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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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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존스 목사의 성화론의 문제점] 2005-12-28묻고답하기-

[로이드존스 목사의 성화론의 문제점] 2005-12-28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함평 수련회 교재
이근호 2005-12-28 14:04:18, 조회 : 160, 추천 : 12

다음의 짧은 글을 통해서 베드로전후서를 보는 관점을 점검하는 교재를 사용코자 하니 주체측에서는 인원수대로 복사해서 그날 배분해 주시기 바랍니다.

로이드존스 목사의 성화론의 문제점

믿음이라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막상 그 불가능하다는 믿음이 본인에게 들어왔다고 여기는 그 순간부터 인간들은 그 믿음의 ‘블가능한’ 속성을 ‘가능한 속성’인 것처럼 취급한다.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 로이드존스 목사의 성화론을 접해보면 그 이유가 윤곽이 드러난다. 문제는 성경에서 지시하고 요구하는 것을 어떻게하든지 맞추어나가는 것이 성도로서의 의무에 해당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나오는 것은 예수님과 성도 사이의 관계를 나름대로 수립해놓은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을 반영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로이드존스 목사의 예수님과 성도 관계가 어떠한가?

그는 예수님께서 성도에게 ‘영적 근육’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강해 35페이지를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어떤 일을 실천하도록 요구하시기 전에 먼저 사람들이 그것을 실행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 활동을 하기에 앞서 생명이 있어야 하며, 근육이 있어야 하며, 기능과 의욕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상태입니다. 즉 그는 이러한 모든 것을 부여 받았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로이드존스 목사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성도에게 이런 것을 부여하게 된 이유가, 이것을 가지고 우리 성도가 하나님과 같다는 점을 알려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처럼 이 땅을 살라고 거기에 필요한 능력을 성도가 마음껏 사용할 수 있도록 그의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불가능한 믿음의 속성이 이제 인간의 것이 되고 난 뒤부터는 일종의 신처럼 마음먹은 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는 ‘가능한’ 속성을 변해있다. 의지만 있다면 의지의 만족을 채울 수 있는 능력은 이미 성도 안에 대기상태로 들어있다는 것이다. 안할려고 하는 것이 문제이지 하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모든 성경 말씀은 성도의 손에 의해서 성취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불가능이 가능으로 달라질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자.
성도가 처음 믿음을 선물을 받았을 때, 자신의 가능성을 마음껏 믿게 되었다고 여길 수 있을까? 아니다. 도리어 성도는 믿음을 받게 되면 도저히 자신의 능력으로 재현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 자기에게 일어났음을 알게 된다. 즉 ‘믿음의 속성=불가능성’임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성도는 그 뒤로 뭐든지 믿음을 행하게 된다. 믿음으로 행한다는 말은 곧 늘 불가능한 속성을 달고 다닌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믿고 난 뒤, 아내를 만나게 되면 그 아내를 찾아내고 골라낸 것이 자신의 가능성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발생케 하셨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만이 믿음이 속한 기적이 아니라 ‘아내를 만나게 된 것’도 기적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하게 된다.

그런데 로이드존스 목사의 이론에 의하면, 믿음으로 사는 자의 삶은 이런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된다. 즉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은 분명 하나님의 기적으로 된 것이다. 나의 가능성은 전혀 동원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아내를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에게 직접 신이 되라고 넣어주신 그 능력을 활용하려는 취지에서, 나의 의지가 발동이 되었고 나는 이러한 나의 가능성을 주저없이 사용하여 현재의 나의 아내를 얻게 되었다”라는 식이 된다.

얼른 들으면 일리가 있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다음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숫자 1를 여러 번 그려보게 해보자. 만약 10번을 그렸으면 10개의 숫자 1이 그곳에 그려져 있을 것이다. 전부 똑같은 1자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릴 때의 의지가 감정은 한 순간도 동일하게 작용한 적이 없기에 10개의 1자가 다 다른 모습을 띠게 된다.

그렇다면 그 아내를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아내를 사랑하기를 주님이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것처럼 하라고 해서 그런 마음으로 10번이나 아내를 사랑했다면 10번 다 ‘아내 사랑하라’는 말씀에 표준이 될 만한 사랑인가? 10번 다 그러한가? 아니면 그 중의 어느 하나인가? 아니면 그 어느 것도 아닌가?

로이드존스의 주장에 의하면 10번 다 아내 사랑에 해당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본인이 ‘아내 사랑’이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이 주신 사랑을 능력을 활용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로이드존스 목사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축약되는데, 즉 “내가 주의 법을 지키고자 하는 그 마음만 있다는 조건으로서도 얼마든지 신의 법을 신의 입장에서 성취한 셈이 된다”고 말이다.

(이 지점에는 칸트의 윤리적 실천 이성론과 연관한 강의가 삽일 될 것입니다. 즉 인간은 완전한 선을 행할 수는 없으나 선을 향한 선한 의지가 있는 것으로 신의 품성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는 주장 )

이렇게 되면 똑같은 ‘아내 사랑’이 안 나와도 무방하다. 심지어 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성도에게 더 이상 ‘불가능한 기적’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자기 선에서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무슨 성경 구절을 코 앞에 갔다대어도 모두다 성도 앞에서는 다 성사가능한 일이 된다.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을 지키겠노라고 선한 마음만 먹어도 이미 그 말씀은 성취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로이드존스 목사에게 있어 ‘신같은 성도’의 삶이란 “나는 신이기에 모든 말씀은 내 손으로 다 지켜지게 된다”라는 마음만 먹어도 되는 삶이다. 로이드존스 목사는 이것은 ‘믿음’이라고 말하고 또한 ‘하나님의 약속’이라고도 한다. 이 ‘믿음’과 이 ‘약속’에는 더 이상 그 어떤 인간적인 불가능성이나 기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성도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성취되고 유지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성도는 곧 신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식이 되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더 이상 3위일체로 남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포함시켜서 4위일체가 되어야 할 판이다.

이런 결과가 초래된 것은 100% 기적과 인간적인 불가능성으로 되어진 믿음이 그 다음 단계에서 이 100%가 몽땅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바꿔치기 당한 것이다.(물론 애초부터 진짜 믿음을 받아 본 적이 없기에 이런 발상을 여전히 고수하게 되지만)

‘믿음→ 불가능’이면서도 어떻게 곧장 ‘믿음 생활→가능’으로 전환되는가? 이는 불가능한 믿음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성경책을 직접 보라! 거기에 쉴새없이 많은 지시와 명령들이 쏟아지고 있다. ‘하라’ 혹은 ‘하지 말라’가 성도를 독촉하고 있다. 이러한 명령들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다가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어 이제는 그 명령들을 지키는 쪽으로 나선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동안 전혀 하나님의 명령들을 안 지킨 것이 된다.

즉 무슨 논리인가 하면, 내가 나의 가능성을 믿기 전에는 그 어떤 방식으로도 그 말씀은 나에게 성취지 않는다는 점을 철통같이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동안 불가능성적인 믿음을 참 믿음으로 잠시 유지한 것은 “주님 덕분은 아무 것도 안해도 되는 신나고 편한 삶을 살다”라는 꿍꿍이를 챙겼는데, 성경을 들척이면 들척일수록 도저히 부인 못할 하나님의 엄한 명령과 지시가 주어지니, “이제는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다소 힘들지만 말씀을 내 힘으로 지키는 식으로 나가자” 한 것이다.

이 말은 달리 말해서, 아무 것도 안하고 신앙생활 하느니 차라리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애쓰는 그 방식이 자신의 속성에 되레 부합되고 자신을 편하게 만든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처음부터 전혀 믿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사람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믿음이란 처음부에도 인간적인 불가능성일 뿐만아니라 그 믿는 자 안에서 발생되는 모든 일도 다 불가능적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현재 아내가 있다는 것 자체가 아무리 생각해도 성도 자신의 가능성의 결과라고는 도저히 인정하래야 인정될 수가 없다고 여겨진다면, 현재 아내가 있음을 해명하고 설명하는 길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 발생된 현상이라는 고백 뿐이다. 그렇다면, 기적, 즉 인간의 불가능성이란 처음 예수 믿을 때만 작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아내하고 생활하는 이 평범한 삶에도 여전히 기죽지 않고 맹렬하게 작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불신자들은 성도의 이러한 정황고백에 대해서 비웃고 있겠지만)

그렇다면 그 동안 아내와 있었던 일, 즉 아내가 보따리 싸고 친정으로 도망할 때 붙잡은 일이나, 아니면 아내의 마음을 흐뭇하게 달래기 위해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비싼 식사비를 제공한 것도 모두 성도 본인의 능력으로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불가능한 행위들이 된다.

그런데 로이드존스의 논리에 의하면, 불가능성을 계속 믿는 자는 곧 ‘아무 것도 안하겠다’라는 다짐한 자라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편견이 작동될까? 그것은 자신의 가능성이 발휘되고 폼나는 경우에만 인간은 행동에 옮긴다고 믿는 철학적 사고에 얼굴을 파묻고 살기 때문에 생긴 발상이다.

즉 인간을 지배하는 그 어떤 힘은 따로 있을 수 없고, 인간의 모든 행동은 자신의 결심이 시발점이 되는 것이 분명하다는 논리에 묶여 있으니, 이 논리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는 점을 로이드존스는 도저히 믿고 싶지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외부적 힘이라도 일단 인간 내부에 들어와서 그것이 그 인간의 개별적 소유로 전환되고 난 뒤에만(타인이 전혀 침범할 수 없는 상태에서) 비로소 그 사람 고유의 행위 근거로 작용한다는 주장을 로이드존스 목사는 하고 싶은 것이다.

즉 로이드존스 목사는, 사람의 변화, 성도로의 변화에 대해서 비복음적이고 비성경적인 토대를 고수하고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축구 선수가 10년 동안 프로 경기에 나가 골대만 12번 맞히고 한 번도 골인 시키지 못하고 은퇴했다면 그 사람은 과연 10여 년 동안 그냥 놀았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런데 어떤 축구선수가 비아냥거리면서 말하기를 “나는 지난 프로 경기를 뛰면서 12골이나 넣고 은퇴했다, 그래서 나는 너보다 지난 10년 간 열심히 살았다”라고 했다면 사실 이 축구선수가 아직도 세상살이를 모르는 사람이다. 위의 두 축구선수가 고백해야 될 복음적 신앙생활은 바로 이것이다. “그동안 살아온 것도 다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고 지난 온 모든 세월이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말이다.

따라서 진정한 신앙생활이란 이 ‘불가능성’을 어떻게 곧 죽어도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 못하겠다고 우기는 아담 속성에서 영글어내느냐가 관권이다. 즉 “이렇게해서 이 말씀을 제 손으로 성취해 내었습니다”라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라 “이렇게하고, 저렇게하면 얼마든지 제 힘으로도 저 정도의 성경 말씀 같으면 쉽게 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한 것 같은데 왜 저는 여전히 불가능성을 고백해야만 하는 존재입니까?”를 물어야 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이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항상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고, 나 자신도 미처 몰랐던 예수님에 대한 적대심을 처음 밝혀낸 분이 바로 주님이었다는 고백이다. 사도 바울처럼 말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으로부터 주님에 대한 적대심을 물러 받았다. 그런데 인간들은 신에 대한 경외심으로 그것을 감추어놓고 있다. 말씀 안에서 각양 명령과 지시가 떨어지자 옳다구나 하고 더욱 더 그 말씀을 지키는데 매진하므로서 자기 속에 있는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더 더 깊은 곳으로 치워놓게 된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안 본다고 뭐라하면, “성경 말씀 지킬 필요 없이 구원시켜준다고 했잖아요. 지킬 필요도 없는 것이라면 꼭 볼 필요도 없는게 아닙니까?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셨잖아요. 이제 와서 딴 소립니까”라고 항의하고, 성경 말씀에 철저하지 않다고 비난하면,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제 속에서 놀라운 성경 성취의 면면들이 발휘되어 주위 사람들에게 큰 영광을 돌릴 겁니다. 지금 애쓰고 있습니다. 지금 애쓰고 있는 것 안 보이십니까? 열심히 살려는 이 마음 자체를 ‘거룩한 삶’이라고 칭해 주세요”라고 변명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자라도 성령이 오게 되면, 바로 불가능성이 튀어나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댐이 터지듯이 전 영역으로 이어진다. 이곳은 곧 자아의 영역에 대한 재난이요 심판이요 함몰이요 파멸이다. 모든 가능성의 영토들이 불가능성에 의해서 점령된다. 어느 한 지점 남김없이 모두가 불가능성으로 뒤덮여진다.

하루 일과 뿐만 아니라 모든 사태에서 본성 속에 묻혀 있는 주님에 대한 적개심이 더 이상 숨을 곳을 찾지 못하고 표면으로 숨을 내쉬면서 돌출된다. “맞습니다. 죄인은 바로 저였군요! 이 세상에 제일 예수님을 싫어하는 자가 바로 저였습니다.”라는 고백을 쏟아놓는다.

이런 고백들의 나열이 성도의 일평생 신앙적 삶이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늘 이런 불가능성의 열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은 자신의 성취를 위해 오늘날 성령에 의해서 성도에게 작렬된다. “이번에도 또 무얼 숨기냐? 거룩한 말씀으로 그 적개심을 찾아내봐”하는 취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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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은 경우도 변명이 가능한 한국 기독교계
이근호 2005-12-30 10:25:22, 조회 : 163, 추천 : 13

80대 노부부가 노인복지센터 설립을 위해 무상증여한 부지를 무단으로 교회 설립에 사용했던 한 현직 목사의 파렴치한 행태가 속속 밝져지고 있다.

28일 전북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관계자와 장애인들에 따르면 전주 삼천동 H교회 신모 목사(52)는 지난해 교회 신축공사 과정에서 지체장애 3급인 K모씨(30) 등 장애인 10여명을 현장에 동원한 뒤 2개월간 잡일을 시키고 인건비 600만원을 편취했다.

장애인들은 “신목사가 몸 안에 있는 귀신을 잡아준다고 선전해 혹시나 하고 교회를 찾았으나 치료는 커녕 남성 장애인은 교회 공사현장에서 잡일을, 여성 장애인에게는 식당에서 설거지와 마늘까기 등 일만 시켰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심지어 식당에서 손님들이 남기고간 상한 음식를 얻어와 이를 먹은 일부 장애인이 두드러기 등 피부병에 시달렸고, 한겨울에 야간공사를 한다며 밤늦게까지 강제로 일을 시켰다”고 말했다.

정신지체 2급인 L씨(여·30)는 “식당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수백만원의 합의금을 받았으나 교통비 10만원을 제외한 합의금 모두를 신 목사가 가져갔다”고 주장했다.

교회 이웃주민도 신 목사의 비위 사실을 공개했다.

교회 이웃집에 사는 K씨(여·51)에 따르면 K씨 가족은 지난 2001년 5월말 전주 삼천동 H교회 바로 옆으로 이사왔다. 첫 집장만인 K씨는 집앞 도로가 당연히 통행로인줄 알았다. 하지만 신 목사는 통행로가 자신의 땅이라며 교회를 지었고, K씨는 지적도를 확인한 결과 통행로 소유주가 신 목사인 것을 확인했다.

이후 신 목사는 평당 100원선에 거래되는 땅을 평당 500만원에 팔겠다고 제안했지만 이를 K씨 가족은 거부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신 목사는 통행로에 콘테이너 가설물을 설치하거나 자동차를 주차시켜 놓는 방법으로 K씨 가족의 통행을 방해했고, K씨가 깔아놓은 자갈도 무단으로 교회 공사에 사용했다.

사정이 이렇자 K씨는 주위토지통행권확인 등으로 신 목사를 고소했고, 법원은 지난해 4월 “신 목사는 1,400여만원과 변제까지 연 20%의 이자를 K씨에게 지급하라”며 K씨의 손을 들어줬다.

신 목사는 법원에 판결에 불복, 빚을 변제하지 않고 있다.

결국 K씨는 신 목사가 명의이전한 땅을 제3자를 통해 통행로 부분 땅을 구입했다.

K씨는 “지적도를 확인해 보지 않고 집을 구입한 것은 잘못이지만 신 목사는 무작정 자신 땅이라며 조직폭력배를 동원, 심한 욕설과 함께 신체적 위협을 가했다”며 “3년간의 재판과정에서 남편(56)은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한쪽 눈을 실명했으며 2,500여만원의 재산피해를 입었지만 신 목사는 한마디 사과조차 없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한편 신 목사는 80대 노부부가 노인복지센터 건립을 위해 무상증여한 땅을 편취한 혐의로 경찰에 고소됐지만, 새전북신문 보도 이후 자취를 감췄다.

가상해 볼 수 있는 변명

1. 믿음 출충한 주의 사자는 초대교회의 기적을 재현 할 수 있다.
내가 귀신을 쫓아낸다면 쫓아낼 수 있다. 과거 그런 전력도 있다. 주의 사자인 내가 귀신을 쫓아낸다는데 있어 믿음 없는 것들이 왜 왈가왈부 말이 많으냐

2. 주님이 이 세상에 버림받은 자를 위해 희생하셨다. 따라서 주의 사자인 내가 예수님을 본받아 아골골짜기 같은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장애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겠다는데 , 교만한 너희들이 왜 간섭이냐.

3. 장애자에게 일을 시키는데 장애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아를 찾아주기 위한 치료기술의 일종이다.
스스로 노동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주의 성전을 지어드리면, 스스로 이 땅에서 쓸모없는 자라고 자부했던 장애자들이 얼마나 생을 보람을 갖겠는가. 그래서 일부로 노동을 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주의 일을 하는 보람을 찾아주는 것이 그 장애자들의 의식을 깨우치는데 참으로 도움되는 일이다. 그런데 왜 이런 깊은 뜻도 모르는 인간들이 노동착취로 보느냐

4. 주의 일을 하는데는 어디든지 마귀가 들끓게 마련이다. 교회 지으면 자기 집값 내려간다고 돈만 사랑하는 이 악마의 자식들이 주의 성전 짓는 것을 방해해서 함부로 이야기한 것을 왜 지방 언론이 나서서 편승하는가? 한 쪽 말만 들어서는 아니된다. 말로 안듣고 무조건 방해하는 자들은 그들이 납득이 되는 방법, 즉 완력으로 다스릴 수 밖에 없다.

아, 정말 빛과 소금의 일을 하는데 이토록 악마들이 방해하는구나.

결론 : 교인들이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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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 해가 저무는 날에
이미아 2006-01-01 00:40:57, 조회 : 176, 추천 : 12

2005년은 최고의 한 해 였습니다.
이근호 목사님을 만나서 기뻤고 정판옥 목사님 서경수 목사님 그리고 노회 목사님들을 만나서 기뻤습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 오시는 날이면 교회의 축제라고 말씀하신 의존교회 목사님 감사합니다.
노회문제로 고민 하시고 기도하시던 중에 이근호 목사님을 만나게 되어서 지금까지 전해 오시던 복음과 딱 맞아
떨어진 (속된 표현을 이해해 주시길) 그 기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으셨습니다.
가장 먼저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으로 인하여 그리고 목회자 덕분으로 인해 의존교회 성도들은 살게 되었습니다.
살 영혼을 죽게 만들고 죽을 영혼을 살게 만드는 이 어둠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를 맛보는 영혼들이 된 것입니다.
이쯤되서야 십자가의 실체에 대해서 눈이 뜨게 되었습니다.
이근호 목사님 이번주 동영상 설교를 들으며 마음이 무척이나 아팠습니다. 감기가 심하게 걸리셨는데 하루 빨리 회복되
시기를 바랍니다. 의존교회 목사님께서도 감기로 고생 하시는데 잘 드시는 모습을 보고 싶으니 예전으로 돌아와 주세요.
이미 저물어 버린 한 해가 되었습니다. 이근호 목사님 2006년도에도 변함없이 의존교회 사경회에 오셔 주시리라 믿습니다.
한 해를 그냥 넘길 수 없게 하신 하나님의 그 선택적인 사랑에 감격하여 메시지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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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힌 해가 저무는 날에
이근호 2006-01-01 08:49:07, 조회 : 167, 추천 : 12

몸이 믾이 좋아졌습니다.

산책도 합니다.

교회사 강의 때문에 애를 많이 섰더니만 그렇게 되었습니다.

의존교회에서 강의할 수 있도록 여건을 허락하시고 도와주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새로운 해란 사실 없습니다.

묵은 해도 없습니다.

있다고 한다면, 늙어가는 몸체 뿐이요,

세월을 거역하고 싶은 인간의 반발심 뿐입니다.

그러나

담 너머 몰래 미군부대를 훔쳐보던 어릴적 호기심으로

세월이 모두 종료되고 난 뒤,

지옥이라는 수용소에서 널부러져 있는 군상들의 고통소리를 상상하면서

한 사람이라도 더 건져보겠다고

십자가 복음을 담너머 던져봅니다.

아직 때가 이르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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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힌 해가 저무는 날에
신직수 2006-01-01 18:42:57, 조회 : 131, 추천 : 11

강의하시느라 수고하신 이근호 목사님과

성실하게 녹취해주시는 여러 목사님들의 봉사에 감사에 감사드립니다.

한가지 더 전 감기 최 초기에 지체하지 않고 약 먹어 확실히 날렸습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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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한 해가 저무는 날에
정판옥 (Homepage) 2006-01-02 10:16:58, 조회 : 115, 추천 : 8

이제야 숨은 그림(이미아)을 찾았네요.
아직도 약간은 숨은 그림으로 남아 있지만...
암튼 너무 반갑습니다.
올 한해도 주님의 이끄심에 평안으로 인한 고마움만이 이어지길 소원합니다.

신직수 전도사님께도 인사드려요.
그리고 십자가 마을을 방문하시는 모든 분들께도 인사를 드립니다.
올해는 어떤 분들과 글과 만남을 통해서 교제하게 하실런지 설레는 마음으로
열심히 마우스를 움직여 볼렵니다.

다음 주 수련회에 뵙겠습니다.
참! 수련회 준비하시느라 수고하시는 오 목사님과 여러 성도님들께도
그 수고의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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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마을 겨울 수련회를 마치고
오용익 2006-01-11 19:13:32, 조회 : 173, 추천 : 6

<삼천년의 삼일?>

함평은 폭설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채 연일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래서 시골풍경이 제법 운치가 있었을 법 하다. 그래도 자기집만 했겠는가? 이모저모 불편했을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서목사님과 아들 정익이는 배탈과 복통으로 적지 않게 곤욕을 치렀다. 나는 자주 서목사님에게서 예수의 자취를 본다. 그의 가족이 망가진 이번에도 그랬다. 약올라 하지는 말기 바란다. 나도 그렇게 되기를 소원하니까. 물론 2초를 넘기지 않지만).

얼떨결에(십자가의 우발적 능력이라는 뜻으로) 모임을 섬기는 큰언니노릇을 떠맡게 된 우인숙 집사님을 빼놓고 나면 함평사람 이라곤 없었으니 다들 나그네인 셈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되달려간 대구, 울산, 부산, 양산, 창원, 대전, 서울, 안산, 시흥, 광주, 곡성, 무안, 목포, 해남등등이 그들의 뿌리일 것인가? 미래를 설계하고 그래서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터전으로서 말이다.

첫째부터 열네번째 강의까지 복음의 신기한 능력이 들여다보이도록 열강하신 이근호목사님!(그의 신체가 허물어지는 약간의 조짐들을 보면서 걱정하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강의할 때 뵈면 목사님이 천년은 족히 살 것 같은데. 복음 때문이라면 그렇게도 살아봄직 하지 않은가?)

“대자연의 안정성을 담보삼아 미래를 설계하기를 꾀하는 교회내에서 주님은 끊임없이 심판을 감행하신다.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 속죄의 공로외에 어떤 인간의 공로도 섞이기를 원치 않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누가 나의 나됨을 스스로 지우고 속죄의 완전성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있겠는가? 예정된 코스를 따라 하나님의 선택으로 부름받은 은혜의 사람들뿐이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의 영인 성령 안에서, 예수님이 이루신 속죄의 완성인 십자가가 몰고 오는 두가지 효력 - 선과 악으로 균열된 자아 그 자체가 죄임을 밝히사 속죄의 대상으로 규정함과, 그 죄를 완벽하게 덮는 속죄의 완성으로서의 사랑 - 으로 인하여 성도는 십자가에 그 생명의 뿌리가 콕 박혀, 베드로 사도가 증거하는 주의 계시대로 불의 심판에 가두어진 이 세상에서 쑥- 뿌리가 뽑히운채 버려지고 지워지는 나그네가 된다. 십자가만 자랑하는!” ( 강의 중에서)

피뿌림을 받은 흩어진 나그네, 천년을 하루 같이, 하루를 천년같이, 형제, 자매님들 모두 사랑합니다.

광주,전남 성경공부 모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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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님 신문 칼럼 (퍼온 글)
백흥진 2006-01-12 12:07:42, 조회 : 272, 추천 : 7

-사랑의 편지 -

예수님과 희생양

이 근 호 목사
(투데이 제천단양신문. 2006. 1. 12일자)

속죄 의식(意識)이란 모든 인류,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들어 있는 심성이다. 자기 양심에 흠집이 난 것은 것은 어떤 식으로도 제거하고 싶은 것이다. 종교들이란, 결국 '죄 의식 처리'를 다루게 되면서 형성된 것들이다.
자신이 속해 있는 그 종교 조직이 민주적으로 운영되는가, 헌금은 합리적으로 쓰여지고 있는 가가 주요 과제가 아니다. 날마다 신도들 마음속에 떠오르는 죄의식에 만족스럽게 제거해 줄 수만 있다면 어지간한 불법은 눈감아 줄 수도 있다는 것이 신도들의 넓은 마음이다.
따라서 신도들은, 자신들이 감추고 있고 또 모르고 있기에 재수 없이 신으로부터 매맞고 있는 점을 교주들이 제대로 파악해서 들추어 내어 주고 또한 그 죄를 씻을 수 있는 인위적 방식만 제 때에 제시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워 한다.
유대교나 기독교의 경우, 속죄에 관한 의식(儀式)은 노골적일 정도도 핵심 분야이다. 유대교에서는 소나 양을 잡아서 죄를 제거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기독교에 와서는 예수라는 분이 자신이 친히 속죄양이 되었기에 그 예수를 믿음으로 죄가 씻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번잡스럽고, 시간 낭비와 비용이 많이 드는 유대교적 방식과는 달리 기독교의 속죄 의식은, 신도들의 간단한 짧은 생각만으로 속죄가 이루어져 버렸다.
이 신앙 고백에 뒤따르는 갖가지 의무들, 예를 들면, 경건한 폼 잡기와 윤리 생활, 엄숙하고 중후한 예배 분위기 유지하기, 교회라는 경제적 단체에 대한 비용 부담, 잡무에 대한 봉사 제공, 성직에 대한 특별 대우와 존경 강요하기 같은 것을 교회측에서 요구하더라도 차라리 자발적으로 해 드리고픈 생각마저 들 정도로 신은 인류에게 너무 간편한 속죄의 길을 열어 준 것으로 받아 드린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 있다. 이러한 생각이 완전히 비복음적이라는데 있다. 자신들의 죄 때문에 억울하게 징벌 받고 박해 당한 그 예수라는 분에 대해서 깊은 동정심과 감사를 드리는 것이 성경적으로 결코 복음이 아니다는 점에 중대한 문제가 있다.
신도들은, 소위 전문 종교인들이 예수님의 희생양 인상을 가지고 얼마나 장사 잇속을 채우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마치 유명 비극영화를 상영해서 관람객을 울려 주고서는 혼자서 휘파람부는 영화관 주인과 같다는 사실을 미처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대중들은 참 예수님의 희생을 정신을 알고 싶어하는?
그들이 과연 예수님이 소개한 그 길을 가고자 하는가? 천만에 말씀. 정말 제대로 십자가와 복음을 소개받았다고 한다면 아마 대중들은 그들이 복음 들은 것을 후회하고 오히려 전에처럼 희생양 영화관에 앉아서 그 영화를 돈주고 관람하는 편이 자기들에게 속 편하다는 사실을 새삼 다짐하게 될 것이다.
예수, 그 예수는 정말 훌륭하고 멋있고 대단한 분이고 위대하고 감동적인 분이기는 하지만 그저 자기 앞에 타인으로만 머물러 주었으면 바랄 뿐인 것이 대중들이다. 그 예수님이 직접 자기 안을 차지해서 자신이 예수처럼 산다는 것을 너무나도 끔찍한 사태라고 그들은 예상하고 있다.
왜냐하면 참 예수님은 너무나 참혹한 삶을 살았기에 철저하게 거부하고 싶은 제 1순위 인물이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그저 인위적인 속죄 방식만 요구한다. "어떻게 하면 죄를 씻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참 예수님은 이렇게 대꾸하신다.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니, 죄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까? 그리고 참으로 그 죄를 미워하고 싶습니까?"
대중들은 이렇다. 죄가 미운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자기를 건드리는 자는 다 미운 것이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요 15:22-23)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을 찌르기 위해서 오셨다.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눅 2:34-35)
참으로 복음을 아는 자는, 예수님에게 고마워하는 자가 아니라 속죄 받고자 하는 자신을 한없이 미워하는 자이다. 속죄는 나의 선택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선택이었다!(요 15:16)
/ 대구 우리교회 담임(053-986-0172.www.woorich.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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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현 장로님의 글(1)
이근호 2006-02-04 19:24:58, 조회 : 171, 추천 : 9

계시의 점진성의 문제

계시(啓示)의 점진성 문제

1.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가톨릭인들과 프로테스탄트들이 받아드리는 계시는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부분이다.

일반계시란 우주와 자연 그리고 인간의 도덕성 및 양심, 또 역사 등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것이며, 특별계시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일반계시를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다음의 성경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인간의 이성(理性)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롬1:19-20)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롬2:12-15)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그러나 특별계시의 입장은 인간의 이성(理性)으로 하나님을 아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며 은혜의 도움 없이는 인간의 죄와 구원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적 계시로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의지의 영원한 작정과 자신을 명시하셨고 교통하시기를 원하셨다. (로마카톨릭주의와 복음주의, Norman L. Geisler, 라은성 옮김, 그리심. 2003. p.44.)

2. 계시의 점진성

특별계시는 구속사에 관한 계시이며, 인류에게 계시의 진리가 전달될 때 본질적 성장은 계시가 그리스도 안에서 최고점과 결론에 이를 때까지 인류사에 계속해서 일어났다고 하였다.(로마카톨릭주의와 복음주의, Norman L. Geisler, 라은성 옮김, 그리심. 2003. p.45)

계시의 점진성의 입장에서 보면 구약과 신약이 구속사가 되어버린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여 구원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의 기록이 된다.

계시의 점진성은 구속사라는 역사를 말해야 하고, 역사는 시간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구원의 3단계라는 발상이 나오게 되며 성화 이론을 주장하게 된다.

이와 같은 발상들은 성령의 역사(役事)를 무시하고 불신에서 나오는 인간의 철학일 따름이다.

3. 계시의 점진성에 대한 비판

다음의 성경구절은 계시의 점진성을 부인하고 있다.

(마3: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요8:56-58)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마22:42-45)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성부)께서 내 주(성자)께 이르시되 내가 네(성자) 원수를 네(성자) 발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행2:25)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상의 성경 구절의 내용에서 B.C. 2000년경의 아브라함과 B.C. 1000년경의 다윗이 영적 세계에서 이미 그리스도의 통치를 보았다는 것이다. 이는 묵시(?示)이지 역사가 아니다. 이 묵시는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에게 보여 졌다. 아브라함과 모세가 그리고 다윗이 보았던 그리스도가 또한 다메섹 도정에서 바울에게 현현하신 부활의 주님이 오늘 우리게도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은 구속사가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그 때 그 때마다 하나님 자신을 선택한 자에게 보여 주시는 묵시의 기록이다.

계시의 점진성이, 감추어졌고 숨겨진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하여 비로소 완전히 자기의 모습을 보여주셨다는 의미는 될 수 있어도 구속사는 될 수 없다. 선택되지 못한 자들에게는 여전히 감추어지고 숨겨진 낯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묵시된 자들에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와 묵시는 어거스틴의 ‘지국과 천국’과의 영적 전쟁과 같이 지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역사적 관점에서 선악과를 보려하고 하나님께서는 묵시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생명과를 보여주신다.

4. 성화론의 발상

교회사는 인간의 허구성을 구축한 것이다.
초대교회는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을 가지고 오랜 세월동안 논쟁을 하다가 드디어 니케아 종교회의(326)와 칼케돈(451)회의에서 신학적 합의를 도출하였다. 그러다가 초대교회의 위대한 한 신학자가 나타난다. 그가 바로 히포의 감독 어거스틴(Augustin, 354-430)이다.
그런데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 540-604) 교황이 주제한 오렌지 종교회의에서 만든 그의 사상이 오늘날에 이르도록 가톨릭 교회의 신학이 되어있다.
어거스틴(Augustin, 354-430)의 원죄와 완전타락설, 은총론과 펠라기우스(Pelaguius, 401-409)의 원죄 부인과 자유의지론을 교모하게 잘 조화시킨 것이 가톨릭의 신학이다.
그의 신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인간은 영육간 완전 타락하였으나
② 자유의지는 타락한 것이 아니다.
③ 공로는 은혜를 앞지르지 못하지만
④ 선한 행위에 대하여는 상급이 있다. 이 행위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⑤ 은혜란 하나님을 추구하려는 노력 즉 선한 의지이다.
⑥ 세례는 죄가 제거되고 신앙이 주입된다. 내적으로는 ‘말씀’을 통하여 선한 의지와 사랑의 의지를 만들어 낸다.
⑦ 죄의 용서: 세례를 통하여 용서를 받지만 세례 후의 죄는 고행을 통하여 용서되며 성자들의 중재(미사)를 통하여 죄를 용서받는다.
⑧ 연옥의 교리(마12:32)

이 가톨릭 신학에서 성화론이 나온다.

1) 성화론

성화론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1:16)
② 인간은 거룩할 수 있다.
③ 인간의 추가적 행위가 없으면 ‘거룩’이 없음으로 거룩 단계가 빠져 구원이 성사될 수 없다.
④ 불가능한 속성을 가능한 속성으로 바꾸어야 한다.
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행위(인간의 가능성)가 즉 신인협동(총체적 행위)에 의해 믿음이 발생하고 구원이 이루어진다.

2) 성화론의 근원

인간에게는 끊임없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이 신이 되고자 작정하였다. 따라서 인간의 이상(理想)대로 신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헬라 철학과 유대교 사상이다.

(1) 헬라 철학의 영향

헬라 철학의 핵심은 인간 중심주의 사상으로서, 인간은 이성적(理性的) 존재로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해 주고 있다.이 사상의 영향으로 기독교는 다음과 같은 사상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의 선물로서 ‘자유의지’를 부여 받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그래서 오늘날 만사형통의 신앙이 여기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2) 유대교의 영향

모세 율법을 철두철미 지키도록 요구하는‘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가 형식주의에 도덕, 윤리 종교가 되어 버렸다.

위 두 사상에 근거하여 안셀무스는 믿음으로 구원되지만 이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또 칸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인간 속에 내재된 것이 이성(理性)이다. 이성을 통하여 순종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설득과 교육을 통하여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헤겔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 하나님의 겸손을 통하여 믿을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성령의 거듭남’의 내용까지도 인간의 능력으로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바탕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누구나 믿을 수 있다.

3) 구원의 3단계

성화론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만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종교에서도 나름대로 자기들의 구원을 말한다.

그런데 대부분 구원의 과정은 3단계로 되어 있다.
불교에서는 계(戒)->정(定)->혜(慧) 의 3단계를 말한다.
악을 다스리고(戒)->덕을 쌓고(定)->경지에 이르면(慧) 그것을 구원에 이르렀다, 경지에 도달했다, 해탈했다고 한다.

유교에서는 입문(入門)->외당(外堂)->허입내실(許入內室)의 3단계이다.

기독교도 구원은 3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그것은 '의인->성화->영화'인데, 쉽게 말하면 "이미 받은 구원->지금 받고 있는 구원->앞으로 받을 구원."이다.

완전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세 번째인 앞으로 받을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

① 이미 받은 구원 - 믿는 즉시 받았던 구원. 세례를 받고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義人이되었음.(요한복음3:36)

② 지금 받고 있는 구원 - 날마다 회개하며 성령을 따라 이루어져가고 있는 점진적인 성화 (빌2:12)

③ 앞으로 받을 구원 - 마지막 날 받을 영광스러운 영화의 구원 (골3:4)

우리의 구원은 이미 끝나버린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지금도 구원되어져 가고 있다.

5. 성화론의 허구성

1) ‘인간은 할 수 있다’의 허구성

인간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는 헬라철학에 대하여, 그리고 인간은 ‘해야한다’는 유대교에 대하여, 성경은 인간은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인간은 죄인(롬3:10-12)이요 피조물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흙으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창3:19)는 말씀에 따라 인간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구원은 하나님 쪽에서 이미 완성하신 것인데 ‘구원 그 이후’의 삶을 운운하면서 성화(聖化) 이론을 말하는 것은 참 웃기는 이야기이다. 구원은 영생의 개념 속에 있는 것이지 시간의 개념 속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의 고백처럼 현실의 삶 속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늘 확인할 수 있는 행복 속에 살아갈 따름이다.(롬7:21-25).

2) 구원의 3단계의 허구성

엡1:4-6에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의 내용을 정리하면

(1) 시간 개념: 창세전으로서 인간의 시간 개념을 초월해 버린다.
(2) 선택된 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되고 선택되었다.
(3) 오직 은혜: 선택(그의 아들들)은 인간의 행위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었다.

따라서 구원의 3단계란 있을 수 없다.

롬8:30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게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구원의 단계성이 아니라 구원의 완결성을 의미한다. 인간 쪽에서 구원을 따낼 그 어떠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쪽에서 예정하시고 선택한 자들을 이미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 인간은 이를 믿고 감사하면서 살면 된다.

빌2:12에,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의 의미는 인간 쪽에서 구원의 완성을 위해 행할 어떠한 요구 조건이 아니라, 신앙공동체에 속한 자로서 이미 구원되었음을 기뻐하고 찬양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라는 것이다.

골3:4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뚜렷한 대망을 의미한다.

3) 이미, 아직

현재진행형으로 지금도 구원되어져 가고 있다. 이 말의 의미가 인간 쪽에서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는 단계로 보아서는 안 된다.
구원은 창조 행위이다. 이 창조의 행위를 하나님 쪽에서 계속하시고 계신다는 의미로서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가시적인 역사 속에 사는 우리 성도에게는, <이미> 구원은 이루어 졌으나, <아직> 주님이 오실 그날 까지 성도의 삶을 통해 십자가를 증거할 의무가 남아 있다.

6. 결론

계시의 점진성이란 사고는 계몽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것으로 결국 인간 이성(理性)에 따라 성서를 해석하자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누구도 인간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 없다(고전12:3).
오늘날 교회는 죄와 십자가가 빠져버린 '종교'가 되어 버렸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 결정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인간의 능력과 긍지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죄(罪)인 것을 모르고 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이다. 베드로는 창세전에 이미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된 자이며, 그의 삶은 주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의 증인으로 사용되고 있을 따름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하면서까지 3번이나 부인한 것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뵌 이후 베드로의 삶도 모두 주님의 소관에 따라 살아 갔다. 성도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구원 이후의 성도들의 현실적 삶까지도 결국은 십자가에 종착되어야 한다.(갈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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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질문있습니다
진재형 2006-02-04 23:41:34, 조회 : 130, 추천 : 17

"그러나 가시적인 역사 속에 사는 우리 성도에게는, <이미> 구원은 이루어 졌으나, <아직> 주님이 오실 그날 까지 성도의 삶을 통해 십자가를 증거할 의무가 남아 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윗 글에서 궁금한 점이 있어서 글을 적습니다.

성도에게 삶을 통해 십자가를 증거할 의무가 있다할 때에, 그 증거를 누구에게, 왜 해야하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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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질문있습니다
이근호 2006-02-05 08:52:21, 조회 : 129, 추천 : 12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자존심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미 본인의 소유가 아니라 주님의 소유입니다. (고전 6:19-20)

따라서 주인되시는 주님께서 자신의 공적에 대한 성과와 명예를 위해서 자기에게 예속된 자를 마음껏 부릴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시는 겁니다.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빕 2: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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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모르는 자도 이 정도의 수준인데 하물며...
정판옥 (Homepage) 2006-02-06 22:26:09, 조회 : 208, 추천 : 13

2002년 8월 <복음과상황> 인터뷰 (문제 발언만 발췌)

기자(지유철)-한국 기독교에 평소 어떤 생각을 하는가.

유시민-우리 기독교라? 예수님이 하지 말라는 것 골라가면서 다 한다. 기도는 골방에서 하라고 했는데 통성기도 하고, 왼손이 하는 일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드러내 놓고 자선행위를 한다. 외식하지 말라고 했는데 성전 엄청 크게 때려 짓는다. 얼마나 많은 교회의 설교들이 대중을 무지와 미몽 속에 묶어 놓는가. 징역 살면서 조 아무개 목사의 설교를 열성 신자가 틀어주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들었다. 들어보니 미국이 어떻게 불황을 극복했는지를 이야기하는 데 전부 거짓말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엉터리로 이야기하더라. 그런 헛된 선전을 어마어마하게 해 댄다. 대한민국에 교회가 많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나는 생각한다. 아무 종교도 없지만 감옥에서 성경은 많이 읽었다. 정말 한국 교회는 어쩌면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가면서 할 수가 있는가. 그런 점에서 나는 기본적으로 종교 기관을 서비스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정신적 안정, 그것이 장기간 지속되는 것이든 단기간에 사람을 마취시키는 것이든 그걸 주는 대가로 헌금을 받는 서비스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도덕은 지키고 하자. 지금 한국 교회가 하는 것을 보면 이것은 거의 절망적이다. 내가 사는 일산에 교회 엄청 많은 데 밤에 네온사인 켜져 있는 것을 보면 엄청 무섭다. 끔찍하다.

기자-독실한 크리스천인 한완상 전 부총리도 예수가 한국에 오면 일요일 교회 안 갈 것이라고 했다.

유시민-다 때려 부술 것이다. 왜 교회는 사람들을 어린애로 만드는가. 나는 교회가 무섭다. 종교는 무섭지 않은 데 한국 교회는 무섭다. 겁이 난다. (침묵) 오늘의 대한민국 사회와 가장 닮은 데가 한국 교회다. 총체적 부패, 총제적인 불투명성, 총체적인 권위주의, 총체적인 무비판, 이런 게 다 집약되어 있는 게 한국 교회다. 나는 교회를 다녀보진 않았지만 곁눈질로 구경은 해 보았다.

기자-부끄럽다, 할 말이 없다.

유시민-교회가 그렇다는 것이지 신도들 개개인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면 교회 안 나가고 그냥 혼자 신앙을 지키거나 아니면 정말 바른 신앙, 이 표현도 문제지만,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조그마한 교회를 이루지 큰 교회는 안 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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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복음을 모르는 자도 이 정도의 수준인데 하물며...
이근호 2006-02-07 09:03:31, 조회 : 140, 추천 : 13

복음 몰라도 '어린이집' 할 수 있고, 학원 운영할 수 있듯이

복음을 몰라도 얼마든지 '교회'라고 사람들이 불러주는 단체를 세워 영업에 나설 수 있는 시대입니다.

도리어 복음을 말하면

'이상한 교회'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이 슬금슬금 피해버립니다.

피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저런 식으로 장사가 될까?"

그렇습니다.

이로서 장사하기 위한 목회자와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하려는 목회자가 구분됩니다.

동시에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빈 말이 아님을 새삼 절감합니다.

"과연 말씀은 여전히 살아 역사하구나! "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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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복음을 모르는 자도 이 정도의 수준인데 하물며
김명현 2006-02-07 12:08:40, 조회 : 182, 추천 : 12

성령께서 너무나도 꾸준하고 집요하게 섭리하셔서 발각시켜 온, 절망적인
죄인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믿음의 원리는 정말로 나올 수 없습니다.
죄인이 아니고서도 능히 믿음의 원리를 세워놓을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은 진짜로 가짜입니다.

오랜만에 너무 심하다고 말할 수 있는 비판을 써보려고 합니다. 처음부터 기독교 내용 없이 시작하였고 지금도 그런 가운데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인간 본성에 의해서 세워진 비스므레한 기독교인데, 비스므레한 기독교는 이방종교입니다. 이방종교란 원래 인간의 끔찍한 타락에 의해서 자기를 위해서 세워진 종교 아닙니까?

한국교회는 그 어떤 나라에서도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의 피를 모독하고 있는데, 다른 나라는 예수 믿기 싫으면 깨끗하게 손을 털고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끝까지 예수님의 복음을 물고 늘어져 모독하는 일에 안식할 줄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뒷간에 있는 구더기가 밥상 위에 놓여 있는 미역국 안에 까지 들어와 휘젓고 돌아다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를 빨고 있습니다.

그 어떤 유명하다고 하시는 분들 설교하는 것 보면은 정말로 설교 못합디다. 그 설교에 무턱대고 아멘하는 교인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요? 이 글을 쓰면서 에스겔 선지자가 선포했던, 겔13:19절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너희가 두어웅큼 보리와 두어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갈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에스겔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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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