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사역을 내려 놓고 싶습니다.] 2006-03-22
[이제.. 사역을 내려 놓고 싶습니다.] 2006-03-22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음...!
남상수 (Homepage) 2006-03-11 14:47:53, 조회 : 189, 추천 : 11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경북대학교와 총신대학원을 나오셨군요. 근데 이근호식 사상과 정서에 그런거 표시하는게 좀 어색해 보이는군요.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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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음...!
이근호 2006-03-11 15:53:41, 조회 : 196, 추천 : 11
>남과 대결하겠다면 흉기처럼 간주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궁금한 것을 알려드리는 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요 봉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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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음...!
남상수 (Homepage) 2006-03-12 10:13:58, 조회 : 169, 추천 : 10
뭐 제 이 말을 비꼬는 투로 보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그만큼 이근호 목사님의 사상과 생각이 대단한 열의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하는데 그런 소개를 보면 믿음이 연약한 저 같은 사람들은 약간 의아해지기도 하겠지요. 이해하십시오. 그런데 저도 글들을 잘 읽고는 있지만 가끔 이런 대꾸성 글에다가 추천한표 찍고 하는 것은 뭐 별로 보기 좋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누군지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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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전도사님의 글
이근호 2006-03-22 17:12:04, 조회 : 162, 추천 : 7
이제.. 사역을 내려 놓고 싶습니다.
어제부터 저희 교회 부흥회였습니다.
저는 전도사지만 교회에서 설교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설교의
다양한 본문을 전하지만 거의 결론은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은
같다는데, 주된 목적을 갖고 설교를 많이 합니다. 부족하지만
기복신앙에 빠져 있는 성도들에게 바른 신앙관을 가르쳐 주고자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듣는 성도들의 반응은 냉담합니다.
성도님들이 다른 예배와는 달리 부흥회때만은 많은 은혜(?)를
받더군요. 제가 들어도 어쩌면 저리도 말씀을 잘하시는지 감탄을
합니다. 성도들이 아멘 아멘,, 말씀 끝나기도 무섭게 아멘을 하더군요.
이번에 오신 강사님은 다른 부들과는 다르게 본문의 배경과
내용을 바르게 해석하시면서 쉽게 가르치셨습니다. 문제는
결론에서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기도를 받고 싶으면 내일
야곱이 바쳤던 별미를 갖고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성도들이
또 얄팍한 종교상술에 넘어갈거를 생각하니.... 저를 더 화나게
하는 것은 성도들이 이 말에 얼마나 은혜를 받던지..
전에는 저런 설교를 들으면 저런 사람들 때문에 내가 목회를
해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는데,,성도들은 아무리 가르쳐줘도
들으려 하지 않고 내가 알지 못하는 축복(?)에 대해서 전해야
듣기를 원하는 성도들 앞에 더 이상 서 있을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꼭 종교사기 집단에서 똘만이 노릇을 하는게 아닌가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수많은 엘리트 신학생들이 배출되는데,, 저 하나 쯤 사라져도 큰 문제는
없겠죠..
2006.03.22 02:47:18
124.5.xxx.252
좁은문
전도사님께서 현재 이정도의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면, 전도사님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수많은 목사, 부흥사들이 바로 처음에는 전도사님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깨닫게 된 것은 아하! 이렇게 바른소리를 하면 성도들이 좋아하지 않는구나! 그래서 그들이 생각해낸것이 바로 사람들 입맛에 맞는 설교를 하게 된 것입니다. 공든탑이 하루아침에 쌓아지는 것이 아니듯이, 자신의 타락 또한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한국의 수많은 목사들이 처음에는 전도사님처럼 순순하게 출발했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앉게되자 그들의 비유를 맞추다보니 오늘날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전도사님께서 진정으로 주님 한분만을 믿고 의지한다면 자신의 곧은 마음을 끝까지 관철시키십시오. 고생은 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잠깐후면 곧 오실 주님께서 모든것을 갚아주실 것입니다. 마지막날에 믿음있는 자를 보겠느냐? 이 말씀을 상기하십시오. 전도사님 끝까지 승리하십시오.
2006.03.22
124.5.xxx.252
sbs
한국 교회 기복 신앙 목사들의 문제가 아니고 신도들의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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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어느 전도사님의 글
이근호 2006-03-22 17:17:48, 조회 : 168, 추천 : 10
성경은, 세상에 대한 허무가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신에 대해서 뭔가 기대를 걸만하다고 희망을 거는 그 인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세상이 뭔가 자신이 욕구에 충족되는 세계라고 기대했다는 것 자체가 십자가의 길로 가신 예수님의 삶이 방식을 너무나 얕잡아 본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죽했으면 십자가를 졌겠습니까? 그런데 십자가 지지 않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이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 자체가 주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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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송재원 2006-03-24 01:37:17, 조회 : 203, 추천 : 9
이근호 이 죄인!
왜 그동안 예수님이 날 사랑하셨다는 걸 안말해줬어요
4년동안 이근호 주위만 맴돌면서
지식은 쌓았는데
그것만 몰랐는뎅...
아..
에이~~~!!!
이 죄인들아!!!
왜 그렇게 예수님의 사랑에 무감각해요~~~
왜 한명도 예수님이 날 사랑한다는 사실을 안말해줬어여~~ 에웅~
크하하하
여기 죄인들 참 많네~
은혜 까먹는 자들~~
나같은 자들~ 우하하
근데 씁쓸하네용
망한다고 그러던데
힘뺀다고 그러던데
(지식으로 알음)
음..
그렇다면 강이아부지 말대로 인생 꼬인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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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에이~
이근호 2006-03-24 09:13:24, 조회 : 213, 추천 : 11
죽음은 그 죽음의 티를 내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하는 것 하고
'예수님이 나(특히 '나')를 사랑한다고 증거하는 것 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 서신 고린도전서 16:22에 보면,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라면 이렇게 반발할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너희들이 몰라주면 내가 주의 이름으로 너희를 저주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4:11에 보면,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라면 이렇게 반발할 것입니다.
'우리 산 자는 더이상 십자가 죽음을 두 번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고"라고 말입니다.
성경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거부하는 이유는,
자신의 살아있음 그 자체를 신의 절대적 계시로 간주하는 것이 자기 본성에 부합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늘 십자가 앞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십자가가 보이지 않고 자신만이 절대자가 되는 종교로 탈바꿈하는 것이 타고난 본성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오로지 십자가만 외칠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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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에이~
송재원 2006-03-24 13:48:51, 조회 : 172, 추천 : 9
늘 살고자하는 자임을 확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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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에이~
한진영 2006-03-25 16:32:38, 조회 : 160, 추천 : 12
>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거품을 다 빼고 보니..
흔히 말하는 사랑이, 사랑의 실체 안에 그 리얼리티 안에 들어 가지 못하는 짐된 가짜 '사랑'임이 보였습니다.
교회마다 복음 , 사랑, 헌신, 희생 ... 말들은 무성하지만 ( 나 남 할 것 없이)
내가 그것의 실체와 닿지 못하고
그 개념들이 자아에 참으로 스미지 못하고
변죽으로만 울려지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그래서 십자가 마을을 찾고 진리의 해명을 원했는데,
이근호 목사가 십자가 마을이 나를 대신해 죽어 줄 수까지는
없는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데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복음'조차도 죽지 않은 자들에게는 동일한 껍데기로 겉돌 수 밖에 없더군요.
뭘 얼마나 더 소유하려고 들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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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그렇습니다.
이근호 2006-03-25 17:28:05, 조회 : 186, 추천 : 9
하나님은 자기 아들 마저 버렸건만
인간들은
자신은 버림을 당하지 않으리라 여기며 버팁니다.
십자가에 예수님과 같이 버림받는 그 능력이 십자가에서만 나올 수 있는 생명인 것을....(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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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읽어보시기를....
신직수 2006-03-26 02:05:58, 조회 : 160, 추천 : 10
*** 이글은 2002년까지 제가 교사 중 대장이었던 이왕규 총무와 함께 고등부 사역했던 대전 오정동에 있는 대전중앙침례교회 고등부 전도사 이왕규가 쓴 글에 대한 답변과 답변들입니다. 그냥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이왕규는 제게 가장 친하며 똑똑하다는 동생 전도사(침신대 대학원3년)입니다.
① 캡_틴 - 이왕규의 글
이번주가 지금까지 내 생애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공부한 것 같다.
2006년 3월24일, 지금 난 내일 있을 강의를 준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죄가운데로 인도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죄를 쫓는 것은 나 자신이다.
이것은 명확한 사실이고, 이 사실을 난 이겨내야 한다.
예수님은 내 죄를 모두 도말하셨다.
난 도말된 죄를 버려야 한다.
난 예수님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예수님을 사랑하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② 신직수 - 1번 답글
1 하나님께서는 나를 죄가운데로 인도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죄(니)를 죄 가운데 몰아넣으시고 탈주할 수 없도록 가둬놓으신 분이시다.
2 죄를 쫓는 것은 나 자신이다.
니가 죄를 쫓는 개념보다는 죄(왕규)가 죄 가운데 있기 때문에 니가 죄만 쫓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3 이것은 명확한 사실이고, 이 사실을 난 이겨내야 한다.
명확한 사실이라는 말은 니 착각이고 넌 죄를 이겨낼 수 없다. 죄를 이기시고 도말하신 분은 예수님 뿐이시다. 말을 바로 해라. 예수님이 니 죄를 도말하셨다면 이겨낼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고 여기서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 유지시켜주시는 믿음밖에 없다. 니 관리 밖에 있는 믿음이다.
4 예수님은 내 죄를 모두 도말하셨다.
예수님이 니 죄를 도말하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니 꼬봉이라는 말이고 니가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너를 증거하지 마라. 도말된 성도라면 예수님만 예기해라. 글이 너 자신만 자랑하는구나!!
5 난 도말된 죄를 버려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죄가 도말된 성도라면 죄를 버릴려고 하지 않는다. 죄는 죄로 보고 선(예수님)을 바라고 믿고 따라가질 뿐이다. 너는 항상 그랬듯이 니 행위 즉 너를 증거하는 것을 봤다. 이것은 불신자의 표본이다.
6 난 예수님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
니가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다 알아서 하는 것이다(말 많아지겠구만ㅋㅋ).
7 왜냐하면 성령께서 예수님을 사랑하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또한 마지막 니 말은 참 개념없는 말이다. 성령이고 예수님이고 다 너를 위해 존재하니...???
결론 : 니가 살기 위해 사역하니까 글이 점점 더 니 중심으로 돌아가는구나!! 성도는 예수님만 예기하면서 산다. 글 참 개념없게 썼구나!! 이글은 니가 죄의 본질 가운데 있다고 증거하는 글이며 니가 항상 예기했던 니 정체성을 집중적으로 표현하고 요약한 글이다.
③ 캡틴 - 2번 답글
1 하나님께서는 나를 죄가운데로 인도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죄(니)를 죄 가운데 몰아넣으시고 탈주할 수 없도록 가둬놓으신 분이시다.
그럼 하나님은 죄의 주인이시다. 난 죄이지만 죄가 된 것은 하나님 탓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죄와 싸워 이기시기를 원하신다. 내가 하는 것이다. 내가 하지 않으면 내 존재는 없다. 내 존재가 없으면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
2 죄를 쫓는 것은 나 자신이다.
니가 죄를 쫓는 개념보다는 죄(왕규)가 죄 가운데 있기 때문에 니가 죄만 쫓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게 그소리다. 말 장난이다.
3 이것은 명확한 사실이고, 이 사실을 난 이겨내야 한다.
명확한 사실이라는 말은 니 착각이고 넌 죄를 이겨낼 수 없다. 죄를 이기시고 도말하신 분은 예수님 뿐이시다. 말을 바로 해라. 예수님이 니 죄를 도말하셨다면 이겨낼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고 여기서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 유지시켜주시는 믿음밖에 없다. 니 관리 밖에 있는 믿음이다.
명확한 사실의 명제는 2번의 사실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문장에 정확히 답변하라. 난 죄를 이겨낼 수 없다. 그렇다고 핑계대고 가만히 앉아서 쉽게 내 몸뚱아리를 죄에게 주고 싶지 않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도말하심은 소망이다. 소망의 근거위에 난 죄를 용기있게 내쳐야 한다. 예수님이 유지시키시는 믿음 때문에 난 죄를 방관할 수 없다.
4 예수님은 내 죄를 모두 도말하셨다.
예수님이 니 죄를 도말하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니 꼬봉이라는 말이고 니가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너를 증거하지 마라. 도말된 성도라면 예수님만 예기해라. 글이 너 자신만 자랑하는구나!!
예수님이 내 죄를 도말하신 것은 사실이다. 사실은 사실로 받아들여야지 사견을 섞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예수님은 꼬봉이 되실라고 오셔서 대장 되셨다. 죄를 우습게 여기고 쉽게 즐기는 자는 오히려 예수님을 계속 꼬봉 만드는 짓거리다. 난 대장이신 예수님이 좋다. 여기에 내 자랑은 없다.
5 난 도말된 죄를 버려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죄가 도말된 성도라면 죄를 버릴려고 하지 않는다. 죄는 죄로 보고 선(예수님)을 바라고 믿고 따라가질 뿐이다. 너는 항상 그랬듯이 니 행위 즉 너를 증거하는 것을 봤다. 이것은 불신자의 표본이다.
도말된 사실은 신자에게 소망이자 용기의 근원이다. 예수님께서 이 소망의 근거를 마련하지 않으셨으면 죄이기기를 포기해야 한다. 죄를 죄로 보고 선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행위가 바로 죄를 버리려는 행위다. 따라가진다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걸 거부하면서 죄를 즐기려는 자가 불신자다.
6 난 예수님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
니가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다 알아서 하는 것이다(말 많아지겠구만ㅋㅋ).
성령께서 다 알아서 하시는데 내 안에서 하신다. 옆에 있는 개똥이가 아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것이다.
7 왜냐하면 성령께서 예수님을 사랑하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또한 마지막 니 말은 참 개념 없는 말이다. 성령이고 예수님이고 다 너를 위해 존재하니...???
예수님과 성령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헤세드시다. 그래서 나를 도우신다.
결론 : 니가 살기 위해 사역하니까 글이 점점 더 니 중심으로 돌아가는구나!! 성도는 예수님만 예기하면서 산다. 글 참 개념 없게 썼구나!! 이글은 니가 죄의 본질 가운데 있다고 증거하는 글이며 니가 항상 예기했던 니 정체성을 집중적으로 표현하고 요약한 글이다
결론: 나에게 있어서 사역은 사역일 뿐이다. 내 중심으로 돌아가봐야 별 볼일 없다. 무엇이 내 중심이고 예수님 중심인지 분별하려는 작업은 평생 인간이 해야 할 과제다. 형은 벌써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것은 마치 교만의 비비탄 총으로 사람들을 쏴대는 행위다. 난 죄의 본질 가운데 증거하고 있다고 분명 말했다. 그래서 난 예수님만 얘기했다. 형이 그렇게 안 보이는 것은 한 가지 틀만 있어서 그렇다.
이근호 목사님은 형이 가지고 있는 한 가지 틀만 소개한 분이 아니다. 그 분은 폭넓다. 계속해서 공부할 때 한 가지 틀만 가지고 나머지 전부를 담아내려는 것은 어리석은 공부다. 공부함으로 삶속에서 공부를 느껴야 한다. 난 끊임없이 죄를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삶속에서 느끼는 공부다.
④ 3번 덧글
1) ㅋ 내가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내가 니 비유의 본질처럼 엄청 교만한 넘이다...ㅋㅋ 그리고 내가 그럼 내 한 가지 틀만 가지고 있지.. 두 가지 틀 가지고 있냐?? 그리고 이근호는 한 가지 틀 즉 예수님만 얘기하는 사람이다. 이 틀을 얘기하기 위해서 한 가지 틀 즉 세상의 틀, 죄의 틀을 끄집어 내는 것이다.ㅋㅋ 2006/03/25
2) 윗 글을 읽어보니까 너는 죄가 뭔지 모르네.. 그걸 니가 주께 미안해서 이기려해본다구ㅋ 하나님은 너로 죄를 이길 수 없도록 하셨네요 죄를 모르면 자신을 모르게 되있고 자신을 모르면 예수님도 모르는 거지 그러면 모든 사역적 말이 종교사기밖에 더 되냐... 인정하는 것이 자신의 죄를 아는 거지요??...ㅋㅋㅋ 2006/03/25
3) 글구 자꾸 공부 공부 하고 자꾸 나는 죄 안 지을꺼야 죄 안지을꺼야 하는데, 웃긴다. 내 주변엔 나보다 감각 좋다는 넘들이 많은데 니두 그 부류지, 감각이 뭐 있냐? 성도는 운명 공동체다. 공부, 죄 안 짖는 거론 절대 안 된다. 니를 포함해 내 친구들이 참 예수님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것을 안 지는 하루 이틀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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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지라르'의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처럼 떨어진다를 읽고-곽진계
이장우 2006-04-05 09:38:39, 조회 : 97, 추천 : 2
저희 교회 홈페이지에 올려진 글을 함께 나누고자 올립니다. -이장우
르네 지라르의 이 책을 읽은 지는 한 달이 지났지만 그동안 개인적으로 바빠 서평을 작성하지 못하고, 오늘에야 서평을 작성하는군요. 그래도 3월달 안에 작성하여 그나마 다행입니다.
저는 지라르의 이 책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지라르 저작들의 결론과 같은 입장에 위치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책들은 읽지 않았지만, 핵심 주장들을 먼저 요약을 한 후 이 책에 대해서도 진행을 해보 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저서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로서 소설 속의 인물들을 대상으로 인간 욕망의 구조를 밝혀내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향해서 자발적으로 욕망한다는 자율적 욕망을 믿는 것은 ‘낭만적 거짓’이며, 타인이라는 모델(중개자)의 욕망을 모방하는 타율적인 욕망, 즉 모방 욕망임을 인정하는 것이 ‘소설적 진실’이라는 것이 결론입니다(243 페이지).
첫 번째 저서에서 인간의 욕망이 모방욕망임을 밝혀낸 지라르는 두 번째 저서인 “폭력과 성스러움”이라는 책을 통해, 인간 욕망의 모방 대상인 모델이 가까운 동료(짝패)가 될 때, 이 동료들 사이에는 선망과 질투, 증오 등의 감정이 생겨나고 갈등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폭력의 씨앗이 된다고 합니다. 이 폭력은 상호 폭력으로 인류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아주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개인들 사이의 차이가 사라지는 무차별 상태에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이어지고,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사회를 유지시킬 것인가 하는 의문이 발생하는데,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희생양 메커니즘’이라는 것입니다.
희생양 메커니즘은 사회가 무차별적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위기의 책임자로 한 사람을 지목하여 사회의 상호적 폭력을 그에게로 집중시킴으로써 다시 평화를 회복하는 메커니즘입니다. 모방적인 상호 폭력을 피하기 위해 인류가 만들어낸 일종의 방책이 희생양 메커니즘인데, 세계 도처의 인류학적 자료와 신화, 민담 등을 통해 이 메커니즘의 존재를 입증해 보이고 있습니다.
세 번째 저서인 “희생양”에서는 희생양 메커니즘의 규칙성을 밝혀내려고 하면서 인간 문화의 근본 구조를 드러내는데, 그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문화의 근저에는 집단 구성원의 만장일치적 폭력인 박해와 살해가 있고, 이 집단 살해를 전해주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을 지라르는 ‘박해의 텍스트’라고 부르며, 역사적인 기록이나 민담, 신화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나타나는데 이런 기록들은 모두 그 집단 살해 ‘이후에’ 기록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집단살해에 성공한 살해자들의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살해당한 자들의 입장은 완전히 배제되어 진실을 왜곡하였다는 것이지요. 세 번째 저서에서 희생양 메커니즘이 통용될 수 있는 구체적인 환경과 과정을 여러 신화와 문헌 속에서 찾아내면서, 거기에 성경이라는 기독교의 텍스트로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도 하나의 희생양의 죽음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서론이고, 지라르 책들의 요약입니다. 너무 길었죠? 본론은 더 길어 질 것 같은데, 일단 나가봅시다. 지라르의 네 번째 저서인 이 책에서는, 신화와 성경을 상세하게 상호 비교하면서 ‘희생양 메커니즘’에 대한 그 차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즉 신화적 텍스트(아폴로니우스 신화)는 집단폭력의 희생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즉, 죄를 지어서 그 집단에 의해 살해를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텍스트는 집단폭력의 희생자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즉, 무고하게 살해를 당하고 고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신화의 해석은 환상이고 거짓이며, 성경의 해석이 정확하고 진실이라고 하면서 기독교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화와 성경의 기록이 실제 일어난 일로 해석을 합니다.
신화적 해석이 어려운 이유는 그 사회 자체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는 신화의 기록자 자신이 신화적 폭력 뒤에 있는 군중 현상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데, 이러한 신화적 사회는 폭력에 전염되어 과도하게 모방에 빠져들어 그들의 희생물이 죄가 있고, 그래서 그로 인해 자신들이 다시 화해한다고 믿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화해로 인해 희생물은 최종적으로 찾아온 평화를 가져다준 존재로 떠받들어져서 신격화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만이 이런 환상을 극복할 수 있는데, 성서를 쓴 사람들이 이러한 환상을 극복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자들은 처음에는 신화와 유사한 모방 전염에 빠져 다른 군중들처럼 정신을 못차리다가 나중에는 특이한 경험을 통해 모방 전염을 넘어서서 희생물이 무고하다는 것을 알아보게 된다고 합니다. 그 예로 구약에서는 요셉이 있고, 신약에서는 베드로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 지라르의 두 번째로 중요한 개념은 사탄을 인간의 이러한 ‘모방욕망’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구약의 십계명 중 열 번째 계명은 이러한 인간의 모방욕망을 금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들은 날 때부터 이웃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욕망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인간 집단 가운데는 아주 강한 경쟁적 갈등의 성향이 있고, 이것을 제어하지 못하면 위기나 폭력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웃이 우리 욕망의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자가 주장하는 사탄의 실체를 인용해보겠습니다. “거기서 거짓을 끌어내오는 악마의 ‘정수’는 바로 실체가 하나도 없는 강렬한 모방일 뿐이다. 악마에게는 고정된 기초가 없으며 ‘존재’는 더더욱 없다. 자신이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악마는 신의 피조물에 붙어서 기생해야 한다. 이렇듯 악마는 완전히 모방적인 존재라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61 페이지)
저자는, 신약으로 와서 예수 자신도 이러한 인간의 모방욕망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금지하기 보다는 대상을 바꾸어 모방하라고 이야기하였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항상 금지의 언어가 아닌 모방하는 모델의 언어로 자신을 모방하라고 이야기하였는데, 그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모방 경쟁을 피하게 하려는 생각에서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를 욕망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의 삶이나 방식이나 습관을 모방하라는 뜻은 아니고, 금욕법칙도 아니며, 그것은 예수가 욕망하는 것, 즉 그 자신의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욕망은 무엇입니까? 가능한 한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는다는 목표로 그를 인도하는 정신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아버지를 모방하는데 온 힘을 바치고, 우리에게 그를 모방하라고 권하는 것은 결국 예수의 모방을 모방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대략적으로 책에 대한 소개를 하였는데, 다른 중요한 내용들도 많이 있지만 이것으로 정리를 하고, 그러면 이 책에 대한 평을 간략하게 해보겠습니다. 장점 먼저 이야기하면, 지라르는 이 책에서뿐만 아니라 이전 책에서도 인간의 욕망은 모방욕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평생을 걸쳐 이에 대한 신화, 민담, 성경 등을 분석하면서 입증하려고 애를 썼는데, 아주 탁월하고도 정확하게 인간의 욕망의 구조를 밝혀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깊이 공감하고 있고, 이런 시각으로 사물을 보거나 현상을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다른 장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무고하다는 것을 인류학적으로 옹호하였다는 것입니다. 죄가 없지만 당시 이스라엘 군중들의 모방욕망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을 당하였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의 모방을 모방하라는 충고는 깊이 새겨 들을만합니다. 현실 교회의 목사보다도 더 은혜적이기까지 하구요.
그러면, 지라르의 문제점은 없느냐? 제가 보기에 먼저 사탄을 실체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바로는 모방욕망이 사탄이 아니라 사탄이 인간의 배후에서 이러한 모방욕망을 충동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기록도 사탄을 실체로 보고 있구요.
다른 문제점은 기독교를 옹호한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무고한 희생을 강조합니다만 이것을 신화의 해석과 비교하다보니, 너무 수동적으로만 파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희생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였고, 예수 그리스도가 능동적으로 걸어간 길이라는 것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구약의 창세기에서부터 예언되어 요한계시록에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주제입니다.
손 목사님의 권유로 책을 읽으면서 많은 유익을 얻었습니다. 앞으로도 책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면 사정이 허 락하는 한 동참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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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해석문제?
이장우 2006-04-05 09:40:45, 조회 : 167, 추천 : 3
이글도 곽진계 집사님의 직장 내부퉁신만에 올려진 글입니다. 직장은 내용 중에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장우
현재 기독교에 대해서 발언,토론란이 뜨거운데, 계속 지켜만 보고 있자니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오해할 것 같아서 이렇게 자판(?)을 들었습니다.
진 계장님이나 강 계장님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개인적인 선입감에 의하여 생겨난 이해라고 봅니다. 본인들의 개인적인 체험(강 계장님)이나, 형성된 자아가 바탕이 되어서 그런 정보만을 취합(진 계장님)하여 기독교를 전파하거나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원래 언어라는 속성 자체가 해석을 하기가 참으로 난해합니다. 여러분들은 상대방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던가요? 하물며, 성경은 3,000년 전부터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이것을 정확하게 해석하기란 참으로 힘들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굳이 현대언어학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할 필요성이 있겠습니다. 먼저 소쉬르는, 언어는 ‘자의적’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말은 중요한데, 소쉬르 이전까지 언어를 어떻게 파악하였느냐 하면 모든 언어는 그것에 지칭되는 사물과 유사하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즉, 모든 언어는 거기에 맞는 사물이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소쉬르는, 언어는 사물하고 유사한 것이 아니라, 사물하고 단어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자의적)는 것입니다. 단지 그 단어는 다른 단어와의 차이성만 나타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변별성이라고 합니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운 내용일 텐데 너무 어렵나요? 일단 넘어가겠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한 발 더 나아가 모든 언어는 ‘활용’(또는 용법)이라고 합니다. 모든 언어의 기능은 그 상황에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뜻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를 언어게임이라고도 표현하였는데, 모든 게임의 규칙은 그 게임에만 해당이 되고, 다른 게임에서는 다른 규칙이 적용되는 것과 같습니다. 바둑의 룰이 틀리고, 체스의 룰이 틀립니다. 바둑의 룰을 체스에 적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같은 단어라도 그 단어가 쓰여진 상황에 따라서 그 뜻이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서론이 너무 긴데, 한마디만 더하고 가겠습니다. ‘들뢰즈’라는 철학자는 모든 ‘언어는 명령어’라고 주장을 합니다. 즉, 모든 언어는 화자(말하는 자)의 의지가 담겨있다는 것이지요. 제가 피의자에게 ‘무엇을 훔친 사실이 있는가요?’라고 물었을 때, 이 말은 ‘너, 빨리 자백 안하고 뭐해? 빨리 자백해!’라는 명령이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명령어든, 서술어든 똑 같고, 숫자나 공식들도 명령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1+1=2’라고 했을 때, 1 더하기 1은 2가 아니라고 하는 놈들은 이 수학의 세계에 발디딜 자격이 없는 놈이기 때문에, 넌 빠져! 라는 명령이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언어학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그러나 언어의 문제는 현대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수적이고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곰곰이 생각을 해보세요. 그리고 우리의 직업 자체가 기록과 싸우는 것이요, 사건의 당사자들과 대면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필요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라캉’이라는 정신분석학자는 아예 우리의 무의식 자체가 언어에 의해서 제약을 받는다고 합니다. 언어가 우리의 무의식까지도 조작을 한다는 것이지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진 계장님께서 이야기하는 성경의 모순점들을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 것인가? 우선 이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성경의 정경성 자체를 문제삼거나 조작되었다고 이야기를 하게 되면, 여기에 대해서는 끝없는 논쟁만 계속될 뿐입니다. 성경의 정경성을 인정하는 측에서는, 역시 역사적인 기록 및 성경의 자증성을 통해서 입증이 된다고 하고, 성경의 정경성 및 기독교를 부인하는 측에서는, 성경의 자증성은 성경 자체가 입증이 안되기 때문에 증거로서 효력을 상실하였고, 그러면 역사적인 기록만을 가지고 이야기하자고 하면서, 역사적인 기록 자체가 성경의 정경성 및 사실성을 부인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역사적인 기록인데, 이 또한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가 문제됩니다. 각 측에서 선입감을 가지고, 거기에 맞는 역사적인 자료들만을 취합하여 증거로 제시하는데, 그러면 이 역사적인 기록은, 진실인지 누가 담보하느냐는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사실 중세 때는 역사의 기록이 조작되기도 하였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이렇게 성경의 정경성 자체를 문제 삼으면 성경의 내용에 대한 더 이상의 진전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양 측의 ‘믿음의 문제’로 귀결하게 되니까요. 이를 인정할 때 두 번째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내용 중에서 왜 이렇게 모순된 진술이 많은가?의 문제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진정한 성경의 해석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먼저, 아까 언어에 대해서 말씀드린 대로 성경의 해석도 언어의 해석문제가 연관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의 천지창조 문제가 있다고 합시다. 진 계장님 말씀대로 1장과 2장의 모순점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면 도무지 믿지 못할, 이해하지 못할 성경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황을 알아야만 성경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해하라고 주어진 책이 성경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기 때문에 계시로 주어진 것입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누구입니까? 하나님? 물론 맞는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아서 썼는데, 모세오경 중에 첫 번째 책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이 책을 쓰게 된 상황은 어떠한가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땅에 들여보내기 위해 모세를 선택하여, 강퍅하기만 한 애굽왕 바로의 장자를 죽이면서까지 하면서 결국 출애굽시켜, 광야를 걸쳐 가나안땅을 향하여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넌지 3일 만에 물없다, 양식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가나안땅으로 인도하겠다는 그 약속을 믿지 못하여, 20세 이상의 남자는 광야에서 죽어야만 하였고, 모세도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라만 보다가 광야에서 죽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쓰여진 책이 모세오경이고, 창세기입니다.
“왜 너희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느냐? 여호와 하나님은 종살이하던 너희들을 애굽땅에서 구원하여 광야를 거쳐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너희를 선택한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하나님이 여호와다”라는 것입니다. 즉, 이런 배경하에서 창세기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세기의 내용은 전혀 다른 의미가 됩니다. 현대인과 고대인은 사고의 틀 자체가 틀립니다. 시대상황이 전혀 틀리다는 말입니다. 과학적인 내용을 입증하려고 창세기가 서술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궁금한 것을 해결하려고 창세기가 기록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선택한 하나님은-당시 수많은 신들(하나님) 중에서-천지를 창조한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 말씀들이 전혀 모순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은 우리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정보를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이 있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은, 구약(옛언약)에서는 여호와이고, 신약(새언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진 계장님 말씀대로 여호와는 유대인의 민족신입니다. 그러나 그 여호와가 이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것입니다. 창조의 순서가 틀리다고요? 그러면 시편에서는 하나님이 이 천지를 ‘손가락’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이 표현도 틀린가요?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까요? 진 계장님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가나안 민족(어린 아이 포함)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셨겠는가?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인데, 이것은 대표적으로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신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맞는데, 그 대상이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나 사랑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즉, 선택된 사람만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민족은 선택된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걸림돌이 되는데, 그러면 선택의 기준은 하나님 마음대로이지 않느냐? 불공평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죄를 지어 피조물로서의 권리를 상실하였습니다. 이 부분을 인정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좀더 나가, 그러면 왜 가나안 민족이 진멸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해봅시다. 노아홍수 이후에 노아가 술에 취하여 옷을 벗은 채 잠을 자고 있었는데, 이것을 노아의 아들인 함이 보고는 셈과 야벳에게 고자질을 합니다. 즉, 노아의 수치를 들어냅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덮을 것을 가지고가 노아의 수치를 가리워주었고, 노아가 잠에서 깬 후 이를 알고 함과 가나안(함의 아들)을 저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함과 가나안은 하나님의 덮어줌의 은혜를 잊었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로 노아의 홍수에서 살아났는데도 그 은혜성을 잊었기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사실 현대교회도 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언약에 대해서 설교하는 목사님들을 거의 보지 못하였습니다. 약 20-30년 전의 한국 교회 상황하고는 전혀 틀립니다. 교인들이 기복신앙에 사로잡혀 있으니, 목사들이 하나님의 선택, 언약, 은혜에 대해서 이야기하여 보아야 교인들이 듣지를 않고, 목사들도 관심이 성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으니 이 또한 문제입니다. 오직 내세에서도 천국가기를 소망하고, 현세에서도 복받아 살기를 바라고,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이 진정 무엇을 증거하는가? 성경이 정말 그러한가? 상고하지도 않습니다. 복도 무엇이 진정한 복인지 모릅니다.
어떤 교인들은 개인적인 체험을 내세웁니다. 강 계장님이 대표적인 경우 같은데, 나 성령받았다는 것입니다. 체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물밀듯이 나에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황홀경이지요. 그러나 성령의 역사가 정말 그러한가? 진지하게 성경을 연구해보신 적이 있는가요? 진정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이 부분은 사도행전에 보면 잘나와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감화,감동시키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받으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우리를 책망한다고, 요한복음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구약의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을 따라 하신 일들이, 이제 신약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고, 완성을 하셨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이 성령을 받아 증거한 내용과 베드로나 바울이 증거한 내용을 읽어 보셨나요? 전부 그런 내용들로 가득 찼습니다. 성령받은 그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으면 무엇을 증거하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나(예수)에 대해서 증거한다고 요한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구약의 모든 율법과 제도, 언약은 그림자이고 모형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실체라고 성경의 모든 내용들이 이것으로 수 놓고 있습니다.
복음은 혁명적입니다. 사회적으로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복음(해방신학)이라서 혁명적인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엄청난 일이 이 현실세계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뭐냐? 구약의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여 제사장나라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이들이 실패하자 직접 하나님이 아들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직접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예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만 불렀으나 신약에서는 이방인들도 복음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의인을 부르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나 저나 위로를 받고 희망도 보이는 것입니다.
제가 다소 흥분한 것 같은데, 진정을 하고 이제 정리를 해봅시다. 진 계장님이 이야기하는 성경의 모순점에 대해서는, 현대인들이나 그것이 모순되다고 생각하지, 옛날 사람들(고대, 중세, 근대 포함)은 모순되다고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성경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쓰여진 책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래 기독교를 옹호하는 학문을 변증학이라고 하는데, 그런 책들은 시중에 많이 있으니 궁금하시면 그런 책들을 읽어보세요. 그리고 강 계장님은 기독교를 옹호한다고 올리는 글들이 기독교를 오해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체험은 자중하시고, 복음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대상이 본인이 맞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심이 어떨런지요?
제가 이 글을 쓴다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것 같으나, 현재의 논의에 대해서 심히 유감으로 생각하여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관심이 없으신 분들은 널리 양해를 해주시길 바라면서....
2006-04-04 17:49:55 / 203.24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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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고마워서 퍼갑니다.(화평낙서장으로)
구자근 2006-04-08 11:42:11, 조회 : 101, 추천 : 2
신앙의 열매란 이런 것을 말하는구나... 싶습니다.
철저히 예수님만이 증거되는 삶!
함께 생활해야 되는,
친밀한 관계가 돈이되는 삶의 터전에서,
이렇게 매몰찬 증거가 얼마나 가슴 쿵쾅대는 일(심약한 사람에게)이며, 부담되는 일인지...
물론 그 이상으로 차오르는 주님의 용서의 능력이 덮쳐온 결과이겠지만...
사랑이 놀랍습니다...
그 사랑이 고마워서 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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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우 목사님 교통사고로 입원중
한윤범 2006-04-10 21:07:36, 조회 : 110, 추천 : 2
이천우 목사님이 지난 5일 교통사고로 2주 진단이 나와서
인천 삼산동 연세정형외과의원에 입원중이십니다.
이번주 금요일부터 본교회 사경회가 있어서
좀 무리해서라도 퇴원하시려고 하는데 아직은 유동적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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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천우 목사님 교통사고로 입원중
이근호 2006-04-11 10:08:07, 조회 : 115, 추천 : 3
여건상 문병을 가지 못해서 죄송스럽습니다.
그만한 중에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됩니다.
어서 쾌유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삼상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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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할 수 없는 죽이심
신직수 2006-04-12 00:02:40, 조회 : 104, 추천 : 2
죽이심에 대한 반항이 소용없다는 걸 93년 사고로 압니다.
그 때 왼쪽 머리 뼈에 금가 뇌에 고인 피를 제거한 후 군 면제를 받았습니다.
그 후 올 2월에 제게 가장 소중했던 사람의 사고장소와 똑 같은 장소에서 저도 사고가 났었는데,
제 옆의 차를 가해자 차가 신호위반 후 강력 충돌하면서 저를 쳤지만 많이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그 정도 파워로 저를 쳤으면 제게 가장 소중했던 사람처럼 죽었던 겁니다.
이천우 목사님, 빠른 쾌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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