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빈치 코드-를 보고서] 2006-05-25
[영화- 다빈치 코드-를 보고서] 2006-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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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빈치 코드-를 보고서
이근호 2006-05-25 18:23:31, 조회 : 262, 추천 : 4
[영화라는 이름의 오락으로 종교라는 이름의 오락에 딴지 걸기]
진리에 대해서 기독교가 권위의 한 몫을 담당한다고 여기는 대부분의 서구인들에게 있어 예수는 결코 신이 아니라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는 점을 설득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즉 진리라는 것이 예수의 신성에 확고한 기초를 지니고 있을 때만 효과가 발휘된다고 여기는 발상은 누구의 아이디어인가? 바로 인간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다.
인간들은 초월의 세계로 이어지는 사다리를 원한다. 예수로 하여금 그 사다리가 되기를 바란다. 예수의 신성은 인간들의 인간으로서의 자기 한계성을 점차 멀어지고 떨어져나가게 만드는 사다리 구실을 한다고 서구인들은 믿고 싶어한다. 예수의 부활은 인간 초월성의 시범적 상황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인간이 언젠가 완전하게 될 수 없고 그냥 그대로 뭉개진다고 한다면 생의 활력과 목적을 갖지 못해 깊은 허무에 빠진다. 그래서 이 피곤한 일상에서의 구원을 위해서라도 초월의 세계를 구상해야만 했다. 옛날에 예수라는 청년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소식은 오늘날에도 희망을 준다.
그런데 과연 그 희망이 단지 기대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실제로 그렇게 되는지 하는 것을 결정짓는 것은 실제로 예수라는 청년이 신으로 환생해야만 한다. 그냥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인생이 종쳐서는 아니 된다.
하지만 영화는 외친다. “왜 오늘날 우리들마저 아직도 기독교가 말하는 가치에 아무 생각없이 동조해야만 하는가? 왜 과학을 이야기하고 인류의 지혜의 탁월성을 자랑하면서 인생의 최종 의미에 대해서는 여전히 허술하고 모호하고 허약한 고대의 신화에 도움의 눈길을 보내는가? 뭔가 다른 모색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은가?”라고.
인류 지혜의 발달은 다른 가능성을 위해 닫아두지 않고 늘 열어놓은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고 알고 있다. 즉 ‘지혜의 종결이나 완결성’은 영 현대인 생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다빈치 코드를 통해 기독교를 한낱 고대 신화로 간주해보자는 발상은 기독교에 대한 묵살이나 박살이 아니라 기독교가 지혜의 다른 가능성을 방해하는 장애물 노릇을 하도록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신화란 합리성을 가지고 재해석할 경우에만 요즈음 현대인의 생리에 합세할 수 있는 해석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본 현대인의 심기에 편하게 하지 못하고 억지처럼 느껴지는 하는 요소는, 예수라는 청년이 꼭 막달라 마리아하고 연애를 하고 혼인을 하고 ‘사라’라는 딸 아이까지 임신시켜야 인간다운 면모가 더욱 강조되고 부각된다고 여기는 발상이다.
즉 현대인들이 고대인이나 종교를 대할 때는, 극히 자연스럽게 작용하는 신의 동작이 도리어 더욱 더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법이다. “아, 신은 이처럼 낮아지셔서 인간들의 관심사를 완벽하게 돌보시는구나”라고 말이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신성을 걷어낸다면 종교란 결국 ‘오락’일 뿐이다.
과거 화제거리를 심심풀이 잡담용으로 삼는 것 밖에 안 된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종교라는 이름의 오락생활을 할 이유가 없어진다. 종교라는 것이 계속 가치 있는 오락으로 남으려면 거룩한 신께서 인간 수준까지 낮아져서 인간들의 시시껄렁한 이야기까지 건성 듣지 않고 신경써주시는 신비로움으로 치장이 되어 있어야 한다.
마치 멜로드라마에서 여자가 전혀 등장하지 아니하면 성립이 안 되는 이치와 같다. 다빈치 코드는 사람들이 기독교라는 오락을 즐기는 것에 대해서 시비를 걸고 싶어 만든 영화이다. 하지만 종교보다 더 짜릿하고 삶의 의미를 주는 오락은 아직도 창안하지 않았다는 점을 이들은 알지 못한다.
세상적인 오락의 대표적인 것은 축구나 야구나 골프나 영화나 소설 같은 문학이나 정치운동이나 고스톱이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죽고 난 뒤까지 그 게임을 즐긴다는 보장은 없다. 이 영화를 통해서 기독교이라는 이름의 오락이 쇠퇴하기는커녕 더욱더 종교라는 이름의 오락의 중요성을 부각시켜 주는 부작용을 낳게 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영화에 대해서 심술내면서 말하기를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이 영화에서 대꾸하고자 하는 바는 “종교란 어디까지나 오락일 뿐!”이다.
여기에 대해서 종교인들을 솔직하게 고백해야 한다. “종교만큼 희망적인 오락이 또 있을까! 다 사람을 즐겁게 하고자 짓이다”라고 말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만들어내지 않는 것은 오직 복음 뿐이다. 나머지는 다 악마의 능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오락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 복음이 싫어서 기독교를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영역권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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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찬성입니다용~~!!
강은식 2006-05-29 12:22:55, 조회 : 146, 추천 : 0
기독교가 인간이 만들수 있는 영역안에 들어와 있다는 말이 참 인상적이네요!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가져다 주신 복음앞에 두손드는 자가 되길 오늘도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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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코드』를 보고..
곽진계 2006-05-29 15:24:30, 조회 : 312, 추천 : 0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를 영화화한 <다빈치코드>가 개봉되었습니다. 주위의 대체적인 분위기는 별루 재미없다는 반응이였는데, 저도 책을 읽어보지 않고 영화를 보아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리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였습니다.
영화평을 작성하기 전에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핵심 내용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아기를 임신하고 있었고,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박해를 피해 마리아는 프랑스로 넘어가서 아기(여자)를 낳았으며, 그 자손들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로마카톨릭 교회에서는 이 사실이 밝혀질 경우 예수님의 ‘신성’에 타격을 입을 것과 교황청의 권위가 무너질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 후손들을 제거하려고 주교들의 비밀조직(요푸스데이)을 이용하여 예수님의 후손을 찾는데(그리고 제거하려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시온수도회’라는 비밀조직은 이에 대항하여 예수님의 후손을 수호하는데 조직의 사활을 걸고 지켜내고 있으며, 예수님의 후손이 있다는 사실과 위치를 암호화(코드화)해서 다른 사람들은 이 암호를 풀 수 없고, 핵심멤버(시온수도회의 수장)만 이를 풀 수가 있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예수님의 후손을 둘러싼 쫓고 쫓기는 싸움은 1세기부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살던 15세기까지 이어지고,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면서, 예수님의 후손이 있다는 사실을 이 그림에 암호화(코드화)시켜놓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빈치는 ‘시온수도회’의 수장이였구요.
그러면, 이 그림의 어디에 코드화시켜 놓았을까요? 이 “최후의 만찬” 그림에는 ‘성배’가 없다고 합니다.(저도 처음 알았습니다.) 아니 최후의 만찬에 성배가 없다니요?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에서 떡을 떼시고, 술을 잔에 부으시면서 이는 내 살과 피라고 하시면서 이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였지 않은가요?
그런데, 왜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의 핵심인 술잔(성배)을 빼버렸을까요? 그것은 성배는 술잔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인 것을 나타내기 위해 성배를 빼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의 우측옆(예수님쪽에서)에는 공간이 비어있고, 예수님의 반대방향으로 비스듬이 누워있는 사람이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공간의 라인을 따라가면 성배가 그려진다는 것입니다. 성배가 코드화(고대에는 잔이 여자를 상징한다나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스듬이 기대어 있는 마리아를 예수님의 좌측옆으로 이동시키면 정확하게 예수님의 좌측으로 기대어있는 모습과 자연스럽게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그림을 보고 설명을 하면 더 쉬울 텐데(네이버에서 조회해서 보시면 됩니다.) 아쉽지만 일단 넘어갑시다. 그동안 예수님의 성배를 찾는 전설이나 영화, 소설 등이 무수히 많았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 실체가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15세기의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에 코드화시켜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까지 잘 보존(시온수도회 덕분?)되어 그 예수님의 후손이 ‘소피’라는 여자주인공이라는 것이 결론입니다.
이 후손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극적인 요소들이 배치가 되면서 영화가 구성되었습니다. 영화에서는 약간 지루한 면도 있었으나, 소설을 읽어본 사람들의 반응은 재미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영화를 관심있게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 내용이 사실일까요?
여러분, <다빈치코드>는 소설이고 영화입니다. 즉, 허구라는 것입니다. 착각하지 마시고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역사소설이나 대하소설을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저도 옛날에 역사소설 등을 좋아해서 읽어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실존인물’이 등장하면서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작품이 ‘구성’되면 그 소설 전체를 사실로 오인을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작가가 실존인물과 역사적 사건만을 발췌하여서 세밀하게 새로이 구성한 플롯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면 그 작가의 뛰어난 ‘구성’ 때문입니다. 이를 역사적 사실과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이 소설도 댄 브라운이라는 작가가 쓴 소설입니다. 여기서 실존인물과 역사적 사실로 등장하는 것은 다빈치와 “최후의 만찬”인 그림입니다.
여기서부터 영화에 대한 비평입니다. 다빈치가 실존인물임에는 틀림없으나 이 다빈치가 ‘시온수도회’ 수장이였다는 말은 금시초문이고, 허구입니다. “최후의 만찬”도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가 만찬 자리에 있었다고 쳐도 그 사실이 예수님과의 관계(결혼)을 통해 후손을 낳았다는 결론은 비약입니다. 설사 성배가 없다손 치더라도, 이것을 막달라 마리아와의 결혼으로 연결하는 것은 비약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셨다는 내용이 나오는 복음서나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가 있다고 해도, 이것을 가지고 예수님과 결혼하였다는 결론으로 이끄는 것도 비약입니다. 사실 이런 내용(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였다는 내용)은 “예수의 마지막 유혹”이라는 영화에도 언급되었던 내용이지요.
또한, 성배가 마리아를 상징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예수님의 후손하고 뭐가 상관이 있습니까? 이것(즉, 성배가 마리아를 상징하더라도)이 예수님의 후손이 있다는 내용에 결정적인(혹은 정황적인) 증거가 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마치 진화론자들의 진화단계 이론에서 결정적인 ‘연결고리’가 빠졌듯이.
따라서 이 영화의 핵심요소인 다빈치의 그림에서 마리아를 발견할 수는 있어도 그 외 추가적인 요소(예수님이 마리아와 결혼한 사실과 후손이 있다는 사실)는 작가의 상상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너무 진지하게 대응하였는가요? 단지 소설일 뿐인데...
사람들은 열광합니다. 현대인들은 이슈를 찾아서, 이벤트를 찾아서 몰려듭니다. 할인점이나 백화점에 이벤트행사한다면 물불 가리지 않습니다. 언론에서는 이러한 이슈들만 노리고 뉴스에 게재를 하면 폭발적인 조회수가 현대인의 이런 경향을 증명합니다. 하루하루가 새로운 사건으로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지루하고 평범한 것은 견디지를 못합니다.
모든 회사에서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이런 대중심리를 마케팅에 적극 이용하여야 성공합니다. 이것은 영화산업이나, 소설이나, 음악계나 차이가 없습니다. 댄 브라운은 이 심리를 적극 이용하였습니다. 이 심리는 현대인의 고유한 심리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고유한 심리입니다. 세계 최대의 종교인 기독교에서 핵심교리인 예수님의 ‘신성’을 공격하는 소설책에, 세계가 열광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돈방석에 앉았습니다.(세계적으로 4,300만부가 팔렸다고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260만부가 팔렸다고 합니다.) 당연히 영화로도 만들어져야지요.
비기독교인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정말 기독교인들의 행태를 보니 미워죽겠는데, ‘울고 싶은데 뺨때려준다’고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공격하고, 또한 기독교 교리 자체에 대한 거부감으로 열광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악마의 책이라는 둥, 사실일까? 라는 둥 온갖 호기심을 갖게 하니 열광합니다. 흥행이 되니 출판계, 영화계, 부수사업 등에서 등달아 이슈화시킵니다. 원래 세상의 구조가 이렇게 흘러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개봉된다고 하니, 한기총에서 결사반대한다고 하고, 이것이 다시 이슈화되고, 사람들은 영화를 더 많이 봅니다. 한기총이 오히려 흥행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역설이지요.
교회에서는 목사님들이 앞다투어 이런 악마의 영화를 보면 안된다고 하는데, 교인들은 보고 싶어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는 사람은 속은 후련하지만 목사님이 보지 말라고 했는데 봐서 내 믿음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불안하고, 끝까지 안보는 사람은 믿음이 좋다고 스스로 자위해 봅니다만, 어딘지 찝찝합니다.
뭐가 그리 불안한가요? 예수님의 복음하고 이 소설하고 뭐가 상관입니까? 예수님의 후손이 있다는 허구의 사실이 무슨 비밀이라도 되는 양 안달입니까? 이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것을 비밀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십자가’를 비밀이라고 합니다. 정말 이것만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후손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구요. 이 ‘십자가’의 코드(비밀)는 ‘시온수도회’ 수장도 모릅니다. 제발 오해하지 마세요.
정말 우리는 믿음이 없습니다. 안 그런가요?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바다에 던지울 것이라는 말씀이 실감나지 않은가요? 우리들의 ‘믿음없음’을 고발하기 위해서 이 영화는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믿음이 선물로 주어진 자만 찾는 작업, 이것이 예수님의 추수작업일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란 말인가요? 말란 말인가요? 저는 별루던데 보고 싶으면 보세요. 그런데 아마 “미션임파서블 3”보다 재미없을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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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다빈치코드』를 보고..
정판옥 (Homepage) 2006-05-30 07:29:42, 조회 : 103, 추천 : 0
인간들이 믿고 숭배하는 신(하나님이든지, 예수든지...)을
예수님께서 인정을 해 주지 않음으로 인하여 심통을 부리는 것이지요.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한마디로
"나를 믿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하나님을 이야기 하고
예수를 이야기하고
교회를 이야기 해본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내가 믿어지고
내 말이 들려지는 자가
하나님께로부터 택함을 받은
나의 자녀이지
그 이외에는 마귀의 자식들이고
너희들의 신은 우상이요 잡신이니라!"
인간들이 어찌 좋아할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십자가 사건이 터졌고,
오늘도 여전히 죽이고 싶도록 미울 것이고,
하나님은 여전히 그 어두움 속에 가두어 두실 것이고,
영원전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자에게만
그 시궁창 속에서
긍휼을 입고
블러냄을 받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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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굴뚝청소부』를 읽기 위한 두 가지 예비 고찰
곽진계 2006-05-30 09:36:46, 조회 : 282, 추천 : 2
이 책은 이진경 교수가 일반인들을 상대로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인데, 책의 완성도가 뛰어나서 두 번이나 개정판을 내면서(내용도 많이 바뀌였지만) 현재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너무나 쉽게 일반인들을 상대로 근대 및 현대 철학에 대해서 설명을 하였고, 베스트셀러가 된 책입니다. 많은 것을 배웠고, 느꼈습니다.
그후 이진경 교수의 책들을 계속해서 보고 있습니다. 그 외 완성도가 높은 책은 <철학의 외부>와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노마디즘1, 2> 정도 일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텍스트인 『철학과 굴뚝청소부』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었기에 제가 충격을 받았을까요? 그것은 이 교수의 ‘문제의식’ 때문이였습니다. 여기서는 이 책을 읽기 위한 예비 고찰로써 간단히 두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1. 문제설정
이 책은 근대 및 현대철학에 대해서 이 교수만의 ‘문제설정’을 가지고 쓰여진 책입니다. 이 교수는, 철학이란 ‘의심하기’라는 방법을 통하여 기존의 지배적인 사고방식과 투쟁하여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정의를 합니다. 여기서 ‘넘어서는’ 것은 당시의 지배적인 어떤 사상을 넘어서는 것이요, 하나의 시대를 지배하는 특정한 사고방식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합니다.
넘어설 때 기존의 사고방식과 새로운 사고방식과의 경계선이 형성됩니다. 넘어서기는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철학한다는 것은 이 경계선들을 찾아내고 그것의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라고 이 교수는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경계선을 찾아내는 것이 엄청 어렵다는 것입니다. 철학자 자신들이 경계선들을 말해 주는 경우는 없고, 철학책에서도 이 경계선들을 보여주는 표시는 없기 때문에 일반인들로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 부각됩니다. 그 찾기 어려운 경계선들을 이 교수 나름대로의 기준에 따라 경계선을 찾아내고 있고, 이를 독자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몇몇 철학책들을 보다가도 완독을 하지 못하거나 내용이 거의 기억에 남지 않았던 것은 저자들 나름대로의 이 기준이 없었다는 데에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혼란스러웠고, 어려웠습니다. 철학 훈련이 되지 않은 일반인으로서는 저자가 직접 설명해주지 않으니 그 책을 따라가기가 힘에 부쳤던 것이지요.
이 교수는 저자의 기준, 이것을 ‘문제설정’이라고 합니다. 경계를 확인하고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개념적 도구로서 ‘문제설정’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입니다. 이 교수는 친절하게도 이 ‘문제설정’을 설명하기 위한 예를 들고 있습니다. 저의 집 대문 앞에 아무 양해 없이 며칠 동안 세워둔 남의 자동차를 보고 화가 나서 바퀴에 펑크를 내었다고 하면, 그 자동차 주인이 “아니, 차 좀 주차시켜놓았다고 이렇게 펑크를 낼 수가 있소? 이건 명백히 불법행위이니 배상해 주시오.”라고 항의를 한다고 칩시다.
그러나 그 자동차로 인해 많은 불편을 겪었던 저는 그 말에 순순히 응하지 않고 그 사람을 ‘불법주차’로 맞고소를 하겠지요. 그럼 이제 ‘불법 주차한 자동차에 펑크낸 게 불법행위인가 아닌가’가 문제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는 ‘불법주차한 자동차에 펑크를 낸 행위가 불법인가 적법인가?’라는 문제가 설정된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대답 역시 그 문제를 설정한 방식에 크게 좌우되는 것이구요.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동차와 나, 자동차 주인과 나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는 그밖에도 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주차장이 아닌 남의 집 앞에 불편하게 주차해 둔 이유가 무엇인가? 그건 주차장이 모자라기 때문이며, 근본적으로 도시 교통정책이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회적 측면에서의 접근 방식이고, 해결 방법도 전혀 틀릴 것입니다.
또한 왜 나는 바람직한 일이 아님에도 그 자동차에 펑크를 냈나? 자동차 없는 것도 서러운데 남의 차 때문에 하루 종일 고생을 했으니 화가 나서 그랬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심리적 측면에서의 접근 방식인 것입니다.
법적 측면에서의 접근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심리적 측면에서의 대답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즉, 어떻게 문제를 설정하느냐에 따라 그 대답도 틀리게 됩니다. 대답뿐만 아니라 해결 방법도 전혀 틀리게 됩니다. 법적인 차원에서 접근할 때는 그 법이 정당하냐 아니냐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고, 기존 법의 올바름이 당연시 됩니다.
이건 과학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뉴턴의 이론이 나온 뒤에 다른 행성의 궤도는 다 그 이론에 따라 계산한 게 맞는데 오직 천왕성만 안 맞습니다. 이 경우 ‘이론을 반박하는 사례가 나오면 그 이론을 포기해야 한다.’는 실증주의나 반증주의의 입장에선 “이론과 사실 둘 중 어느 것이 옳은가? 사실이 안 맞는 이론은 버려야 한다.”는 문제설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왕성 궤도를 잘못 계산한 뉴턴의 이론은 거짓이라는 결론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지요.
반면 뉴턴 이론의 지지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다른 건 다 맞는데 오직 천왕성만 안 맞는다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요인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 요인이 대체 무얼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설정을 하면 이젠 다른 요인들을 찾아 나설 것이고, 결국엔 천왕성과 명왕성 사이에 해왕성이라는 행성이 하나 있기 때문이란 걸 발견하게 됩니다.
상이한 문제설정은 이처럼 상이한 대답과 상이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문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것은 그 문제를 가지고 사고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제한합니다. 여기서 ‘문제설정’을 통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사고방식을 찾아볼 수가 있으며, 그것을 분석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문제설정’이라는 도구를 통해 철학의 경계를 찾아내고, 그 경계의 의미를 읽어낼 수가 있는 것이라고 이 교수는 말합니다.
저는 이 ‘문제설정’이라는 개념이 엄청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성경을 읽는데, 왜 해석이나 그 의미는 개인에 따라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가? 여기에 대해서 고민해보지 않았는가요? 같은 본문을 읽더라도 구속사신학에서는 이렇게 읽고, 언약신학에서는 저렇게 읽고, 성화신학에서는 요렇게 읽는 이유가 ‘문제설정’ 자체가 틀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 교수가 예를 든(전혀 다른 의미의 예지만.) 성경구절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라는 본문에서, 왜 말씀이 하나님이 되는지 ‘능력’의 차원에서 이해(문제설정)하는 것과 ‘존재론’적 차원에서 문제설정하는 것은 엄청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그 대답도 하늘과 땅 차이이지요.
2. 두개의 코기토
코기토(cogito)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뜻입니다. 근대철학을 연 데카르트의 명제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요. 그런데, 이 코기토가 중세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계셨나요? 4세기의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의 제1명제도 이것이였습니다. 어떻게 같은 명제가 서로 대비되는 중세(알다시피 중세는 어거스틴이 열었습니다.)와 근대를 열었을까요?
어거스틴은 플라톤과 기독교교리를 믿음과 이성으로 종합하여 중세철학을 기초지운 사람입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인식의 목표는 신과 영혼이였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겨냥해 제기되는 숱한 회의론을 반박하려고 하였는데, 그 기초가 되는 것이 이 ‘코기토’인 것입니다. 회의론자들이 의심하는 모든 것 중에서 의심하는 자신은, 회의론자들도 반박을 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의심하는 나’가 없으면 어떻게 ‘내’가 의심하겠습니까?
어거스틴은 여기서 더 나가, 이러한 의심하는 ‘내’가 모여서, 이들이 모두 인정하는 지식, 예를 들면 2+2=4와 같은 수학적 지식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긍정하는 도덕적 지혜 등도 확실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러한 것들이 확실한 것이라는 판단을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개인이 아닌 ‘다른 확실한 것’에 의존하여야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신’을 끌어드리죠.
즉, 신이 이런 확실한 판단을 할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인데, 반대로 이야기하면, ‘코기토’라는 확실한 지식을 통해 우리는 신이라는 확실하고 완전한 존재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문제설정’입니다.
그러면, 데카르트는 똑같은 ‘코기토’를 가지고 어떻게 나아갔을까요? 데카르트도 똑같은 회의에 빠집니다. 진리는 어떠한 의심에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확실한 것에 이르기 위한 회의, 이를 ‘방법적 회의’라고 합니다. 데카르트도 모든 것을 의심하지만, 의심하는 자신만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이 ‘의심하는 나’는 자신의 능력으로써 확실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생각에 미칩니다. 좀 어렵는가요? 쉽게 말해 ‘의심하는 나’는 확실한데, 이 ‘의심하는 나’를 ‘내’가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심하는 ‘나’는 확실한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데카르트의 ‘문제설정’입니다. 더 어렵게 되었죠?
비교해서 말하면, 어거스틴에게는 이 확실한 ‘코기토’를 신이 제공해 주었다는 것이고,(어거스틴의 목표가 신에 대한 인식이였지요.) 데카르트에게는 이 ‘코기토’를 누가 주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라는 자아가 자신의 ‘능력’으로써 확실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며,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 이 능력이 인간 자신에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거스틴에게는 ‘코기토’가 신학의 기초를 제공해 주는 것이라면, 데카르트에게는 이것이 이성(과학)의 기초를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핵심은 ‘코기토’가 상반된 역할을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맥락 속에 자리 잡고 있느냐, 어떤 ‘문제설정’ 속에 위치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기 때문인 것입니다.
너무 중요한 이야기이지요.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어떤 ‘문제설정’을 가지느냐, 또는 어떤 맥락 속에 있느냐에 따라서 같은 낱말도 상반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생각해보세요. 같은 낱말이라도, 예를 들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라는 의미도 어떤 문제설정이나 맥락 속에 위치하느냐에 따라서 상반된 의미를 가집니다. 이 구원이, 인간을 위한 구원으로 보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하나님(예수님)의 영광을 위한 구원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거기에 대한 인간의 반응도 틀릴 것입니다. 성경의 명령문이나 예수님의 말씀들도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 두 가지 개념만으로도 이 책의 의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개념들을 성경에만 적용하였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가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말을 얼마나 많이 오해하는가요? 그것은 나와 상대방의 ‘문제설정’ 자체가 틀리기 때문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상반된 의미가 됩니다.
이 책은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입니다. 내용이 너무 방대하지만 근대 및 현대 철학의 흐름을(물론 이진경 교수 나름대로의 ‘문제설정’에 의해 경계 지어진 흐름이지만) 쉽게, 명확하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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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읽기 위한 두 가지 예비 고찰
정판옥 (Homepage) 2006-05-30 17:51:45, 조회 : 143, 추천 : 0
머리가 복잡해 지려고 하네요. 집사님!
그러면서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라는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다 하게 하십니다!(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내가 다 이루었느니라!)"
또 다른 어떤 이는 "내가 하기 나름이야!"
이 둘 사이에 동일한 성경이 손에 쥐어졌지만
공통분모는 물건너 가버렸고
서로가 다름을 확인할 뿐이겠지요.
하나님이 다르고
예수님이 다르고
구원이 다르고
믿음이 다르고......
암튼 집사님을 통해서 공부시키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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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읽기 위한 두 가지 예비 고찰
곽진계 2006-06-01 10:35:39, 조회 : 155, 추천 : 0
목사님!
보고십네요. '주 안'에서 즐거운 삶이 되시고,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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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굴뚝청소부』를 읽고
곽진계 2006-06-01 10:30:40, 조회 : 190, 추천 : 0
저번에 예비 고찰을 통하여 이 책에 대해서 약간 언급을 하였기 때문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은 이진경 교수 나름대로의 ‘경계짓기’(문제설정)를 통하여 근대 및 현대 철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철학의 가장 큰 주제를 ‘주체’로 파악하였고, 그래서 근대의 철학을 ‘주체철학’이라고 합니다.
1. 근대철학의 출발
왜 근대철학이 ‘주체철학’이 되었느냐하면,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의 문제설정이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예비 고찰에서도 살폈듯이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의심하는 나’는 확실하다는 것(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을 데카르트는 깨달았고, 이것을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주체가 객체(대상)와 분리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사고하는 ‘주체’가 있으면, 당연히 사고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여러 문제가 등장하는데, 주체가 대상과 분리되었을 때 (인식하는) 주체가 (인식되는) 대상과 일치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주체가 대상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중세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신을 통하여 대상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알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제목인 『철학과 굴뚝청소부』도 이 대상과의 일치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제3자가 보증해주어야 하는데, 그것은 과학도 보증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이 교수가 말하는 ‘근대철학의 딜레마’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이 근대철학의 딜레마를 넘어섰다는 것이 이 교수의 설명입니다. 스피노자는 두 개의 실체를 가정하는 데카르트를 비판하고 실체는 한 개이지만, 속성은 여러 개로 나타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양태). 다시 말하면 실체는 양태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표현된다는 말은 ‘존재한다’는 뜻이구요.(p.68) 그래서 애초부터 주체와 객체의 분리문제, 정신과 물질의 분리문제를 비껴갈 수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진리(대상과의 일치문제)를 알려면 이미 진리의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진리와 허위의 기준이다.”
2. 근대철학의 위기
그 다음은 영국의 경험주의를 통하여 근대철학의 위기가 왔다고 이 교수는 설명합니다. 로크는 데카르트의 이성주의에 반대하여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경험’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완전한 개념’은 신이 준 것이 아니고, 오직 경험에서 추출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것은 단지 개별적인 것에서 추상된 것이며, 이 공통된 특징에 붙인 이름일 뿐이라는 주장은 ‘유명론’의 논지와 비슷합니다.
이 경험주의를 극한으로 밀고 간 사람은 버클리와 흄이였습니다. 특히 흄은 ‘나’, ‘주체’, ‘자아’로 불리는 것은 인상과 관념의 묶음, 지각의 다발일 뿐이라고 합니다. 결국 ‘나’, ‘정신’이라는 게 따로 없다는 것이지요. 흄의 주장은 모든 것을 의심하는, 급기야 ‘생각하는 나’까지 의심하는 극단적 회의주의였습니다.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였던 ‘주체’가 해체의 위기가 온 것입니다.
그러나, 흄의 주장도 여전히 근대적 문제설정의 한계 ‘안에’ 있었다고 이 교수는 설명합니다. ‘인간’에 대한 과학과 참된 지식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검토하다보니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이 나오는데, 흄에게 있어서 ‘인과관계’는 습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상이나 관념을 결합시켜 어떤 지식을 형성합니다. 이 지식은 ‘법칙’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힘이 있어 믿은 사람에게 실재적인 효과를 가진다고 합니다. 즉, 흄은 어떤 지식이 진리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게 아니라 이 지식이 그걸 믿는 사람에게 어떤 효과를 갖는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3. 근대철학의 재건
칸트는 흄의 주체비판을 받아들여 이 주체가 과연 철학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지를 살폈습니다. 데카르트가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출발점으로 삼았던 것들을, 칸트는 그게 어째서 출발점이 될 수 있는지를 연구하였다는 것이지요. 이를 ‘이성비판’이라고 합니다.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 ‘선험적 주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선험적 주체는 관념이나 감각의 다발에 불과한 경험적 주체와 달리 모든 주체에 공통되며, 경험이나 감각에 좌우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좌우하며, 확실하고 항구적이라는 특징을 가집니다. 이로써 칸트는 흄에 의해 해체되어 버린 근대적 주체를 ‘선험적 주체’라는 확고하고 튼튼한 것으로 되살려 낸 것입니다.
피히테를 거쳐 헤겔에 이르면, 근대철학은 정점에 이릅니다. 헤겔은 주체와 객체의 문제를 ‘절대정신’으로 동일화시킵니다. 절대정신은 자기 발전과정을 통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에 도달한다는 것이지요.(변증법) 이로써 절대정신은 다시 자기에게로 복귀하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절대정신의 실현이란 목적을 향해 발전해 가는 ‘목적론적 과정’이라고 합니다.
4. 근대철학의 해체
근대철학은 이제 해체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인간이나 주체를 출발점으로 삼는 ‘주체철학’을 근본적으로 넘어서려는 시도는 먼저 맑스의 '역사유물론'에서 나타납니다. 맑스는 ‘실천’이라는 개념을 통해 근대철학을 넘어서려고 합니다. 먼저 맑스는 ‘대상’의 개념 자체를 바꾸려고 합니다. 주체와 대비되는 ‘대상’이 아니라 활동적인 생활 과정, 실천 과정으로서 파악합니다. 그럼으로써 ‘대상’을 사회적 맥락과 역사 속에서 정의하려고 합니다. 중요한 말이지요. 또한 ‘진리’의 개념도 현실성과 힘의 문제로 바꾸어버립니다. 어떤 사물에 대한 영원한 진리는 불가능하고, 어떤 판단이나 지식의 현실성과 타당성이 힘을 가지게 되면 그것이 진리라고 합니다. 이러한 유물론을 ‘역사유물론’이라고 합니다.
이를 통해 맑스는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해체합니다.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파악합니다.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p.213)
두 번째로 근대철학을 해체한 사람은 프로이드입니다. 그는 처음으로 인간의 ‘무의식’을 발견합니다. 즉 의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영역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무의식은 우연적인 게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이라고 합니다. 후기의 프로이드는 이 무의식도 ‘이드’와 ‘초자아’로 분열되어 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무의식은 근대철학을 해체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근대철학은 주체를 의식과 동일시하였고, 투명하고 통일성이 있었다고 하였으나 이것이 깨어진 것이지요. 이제는 ‘생각하는 나’ 이외에 ‘생각하는 나’가 알지 못하는 ‘나’가 인간내부에 있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근대철학을 해체한 사람은 니체입니다. 니체는 질문 자체를 바꾸어버립니다. ‘진리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진리란 어떤 것인가?’라고 묻습니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라고 말입니다. 진리라는 것을 사로잡고 있는 힘은 어떤 것인가? 따라서 ‘의미’를 아는 것은 주어진 대상을 점령하고 있는 ‘힘’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힘을 구별해주는 것이 ‘의지’이고, 이 의지는 힘들간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어 지는 것입니다. 이를 ‘권력에의 의지’라고 합니다. 좀 어렵죠?
데카르트의 명제와 비교하면, 니체는 ‘생각’이라는 것은 내가 원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 원해서 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그 무엇’은 ‘권력의지’이구요. 따라서 근대적인 주체 개념은 자명하지 않고, 출발점이 아니라 권력의지가 구성해내는 ‘결과물’인 것입니다. 주체가 해체된 것이지요.
5. 현대철학과 언어학
세 사람을 통하여 근대의 주체철학은 해체의 길을 가는데, 이를 더욱 가속화 시킨 것은 현대 언어학입니다. 언어는 우리의 사고를 제한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의 규칙에 따라서 사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훔볼트는 언어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구조를 제약하며, 세계를 파악하는 관점을 내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사고보다 언어의 우위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즉, 언어란 그걸 사용하는 주체들 모두에게 공통된 사고의 기반이며, 선험적인 구조라는 것입니다.
소쉬르는 언어에 있어서 기호와 지시체 간에는 어떤 유사관계나 일치관계가 없다고 합니다. 자의적이라는 것입니다. 유명한 말이지요. 또한 언어는 개인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약속된 규칙의 체계이기 때문에 개인은 그 규칙에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의미는 개인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언어체계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사고나 판단은 개개의 ‘주체’가 하는 게 아니라, 언어의 의미체계(구조) 속에 있는 것이며, 개인들은 그것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래서 소쉬르는 ‘구조주의’의 창시자라는 말을 듣지요.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는 ‘용법’이라고 합니다.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따라, 어떤 맥락 속에서 사용되었는가에 따라 의미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언어게임’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체스를 할 때와 바둑을 할 때는 그 규칙이 틀려서 다른 규칙을 배워야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말이지요. 이는 또한 규칙 자체가 가변적이라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언어규칙과 직장에서 사용하는 언어규칙이 틀리다고 하면 적절한 예가 될까요? 아무튼 이런 생각은 소쉬르의 구조언어학과 차이가 있습니다. 즉, 구조언어학처럼 항상 이미 정해진 의미구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용법에 따라 가변적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교수는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맑스의 ‘실천’개념과 연결하여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교수가 지극히 ‘맑스주의자’이고 ‘유물론자’이기 때문에 이런 사유를 하였을 것입니다.
6. 현대철학과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언어학의 연구방법을 인류학에 연결한 사람입니다. 인간에게 공통적인 무의식적 기초는 무엇인가? 그것은 ‘근친상간 금지’라는 규칙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인류의 ‘문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는 모든 사회적 집단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의 보편적이고 ‘선험적인’ 무의식을 기초로 친족관계의 보편적 구조를 찾아내며, 이로써 사회구조 전반을 관통하는 보편적인 사회질서를 찾아냈다고 생각합니다.
라캉은 소쉬르와 레비-스트로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프로이드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그의 핵심주장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욕망은 결핍에 대한 욕망입니다. 타자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것이고, 타자와 동일시하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참고적으로 르네 지라르는 인간의 욕망을 ‘모방욕망’으로 보았다는 것을 저번 논의를 통해서 알 수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주체가 해체되는 지점은 ‘주체’는 어떤 중심성과 통일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으로서 무의식의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알튀세르는 맑스를 극한까지 사고한 사람이랍니다. 먼저 맑스주의를 과학으로 정립하려고 하였는데, 새로운 과학적 성과는 ‘인식론적 단절’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인 효과를 갖는다고 합니다. 또한 이데올로기는 항상-이미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고 합니다. 생각해볼만한 대목이지요. 호명은 불러주는 것입니다. ‘너는 한국인이다’라는 호명에는 ‘너는 한국인답게 행동해야 된다.’라는 뒤의 말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너는 선택받았다.’라고 말하면, ‘너는 선택받은 백성답게 행동해야 된다.’(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죠.)가 아니라 ‘그래서 감사해야 해’가 생략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푸코는 경계를 허무는 철학자라고 이 교수는 말합니다. 정상과 비정상, 동일자와 타자, 내부와 외부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인간’이란 범주가 근대라는 시기에 만들어진 산물이라고 합니다. 즉 주체는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다는 것이지요. 역사유물론적인 관점입니다. 그리고 푸코는 권력에 대해서 사고한 철학자입니다. ‘생체권력’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학교에서, 공장에서, 감옥에서 감시와 처벌을 통해 사회가 요구하는 책임있는 주체, 법적인 주체로 만들어진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를 더 확장하여 현대교회는 이러한 감시와 처벌(지옥간다 등)을 통해서 ‘비기독교적인’ ‘교인’을 생산한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들뢰즈/가타리는 ‘배치’라는 개념을 통해 차이의 철학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동일성의 철학에 대한 반대개념이지요. 병원의 배치 안에서는 환자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의사라는 주체에 의해 진단받고 처방받는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는 영화를 보면 이를 잘 말해줍니다.) 가정의 배치 안에서는 자애로운 아버지가 되지만, 공안경찰이라는 직업적 배치 안에서는 잔인한 고문경관이 되고, 이를 확대하여 교회라는 배치 안에서는 믿음이 좋아 ‘보이는’ 목사나 집사가 됩니다.
즉 모든 인식이나 태도의 전제가 되는 확고한 출발점으로서 ‘주체’는 없으며, ‘배치’마다 만나는 이웃항에 따라 달라지는 수많은 ‘나’들의 반복이 있습니다. 그런 반복은 동일한 반복이 아니라 차이 나는 반복입니다. 이런 ‘나’는 차이가 나지요. 들뢰즈/가타리는 또한 욕망의 개념을 ‘생산하는 욕망’으로 봅니다. 욕망은 ‘하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하고자 함’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떻게’ 하고자 함이라는 구체적인 양태로 존재합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스피노자의 실체와 양태 개념과 맥이 닿아 있습니다. 돈을 벌고 싶다, 먹고 싶다, 구원받고 싶다 등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욕망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나와 만나는 것들의 ‘관계’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주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배치’에 따라 욕망은 틀려진다는 것입니다.
사실 들뢰즈/가타리는 현대철학의 중심에 놓여있습니다. 그 외 ‘영토화’, ‘탈주’, ‘재영토화’, ‘유목주의’ ‘기계’ 등등의 개념들은 중요하지만 여기에서는 전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손성식 목사님의 글에도 이러한 들뢰즈의 사유개념이 차용되어 있다고 보여집니다.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데카르트에서 출발한 근대철학은 ‘주체철학’이였습니다. 너무 이른 시기에 이를 넘어서려는 스피노자의 자연주의철학은 약 300년을 기다려야 하였고, 영국의 경험주의는 이성주의에 반대하면서 이를 극한까지 밀고나갔으나 근본적인 ‘근대철학의 딜레마’는 극복하지 못하였으며, 칸트는 근대철학을 다시 재건하였고, 헤겔은 이를 정점에까지 가져갔습니다. 근대철학의 해체는 맑스, 프로이트, 니체에 의해 시작되었고, 언어학과 구조주의는 이를 더욱 가속화시켰으며 포스트구조주의는 새로운 주체 개념을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즉, 현대철학에서는 데카르트적인, 칸트적인 ‘주체는 없다’는 것입니다.
7. 서평
느낀 점이야 많지만 이를 전부 이야기하려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으니 간단하게만 언급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문제설정’과 ‘코기토’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예비고찰에서 상세하게 다루었습니다. 두 번째로 스피노자의 실체와 속성(양태) 개념은 저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주체)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을까요? 기존의 신학은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파악하였습니다. 데카르트의 사유에 바탕을 둔 ‘이원론’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원론을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인간’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영혼’이 죽어서 천국간다는 말도 틀렸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몸’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개념이지만 스피노자의 개념을 빌려서 이를 설명할 수 있지도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인간의 실체는 하나인데, 속성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에서 ‘영혼’이라고 하더라도 이원론으로서의 영혼이 아니라 인간의 실체 중 하나로서의 영혼을 이야기(강조)한다고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좀더 분명하게 설명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애석하지만 아무튼 이런 식의 표현은 “구약성서의 인간학”이라는 책에 보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로 칸트의 논의 중 제가 생략하였지만 ‘시간과 공간’에 대한 것입니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선험적 조건’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사고하고 살아가는데 있어서 바탕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칸트적이 개념이고, 더 나아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것이 이 교수가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입니다.(“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수학의 몽상” 참조) 우리가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하였던 뉴턴의 물리학, 유클리드의 기하학 등도 그 시대의 산물이고, 현대의 물리학, 기하학에서는 이것이 깨어졌습니다. 공간에 대해서는 공간도 질량에 따라 휘어지고, 시간에 대해서도 빛의 속도보다 빨리 이동하면 시간도 거슬러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 줍니까? 진리란 없다?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한 진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관은 근대의 진리관이라는 것입니다. 너무 중요한 내용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과 ‘영원’을 우리는 막연히 저세상에서 시간이 영원히 지속된다고만 생각하였습니다. 과학적으로는 증명이 되지 않는 ‘믿음’의 문제로만 보았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천국’은 기독교인의 상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공간’에 존재하고, ‘영원’도 너무나 순진하게 시계의 시간이 영원히 흐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시간’(그것을 굳이 시간이라고 불러야한다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완성된 ‘묵시세계’도 설명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눈앞에 보여야만 믿는다는 사고방식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아십니까? ‘잠재적’이라는 말은 확실한 사실이지만 아직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조들이 이러한 잠재적인 본향을 사모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도 ‘경험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지만 눈으로 보아야만 믿겠다는 생각은 역시 너무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사실 우리는 현실세계도 똑바로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망막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맹점’이라고 하지요.
네 번째로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제한한다는 것입니다. 점심 먹고 졸릴 때 우리는 ‘자진다’라고는 표현을 못합니다. ‘자다’라는 자동사는 수동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졸음이 올 때는 내가 의지적으로 자는 것이 아니라 ‘자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언어규칙이 없기에 우리의 사고는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무의식조차도 언어에 의해 구조화되어있다는 라캉의 주장은 의미가 큽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이 날 듯 말 듯한 낱말을 경험을 해보지 않았는가요? 입에서 맴도는데 말은 안나오는 경우 말입니다. 또한 언어는 용법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성경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역시 같은 단어라도 어떤 맥락에서 하였느냐에 따라 의미가 틀려질 것입니다. 같은 ‘구원’이라도 재난에서의 구원일 수가 있고, 죄에서의 구원일 수가 있습니다.
다섯 번째로 구조주의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우리의 죄가 구조화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구조화된 죄 아래 있는 인간에게는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이를 ‘아담 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말이 나온 김에 한 시대를 특정 짓는 인간의 사고 구조라든지 행동양식 등을 여러 학자들이 말하였는데,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이라고 하고, 푸코는 ‘에피스테메’라고 하고, 부르디외는 ‘장(場)’이라고 하고, 들뢰즈는 ‘영토’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인간은 이러한 사고 구조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크게 보아 모든 시대 인간들의 사고 구조나 ‘선악체계’, 행동양식 등도 구조화되어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 교수는 ‘주체’라는 문제설정을 통하여 근대 및 현대 철학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설정을 통하여 ‘역사’라는 문제설정을 넘어서야 할까요? 역사 안(배치)에서 사고하는 사람들이 역사 너머를 사고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은혜가 있으면 역사 너머의 ‘묵시’를 사고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성경은 철학이 아닌 ‘계시’가 아닐까 생각해 보면서 읽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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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굴뚝청소부]에 대한 정석훈 목사님의 글
이근호 2006-06-02 18:43:49, 조회 : 149, 추천 : 1
철학과 굴뚝청소부
굴뚝청소를 하고 나온 두 사람의 청소부가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자신의 상황을 파악한다.
저자가 왜 철학과 굴뚝청소부라고 책 제목을 달았을까 생각하면서 책을 죽 읽어나가는 중에, 철학의 경계라는 것이 항상 이전의 철학자나 다른 철학자들과 비교하는 가운데 생성되고 허물어진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철학이란 항상 기존의 것과 비교하는 가운데 참된 진리를 찾는다. 푸코에 이르기까지 ‘참된 지식’이 따로 존재했지만 푸코에 이르러서는 ‘진리란 동일자 자신이 발행하는 동일자의 보증서에 불과’ 하게 된다.
결국 인간이 진리를 만들어 낸다고 할까?
중세까지 신이 진리를 주셨다면 데카르트 이후론 줄곧 무엇을 향해 달리는가?
진리는 신이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이 곧 신이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떤가?
내 존재의 확실성(나는 생각하는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출발하여 이렇게 존재하는 여럿이 함께 인정하는 확실한 진리는 오직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함으로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은 신 존재를 분명히 증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어그스틴에서 출발하여 푸코에 이르기까지 이들 공통의 관심사는 오직 인간이다. 인간이 곧 진리라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어떤가?
십자가를 통해 오히려 사람들의 지혜로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셨고, 십자가를 통해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죄밖에 없다는 것을 고발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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