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사명이다-예수님 외에 아는 바없는 어느 노인의 육성 설교] 2006-06-26
[이것이 사명이다-예수님 외에 아는 바없는 어느 노인의 육성 설교] 2006-06-26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이것이 사명이다-예수님 외에 아는 바없는 어느 노인의 육성 설교
이근호 2006-06-26 17:25:44, 조회 : 199, 추천 : 2
추천 사이트 '매인교회' 사이트, 자유게시판에 들어가시면
유원상 선생님의 5분짜리 육성 설교가 나옵니다.
평생을 성경 구절만을 가지고 예수님을 증거했던 분의 황혼 인생을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
[re] 이것이 사명이다-예수님 외에 아는 바없는 어느 노인의 육성 설교
정판옥 (Homepage) 2006-06-27 19:34:09, 조회 : 139, 추천 : 0
목사님이셨는데,
지금은 선생이라는 말도 가당치 않다고 하시는군요.
79세가 되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살과 피에 대한 의미를 깨달았답니다.
지금은 83세 되시고, 충남 대천에 살고 계시더군요.
그 유명한(?^^) 이근호 목사님은 전혀 모르고,
다만 예수님만 이 나이 되어서야 조금 알것 같다시네요.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할 뿐입니다.
==========================================================================
[re] 이것이 사명이다-예수님 외에 아는 바없는 어느 노인의 육성 설교
이근호 2006-06-28 08:31:16, 조회 : 140, 추천 : 2
하나님은 복음 중심으로 움직이는데
인간들은 너무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삽니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기도
자신의 신세 탓, 하기도 하고
자신의 대단한 신학 지식과 복음 지식을 안 알아주는 세상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세상 너희들이 나를 안 알아 주기에 나도 너희들 떠나겠다"라는 식으로 삽니다.
이것은 복음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입니다.
연속적으로 터져나오는 고마움과 감사가 없이는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실필 필요조차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원상 노인의 태도는 참으로 '자유' 그 자체입니다.
이런 자유는
오로지
자신이 뭘해도 '죄'만 나온다는 의식에서 나온 겁니다.
자신이 죄 자체이기에
거기에 복음의 능력이 임하게 되면 뭐가 나오든지 간에 모두 감사와 고마움 뿐입니다.
"내가 잘했을까" 혹은 "못했을까"를 따지면서 산다면
거기에서는
감사와 고마움이 멈추고 남는 것은 자신의 의로움 챙기기 뿐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버룻삼아 내뱉게 됩니다.
"세상이 나를 안 알아주니 나도 세상을 버리노라"
이것은 사명감이 아니라
자기 잘난 채하는
교만의 절정입니다.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 전할 때 값 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8-19)
==========================================================================
[re] 이것이 사명이다-예수님 외에 아는 바없는 어느 노인의 육성 설교
박기삼 (Homepage) 2006-06-28 09:45:14, 조회 : 148, 추천 : 2
저가 유원상 선생님을 안 것은 선생님이 58세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의 선생님과 지금의 선생님을 보면서 느낀 것은 요한복음 21장 18절로 요약됩니다.
원치 않는 곳으로 가고자 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는 약속에 따라
원치 않는 곳으로 우리들을 이끄시는 것을 실감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
비가 억수같이 내린다.
박윤진 2006-06-29 23:39:55, 조회 : 129, 추천 : 0
비가 억수같이 내린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수직으로 내려꽂는 소리가 두렵기까지 하다.
두렵다는 느낌에 가슴 한쪽이 서늘해 질쯤,
하나님께서 노아라는 사람과 맺었다는 '무지개 언약'이 생각났다.
'아! 그러면 이 비 때문에 죽지는 않겠군......'
두려움이 극적으로 반전한다. 나는 안전하다.
하나님의 언약이 나의 죽음을 방어한다.
여전히 나는 살아남기 위해 하나님의 언약을 씹는다.
십자가가 내 눈 앞에 밝히 있으나
살아남고자 하는 욕망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십자가를 보양식으로 삼더라도 살자고 한다.
삶만은 끝까지 놓지말자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원샷한다.
물받이 위로 빗방울이 가끔 떨어진다.
비가 그칠려나 보다.
비가 그치면 두려움도 그치고
무지개 언약이니 십자가니 하는 자기방어술도 그치겠지.......
모든 것이 그치지만
결코 그치지 않는 것이 있다.
살고자 절대자의 말씀까지 서슴없이 먹어치우는 식욕이다.
하나님의 원수들이 자기 배를 신으로 삼았다는 말씀을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하나님의 죽음이 나를 삼키기 전에
이 식욕을 누가 멈추게 할 수 있는가?
이 식욕이 멈추었으면 하는 것이
혹, 참을 수 없는 또 다른 식욕은 아닐까?
긴 한숨.................................................
어쩔 수 없는 죄인의 괴수,
누군가 드디어 십자가 속으로 잡아 넣다.
==========================================================================
[re] 비가 억수같이 내린다.
곽진계 2006-06-29 23:57:23, 조회 : 118, 추천 : 0
여기도 비가 억수같이 내립니다.
저도 두렵지만 ‘무지개언약’을 생각합니다.
저도 살아남기 위해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을 씹었습니다.
부쩍이나 체력이 약해진 저도 십자가를 보양식으로 살아남고자 합니다.
그리고, 저도 끝까지 살아남고자 예수님의 피를 원샷합니다.
비는 그쳤지만 살고자 하는 욕망은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먹어치웁니다.
이 욕망을 멈추고자 하는 것도 또다른 욕망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박윤진님의 글이 비오는 오늘밤 너무 가슴에 와닿내요.)
==========================================================================
[re] 비가 억수같이 내린다.
이근호 2006-06-30 08:36:10, 조회 : 130, 추천 : 0
비가 억수같이 온다는 것은
기압골이 그만큼 깊다는 뜻입니다.
비가 억수같이 오지 아니하면
강수량이 부족해서 농사가 제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한꺼번에 많은 비를 내린다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께서는 무지개 언약에 따라
땅에서 목숨 부지하고 살라는 은총을 주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빗방울 하나 하나를
빠징코 기계에서 쏟아지는 코인다발로 여겨야 합니다.
대박입니다!
언약은
사적 감정에 따라 이해될 수 없습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라도
방금 고시 패스한 사람이 맞으면 하늘의 축복이요
방금 은행에서 최종 부도처리 당해서 거지꼴이 되어 버린 가장의 맞는 비는 저주로 느껴질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합니다.
자신의 죽음조차도!
##############################################################################################
서양철학사 3강 올리면서
손하진 2006-06-30 14:03:08, 조회 : 65, 추천 : 1
후텁지근한 날씨속에 모두들 안녕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아래서 수고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사실 저의 입장에서는 녹취하는 게 그렇게 수고로운 일이 못됩니다.
그냥 '노느니 장독깬다'고 혼자 공부하다가 부산물로 생긴 걸 저도 같이 나눠먹는 처지라
수고랄 것도 없죠 뭐.
또 저는 단지 남이 뼈 빠지게 공부해서 강의해놓은 걸 뒤따라가며 주서 놓은 것 뿐이니까요.
정말 수고라면야 괜한 강의요청에 안 해도 될 일을
바쁜 와중에 시간쪼개가며 강의해주시는 김교수님께서 하시는 거죠.
아무튼 저로서야 요즘 장독 깨는 일밖에는 달리 일이 없어서 당분간은 장독이나 마저 깨렵니다.
이번 3강은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가운데 '기계론자'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에 대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중세와 근, 현대를 오가며 그들의 주장과 연관된 인물이나 사상도 소상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8번 >>>>> 지난 2강에 다룬 '존재'와 '생성'에 대해 짧게 언급하고 있으며
'사이'에 대한 단상이 곁들여져 있습니다.
*8-47번 >>>>> 우선 기계론자들 가운데 맨 첫번째로 엠페도클레스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47-82번 >>>>> 'Atom'개념을 만든 데모크리토스가 다뤄지고 있습니다.
*83-106 >>>>> 태양이 신으로 받들어지던 그 시대에 태양은 이글거리는 돌덩어리에
불과하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한 아나사고라스에 대한 얘기와
더불어 '누스', '푸쉬케', '휠레'의 개념을 명확히 해주고 있습니다.
*106-115 >>>>> 오늘날에 와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견유학파의 디오게네스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
손성식 목사님의 글
이근호 2006-07-05 10:01:56, 조회 : 161, 추천 : 2
[7-8월의 책을 선정하면서]
「코스모스」
저자: 칼 세이건
출판사: 사이언스 북스
“기독교의 종말론은 우주적 종말론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고 위르겐 몰트만 교수는 「오시는 하나님」(p. 443 f)에서 말했다. 우주적 종말론의 프로그램은 현대의 과학-기술 문명 속에서 커다란 어려움에 부딪히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체로서의 우주와 그의 모든 세부영역이 자연과학의 연구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자연과학이 그의 방법에 있어서 불가지론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면, 자연과학은 그의 영역에 있어서 아무런 신학적 진술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생성에 대해서도, 그것의 종말에 대해서도 신학적 진술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신학이 “자연”의 영역에서 후퇴하여 “역사”의 영역에 집중하였으며, “역사”의 영역에서도 후퇴하여 역사의 내적인 면 곧 “인간의 실존”에 자신을 제한시키는 것은 이해할만하다.
인간의 생명은 자연으로의 참여이다. 살아 있는 것과 땅과 태양계와 은하계와 우주의 세계는 이들과 결합되어 있는 우리 인간세계의 조건이기도 하다. 몸으로부터 분리된 영혼이 없으며, 생명과 땅과 우주의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인류는 없기 때문에, 자연의 구원 없는 인간의 구원은 있을 수 없다. 인류의 구원은 그의 현존에 있어서 자연과 결합되어 존속하는 인류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 없는 인간을 위한 구원은 생각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말을 좀 돌려보자. 오래전에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유럽 전역에 논의되기 전에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나 하늘의 덮개, 해와 달... 이 아니라 지구가 회전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발버둥치는 오만 불손한 천문학자의 말에 현혹되고 있다. 그 바보는 천문학 전체가 뒷걸음치는 걸 바라고 있다.” 필립 멜랑히톤은 더 심하게 말했다. “멍청이가 새것 중독자들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장 칼뱅은 성서로 눈을 돌렸다. “성서에는 ‘세계는 또한 그것이 움직일 수 없게 정해졌다’고 씌어있다.”고 했다. 우리는 현재 루터, 멜랑히톤, 칼빈이 우주를 바라보는 시각이 틀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왜 그들은 틀렸을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 시대의 아들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론 우리도 그렇다. 우리의 사유가 어떤 장에서는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린 어쩌면 신학적 도그마들로 우리의 사유를 요새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확실한 것과 확실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분명한 정리가 있어야 될 것 같다. 난 나의 무지를 통각하면서 7-8월의 책 읽기로 본서를 택했다. 혹시 같이 읽는 분들이 있다면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참고로 본서는 600페이지에 이르고, 책값도 비싸다. 그러므로 가까운 도서관에서 빌려보는 것이 좋을 듯싶다. 그리고 [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상문도 좀 뒤로 미루기로 한다.
==========================================================================
[re] 손성식 목사님의 글
박병규 2006-07-05 13:15:43, 조회 : 115, 추천 : 2
손목사님은 담임목사와는 다른 방법으로 부목사를 힘들게 하는 군요 ㅎㅎㅎ
==========================================================================
[re] 목회자들이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
이근호 2006-07-05 10:26:14, 조회 : 156, 추천 : 5
목회자가 하는 일이 성경을 설명하는 일이다.
이 일에 자존심을 거는 자가 목사이기에
만약 세상 공부를 계속하지 아니해도
성경을 통해서 보이는 세상으로 자기의 시선을 충분히 넓다고 생각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단, 목사보다 세상을 넓게 보고 있는 교인들이 빠지고 남은 교인들 앞에서는만 그러하다.
목사보다 더 세상을 넓게 본 교인들은 목사의 좁은 세상관에 탄식을 하면서 그 교회를 떠난다.
남아 있는 교인들은 왜 안떠나는가?
목사보다 덜 무식해서가 아니라 아예 목사한테 한 수 배우기를 포기하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목사로부터 더 배울 것이 없다는 사실이, 곧 자신이 목사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것이 증명된다는 점을 마지못한 빈약한 즐거움이라고 건지려고 한다.
목사가 이렇듯 자기 한계성을 지니고 성경를 대하는 딜레마를 어떤 식으로 헤쳐나가야 하는가?
그것은 자기보다 더 유식한 사람에게 계속 배우는 것이다.
그 유식한 사람들이 어디있는가?
도서관과 서점에 있다. 그리고 T.V의 교양 프로그램이 나온다.
목사가 그렇게 더 유식해서 뭘 어떡하겠다는 것인가?
그동안 자신이 거룩하고 올바른 진리라고 간주하면서 그 진리관을 가지고 자신만만하게 성경을 해석했던 그 해석 기준이
원 세상에!
성령을 받지 않는 일반 지식인들도 지니고 있을 뿐더러 도리어 더 깊은 사고로 체계있게 정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그동안 목사 본인이 얼마나 육적인 해석을 복음적 해석이라고 우기면서 교인들에게 강요 했는지 그 죄를 갈수록 절실하게 느낀다.
즉
목사 본인을 성경 앞에서 계속 죄인으로 남긴다.
이렇게 목사의 인간성 자체에서 오는 유,무식의 한계와 타고난 자존심으로 인해 자폐증적인 오만의 죄를 짓고 있음을 알고 있다면
교인들에게 돌아올 것은 무엇인가?
오직 십자가 복음의 은혜 뿐이다.
이제 복음의 능력을 받은 목사는
그냥 건성으로 포괄적으로 "저는 죄인입니다"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납득이 가는 현실성적 체계를 잡아서 본인이 죄인임을 고백하게 된다.
즉
목사가 아예
본인이 성경의 권위에 호소할 자격조차 안되는 인간임을 자각할 때,
교인들 앞에서
오직 말씀 자체에서 나오는 권위가 그대로 살아있는 상태로 교인들에게 도착된다.
이 말씀의 권위에서 목사는 빠진다.
왜냐하면
목사는 예수님보다 무식하기 때문이다.
손성식 목사님의 글에서
"그러므로 현대신학이 “자연”의 영역에서 후퇴하여 “역사”의 영역에 집중하였으며, “역사”의 영역에서도 후퇴하여 역사의 내적인 면 곧 “인간의 실존”에 자신을 제한시키는 것은 이해할만하다." 라는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이 말씀을 쉽게 풀이 하면 이렇다.
" 그동안 살아오면서 하나님을 알고,(자연의 영역) 신학교 가서 목사가 되어 (역사), 개척교회해서 내 교회 하나 건지면 (인간의 실존) 그것이 곧 거룩한 신의 뜻이 아닌가!"라고 말이다.
이게 예수님보다 무식한 이단들의 자기 정당성이라는 것이다.
##############################################################################################
서양철학사 4강을 올립니다.
손하진 2006-07-07 14:57:56, 조회 : 40, 추천 : 3
이제 '자연철학'의 시대를 뒤로 하고 '인간철학'의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의 대결구도를 눈여겨보면 좋을 듯 싶습니다.
어찌보면 이번 강의까지가 고대 그리스철학에 있어서 '오픈 게임'에 해당한다면
이번 강의 말미서부터 시작해 앞으로 몇 강에 걸쳐서는 '본 게임'이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상세히 다뤄지게 될 것입니다.
이번 강의는 대강은 이렇습니다.
0-5 >>>>> 지난 시간에 다뤘던 견유학파에 대한 언급이 잠시 나옵니다.
5-61 >>>>> 그간의 철학사에서 부정적으로만 읽혀지던 소피스트들의 철학에 대해서
그들의 견해를 일정부분 수용했던 후대 철학자들의 사상을 견주어가며 재평가 작업에 나서고 있습니다.
62-97 >>>>> '나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고백과 함께 '산파술'을 이용해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을 궁지에 몰아넣어 결국은 자신과 같은 고백이 나오도록 만든 소크라테스가 나옵니다.
97-102 >>>>>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은 여러 학파들에 대한 이야기가 잠시 언급됩니다.
103-125 >>>>> 플라톤 철학으로 들어갑니다.
&참고로 우리교회(대구 주님의 교회)수련회가 7월 15일-17일(토-월)에 경주에서 있을 예정입니다.
참석하시고 싶은 분 계시면 연락을 주세요.(천성은 목사님 011-818-0091)
참석하시면 목사님께서 아마 말씀에 푹 담가주실 겁니다.
그리고 저는 시원한 물에다 담가 드리겠습니다.
##############################################################################################
오용익 목사님의 십자가 사랑의 편지
우인숙 2006-07-09 20:01:57, 조회 : 140, 추천 : 2
*이 편지는 요사이 화평의 밥상머리에서 3시간 이상씩 너무 육신이 허약해서 우리의 마음을
짠하게 하는 오 목사님의 십자가 사랑의 화신이 된 모습으로 토해놓는 질문과 답에 대한
정리인 셈입니다...ㅇㅇ님께서 받은 메일을 저와 나누고자 제게 보낸걸 게시판에 올립니다.....
믿음에 관한 마지막 정리
요한복음 17:11절과 12절의 말씀에
"11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당연히 믿음으로(반드시 하나님께서 들어주심으로 응답된다는 뜻)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내용속에 예수님의 믿음이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란 이런 겁니다.
"하나님은 내(예수님)가 나의 피로 거룩하게 한 사람에 한해서 구원해주시고, 내가 나의 피로 거룩하게 하지 않은 인간은 반드시 지옥가게 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이 믿음속에는 어떤 인간의 믿음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가 응답된 결과물로서 말입니다.
그래서 믿기를 예수님의 믿음하고 하나가 되게 믿습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은 이 지상의 어떤 인간의 선택(믿음-구원을 위해 발휘할수 있는 인간의 모든 지혜)도 무시하고 예수님의 선택만으로 지옥도 천국도 결정하기에
나는 내 믿음이 아니라(내 믿음은 아무리 나와도 지옥갈 믿음뿐이기에)
예수님의 선택(십자가의 피공로를 줄자에게 주고 안줄자에게 안주는 식으로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예수님의 믿음-인간의 모든 구원시도를 무산시키고 예수님이 주님노릇 하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 )만으로 구원되었다"고 믿는 겁니다.
예수님의 믿음(영)에 인간의 믿음(육)이 포함되게 되면 "하나"가 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은 영이고 육은 육이라고 한겁니다.
그러니 이런 믿음은 이 지상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만 생산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선택을 당해서 예수님의 믿음을 받게 되면 나타나게 되는 현상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자기 생명으로 자랑하는 사람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주체 혹은 믿는 주체자가 되어야 하는 자기조차 죽은자로 간주하면서요.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런 믿음만 하늘나라 가는 믿음입니다.
육체에 의한 자기 기만적 믿음에 빠진자 이라면
"믿음이 없다"가 아니라 내가 믿는 믿음은 구원받을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방식으로 "주님의 믿음이 온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믿음이 오게 되면 내가 믿어서 될 구원은 일체 없고 그 믿음안에 예수님의 피공로만 담긴채 다가온 믿음임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믿음이 오게 되어서 믿게 된 사람은 오직 십자가의 공로만 자랑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때 성도라도 자기쪽에서 믿는다는 이 믿음이 아예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을때까지 계속 내쪽에서 믿는 식으로 주께 다가가려고 합니다. 이것을 본인이 끊어내지 못합니다.
이것을 십자가의 공로로 일생토록 죽여주시고, 십자가의 죽음만이 생명되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이런 관계로 예수님과 성도는 관계되어 있습니다. 이 관계(상태)를 일컬어서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믿음이란 내가 무엇을 믿는다든지, 안믿는다든지를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믿음을 선물이라고 하는 취지는 믿음안에 내가 애쓰고 수고해야할 내용물이 일체 담겨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은혜위에 은혜러라"고 합니다. 로마서에서는 "믿음에서 믿음으로"라고 합니다.
자! 이때 이런 반문이 나올수가 있습니다.
다 알아듣기는 하겠는데, 그럼 지금 목사님께서 위에 말한 모든 것조차 또 내가 그렇게 믿고 싶어서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라면 (나를 또 가장하고 구원받고 싶은 마음에 그것까지도 내 마음이 조작해서 되어진 것이라면) 어찌 합니까?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위의 질문에서 질문자가 문제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믿고 싶어서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라면" "내 마음이 조작할수 있는 것이라면"
이것은 행위하는 자기를 계속 쳐다보고 있기에 나오는 질문입니다.
일종의 자기반성이고 자기반추입니다.
자기를 아무리 들여다 보고 자기 행위를 아무리 뒤집어 봐도 믿음은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진짜 믿는것이 맞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 하다는 것입니다.
성령받은 성도에게 의심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런 것조차 바로 예수 믿는 일에 전혀 무의미한 일인것까지도 알려 주신다는 말입니다.
자기쪽에서 믿는 것이 안된다는 말은,
더 이상 자기가 믿는지 안믿는지를 확인할 필요조차 없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겁니다.
자기가 진짜 믿는지 안믿는지를 헤집어서 믿음을 확정하는 일 자체가 안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런식으로 믿는지 안믿는지를 본인이 따져서 확정하고 그것을 믿는다고 여기는 식으로 자기 믿음을 확정하는 것이 불신앙입니다.
진짜 성령받은 사람이라면 믿음의 근거를 십자가의 피로만 확정짓는 겁니다.
예수 믿는다는 말은 십자가의 피외에 아무것도 안믿는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는 나조차도 믿음의 대상에서 제외시킨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믿었는지 안믿었는지 그걸 확인하려고 하든 말든, 나에 대해서 개의치를 말아야 하는 겁니다. 나는 믿을만한 나가 못되기에 뭘 하든지 개의치 않아야 한다는 것을 성령받고 나서야 비로서 알아채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으로만 구원되는 겁니다. 믿음은 선물입니다.
구약의 십계명에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는데
이것은 에덴에서 쫒겨난 인간의 실상이란 자기 주도적으로 무엇인가를 행사할수 없도록 되어 있
다는 뜻입니다.
나를 안믿고 외부의 누군가를 믿는 일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는 것은 사기가 되죠.
오늘 진짜 복음 듣고 내가 그것을 믿었다고 해도 돌아서면 곧바로 그것을 자기것으로 만들어서 소유하게 되고 그리되면 그것이 또 자기것을 자기가 믿는 식이 되어서 곧바로 사기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제의 믿음은 오늘의 믿음이 아니라고 한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을 사기치려 듭니다.
믿어지기는 하는데 이것이 진짜 믿은것인가 아닌가?
처음부터 자기가 믿었으면 그렇게 따져물어도 되는데, 자기가 한일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따져묻는 것일까요?
그런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이겁니다.
나에게 처음부터 믿음이라곤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000님도 저도 계속해서 하나님보시기에 좋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 믿음도 없고, 의도 없고, 그 무엇도 없으면서도 없다는 것을 인정치 않으려 들고, 뭐라도 좀 있나 하고 찾아 헤집으면서 자기구원의 확증이나 찾으려고 시도하는 -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00님! 제속에도 00님 속에도 믿음 없습니다. 없는데 믿었는지 안믿었는지를 뭐하려고 찾으려 들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찾으려고 듭니다. 그게 우리의 죄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 믿음없는 우리를 끌고 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십자가의 공로)만 있습니다.
그 괴수됨을 들키우면서 십자가의 사랑을 도장찍듯이 또 찍고 또 찍어 주는 식으로 끌려 가는 것이 성도의 일생입니다.
그래야 내 일생 다가도록 은혜만 남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공로로만 구원될것이 아닙니까? 내가 조금이라도 잘 믿어서 구원되면 내 공로 들어가고 그리되면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겁니다.
이래서 죄가 더한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한것입니다.
그점(십자가의 공로)을 성령께서 문득 문득 일깨워주실때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십자가만 자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복음에는 수준(Level)이 없는 것이 맞습니다
복음에는 수준을 논할수 없다는 것이 지당하십니다.
왜 그러냐 하면 복음 자체가 가지는 기능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음이란 예수 이름만 높이자는 취지로 하나님께서 일 벌려서 하나님께서 끝장을 다 본 일이기에
어느 수준높은 인간의 이름조차 다 지워지는 현장이 바로 복음안이기 때문입니다(엡 1:3-6).
누가 전하면 복음이 더 수준이 높아지고, 누가 전하면 복음이 수준떨어지는 복음이 된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고전 1:12,13).
누가 혹시 이런 주장을 한다면 그 사람은 아예 복음이 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겁니다(고전 1:18).
예를 들어 제가 남들이 미처 알아채지 못한 진리를 먼저 알아채서 그것을 남들보다 더 빨리 전한다고 해서 저의 수준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또 제가 그렇게 전해주었기에 그 진리의 수준이 전보다 더 가치와 수준에 있어서 올라가는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고전 2:1-5).
진리를 깨닫는 다는 것은 내가 어떤 지식을 소유했다가 아니라, 그렇게 해서 내 수준도 높이고 복음의 수준도 높여 놓았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끝없이 깊고 넓은 복음안에 있는 사랑을 다 안것처럼 교만하게 굴었다는 죄를 들키우며, 인간의 잘남(수준, 레벨)이란것이 얼마나 십자가앞에서 헛된것인지를 회개케 하는 겁니다(고전 1:29-31).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서열을 매길수 없고, 우열을 가릴수 없는 이유도 순전히 복음에 있습니다.
복음에 수준이 없기에 나보다 더 먼저 깨닫고 나보다 더 많이 깨달은 사람도 있을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엡 3:7-11).
사람의 수준에서 보면 이런것이 다 서열매기는 것처럼 보이기 쉽습니다(민수기 16장).
그러나 복음입장에서 보면 도리어 이런 면이 복음이 어떤 인간에게도 소유되지 않으며, 도리어 주님께서 복음으로 교회를 주관하고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이는 게 됩니다(고전 3:10-15).
같은 종노릇을 해도 어떤 종은 등짐을 더 많이 지고, 어떤 종은 좀 적게 지는 식으로 보일수 있는 겁니다. 이것도 항상 그런것이 아니고 언제든지 바뀔수도 있고요.
그런다고 해서 종이 주인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고전 3:6,7).
이때 종이 다른 종 보면서 왜 나만 이렇게 무겁게 지고 가야 하느냐고 따진다든지,
혹은 왜 나는 이렇게 가벼운 짐만 줘서 수준떨어지게 했느냐 하는 것은,
종주제에 주인의 일에 참여 되었다는 고마움보다는 자기 체면챙기고,
자기위신이나 챙기겠다는 태도이겠지요(고전 3:9).
주님이 다 알아서 하니, 나는 그냥 게을러도 되고 놀아도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 태도입니다(고전 4:1,2). (목사들의 이런 사고방식은 언제나 누구로부터도 책망받아 마땅합니다)
나외에 누구라도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 가리지 말고 기꺼이 참여해서 들을 마음이 있어야 하고, 나도 내가 깨달은 복음을 대상을 가리지 않고 기꺼이 증거할 맘이 있어야 합니다(고전 4:1).
그래야 00님 지적하신 대로 복음외에 어떤 인간의 레벨과 수준도 인정할수 없다는 복음의 취지가 성립되는 것입니다(고전 1:21, 23,24).
왜입니까?
복음만이 사람을 구원하는 유일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예수님의 피공로 외에 서열과 우열을 논하는 기준이 되는 어떤 인간의 수고와 노동의 가치도 들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롬 11:6).
그런 취지로 이근호목사님의 강의를 어렵다고 피하지 말고 어려워도 힘껏 들어야 한다고 제가 추천한 겁니다.
저도 이근호목사님도, 누구라도 복음의 종된 목사라면 다 같은 취지로 복음 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목사 쳐다보지 말고, 이 세상 어떤 인간도 기대하지 말고, 당신 자신도 기대하지 말고
예수님 한분만 쳐다 보고, 예수님 한분만 의지하고, 예수님 한분만 사랑하고 예수님 한분만 기대하라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2:1-5).
십자가 지신분이 예수님 한분 뿐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13)
이런 취지로 누군가 복음전한다면 주께서 보낸 종인줄 알고 마음껏, 원없이, 들어줘야 하는 겁니다.
그런 종들의 도움을 마음껏 받아서 주님을 더 많이 알아가고, 주님과 더 깊이 사랑하고 교제하라는 것이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브리서 10:23-25)
##############################################################################################
어느 신학자의 글에 대한 동역자들의 평가를 부탁합니다.(야후 펌)
정판옥 (Homepage) 2006-07-11 02:20:38, 조회 : 145, 추천 : 0
한국적 신학과 중국 선교의 원리
이문장 교수(싱가포르 트리니티 신학 대학)
21세기 이후 기독교 역사의 흐름에서 한국 교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동시에 중국 교회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 앞으로 세계 기독교 역사는 동 아시아, 즉 동양(東洋)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기독교 역사의 촛대를 옮기시고 계심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제는 기독교의 서양 시대가 마감하고 동양 기독교가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견해에 이의는 많지 않다. 차제에 우리는 ‘한국적 신학’의 담론과 중국 선교의 원리 사이의 상관관계를 고민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중국 선교를 하는데 있어 한국적 신학의 담론이 어떤 통찰과 방향제시를 해 줄 수 있겠는지 함께 찾아보려고 한다.
중국 교회와 동역의 관계를 형성하라
중국 선교는 시세 파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지피지기(知彼知己)해야 한다. 상대를 알고 우리를 알아야 한다. 우리와 상대를 감싸고 있는 인적, 물적, 지형적 및 정치 경제 문화 종교적인 환경도 파악해야 한다. 동 아시아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시대적 도전에 민감해야 한다. 중국은 전통적 선교 개념을 가지고 접근하면 곤란하다. 그것은 단순히 선교 방식의 전환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국 교회와 중국 교회의 관계 설정 자체에 근본적인 인식 전환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한국 교회와 중국 교회는 공통의 과제를 함께 풀어가야 할 새 시대의 동반자로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경험과 중국 교회의 경험이 창조적으로 만나져야 한다. 한국 교회가 중국 교회를 대상으로 일방적인 시혜(施惠)를 주어야 한다는 발상은 매우 불순하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차제에 한국 교회와 중국 교회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 작업을 필요로 한다.
먼저 중국 선교에 있어 일차적으로 선교 환경에 일어나는 변화를 주목해야 한다. 기독교 역사에 급격한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자연과학적 세계관의 깊은 영향을 받은 서양의 정신세계와 기독교 사이에 균열이 일어난다. 기독교의 중심 축(axis)이 동양 문명권으로 이동하고 있다. 선교의 주체도 바뀌고 있다. 4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선교 현장의 거의 모든 사역자들은 서양 선교사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시아 교회와 선교사들의 역할이 증가하고 있다. 서양 교회의 선교가 후퇴하고 있음은 시대적인 흐름이다.
한국 교회 선교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복음과 교섭한 역사가 한국보다 길고 깊다. 삼자교회와 가정교회를 통한 자 문화권 선교를 감당할 역량이 형성되어 있다. 한국 교회는 자신의 현재 위치와 역할 그리고 중국 교회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한다. 중국의 복음화는 중국 교회의 사명이자 몫이다. 중국 교회가 선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중국 교회의 자생력에 손상을 입히지 말아야 한다. 공산정권 50년 기간에 서양 선교의 부재가 오히려 중국 교회의 자생력을 키워주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 교회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사역에 대한 전략적 모색이 요청된다. 한국 교회의 역할은 중국 교회의 동역이다. 그것은 현지 중국 교회가 동역을 필요로 할 때 형성되어진다. 억지 동역이 아니다. 물량 공세를 통한 동역도 아니다. 중국 교회의 필요는 중국 교회가 결정해야 한다.
한국 교회와 중국 교회의 관계는 선교주체와 피선교지 관계가 아니다. 중국 교회가 스스로 인정하는 필요를 지원하는 도우미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중국 선교는 소탐대실(小貪大失) 했다. 앞으로는 중국 교회, 더 나아가 중국 인민과 정부가 한국 교회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도록 바른 역할을 해야 한다. 앞으로 한국 교회는 중국 안에서 역할을 새롭게 찾아야 한다. 중국 교회와의 동역은 그리 수월한 편은 아니다. 문화적 배경이 다르고 지난 세월 살아 온 배경이 달라 어려움이 많다. 특히 중국인의 심성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중화사상이 한국 교회와 동역자 관계 형성에 은연중 걸림돌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감당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역할이 있다. 그것을 찾아야 한다.
말씀의 깊이를 보여주라
한국 교회가 중국 교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중국을 향한 한국 교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함도 사실이다. 중국 교회는 한국 교회의 역할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앞으로 한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 문명권이 기독교의 새로운 중심 세력으로 부상하고 역할을 감당해야 하겠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신학에 있어 서양 신학의 이식자 역할에 머무른다면 중국 교회 안에서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새로운 기독교 중심의 주체로서 새로운 기독교 형성을 위한 방향타 역할이 한국 교회 앞에 놓인 긴급한 도전이다. 이것은 전통적 의미의 선교라기보다는 복음과 한국 문화의 교섭을 통해 형성되어진 한국적 신학과 그 경험을 중국 교회와 나누는 차원의 사역이 될 것이다. 결국 한국 교회와 중국 교회는 공통적으로 시대적 과제에 직면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교회의 문제점 가운데 제대로 교육을 받은 지도자의 결핍이 가장 두드러진다. 그러나이러한 현상은 실상 한국 교회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교회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가르침, 즉 말씀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자체 위기에 봉착해 있다. 교회의 붕괴를 조심스럽게 전망하기도 한다. 10년 뒤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 안에서 설 자리가 있을까 고민하는 소리도 없지 않다. 기독교가 한국과 중국 백성들의 정신세계를 주도하는 가르침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으려면 말씀을 체현한 고수들이 등장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성경에 통달해야 한다. 성경을 연구하면 하늘과 땅과 인간 삶의 원리를 보는 눈이 열려야 한다. 성경을 연구하면 은사의 세계가 열려야 한다. 성경을 연구하면 다른 종교의 가르침들을 능가하는 권세 있는 가르침을 베풀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한국 교회가 중국 교회를 선도해야 할 중요한 영역이다.
기독교의 원형을 보여주라
한국 교회와 중국 교회가 공히 직면한 21 세기 도전은 기독교를 동양의 종교로 정착시키는 일이다. 기독교가 한국인의 심성에 뿌리를 내리도록 하는 일이고, 동시에 기독교가 중국인의 심성에 뿌리를 내리도록 하는 일이다. 기독교를 동양의 종교로 자리매김하는 일은 동양 문명권에 속한 한국 교회와 중국 교회의 공통의 과제이다. 한국 교회와 중국 교회는 공통의 과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경험을 공유하고 교류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탈 서구화를 위해 애쓰는 중이고, 중국 교회는 역설적으로 서양 신학을 배우려고 애쓰는 중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교회와 중국 교회는 상호 타산지석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 교회와 중국 교회의 최근 역사적 경험이 교차하는 곳에서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건강하고 열린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앞으로 동 아시아 기독교의 전개 양상에 지대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오늘날 서양 기독교를 ‘팔 다리 잘린 기독교’라고 말한다. 그런 무력한 기독교는 선교적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 불신자들의 정신세계를 끌어당기는 자력(磁力)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구약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선교적 사명이 그것이었다. 신약 교회가 감당해야 할 선교적 사명도 동일하다. 개인이나 교회나 기독교의 본래 모습을 구현하지 못하고 자력을 잃게 되면 선교적 역할을 마감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모습,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모습, 그리고 인간의 본래 상태를 회복한 모습이 개인과 교회 공동체 안에 보여질 때 선교의 자력이 살아날 것이다.
한국 교회는 자체 갱생의 경험이 아닌 기존의 교회 문화를 중국 교회에 이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한국 교회 자체가 탈 서양화 과제를 안고 있다. 한국 교회 자체가 기독교의 원형 회복의 과제를 안고 있다. 한국 교회가 건강하지 않은 기독교 문화를 중국 교회에 이식하게 되면 오히려 중국 교회의 형성에 해를 끼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깨우침은 신학교를 통해 확보되고 전수된다. 현재 우리가 기독교를 배우고 가르치는 방식은 서양 선교사와 서양 교회를 통해 이식된 것이다. 서양 기독교인들이 동양에 와서 서양식으로 기독교를 연구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지금은 서양 선생들이 거의 철수했다. 그러나 서양식 신학 교육의 틀은 변함이 없고, 서양식으로 신학 훈련을 받은 동양 선생들에 의해 지속되고 있다. 기독교의 진리를 배우고 가르치는 동양적 방법이 있을 수 있고 또한 있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확산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화 혹은 현장화 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는 기독교의 영성을 일으켜야 한다. 기독교의 원형 복원을 말하는 것은 기독교를 기독교 되도록 만드는 요소들 가운데 상당 부분이 상실되었음을 전제한다. 서양 기독교는 영적 차원에 대한 감수성이 둔해졌다. 초자연적 영역 및 영적 차원이 학문으로서의 신학적 담론에서 삭제되었다. 제 종교들이 새로 부상하는 시대적 징조를 읽어야 한다. 기독교 바깥 세계에서 활약하는 능력자들의 존재를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에서 발견되는 능력의 세계에 주목해야 한다.
모세가 애굽의 술사들을 능가하는 능력을 소유했던 것처럼, 이 시대 기독교도 세상의 능력자들을 능가하는 영적능력을 소유해야 한다. 이 일에 한국 교회가 선도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로고스(logos)와 카리스마(charisma)가 통전되는 기독교의 원형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중국 교회에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이 한국 교회가 중국 교회를 위해 감당해야 할 선교적 역할이다.
==========================================================================
[re] 어느 신학자의 글에 대한 동역자들의 평가를 부탁합니다.(야후 펌)
이근호 2006-07-11 06:41:09, 조회 : 132, 추천 : 1
목적이 정치적이면
그 어떤 내용이라도 결국 권력 침투와 관계되는 작업에 불과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하나님의 전도 방식은
정치적이 아니라 언약적입니다.
즉
정치적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관장하지 않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로서
공간에서 공간으로의 수평적 확장이라든지 정복의 취지를 품은 의도로 나타나게 됩니다.
반면에 언약적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중심성이 그 어떤 지역이나 시간이나 상관없이 돌출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갔다고해서 교회 중심이 로마로 바뀌는 것도 아니요
안디옥 교회에서 전도를 지역을 넘어 실시했다고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가치가 궤멸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상의 중심은
지상의 특정 지역에서 벗어나 항상 예수님 계신 곳, 하늘 나라가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땅을 생각치 말고 위를 사모하라는 원칙은 지구상 어느 지역에서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언약 원칙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신학교 학장님은
장사꾼이나 여행사를 꾸리는 사업가입니다.
쉽게 말해서 양의 탈을 쓴 사기꾼입니다.
왜냐하면
과거에서 지금까지의 한국 교회를 교회라고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단이냐 아니냐를 성경 진리를 통해서 검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왕 쭉- 교회와 성장해왔으니 설마 교회 아닐 수 있겠느냐 하는 식입니다.
'교회 있음'을 자체를 '교회됨'이라고 단정하고 싶어합니다.
많은 교회들 속에 있고 거기에 곁들여 붙어있다고 교회라고 우기고 싶어합니다.
진리는 성경에서 나와야지 '교회들이 있음'에서 새끼치듯이 교회가 나와서는 안되는 겁니다.
전도란, 이 세상에 왜 종말일 수 밖에 없는가를 증거하는 겁니다.
교회마저 왜 멸망당해야 하는 가를 증거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교회권과 정치권과 더불어 왜 함께 망해야만 되는 것이 이 세계인지를 증거하는 겁니다.
즉 과거에 교회라고 불렀던 것조차 언제든지 정치적으로 세력화하는 속성을 드러내는 멸망받을 단체인 것을 증거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 학장님처럼 선교하고자 한다면
곧
중국의 공산당 수하에 있는 삼자교회처럼 공산당의 정당성을 인정해주고 권력과 결탁하여 공산당을 교회보다 더 우위에 있음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을 해서라도 전 인민의 신자화를 꾀하자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다니엘의 예언과 배치되는 안목입니다.
인자의 나라는 99마리의 양에 탐을 내지를 않습니다.
잃어버린 양만 찾는 작업이 주님의 일입니다.
온 천하와 온 지구를 전부 기독교 교인화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신자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내게 주신 자 중에서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40)
==========================================================================
[re] 어느 신학자의 글에 대한 동역자들의 평가를 부탁합니다.(야후 펌)
정판옥 (Homepage) 2006-07-11 07:51:07, 조회 : 101, 추천 : 0
예, 동감입니다.
그런데 이분의 아래의 글에서 말씀과 영적 능력을 이야기하는 부분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예수님처럼 표적과 기적 같은 영적능력을 행해야 한다는 논리인지 잘 감이 오지를 않네요? 초자연적 영역 및 영적 차원이 학문으로서의 신학적 담론에서 삭제되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과연 이분이 주장하는 영적 능력이란 무엇인지요?
***아래의 글***
"한국 교회는 기독교의 영성을 일으켜야 한다. 기독교의 원형 복원을 말하는 것은 기독교를 기독교 되도록 만드는 요소들 가운데 상당 부분이 상실되었음을 전제한다. 서양 기독교는 영적 차원에 대한 감수성이 둔해졌다. 초자연적 영역 및 영적 차원이 학문으로서의 신학적 담론에서 삭제되었다. 제 종교들이 새로 부상하는 시대적 징조를 읽어야 한다. 기독교 바깥 세계에서 활약하는 능력자들의 존재를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에서 발견되는 능력의 세계에 주목해야 한다.
모세가 애굽의 술사들을 능가하는 능력을 소유했던 것처럼, 이 시대 기독교도 세상의 능력자들을 능가하는 영적능력을 소유해야 한다. 이 일에 한국 교회가 선도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로고스(logos)와 카리스마(charisma)가 통전되는 기독교의 원형을 회복해야 한다."
==========================================================================
[re] 어느 신학자의 글에 대한 동역자들의 평가를 부탁합니다.(야후 펌)
이근호 2006-07-11 09:34:26, 조회 : 117, 추천 : 1
모세의 능력은 고난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애굽의 술사들과 똑같은 질을 갖되 더 큰 능력의 기적을 눈으로 보고 싶다는 겁니다.
큰 기사와 능력을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답답해서 못 견디겠다는 겁니다.
이런 주장에 대해서 한국 교회 이단들은 이렇게 답변할 것입니다.
큰 예배당 짓기 위해
헌금을 갹출 시킨 능력이 얼마나 큰 능력인지 알기는 아느냐?
큰 예배당지어서- 군중을 떼로 모이게 해서- 십일조와 주일성수 안지키면 복 못받는다고 사기쳐서 -큰 몫돈 만들어서- 선교비 주었더니만- 이것들이 배가 부르구먼!
조용히 죽는 능력이 얼마나 큰 능력인지!- 거지 나사로 신세만 되어야 횡재한 겁니다.
◁ 이전글
다음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