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7:14-24 “보내신 이의 영광” ] 2005-07-09
[요 7:14-24 “보내신 이의 영광” ] 2005-07-09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서산의 문영호 목사님의 설교
이근호 2005-07-09 21:42:55, 조회 : 195, 추천 : 8
<요 7:14-24> “보내신 이의 영광”
흔히들 ‘예수를 믿으면 구원, 믿지 않으면 지옥’이라는 공식이 교회 내에서는 통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을 구약 식(유대인)으로 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율법 지키면 의인이고 천당 가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지옥행’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느냐 라고 묻는다면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오늘 본문에 의하면 19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하느냐”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과연 무슨 말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 라고 하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과연 누구에게 하는 말씀입니까? 지금 교회 나와서 앉아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유대인들 가운데 자신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에는 한 사람도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고 한 것처럼 오늘 이렇게 설교를 듣기 위해 교회 나와서 앉아 있는 여러분들에게 여전히 나를 믿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나는 교회를 다니고 있으니까, 나는 복음을 들었고 알고 있으니까 누구보다도 나는 예수를 믿고 있노라고 생각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나를 믿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이런 말을 들어도 별다른 동요나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고, 딴 동네 이야기이지 나하고는 상관없는 말로만 들립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내가 과연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주님의 뜻보다는 내 생각과 아집에 매여서 내 복음에 젖어 있지는 않는지 되짚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일단 나부터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말씀을 대하게 될 때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아직도 예수를 믿고 있다면 그것은 내 노력이나 내 열심이 아니라 주님의 다함이 없으신 긍휼 때문임을 알고 기뻐하며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율법을 잘 지키면 복을 받게 되고 들어가도 나가도 복이 천지 사방에 깔린다는 것이 율법 지킨 자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키지 못하면 들어가도 나가도 저주뿐이라고 하였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뒤에 것은 생각하려고 하지도 않고 앞에 나오는 부분만 붙잡고 나는 천하없어도 율법을 순종하고 지킬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름대로는 열심히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하나도 지키는 자가 없다 라고 하니 얼마가 기가 막힐 노릇이겠습니까? 그것뿐이겠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은 결국엔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다고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더욱더 기가 막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언제 우리가 예수 당신을 죽이겠다고 했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애쓰고 있는 그야말로 착하디착한 사람들이 사람을 죽이려고 한다니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하느냐? 라고 하고 있으니 유대인들은 예수를 가리켜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면 미쳤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도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까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안식일 문제를 가지고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를 인하여 괴이히 여기는도다’ 라고 한 그 ‘한 가지 일’이란 다름 아닌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친 사건을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할례의 율법을 가지고 부언 설명을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할례의 율법을 지금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들 조상 가운데 가장 존경하는 조상 가운데 한 사람인 모세로부터 주어진 율법의 한 가지로서 알고 지키고 있었는데, 그런데 정작 그들이 알고 있는 할례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그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 내려왔던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시간이나 날짜에 제재를 받지 않고 안식일에도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안식일에 할례를 행할 수도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해 왔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그런 것을 행하면 분명히 안식일을 범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모세 율법에 해당되니까 괜찮다는 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고 싶은 말은 너희들은 할례라는 법을 지키기 위해서 안식일 법을 범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귀중한 한 병자를 온전케 하여 사탄의 권세로부터 놓아 준 일을 가지고 나를 책잡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23절에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율법의 조항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특별히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안식일의 법은 지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그분을 믿으면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왜 안식일 법을 준행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온전히 다 이루신 예수님의 공로로 은혜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고 복 받는 것으로 구약의 성도들이 생각해 왔다고 한다면 오늘날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시비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이 마치 나의 믿음의 행위로 나타나는 결과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내가 믿는 믿음의 행위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너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오로지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신 예수님의 은혜만이 나를 살리고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내가 똑똑해서 믿게 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친히 행하신 이적을 보았기 때문에 믿게 된 것도 아니며, 내 아들이나 딸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고침 받아서 믿게 된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려주신 은혜 때문에 다시 말하면 주님이 우리 마음속에 믿음을 ‘폭’ 집어 넣어주시는 믿음, 그 믿음 때문에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 없는 믿음을 주셔서 믿어지게 하시는 은혜 때문에 믿게 되었고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눈을 뜨게 된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보다 복음에 대해서 적게 알고 있다고 해서 너는 왜 그렇게 잘 모르느냐 라고 자기 자신을 과시하거나 자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같은 열차를 타고서 너는 왜 뒤에 앉아 있느냐 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같은 열차에 타지도 않았으면서 마치 자신은 그 열차에 타고 있는 양 흉내를 내는 자들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들이 유대인들이고 오늘날 복음을 안다고 하는 우리들 가운데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마다 사건마다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면 그것으로 시비를 걸고, 초막절인 명절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복음을 가르치니까 또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배우지도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였던 용어는 아람어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사용되었던 용어는 히브리어였던 것입니다. 히브리어는 특별히 공부를 한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나 알 수 있는 글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우리도 잘 알고 있듯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글을 배울 수 있는 여건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어렸을 때부터 12살 때에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도 대화를 하였다는 것을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2:41-47). 그래서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의 견해는 예나 지금이나 별 다를 바 없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진리를 배워야 알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직접 받아서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논쟁이 나오게 되느냐 하면 은혜를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 그 이유를 모르듯이 유대인들도 예수님에 대해서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르면 모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죄인들은 자기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꾸만 인간들의 죄를 지적하고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악하다’라고 하시며, 율법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 라고 하니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말입니까? 이로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광만을 추구하고 그것을 인정받기 원하지 결코 주를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내용은 자기가 스스로 지어낸 말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어서 하는 말을 하는 자들은 자기 영광만을 구하지만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어 그 속에 불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로 자신은 보내신 분의 영광만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너희들은 그것을 가지고 시비를 걸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배운다고 진리에 이를 수 없듯이 율법은 지킨다고 구원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영광만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본문 19-20절은 인간의 제도나 법이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령세례가 아니면 구원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심에 의해서 가르치거나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하심에 대해 인정하지 못하는 데에는 분명 다른 의도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감추고 있는 속내를 드러내 보이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몰아가는 이유는 결국 저들의 속내가 다름 아닌 예수를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면 약 올리기입니다. 결국 너희들의 악한 본색을 드러내 보이라는 것입니다(7절). 괜히 율법을 지킨답시고 의인인 체, 내숭 떨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들의 속내를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분 앞에 들통이 나게 되자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달려드는데 표면적으로는 자신들의 자존심을 상했기 때문에 죽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어겼다는 것으로, 또한 하나님을 모독하였다는 죄목으로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키지도 못하면서 지키는 체 하는 율법의 행위로 사람을 판단할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만 구원되어진다는 것을 알고 그 믿음으로만 판단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
'구속사신학'의 허구성-손성식 목사님의 글
이근호 2005-07-18 16:56:30, 조회 : 189, 추천 : 10
『구속사 신학』
내가 경험하는 성경해석의 현실에서 "구속사 신학"이란 정점에 위치한다. 그것은 특정한 교파나 교단의 일방적인 해석이 아니라, 현대신학의 보편적인 해석의 지평으로 자리잡고 있다.
"구속사 신학"의 핵심은 구원에 있어서 시간의 개입이다. 구원이란 시간의 장(場)을 기반으로 해서 형성된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의 중심에 자리잡는다.
사람들은 구원을 꿈꾸며 살아간다. 과학의 발전으로 양산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뒤 얽킴속에서도 구원이란 욕망하는 인간의 희망으로 자리잡는다. 어떤 내용일까? "보다 더 인간답게!" 인간다움을 생산해내는 것이 현대담론의 화두이다. 어떻게 가능할까? 불확실한 미래에다 손짓한다. 이런 흐름에서 시간이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예측할 수 없는 엉김의 중심에 자리잡는다.
끊임없이 새로운 생존 돌파구를 찾아 나서는 휴먼 원정대의 노력에 서광의 빛을 비추게 하는 주제가 바로 "시간개념"이다. 사람들은 이 시간개념 속에다 구원을 그려 넣었다. 이 지점에서 신학은 철학 그리고 과학과 조우한다. 출발지는 달랐지만 정상에서 만난 것이다. "시간의 정상에다 깃발을 꽂는다. 예수님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무단복제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런 상황에서 십자가 사건은 사람들의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사람들의 본능적인 구원관과 대결한다. 마치 두더쥐 게임하는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을 내리치시지만 인간의 구원욕망은 두더쥐 마냥 고개를 쏙 내민다.
본격적인 싸움의 장(場)이 마련된다. 욕망하는 사람편에서는 시간의 장(場)을 내세우고,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편에서는 언약의 장(場)을 내세우신다. 사람은 시간에다 기대를 걸고, 하나님께서는 언약에다 시선을 고정시키셨다. 이 지점에서 신학과 철학 그리고 과학이라는 구원의 보편사와 십자가의 복음은 충돌한다.
묵시와 역사의 격전장이다. 묵시에서 구원이란 언약-구원인 반면에 역사에서 구원이란 시간-구원이다. 하나님의 활동상은 언약에 토대를 두면서 인간의 구원상은 고발한다. 언약이란 십자가 사건이다. 시간에 근거한 모든 보편사 신학을 거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이다. 구원이란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독점적인 활약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적 유토피아로 꽃피는 희망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피어오르는 구원욕망을 거부하는 묵시적 인격체다. 이런 맥락에서 성도의 구원이란 시간에 예속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활약상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관심사란 예수 그리스도의 활약에 있다. "그 분이 앞으로 어떻게 활약하실까?" 물론 십자가의 방식이다.
복음이란 구원사 신학이 아니라, 십자가이다. 역사로부터 구원사 신학이 배태된다. 역사란 인간의 발자취이다. 인간은 십자가를 비켜간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예수님의 고유권한이기 때문에 그렇다. 십자가 없는 구원사 신학은 욕망하는 인간의 생산이다. 묵시는 유령이 아니라, 인간의 생산을 고발하며 십자가의 장(場)에서 창조작업을 펼쳐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활약상이다.
##############################################################################################
진짜 십자가 마을
이근호 2005-07-29 08:07:08, 조회 : 264, 추천 : 12
때 : 2005년 7월 24일 일요일 낮예배(11시) 진행중...
곳 : 전남 무안군 운남면 내리 원동 화평교회 예배당
이제 딱 4년을 채우는 설교시간. 사람 수가 없는 건 여전하지만 그 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기적같이 몇 명의 성도를 만났다는 사실이다. 전에 있던 교회에서 목사의 행위 설교에 치가 떨리도록 질려버린 YJ집사님이 오늘도 변함없이 편안한 얼굴로 앉아있고, 교회 사이에서 요주의 인물로 새롭게 급부상한 MK집사님이, 자기도 같이 가고 싶다며 따라나선 C형제님과 앞뒤로 얌전히 앉아 있다. 그리고 요즘 따라 찬송가 악보 보는 일이 더 까막까막해진(가만~ 내가 지금 어디를 칠 차례지?) 사모는 어떻게 하면 이 손 떨리는 일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를 상상하며, 중간에 누가 예배하러 왔는지는 안중에도 없는 얼굴로 열심히 부채질하며 앉아 있다...... 뭔 일이 일어날 때가 됐는데... 하는 생각을 뒤로 하고 오늘도 강단에 올라선 오목사, 요한복음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온 예수님을 전하고 있는데...
교인1 : 목사님! (벌떡 일어서서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목소리로, 울먹이는 것도 같은 목소리로) 그동안 우리 교인들이 목사님에 대해서 참을 만큼 참았습니다. 이젠 더 못 참겠습니다. 교인들이 목사님을 좋아하는줄 아십니까? 다 싫어합니다!
목사 : 언제 나를 사랑해 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 한분만을 사랑하자고 한 설교가 그렇게도 못 참을 만큼 싫었다는 말씀입니까...? (순간 그 옛날의 설교시간이 생각났는지 아주 차분한 어투로)집사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본데 말씀하십시오(그리고는 얌전히 앉아서 들을 준비를 하고 있다).
교인1 : 목사님은, 하늘나라는 이 땅에서 받는 복과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복 받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왜 없다고 하십니까? 목사님은 어떻게 영만 이야기를 합니까? 육도 있지 않습니까? 육이 있어야 영도 있는 것 아닙니까? 목사님은 신비주의입니다. 지금이요~(참 답답하다는 어투로) 얼마나 과학이 발달한 시대인데...
목사 : 요한복음 3장 6절에 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했기에 그 말씀을 그대로 한 것입니다. 육으로는 ‘영’이 될 수 없고 성령으로 난 ‘영’도 ‘육’이 될 수 없기에,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어서 둘이 섞일 수 없는 다른 세계라고 전한 것입니다. 성령으로만 거듭나서 영되도록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알아차리고 좋아하고 반가워하는 사람이 영이고, 그렇게 일하시는 것을 거부하고 싫어하면서 왜 사람을 무시하고, 사람의 열심을 그토록 우습게 여기냐고 반감을 가지는 사람은 육입니다.
헌금으로도 안되고, 전도로도 안되고, 뭘 해도 안되고, 오직 주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영이 된다고 했습니다. 영이 되면 헌금해도 죄인이고, 전도해도 죄인이며, 뭘 해도 죄인인줄 알게 됩니다. 그런 죄인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 내버리지 않으시는 사랑은 오직 십자가에서만 나오게 된다는걸 깨닫고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사랑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 설교를 집사님 맘대로 들은 것입니다. 집사님은 늘 뭔가를 해야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예수님의 행위로만은 부족해서 집사님의 행위를 더 보태야만 구원된다는 사고방식으로 들으니 그렇게밖에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교인1 : 목사님이 수준이 있는 분이라는 것은 제가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같은 시골사람들 하고는 안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수준높은 설교는 우리하고는 안맞아요. 도대체가 무슨 소린지 모르겄소.
목사 : 제가 보기에는 수준 때문에 못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서로 관심사가 다르다고 보여집니다. 설교하고 성경 보는 제 관심사는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살피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집사님의 관심사는 그것도 살펴야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렵사리 세워놓은 교회가 부흥되어야 동네에서 교인들 체면도 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믿는 자가 누려야할 복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닙니까?
교인2 : 예배드립시다--
교인1 : 목사님은 계속 설교하쇼. 나중에 다시 따로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목사 : 계속 설교하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배는 저의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는 목사의 것도 아닙니다. 예배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고, 교회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목사는 다만 그 사실을 증거할 뿐입니다. 목사는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달라고 청했기에 온 것뿐입니다. 더 이상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설교를 듣기 싫어한다면, 그러니까 저 목사한테서는 더 이상 들을 것이 없다고 판단된다면 다른 목사를 데려다가 그 일을 시켜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제가 전하는 복음 듣기를 거부하고 싫어한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짐을 쌀 수 있습니다... 설교 계속하겠습니다...
목사가 루스타임까지 적용해 가면서 설교를 마치고 내려오는데, 준비된 듯한 (젊은)질문이 이어진다.
교인 2 : 저희 아버지께서 설교 도중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사과를 드립니다. 그리고 무례하다 하지 않으시고, 잘 받아주신 점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목사님은 시골마을 사람들의 신앙을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힘들지만 힘든 가운데서도 신앙을 잃지 않고 생활해 오신 이 분들의 믿음을 왜 무시하는 발언을 하십니까?
예를 들어 목사님의 설교 중에 “---그렇게 새벽기도 많이 하고 열심히 신앙 생활한 결과가 이것밖에 안되는 것이냐, 이 세상에서 구하고 살아온 결과가 이 정도라면 이제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다”고 하셨거든요. 이런 말씀들이 시골사람들의 신앙과 생활자체를 무시하는 거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목사 : 저는 설교 중에 시골사람 도시 사람 차별한 적이 없습니다. 시골에 살든, 도시에 살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는 일에 골몰하는 사람들이 저주를 받는다는 취지로 설교한 것입니다. 자기가 기도한 덕에 복 받았다는 식은 자기 행함에 취해있는 것이고 자기열심에 취해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시골에서 어렵게 살면서 믿기에 그것이 더 순수한 신앙이라고 보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도 알아줘야 하지만 그 십자가를 믿는 자기도 함께 알아달라는 소리 밖에는 안 됩니다. 그것은 복도 아니고 믿음도 아니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교인 2 : ......그리고 목사님의 설교 중에 사람들이 “죄 안짓기 경쟁을 하고 죄 감추기 경쟁”을 한다고 하셨는데 저는 이때까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복을 받기 위해서 신앙생활 하지도 않습니다. 저도 기복적 신앙은 개인적으로 싫어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앉아 있는 사람 모두 다 그런다는 식으로 설교하시던데요. 저는 정말 아니거든요.
목사 : 자매님은 자매님의 행위 중에 죄가 아닌 것도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실수한 것이 됩니다. 자매님은 이 세상에서 잘되고 싶고 잘살고 싶은 거겠지요? 물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고요. 그런데 막살아서는 잘 살수가 없겠지요?
세상 사람들에게 막사는 인간으로 비쳐지면 잘 살수 있겠습니까? 사회에서 인정을 받아야 더 더욱 잘살게 되고, 그래야 전도도 수월하게 진행된다고 그렇게 배워서 그렇게 알고 계시지요? 바로 그것이 죄안짓기 경쟁이고, 죄감추기 경쟁이 아니고 뭡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의 본성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기복신앙 아니라고요? 거짓말입니다!!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 몸의 본성입니다(그래서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간 것 아닙니까). 그 본성을 인간이 어떻게 할 수가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 본성에서 종교적인 열심도 나옵니다...
마귀는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대신에 인간의 종교적 열심과, 윤리적 행실과, 사회적 인정 같은 것을 내세워서, 예수님의 공로를 훼손하는 일로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성령 받은 영이라면 예수님의 행위만 선포되는 말씀 앞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교인2 : 그러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하나님께 받는 복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까?
목사 :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창세전에 예비한 복을 주시는데 그 복은 신령한 복이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3장에는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안에 감추어져 있기에 이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매님이 꿈꾸는 복이라는 것이 과연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 복인지 본인이 잘 판단해 보세요.
교인 2 : 그래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도 주시는 복이 분명히 있잖아요.
목사 : 있죠!! 성경에 나오는대로 말해야 합니다. 마태복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이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땅의 복에 관심이 없습니다. 땅의 복을 구하려고 달려가다가도 말씀 앞에 서면 곧바로 자신의 죄악됨 앞에 통회하는 심정이 됩니다. 목사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도들로 하여금 모이는 일에 힘쓰게 하지요. 말씀 앞으로 모여지게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늘나라로 데려가지는 복을 날마다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것이 성도의 복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 복,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인 십자가만을 증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교인2 : 십자가의 공로로 하늘나라 간다는 것은 저도 알아요. 그것은 궁극적인 것이고요. 어쨌든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목사 : 그러니까 성도는 궁극적인 것을 바라보고 살아야지요! 성경에서는 하늘 아랫것을 복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답해보세요. 창세전에 가족이 있었습니까? 부모가 있었습니까?
교인2 : 아니~ 그것은...
목사 : 자꾸 머릿속으로 생각을 돌리지 마세요! 단순하게 어린아이같이 대답하세요! 베드로서에 보면 이 땅은 불살라 없어질 거라고 합니다. 불살라 없어질 땅에서, 땅의 복을 받겠다고 아우성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지요? 자매님은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것 다 날아가면 그 때부터 예수 안 믿을 작정이십니까?
교인 2 : 아니죠. 저는 믿지요.
목사 : 그렇다면 됐습니다. 그런데 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 자매님이 생각하는 그런 복을 받고 사셨습니까? 못 받았습니까?
교인2 : ... 못받았지요...
목사 : 그렇지요. 새도 집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는데 예수님은 머리둘 곳이 없을 정도로 복도 없이 살다가 가신 분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에서는 성도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하셨다고 하지요. 그러면 성도가 이 세상의 복을 인정하고 사는게 맞습니까, 관계없다는 것이 맞습니까?
교인2 : ......저는 알지만 여기 시골 사람들의 믿음은---
목사 : 자매님! 믿음이 어디서 나옵니까?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온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찾아와서 만나주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할일을 왜 걱정합니까?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오셔서 독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체면과 교인들 위신 따지기 전에 본인걱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러고 있는 동안 여기저기서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교인2는 자꾸 뒤쪽의 아버지가 신경 쓰이는지 목사와의 대화에 집중을 못한다) 발언의 기회를 목사로부터 봉쇄당한 MK집사가, 자기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어느새 뒤쪽으로 나가서 교인1과 대화 아닌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MK : (이말 저말 다 필요 없다는 표정으로)제가 댁의 속을 한번 말해볼까요? 목사 하나 데려다가 교회 부흥시켜 달라는 것 아닙니까? 집사님! 장로 되고 싶어서 그럽니까?
교인3 : 본교회가 어디요? 직분이 뭐요? 왜 여그 왔소?
MK : 본교회? 직분?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라는 것은.....
교인1 : (여전히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사수해야 한다는 급한 마음으로, 말을 가로채며) 본 교회는 지켜야 하고, 교회에서 직분은 중요한 것이요. 직분이 중요하지 않다니 그거 문제있소!
교인3 : (저쪽에서 목사가 교인 2에게 하는 질문을 듣고,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비양거림으로) 뭘, 믿음이 어디서 나와요? 십자가에서 나오지. 다 관둡시다. 우리는 서로 믿음이 달르요. 우리네하고 당신네 하고는 서로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잉깨.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아무도 판단할 수가 없어요. (신발을 신으며) 하나님만 판단하신다고요...
MK : 그렇죠. (자기도 모르게 뒤쫓아 가면서) 그런데 복음 전하는 목사를 왜그렇게 판단하십니까? (한발짝 더 뒤쫓으면서) 왜 그렇게 판단 하냐고......
빙고!!! 이제야 답이 나왔다! 과연 예수는 인정하되 예수의 피를 믿을 가능성은 인간에게 전무하다.“나는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꽁꽁 묻어둔 이 소리를 토해 내치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렇게도 몰아가시면서 일하시나보다.
분노와 조롱 섞인 발자국들이 하나 둘씩 예배당 문을 빠져나간다. 오목사도 곧바로 차량운행 나가고, 예배당 안에는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벽걸이용 선풍기만이 쉴새없이 윙윙, 덜덜덜 돌아가고 있다. 성령의 바람은 언제나 계획도 없이 불어댄다.
사모마음은 복잡해진다. 어이고... 복도 지지리도 없지. 결국엔 이 싫어함을 당할라고 이 남도까지 온 것인가. 땀 줄줄 흘리며 무얼 허겠다고 그 발버둥을 쳐댄 것이며... 설교 중에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말씀(내가 주는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을 들으며 터진 눈물이(그래, 이 땅에서 나는 것들은 퍼먹고 퍼마셔도 갈증의 연속일 뿐이지), 이제는 억울함과 서러움으로 단번에 바뀌면서 더더욱 솟구친다. 이래서 인간은 ‘안 된다’이리라. ‘복음의 눈물’이 ‘땅의 눈물’로 변신하는 데는 단 몇 분이 소요될 뿐이다. 그것이 또 기가 막혀서 눈물에 눈물이 흐르고, 이 순간에도 죄 감추기 경쟁에 끼여들 수밖에 없는(네 죄가 그저 있느니라) 자신이 미워서 이제는 증오의 눈물이 되어 흐른다. 그런데도 이 십자가의 원수 된 죄인을 떠나지 아니하시는 그 은혜가 어찌 이다지도.....
이 묵시와 역사, 역사와 묵시가 순식간에 교차하는 음행한 마음과는 관계없다는 듯, 얼굴에 승리의 미소를 가득 담은 MK가 자기자리로 돌아와서 질문의 각도를 달리하여 말한다.
MK : 이야~ 말씀이 떨어지는 곳에는 언제나 전쟁터라더니, 맞어!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어요. (갑자기 의심이 간다는 눈초리로) 사모님! 왜 자꾸 눈물을 닦는 것이요? 하나님 일에 감동해서요, 남편이 딱해서요, 자신이 불쌍해서요? (진짜, 성도로서 기분 나쁘다는 목소리로, 그러나 힘을 주어서) 이 영광스러운 전쟁터에서 왜 우는 것이요?
사모 : ...... (그려, 당신은 그리스도의 군사, 맞어.)
YJ : (사모의 대답은 불필요하다는 듯)하하하하.... 오늘 오목사님, 진짜 환상적이네요... 정말 멋있었어요! 그렇지 않아요, 집사님?
모두가 자기 기준대로, 자기가 본대로, 자기의 상상 속에서만 말하니, 이 세상은 동문서답의 각축장이다. 이러한 때에 <같은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이 어인 신비가 아니리요! 그리고보니 그리스도인은 ‘교인1’의 말마따나 신비주의자들이다. 과학의 시대와는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는 미련한 자들이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시오. 홍해가 갈라진 사건이 어디 과학인가요? 시내산에서 불 가운데로 나타난 여호와의 영광이 어디 과학인가요? 죽음의 사자가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발려진 집은 건너뛰었다는 이야기가 과학인가요?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지시고 죽었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서 마귀의 권세를 완전히 깨부셨다는 복음이 어디 과학이라고 할 수 있나요?
복음이 얼마나 명쾌한 것인가. 예수님이 일러주신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미워해야 한다. 예수님도 사랑하고 내가 원하는대로 내 것도 챙기는 방식은 주님의 방식이 아닌 것이다. 성령 받은 성도라도 이 땅에 살아가면서 똑같이 내 것을 챙기는 방식으로 살아가지만, 십자가 지신 예수님 앞에 서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면, 곧바로 통회하는 심정이 된다. ‘주여, 차라리 이 죄인을 떠나소서’라며 자복하는 심령이 된다. 이때 온유가 나오고 절제가 나온다. 자비가 터지고 말씀대로 사랑이 되는 성령의 열매를 맛보게 된다.
성도는 자기목숨을 미워하는 쪽으로 인도받는다. 십자가 앞에서, 죄인 됨의 끊임없는 발각선상에서 그렇다. 동시에 성도는 자기목숨과 더불어 <성도 한 명 한 명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걸 확인하는 쪽으로 인도받는다. 주님이 낳은 사람들, 주님의 의를 드러낼 도구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죄인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 나타나고, 예수님은 그 죄인의 몸에서 <영원한 속죄, 화목제물>이 되어 자신의 ‘의’만 나타내기를 쉬지 않는다.
이 땅의 복이 과연, 자기 목숨을 미워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가, 아니면 자신의 괜찮은 행위는 하나님이 주신 거라면서 점점 더 ‘자기 의’를 쌓아가는 것과 같은 계열에 있는 것인가. 이것은 너무나 분명하게 나누어떨어진다. 예수님은 <나를 인정하는 자>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하신다.
설사 어느 누군가로부터 나의 전 생활이 무시당한들 무슨 상관인가. 성도가 말씀 들으면서 주의할 일은 저 목사가 무얼 말해도 결국은 예수님<만> 높이고 있는가를 살피는 일이다. 예수님만 높임 받는다면 내 것은 다 무시당해도 괜찮다.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마땅하게 여겨야 하며 더 적극적으로는 좋아하고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닌가! 죄인들에게 무시당한 채, 십자가지신 예수님 앞에서 가타부타 무슨 할 말이 그렇게도 많은가!!!
**능선 너머 참한 예배당
뾰족탑이 아름답던 마을
그 소박한 고향 예배당 지붕에도
유황불이 떨어질 거라고
상상이나 해보았는가.
성도가 믿는 것은
교회생활의 경험과 추억이 아니다.
(이 근호, 지옥의 하나님, 맨 앞장에서)..**
==========================================================================
[re] 진짜 십자가 마을
곽진계 2005-07-29 10:37:05, 조회 : 215, 추천 : 11
복음의 눈물이 땅의 눈물로 되는 것은 순식간이군요. 평화로워 보이는 시골교회에서도 여전히 복음은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그래 "이것이 복음”이야! 라고 외치더라도 남는 것은...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무슨 업보같기도 하고...
어쩌겠습니까? 그렇게 살아야지요. 기쁘할 수 있으면 더욱 좋구요.
==========================================================================
[re] 진짜 십자가 마을
우인숙 2005-07-29 10:15:48, 조회 : 217, 추천 : 12
오랫만에 울었습니다..
너무 힘 없음의 너무나 힘있는 능력을 보며.
어제 밤에 화평교회홈에서 전혀 글쓰기가
안되어서리......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4:14)
==========================================================================
[re] 진짜 십자가 마을 ...
정판옥 (Homepage) 2005-07-29 14:13:35, 조회 : 244, 추천 : 11
'그래, 이 땅에서 나는 것들은 퍼먹고 퍼마셔도 갈증의 연속일 뿐이지.....예수님만 높임 받는다면 내 것은 다 무시당해도 괜찮다.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마땅하게 여겨야 하며 더 적극적으로는 좋아하고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닌가!'
이런 고상한 방언은 이 세상의 상식을 가지고, 이 세상의 윤리와 양심을 가지고는 정신병자 취급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겠는지요?
차라리 '김광석'씨 처럼....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아가고 있구나!...라고 인생의 허무와 무능을 인정이나 하면 좋으련만...
그래도 가짜이면서도 진짜인 것처럼 하고 있는 카멜레온 종교인보다는 낫지 않겠나 싶기도 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든지 아니면 팔아 먹든지...이것도 저것도 아닌체 이제나 저제나 복이 안떨어지나 눈동자는 풀려 있고,
머리 속에는 로또 복권 추첨일을 헤아리고...이런 종교인보다는 낫지 않을까여...
그래도 사모님은 행복하시네요. 우리 인간이 얼마나 사악한 존재인가를 확인하고, 깨닫도록 하시니 말이예요.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복음을 들려 주시니 또한 감사하구요!
또 이번 수련회에는 무슨 기적이 일어날려는지...
##############################################################################################
참 교회의 기준이 과연 무엇인가?
이근호 2005-08-10 11:00:07, 조회 : 289, 추천 : 10
어떤 분이 한국교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낱낱이 지적하니 그 지적에 대한 반발로 또 다른 분이 제시한 한 글입니다.
쉽게 말해서 한국교회를 함부로 가변게 비판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이 아래의 글입니다.
"얼마전 어느 교회에서 자신의 몸에 생긴 암으로 인해 발생한
보험금을 전액 교회에 헌금을 하니 ....
(이 분은 자신이 암에 걸린 사실을 교회에 알리지 않은 상황임)
똑똑한 다른 교인이 교회에 뭉터기 헌금을 하는 자들은 자기 이름내기위해
하는자들이라고 온 교인들을 모아놓고 비웃고 헌금을 받은 목사 나무라고
교회가 썩었다고...헌금은 개인의 이름 나지 않게 다같이 해야한다고..비난하고
우리는 보이는 바 내 이성으로 판단하는 실수를 ..조심해야 할것입니다.
교회에 대해 모르면 모른다고 하세요
머리는 예수님인데....몸들이 난리를 치면 어떻게 하나요
난리 치는 몸들이 있거든...그냥 놓아 두세요
주님이 다 보고 있으니까요
서투른 '비느하스'보다는 바보가 됩시다."
평가:
암으로 인해 생긴 보험금을 전액 교회에 헌납한 사실을 가지고 올바른 교회가 아직도 한국 교회에 있다는 예로 제시한다는 것은
이 사람의 사고방식 속에는
여전히 생존에 필요한 돈이 생긴 것을 참된 사랑이라고 보는 사람입니다.
살고자 하는 자를 더욱더 격려하는 것이 주님께서 남기신 사랑의 말씀입니까?
살아남는 것이 진리입니까?
교회가 존속하는 것이 교회의 목표입니까?
그 헌금으로 그 교회가 보다 오랜 시간동안 이 세상 한복판에 여전히 간판걸고 존속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까?
참 교회냐 아니냐의 문제는,
교회가 있든 없는, 그리스도 몸으로 감사하지 못하고 고마워하지 못하는 헌신하지 못하는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됨을 포기하고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믿음'의 증거로 보고 있습니다.
주님은 복음의 진리 안에서 일하지 기존의 교회 안에서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 운영을 배후 조종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는 관심이 없고, 교회 존속에 관심을 두는 이단이면서도 그 사업체를 공격하니 기껏 올바른 교회 있음을 증거하고 제시하는 것이
'돈되는 교회상'이라면 이것 자체가 이미 이단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바 내 이성으로 판단하는 실수를 ..조심해야 할것입니다.
##############################################################################################
김형희씨의 글
이근호 2005-08-12 07:28:31, 조회 : 253, 추천 : 11
성경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하는 나를 보고 이단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나 또한 사실은 예전에 그런 관점으로 신앙생활을 하던 부끄러운 과거가 있습니다.이제는 압니다 성경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께 있는 것임을 이제는 압니다..
성경에 능통햇던 수많은 이스라엘민족들과 바리새인들이 왜 독사의 자식이요 멸망받을 자식이요, 회칠한 무덤이였는가를 [요한복음 5장39-40'] 성경은 말해 줍니다.
그런데도 이런 사실을 모른체 성경우상주의 목사우상주의 교회우상주의가 판치고 잇습니다.
성경에는 구원이 없습니다..그러나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임한다면 [누가복음24장45절]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왜 내가 성경우상주의에 빠져 지내왔던가를 깨달을 수가 잇을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바울처럼.. 나의 성경지식과 성경묵상과 신학의 지식이 배설물보다 못한 것이였던가를 처절하게 절감할 수도 잇을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이 거짓이 아닌 진실이라면 말입니다.. 예수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한 바울의 고백이 겸손을 가장한 말장난이 아닌 진실 그 자체임을 깨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신앙은 인간의 지혜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구원이 없습니다..범사에 감사할 수있게 만드는 것은 성경도 찬송도 예배도 십일조도 금식도 아닌 오직 주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주님에 은혜로 인해 강아지의 울부짖음도 새벽닭의 기침소리도 소나기의 방구소리도 나룻배의 콧노래 소리도 말씀으로 다가옵니다..세상모든 만물이 주님의 외침으로 들려오고.. 성경의 모든 말씀도 바로 나에 대한 외침인것을 깨닫게 됩니다..성경이 없었다면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알턱이없습니다.그러나.. 성경책만으로 예수님을 알턱도 없습니다.. 이말이 이해가 가셨다면 성경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제말이 이해가 갈수도잇을까요?
들판의 암코양이 한마리를 보고도 구원이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이나 성경에는 구원이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이나 무엇이 다를까요? 주님의 은혜가 임한다면 문맹자도 귀머거리도 벙어리도
일생동안 혈루병에 문둥병에 전신마비에 시달려 방안에만 갇혀 지낸 사람조차도 예수님을 알고 성경을 수만번을 읽은 사람보다도 더 예수님의 은혜의 참뜻을 알수가 잇습니다..
성경에 능통했던 수천 수만 수억의 이스라엘 사람들중에 그 성경으로 인해 구원받은 사람은 없습니다..오직 하느님의 은혜... 오직 예수님의 은혜.. 그 하나만이 인간에게 임했을 때 그 때만이 삶의 가치가 있었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그외에는 성경책은 사단의 책으로 둔갑할 뿐입니다.
성경의 귀절들을 가지고 왈가왈부 하면서 허구헌날 무익한 논쟁을 벌리는 자들로 가득찬 이곳 게시판을 보면서 참으로 성경에는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낄수가 잇는 것이다..
2005.08.11 18:37:38
==========================================================================
[re] 이 주장에 불안을 느끼는 자라면
이근호 2005-08-12 07:35:33, 조회 : 240, 추천 : 12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게 됩니다.
"지도가 없이는 어떻게 구원의 길을 찾아 가느냐?"고 말입니다.
즉
지도가 필요함 →성경은 꼭 필요함→성경을 가르칠 전문가가 필요함→목사가 필요함→목사를 키워주고 존속시켜줄 교회가 필요함→목사를 양성하는 교단이 필요함→다른 교단들과의 교류가 필요함(왜냐하면 한 교단이 절대화 되면 안되기 때문)→ 교단 연합(기독교=카톨릭)이 요구됨→기독교의 역사가 필요함→ 그러니까 역사가 곧 계시임(성경이 아니라!)
이렇게 나온다면 김형희씨는 또 이렇게 반박할 것입니다.
"어떻게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 찾는가?"(누가복음 24:5)
◁ 이전글
다음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