시드린듯하여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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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꼭 그렇게만 적용될까요
이근호 2006-11-03 10:14:06, 조회 : 122, 추천 : 2
>'중심'이 주님을 향하고 있다면 제가 무슨 소리해도 신경쓸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단지 '주님의 은혜'만이라는 고백이 나오는 그것을 주님이 주신 귀한 기적의 선물이라고 여기고 존경할 뿐입니다.
문제는 '주님의 은혜'에서 정말 시작했다면 계속 주님의 '주님의 은혜'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능력이 그 사람 속에 지속적으로 역사하여 오직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은혜'로 시작해놓고서는 결국에는 '날 건드리지 말라. 내가 이만큼 완벽해지는데도 쉽지 않았다.'라는 태도로 '주님에 대한 증거'가 '자기 증거'로 바뀐다는데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꾸로 지옥으로 신나게 꽂혀지는 삶이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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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꼭 그렇게만 적용될까요
김헌식 2006-11-03 10:46:07, 조회 : 125, 추천 : 0
신경이 쓰이니까 (상관을 하니까) 한마디 한 것으로 이쁘게 (?) 보아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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