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현실과 제언] 2005-03-29
[한국교회의 현실과 제언] 2005-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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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현실과 제언
김상욱 2005-03-29 23:38:53, 조회 : 422, 추천 : 36
저는 한국교회 안에서 세례를 받고, 번역된 성경으로 말씀을 듣고 그 당시 나름대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 한지 25년 만에 로마서를 통해 그리스도안에 있는 갖가지 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얻은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원수에게는 훼방의 빌미를 기대를 걸고 있는 형제들에게는 실망을 안겨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한국교회에 대한 사랑과 안타까움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한국과 전 세계에 전할까 고민하는 아주 작은 자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죤 듀이의 교육이론을 따른 지성적인 경건주의와 동양신관적인 신앙을 교회에 그대로 접목한 감성적 열광주의로 양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쓴 다음, 육체로 우경화 되는 것을 보고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고 세상으로 좌경화 되는 모습을 보고 고린도전서를 기록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금 한국교회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습니다.
제 나름대로의 원인 분석은 약간 세대주의 맛이 나는 조직신학의 득세와 성령론이 미약한 성경신학이 원인이며, 거기다가 실용주의 종주국인 미국의 한 신학교의 교수가 집대성한 적극적인 사고방식과 복음을 혼합시킨 신 복음주의에 의한 교회 성장이론을 너도나도 받아들여 교회부흥에 접목시킨 결과이기도 합니다.
어쩜 뱀의 물을 온 땅이 흠뻑 삼킨 꼴이 되고, 남은 자는 도망 다니는 형국이 되어 버렸습니다(계12장)
그러던 중 선교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전도 운동을 일으켜 적잖은 영향을 미친 적도 있습니다(74년, 80년) 그러나 전도 운동에는 자극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운동은 운동으로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들이 가지고 있는 자료는 퍼즐 맞추기와 같아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나타나지 않으므로 진리의 성령의 역사를 체험 할 수 없고 구원받은 그 이후의 양육은 교육이론을 따른 또 하나의 지성적인 경건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강해설교 곧 귀납적인 설교와 제자 훈련등이 한국교회에 도입이 되어 많은 교회에서 이를 시행하여 양적인 부흥과 성경을 읽고 그 요구를 삶에 적용하려는 몸부림을 쳐 보는 계기만 되었을 뿐 교회 체질을 갱신하는 데는 절대적인 방법이 될 수 없음이 입증되었습니다. 그 근거로는 그토록 제자 훈련에 열중하던 한 목사가 쓰러진 다음 다시 일어난 뒤의 제 일성이 오직 성령만 전하겠다고 공언하므로 그 한계를 노출했습니다.
그 말은 맞습니다. 칼빈은 지성과 경건, 신학과 영성을 조화시키는 비결은 오직 성령 밖에 없다고 피력했습니다. 사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호 로고스)에 의한 성령의 능력과 지혜만이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귀납적인 강해도 결국은 교육이론에 따를 수밖에 없으므로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는 없고, 오직 이성으로 아는 만큼 실천하려는 안간힘의 부담만 신자들에게 안겨주는 무거운 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혜성처럼 미국에서 공부한 신학자들에 의해 구속사적인 언약의 성취 곧 하나님의 약속을 원근통시적인 안목으로 보는 성경해석과 설교의 유형이 도입되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가장 성경과 일치하는 방법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속사적인 관점으로 성경의 스토리를 구약부터 시작해서 언약의 성취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기가 막힌 실력을 보며 감동해 하는 것 까지는 좋으나 많은 분들이 십자가 예수 까지는 잘 끌고 와서 거기서 부터는 목회적인 수사로 얼버무리고 마는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고 십자가까지는 성경의 지원을 받는 신학적인 용어로 자신 있게 끌고 와서는 그 다음부터는 어휘가 분명치 않게 됩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이후부터는 보혜사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비밀의 경지입니다. 요12:36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숨으신 것을 봅니다. 그 다음 제자들만 영접하시고, 끝(테로스)까지 사랑하시고 그의 처소로 이끄십니다.
성경에는 말씀을 자신의 자랑이나 대가를 바라는, 다시 말하면 이용하려 한다든가 설교를 잘해서 교회 부흥을 꾀한다거나 자료화해서 사고팔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열리지 않는 문이 있습니다. 문이 있다는 말은 나가고 들어감이 제한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아직 까지 명쾌하게 열리지 않고 있으므로 한국교회는 원 복음에서 파노라마처럼 멋지게 예수, 피, 그리고 십자가까지는 제대로 끌고 와서는 새 언약이 이루어 진 사실과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 복음의 실체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합니다. 구약과 공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사역에 대한 설명은 명료하지만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3)는 말씀은 장차 갈 천국을 연상하는 정도의 믿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성경은 구약을 덮은 수건은 십자가 앞에서 벗겨지는 것이 아니라 주(Lord) 곧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면 벗겨진다고 했습니다(고후3:16)
그러므로 예수라고만 하지 말고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면 그 분의 대접이 훨씬 달라질 것입니다. 노무현이 보다는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말이 그 분에게는 좋은 호칭인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 안에 계시지 않으면 그가 하신 일에 대한 효력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피의 효력도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도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실 때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역사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십자가의 효력과 그 능력을 우리에게 극명하게 드러내십니다.
문제는 십자가 앞에서는 성령의 임하심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순절은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다음의 절기이듯이 성령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뒤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 때부터 예수는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고 그 감동이 우리를 붙잡으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선물로 받는 방법도 성경은 “회개, 세례 죄 사함 그리고 성령을 선물”(행2:38)이 동일 선상에 있음을 말씀 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다시 살아 새 생명 가운데 행하기 위한 믿음의 의식이지요.
결국 십자가의 도는 이 질그릇 속에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갈2:20)과 왕으로 나를 주장하시는 것을 믿는 다시 말하면 정권 교체이기도 하고, 주체를 바꾸는(exchange) 영적인 장치 인것입니다.
분명 그리스도는 예수이심과 동시에 임마누엘이십니다(마1:21,23)
그래서 그 토록 잘난 척 하는 사람이 많은 고린도교회를 향한 결론 부분에 바울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지 않으면 너희는 버리운 자니라”(고후13:5) 라고 일갈 합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나 주의 종의 개개인의 구원의 진보를 위해서도 마태복음의 산상보훈과 요한복음과 로마서 그리고 히브리서와 요한서신이 창세기 1장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성취되고 있는지 그 흐름을 구슬처럼 꿰는 관점으로 구속사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외의 성경이 다 중요합니다만 줄기를 잡자면 그렇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창세기부터 굉장히 호기 있게 끌고 와서는 십자가의 벽을 넘지 못합니다. 공간 복음 이상의 벽을 넘지 못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성취를 동심원적인 흐름으로 온전히 풀고자 하면, 십자가의 고난 받으신 후의 인자가 우리에게 성령과 함께 우리 안에 임하신 사실을 믿는 믿음에 서서 구약을 뒤돌아보고 난 뒤(그 곳이 정확한 문) 그 관점으로 창세기부터 계속 내려오면 계시록 까지 거침없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계시록 강해를 실패하는 이유는 성경 65권을 모르고 계시록 한 권만 알려고 매달리니 억지를 부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후에 얻으신 영광(벧전1:11)을 아는 자가 십자가의 도를 증거 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나타 날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 공부하러 갔을 때 제임스 케네디 목사(전도 폭발 창시자)에게 미국 교회에서 은사 운동을 많이 하는데 롬6:23절의 “하나님의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라는 이 은사는 미국교회에서 어떤 위치입니까? 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답을 우물쭈물하고 마는 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만큼 미국에서도 말로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다고 하지만 그 실체에 대해서는 막연하다는 의미일 겁니다.
그리고 레이먼드 교수(조직신학으로 제법 유명)가 그의 저서에 서명을 해 줄 때에 갈6:14절을 적어 주었는데 그 때 저는 사실 6:15절을 더 좋아한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 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14) 여기서 예수가 아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라는 대목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마냥 매달려 있는 곳이 아니라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편승해서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15) 그리스도의 십자가(성경은 예수의 십자가라 하지 않음)는 새로 지음을 받은 자와 연결이 되지 않습니까? 여기서부터 겉 사람은 후패해 지고, 속사람은 새로워지는 선한 싸움이 시작이 됩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신자가 신자다워지는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의 대속의 은총으로 우리 안에 나타난 복음의 능력을 얼마나 알고 붙잡고 있느냐는 싸움일겁니다. 십자가의 도(The massage of the cross NIV) -십자가만이 아니라 십자가의 말씀(호 로고스)-의 능력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입니다(고전1:24).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능력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죽은 몸을 다시 살리실 능력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여기서 부터 그리스도의 영이 신자의 심령에 빛과 생명과 사랑으로 나타나고 발전해 가는 것입니다.
이 길에서 신자다운 모습과 향기와 열매가 나타나고 하나님께는 영광이며, 본인에게는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 길만이 한국교회가 개혁(Reform)될 수 있고, 하나님께로 난 자 곧 택한 자들이 온전한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어 하늘에 속한 거룩한 백성으로서 그 능력을 나타낼 수 있다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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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한국교회의 현실과 제언
이근호 2005-03-30 01:16:33, 조회 : 314, 추천 : 34
성령의 사역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는데 있습니다.
그 근거는 오로지 십자가 뿐입니다.
거기서만 "다 이루었다"가 성립됩니다.
그런데 귀하께서는
인간의 종교적 이상성을 포기하지 않기에
성령안의 삶을 가지고 "다 이루었다"로 간주하고자 합니다.
그렇게해서 남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완성도 있는 그 무엇, 그것에 구미가 당겨 그것을 소지해서 자랑스러워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마귀가 그것에 기죽어 하겠습니까?
마귀가 바보입니까?
복음과 복음으로 이용해서 채우려는 인간의 신비적 욕구 충족도 제대로 분간 못할까요?
귀하께서는 기본적으로
복음의 증인이 아니라 복음의 유용성의 증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라 종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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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손성식 2005-04-05 21:44:02, 조회 : 337, 추천 : 21
『묵시와 현실』
【싸움】
나는 얼마 전에 언어는 자의적이라고 말했었지. 그러면 왜 언어가 자의적일까?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이 자의적이기 때문이야. 그래서 "자의적"이라는 말의 뜻이 "마음대로"인 거야. 즉, "마음대로"하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해. 이런 내용은 사사기를 끝맺고 있는 구절의 내용을 떠올리게 해. 뭐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21장 25절)라는 거잖아.
왕이 없으므로 각기 자기 마음대로 행했다는 사사기의 마지막 언급은 상당히 아리송해. 왜냐하면 이 말은 왕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하지만 사사기 이후를 보면 왕이 있더라도 자기 마음대로 한단 말이야. 어느 정도까지? 왕이 된 자들까지 그렇잖아. 그렇다면 "왕이 없으므로"라는 사사기의 언급은 단지 "왕이 있었으면 될텐데!"라는 희구성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을 선택과 언약의 역사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의 자의성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애.
사실 구약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깨달음의 자비스러운 부처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싸우시는 여호와의 이름이 활약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 싸우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야. 하나님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활약상이야. 피 터지게 싸우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활약상이 안 보이면 뭐가 문제인가 하면 이미 인간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거야.
그러므로 성경은 자의적인 인간과 싸우시는 하나님의 역사야. 내가 얼마 전에 한스 큉 신부의 『그리스도교』를 읽으면서 기독교 역사는 욕망 하는 인간의 배설물이라고 했잖아. "박해받던 교회가 박해하는 자리"에 처하게 된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욕망 하는 인간을 부추켜 세워서 복음을 왜곡시키며 발악하는 사단의 활약상이지. 그렇다면 기독교 역사속에서 성령의 역사는 어떨까? 박해받던 시기에는 거시적으로는 제국으로부터 고난당하고 미시적으로는 일가친척으로 박해받았어. 그리고 교회가 박해하는 자리에 처한 경우에는 오히려 교회로부터 박해받은 거야. 그러므로 이것만은 기억해야해. 그리스도의 몸이 생성되는 자리는 십자가의 자리뿐이라는 거야. 철저하게 힘없는 자리야. 이런 맥락에서 현실교회를 보면 교회가 십자가의 장(場)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힘의 장(場)에 서있는 것 같애. 현실 교회는 예수님을 믿지 않아. 단지 자본에 기대고 있지.
내가 쓰고 있는 타이틀이 [묵시와 역사]잖아. 여기서 묵시라는 것은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묵시적 인격체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도 동일한 묵시성을 띈다는 거야. 어떤 묵시성이냐 하면 이 땅으로부터 피어오르는 힘을 거부하고 십자가의 현실을 경험한다는 의미에서지. 사실 이 묵시라는 말이 매우 중요해. 왜냐하면 유일무이하게 교회의 실체를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지.
혹시 미국 여성 신학자 R.R. Ruether의 『메시야 왕국』(한국신학연구소)의 내용을 읽어봤어. 그녀의 관심사는 나와 상당히 비슷해. 어떤 맥락에서냐 하면 묵시와 역사와 관계성을 말하고 싶다는 의미에서 그래. 하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상당히 견해를 달리하는데, 그녀는 묵시가 역사 안에서 새로운 질서를 가지고 운동해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그녀는 복음을 새로운 사회질서의 대두로 보고, 기독교를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혁명의 운동으로 보지. 그러니 결국 구원이란 개인적인 구원이 아니라 공동체적 구원이고 사회적 구원이야. 이것을 좀 쉽게 말해볼게.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는 개인적인 구원에 대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지. 즉, 구원은 개인적이지. 하지만 본 서는 개인적인 구원을 넘어서서 사회가 구원받아야 한다는 거야. 왜냐하면 사회가 변하지 않으면 구원은 미숙한 내용으로 남게 된다는 거지. 그래서 그녀는 묵시가 역사 속에서 새로운 질서로써 몸부림 친 흔적을 보이자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이 "변혁(레볼루션)"과 "실천(프락시스)"이야. 예배당 안에서만 외치는 복음은 가짜라는 거지. 어때?
사실 류터의 견해는 내가 경험하는 사상세계에서 만연하고 있지. 현대 철학의 마르크스-질 들뢰즈, 가타리를 중심으로 한 사상이나, 이들의 사상을 추종해서 자신의 견해를 내뱉는 진 중권(미학 오디세이 이외에 많은 저술들), 이 진경(노마디즘외 많은 저술들), 이 정우(시뮬라크르의 시대외 많은 저술들), 안토니오 네그리(제국)등등. 수 많은 사상가들이 이 땅의 사회질서 혁명을 위한 메시야니즘을 꿈꾸고 있지. 내가 잘 아는 위르겐 몰트만이나 한스 큉도 마찬가지지. 그리고 전에 서평 했던 한스 요아킴 크라우스의 『조직신학』이나 게르하르트 로핑크의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는가』나 레오나드로 보프의 『교회:카리스마와 권력』등도 마찬가지지. 너무 거칠게 말한 부분이 있지만, 이들을 공통으로 묶고 있는 것은 사회질서의 유토피아야. 새로운 세상을 이 땅에서 꿈꾸고 있다는 거지.
하지만 나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고 보는 거야. 이 땅은 묵시를 건설하는 현장이 아니라 묵시를 확인하는 현장이라구. 너무 어렵게 얘기했나. 다르게 얘기할게. 이 땅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터전이 아니라, 예수님이 왜 다시 와서 심판해야 하는지를 확인하는 십자가 사건 현장이라는 거야. 알았지.
그러므로 복음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께서 싸우고 계시다는 거야. 어떤 내용 때문에? 자의적인 인간이 자의적으로 이 땅에 건설하려는 모든 메시야 왕국의 거짓됨을 확증하시기 위해서 그래. 이런 맥락에서 성도란 자의적인 자신의 실체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현장에서 확인 받고, "예수님 고맙습니다! 나의 죽음은 당연합니다."라고 고백하며 사는 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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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악마라면 어떤 반응을?
이근호 2005-04-06 09:22:56, 조회 : 235, 추천 : 20
악마는 오로지 십자가 복음에만 반응을 나타면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그 어떤 신학에도 절대로 들키지 않고 꼭꼭 숨어있던 악마가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현장은 오로지 십자가 복음이 전해지는 현장에서만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
악마라면 십자가 복음에 어떤 반응을 나타낼까요?
1. 십자가만 전하면 교회 운영이 되냐? (돈을 내냐?)
2. 십자가만 전하면 사람들이 호응하냐?
3. 십자가만 전하면 사람들 행위에 대해 긍정적 동기부여가 되냐?
4. 십자가만 전하면서 사람들의 선함을 발휘한 의지를 꺽어버리면 도데체 이 사회를 그냥 포기하자는 말인가?
5. 십자가만 전하면 목사 권위는 어디서 찾냐?
6. 사람들이 십자가만을 알고 목사를 개똥같이 여기면 목회자는 무슨 보람으로 사람들 꼬시냐?
7. 십자가만 전하면 그동안 자아를 훌륭한 사람으로 재창조하기 공들였던 모든 것이 허물어지게 되는데 그러면 그러면 그 노고는 어디서 보상받냐?
8. 그동안 사도 서신에서 '-하라'라고 명령한 것을 모조리 '반드시 해야한다'고 가르쳐 왔었는데 십자가만으로 '하나님의 뜻 완료'라고 선포하면 그동안 자신이 가르쳐온 것이 다 거짓말이되니 이런 낭패를 무엇으로 수습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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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손성식 2005-04-10 08:48:50, 조회 : 142, 추천 : 25
『묵시와 현실』
【제국】
뭐가 현실일까요! 뒤집어서 현실이 뭘까요. 진 중권씨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기술복제시장]으로 불러요. 복제품으로 넘쳐나는 세상이죠. 가짜가 넘쳐나는 곳에서 사람들은 진짜를 찾아나섭니다. 원본을 찾아보지만 원본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요? 시뮬라크르의 시대니까! 복제에 의해서 가동되어지는 세상이니까 그래요. 복제가 복제를 낳고, 그 복제가 복제를 낳는 복제의 세상.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인간이 아담아래 있다는 것의 힌트를 얻을 수 있지요. 인간은 다 아담의 복제품들입니다. 아담상표예요. 복제된 아담의 세계입니다. 흙으로부터 와서 흙으로 돌아가야 할 공동 운명체입니다. 이런 생명 부재의 차원을 사도 바울은 "육"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땅에서 행하는 아담세계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헛된 이유는 생명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이죠. 하늘의 세계를 이 땅에 펼쳐내신 예수님의 생명 말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영"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땅은 서로 계열을 달리하는 두 개의 현실의 싸움터입니다. 하나는 육으로 표상 되는 아담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영으로 현시 되는 그리스도의 몸 세계입니다. 이 땅에서 피어오르는 싸움은 아담세계내부에서 일어나는 다중 적인 유토피아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이중현실에서 고난 당하는 교회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자본에 의해서 잠식당한 [제국]에서 마르크스의 후예들의 자본을 넘어서려는 피나는 투쟁은 마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의 세상 같아 보입니다. 투쟁을 거듭해서 이루어 온 사상적 세계를 뚫고 나와보지만 그것은 단지 너무나 작은 자신들만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이미 제국화된 자본입니다. 물론 안토니오 네그리처럼 다중의 [제국]을 희망하지만, 자본이 왕노릇하는 세상에서 다중은 자본의 유지를 위한 소모품에 불과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맥락에서 현실교회의 싸움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뭘까요? 자본입니다. [기술복제시장]이 교회를 향하여 가상현실을 건설하고 있지요. 모토는 이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자본에 의해서 건설된다!]. 어떻습니까? 현실교회에서 교회의 유지는 오직 자본 같아 보입니다. 자본의 흐름에 의해서 거대교회가 건설되고, 유명한 목사가 생성되고, 세계선교가 이루어지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고 조장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 땅에서 양산되는
육의 세계죠.
영은 묵시입니다. 묵시는 [제국]을 거부합니다. 그것이 자본에 의해서든, 아니면 다중의 봉기에 의해서 생겨난 멋진 유토피아든 동일합니다. 영은 묵시의 체계로써 이 땅에 하늘의 세계를 현실화시킵니다. 예수님의 경험과 동일한 방식으로요. 바로 십자가의 방식입니다. 이 땅에서 생산되는 모든 몸부림을 거부합니다. 역사를 소각장에서 불태우려고 하지요. 그러므로 묵시로서 그리스도의 몸은 심판의 현장에 서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의 진원지입니다. 이곳에서 죄악에 대비한 은혜의 깊이와 풍성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자본의 축적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자의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하늘의 세계를 펼치시고 지금도 활약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본의 능력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죄인의 회개는 교회로 초대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십자가의 현장으로 이끄셔서 항복시키는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의 통제 하에 있는 것입니다. 자본이 통제하지 않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는 이 땅에서 [기술복제시장]이라는 자본의 현실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묵시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활약상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정체성 싸움은 [제국]화된 자본 속에서 교회의 정체성 싸움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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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노회 목사님들은 모두 사표감
이근호 2005-04-15 10:50:04, 조회 : 256, 추천 : 14
목회자 자격 10가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에게 어느 날 한 후배가 찾아와
“어떤 목회자가 진정한 하나님의 종입니까?”라고 물었다. “경건한 사도가 되어야지.”
“영성을 제외한 실제 목회 생활에 대해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마르틴 루터는 수첩을 꺼내 거기에 적혀 있는 ‘자기 신조 10가지’를 말해 주었다.
1)목회자는 쉬운 말로 설교하고 질서있게 가르쳐야 한다.
2)훌륭한 머리가 있어야 한다(지식과 지혜를 바탕으로 한 종합적인 사고가 있어야 한다).
3)분명한 발음 등 언어 사용에 능숙해야 한다.
4)좋은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진실한 목소리, 설득력 있는 목소리를 갖춰야 한다)
5)좋은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6)그만 둘 때를 알아야 한다. 7)자기가 하려고 하는 말에 확신이 있어야 한다.
8)진실을 위해 몸 영혼 재물 명예를 바칠 각오를 해야 한다.
9)부지런히 공부해야 한다.
10)고난과 비난을 참고 견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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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개혁 노회 목사님들은 모두 사표감 - 저는 다음 4번이 제일 자신이 없네요.
구득영 2005-04-15 18:27:17, 조회 : 158, 추천 : 13
4)좋은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진실한 목소리, 설득력 있는 목소리를 갖춰야 한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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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 하나 내어 볼까요.
이근호 2005-04-15 10:51:05, 조회 : 274, 추천 : 18
아래의 글은 흔히 직장이나 사회에서 상용되는 '세상 처세술'에 관한 내용입니다.
숙제: 여러분 같으면 저 창으로 피해 어떻게 처신하면 옳습니까?
좋은 의견을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
변화를 가로막은 고정관념과 말 26가지
"얼마나 가나 봐라"(불신주의)
"전에 안해본지 아나?"(경험제일)
"우리회사가 하는 일이 별 수 있겠어?"(부정적사고)
"빨리 크는 놈이 일찍 나간다"(뒷다리 잡기)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마라"(복지부동)
"또 바뀔 텐데, 뭘"(비관주의)
"그래, 너는 잘 될 것 같으냐?"(물귀신 작전)
"너나 잘해"(냉소주의)
"중간만 가면 돼"(평균주의)
"이럴 땐 납작 엎드려 있으면 돼"(복지안동)]
"줄 잘 잡아야 해"(정실주의)
"시간이 약이라니까"(세월이 약)
"잘 될거야"(막연한 기대)
"그거 우리 부서일 맞아?"(책임전가)
"하라면 해"(지시일변도)
"구관이 명관이다"(과거회귀)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지나친 보수주의)
"문서로 보고해"(문서만능주의)
"어떻게 하겠어. XX지시 사항인데.."(지시의 설사)
"감히 누구말씀인데....."(관료주의, 성역의 존재)
"규정에 있나"(규정탓)
"윗대가리가 바뀌어야지 ...."(상사탓)
"직원들은 우수한데 회사 때문에 안돼"(회사탓)
"사업계획에 있나?"(경직돤 사고)
"대충해"(적당주의)
"당신이 부장이야"(임파워먼트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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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7번 숙제 해답
이근호 2005-04-17 08:13:18, 조회 : 258, 추천 : 21
처세술에 대한 방식들은,
인간들이 '자기 의'를 갖고 있는 이상 결코 '자기 의'의 굴레에서 못벗 어남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의 권면들을, '자기 의'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입장에서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들면, 그 자체가 이미 '자기 의'를 더욱 더 강화하는 쪽으로 사태가 진행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즉
"바울이나 베드로, 요한이 시키는대로, 일 때는 이렇게, 저럴 때는 저렇게 처신하고 행동과 실천에 나서면 나는 지금 보다 나은 '거룩한 삶'을 계속 지탱하게 될 걸"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사람은 계속해서 '자기 의'에서 한 발자국도 못 벗어나는 사람임을 증명하는 바가 됩니다. 다.
그동안 '자기 의'만 믿고 산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처세술 교훈' 같은 것은 그 사람을 더욱 더 '지옥 백성'으로 다지고 또 다지는데 유용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기 의'로 경쟁벌리는 게임에서 벗어나 다른 게임으로 이전하는 겁니다.
즉 '자기 의'로 경쟁 벌리고, 스스로 '자기 의'를 소지하고 있다고 자부심을 갖는 그러한 경쟁장에서 이탈하여,
'예수님의 의'로만 악마와 대결하는 하나님의 전쟁장으로 이동하는 겁니다.
오직 자랑할 것은 '그리스도의 의'만으로 자랑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의'와 '인간의 의'의 대결장이죠.
따라서 다음의 처세술은 이렇게 벗어나면 될 것입니다.
"얼마나 가나 봐라"(불신주의)
→ 죄인이니 원래 그렇지
"전에 안해본지 아나?"(경험제일)
→죄인이니 원래 그렇지
"우리회사가 하는 일이 별 수 있겠어?"(부정적사고)
→죄인이니 원래 그렇지
"빨리 크는 놈이 일찍 나간다"(뒷다리 잡기)
→죄인이니 원래 그렇지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마라"(복지부동)
→죄인이니 원래 그렇지
"또 바뀔 텐데, 뭘"(비관주의)
→죄인이니 원래 그렇지
"그래, 너는 잘 될 것 같으냐?"(물귀신 작전)
→죄인이니 원래 그렇지
"너나 잘해"(냉소주의)
→죄인이니 원래 그렇지
"중간만 가면 돼"(평균주의)
→죄인이니 원래 그렇지
"이럴 땐 납작 엎드려 있으면 돼"(복지안동)]
→죄인이니 원래 그렇지
"줄 잘 잡아야 해"(정실주의)
→죄인이 원래 그렇지
"시간이 약이라니까"(세월이 약)
→죄인이니 원래 그렇지
"잘 될거야"(막연한 기대)
→죄인이니 원래 그렇지
"그거 우리 부서일 맞아?"(책임전가)
→죄인이니 원래 그렇지
"하라면 해"(지시일변도)
→죄인이니 원래 그렇지
"구관이 명관이다"(과거회귀)
→죄인이니 원래 그렇지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지나친 보수주의)
→죄인이니 원래 그렇지
"문서로 보고해"(문서만능주의)
→죄인이니 원래 그렇지
"어떻게 하겠어. XX지시 사항인데.."(지시의 설사)
→죄인이니 원래 그렇지
"감히 누구말씀인데....."(관료주의, 성역의 존재)
→죄인이니 원래 그렇지
"규정에 있나"(규정탓)
→죄인이니 원래 그렇지
"윗대가리가 바뀌어야지 ...."(상사탓)
→죄인이니 원래 그렇지
"직원들은 우수한데 회사 때문에 안돼"(회사탓)
→죄인이니 원래 그렇지
"사업계획에 있나?"(경직돤 사고)
→죄인이니 원래 그렇지
"대충해"(적당주의)
→죄인이니 원래 그렇지
"당신이 부장이야"(임파워먼트 부재)
→죄인이니 원래 그렇지
여기서 하나 주의 알 것은
'죄인이니 원래 그렇지'를 마치 '인간이니 원래 그렇지"라고 하면 생각하면 안되는 겁니다. 그것은 즉 '인간의 죄인됨'='자기 의'로 또다시 간주될 뿐입니다.
따라서
"그러니까 너 이 직장에서 나가!"라고 하면
→"내가 이 직장에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동안 감사합니다"라고 성령의 열매가 나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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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일 낮설교입니다 - 왕을 주세요 (삼상 8:1-9)
구득영 2005-04-16 14:21:59, 조회 : 224, 추천 : 14
왕을 주세요 (삼상 8:1-9)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고 싶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이 원한다고 해서 모두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먼저 이 세상 사람들이 구원받기 위해서 무슨 노력을 얼마나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조상숭배, 즉 제사라는 것입니다. 이 제사를 자세히 살펴보시면 이 세상의 종교가 무엇인지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이러한 제사를 우상숭배라고 하면서도 얼마나 제사를 열심히 드리는지 하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제사는 아무 곳에서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장소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그 곳에 다 모입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그렇습니다. 집안 장남의 집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장남은 넓은 집을 갖도록 잘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남은 아주 특별히 이런 것을 고려해서 집을 지어도 넓은 거실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방과 통하도록 문도 그렇게 떼어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 사람들이 제사를 자기 편한 데로, 놀러가서나 아무 곳에서나 드린다고 어른들이 욕을 하지 않습니까? 물론 앞으로 그것마저도 안 할까봐서 너무 큰소리로는 야단을 못 치고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특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무 시간에나 마구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시간을 정해서 그 시간에는, 평소에는 아이들이 마구 뛰놀고 TV를 보고 잡담을 하고 하더라도 그 시간만큼은 일체 그런 것들이 금지되는 것입니다. 아주 경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무엇이 있어야 하는고 하니, 거룩한 인물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그 제사를 인도하는 사람은, 평소에 그 사람이 아무리 술을 좋아하고 담배를 좋아하고 해도, 그때만큼은 그런 모든 것을 다 끊습니다. 물론 평소에 전혀 안 하던 목욕도 깨끗이 하고 말입니다. 그 순간만큼은 아주 특별한 사람, 즉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병풍이 쳐지고 말입니다. 아이들이 거기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서 기웃거리다 야단을 맞고 하는데, 그 뒤에 뭐가 있습니까? 있기는 뭐가 있어요? 그냥 평소에 있던 그대로 TV하고 경대와 화장품 등 잡다한 물건들이 있지 말입니다. 하지만 그때만큼은 무지 궁금한 것입니다. 사실상 알면서도 어른들도 궁금하고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뭐가 들어오지 말라고 하는 의미로 병풍이 둘러쳐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거룩한 장소, 거룩한 시간, 거룩한 인물, 이것은 반드시 제사를 드리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조상신이 와서 그 제사를 기뻐하고 자기들에게 복을 베풀어주시고, 구원시켜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언제부터 있었느냐, 잘은 몰라도 땅을 파서 유물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런 흔적들이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는 이 지역들이, 역사적으로 보면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거의 최초의 지역들입니다. 처음에는 바닷가에서 모여서 살았거든요.
그때부터 이런 일들을 했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유교 때문에 제사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이 '제사' 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다시 말해, 누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살게 되면, 밥을 먹어야 하듯이 그렇게 제사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더 심하지요. 일단 교회당 안에 들어오면 떠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거룩한 장소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당 건물을 그렇게 엄숙하게 지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장남 집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아예 '성전' 이라고 노골적으로 사기를 치곤 합니다. 이젠 예수님이 성전이고 우리가 성전인데 말입니다.
그리고는 또 특별한 시간이 있지요? 언제입니까? 주일이라는 겁니다. 지금도 있지도 않은 구약의 안식일을 소위 오늘날 주일이라고 하면서 거룩하게 지내야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제가 다시 강조합니다만, 안식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주의 날'은 주일이 아니라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래도 비교적 다른 날보다는 회사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적으니까, 오늘 이렇게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필요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 교회마다 바꾸면 다른 곳에서 혹 예배를 드리려고 오는 분들이 혼란이 생기고 하니 그냥 이 날에 모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매일같이 모였습니다. 특별히 오늘 이렇게 모인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뭐가 필요합니까? 거룩한 인물이지요. 그 일을 누가 해야합니까? 사실 이 문제가 제일 심각한데, 소위 목사가 그 일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를 제사장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섬기고 하다가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교회가 아니라 절간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교회에 간다고 구원을 못 받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런고 하니까, 구원은 교회를 통해 이루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천주교이고,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아닌,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물론 제대로 된 교회에 나간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야, 우리는 교회는 기존 교회와는 달리 말씀대로 한다" 라고 해도, 그곳에도 역시 구원받을 사람은 받고, 못 받는 사람은 못 받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중요한 것은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른 사람들 중에서 이런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그런데 교회당이라는 건물이 자꾸 눈에 보이니 그것이 유혹이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러한 건물이 없었습니다. 그냥 성도들의 각 가정에서 돌아가면서 모였습니다. 요즘 우리가 드리는 구역예배처럼 말입니다.
저도 할 수만 있으면 좀 모든 예배를 다 이렇게 하고 싶어요. 물론 우리 교회는 그런 이런 유혹이 좀 덜하지만, 건물이 웅장하지 못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항상 뭔가가 따로 있다는 것 자체가 유혹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없애면 유혹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때 가봐야 알겠지요. 아마 그런 유혹을 뿌리치기는 좀 힘들 것입니다.
물론 구약성경에도 그런 것이 있었습니다. 특별한 장소인 성전이 있고, 특별한 시간인 안식일이 있고, 그리고 특별한 인물인 제사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약속의 실체되신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그 예수님께서 오셔서 다 이루었으면, 이제는 미련 없이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새언약이라는 것입니다. 즉 옛언약의 시대는 지나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까? 그것은 바로 새언약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8장 1절에서 3절 말씀입니다.
(삼상 8:1) 사무엘이 늙으매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으니
(삼상 8:2)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삼상 8:3)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벌써 사무엘이 늙었습니다. 시간이 정말 빠르지요. 지난 시간에 등장해서 이스라엘을 미스바에 모여서 금식과 회개를 시키면 하나님께로 인도한 사무엘이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나이가 들었다고 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사무엘이 할 일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어야 하는 일도 있고 말입니다.
여기에 보면 사무엘의 아들들이 나오는데, 2절에 보면,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스라엘의 사사, 즉 지도자가 되어서 어떻게 했습니까? 3절에 보니, 뇌물을 받고 자기 마음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니, 아버지가 그렇게 훌륭한 제사장인데, 어떻게 그 아들들이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식교육의 힘든(?) 점인데, 아버지가 훌륭하다고 해서 아들이 자동적으로 훌륭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순종하는 자식이 있다면, 도리어 의아해 여겨야 될 지경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기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 사무엘이 경험한 세계와 아들이 경험한 세계가 다른 것입니다. 부모가 믿는다고 해서 자녀들이 자동으로 믿는 것은 없습니다. 부모는 바로 그런 점을 가르쳐주는 역할이고 말입니다.
오늘본문의 핵심은(?) 그것이 아니고, 그 다음 구절에 있습니다. 4절과 5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삼상 8: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삼상 8: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라고 합니까? 왕을 달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지도자를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백성들의 요구가 말이 되는 것이, 지금 사무엘은 늙어서 힘이 없고, 그 아들들은 모두 다 엉터리이니 우리가 따르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죠?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보면, 5절에서 뭐라고 덧붙이고 있는고 하니까,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라고 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열방은 다른 나라들을 의미하는데, 쉽게 말해서, 다른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이방나라들처럼 왕을 달라는 것입니다. 왕을 말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그 특징이 다른 나라들과는 어떻게 된 나라입니까? 구별된 나라이지요. 그래서 거룩한 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구별을 이제 자기들이 거부한다는 말입니다. 왜 거부합니까? 다른 나라들이 잘 사는 것이 부럽거든요. 그래서 나라들처럼 자기들도 왕을 세워서 그렇게 한번 잘살고 싶은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욕망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저도 물론 당연합니다. 큰소리치고 잘 살고 싶지요. 땅이 몇 만평이 있고, 집은 몇 채이고, 저금통장은 몇 개고, 자식은 어떻고 말입니다. 사람들이 계다 동창회다 모여서 항상 하는 이야기가 이런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웃으면서 만나서 씁쓰레하게 헤어지는 것입니다.
심지어 신학교 졸업 동기회에 가도 이러한 이야기들입니다. 자기 교회당은 몇 평이고, 교인들은 몇 명이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동창회는 물론 동기회도 전혀 안 갑니다. 안 그래도 겨우 낮춘 혈압인데, 마구 올라갈까 싶어서 말입니다. 그런 입을 미싱으로 밖아 버리고 싶어요. 그것은 제 성격이 못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그런 것이기에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보면 매우 적나라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6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삼상 8: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삼상 8: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삼상 8:8)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지금 하나님이 얼마나 화를 내고 계시는지 말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화를 내다못해 섭섭해서 우시는 것(?) 같습니다. 왜 자식들에게 너무나 실망을 느끼면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중치가 막힌다고 합니까? 그냥 허탈해지는 그런 상태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제가 이 말씀을 보는 느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엄연히 지금 이스라엘에는 하나님 본인이 왕으로 있는데, 또 다른 왕을 구한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얕잡아 보고 있는 처사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을 광야 40년을 함께 동행하면서 인도해주셨는데 말입니다.
왜 그들이 이렇게 합니까? 눈에 보이는 않고, 하늘에서 마구 일방적으로 야단만 치시는 하나님은 더 이상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법궤 안에 들어있는, 자기들의 죄가 생각나는 그런 보기 싫은 돌판이 아니라, 그런 것은 너무 부담스러우니까,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고 서로 대화가 되는 다른 무엇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을 들어서 이웃에 있는 그래도 잘 사는 이방나라들을 보니까, 모두가 하나같이 자기들에게는 없는 눈에 보이는 '왕'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그 왕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묵살해버리면 그만인데, 그런데 그 요구를 들어주십니다. 그것이 오늘본문 9절에 나옵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삼상 8:9)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이 왕은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다름 아닌 자기들 욕심의 대표자일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왕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모습이고,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에 땅에 집어넣으시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약속의 땅이 무엇입니까? 약속이 아니라면 가시방식과도 같은 그런 곳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었다고 각오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만약에 약속의 땅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제대로 잘 산다면, 그것은 곧 약속의 백성이 아닌 이방나라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왕을 달라고 하는 것이 혹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한번 큰소리치면서 잘 살아보려고 하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약속의 자녀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약속의 실체이신 예수님 때문에 그러합니다. 소위 지도자라고, 즉 '왕' 이라고 자청하는 인간들과 예수님과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한 쪽은 남을 이용해서 자기가 살려는 자이고, 예수님은 오히려 자기 목숨까지 버리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이 세상은 인간 지도자를 더욱더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권력자가 마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귀는 이렇게 유혹의 손길을 온 세상에 뻗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오늘 이 시간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이 세상 왕이 아니라,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왕이기를, 그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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