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행위에 대하여... ] 2005-04-17묻고답하기역대하

[행위에 대하여... ] 2005-04-17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어떤 분의 질문과 신윤식 목사님의 답변
이근호 2005-04-17 07:03:34, 조회 : 322, 추천 : 16

Subject ☞ 행위에 대하여...

<누군가가 자신의 행위를 보면서 ‘이것은 내 힘이 아니야’라는 고백을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보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기 행위를 보는 것일까요? 저는 자신의 행위를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답을 내리고 싶습니다. 즉 자신의 행위를 보면서 자기 행위에 대해 대견해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일을 하다니 이것은 내 힘이 아니야’라는 식의 고백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제 생각이 너무 비약된 것일까요?>

목사님의 지난번 답변 중 위의 내용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

= 위의 답은 인간은 행위에 대한 구분을 두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한 것입니다. 즉 가치있는 행위와 별 가치가 없는 행위로 구분하여 가치있는 행위를 한 것에 대해 스스로 평가하고 '이런 행위는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야'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행위의 가치를 구분하는 것 자체를 문제로 두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내 힘이 아니야'라는 말 자체를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인간의 행위는 모두 악으로부터 출발할 뿐입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의 행위에 선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결국 이런 선한 행동을 내가 할 수 있느냐? 이것은 내 힘이 아니라는 말을 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다. 송선생님은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과 하나님의 힘으로 사는 것이 구분되어 있습니까? 만약 구분되어 있지 않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힘이고 은혜임을 믿으신다면 굳이 어떤 행위를 구별하여 '이것은 내 힘이 아니야'라고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즉 전부가 하나님의 은혜이며 공급하시는 은혜로 살아가는 것인데, '이것은 내 힘이 아니야'라는 말을 한다면, 결국 삶에서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과 하나님의 힘으로 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 되기에 위와 같은 답을 드린 것입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벧전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4:11-14)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사도바울이 모든 사도보다 자신이 더많이 수고하였다고 하는 말씀에서 바울은 자신을 대견스럽다고 생각하고 또 자신의 행위를 보고 하는 고백일까요?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는 말을 목사님의 시각으로 본다면 바울은 신앙이 없고 아직 행위에 매여서 자신의 행위나 드러내는 사람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것이 내가 아니요 나와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

= 바울은 자신을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한 자신을 바라보며 '이것은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차원의 고백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결국 자기의 수고가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은 수고였다는 것을 드러내는 결과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에는 자기 행위를 바라보는 시각에서의 자기 나름대로의 평가가 실려 있는 것이지만 바울은 자기 행위를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면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뭔가를 끊임없이 하면서 이러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 드린것은 의를 이루기 위한 행위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료된 신자라면 바울처럼 살려고 노력할 것이고 노력하려고 하는 마음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그러한 삶의 모습은 분명히 나타날 수밖에 없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게 되지요.>

= 바울처럼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사도의 삶은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에 마음을 빼앗긴 신자의 삶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대로 살아라는 것이 아니라 사도를 보면서 우리의 마음과 삶이 주님에게서 멀어져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의 삶은 사도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온전히 성령에 붙들린 신자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살려고 노력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바울이 마음을 뺏긴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에 내 마음이 점령당하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신자로서의 삶은 나의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도처럼 살기를 노력하는 마음을 주신 것이 아니라 사도처럼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주님의 피흘리심에 감사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한 것은, 자기가 행한 것을 본받아 실천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본받을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사도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보면서 지금 나의 마음을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살전2:8)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에 관심있어하는 자들에게만 복음을 소개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사명이 복음만 제대로 전하면 되는것으로 생각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목숨까지 주기를 즐겨하기까지 형제를 사랑했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고백적 차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4:28-32)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 (갈 6:9-10)

구원을 얻기 위한 행함과 구원을 얻은 자로서 성령의 힘으로 행하게 되는 행함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고 이것을 똑같은 행위로 취급하는 것은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
= 제가 답변한 내용에는 행함을 위의 말씀처럼 구분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행위를 가지고 구분하는 위험성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송 선생님은 자신의 행위에서 성령의 힘으로 행한 것과 성령의 힘으로 행하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습니까? 착한 일을 하면 그것을 성령의 힘으로 한 것으로 봐야 합니까? 가령 수해를 당한 사람을 위해 헌금을 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기 위한 행함이 되고 어떻게 하면 성령의 힘으로 행하는 행함이 되는 것입니까? 행함이라는 가시적 형태를 두고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부정되어야 할 것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율법에 매인 행위이며 긍정되어야 할 것은 성령의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
=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율법에 매인 행위와 성령의 행위를 어떻게 구분하고 이해하고 계시는지 그것이 궁금 합니다.

##############################################################################################
왕을 주세요2 (삼상 8:10-22)
구득영 2005-04-23 15:13:34, 조회 : 111, 추천 : 11

21. 왕을 주세요2 (삼상 8:10-22)

벌써 4월 달이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고추를 좀 심고, 양파와 마늘을 좀 뽑고, 그리고 모내기를 하고 나면 여름이 성큼 다가올 것이고, "어휴! 덥다 더워" 라고 하다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서 추수를 하다가 보면 벌써 겨울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겨우살이를 하면서 움츠리다가 다시 봄을 맞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이 실감나게 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저 벽에 걸려있는 '달력' 이란 것입니다. 저는 달력을 볼 때마다, "저 달력을 왜 만들었지?" 라고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저런 거 없어도 하늘만 봐도 시간이 너무나도 빨리 지나가는데, 저렇게 숫자까지 적어놓으니 정말 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벽에 걸린 달력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달력을 보면 그냥 1월, 2월, 3월... 그렇게 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지나갈 때마다 연도가 하나씩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2003년, 2004년, 2005년... 이렇게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올해보다는 보다 더 나은 내년이..."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것이 과연 좋을까요? 올해보다는 내년이 더 좋을 것이라고 우리 스스로에게, 자꾸 그런 생각을 집어넣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희망을 주는 것 같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얼마나 스트레스를 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좋아지지도 않았는데 좋아졌다고 스스로 착각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옛날보다 우리가 좀 더 편리하게 살아갈지는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결단코 좋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전화 이야기를 했지요? 제가 자랄 때 시골에서 전화를 하려면 이웃동네에 가서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때는 전화 한 대가 얼마나 비쌌는지, 어떤 경우에는 전화를 설치하려면 전봇대를 다시 세워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마 제 기억으로는 그때 전화기 한 대가 약 20만원인가 했지 싶습니다. 그때 영화가 한 프로 보는데 200원인가 했지 싶은데, 그러면 요즘으로 계산하면 전화기 한 대가 500만원이 훨씬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골에서는 전화는 상상도 못하는 것입니다. 도시에서도 아마 전화기는 잘산다고 하는 그런 기준이 되고 했지 않습니까? 자기 집에 전화기가 있는 사람은 폼을 좀 잡고 말입니다.

이런 것이 없으면 좀 불편합니다. 자동차도 그렇고 말입니다. 없으면 좀 불편하지만, 그렇다고 인생 자체가 좋아진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물질을 통해서 인생 자체를 평가하는 것은 천박한 자본주의라고 합니다. 사실 이것이 오늘날 진리가 되고 말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달력과 같은 것들을 만들어서 "보다 나은 내일을..." 라고 해버리면, 그렇게 되면 무엇이 무시됩니까? 지금 자기가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그것에 대한 감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을 성경은 그냥 좌시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반드시 집고 넘어갑니다.

그것이 성경 어디에 나오는고 하니, 바로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지요. 16절에서 20절 말씀입니다. 찾지는 마시고,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눅 12: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눅 12: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눅 12: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눅 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무슨 이야기입니까? 물론 돈을 좋아하는 것 자체에 대한 책망도 있지만, 그것을 자꾸만 창고에 넣으려고 하지, 지금 자기가 어떻게 사는 삶에 대해서는 전혀 감사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의 삶이 없는데 무슨 미래가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이런 부자는 오늘날에는 대환영을 받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부자가 되었냐고 방송국에서도 초청을 해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박수도 받고 말입니다. "역시 부자는 달라도 뭔가가 다릅니다"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의 평가는 전혀 다릅니다. 20절에서 뭐라고 하십니까?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어리석은 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이 세상과는 정 반대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지금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만 미래를 대비한다고 하면서 창고에 저축을 할까요? 그것은 바로 '두려움'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려고 하니 너무나 두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없애보려고 그렇게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동창회나 계모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교회도 이런 자기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입니다. 아니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 다 그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교회나 동창회 모임이나, 그리고 계모임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절도 그렇고 말입니다. 물론 절은 원래 그런 목적이니 상관이 없지만 말입니다.

여러분, 과연 이런 두려움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입니다. 아니지요. 그것은 마귀에 우리에게 와서 뿌리고 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에 가더라도, 예수를 믿더라도 자기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즉 부자가 창고에 재물을 쌓은 그런 마음가짐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제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 나와서 자기 한 평생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그것은 전혀 믿음생활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마귀의 작전은 대성공이란 것입니다. 평생을 교회에 다니게 해서 마음을 푹 놓게 해놓고는, 마지막에는 지옥으로 데리고 가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조금 전에 제가 읽었던 누가복음 12장 22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눅 12: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뭐 하지 말라고요?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두려움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 가져야 될 물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을 우리에게 준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3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눅 12:31)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구하고 바라야 될 것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나라와 그 의(義), 쉽게 말해서,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과 얼마나 다릅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마지막 심판 때 기준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우리에게 그 기준을 이야기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은 심판 때에 다 나자빠져도 우리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내, 그럴 줄 알았지"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뭐가 잘났다고 그 심판의 기준을 이렇게 미리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그 심판에서 면제까지 시켜주는 것입니까? 우리가 도대체 한 것이 뭐가 있다고 말입니까? 세상 사람들처럼 창고나 짓고, 이웃을 돌아보기는커녕 틈만 생기면 빼앗으려고 했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지난 번 시간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무슨 요구를 했습니까? 자기들에게도 왕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왕을 말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는 너무나 당연합니다. 왕이 있어야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 같은 민주주의 시대에도 대통령이라도 있어야 하고 말입니다. 그래야 나라꼴이 되는 것이지, 그런 왕도 없으면 완전히 나라가 난장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을 얼마나 잘 뽑느냐에 따라서 나라의 운명이 달려있음을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게 아닙니다. "너희들이 왕을 구하는 것은 나를 믿지 못해서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하나님, 그게 아닙니다. 저희들이 하나님을 무시할 리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니, 저희들은 이 땅에서 필요한 눈에 보이는 그런 왕을 찾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어보는 것 아닙니까? 제발 좀 허락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자기 백성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완벽한 왕으로 인정한다면,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뭐가 모자라는 부분이 있으니, 이 땅에서 왕을 세워서 그것을 보충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하나님의 왕 되심에 도전하는 것이고, 전혀 하나님의 택한 백성다운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이러한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왕을 허락하시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엉터리 왕을 만나서 죽도록 한번 고생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이 10절 이하에 나오는데, 12절까지만 읽어보겠습니다.
(삼상 8:10) 사무엘이 왕을 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일러
(삼상 8:11) 가로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삼상 8:12)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앞으로 너희들은 왕의 신하가 되어서, 왕이 시키는 데로 군사훈련도 받아야 하고, 천부장과 오십부장이 되어서 전쟁에 앞장서서 싸워야만 하고, 왕을 위해서 음식도 만들어야 하고, 포도원에서 나는 것도 제일 것으로 드려야 하고, 그리고 왕의 종이 되어서 죽도록 일도 해야 되고, 재산도 왕에게 갖다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그게 힘들다고 아무리 나에게 부르짖어도 내가 응답하지 않겠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지금 마음이 엄청 삐친(?) 것입니다. 단단히 말입니다.

그렇게 해놓고는, 이렇게 해도 정말로 왕이 좋으냐고 다시 한번 더 묻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하는 말이, "그래도 좋사오니 우리에게 왕을 주소서"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제 정신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18절에서 20절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삼상 8:18) 그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
(삼상 8:19)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삼상 8:20)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여기 20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우리도 열방과 같이' 라고 합니다. 아니,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 입에서 튀어나올 소리입니까?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상은 이방민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온데간데없고 왕을 구하는 이 백성들, 그들은 전혀 하나님의 택한 민족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약속을 무시하니, 약속의 땅에서 죽도록 고생하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다시 애굽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날은 불을 보듯이 훤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파란만장한 국가를 이루는지, 앞으로 여건이 허락되는 데로 계속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이게 남의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왕을 원했습니까? 잘 살아보려고 말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말씀드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로 하자면, 창고에 곡식을 보다 많이 쌓아두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오늘날 누구 모습입니까? 바로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사진을 찍어서 타임머신을 타고서 3000년 전으로 올라가면, 우리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과연 우리가 구원받을 자격이 있을까요?

바로 그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여, 어떻게 저 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겠습니까?" 라고 하는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십자가의 피가 얼마나 귀하고 고마운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의 왕 노릇을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그분만이 오늘날 우리의 참된 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세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왕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다 잘 끝났습니다
오용익 2005-04-25 00:08:37, 조회 : 186, 추천 : 17

광주강의 마치고 새벽 한시경에 장례식장에 오셔서 유족들에게 주신 말씀으로 인사를 대신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뒤에는 부활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죽음만 보고 내달리는 삶이 아니라 부활을 보고 내달리는 멋진 삶을 한번 살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다고 해서 돈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뭘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부활을 향해 나아가는 삶으로 다시 만날것을 고대하는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 제사상이 차려져 있고, 서너군데 화투판, 대여섯군데의 술판이 벌어져 있고, 담배연기는 숨막힐듯이 차오르고 있는데 한줌 신선한 산소를 공급받은 것 같은 형제들의 방문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알리지 말라고 부탁했건만 철없는 아내가 일을 저질렀고 그렇게 오시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지만, 언제나 눈치 안보는 복음안에서 자기맘대로만 사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참---.

재미있게 상상해 보세요.

한손에 떡상자, 한손엔 성경들고 불과 5분도 채 머무르지 않을거면서 서너시간을 달려왔다가 말씀만 풀어 놓고 총총히 떠나신 어떤 목사님을요!

밤새도록 일해야 하는 처지에서 비행기 타고 달려와서 위로를 하고 돌아간 형제들도 있었습니다. 그것도 근처에 사는 형제들 두루두루 함께 챙기기 까지 해서요.

고맙다고 해야 할지, 미쳤다고 해야 할지 더 생각해 봐야 되겠지요.

이목사님 손에 들려져서 배달된 떡의 비밀은 퀴즈로 남겨둡니다.

==========================================================================
[re] 다 잘 끝났습니다..위로를 전합니다.
우인숙 2005-04-25 08:01:03, 조회 : 184, 추천 : 19

삼손의 퀴즈(수수께끼)에 비하면 이건 너무 쉽다..
지지난 주일 오후에 교회식구들 전부다 (다해봐야
15명 그중에 목사가3명) 곡성 조집사님

농장으로 출동해서 잔디심는 작업에 동원되었는데
거기서 캔 쑥으로 공부하는날 떡을 해오기로 한거...

손이 큰 집사님이 각 목사님네 한 박스씩인데 이 목사님
몫까지 거기다 ....

목이 길어 슬픈 (?) 우리 구 자근 사모님 모습이 아른거려
이 목사님 따라붙어 가고싶었지만 왠 걸림돌이 이리 많은지???

시종일관 제일 열강하신 날이었는데 녹음기가 놀랬는가
녹음도 잘 안되고.....

다음달 공부전에 한번 뭉쳐 봅시다^^*

==========================================================================
[re] 퀴즈 답
이근호 2005-04-25 06:50:17, 조회 : 164, 추천 : 16

>광주 조집사님께서 오목사님 댁 드시라고 집에서 일부러 만드신 쑥떡입니다.

##############################################################################################
러셀의 기독교 비판
구득영 2005-04-26 00:17:25, 조회 : 173, 추천 : 18

러셀의 기독교 비판

이제 도덕적 문제로 넘어가 보자. 내가 볼 때 예수의 도덕적 성격에는 대단히 중대한 결함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그가 지옥을 믿었다는 점이다. 나는 누구든 진정으로 깊은 자비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영원한 형벌 따위를 믿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서에 그려진 대로라면 예수는 분명히 영원한 형벌을 믿었으며, 자신의 설교에 귀 기울이려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보복적인 분노를 터뜨리는 대목이 수 차례 발견된다. 이러한 태도는 평범한 설교자들에게서는 보기 드문 것도 아니지만, 훌륭한 존재가 그랬다는 것은 어쩐지 그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에게서는 그러한 태도를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자기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매우 부드럽고 점잖았음을 보게 되는데 내 생각에도 격분하는 것보다는 그 쪽이 훨씬 성자다운 태도가 아닐까 싶다. 아마도 여러분은 소크라테스가 죽어가면서 한 말이라든지, 자기와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 늘 했던 말들을 기억하실 것이다.

여러분은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보게 된다. '너희, 뱀의 무리,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찌 지옥의 저주를 면하겠느냐?' 예수가 자신의 설교를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한 말인데, 내가 볼 때는 결코 좋은 어조가 아니다. 복음서에는 지옥을 언급하는 이런 말이 대단히 많다. 성령을 거역한 죄악에 대하여 언급한 유명한 구절도 있다. '누구든 성령을 욕되게 말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용서받지 못 하리라.' 이 구절은 이 세상에 말할 수 없이 많은 불행을 가져왔다.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보니 모두 성령에 대해 죄를 지은 것 같아 모두들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용서받지 못하겠구나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진실로 자비로운 성품을 지닌 사람이라면 결코 그와 같은 공포를 이 세상에 심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수는 또 이렇게 말한다. '인자가 그의 천사들을 보내어 그의 왕국에서 거역하는 자와 부정하는 자를 모두 거두어 불가마에 던져버리리니, 거기서 통곡하고 이를 갈게 되리라.' 통곡하고 이를 간다는 대목을 예수는 이어지는 구절에서도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읽는 사람으로서는 예수가 통곡하고 이를 가는 장면을 떠올리며 어떤 쾌감을 느낀 건 아닌가 의심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처럼 자주 언급될 리가 없다.

다음으로 여러분은 양과 염소에 관한 대목을 기억할 것이다. 재림이 일어날 때 양과 염소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얘기하면서 예수는 염소들을 이렇게 말한다. '너 저주받은 자여, 내게서 떠나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계속해서 '이들은 영원한 불 속에 사라지게 하라.'고 한다. 이어 다시 이렇게 말한다.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 속에 들어 가는 것보다는 불구의 몸으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이 얘기 역시 예수는 계속해서 되풀이한다. 나는 죄에 대한 형벌로서 지옥불로 다스려야 한다는 이 모든 교리가 잔인한 교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세상에 잔인성을 심고, 대를 잇는 잔인한 고문에 정당성을 부여한 교리다. 그렇게 된 원인을 따져 볼 때, 복음서 기자들이 묘사한 대로라면 분명 복음서의 예수에게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중요성은 다소 덜하지만 그밖에 다른 예들도 있다. 이를테면 가다렌(Gadarene) 지방의 돼지떼에 대한 대목에서는 정말로 무자비하게도 마귀를 돼지들 속에 들어가게 하여, 온 돼지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 속으로 빠져버린다. 여기서 여러분은 예수가 전능자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그저 조용히 그 마귀들을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귀들을 돼지들 속에 들여보냈다.

이번에는 들을 때마다 늘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무화과 나무에 관한 희한한 얘기가 있다. 여러분도 잘 아는 얘기지만 그 내막은 다음과 같다. "시장기를 느낀 예수가 멀리 서 있는 이파리 무성한 무화과를 보고 먹을 것이 있을까 하고 그리로 갔다. 무화과 나무에 가보니 아직 열매 맺을 때가 되지 않아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 예수가 나무에게 이르기를 '지금부터 영원히 아무도 네 열매를 먹지 못하리라.'하니... 베드로가 예수에게 말하기를 '주여, 주께서 저주하신 저 무화과 나무를 보소서, 시들어 버렸나이다.'고 하였다."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무화과가 열릴 철도 아닌데 나무를 탓하다니 말이다. 나로서는 도저히 예수가 지혜로 보나 도덕성으로 보나 역사에 기록된 다른 사람들만큼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석가나 소크라테스를 예수 위에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re] 오늘날 기독교와 같음
이근호 2005-04-26 08:02:53, 조회 : 212, 추천 : 23

교회란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어야 성업이 가능합니다.

사회란 서로들 마음이 하나로 통해서 지탱되는 법입니다.

쪼개지고 또 쪼개지면 조직체 자체가 위기감을 갖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라는 조직체도

목사나 장로나 할 것없이 한 사람이라도 더 회원으로 삼기 위해 러셀과 같은 신앙심으로 열심히 활동들을 하고 있습니다.

러셀과 같은 신앙심이 아니라면 오늘날 목회해봤자 백발백중 실패합니다.

그리고 러셀과는 반대 의견을 가지고 오직 성경만을 고집하는 자는

목회 세계가 아니라 아예 이 시대 자체에서 퇴출당하게 됩니다.

감히 이 시대가 무슨 시대인데 지옥을 운운합니까!

성경에서 말한 것이 과연 사실이냐 하는 것을 이미 수천년 동안 실험과 검증을 거쳐왔습니다.

결론은

성경을 믿는 놈이 바보이며

성경의 모든 내용은 구라(거짓말)라는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지옥도 없을 것이며 예수도 구름타고 오지 않을 것입니다.

신학생이든지 아니면 신학교 교수가 되었든지 상관없이 이 점을 마음 깊숙히 믿고 있는 바입니다.

(모두들 쉬쉬하지만)

정말 예수를 위하여 죽겠다고 나서는 정신이상자가 자가 아닌 이상 성경은 협박과 공갈이 뒤범벅된 천박스러운 고대 서적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요즈음 교회들은 모두 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이기에

성경에서

윤리적인 면만 취사선택해서 강론합니다.

교회가 해체되지 않고, 목사도 직업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러셀은 가장 정직한 사람입니다.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나와 너희는 누구냐?"(사도행전 19:15)

##############################################################################################
[묵시와 역사]38-손성식 목사
송재원 2005-04-30 16:01:09, 조회 : 140, 추천 : 15

『묵시와 현실』

【복음과신학】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신학은 유성이 아니라 지층이지요. 신학 한다는 것은 지층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지층은 무엇일까요? 역사의 퇴적층입니다. 즉, 시간 속에 무수히 반복된 사상의 흔적이지요. 지층이 고착화되면 전통이 됩니다. 그러므로 전통은 역사의 퇴적물이지, 진리 그 자체는 아닙니다. 또한 지층은 밋밋한 퇴적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통과 전복이라는 격렬한 투쟁의 사상사적 층위를 이룹니다. 한스 큉이 『그리스도교』에서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는 "패러다임"이 제가 언급하고 있는 지층과 유사한 이미지입니다.

혹시 지층화 되기 이전의 상태, 지층화가 발생하지 않은 상태를 상정할 수 있을까요? 한스 큉은 "원 그리스도교"라고 말합니다. 우리쪽에서는 일반적으로 "초대교회"라고 부르지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은 순수하다는 것이지요. 그 내용을 우리는 신약성경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도 이미 복음이 왜곡되는 상황들이 발생한다면 어떨까요? 성경은 유성이고 신학만 지층일까요. 아니면 이미 성경 안에 지층적 요소가 자리잡고 있는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 이미 성경은 지층입니다. 어떤 지층일까요? 유성으로서 복음과 충돌한 역사의 지층입니다.

성경은 격렬하게 싸우는 장(場)입니다. 이미 자본에 잠식되어 버린 교회들이 떠드는 "사랑타령"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 땅의 껍질을 하나라도 남김없이 벗겨서 그 허울을 들추어내시는 분입니다. 이 땅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모든 희망의 신학과 투쟁하시는 분입니다. 어떤 모습으로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으로서 입니다. 무엇 때문 에요? 욕망 하는 인간의 죄 때문이지요. 뭐라고 고발할까요? 욕망 하는 것만 죄가 아니라, 욕망 하는 바로 그 인간이 죄인 이라구요. 여기서 "죄가 문제지 인간이 무슨 잘못이 있느냐?"는 푸념은 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죄가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아담세계라고 그러지요.

아담세계는 항상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지독하게 주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결과로 아담세계는 복음과 항상 충돌하게 되어 있지요. 성경은 유성으로서 복음이 아담세계로부터 충돌한 지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라는 교회사의 지평에 확산된 것이죠. 그러므로 성경을 들춰서 찾아보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피 터지게 싸우시고 계시는 대상의 정체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자, 그럼 복음의 충돌현장으로 가봅시다. 먼저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이스라엘 속으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언약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서 계신 자리는 언약지대입니다. 민족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언약 중심입니다. 언약의 중앙에 예수님이 서 계신 겁니다. 왜요? 하나님의 이름이 언약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이 땅에 자리잡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혹, 어떤 사람들이 성경을 편협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은 언약의 장(場)을 통해서 활약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런 무지는 아담세계에서 보편적인 것입니다. 기억 할 것은 아담세계의 여론향방이 언약세계를 좌우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언약은 아담세계의 여론수렴을 통해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의 일방적 활약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만난 세력은 국가 권력으로서 아담세계의 권력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귀와 충돌했습니다. 예수님이 마귀와 충돌했다는 것은 아담세계가 독자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배후세력에 의해서 조종당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죠. 현대라는 장(場)에서 제일 거부하는 것이 있다면 아마 마귀의 존재일 겁니다. 비종교적이고 과학적 사고방식에 있는 현대인에게 마귀의 존재란 단지 신화에 불과한 유적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아마 루돌프 불트만은 현대인과 접촉하는 실마리로 비신화화라는 거창한 선교를 시작했지 싶습니다. 하지만 비신화화에 대한 불트만의 노력은 복음이 역사에 의해서 세속화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지요. 왜요? 묵시와 역사의 충돌현장이 합리적 이성아래서 이해현장으로 바뀌니까요. 즉, 아담세계가 수긍할만한 내용으로 묵시가 역사로서 조작되겠지요. 이런 해석학적 노력의 와중에서 배태된 것이 물론 성경비평 입니다. 이성적 주체로서 자신을 재확인한 아담세계의 노력이지요. 한데 재미있는 것은 이런 노력의 결과로 파생되는 것이 소외된 계층의 혁명을 위한 신학이라는 겁니다. 민중신학, 해방신학, 여성신학등. 이것은 성경을 언약에서 시작하지 않고, 아담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외"라는 죄 문제를 소외된 부류에서 해결하려는 신학적 노력이지요. 즉, 역사적 유토피아니즘입니다. 아담세계 자체의 분출물이죠.

이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대표자가 바로 맑스와 엥겔스입니다. 이 둘을 제외하고 이 땅에서 양산되는 메시아 왕국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초기 자본주의라는 장(場)에서 인간(노동자)소외의 극복을 위해서 혁명과업을 수행하고자 했지요. 사유재산의 폐지를 통해서 모든 노동자가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꿈꿨던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이루려는 모든 노력도 역사적 지층의 퇴적암으로 자리잡고, 후기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제국이 세워져 있는 것이 현실이죠.

자, 제자리로 돌아와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마귀의 세력입니다. 그는 마귀를 통해서 아담세계의 처지를 확인한 것입니다. 아담세계의 사망과 죽음의 현장은 마귀에 의해서 조작된 것이었습니다. 묵시적 인격체로서 예수님이 역사를 거부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마귀에 의해서 조작된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싸움은 아담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싸움이 아니라, 아담세계를 조작하고 있는 배후세력을 철거하는 활약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현장을 통해서 확인된 십자가 사건의 승리는 마귀의 세력을 무력화시킨 묵시적 활약상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도란 예수님의 활약상으로 인해 십자가의 현장에 있는 자들이지요. 성경을 십자가의 현장으로 보고, 자신의 터전을 십자가의 현장으로 확인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나 교회사라는 지층은 십자가 사건의 폭발로 생겨난 생명의 자리입니다. 아담세계의 배후세력인 마귀가 무력화되고, 아담세계가 항복 당하는 현실이 발생하는 장(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십자가의 터전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지, 전통이나 권력체제로 유지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
[묵시와역사39]-손성식목사
송재원 2005-04-30 16:01:41, 조회 : 160, 추천 : 17

『묵시와 현실』

【복음의 성공과 실패】

현실세상을 들여다보면 아이러니 한 대목들이 많습니다. 개중에 한 가지가 복음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판단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의 성공과 실패를 세상의 형편으로 평가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 같습니다. 즉 현실에서 경험하는 부조리와 불평등과 모순들을 통해서 복음을 평가하려는 모습입니다. 저는 이러한 저들의 주장에서 조작된 복음의 왜곡된 현상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말합니다. "복음은 이 땅에서 발생하는 모든 전쟁을 종식시키고, 궁핍과 고통을 몰아내고, 세상을 바로잡고, 불공평을 철퇴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주장의 내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동의하십니까.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런 내용이던가요. 저는 이런 주장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음의 고유한 내용이 아니라, 이 땅에서 생산된 조작된 복음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저는 복음의 묵시적 성격이 이러한 유토피아를 거부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결코 그런 일을 하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자, 우선 위에서 언급한 복음의 성공과 실패를 현실세상의 판단은 주제 넘는 대목임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는 입장에 우리가 자리잡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복음의 성공과 실패를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지 우리의 복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도 자의적으로 자신만의 복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땅에서 생산되는 복음과 날마다 충돌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위에서 복음의 묵시적 성격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시겠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본능적인 나의 복음과 날마다 충돌하시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란 항상 우리를 항복시키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제 핵심적인 부분으로 넘어갑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은 이 땅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언약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부분이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유토피아를 위한 언약이 아니라, 언약의 완성으로 인해서 생성된 죄의 용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갑자기 너무 비약시켰나요. 좀 다르게 말한다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인간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조작시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그것을 거부합니다. 복음은 언약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의 완성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전혀 다른 접근입니다. 한쪽은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고, 다른 쪽은 예수님의 필요 하에서 죄인이 용서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음이 제대로 된 구실을 한다면 전쟁이 없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전쟁과 난리의 소문이 있을것이다"라고 했고,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소돔과 고모라에 있었던 일과 같이 인자가 나타날 때에도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쟁을 불식시키겠다든지, 세상을 고치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왜요? 이 땅은 수선하고 복구할 수 있는 장(場)이 아니라 심판의 장(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애써 부인하려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보편적으로 기뻐 할만한 가짜 복음을 생산해내고 있는 것이죠.

이런 맥락에서 저는 복음을 자의적으로 조작해내는 세상의 움직임을 아담세계라고 지칭합니다. 아담세계는 복음의 묵시성을 교묘하게 역사의 발전상으로 변절시키려는 의도를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어떤 사상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단결된 힘이죠. 그러므로 아담세계에서 조성된 바벨탑은 단순한 조형물로써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담세계의 힘을 하나되게 하는 권력 체제이며 세계 질서였던 것입니다. 하나의 언어, 하나의 욕망, 하나의 힘이 결집되어 이룩한 것은 피조물의 자리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었습니다.

현실세계에서의 복음의 싸움은 교파나 종파의 싸움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회활동이나 윤리적인 결실의 문제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진짜 싸움을 방해하는 가짜들입니다. 진짜 싸움은 복음의 묵시성을 교묘하게 역사의 발전상으로 변절시키는 조작된 복음과의 투쟁에서 일어납니다. 이 땅은 유토피아를 생산해내는 복음을 교회에 요구합니다. 그들의 단결된 여론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땅을 이미 심판의 장(場)으로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말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아시겠지요.

##############################################################################################
어떤 목사님의 안식
이근호 2005-05-12 11:09:18, 조회 : 341, 추천 : 16

생계곤란 목사 평일 '막노동' 중 사망…'업무상 재해' 논란

근로복지공단이 공사현장에서 일 하다 쓰러져 숨진 한 개척교회 목사에 대해 "과로사가 아니다"라며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지 않아 논란이 일고 있다.

전남 화순의 한 개척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던 이모 목사(52)는 교회 규모가 적어 생활이 어렵게 되자 지난 2002년부터 평일에는 제조업체나 공사장에 나가 일을 하고 주말과 주일에는 목회활동을 해 왔다.

이 목사는 그러던 중 지난 2003년 11월 전남의 조경공사 현장에서 일을 하다 갑자기 쓰러져 숨지고 말았다.

이후 이 목사의 아내는 남편을 대신해 가장 역할을 하며 날품팔이를 하는 등 근근히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평일에는 제조업체, 공사장 등서 '일', 주말엔 '목회'…아내도 날품팔이로 근근히 생활

유족들은 "이 목사가 과로로 인해 사망했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업무상재해 신청을 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측은 이 목사의 사망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과로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지난 4월초 업무상 재해 신청을 기각했다.

이와 관련해 민주노총 광주전남본부는 이 목사가 한동안 일을 하지 않다가 사망당일 경사가 가파른 산에서 갑자기 힘든 일을 해 과로사한 것으로 명백한 업무상 재해라고 주장하고 있다.

민주노총 광주전남본부 법률원 신명근 노무사는 "근로복지공단 자문의사협의회가 이 이 목사의 사망원인을 심근경색으로 추정된다는 의견을 냈다"고 밝혔다.

특히 신 노무사는 "산업재해보상법에 이 목사와 같이 심근 경색으로 사망한 경우 평소보다 업무량이 30퍼센트 이상 급격히 증가했거나 극도로 힘든 작업환경에서 일을 했다면
업무상 재해로 볼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 광주전남본부 법률원측은 지난 4월 말 업무상 재해 재심사를 청구한
상태다.

공사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다 갑자기 사망한 한 개척교회 목사에 대해 근로복지공단이
어떤 결정을 내릴 지 주목된다.

CBS 광주방송 이승훈 기자

◁ 이전글

다음글 ▷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48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4,967 묻고답하기 [황교수 사건에 대한 다양한 시각 중에 한가지] 2005-12-27 - 최고관리자 07-03-13
4,966 묻고답하기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야기된 비복음적 행태] 2005-12-14 - 최고관리자 07-03-13
4,965 묻고답하기 [아빠방(묵시와 역사 등)을 읽고] 2005-10-20 이사야 최고관리자 07-03-13
4,964 묻고답하기 [욕망의 신학 & 사람의 일] 2005-09-29 [신학] 최고관리자 07-03-13
4,963 묻고답하기 [교회는 성직자(목사)가 필요한가?] 2005-09-27 - 최고관리자 07-03-13
4,962 묻고답하기 [난해 구절-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 2005-09-26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7-03-13
4,961 묻고답하기 [가증스러운 검경찰들] 2005-09-14 - 최고관리자 07-03-13
4,960 묻고답하기 [악마의 진격] 2005-08-15 [신학] 최고관리자 07-03-13
4,959 묻고답하기 [요 7:14-24 “보내신 이의 영광” ] 2005-07-09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7-03-13
4,958 묻고답하기 [믿음이란 무엇인가?] 2005-06-03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07-03-13
열람 ➜ 묻고답하기 [행위에 대하여... ] 2005-04-17 역대하 최고관리자 07-03-13
4,956 묻고답하기 [한국교회의 현실과 제언] 2005-03-29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07-03-13
4,955 묻고답하기 [자의적 해석] 2005-03-27 [신학] 최고관리자 07-03-13
4,954 묻고답하기 [사람의 욕망은 과연 악의 축인가?] 2005-03-25 - 최고관리자 07-03-13
4,953 묻고답하기 [믿음의 층위] 2005-03-18 - 최고관리자 07-03-13
4,952 묻고답하기 [무신론] 2005-02-18 - 최고관리자 07-03-13
4,951 묻고답하기 ['도파민'의 유혹] 2005-02-06 - 최고관리자 07-03-13
4,950 묻고답하기 ["도파민"의 유혹] 2005-02-06 - 최고관리자 07-03-13
4,949 묻고답하기 [이근호 목사를 추종하는 자는 지옥갑니다.] 2005-01-10 - 최고관리자 07-03-13
4,948 묻고답하기 [프란시스 쉐퍼에 대해서] 2005-01-02 - 최고관리자 07-03-13
4,947 묻고답하기 [희생양의 의미] 2004-12-27 - 최고관리자 07-03-13
4,946 묻고답하기 [인격성에 대하여] 2004-12-16 - 최고관리자 07-03-13
4,945 묻고답하기 [겨울 수련회를 대비한 공부 - 사회론의 기초 2] 2004-12-15 - 최고관리자 07-03-13
4,944 묻고답하기 [겨울 수련회를 대비한 공부 - 사회론의 기초 1] 2004-12-15 [수련회] 최고관리자 07-03-13
4,943 묻고답하기 [십자가를 모르는 자의 '자기 존재성 구축'] 2004-12-04 - 최고관리자 07-03-13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