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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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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계단 소리 - 남의 일 같이 않은 수필] 2006-08-15묻고답하기-

[새벽 계단 소리 - 남의 일 같이 않은 수필] 2006-08-15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남의 일 같이 않은 수필
이근호 2006-08-15 08:03:53, 조회 : 318, 추천 : 1

새벽 계단 소리

나는 지금 으스스한 얘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 소리 속에서 느껴져 오는 빛과 어둠에 관한 얘기를 하고자 함이다. 혼잡하게 깊어가는 밤이 없는 어둠의 소리와 그 모습들 속에서 힘들지만 변함없이 새벽을 열어가는 거룩한 얘기다.

나는 이 소리를 20년 이상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마다 일정한 그 시간에 들어왔다. 그것은 3층 계단으로 올라오는 피곤하고 지친 발자국 소리다. 곤한 잠을 반쯤 달고 힘들게 발을 옮겨 놓으며 터덕-터덕 올라오는 무거운 발자국 소리다. 그 소리는 가까워질수록 멈출 듯 멈출듯하지만 한발 한발간의 차이가 숨 고르며 쉬어지는 것 뿐 힘겹고 숨찬 발자국 소리는 그래도 끊이지 않고 올라온다. 조용한 가운데 또렷이 깨어 있는 이 소리는 일정한 간격이나 다수는 아니지만 이따금씩 드물게 드물게 새벽 고요한 계단 공간을 타고 올라와 예배당 출입문 앞에 멈춘다. 이윽고 예배당 출입문을 여닫고 조심조심 자리에 와 앉는 소리까지다.

우리 교회 예배당은 별로 크지 않는 4층 건물에 위치해 있다. 외부에서 보면 중랑천변 한천로 길가로 나란히 서서 좀 긴 듯한 한 건물로 보이지만 그 건물 중앙으로 입구가 있고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데 그 계단을 중심으로 한 쪽에 30평씩 건물은 나뉘어져 있다. 계단 각 층마다 출입문은 서로 마주보며 대면해 있고 각 층 사이 칸 마다 화장실이 있다. 이 건물에 우리 예배당은 3층에 위치해 있다. 건물 밖 길가에서 쳐다볼 때 왼쪽 3층이다. 빛바랜 간판과 썬팅 글씨가 보인다. 우리가 이 건물에 임대로 들어 온지도 벌써 21년째다. 남은 벌써 확장 이전해 갔어도 몇 번 갈 기간이고 예배당을 지어도 최소한 우리 예배당이 들어 있는 전체 건물보다 배 이상은 크게 지었을 텐데 우리 교회는 그렇지 못하다. 누가 보아도 부흥 못한 교회다. 아는 선후배 목사님들이 “아니 여기서만 21년 째 란 말이요!?”하고 놀란 듯이 어이가 없는 듯이 모호한 표정으로 말할 때면 나도 대답하기가 매우 난처하고 모호할 뿐이다. 나는 가끔씩 “다른데 갈 데가 없습니다. 제가 부족하고 무능해서 그렇습니다. 주인이 나가라 하지 않으니 계속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할 뿐이다.
오늘날 보편적인 교회 성장 기준의 입장에서 비춰 볼 때 나는 실로 무능하기 짝이 없다. 성공한다고 하는 목회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지하나 2층 이상 건물에다 개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마치 목회 기본 원칙처럼 되어있지만 우리는 그런 것 재고 따지고 할 형편도 못되었다. 당시 이 동네에 유일한 건물은 지금 있는 이 건물이었고 마침 당구장 하다가 되질 않아 비어 있는 칸이 바로 3층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나 지금이나 무엇보다 내 중심에는 그런 것 보고 오는 교인들을 모으려고 건물을 얻고 예배당을 꾸미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게는 도봉산 꼭대기에 예배당을 세워 놓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면 올라올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꽉 막힌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3층이라도 꾸준히 올라오는 성도들로 교회 모습을 이루어가고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새벽 계단 소리는 이들의 소리다. 이 소리를 듣는 시간은 언제나 새벽 4시30분쯤부터 예배 시간인 5시전 까지다. 나는 항상 그 시간에 먼저와 강대상 뒤에 엎드려 묵상 기도하며 그 소리를 기다린다. 점점 연로해져가는 권사님들의 무겁고 힘든 발자국 소리, 그 소리는 1층에서부터 작게 시작하여 3층까지 점점 커지면서 올라오는데 그 소리는 한참이나 걸리고 길게 느껴진다. 밤늦게 까지 때로는 새벽까지 부업으로 봉재 일을 하면서도 꾸준히 올라오려고 애쓰는 몇몇 집사님들, 그리고 늘 바삐 장사하는 집사님, 가내 공장하는 집사님, 이들의 발자국 소리는 언제나 매우 곤하고 지쳐있다“터덕-터덕.” 그리고 이 속에는 우리 집사람의 조용한 발소리도 있다. 비가 오나 눈이오나 달이가고 해가 가도 꾸준히 올라오는 이들의 소리가 10명도 채 못 되지만 나는 이들의 발자국 소리가 날마다 순서 없이 뒤바뀌어 들려와도 나는 그들의 발자국 소리를 어느 정도 구분해 듣는다. 위로 막힌 계단 층 공간을 타고 조용한 새벽 시간을 울리면서 들려오는 계단 발자국 소리는 예배당 출입문 틈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어 온다. 나는 새벽 이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우리 성도들의 발자국 소리를 구분하면서 저들의 고된 세월을 느끼고 삶의 현실을 들으며 저들의 신앙을 느낀다. 신령한 교통의 시간이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 소리를 간절히 기다리며 머리 조아리게 되었다. 나의 새벽 시간은 이렇게 시작되고 우리는 함께 먼저 하나님을 기념하며 그 나라를 삶에 실현시켜 가기 위해 머리 조아린다. 하루의 삶이 구별되는 경건된 시간이다.

그러던 새벽 계단 소리에 혼란이 찾아들어왔다. 우리 교회 예배당과 마주보는 건물 칸에 PC방이 생기고서부터다. 시도 때도 없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소리가 요란하다. 후다다닥 3층 계단을 단숨에 뛰어 올라오는 소리, 쿵쾅 거리며 힘차게 올라오는 소리, 몇 명인지 선착순이라도 하듯 줄 다름 치며 올라오는 소리, 요란하게 문 여닫는 소리, 반 층 아래에 있는 화장실을 잽싸게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는 소리가 계단 층 공간을 꽉 채워 어지럽게 울리며 틈을 찾아 시끄럽게 스며든다. 아이들 소리, 학생들 소리, 청년들 소리, 때로는 아저씨도 보이고 아주머니도 보인다.
새벽 그 시간에 나가 예배당 문을 열기 전에 전자 잡음이 나는 PC방 쪽을 돌아볼 것 같으면 언제 들어와 있는지 많은 젊은이들이 푸르딩딩한 조명아래 줄지어 앉아 컴퓨터 앞에 자리하고 시선을 고정하고 있음이 보인다. 그들에게는 새벽이 없다. 희미한 어둠뿐이다.
그동안 조용했던 건물은 이들로 인해 시끄러워졌고 화장실과 계단은 담배꽁초로, 종이컵이나 휴지조각, 시켜먹은 음식 그릇으로 지저분해졌다. 이미 3층 계단 공간과 화장실은 담배 연기로 찌들어 냄새가 가시질 않고 때론 지린내로 역하다. 그동안 고요한 우리만의 새벽 계단 소리는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불협화음처럼 혼란스럽다. 너무 대조적이다. PC방과 교회 예배당이 같은 3층에 있지만 각각으로 향해 올라오는 소리가 대조적이다. 영적이냐 세상적이냐다. 이제 그것으로 나는 구분해야 했다.
무엇이 저들을 미친 듯이 단숨에 뛰어 올라오게 하는 것인가? 무엇이 밤도 새벽도 없이 저들을 끌어 모으고 3층 높은 곳이지만 빨려들듯이 순식간에 올라가게 하는 것인가?

PC방이 생기기전 그 건물에는 상호가 여러 번 바뀌었다. 독서실도 했었고 고시방도 했었고 비어도 있었고 치과도 했었다. 그러나 모두가 얼마가지 못했다. 단지가 크지 않은 재개발된 아파트 담 밖의 건물에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3층은 외면당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PC방이 들어오고 부터는 전혀 딴판이었다. 알아서 찾아왔다. 그곳은 상권도 없고 사람들이 몰리는 곳도 아니었다. 그런 곳인데도 PC방이 생기자 어디서인지 초등학생들로부터 중고생, 대학 청년, 그리고 어른들까지 구분 없이 몰려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낮과 밤이 구분 없었다. 내가 나오는 새벽 그 시간에도, 우리 성도들이 올라오는 그 시간에도 PC방으로 오는 자들은 피곤한 기색 없이 계단을 2~3칸씩을 뛰어서 겅중겅중 올라갈 정도였다. 이들이 돈까지 내가면서 이렇게 3층 까지 시도 때도 없이 찾아가게 되는 데는 분명 어떤 마력이 있는 것이었다. 며칠씩 PC방에서 게임만 하다가 죽는 일이 종종 보도 되고 있고 게임에 졌다고 상대를 찾아가 죽이고 린치를 가하기도 하고 현실과 사이버 공간을 구분 못하고 컴퓨터가 있는 방에 틀어박혀 게임에 미쳐있는 청소년들의 문제가 사회문제로 심각해져 가고 있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빠져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 이것은 분명 무서운 어둠의 미혹이다. 마약보다 더 강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을 정도라 했다. 한 시간, 두 시간 더하고 싶고 계속하고 싶고 밤새워 해도 피곤함 모르고 지치지도 않게 하는 게임의 마력은 정말 무서운 것이었다. 근간에는 PC방이 있는 아래 1층에 성인 오락실이 하나 더 생겼다. 24시간 열어놓고 삐리릭 삐리릭 사람들을 부른다. 생명도 존귀함도 없는 것들이 더욱 인기다. 요란하고 유혹적이다.
새벽이 없는 세대, 야경이 꽃피는 밤 문화에 취해가는 이 세대, 생활의 리듬이 끊기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진노의 인생들이 서로 조성해가는 어둠 속이다. 새벽이 사라지고 있다. 새벽예배도 점점 없어져 간다. 새벽예배가 없는 교회들이 생겨졌다. 어둡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함께 뒹굴며 취해서 잠자는 세대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들의 모습, 큰 것과 일락만 좋아한다. 아주 드물게 보이는 새벽예배 가는 연로한 신도들, 저들의 세대가 희미하다. 그런데도 깜짝 이벤트 식으로 교회를 세운다고 하니 불을 보듯 뻔한 앞으로가 염려스럽다.

내가 집에서 예배당까지 가는 길에는 우리 동네에서 오래되고 제법 좀 크다고 할 수 있는 교회가 둘 있다. 나는 날마다 그 교회들 앞을 오가며 느끼는 것이 있는데 교회 규모에 비해 새벽 예배 나오는 자들이 매우 적다는 것이며, 드물게 보이는 자들 또한 대부분 노인 신도들이다. 눈 나쁜 내 시력에도 금새 감이 올 정도로 걸음걸이가 그렇다. 그러다가 1년에 한 두 차례 간혹 나를 놀라게 할 때가 있는데 특별 새벽기도회라는 반짝 행사 때이다. 그때면 그 교회들 마당이 요란하다. “지금 새벽시간이 맞아?” 내게 스스로 의문이 갈 정도이다. 가족단위로 나오는 자들, 부부로 나오는 자들의 발걸음이 늦을까 시간에 맞추어 나오는 학생들 같고, 일찍 서두르는 직장인들 같이 발걸음들이 부지런하다. 주변 새벽 시간이 웬일로 시끄럽다. 누군가 나와 교통경찰들이 가지고 있는 길고 빨간 조명 등 후레쉬 까지 들고 새벽 예배 오는 차량들을 통제할 정도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이들이 한순간 열심으로 종종 걸음치며 나오는 것을 보면서 나는 뭔가 이들도 순수하지 않는 것에 끌리고 조련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났다. 무엇이 이들을 열심내게 하는 걸까? 의아해진다. 중학생인 우리 둘째 아들 녀석이 자기네 반 아이 중에는 40일 새벽 예배를 한번도 빠지지 않고 나가서 기능이 좋은 신형 MP3을 탔다고 했다.
며칠인지 그 기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행 길가 그 예배당 마당엔 썰렁히 적막이 흐르고 간혹 권사님 같은 한 노인네 분이 일찍 나와서인지 그 마당에서 손 체조를 하는 모습만 왠지 쓸쓸하다.
어릴 적 여름성경학교 때가 생각난다. 며칠씩 하는 그때 출석 카드에 도장 찍고 공책 몇 권이나 연필 몇 자루 타려고 새벽 예배까지 나갔었다. 혹 깨나지 못하여 한번이라도 빠질까 부모님께 꼭 깨워 달라며 마음 조렸던 때, 지금 돌이켜 보건데 상품을 타는 기대보다 즐겁게 한다는 행사적 홍보에 더욱 설레임을 가졌던 것 같다. 요란한 분위기 속에 아쉬움만 남기고 또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들이 그런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오늘도 거의 그 시간에 일어나 씻고 성경을 끼고 어둑한 골목을 빠져 나와 한순간 요란했다가 오래도록 썰렁한 그 교회들 앞을 지나 우리 예배당으로 향한다. 터벅터벅 삼층으로 오르는 내 발걸음은 예전만 못함을 느낀다. 언 듯 내 발걸음 소리는 어떻게 들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20여 년을 올라온 성도들의 발걸음과 엇비슷한 비중을 느낀다. 그때 내가 방해라도 되는 듯 나를 제치고 성큼성큼 앞지르는 발걸음이 있다. 그러고 보니 한 계단 통로에 넓은 길과 좁은 길이 있음을 느낀다. 각자 다른 것에 이끌리어 올라가고 있다. 어둠의 권세와 빛 된 권세가 새벽 한 통로 공간을 울리며 역사되고 있음을 신비스럽게도 감지한다.
나는 강대상 뒤에 엎드려 곧 한 길로 따라 간간히 올라올 우리 성도들의 발걸음 소리를 예민하게 기다리며 이들의 발걸음이 줄 곧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세월이 되길 먼저 기도한다. 나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오랜 세월의 음악가가 그 많은 악기 소리를 따로따로 구분하여 듣는 것처럼 음을 예리하게 분별하는 전문가의 세월은 못 된다 할지라도 혼란스런 새벽 계단 소리 중에서 우리 성도들의 발걸음 소리를 구별해 내는 세월을 살아왔다. 그리고 그 발걸음 소리에서 거룩한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그것은 잠간과 영원한 의미의 소리를 구분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새벽 계단 소리에 세상이 있고 하나님 나라가 있다. 나는 은혜 속에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새벽 종소리를 들으며 새벽길을 왔고 이제 함께 그 길을 가는 교우들과 오늘도 3층을 오른다. “터덕터덕” 4층보다 옥상보다 더 높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새벽이 없는 통로에서 거룩한 새벽 계단 소리를 남긴다.

고은교회 황부일 목사님 수필문

-부천개혁교회에서 따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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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평
이근호 2006-08-15 08:24:54, 조회 : 163, 추천 : 3

이 수필에는 진심이 들어있다

그러나 진리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목회자들이나 교인들이

진심과 진리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진심은 자신의 성깔이요 한맺힘이지 결코 복음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증거한답시고

자신 속에서 응어리진 불특정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제발

자기를 위해 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성도의 삶'이라고 하지는 말자!

'성도의 삶'이란 고달픔마저 십자가에서 흘려내리는 주님의 은혜의 일부임을 알고 감사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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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여름수련회를 마치고<내가 너희를 지나가리라> 화평교회 구 자근 사모님의 글
우인숙 2006-08-17 15:32:16, 조회 : 319, 추천 : 0

주님의 손에 들리운다는 것이 무엇일까? 이 목사님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만을 열나게 외치는 자의 모습을 말하는 걸까?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육적 해석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이 꽂혀야만 한다는 뜻일까?

1. 토론 시간, 장로와 몇몇의 목사들이 -사회자에 의해- 차례차례 불려나와, 교회생활 가운데 복음이 주는 자유가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에 대하여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여 있었다. 도무지 주제파악이 안 되는 까닭에 아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아도, 그 답을 거부할 만한 염치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는 율법의 울타리가 쳐진 상황에서, 인간의 행위가 도출될 수밖에 없는 항변성 질문이 떨어졌으니, 이렇게 말하나 저렇게 말하나 어차피 똥묻은 고백들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복음까지도 빙자하며 ‘자기 의’를 산출시키는 죄인들을 향하여 은혜가 덮치는 현장이다.

복음을 안다고 하는 자들의 철없는 고백이 만천하에 공개되면서, 00목사도 무슨 소리든 한소리 해야 될 운명에 처해있었다. 마음속으로는 ‘지금 강사목사님은 종말이라고, 다 끝났다고, 헌금 같은 이야기 말고 예수님만 쳐다보자’고 외치고 싶었으나, 엉뚱하게 다른 소리가 나왔는데...그것도 보기 드물게 더듬더듬 거리면서...

“...저는 요즘 제가 누리는 자유에 대하여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교회에 5년 동안 있으면서 사실 저는 헌금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저에게 있는 모든... 것이 다 들어갔을 뿐입니다. ...그저 아무 생각이 없어요... 복음을 듣고 좋아하는 자가 있다니... 이 한 가지만으로도 너무나 놀랍고 고마울 뿐이거든요...”

앉아서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부인의 마음속에 ‘...엉? 그래, 참 은혜로다.’라는 생각이 들 즈음, 다른 한편의 마음속에서 갑자기 보충!! 하고 외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보충 있어요! 마누라가 돈을 벌고 있거든요~’ 그러나 순간 둘 다 ‘쌩쇼’하고 있다는 제 3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잠자코 있는데... 은혜로 산다는 말에 상처받은 듯한 다음 타자가 나오고 이를 변명하기 위한 다음 타자가 또 나오고, 이제는 여기저기서 마음속에 있는 갖가지의 항변이 색깔로만 나타날 즈음...

강사 목사님이 지명당하셨다. “우리에게는 애초부터 자유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 온전한 자유를 누리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에요. 그런데 자유를 누린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직은... 마... 그 정도, 살 만하다는 뜻입니다... 자유를 누리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윽! -김장로님 버전으로- 목사님, 명쾌하십니다! 내 마... 박수를 보냅니다...! 00목사 일당은 순간 띠용~ 했다. 아니, 이렇게 엎어치기를 당하다니... 맞긴 맞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꿀꿀하지...? 어이구... 그럼 그렇지, 00목사 니가 별 수 있나...? 어째 요즘, 잘난 집사 만나서 더욱 잘난 척을 한다고 생각했거든. 그래... 마누라가 돈 벌고 그만그만 살 만하니까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게야...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느니라! 그래, 아무리 마누라가 돈 번다고 해도-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애 셋 딸린 가정에서, 요즘 시대에 그게 어디 돈 축에나 끼는가-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이 무한대인데, 저 정도로 예수님께 취해서 살고 있다니, 참으로 복음의 능력이 대단하군... 온전히 자유 가운데 계신 오직 한 분의 자유로, 인간의 자유를 공격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놀랍다. 엎어치기를 당해도 놀랍다!

과연 우리가 자기 영광을 높이시는 주보다 강하냐? 그럴 수는 없다. 그러므로 복음이 떨어질 때, 예수님의 피가 확- 뿌려질 때, 성도는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로 정죄당하지 않는다. 수치스럽고 화나서 어쩔줄 모르는 그 차원이 아니라, 죄인인 자신을 사용해서 복음이 증거(예수님의 십자가의 가치성만 높여진)된 것으로만 무한 감사하다. 주님의 손에 들려졌다는 것으로 구원이다.

“너 까불고 있구나. 먹고 살만 하구나. 뭐 자유? 주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는 아예 단절되어 있어! 땅에서 들리신 분도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거든?”
“예,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 머리 둘 곳 없이 살아도 아무 상관이 없을 만큼 자유하셨던 주님, 죄인들의 받을 저주를 십자가에서 대신 담당한 주님의 그 자유 앞에 서고 보니, 잠시잠깐씩 누린 것처럼 보인 저의 자유가 한량없이 초라한 그런 죄인 맞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능력만이 구원이라고 일러 주시니 고마울 뿐입니다... 그래서 더욱 예수님만 좋으니 어쩝니까. 할렐루야!”

이렇게 하여 00목사는 정죄함이 없는 예수님 품안으로 도망쳐버렸다.

2. 이번에도 성령의 바람은 00목사를 강타했다. 공개석상에서 구체적인 이름이 불려지며 완전히 분석 당했으니... 어쩌면 저렇게도 하나님은 사랑이실까.

순간 불신자(1) 저 00목사님이 절대로 철없는 분이 아닌데, 어쩌다가 저렇게 어린 아이처럼 쓸 데 없는 소리를 해서 저 부끄러움을 당하냐? 나서서 도와줄 수도 없고, 아유 안타까워라, 얼마나 민망하실까. 전국으로 나가는 방송인데... 그러게 아무리 그럴싸한 복음 전도자라 해도 너무 가까이 지내면 안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돼. 그래야 내 사생활이 지켜진다고~

순간 불신자(2) 드디어 저 강사 목사님 인격이 천하에 공개되는 순간이구만. 어째 저리도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을꼬! 00목사님이 예수님을 부인한 것도 아니고 솔직하게 자기 심정을 토로한 것뿐인데, 만인 앞에서 꼭 그렇게 질타를 가해야 하냐고! 조용히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이야기하든가 메일로 보내든가 해도 충분히 알아들으실 수 있는 목사님인데... 복음을 안다는 사람의 자유가 그렇게 나타나는 거 맞어? 우리가 교회라면서 그렇게 무지막지해도 되는 거야??

신자(1) 아~ 00목사님을 손에 쥐고 흔드시는 복음의 능력이 놀랍구나... 저 목사님은 복도 많지. 때마다 저렇게 은혜를 주실까? 하나님의 자기 자녀에 대한 사랑은 지독하구나. 어떠한 인간의 행위일지라도 만천하에 죄로 폭로시키면서까지 그 좋은 영생을 보여주시려고 이렇게 애쓰시다니... 눈물겨워라...

신자(2) 어찌하든지 예수님의 피만 증거하시다니, 저런 성질 급한 강사 목사님까지도 도구로 쓰시는 복음의 능력이 놀랍구나! 인간은 누구나 그 사회에서 선하다고 규정된 쪽을 향하여, 상대방을 따뜻하게 이해하며 가기를 좋아하는데 -그러면 품격있고 고매한 인격자라는 소리도 듣고- 그 강한 유혹과 상관없는 사람처럼 저렇게 공개적으로 기쁘게 내지르다니~ 에구머니나, 깜짝 놀래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리심의 은혜가 놀랍구나...!

내가 너희를 지나가리라(아모스 5:17)! 하나님의 거룩이 불도저처럼 이 땅을 밀고 지나갈 때 아무도 그 앞을 피해갈 자 없다. 너, 나 없이 집단 심판이다. 최후의 남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 그 한 분 만을 건져내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부터는 하나님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남아있는 오직 한 분에 의한 구원임을 명백히 하신다. 완벽한 거룩을 이루신 오직 한 의인에 의하여, 그 몸에 붙어서, 그 몸과 한통속이 된 사람만 구원임을 선포한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아버지는 숨어계시고 아들만 내보이시는 종말을 예고한 셈이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만 남기기 위한 하나님의 계시! 못풀라고!! 왜? 풀리는 즉시 인간의 소유물로 전락되니까! 그러면 인간의 이름이 앞세워지는 건 뻔한 이치이니까! 어떠한 방식으로든 구원에 이르고자 열망하는 인간들에게 심판은 내려져 있다. 당하라고! 그래서 그 구덩이 속에서 건짐 받은 자는, 오직 꺼내주신 그 한 분만 자랑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질 때(복음이 증거될 때), 신자는 온갖 항변과 시위와 질투의 죄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지만, 자신을 밟고 지나가는 거룩의 실체를 눈치채고 그 앞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끔 인도된다. 복음이 증거되는 순간은 백년과 천년, 영원을 확정할 만큼의 꿈속에 있는 것이기에!

“뭐라고요? 세상에, 수입의 3분의 1을 헌금해왔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이 많다니요... 그러나 이정도로 헌금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속수무책인 그런 죄인들이니, 단번에 다 이루신 십자가지신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고마운지... 그 솔직한 마음을 그대로 담아서 설교하시면 되는 겁니다. 뭘 걱정합니까. 성도들 시험 들까봐서요? 성도를 목사가 챙깁니까? 교인 챙기고 교회 관리하려고 하지 마세요. 성령께서 친히 가르치십니다. 선지자는 자기 개인의 괜찮은 드라마를 쓰는 역할이 아니었습니다. 엔지 장면까지도 활짝 열어놓아야 성경이 인간구원을 위한 책자가 아니요, 오직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만 증거되는 계시라는 것이 드러나지요.”

“예... 그렇습니다. 3분의 1만큼보다도 더 크고 좋은 것을 판단하여 챙길 만큼,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미련하고 악한 죄인 맞습니다. 그래서 다 이루신 예수님만 더욱 좋으니 어쩝니까. 할렐루야!!”

이렇게 하여 육적 현실을 죄로 고발하시며 다가오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00목사는 그 말씀에 걸리지 아니하고 정죄함이 없는 예수님 품안으로 도망쳐버렸다.

3. 안산에서 온 00성도는 혼자서 넉넉했던 지금까지의 간단한 여행과는 달리, 아기 딸린 직장 후배와 함께 수련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아기 때문에 힘들지 않겠냐며 은근히 못가도록 말렸지만 “언니는 나랑 함께 가는 게 그렇게 싫어?”라는 후배의 핀잔을 듣고는, 혼자서 편안하게 잔치집에 갔다오기를 꾀한 자신의 도둑놈 심보를 시원하게 들켜버린 뒤에 함께 기차에 몸을 실었다. 사실은 얼마나 이쁜 후배인가. 세상에, 복음을 듣겠다니!

드디어 도착- 그러나 강의 시간배정이 아쉬웠다. 없는 시간 휴가 내서 왔기에 이왕이면 더 많은 시간 동안 강의듣기를 원했는데, 웬일인지 시간이 너무나 널널했다. 족히 10강 내지 12강은 할 수 있는 시간인데 겨우 7강으로 짜놓은 후였다. 누구 말마따나 성경에 대한 모든 육적 해석을 무지르고 온전히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만 증거하는 복음 전도자가, 100년 200년 사는 것도 아니고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는 일인데 할 수 있다면 더 듣고 또 들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7강으로 짜놓은 인간의 시간과 역사 속에 묶여있는 분이 아니었다. 7천 시간짜리, ‘영원’이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종말에는 어떤 식으로 드러나게 되는지가 새롭고 또 새로운 시간이었다. 지원 아기는 그야말로 강사 목사님과 어쩜 그렇게도 코드가 딱 맞았다. 한 쪽은 하늘에서 쏟아진 영원한 아기예수로만, 아들로만 남는 구원관계를 줄기차게 떠들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종말을 살아가고 있는 역사 속의 아기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느라 시종일관 지침없이 조잘대고 멋대로 시끄러웠으며,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천방지축 돌아다니기를 그치지 않았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나타난 아기예수는 자라지 않는 한 영원한 아들로 계시된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자랄 만큼 자랐고 선악을 분별할 만큼 다 큰 어른이기에(그리고 더 성화될 것이기에), 그 정도는 나도 다 안다면서 자기기준을 앞세워 나갈 때, 우리 앞에 나타난 아들예수는 우리의 착각을 원점으로 돌려놓으신다. ‘너는 흙’이라고 선포하며 영원한 맏형으로 존재하시는 아들의 권세로, 자신이 더 크다고 까부는 죄인들의 키를 푹 눌러 찌그러뜨려 주신다.

신자는 진정 아들관계에 놓인 분이 메시야임을 알게 되며, 오지 않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죽으신 한 아기, 아들 예수(묵시)가, 괴물만큼 다 자라서 설쳐대는 인간의 역사를 무시하고 박살내는 쪽으로 공격해올 때,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반발과 시위와 분노와 질투가 이 지상에서 어떻게 뭉게뭉게 피어오르는지를 폭로당하는 자이다.

과연 그랬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돌아가는 시간, 만만치 않은 항변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기 딸린 후배와 그의 손잡이 망가진 여행가방과 또다른 자매와 그의 어린 아들과 짐가방, 그리고 바람 한점 없이 푹푹찌는 35도 이상의 폭염 속에서 자신의 일당은 순간 버림받은 기분이었다(다행히도 자기한테만 해당되는 사항이었으리라). 아마도 자신의 영역이라면 지금쯤은 00지구대장의 안위와 품위에 맞는 써비스를 자신있게 요구할 수 있을 터였다.

점심을 함께 먹은 강사 목사님, 조 장로님 그외 함께 한 우리교회 몇몇 식구들도 가벼운 인사 후 제각기 돌아갈 길로 가는 분위기였고, 오목사 일행은 울산으로 가는 길이라며(사실은 저 뒷풀이에 따라가고 싶었다) 버스 정류장에서(물론 남은 자들이 이곳에서 내려달라고 했다) 일당을 내려놓고 떠나버린 후였다. “휴~! 목사는 손님 대접 받고, 성도는 짐짝 신세군!”

00성도는 순간 진정으로 섭섭했다. 아무리 힘들고 고달팠던 그 어떤 상황도 혼자서 넉넉히 이기며 달려온 인생이었다. 가족과 멀리 떨어진 채로 홀로 자취방을 오가도 외로움을 모르는 학창시절을 보냈고, 시리도록 차가운 3층 마룻바닥에서 무릎 꿇리운 채 담임교사에게 일방적으로 뺨을 맞고 있었을 때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을 만큼 급우들 사이에서의 지도력이 짱짱했으며, 서울의 잠실 아파트 동네를 넘나들며 석간신문을 돌리던 대학시절 때에도 누구를 원망한다던지 섭섭함을 느낀 적이 없을 만큼 너그럽고 강단지게 끌어온 인생이었다.

결혼도 안한 몸, 어디가나 혼자서 불편 없이 지낼 수 있었고, 이제는 복음 안에서 기회가 되는대로 주 안에서의 봉사와 자유를 고마워하며 맘껏 누려오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기차역마다 잡다한 인간 군상들이 오히려 정겹고 낭만적이었으며, 지나온 시간의 역사를 반추하며 여행하는 길이 왜 그리도 평안한지 몰랐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은 그것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누구를 원망할 일도 아니었다. 조 장로님은 당연히 오목사 일행이 알아서 할 걸로 생각했을 터이고, 오 목사는 나름대로 길도 모르고 방향도 모르고, 그 몸으로 갈 길이 피곤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이해라든가 배려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정도 가지고 섭섭함을 느끼는 자신에게 이제는 더 화가 날 정도였으까 말이다. 한마디로 성도를 죽여놓고 시작하시는, 땡볕만큼이나 뜨거운 불도우저의 거룩이 밀려오자 사정없는 항변과 시위의 거리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던 거였다.

역사를 공격하는 묵시의 능력은 참으로 잔인하다. 그러니까 신자에게 있어서 종말은, 이제부터는 내 처신을 똑바로 하면서 살아야겠다든지, ‘종말’은 내가 알아서 피해야겠다든지 하는 내 몸 살리기 차원이 아니요, 여호와의 거룩 앞에서는 결코, 아무도, 어떤 방법으로도 피할 수 없다는 현실을 통보받을 뿐이다. 이제는 끝난 세상임을 알아라. 파장이다. 희미한 조명등마저도 꺼진 상황이다... 다 죽은 자로 알라는 것이리라. 아, 주께서 나를 이긴 흔적이 이토록 처참한 반항을 불러일으킨 자리였던가!

예수님의 몸에 붙은 ‘저희들’,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 속에 붙어있는 ‘저희들’, 그러니까 성도는 믿음을 받을 때, 예수 몸에 붙어있는 성도들의 몸을 함께 받는 자들임을 알겠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깔아놓은 양탄자 위에서, 훌륭하신 목사님께 선한 봉사한다고 춤추고, 하나님을 안다고 춤추고, 춤추는 자들이 신자답지 못하다고 춤추어댈 때, 갑자기 발 딛고 서있는 양탄자를 갈기갈기 찢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저희들’ 모두는 넘어지고 자빠지며 서로를 가리고 있던 수치스러운 속살이 낱낱이 들키우는 현장으로 내몰림이 마땅하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찢고 때린 사건 앞에서 성도는, 지금 ‘저희’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양자의 영을 받은 것은, 순전히 대신 찢기우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만 영광 돌리기 위한(그 피만 증거되기 위한) 하나님의 예정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성도 자신은 황량한 죄인으로 드러남을 오히려 기뻐하게 만드는, 십자가의 용서의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깜짝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다! 짐덩어리로 여겨지는 ‘저희들’공동체는 천하보다 귀한 성령공동체인 셈이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말씀 앞에 모이게 하시고 다양한 죄를 터뜨리심을 고마워한다.

진정, 온전한 자유와 봉사는 천상의 것이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맞다. 죄인에게 있어서 이것은, 애초에 알 수도 없고 느낄 수조차 없는 하늘에 감추인 보화이다. 그런데 그동안 자유를 누린 적이 있었고 그나마 봉사할 기회가 있었다면 그건 순전히, 오직 은혜였다는 뜻이 된다. 누구를 높이는? 대신 찢기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증거되는!

“맞습니다. 홀로 버틴 지난 시간들은 주님의 용서의 흔적이었습니다. 내가 주님께 대하여 짐짝같은 존재입니다.” 이제 영적 전쟁은 마감이다. 가자, 가자!

이렇게 하여 00성도는 정죄함이 없는 예수님 품안으로 도망쳐버렸다.

4. ‘성령의 열매’를 놓고 한밤중의 토론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다 나온 00집사님은, 십자가로 인한 승리의 합창을 부르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나올 수밖에 없음을 통탄해 하며 씩씩거렸다. 이럴 수는 없다고...! 더욱이 평소에 자신이 알고 있다고 여겨졌던 이 부분에 대하여 확실한 논리조차 펼 수 없음을 당하며, 역시 복음은 내가 이제 알았다며 소유할 수 있는 땅의 지식이 아닌 것만을 확인하고 나왔을 뿐이었다. 여러 소리들이 난무했지만 자기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지 못한 것이 못내 분통 터지는 듯, “으이구~! 답답이야... 이렇게도 복음을 모르다니...” 하면서 한여름 밤의 꿈을 소유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이 또한 항변이었을 터!

하나님의 일하심의 열매를 내 구원의 증거로, 보이는 모습으로 소유하려고 할 때, 육적인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겠다. 오줌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그냥 나오는 것이란다. 십자가의 피가 발려진 택한 성도에게서 성령의 열매는 그냥 터지도록 되어있는 것을! 그러나 “성경에 성령의 열매가 있으니까 사랑해라... 권면해주는 것이 사랑이다”라는 주장은 성경적이지 못하다. 그래야 ‘교회답다’는 유기체로서의 보이는 교회를 이미 전제하고 나온 발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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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를 지나가리라(2) 화평교회 구 자근 사모님의글
우인숙 2006-08-17 15:40:51, 조회 : 201, 추천 : 1

하나님의 일하심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잡으려고 할 때, 복음을 아는 자들의 ‘교회생활다운 모습’에 대하여 고민하게 되고, 어떻게 해야 복음이 주는 자유를 성경적으로 누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육적 성경관이 투입될 조짐이 크다. 그러나 성경에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자비와...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서5:19)”로 되어 있는바, 성령의 열매는 ‘오직’ 성령의 소관인 것을 분명히 증거한다. 또한 <성령의 열매가 있다>가 아니라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이다.

전자는 세상사람 누구에게나 보이는 ‘문자’로서 ‘좋은 열매가 있다’는 것을 읽어낸 것이며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취하자는 육적해석이며, 후자는 성령의 일방적인 역사하심만을 증거한다. 더 나아가 그 다음의 말씀에서는, 이 성령의 열매가 어디로부터 근거한 것인지를 확정짓는다. 바로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이 십자가에 못박힌 죄인에게서만 나오는 ‘<오직> 성령의 열매(죄인에게서는 죄만 나오니까)’라는 것이다.

또한 전자는 복음을 알았다고 하면서 무조건 아무것도 안하려고 하는 성도들의 행태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이 현실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하는 교인 관리차원에서 찾아진 해결책이며, 후자는 절대로 막을 수 없는 십자가의 피흘리심과 용서의 열매를 증거하는 영적해석이다. 그러므로 전자는 교회생활의 참모습이 안 보인다고 여겨질 때, 자기를 바라보며 그 죄를 반성함으로써 인간이 그 죄를 담당하자는 쪽으로 애쓰게 되지만-그럴수록 자신의 죄는 더욱 가려지게 되고- 이것은 끝이 안 나는 무의미한 싸움일 뿐이다.

자기를 쳐다보게 하는 것은 창조이래로 마귀가 유혹하는 사항이다. “이번에는 내가 그럭저럭 복음을 잘 전했구나. 주여 감사합니다.”하며 안도감을 쉬던가, 또는 “내가 왜 이렇게 정확하게 가르치지 못했을까... 아예 기도도 안하고 헌금도 안하다니”하면서 결국은 자기 몸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보기에 좋은 것을 취하고자 하는 육적해석에서 오히려, 일정한 형식과 내용으로 산출되어야 당연하다는, 고정된 지식으로서의 ‘복음의 관념화’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게 아닐까?

<서로 사랑하라>는 새언약의 말씀 안에는, 사랑은커녕 상대방을 지배하려는 죄성이 남김없이 터지는 인간의 육적 현실이 고발된다. 그래서 성도는 이러한 자신의 육적해석이, 언제 어디서나 말씀에 의해 공격당하는 위치에 있음과 저주 가운데 갇혀있는 죄인으로 폭로될 때, 비로소 안도하며 비로소 자유하게 된다. <서로 사랑하라>는 성령의 열매를 따먹는 중이라고나 할까?

여름하늘은 적운이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뭉게구름... 아, 속절없이 얼마나 아름답게만 보이는지.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상, 계속해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저 뭉게구름조차 인간들의 항변과 시위와 불평과 질투를 담아내는 옛언약을 생각나게 하며 완성된 새언약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는 십자가의 증거용으로 사용됨을 새롭게 알게 된다. 그리하여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반항하는 중에도, 덮쳐오는 십자가의 능력 앞에서 그 ‘용서받음이 끝’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가치만 증거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복음이 끌고 가는 현장은 다들 예외없이 가스가 찬다. 장 속에 가득찬 부글부글거리는 가스로 인하여 답답해하고 짜증도 나고, 왜 내가 이런 자리까지 와 있게 되었는지 화도 나고 분도 난다. 복음이 떨어진 현장, 예측불허로 다가오는 믿음의 징후이며 복음 안에 있기 때문에 생기는 반응이다. 성도 개인의 품위를 일절 고려하지 않은 채 오직 예수님의 일하심에만 영광 돌리기 위해, 십자가의 증거용으로 아무렇게나 끌려다니는 인생이 성도의 일생이다.

그러므로 종말이 밖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내부로 투입된 성도는, 십자가의 피 중심으로 순간순간 갈라내고 붙게 만드는, 바람같이 역사하는 성령의 일하심만으로, 크게 즐거워하도록 인도 받는다. 정죄함이 없는 예수님 품안으로 도망친 형제들처럼, 깜짝깜짝 놀라며 고마워하고 신바람 나도록 끌려 다닌다.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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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향해 외치는 말씀
손무성 (Homepage) 2006-08-18 19:14:00, 조회 : 189, 추천 : 1

바울은 고린도교회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1:10)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1-5)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갈라디아서 5:26)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브리서 10:24)

요한은 요한1서에서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한1서 4:11)

베드로는 베드로전서에서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1:22)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베드로전서 4:8)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베드로전서 4:9)

야고보는 야고보서에서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야고보서 5:9)
....

1) 바울, 요한, 베드로, 야고보...가 말은 모든 내용은 전적으로 회개용이기만 한가?
2) 교회를 어떻게 해보고자 하는 교인 관리차원에서 찾아낸 해결책으로 이런 말을 했던가?

그렇지 않다. 이들이 말하고 있는 내용은 십자가의 은혜가 넘치고 있는 이들에게 성령으로 그리스도 몸을 통해 넘쳐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요 주이심을 증거 하게 하려는 것이다.

마치 성전 미문에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여 일으켜 세운 베드로를 향해 당신의 능력이 저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고 하자. 그는 ‘내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라고 했다. 이러한 일을 시키신 분이 주님이시다.
그런 베드로가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 난 뒤 자기 의를 결국 챙기는 일을 하고 말았는가?

꼭 인간은 ‘성령의 열매까지도 자기 의를 내세우는데 이용해버리는 존재다’라는 공식을 내세우면 그것은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 될 수 있다.
성령의 열매마저 인간이 자기 의로 돌리려는 인간이 있을 수 있기에 성령은 죄에 대해서만 지적하시는 분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령은 의에 대해서도 알려 주신다.

‘누가 하셨습니까?’
‘주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요16:8)

성도는 성령이 거하는 전이다. 그러기에 성령의 간섭 하에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성령의 간섭이 싫어 주님의 의를 증거하는 간판(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되기를 거부하고, 자기 의를 자랑하려한다. 이를 성령은 가만히 있지 않으신다. 이를 때 마다 ‘죄에 대하여’ 지적하신다. 성령의 열매마저도 ‘자기 의’로 챙기려는 자에 대해서도 ‘죄에 대하여’ 지적받고 다시 십자가 앞에 서게 하여 회개케 하신다. 그렇게 함으로 십자가를 통하여 셩도는 다시 ‘하나님의 한 의’를 찬양하게 한다.

바울, 요한, 베드로, 야고보는 결코 교회를 어떻게 해보고자 하는 교인 관리차원에서 찾아낸 해결책으로 위와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십자가의 은혜가 들어 왔기에 성령의 관리 하에 들어왔기에 마땅히 넘쳐 나와야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성도가 자신의 환경과 시간과 처지를 내세워 사도들이 말하고 있는 내용들을 듣고도 거부한다거나, 성령의 열매마저도 자기 의로 돌린다면 회개해야 할 것이다. 그를 때 회개용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 맞다.

‘오줌이 차 있으면 마렵고 마려우면 화장실을 찾고 화장실을 찾아 그 속에 있는 오줌을 내놓는 것이 마땅하다.’

교회는 계시록의 일곱 교회의 사라짐과 같이 사라졌다 다시 발생하고 있으며,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고 그의 몸의 지체로 구성되어 있기에 지금도 성령의 전으로서 성령의 역사로 구체적으로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증거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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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잘 읽었습니다.
구자근 2006-08-18 21:57:22, 조회 : 120, 추천 : 1

목사님께서 쓰신 글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님만 바라보자>라는 뜻으로 알고 감사함으로 받습니다.

목사님께 대한 저의 평소 생각은 이렇습니다.

성격이 올곧으며 순전하시고, 그러면서도 정의 앞에서는 누구보다도 강직하시며

늘 섬기고 봉사하시면서도 불평을 모르시며

성경적인 복음을 전하시려고, 자신의 사생활까지도 사소하게 여기려고 애쓰시는 분이며

동료 목사님들을 지극히 사랑하시며,.....

(제발) 저의 이 생각들을 언짢아하지 말아주십시오. 제 딴에는 진심이니까요.

저의 글, 서두 1번의 중심내용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토론시간조차도) 예수님의 새언약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 피의 능력을 드러내시는 사건으로써

고마운 마음으로 쓴 것입니다. 2, 3, 4번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써진 것입니다.

제 마음 속에서 (거의, 언제나) 안쓰럽고 사랑스럽게 떠오르는 형제자매님들이 있습니다.

특히 이런 수련회에 참가하시는 분들이 저에게는 그런 대상들임을 고백합니다.

(저의 이미지가) 어쩌면 건방지게 보이고, 어쩌면 무뚝뚝하며 어리석게 보일 때가 있을지라도

제 마음은 그것이 진심입니다.

때로는 주일 예배시간에 피아노 앞에서 반주하고 있는 동안에도 가끔씩,

목사님들 여러명이 떠오르면서 가슴 먹먹해지는 훈훈함으로 무엇인가 울컥 올라올 때도 있지요.

그런데 목사님!

누군가가 저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 마음 속에 있는 그런 사랑이 성령님께서 주신 사랑 맞나요? 십자가에서 나온 사랑 맞나요?"

"지금 당신은 crossvillage 관리하시는 멋진 손목사님 관리하려고 애쓰시는군요?"

목사님!

저 자신을 포함하여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부인당해지는' (또는 부인하면서 자랑되는)글이 써질 때

인간적으로 걱정도 되고 두려움도 생기지만,

십자가지신 주님 앞에서 오히려 감격과 환희의 순간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자신 속에서 퍼올려진 내용물들로 인하여 누군가가 상처를 받고 정신적인 피해를 입었다면

참으로 죄송한 일입니다.

한말씀 더 생각나서 덧붙이면(강의 들을때 생각난 것인데요, 남편한테도 얘기 안한 것이지만)

<오줌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냥 나오는 것이다>에서

제 생각으로는 그냥 나오는 오줌조차도

우리 인간들은 자기 마음에 드는 색깔이 아니면 기분나빠 한다는 것입니다.

금똥을 원한다든지, 은오줌을 원한다든지 말이지요...

그러니까 <오줌은~나오는 것이다> 까지는 복음이고

그 내용이 헌금이나, 사랑의 권면등으로 일정하게 고정된 가치로 매겨질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기준이라고 여겨집니다.

(오늘밤은 너무나 시원한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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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잘 읽었습니다.
손무성 (Homepage) 2006-08-19 08:55:18, 조회 : 107, 추천 : 1

아래 내용을 볼 때 너무 지나친 걱정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오줌은~나오는 것이다> 까지는 복음이고
그 내용이 헌금이나, 사랑의 권면등으로 일정하게 고정된 가치로 매겨질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기준이라고 여겨집니다."

예를 들어 형제가 교회 봉사하는 것을 보고 그 형제에게 '네가 하는 봉사는 너의 의에서 나오는 봉사인가? 아니면 주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나 걱정은 지나친 우려입니다.
<오줌은 ~나오는 것이다>는 것은 나오게 될 때 주깨서 하셨습니다. 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

'오늘 아침 밥상은 내 어머니가 채려준 밥상인가? 악마가 채려준 밥상인가? '왜 걱정하십니까?

그리스도의 몸에서 발생되는 것이라면 예수가 주요 그리스도 인것을 나타내게 하시려고 발생시키며, 사도들도 그리스도의 몸에서 마땅히 이를 증거하기 위해 나오기를 바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려해야 할 것은 이렇게 나온 것을 내 몸에서 나왔으니 내가 한 것이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나오게 되는 것과 나온 것을 마치 나오면 안되는 것같은 심정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참고 : http://www.crossvillage.pe.kr/bbs/zboard.php?id=freeboard&no=3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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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누가 누구를 심판하겠다는 것인지!
정판옥 (Homepage) 2006-08-19 08:06:27, 조회 : 155, 추천 : 0

<목회와 진리수호>라는 인터넷 싸이트에서 퍼온글입니다.

신길성결교회 이신웅 목사가 양태론을 설파하여 파문이 일고 있다.
그는 2006.1.11 한밭제일장로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는 중에 “예수님이 성령님 이예요 아니 예요”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기를 “네 성령님 이예요”라는 것이다.
이는 명백한 양태론을 주장하는 자로서 피할 길이 없다.

이러한 반성경적인 신론사상으로 한국교회의 강단을 어지럽히는 이들이 많다.

예를 들자면 이단규정을 받은 베뢰아 김기동목사. 연세중앙침례교회 윤석전 목사와 베뢰아 김기동 목사에게 정식제자로 인정받고 있는 장경동 목사 등 이에 영향을 받은 출신들이 일반적으로 양태론 주장은 물론 예장대신 전광훈 목사도 양태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1. 이신웅 목사의 양태론 메시지.

“ 모두 다 충만 받아야 데요
여러분 성령 받는 거와 성령충만 받는 것은 같을 까요 다를 까요
달라요 그때그때 달라요
자 여러분 어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성령 받는 거와 어떻게 다르냐
여러분 우리 예수님 믿습니까?
십자가 보혈로 다 시침 받았고 주님의 자녀 됐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성령님 이예요 아니 예요?
네 성령님 이예요.

성령님은 하나님 이예요 아니 예요? 하나님이에요.
삼위가 일체이시기 때문 이죠”

2. 양태론이란 무엇인가?.

성경에 반하는 양태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장로회신학대학 조직신학 김명용 교수의 글과 합동신학대학 역사신학 김영재 교수의 글을 소개한다.

1) 김명용 교수의 글.

장로회신학대학교 김명용 조직신학 교수의 2006-02-08 15:01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1)”라는<네이버 지식>에 게재한 글을 인용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라는 말은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말이다. 한국 내의 많은 성도들과 교회들은 하나님의 삼위되심의 삼위를 세 분으로 생각하지 않고, 셋이긴 하지만 세 분이 아닌 다른 어떤 형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 빨리 버려야 할 사고이다. 많은 경우에 삼위는 한 분 하나님이 세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는 어떤 형태로 생각하는데 이런 생각은 초대 교회가 이미 이단으로 규정한 사벨리우스 이단, 곧 양태론 이단으로 흐르는 사고이다.”라며 버릴 것을 촉구한다.

2) 김영재 교수의 글.

합동신학대학원 김영재 역사신학 교수의 2005-03-03 18:44“삼위일체 하나님”라는 <네이버 지식>에 게재한 글을 인용한다.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그냥 양태론(樣態論, Modalism)이라고도 하고, 그것을 사벨리우스가 처음 말했다고 해서 사벨리우스주의(Sabellianism)라고도 합니다...3세기 중반에 사벨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이 구약과 신약과 교회 시대의 세 시기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이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단자(單子, monad)로서 하나님의 존재 내에서 구별이 없으며, 세계와의 관계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구별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 가지 이름과 양식으로 구별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태양과 빛과 열을 비유로 사용하여 로고스를 통하여 세상이 창조되었다면 장차는 로고스가 다시금 흡수되고 하나님은 하나일 뿐이라고 합니다. 사벨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인성은 완전히 무시하였으므로 그에게서 성육(成肉)의 개념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이러한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은 물론 이단설로 정죄를 받았으나, 교회 역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잘못된 삼위일체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경향은 합리주의적 사고를 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신자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이러한 양태론적 이해는 부흥사들이나 일반 목회자의 설교에서도 흔히 듣는 것입니다. 일반 목사들의 경우는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해, 햇빛, 열, 혹은 물, 얼음, 수증기 등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로 설명합니다. 그러다 보면 불가피하게 양태론에 빠지게 됩니다.”라고 경계를 촉구한다.

3. 비 판.

성경에 반하는 양태론 사상에 영향을 끼친 것에는 시벨리우스주의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한 해악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이들의 반성경적인 사상을 신앙화 시킨 지도자들의 책임과 각성을 촉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작금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이신웅 목사의 경우 역시 기독교형의 탈을 쓰고 있는 양태론 사상에 피해자 일 수가 있을 것이나, 그가 양태론을 신앙하는 것에 대하여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그는 성령론 관련에 메시지 흐름에서 예수님이 성령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성령님이라는 근거는 성경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신웅 목사의 주장은 예수님=성령님=성부하나님이라는 결론이다.
이런 주장은 성부 고난과 사망설을 피 할 길이 없을 뿐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말씀하신 문장의 파괴로 인한 충돌은 물론 예수님의 요단강에서 침례와 기도 등이 1인 삼역을 한 생 쇼를 한 것으로 해괴 망측스럽게 신성을 모독한 것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성령님이라면 오순절 이전에 승천하신 분이 성령님이라는 것이고, 오순절에 지상강림하신 성령님이 예수님이라는 것이니, 예수님이 재림하신 것이 된다.

그렇다면 재림 이전에 성도의 휴거인 첫째부활이 지나갔다는 것이라는 모순과 오류인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신 인자되신 예수님을 본 것도 또한 이신웅 목사의 말대라면 보좌 우편에 인자가 성령님이라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지상 강림하신 성령님이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인자로 계신다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이 되는 것이다. 스데반은 오순절 사건에 이전에 승천하신 예수님이신 인자를 보신 것이지, 성령님을 봤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 양태론은 신론 관련 비성경적인 이단사상이다.

4. 삼위일체 성경교훈.

① 에베소서 4:4-5 /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There is] one body, and one Spirit, even as ye are called in one hope of your calling;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One Lord, one faith, one baptism,
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One God and Father of all, who [is] above all, and through all, and in you all.

② 신명기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에하드 : 복합적 단일>여호와시니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one LORD:

③ 마태복음3:16,17 / 16 예수께서 세례(洗禮)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聖靈)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自己) 위에 임(臨)하심을 보시더니
And Jesus, when he was baptized, went up straightway out of the water: and, lo, the heavens were opened unto him, and he saw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like a dove, and lighting upon him:
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者)라 하시니라
And lo a voice from heaven, saying,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기독교이단사이비연구대책협의회
상임회장 원 문 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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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