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악마의 진격] 2005-08-15묻고답하기[신학]

[악마의 진격] 2005-08-15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악마의 진격
이근호 2005-08-15 10:12:27, 조회 : 216, 추천 : 12

악마의 진격

오늘날의 교계 신학은 마치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불량 식품과 같다.
먹어서는 안 되는 식품을 유통시키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와 같다.

1. 자신의 신관이나 종교관이나 구원론이 자본주의적 배경에서 나온 산물인 것을 모른다. 즉 욕망의 흐름이 뭉쳐져 종교라는 형태로 전환된 것에 불과하다.
이 자본주의 사회는 악한 영의 조정을 받는 의식이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유통되고 있다. 따라서 이 자본주의 사회에 '종교'라는 영역을 따로 확보해서 거기서 교회라는 이름의 조그마한 가게라도 시작하려면 자본주의적 욕망에 편승해 주어야 한다.
자본주의적 욕망은, '개선' 내지는 '개혁'되어져 간다는 여운을 남기는 그것을 곧 진리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이런 양상은 '이성'에 의한 '반성적 기능'에 의해서 야기되는 것이다. 즉 자기 반성과 자기 회개들을 양산시켜 이런 자기 반성과 회개 작업을 접속시키고 결합시키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역사'라는 상상적 활주로가 요청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앞으로 점차 나아진다는 기운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나의 존재는 상당히 건전함을 증명하는 것이다"라고 보는 의식이다. 따라서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나아짐'과 '개선되어짐'을 확인시킬 그런 사건들을 신경곤두세우면서 수집에 나서서 모아놓으면 그만이다.

곧 '자기 의로움 수집 기능' 여기에 자기 교회의 사활이 달렸다고 보고 있다. 자기 정당함을 얻기 위해 교회를 만들고 그 안에서 자기 의로움을 확인시켜줄 사건을 유발시킴으로서 그것을 신의 계시로 간주하는 짓들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본주의에서 '자본'이 '자본'을 낳는 자본 '재생산'기능과 맥락을 같이 하면서, '나의 의로운 행위'가 내가 살아 있는 한 지속적으,로 '나의 의로움을 재생산시키는 기본 토대가 된다고 본다.

쉽게 말해서 자신의 종교심에다 목숨을 다 바치고 충성을 다하는 자들이다. 그러니까 이들에게는 십자가가 여전히 걸림돌이 된다. 이들은 십자가 복음을 회피하고자 예수님 대신 삼위일체 신학으로 대체시킨다.

2. 삼위일체 신학의 허망성

삼위일체를 제대로 본 사람 같으면, 삼위일체 신학이 아무런 의미를 지시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마치 등산하고자 배낭에 뭔가를 잔뜩 집어넣었는데 막상 산에 올라가서 배낭을 끌어보니, 껍데기 같은 개념과 개념들만 끼어 맞추어서 생산한 쓰레기만 잔뜩 들어있고 실제로 생명이라고는 전무한 정황으로 파악하게 된다.

삼위일체 신학이 왜 그런 양상으로 귀결되는가 하면

'교회'를 위한 신학이고자 해서 그런 것이다.

즉 진리를 위한 신학이 아니라 제 2의 자아상을 획책하는 차원에서 자기 앞에 자신의 욕망의 산물을 '교회'라는 이름으로 세워놓기 위한 신학을 추구하다보니 자신들의 교회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논리들을 동원하게 된다. 이것을 위한 신학이 삼위일체 신학이다.

왜 그런고 하니 삼위일체에 등장하는, 성부, 성자, 성령 모두가 신학을 하는 주체인 인간에게 있어 철저히 관찰과 탐구 대상이 되는 '타자'(他者)로서만 구성되기 때문이다.

즉 타자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그 타자를 바라보는 자아라는 주체자는 그 자아성(타자와의 차별성)을 극한까지 밀어붙이지 않으면 안되도록 되어 있다.

자아와 타자는 늘 대립적인 위치를 갖고 상호 주체성의 경계가 절대로 허물어지지 않고 갈수록 더욱 굳어지는 상황을 조장하면서 탐색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설명하면서 '∼와는 다르다'라는 식으로 설명될 수 밖에 없다. 물론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설명된다. '∼와는 상호 다르다'라는 식으로 해명될 수 밖에 없다. 즉 '성부는 이런 점에서 성자와 다르다'라는 식으로 성부 하나님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성부와 성자를 하늘의 별처럼 쳐다 보고 섰는 그 주체자(인간)은 결코 성부와 성자에게는 절대로 복속될 수 없는 절대성이 보장되는 관찰점을 따로 확보하는 조건을 이미 장만하고 있는 셈이다. 이로서 신은 세 분이 아니라 네 분이며 (탐색자인 인간 자신을 포함시켜야만 공통 지평이 형성됨) 또한 이 세 분의 하나님만이 '하나'가 아니라 인간까지 포함해서 '하나'이다. 인간이 거기에 신을 해명하는 신적인 자격으로 당당하게 합류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삼위일체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신학이 아니라 왜 인간은 절데적인 신이 될 수 밖에 없는가를 증명하는 자기 논리에 해당한다. 즉 인간은 애초부터 신이기에 신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절대적인 규정을 내릴 입장과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논리에 의하면 "따라서 내가 세운 교회는 무조건 절대적이며 내가 살아가는 것이 무조건 마땅한 진리이며 따라서 나에게서 나온 행위는 참으로 이 우주 안에서 보편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진리적 행위"라고 선언하는 바가 된다.

주님 앞에 자기 부인이란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대목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가롯 유다가 이런 운명을 지닌 자이다. 이런 가롯 유다류에 사람에 대해서 주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의 예정론으로 대결을 펼치신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마 26:24)

삼위일체 신학을 주장하는 자들은,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음을 모른다.
도리어 그들은 신을 상대로 거래에 나선다. 즉 "힌트만 주신다면 신의 세계까지 파악할 자질을 신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일단 예수님의 십자가 문만 통과하고 나면 그 뒤에 등장되는 풍성한 신의 세계는 우리 자신의 논리에다 다 맡겨주옵소서"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이들에게 처음부터 주님을 위하여 '자기 부인'할 생각은 일체 없었다. 처음 믿을 때 잠시 '자기 부인' '자기 반성'의 흉내를 내었을 뿐이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자기 전부를 내어줄 생각은 전혀 없다. 단지 예수님마저 따돌리고 자기의 이름을 갖고, 자기 이름을 걸고 하나님 보좌에 직접 나아가려고 한다. 두 번 다시 자기 부인하는 것은 그런 패배주의적 태도는 스스로 회수해버리고 이제부터는 신나게 자기 긍정의 태도를 견지하면 그 길을 개척해나간다. 역사라는 상상의 활주로를 타면서.

이런 넓은 길에 어느새 악마가 히죽 웃으면서 엎에 다가와서 '예수님 십자가의 깃대'를 분질러버린 인간 존엄성의 승리를 축하해주고 독려해주고 있다.

이것이 '악마의 진격'이다.

##############################################################################################
예수님의 활동상황
신직수 2005-08-17 13:53:49, 조회 : 215, 추천 : 11

예수님 전 시대를 포함한 역사에서 하나님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가 싸운 상대는 이방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과 싸워 지기도 하시고 이기기도 하시고 이방인의 손에 붙여 포로로 끌려가게도 하셨다. 싸운 이유는 예수님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십자가로 이루시고 그 효과를 역사에 적용시킨 것이 이 싸움이라는 것이다. 이 싸움의 이유는 죽은 이스라엘을 살려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고 자신의 것(교회)으로 세우기 위함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죽음이다. 선악을 안 인간들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 도전하고 하나님 되어 살아가는 인간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에덴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십자가 효과는 예수님에게 가는 길을 차단하신 심판의 죽음이다. 이 죽은 자의 역사속에서 예수님은 살아나셨는데 아브라함을 통해 세우셨던 후손들과 함께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 자는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이 세상에서 발휘되어 진다.

예수님 십자가가 죽이심이기에 모든 인간은 죽은 채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죽은 인간은 죽은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 길이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막아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이런 말씀을 기록했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 찌라도 능히 깨닫지 못 하리로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얻은 자는 죽음의 능력이 부서뜨려지면서 깨어나게 된다. 이들은 하나님의 일을 깨달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여 죽음을 맛보고 온 세상이 하나님의 철퇴에 휘두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은 지옥이다. 이 지옥에서 무엇을 해도 개혁되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같은 무리끼리 사기치고 또 사기친 꼴이 된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학문적 과학적 물질적 결과물들은 지옥 환경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했고 하나님 되어 스스로 살아가려는 가장 큰 범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꼴이 된 것이다. 돌을 굴렸지만 그 돌에 치인 꼴이 된 것이다.

여기서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불신자는 종교적(바리새인의 기도 참고)이다. 목사(선교사 교수 포함), 교회직책을 통해 모든 종교 활동을 하고 그 활동을 내세운다. 그러나 신자는 그 직책의 의미 없음을 알고 오직 그리스도만 내세운다. 행위적으로 말하면 불신자는 자신이 십자가서 죽었다는 것을 모르므로 자기 주체가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자기 주체가 하나님 되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또한 그 하나님의 일을 자신이 넉넉히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신자는 내가 죽었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있고 하실 수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한 마디로 불신자는 예수님을 통해 살아있는 자신을 내세우고 신자는 예수님 때문에 죽었지만 예수님의 사심 때문에 살아 한 몸 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 속에서 서로 서로 사랑하며 잘 살아보자, 하나님의 일을 협력하여 이룸으로서 서로 서로 복 받자, 하나님의 부흥을 위해 힘써 교회 활동(선교활동 포함해서 모든 조직 활동)을 하자. 라며 일하는 자는 이미 하나님의 철퇴에 휘두름 당한 자의 생활상이다. 이 사기에 속지 않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사기활동을 하나님께 즐거움 가운데 고하며 자신의 마음은 탄식으로 탄핵(죄상을 들추어 논란하여 꾸짖음)하며 산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의를 통해 한 부류는 죽여 차단시켜 버리고 한 부류는 죽여 생명에 이르게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옳은 것이다.

==========================================================================
[re] 같은 맥락에 이어서
이근호 2005-08-17 15:23:32, 조회 : 252, 추천 : 11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 세상에서 사라졌기에, 오직 십자가 문을 통해서 다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십자가 문은 예수님만이 열 수 있습니다. 이 십자가 문이 열린 동시에 세상은 예수님 본인의 십자가 죽으심을 근거로 그 예수님으로부터 심판 받아야 합니다.
성도에게는 십자가가 구원의 문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로 인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 십자가 안에서 그리스도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신자는 십자가 앞에서도 자신을 죽을 자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가치를 짓밟고 죽이려드는 그런 메시야를 필요치 않다는 겁니다.
더욱 더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를 믿겠다는 겁니다. 진리란 자신을 더 가치 있게 만들 경우에만 인정하겠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인간들을 향하여 지옥의 저주는 십자가 문을 통해 뿜어져 나옵니다.

그래서 악마의 종들은 어찌하든지 이 십자가 문을 틀어막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 믿고 더 잘 살아보세! 더 가치 있게 살아보세!"

이런 자들의 '예수 믿기'란,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다가온 것이 아니라 본인이 예수를 붙잡기 위해 노력에 불과합니다.
그러하기에 이 사람들 입에서 다음과 같은 소리가 나옵니다.
"자 예수 믿었습니다. 그 다음에 또 어떤 행함을 보이면 됩니까?"

이들에게 있어 예수는 여전히 타인(他人)이요 상대자일 뿐입니다.
이들에게는 십자가만으로 감사가 없습니다. 십자가만으로 영 마음에 차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십자가 은혜가 임한 적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과업을 향해 쏜살같이 달립니다. 실적을 위한 '자기 시도'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희미하고 자기는 또렷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죽은 분이고, 자기는 생생하고 살아 있습니다.
살아있는 나를 위해 '죽은' 예수를 관에서 부활시켜 일을 시켜 보려고 획책하는 자들이 이들입니다.

성도에게는 복음으로 인한 감사와 고마움 기쁨 같은 것이 성령의 열매가 맺혀 나옵니다.

그러나 소위 자칭 '기독교 신자'라는 불신자들은,
'하나님 나라 확장하기', '교회 개혁하기', '이상적인 교회 되기' 같은 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내어놓습니다.
이들은 정치적 욕망의 화신들입니다.

정치적 욕망이란, 내가 타인을 지배하고, 굴복시키고, 승리하는데서 오는 감사와 고마움과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의 소원을 말합니다.

예수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있는 나로 인해 정치적 승리가 자기 손에 잡혀 들어오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도 쉬지 않고 다음과 같이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 저는 예수님을 확실히 믿습니다. 이제 가치 있게 된 제가 또 무슨 작업에 나설까요?"

참된 성도에게라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응답하십니다.

"지금까지 나 주께서 일한 것에 대해서 너는 전폭적으로 감사하고 있나? 그리고 앞으로 너에게 어떤 상황이 일어나도 십자가 복음만으로 감사할 수 있니?
네가 지금 원하는 목회 성공하기, 하나님 나라 건설하기, 이상적인 교회가 이루어지기, 내가 유명인 되기, 이 모든 것이 날아가고 남는 것은 병든 몸으로 홀로 소리없이 객사하는 일이 있더라도 너는 십자가 복음으로 감사할 수 있니? 나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요 6:29)"

==========================================================================
[re] 같은 맥락에 이어서
신직수 2005-08-19 15:57:27, 조회 : 121, 추천 : 10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목사님...

대전에서 목사님 말씀대로 감사와 즐거운 열심으로 살렵니다.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평강 가운데 사시는 이근호 목사님께...

##############################################################################################
위대하신 복음을 전하시는 목사님
김명현 2005-08-18 19:38:13, 조회 : 214, 추천 : 11

10여년 넘게 예수그리스도의 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선포한 터 위에 이근호 목사님이 이렇게 풍성하게 복음을 선포해 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주께서 이쯤에 와서야 목사님의 복음을 듣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며, 대한 예수교 장로회 개혁노회를 알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방학이 어서 끝나고 시원한 가을 바람이 불어오는 9월 12일에 오셔서 풍성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감없이 풍성하게 눈치보지 마시고 힘있게 전해 주십시요.

==========================================================================
[re] 위대하신 복음을 전하시는 목사님
이근호 2005-08-18 20:46:14, 조회 : 204, 추천 : 13

복음을 알게 하시는 주님만이 위대하다는 점에 저도 동의를 표합니다.

교회, 노회, 교단, 기독교가 결코 하나님의 저주를 막아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오직 하나님의 피(행 20:28) 만이 막아 냅니다.

하나님의 저주 앞에서 신랄하게 기죽어 본 자만이

이 세상 그 어떤 인간 앞에게도 기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의 얼굴은 곧 십자가 입니다.

##############################################################################################
하나님의 복수-손성식 목사님의 글
이근호 2005-08-23 14:07:55, 조회 : 158, 추천 : 9

【복수】

박 찬욱 감독의 "복수"에 대한 설교는 역사 내적이다. 다투고 갈등하는 아담들 내에서 카타르시스를 유발하는 케리그마다. "복수"의 장(場)은 피 터지는 장(場)이다. 극장은 리얼리즘의 장(場)이 된다. 분노와 공포, 그리고 희열의 도가니가 된다. 하지만 극장을 나서는 순간 현실은 변모한다. 박 찬욱 감독의 리얼리즘은 관객들의 리얼리즘과 조우하기도 하고 단절되기도 한다.

가인과 아벨이 들에 있다.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인다. 아벨의 복수를 누가 맡아야 할까? 아담이나 하와다. 아벨의 부모다. 하지만 아벨의 복수를 책임지시는 분이 등장한다. 여호와이다. 그가 왜 아벨의 복수를 대신하려고 할까? 이유는 아벨의 죽음이 여호와의 선택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연결체는 와해된다. 무엇 때문에? 선택의 우발성 때문이다. 이때부터 아벨은 아담에게 소속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소속이다. 아담과 하와에게 단절된 피의 리얼리즘은 여호와에게 복수의 리얼리즘으로 다가선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리라." 피가 소리 칠 리 없다. 그것은 아벨의 죽음이 여호와에게 현실(리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벨의 죽음은 여호와의 현실이다. 왜? 선택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복수는 여호와의 몫이다.

아벨의 핏소리와 동일한 탄식소리가 들려 온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 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나님의 선택 때문에 일어난 탄식의 울림이다. 복수에 대한 외침이다. 자의에 의한 복수가 아니라 일임된 복수다. 왜? 선택 때문에 그렇다.

선택의 중심에 십자가 사건이 자리잡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이다. 묵시이다. 역사에 대한 하늘의 거부이다. 묵시와 역사는 "피"를 가운데 두고 마주 서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이다. 박 찬욱 감독의 "피"가 역사라는 장(場)에서 아담의 울분과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하늘세계의 울분과 분노의 케리그마다.

박 찬욱 감독의 "피"는 화면으로부터 무(無)로 화한다. 역사의 그늘로 사라진다. 화면에 시선이 고정된 순간의 현실이다. 화면으로부터 단절된 아담세계는 일상성의 현실이 다가선다. 피비린내 나는 현실이 아니라, 출근하고 퇴근하고 밥먹고 TV보고 씻고 자야하는 현실이다. 아담세계에서 일어나는 천의 현실도 사망이라는 획일화된 현실을 넘지 못한다. 아무리 "피"를 뿌려보지만 죽음을 넘어설 수 없는 현실이 자리잡는다. 사실 아담세계가 울분과 분노를 터뜨려야 하는 자리는 바로 여기다.

하늘세계의 현실은 십자가의 현실이다.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중심으로 복수하려는 것이다. 하늘세계의 울분과 분노를 터뜨리시는 것이다. 선택의 세계이다. 죽음을 넘어선 세계이다. 복수는 죽임 당한 어린양의 고유권한이다. 또한 성도란 그에게 소속된 운명공동체다. 여기서 터져 나오는 외침. "예수님 고맙습니다"

##############################################################################################
리딕 - 헬리온 최후의 빛
신직수 2005-08-25 13:48:07, 조회 : 134, 추천 : 11

절대악의 상징 네크로몬거(군대이름)의

마샬(지도자)은 자신을 거역하는 모든 행성을 휩쓸어 버린 후

정복의 상징으로 죽음의 조각상(머리네개)을 남겨 놓으며

우주의 행성들을 하나씩 하나씩 점령해 나간다.

마샬에게 적의 선택은 오직 '복종' 아니면 '죽음' 의 선택 뿐이다.

문명이 발달한 눈부신 별 헬리온에는 다양한 종족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별이었지만

이 별에도 예외 없이 마샬의 침략은 피해갈 수 없었다.

마샬의 무력 앞에 헬리온은 멸망의 위기에 처한다.

헬리온의 캡틴은 마샬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종족 퓨리온을 찾지만

그들은 이미 알 수 없는 이유로 멸망한 후였다.

드디어 헬리온에도 죽음의 조각상이 세워지고 목숨을 건 저항에도 불구하고

마샬의 가공할만한 힘 앞에 헬리온은 무력(無力)하게 점령당하고 만다.

그러나 헬리온의 캡틴은 마샬에게 대항할 수 있는 퓨리온의 유일한 후예

‘리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주 역사상 가장 최악의 범죄자 ‘리딕’은

대군단 네크로몬거의 마샬과 미래를 거머쥘 전투를 시작하는데

실제로 마샬이 싸운 이유는 리딕 자신의 운명 때문이었고

그가 애정을 갖고 있었던 키라와의 관계 때문에 마샬과 전투하게 된다.

마침내 리딕은 마샬의 머리에 칼을 꼽게 된다.

이 상황에서 마샬의 군대내에서 마샬을 죽이고 지도자 자리에 앉으려던 자가 군인들과 함께

리딕 앞에서 무릎을 꿇고 리딕에게 지도자가 되줄 것을 요구한다.

그 뒤 멘트가

"리딕이 지도자가 되었는데 네크로몬거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라며 영화는 끝이 난다.

평가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되는가?

악과 악의 싸움은 역사내 시공간에만 쌓이는 퇴적물일 뿐이다.

이 퇴적물이 주의 나라에 쌓이진 않는다.

서로 침뱉고 피 터지게 싸우지만 날라오는 건 자기 침뿐이다.

주의 자녀의 싸움은 악한 영과의 싸움이지만 또한 시간속에서 악과 악의 싸움이다.

악과 악의 싸움에서 침 밖엔 맞을 것이 없고 또한 패배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선과 악의 싸움에서는 역시 패배한다.

아무것도 이길 것이 없다.

이기는 것은 선하신 '주' 밖에 없으시다.

약한 악의 웃기는 정의가 강한 악의 웃기는 정의을 물리치고 자신들의 평화를 지켜냈다.

요즘 이슈화가 되고 있는 반침략의 반전 즉 네크로몬거의 마샬 침략은

현 미국의 반침략의 반전과 맞물린다는 점에서 상징하는 바가 크다.

영화상에서도 말하듯 '복종' 아니면 '죽음' 이다.

감독이 의도를 했든 아니든 영화의 전체적인 느낌은 반침략의 느낌이 강한 영화로 만들어졌다.

똑 같다.

남는 것은 없고

약간의 웃기는 평화, 엄청 긴 전쟁속에서의 살인과 떼 죽음 등

지옥에서 서로 물고 뜯는 모양새다.

이렇게 해도 안되고 저렇게 해도 안 되는 모양새가 이미 끝장났음을 영화를 통해

현실속에서 말하고 있다.

이것이 다 주님의 보복이니 두려운 분이시다.

주님의 끝난 보복 앞에 우리가 육체로 있으니 갈곳은 없다.

==========================================================================
[re] 무슨 영화입니까?
이근호 2005-08-25 16:09:44, 조회 : 168, 추천 : 11

>무슨 제목의 영화인지는 모르지만,

영화란

인간이, 자신들의 기원으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동일성을 모집하여 자아를 구축하는 생성의 영역입니다.

일종의 '구원 연습'이지요.

타인의 목소리를 뺏아서 '정복 집단'의 장을 엽니다. 한 번은 영화 안에서 승리자가 되고 싶은 겁니다.

영화의 재미는, 즐거이 착취하는데 있습니다.

악인에 대한 합당한 착취,

박수받는 미녀와의 로맨스.

이처럼 영화 안에서 인간은 잠시 자신의 기원을 잊어 봅니다. 6000원 내고.(조조는 2500원)

##############################################################################################
율법과 복음
조부상 (Homepage) 2005-09-07 09:46:03, 조회 : 312, 추천 : 2

참 이상하죠?
저는 훌륭한 설교를 들으면 가슴이 뛰고 설레입니다.
이 달고 오묘한 말씀속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어떤 설교는 정말 수준도 높을 뿐 아니라 보석과도 같고
어떤 설교는 성경을 잘못해석하여 쓰레기와도 같음을 느낌니다.

많은 설교들은 천박한 초등학문(몽학)선생의 가르침과 같고
어떤 설교는 사도바울이 다시 살아나서 가르치는 듯
깊고 치밀한 말씀의 능력과 환한 말씀의 빛을 보게 합니다.

많은 설교들은 흐리멍텅하여 금방 잊어먹게 되지만
어떤 설교는 평생을 두고도 잊혀지지 않는 믿음의 씨앗이됩니다.

많은 설교들이 "하면 복받는다, 안하면 저주받는다"의
윤리나 도덕, 육체와 율법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어떤 설교는 몽학선생을 초월하는 성령의 능력을 보게 합니다.

많은 설교들이 오합지졸이나 실력없는 스승같지만
어떤 설교는 이순신 장군이나 히딩크같은 탁월함을 봅니다.

많은 설교들이 인간의 관점과 욕심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어떤 설교는 인간을 초월한 감동적인 빛과 진리를 보게합니다.

저는 문동학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마치 사도바울이 다시 살아나신 듯한 인상을 받게됩니다.
우리는 모두 만인제사장이며 우리 모두는 말씀의 설교자들입니다.

참 믿음이 무엇인지, 진리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무엇인지
분명하고 선명히 보여주고 있는 설교동영상을 보내드립니다.
숨겨두고 먹는 꿀단지처럼 시간이 날때마다 조금씩 드셔보시길 원합니다.

각 설교제목 아래에 있는 인터넷 주소를 클릭하신 후에
(혹은 설교제목 아래에 있는 설교주소(영문)을 복사하신 후에
주소창에 붙혀넣기-주소창을 클릭하시면 파랗게 반전되는데 그때 오른쪽 클릭하셔서
붙혀넣기 메뉴가 뜨면 클릭하시면 됩니다. 그런후에 엔터나 이동을 클릭)
+설교보기 바로 옆에 있는 TV 아이콘을 클릭하시면
마치 사도바울이 직접 설교하는 듯한 그런 설교 동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문동학 목사님의 갈라디아서 강해는
수준도 높고 이해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우상 "세 개의 금송아지"

http://www.cts.tv/progsm_inc/index.asp?PID=P261&DPID=12912

69 육체와 성령의 싸움과 그 승리

http://www.cts.tv/progsm_inc/index.asp?PID=P261&DPID=12940

46 다른 복음은 없다

갈라디아서 1:1-10

http://www.cts.tv/progsm_inc/index.asp?PID=P261&DPID=12917

47 오직 계시

갈라디아서 1:1-10

http://www.cts.tv/progsm_inc/index.asp?PID=P261&DPID=12918

48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갈라디아서 2:1-10

http://www.cts.tv/progsm_inc/index.asp?PID=P261&DPID=12919

49 율법에 대하여 죽고 믿음으로 살리라!

갈라디아서 2:11-21

http://www.cts.tv/progsm_inc/index.asp?PID=P261&DPID=12920

50 체험과 믿음

갈라디아서 3:1~5

http://www.cts.tv/progsm_inc/index.asp?PID=P261&DPID=12921

5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브라함의 복

갈라디아서 3:6-14

http://www.cts.tv/progsm_inc/index.asp?PID=P261&DPID=12922

52 그런즉 율법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갈라디아서 3:15-29

http://www.cts.tv/progsm_inc/index.asp?PID=P261&DPID=12923

57 너희가 삼가 지키니

갈라디아서 4:1-11

http://www.cts.tv/progsm_inc/index.asp?PID=P261&DPID=12928

58 네 안에 그리스도가 이루어지기까지

갈라디아서 4:12-20

http://www.cts.tv/progsm_inc/index.asp?PID=P261&DPID=12929

59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4:21-5:1

http://www.cts.tv/progsm_inc/index.asp?PID=P261&DPID=12930

60 자유·성령·사랑

갈라디아서 5:1-15

http://www.cts.tv/progsm_inc/index.asp?PID=P261&DPID=12931

69 육체와 성령의 싸움과 그 승리

갈라디아서 5:16-25

http://www.cts.tv/progsm_inc/index.asp?PID=P261&DPID=12940

71 사랑의 법

갈라디아서 6:1-10, 사도행전 1:1-11

http://www.cts.tv/progsm_inc/index.asp?PID=P261&DPID=12942

73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라!

갈라디아서 6:11-18, 사도행전 1:12-26

http://www.cts.tv/progsm_inc/index.asp?PID=P261&DPID=12944

주님의 교회 홈페이지 : http://www.pcltv.org/

"자유, 성령, 사랑 이 세가지는 하나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영적자유의 마그나카르타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종교개혁의 선전포고문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인의 독립선언문입니다."

-ㅡ문동학 목사님 동영상 설교중에서ㅡfrom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ㅡ
출처==>http://cafe.daum.net/jesus330

==========================================================================
[re] 율법과 복음
이근호 2005-09-07 11:54:50, 조회 : 218, 추천 : 11

복음이 한국교회 개혁에 희망을 줄 수 있다?

뭔가 속고 있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가지고 결코 교회 개혁에 써먹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한국 교회가 율법을 버리고 복음으로 돌아서면 바른 교회가 될까요?

결코 바른 교회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눈에 뜨이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의 신앙의 대상은 십자가 지신 그 분이 아니라 자기가 포함되어 있는 '바른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시대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자기 시대가 유독 진리가 확연해 져서 본인이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기를 바라며, 모범적인 시대의 시발점이 되기를 바라며, 자기 시대에 바른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바라며, 자기 시대에 훌륭한 모범적 교회를 구경하기를 원합니다.

참으로 문동환 씨가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복음을 증거해서는 아니됩니다.

즉

어떤 방식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와 결부해서 복음을 증거하는 설교를 해서는 아니되고,

인간의 원초적 구원본응마저 왜 죄일 수 밖에 없는가를 배경으로해서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위한 십자가 복음이 아니라, 십자가 지신그 분을 위한 십자가 복음이 증거되는 겁니다.

문돟환 씨의 설교는 안타까울 정도로 아마츄어적인 발상을 가지고 설교입니다.

그 원인은 십자가 복음에다 자신의 생명을 전폭적으로 다 걸지 않는데 있습니다.

◁ 이전글

다음글 ▷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48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4,967 묻고답하기 [황교수 사건에 대한 다양한 시각 중에 한가지] 2005-12-27 - 최고관리자 07-03-13
4,966 묻고답하기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야기된 비복음적 행태] 2005-12-14 - 최고관리자 07-03-13
4,965 묻고답하기 [아빠방(묵시와 역사 등)을 읽고] 2005-10-20 이사야 최고관리자 07-03-13
4,964 묻고답하기 [욕망의 신학 & 사람의 일] 2005-09-29 [신학] 최고관리자 07-03-13
4,963 묻고답하기 [교회는 성직자(목사)가 필요한가?] 2005-09-27 - 최고관리자 07-03-13
4,962 묻고답하기 [난해 구절-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 2005-09-26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7-03-13
4,961 묻고답하기 [가증스러운 검경찰들] 2005-09-14 - 최고관리자 07-03-13
열람 ➜ 묻고답하기 [악마의 진격] 2005-08-15 [신학] 최고관리자 07-03-13
4,959 묻고답하기 [요 7:14-24 “보내신 이의 영광” ] 2005-07-09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7-03-13
4,958 묻고답하기 [믿음이란 무엇인가?] 2005-06-03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07-03-13
4,957 묻고답하기 [행위에 대하여... ] 2005-04-17 역대하 최고관리자 07-03-13
4,956 묻고답하기 [한국교회의 현실과 제언] 2005-03-29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07-03-13
4,955 묻고답하기 [자의적 해석] 2005-03-27 [신학] 최고관리자 07-03-13
4,954 묻고답하기 [사람의 욕망은 과연 악의 축인가?] 2005-03-25 - 최고관리자 07-03-13
4,953 묻고답하기 [믿음의 층위] 2005-03-18 - 최고관리자 07-03-13
4,952 묻고답하기 [무신론] 2005-02-18 - 최고관리자 07-03-13
4,951 묻고답하기 ['도파민'의 유혹] 2005-02-06 - 최고관리자 07-03-13
4,950 묻고답하기 ["도파민"의 유혹] 2005-02-06 - 최고관리자 07-03-13
4,949 묻고답하기 [이근호 목사를 추종하는 자는 지옥갑니다.] 2005-01-10 - 최고관리자 07-03-13
4,948 묻고답하기 [프란시스 쉐퍼에 대해서] 2005-01-02 - 최고관리자 07-03-13
4,947 묻고답하기 [희생양의 의미] 2004-12-27 - 최고관리자 07-03-13
4,946 묻고답하기 [인격성에 대하여] 2004-12-16 - 최고관리자 07-03-13
4,945 묻고답하기 [겨울 수련회를 대비한 공부 - 사회론의 기초 2] 2004-12-15 - 최고관리자 07-03-13
4,944 묻고답하기 [겨울 수련회를 대비한 공부 - 사회론의 기초 1] 2004-12-15 [수련회] 최고관리자 07-03-13
4,943 묻고답하기 [십자가를 모르는 자의 '자기 존재성 구축'] 2004-12-04 - 최고관리자 07-03-13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