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적 해석] 2005-03-27
[자의적 해석] 2005-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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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적 해석]
손성식 2005-03-27 21:03:45, 조회 : 143, 추천 : 18
『묵시와 현실』
【자의적 해석】
언어란 자의적이야! 그러므로 천의 해석이 생성돼.
자의적이란 뭐고, 천의 해석이란 뭐야: 자의적이란 자기 마음대로 라는 뜻이고, 천의 해석이란 그 결과 수많은 해석들이 등장하는 것을 말해. 쉽게 말하면 사람 열명이 있으면 열 개의 해석이 있고, 백 명이 있으면 백 개의 해석이 있는 거야.
자기 마음대로: 주관과 객관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야. 욕망 하는 인간이 있는 거야. 즉, 마음대로 하는 인간이 있다는 거지.
하지만 마음대로 안 할 때도 있잖아: 그래, 국가에 통제를 받는 경우와 윤리와 도덕에 제재를 받는 경우지. 갈등은 여기서 솟구치지.
그렇다면 해석도 천의 해석이 아니라 욕망 하는 해석과 통제와 제재의 해석만이 있는 것 아니야: 그래, 개인적 해석과 국가적-윤리적 해석이라는 잣대가 선을 긋고 있지. 그래서 한 개인은 거칠게 본다면 선 안에 있느냐, 선 밖에(탈선)있느냐로 규정되고 있는 것이지.
탈선: 탈선이란 말은 윤리적 해석이고, 사회, 정치, 문화적으로는 탈주란 말을 쓰고 있지.
탈주: 이미 고착화된 틀을 넘어선다는 것이고, 현대적인 맥락에서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몸부림이지.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기존의 틀을 고집하는 것도 욕망 하는 인간이고, 그 틀을 넘어서려는 것도 욕망 하는 인간이야. 그것은 추상적으로 인간의 싸움이며, 구체적으로 이해의 지평을 둘러싼 해석의 싸움이라는 거야.
아담의 세계: 욕망의 세계이며, 해석의 싸움판이야.
싸움판: 그래, 누가 옳으냐의 싸움이지. 하지만 누구도 판정해 줄 수 없다는 것이 딜레마야. 단지 힘있는 쪽이 이기겠지.
혹시 하나님이 버려 둔 현상: 그래, 하나님께서 이 땅을 버리신 거지. 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믿으려고 안 해. 버림받았다는 걸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단 말야. 오히려 하나님을 자신들이 없앴다고 자랑하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구원받은 자는 자신이 버려졌다는 것과 그 가운데서 불리워졌다는 것을 안단 말이야.
회의주의: 이 땅에서 피어오르는 욕망은 두 갈래의 해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애.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낙관적인 해석과 비관적인 해석이지. 하지만 창조자가 이미 세상을 버렸는데, 피조물끼리 세상의 앞날에 대해서 논한다는 것은 우스운 얘기지.
철학의 한계: 그래, 인간의 한계야.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현실이지". 그러므로 죽음을 극복할 수 없는 한 인간의 모든 철학은 허구야. 조작된 현실이고 가상현실이지.
왜 현 동네 얘기를 안하고 옛 동네를 들춰내는 거야: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장(場)이 옛 동네이잖아. 기억해 줘. '옛 동네냐, 새 동네냐!'는 장소 문제가 아니라, 관계 문제야.
어떤 관계: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새 동네이고, 아니면 옛 동네이지. 그러므로 성도란 예수님의 해석을 받아들이는 거야. 그러므로 성도란 이미 확정된 해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당당할 수 있는 거야.
어떤 해석인데: 십자가의 해석이지.
그것도 자의적 해석 아닌가: 맞아. 하지만 이 땅에서 피어오른 자의가 아니라, 하늘의 세계가 이 땅에 펼쳐진 자의적 해석이지.
요지가 뭔데: 세상의 모든 언어적 해석을 거부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해석으로 헤쳐 모이게 하는 거지.
헤쳐 모인다고: 우리보고 결단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활약상이지.
그러므로 성도란: 예수님의 십자가 해석에 의해서 자신의 자의적 해석이 항복 당하는 관계 속에 있게 된 거야.
다시 처음으로 욕망 하는 인간의 자의적 해석이란: 이 땅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이야. 하나는 유토피아이고, 다른 하나는 디스토피아이지. 하지만 깊숙이 들어가면 둘 다 이 땅을 사랑하는 존재유지에 대한 몸부림이지.
하지만 이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의해서 이 땅의 존재의의가 해석되고 있는 이상, 그 모든 해석은 소각장의 불꽃 속에서 사라질 쓰레기에 불과해.
신학도 그래: 신학이라고 다르지 않아. 이 땅의 존재기반과 자아의 영속성을 주장하는 모든 해석은 그 계열의 범주를 떠나서 동일한 내용적 해석이야.
다시 성도란: 이 땅을 살면서 경험한 모든 이해 지평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해석에 의해서 공박 당한 은혜의 열매지.
그래서 일어나는 성도의 사건현상: 예수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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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자의적 해석]
정경의 2005-03-29 23:30:44, 조회 : 120, 추천 : 13
손 목사님은 아주 제미 있는 분이시군요
뭔가를 본것이 있다고 보였는데!~~
그것마져도 나에 자의적인 해석이었군요
님이 말하고 있는 십자가 말임니다
진정 그 십자가 님에게 들어왔거나 아니면 님이 스스로 할례라는 것을 통과 했다면
계속 앵무새 흉내 내는짖은 끝이 났을텐데
아직도 계속해서 자의적이니 !~~~뭐 예수님 감사합니다!~~~
밖엔 할 이야기가 없어니 말이예요
참 예수님 좋아하시니 예수가 하신말을 그대로 말하면 알아 들을수 있을찌!
마태6장22절!~~눈이 나쁘면(악하면_원문)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어두움이면_원문)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깊이 예수를 생각해보시길 기도 할께요!
참 님은(마태23장13~15절 참고) 예수님 당시에 율법사들 서기관들처름 천국문앞에 좌정하고서
자기도 또한 들어갈려던 자들까지도 가로 막고 있는 거침돌이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아야지요 님이 그토록 애지 중지하는 그 십자가라는 막대기로 말입니다
십자가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님은 잘 아실텐데!!~~~~
그럼 님도 ! 앞을 향해 전진 하시길^^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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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자의적 해석]
권범식 2005-03-29 23:54:37, 조회 : 111, 추천 : 14
경의님의 전진하길 바란다는 것 자체가 비성경적인 발상이지요...
무엇을 본 것이 아니고...주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님은 어떤것을 본 사람을 따라다니시는 모양인데 주님께 보여달라고 기도하시고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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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정한(?) 특혜의 책-성경
김상욱 2005-03-27 23:28:36, 조회 : 138, 추천 : 15
성경은 약속의 책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복이 아브라함에게처럼 약속의 말씀으로 와서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를 성취하시는 계약문서라는 뜻입니다. 물론 전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작정이 이루어지는 섭리의 스토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 그 분의 뜻에 따라 구원의 반열에 들어 선 하나님의 백성은 이 어처구니없는 은혜와 긍휼의 약속에 계약 당사자로 끼어 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한 푼도 투자한 적도 없고 언제 한번 얻어 보고자 머리띠 동여매고 결심한 적도 없던 하나님의 기업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무임 승차했습니다. 적어도 천국재산에 대해서는 불한당(땀흘려 일하지 않는 사람)과 같은 무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에 믿음 하나만 달랑 들고 들어와 하나님과 계약 당사자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의 분깃을 챙기는 복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역사와 구속 역사의 총괄 사업에 한 푼도 투자하지 아니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분을 주셨고, 공짜로 얻은 천국 일터에서 각자 맡은 일을 잘하면 다섯 달란트 남긴 자로 또는 열 고을 차지하는 권세자가 될 수 있다니 이것 참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꿈이냐 생시냐 알아보기 위해 뺨이라도 만져봐야 할 지경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사실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약속하는 계약문서요 하나님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구원에 관한 상호 약관이요 정관입니다. 어느 구석을 살펴봐도 하나님이 한 호리라도 챙기신다는 대목은 없고 오직 그 분의 희생과 주심과 참으심과 애타하고 아파하심만 있을 뿐이어서 이 계약은 분명 인과응보의 공정 거래 위원회의 제재를 받을만한 특혜 중의 특혜요 엄청난 비리(?)가 있는 원칙이 없는 은혜의 거래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찬405장) 죄인은 죽어 마땅하고 죽어서 사망이 가는 불 못에서 영원히 죽지도 못하고 극심한 고통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 왜 은혜로 살리시는가 그건 분명히 불공정한 특혜 시비가 붙을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공짜로 영원한 불 못 행 열차에서 영원한 하늘나라 행 열차로 옮겨 태워 주셨다는 사실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은혜입니다(Amazing Grace) .
그래서인지 옛날 욥에게 특혜를 줬다고 사단이 하나님께 참소했던 것처럼 지금도 죄인들이 하나님의 특혜로 구원받아 그 기쁨을 누리면 그걸 못 봐주는 특혜 감시단이 교회 안에도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지 원칙대로 하고 일한 만큼 주고받자는 착실한 일꾼들이 지금도 포도원에서 땀흘려 일하며 오후5시에 들어온 쓸모 없는 일꾼에게 거만한 눈짓을 보내고 있습니다. "불쌍한 놈 너는 아무리 열심히 일 해도 우리가 받을 일당에 비하면 너의 품삯은 쥐꼬리야" 그러나 주님은 늦게 온 자로부터 품삯을 한 데나리온씩 나누어주는 포도원의 주인의 비유로 천국의 은혜의 일당 지급방식을 가르쳐 주십니다.(마20장) 이건 분명히 불공정한 거래요 특혜시비가 뒤 따를만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보는 눈에 따라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자냐 아직 엄위 안에 갇혀 있는 자냐 갈라지는 분깃점입니다.(롬11:22) 쉽게 말하면 하나님과 그 분의 은혜와 진리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일방적 계약을 맺고 있는가 아니면 율법으로 말미암아 행함에 따라 보상하는 쌍방계약을 맺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행위계약을 맺고 있는 쪽에서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 안에 아무 공로 없이 끼어든 몹쓸것(?)들에게 하나님의 특혜가 주어지는 것은 너무 부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무력화 시키는 아주 무례한 불법이란 사실을 그 들은 꿈에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죄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독생자를 우리에게 영생으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불공정한 특혜라고 시비를 거는 것은 예수님을 엉터리라고 십자가에 못박도록 잡아준 유대인들과 다를 바 없이 하나님의 아들을 현저히 욕보이는 일입니다.(히10장)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신기한 능력으로 거듭나게 하사 생명의 소망으로 살게 하신(벧1장) 그 엄청난 천국 자산을 무시하는 눈떤 소경들입니다.
누가복음15장의 맏아들은 제 동생의 잘못과 말아먹은 재산에만 관심이 있을 뿐 아들을 다시 찾은 아버지의 기쁨은 전혀 헤아리지 못합니다. 지금도 수많은 자칭의인-여러 해 동안 잘 섬기고 명을 어긴 적이 없는 이-들이 아무것도 한일 없는 천하 몹쓸 죄인들이 구원받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만 축내고 있다고 비웃고 있습니다.
그러나 꼭 하나 알아야 할 일은 하나님은 인간의 천연적인 장점의 분깃을 주식처럼 긁어모아 천국의 주주로 떳떳하게 하나님 앞에 설려는 맏아들 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만 바라보고 엎드리는 탕자를 오히려 효자로 본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이 맏아들은 탕자로 돌아온 동생을 입을 맞추어 환영하고 멋진 옷을 입히고 고이 준비해둔 그(헬,관사가 있음)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의 불공정과 무원칙한 특혜 때문에 며칠은 끙끙대고 앓아 누웠을 것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을 영접하고 어울려 식사하시고 말씀을 나누시는 장면을 보고 배 아파 하며 투덜대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들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마땅히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할 자신들은 외면하고 저런 잡동사니와 어울리느냐 하는 비난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십니다.
오늘도 성경은 스스로 죄인이라 여기며 하나님의 거룩함과 긍휼 앞에 상한 심령으로 엎드리는 자들에게 특혜를 주시고자 약속한 하나님의 일방적 계약문서로서 펼쳐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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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불공정한(?) 특혜의 책-성경
이근호 2005-03-28 04:36:32, 조회 : 185, 추천 : 24
언약이란, 주님의 십자가 공로 뿐만 아니라 인간의 ' 자기 의'로 인해 '자기 체제 정당화'가 함께 표출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을 통해서 보면 두 가지 면으로 나오는데
하나는, 자기 신학의 정당성이요
다른 하나는 자기 체제의 정당성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십자가만의 공로를 알기에 그 때부터 무엇이 뚜렷해지는가 하면 바로
자기 욕망에서 자기 행위의 의로움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뚜렷해지고,
자기 의로움에서 자기가 구축해 놓은 신학에 대한 의로움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뚜렷해지고,
자기가 구축해 놓은 신학을 바탕으로 한 자기 종교 체제의 의로움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뚜렷해집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십자가 복음은 무엇을 악의 축으로 보고 공격하게 되느냐 하면
자기가 속해 있는 종교 단체의 자기 정당함을 공격하게 되고,
더나아가서 그런 단체의 기초를 이루는 신학을 공격하게 되고
이는 곧
모든 인간이 늘 표출하는 '자기 의'를 공격하게 되고
이는 곧 그 '자기 의'를 배태하게 하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공격하는 것이 되고
이는 곧 그 행위를 낳는 인간의 욕망을 공격하게 됩니다.
이를 경우에만
신학으로 구원되는 것도 아니요, 행함으로 구원되는 것도 아니요, 교회나 교회 내의 행사로 구원되는 것도 아니라 오직
오직 십자가 자체에서 나오는 능력으로만 구원의 능력이 된다는 점을 증거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러한 공격은 하늘에 의한 땅을 향한 공격이며,
묵시에 의한 인류 전체 역사를 향한 대한 공격입니다.
따라서 언약에 의한 올바른 성령님의 증거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짝을 이루어 반드시 인간 속에서 각가지 변용된 형태로 표출되는 종교적, 정치적 욕망에 대한 공격도 병행해서 함깨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를 들면, '주님을 찬양하라'라는 성경 말씀이 나오면,
이 성경말씀의 적용을 놓고 인간의 욕망과 성령님이 서로 경쟁하고 결국에는 성령님의 고발로 이어집나더,
인간들은 '주님의 찬양'에 대한 역사적 체험과 주위의 의견들과 본인의 느낌을 집약해서 어떤 '찬양'의 모델을 만들어 내기 되는데 이것이 그 순간의 자기 신학이고 이 신학을 구체화하기 위해 작업에 나서게 되면 그것이 '종교적 조직체 결성과 체계'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주님에 대한 찬양'은 오직 성령님께서만 달성할 뿐입니다.
인간들의 자신의 이러한 종교적 욕망이 이러한 성령님이 내세운 십자가 피 앞에서 회개당할 때, 비로소 찬양은 성령님의 몫임을 알고 공로를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돌리고 외부적으로는 오직 십자가 복음만 증거하는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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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飛上)과 추락(墜落)
김상욱 2005-03-28 19:17:01, 조회 : 146, 추천 : 31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를 가면 스페인 시대에 만든 요새 안에 이 나라의 독립 영웅인 호세 리잘의 기념관이 있습니다. 거기에 국민을 향한 그의 마지막 유언중에 "나의 조국이여 너의 비상을 위해 내가 추락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하는 글귀가 있습니다.
국가의 독립 곧 비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추락을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위지며, 시선을 동판의 이 글귀 위에 고정시켜 한참 동안 생각하도록 합니다.
호세 리잘은 참으로 아름다운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국가와 민족의 비상을 위해 내 한 몸 형장의 이슬로 추락한 후 먼 후일 아름다운 기억의 입자가 되어 민족의 귀에 긍지의 노래가 된다면 기꺼이 그 길을 택하겠다는 그의 애국심은 국경을 넘는 감동의 서사시입니다. 그의 말대로 지금도 호세 리잘은 필리핀 국민의 제일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이런 사상을 가진 위대한 영웅들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 중에도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성웅 이 순신 장군의 애국 애족은 호세 리잘의 그것 이상입니다. 일엽편주와 같은 배 십수 척으로 막강한 일본 함대를 향해 나아가는 그의 심중에는 내 조국 내 민족이 비상하는 일이라면 내 한 몸이 추락하는 것이 무엇이 아까우리요 하는 결심이 서려 있었습니다.
그 분의 난중 일기에 배어 있는 애국 애족의 사상을 좇아 읽다 보면 황홀한 행복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참으로 좀생이와 같은 내가 표현하기엔 도무지 역 부족인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그야말로 민족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불멸의 장군입니다. 그 아름다운 조상의 정서가 내 정신속에 조금이나마 스며 있어 나도 저렇게 아름다우리 하고 마음을 다질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호세 리잘이나 이 순신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선이나 의를 위한 추락이라는 명분이 있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추락은 아무 명분이 없는 죄인을 위한 비참한 저주의 추락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을 구원하여 하늘나라로 비상시키기 위해 하늘 영광 보좌 비우시고 이 낮고 낮은 땅으로 추락하시더니 저주받은 죄인만이 짊어지는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는데 까지 추락 하셨습니다. 이 일을 하나님은 기쁨으로 행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습니다. 영원히 멸망 받을 죄인을 의인으로, 그리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나아가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왕권 성도로 비상시키기 위해 한없이 추락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구더기가 되는 이상으로 추락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간 가장 모범적인 성도인 사도 바울 또한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4:12)고 말했습니다. 이 말의 뜻도 결국 너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비상시키기 위해 내가 사망의 짐을 지고 추락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기독교가 과연 이러합니까? 이웃과 동무와 교회와 국가와 세계의 비상을 위해 추락을 할만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자기 비상을 위해 어설픈 지식으로 안간힘을 쓰고 있고, 약간의 구제나 선교나 선행도 자기 비상을 위해 이용하고 있지 않는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전에는 머리 좋은 사람들이 국가에 충성하므로 자신의 이름을 빛냈으나 지금 세대는 남을 돕는 일을 해서 거기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법을 터득한다고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스스로 높이기를 좋아하고 약아졌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에 세례 요한과 같이 그리스도는 흥(비상)해야 하고 나는 쇠(추락)해야 하리라는 종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를 찾는 일은 흡사 큰 바위 얼굴을 기다리는 마음과 같습니다.
또한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희생이 없어서는 안 되는 법인데 바울과 같이 그 들의 사망의 짐을 지고 추락해 줄 종들을 얼마나 찾을 수 있을까요? 노래로는 "예수님 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부르고는 있지만 예수님 처럼 바울처럼 남을 위하여 추락해 줄 내가 아님을 발견하고 맙니다.
나는 정녕 모세처럼 금송아지를 섬겨 하나님을 반역한 이스라엘의 죄를 가로막고 하나님 앞에 서서 "합의하시면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데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32:32) 라고 간청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없단 말인가? 오호라 통제라 슬프도소이다.
또한 내게는 바울과 같이 비록 하나님의 뜻을 좇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는 있지만 자기 민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롬9:3) 라고 배수의 진을 치고 추락할 수 있는 믿음의 용기가 정녕 없단 말인가? 오 나의 주 그리스도시여! 전에는 남보다 더 많이 알아 자랑하려고 했으나 이제는 남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싶으오이다.
죽는 순교보다 산 순교가 힘이 든다는 말을 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죽는 순교는 딱 한번의 고통으로 끝나지만 산 순교는 사는 날 동안 계속 형제와 이웃의 비상을 위해 자신이 추락을 해야 하기 때문일것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너의 비상을 위해 내가 추락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냐"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신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내 조국의 사랑하는 영혼들의 연약함과 무지의 죄를 비판하고 동무들을 때릴 것이 아니라 이를 짊어지고 우리 주님께 나아가는 제사장의 작업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귀한 종교라도 아름다움을 능가 할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감히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그리고 나의 주 그리스도 앞에 진실한 마음으로 이글을 씁니다. 만약 나의 조국 대한민국과 열방과 민족과 방언들을 사랑하고 축복하는 자가 되지 못할바엔 차라리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성경지식과 함께 나의 목숨을 거두어 가소서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지식과 인간은 천국에서는 아무 소용없는 쓰레기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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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비상(飛上)과 추락(墜落)
이근호 2005-03-28 21:08:59, 조회 : 122, 추천 : 14
환상이란 늘 아름답고 장렬하게 보이는 법입니다.
비천하게 사는 것보다 더 큰 일은 조용히 사시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은 늘 비밀스럽습니다.
소리나지 않는 비명, 이것이 진정한 십자가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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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비상(飛上)과 추락(墜落)
권범식 2005-03-29 01:01:12, 조회 : 103, 추천 : 15
음...아직도 이해 못하시는 군요...
상욱님 그렇게 자기의 믿음을 나타내고 싶으시면 차라리 그냥 내가 의인이라고 하세요...
그게 차라리 솔직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차라리 거두어 가소서...라는 고백 자체가 이미 자신의 목숨을 크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보다 중요히 여기는 것은 예수님이 주신 참 생명입니다. 아니...참 생명이 되신 예수님 이십니다.
이 참 생명을 안에 간직한 성도는 그러한 고백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이간대...라는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고백 하실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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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사랑의 함수관계
김상욱 2005-03-29 03:24:24, 조회 : 152, 추천 : 35
신앙은 본능적이며 이성적인 자연인으로부터 출발해서 그리스도안에 있어도 어린아이 곧 육적인 신자로 발전 합니다.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은 종교인이 다 이 범주에 들어 갑니다. 그 다음 신령한 사람 즉 진리를 통해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할 줄 아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사랑을 얻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데로 나아갑니다.
아담 안에 있던 자연인이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나서 성령의 공급 하심에 의해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의 사람으로 서서히 변화 되어 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이라고 하면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한 관점을 설정해 놓고 "믿습니다"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동의가 필요 없이 자기 멋대로 믿음의 내용을 설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오직 가상적 절대자일 뿐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보통 믿음이라 말하고 그 열심이 대단할 수록 믿음이 좋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과 관계의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믿음은 하나님이란 대상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믿습니다"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말씀을 아멘으로 수용하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어떤 목적을 따라 자기의 요구를 다 들어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에게 말씀을 통해 다가 오시는 하나님을 받아 들이는(영접) 순간부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가 성립됩니다.
요즘의 텔레 뱅킹 시스템과 비슷하다고 보면 과언일까요? 접속만 되면 약속된 정보에 의해 마음껏 운용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신앙이 된 이후부터 사랑의 차원으로 발전하게 되며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엡1장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 곧 CF 송이 되도록 하신다고 진술합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에는 사랑이 없는 신앙의 기능이 얼마나 쓸모 없는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1-3)
기능은 신앙의 업무 수행에 필요할 뿐 그 자체가 사랑이 아니고 결국 본인에게 유익이 되질 못한다고 규정합니다. 사랑이란 인간의 본성이요 본질상의 문제이지 말 잘하고 은사 있고 남에게 주길 좋아 한다고 사랑이 있는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사실 사랑이란 어떤 일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능력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악한 일을 생각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을 능력이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딜 수 있는 능력입니다(고전13:4-7)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명사지만 동사(?)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사랑을 지니고 신앙 생활을 시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 들이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연합되어 영생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관계를 맺은(요17:3 하나된 이후 아는 것) 이후부터 사랑을 하게 됩니다. 사랑의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그 가지도 당연히 사랑의 가지가 되겠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통해 하나님께 접붙이려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겁니다(오직 기독교만 갖는 신비)
만약 사랑이 되기 시작하면 그 사람안에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 하시는 증거가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랑의 영이신 성령을 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신 동시에 사랑 할 수 있는 능력이십니다. 이 분이 그리스도인들 안에 계시는 순간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마음과 생각이 같아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곧 포도나무와 가지의 조직세포가 같아진다는 말입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이 좋으면 나도 좋고 하나님이 싫으면 나도 싫어집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의 기운이요 감(느낌)입니다. 전기의 전류가 힘이 되듯이 성령님은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의 전류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고 실천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머무는 심령에는 우선 두려움이 없고 정죄감이 없으며 푸근해 집니다. 먼저 자신이 평안을 느끼고 그 다음 다른 사람에게 평안을 끼치게 됩니다. 사랑은 환경과 사정에 상관 없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망의 어두움이 가득하면 아무리 좋은 환경도 염증이 나고 맙니다.
사랑과 평안은 배경음악과도 같습니다. 좋은 환경 속에서도 슬프고 음침한 배경음악이 흐르면 마음이 금방 가라앉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경쾌하고 밝은 배경음악이 흐르면 기쁨을 유지할 수 가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행복의 여부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심령의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다(성경의 심령이란 무엇을 지니고 있는 마음 상태를 말함). 만약 사랑이 없으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싫증나고 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심령은 언제나 사랑의 배가 고파야 합니다(마5:3) 이 말씀을 사랑의 배가 고픈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바꿔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 까지든지 떨어 지지 아니 합니다(고전13:8) 사랑은 하나님의 차원이므로 가라앉거나 내려가지도 않습니다. 사랑은 아침 안개가 대지를 휘감듯이 허다한 영혼들을 끌어 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전14:1)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을 추구하라는 뜻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자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롬6:11)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믿음이어야 하고 소망은 그 안에 있는 사랑이 내게도 이루어 질 것을 학수고대하는 소망이어야 하는 것입니다(롬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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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신앙과 사랑의 함수관계
이근호 2005-03-29 07:28:55, 조회 : 142, 추천 : 25
>성경에서의 사랑은
>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 나타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
>따라서
>
>사랑을 바로 아는 자는 자기를 미워하게 되어있습니다.
>
>그런데 귀하의 글을 보면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
>자신을 더욱 더, 점차도 사랑하기 위해서 명령 따라 사랑하자는 식으로 나옵니다.
>
>말씀에서의 명령이란, 그 자체가 창조 선포를 의미하고 그 선포는 자체적인 능력이 되어 실재화 되는 겁니다.
>
>따라서
>
>귀하의 주장대로라면, 사람이 사랑을 요청하지 아니하면 전혀 사랑을 맛보지도 못할 지경에 놓여 있습니다.
>
>이런 생각은 언약적인 생각과 틀립니다.
그리고 포도나무의 가지와 포도나무와 같은 세포로 되어 있다고 하셨는데(즉 구성요소가 동일하다는 주장),
이런 생각이 바로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실체화적 해석'이라는 겁니다.
무리한 비유를 구태어 동원해서 추구하여 얻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형제끼리 같은 인간의 세포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한다고해서 제대로 형과 동생 관계를 표현되었다고 보십니까?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하고 백성들하고 같은 세포로 구성되었습니까?
차라리 천주교처럼, 딱과 잔이 살과 피로 변한다는 주장보다 더 노골적인 주장입니다.
언약적 관계에 무지하니 이런 발상이 나오는 겁니다.
언약 내의 관계를 함부로 물질화 시키면 큰 일 납니다.
>다시금 이야기하지만
>
>사람들을 종교적으로 포섭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경 내용을 사람의 구미에 맞도록 무리하게 재구성하면 바른 전파라고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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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의 중요성
김상욱 2005-03-29 04:05:23, 조회 : 195, 추천 : 12
요한 복음은 육체화 된 우리 인간을 영화시키는 성경입니다. 육체화 된 우리 인간이 영화 되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창6:3 참조) 인간의 육체에 말씀이 임하여 그 말씀이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갑니다. 구원이란 영생을 얻은 자들로 하나님의 영광과 같이 될 자로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요일3:2) 그리고 로마서는 그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는 성경입니다.
-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로마서에서 요한 복음이 환하게 열립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요한 복음의 참고서라고도 볼 수도 있습니다.
로마서는 1장부터 11장까지는 듣고 12장부터는 행하는 자가 되는 것이 온전한 믿음이라고 진술합니다. 로마서는 서술적으로 기록되었으므로 그 원리를 알고자 접근해야 합니다. 로마서를 계속 듣고 익히면 이 원리가 스며듭니다. 칼빈도 말하기를 진리는 반복해서 적용하므로 습득되는 것이라고.....
그런 다음에 요한 복음 15장이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참 포도나무와 가지"(요15:5)의 비유에서 참이란 실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실존하시는 분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이 구절을 벽에 붙여 놓고 매일 쳐다본다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 사이에는 공급과 수용의 원리가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잎사귀를 밖으로 드러냅니다. 그 열매는 찾아보아야 됩니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열매를 드러냅니다. 이것이 두 나무의 다른 특징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생명이 없는 자는 잎사귀는 무성해도 열매는 찾아봐야 할 정도입니다. 신앙의 활동이 있고, 열정도 있기 때문에 얼른 봐서는 모릅니다. 그러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와 같이 실제로 하나님께 붙어있는 사람은 우선 말부터 다릅니다. 그 입으로 지혜와 총명을 냅니다. 입술의 열매를 자연스레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잘못하면 생명 없는 신앙 인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생명의 통로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성경에 대한 지식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지식만 얻으려고 하면 성령이 막으십니다. 그럴 때는 거기서 멈추어 서서 영혼의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출발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처음엔 진리가 수용이 잘 안되지만 계속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면 물이 흐르듯 성경과 같이 흐름을 타게됩니다. 그때부터 성경의 말씀이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로마서의 가장 핵심은 8장이며 8장 중에서도 6절의 말씀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기독교는 사상을 바꾸는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만이 진리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과 생명을 우리에게 공급하여 생각을 바꾸게 하십니다.
먼저 로마서를 세 부분으로 나누면 1장-8장은 개인구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왜 구원받아야 되는가
●어떤 방법으로 구원에 이르는가
●구원의 결과는 무엇인가를 진술합니다.
이 과정은 구원이 필요한 자라면 누구든지 똑같이 적용될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 원리는 필수 선택해야 됩니다. 견고하지 못해 잘 흔들리는 신앙은 로마서를 통한 구원이 아니고 자기 식으로 믿은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나 들을 때에 쉽게 수용이 되는 말씀이 있고 수용이 잘 안 되는 말씀이 있는데 쉽게 수용이 되는 말씀은 자신이 이미 그 상태가 된 것이며 수용이 안 되는 것은 그 상태가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들으면 수용이 될 때가 옵니다. 그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다만 억지로 믿는 척은 말아야 됩니다. 로마서의 말씀이 수용이 안되어도 요한 복음에서나 또는 에베소서에서 또 다른 말씀을 볼 때 깨달아지면서 수용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연구는 하나님 앞에서 기다림이 매우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로마서는 반드시 체계 있는 원리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흡사 자동화 기계의 전 시스템과 비슷한 원리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겁니다. 원료로부터 완제품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 지듯 로마서는 구원이 필요한 죄인으로부터 구원이 확정된 하나님의 자녀의 완성적 차원까지의 전 과정을 서사적으로 진술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에는 절대적 소원과 상대적 소원이 있는데 절대적 소원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이며 상대적 소원은 그분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보좌와 거리가 가까워져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일지라도 그 거리에 따라 영광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내가 은혜의 보좌와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를 측량해 보아야 합니다(계11장) 로마서적인 구원이 아니면 내 속에 있는 죄와 사망과 어둠의 요소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와 가까이 할 수 없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의 보좌와의 거리에 따라 하나님의 대접이 다릅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성경의 중대한 관문입니다. 성경이 신자의 믿음을 인정해야 됩니다. 로마서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뒤의 히브리서 말씀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이루어보고자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기는 자들의 복을 맛보려고 하지 않고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도무지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그 구원을 받고 누리고 있는가 확인해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9장-11장은 전체 인류의 구원 (온 이스라엘)에 관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세계관과 역사관이 생깁니다. 개인구원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지만 인류 전체구원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그 다음 12장-15장은 “이렇게 살아라”는 명령입니다.
산 제사의 방법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나란 개체가 구원을 받아 변화되어 공동체인 우리 속에 들어가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헌장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축복을 받으려면 1장-8장의 구원이 내 안에 이루어져서 12장 이후의 삶이 되어져야 합니다.
12장 이후의 삶이 안되면 ‘왜 안 되는가’할 것이 아니라 다시 1장-8장의 구원의 원리를 내 안에서 재점검 해 봐야 됩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원리와 능력이 없으면 삶으로 연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를 통해 이 원리와 능력을 터득해서 내게 나타나는 효력이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어야 됩니다. 로마서는 복음의 확실한 효력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산다’고 말할 수 있게 합니다. 바울은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라”고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나아가는 목적을 서두에 밝히고 있습니다. 실제로 로마서는 능히 우리를 견고케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1장-11장까지는 듣고 12장부터는 실행하는 삶의 교훈입니다. 1-11장까지는 교리요 12장부터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들어야 행할 수 있는 원리(교리)가 내 안에 생깁니다. 듣지 않고 행하려고 하면 많은 변론과 부작용을 내게 됩니다. 로마서는 하나님의 주장이 일관성 있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씀과 같이 신앙은 실제화 되는 것이므로 믿음에 관해서 “예”냐 “아니오”냐 분명히 대답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맹세”로 이루어 가십니다. 그 구원의 약속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영접)이 의를 얻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살려고 애쓰지 말고 “살았다”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면 살게되고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포기하려고 애쓰지 말고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천당 갈려고 애쓰지 말고 내게 천국이 임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성경이 요구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믿어보려고 하는 사람은 말씀을 그대로 안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권세가 그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이겨 보려고 더 열심을 내게 되고 그 다음에는 자기 의를 세우게 되는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결코 붙여서는 안될 단어는 “그러나”, “그렇지만” 같은 말입니다. 이건 자기 생각이 개입되어 “말씀은 옳지만”하고 자기를 변호하는 강퍅한 마음인 것입니다. 이러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브라함처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대접하고 우리의 전심으로 아멘하고 받아들여야 됩니다.
로마서 총론을 다시 한번 말하면 1장-8장 개인구원에 관한 내용입니다.
1장 후반부터 3:18 까지는 죄의 이야기입니다. 즉 불신자의 이야기이며 그 불신자란 억지 논리로 진리를 막는 자들입니다(롬1:17)
1장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와 막는 자의 이야기입니다.
2장은 유대인의 죄가 무엇인가 믿는다라고 하는 자들의 죄가 무엇인가 안다고 하는 자들의 죄가 무엇인가 지적합니다.
3:19-32 까지는 이런 존재들의 해결책이 제시됩니다.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복음에 대한 수용의 의미입니다(중요) 그래서 로마서 3장과 4장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믿음과 성경이 규정하는 믿음 사이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지리라”(롬1“17)
복음이 내 속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의가 내 속에 나타나고 그 의가 믿음이 되고 그 믿음이 쌓아지면 주님을 신뢰하게 되고 난 다음 그 믿음으로 살아지게 됩니다. 이것을 아브라함의 전통을 좇는 로마서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내가 스스로 잘 믿는다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죄는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을 먹고 죽은 것입니다. 그럼 의는 무엇일까요? 죄를 뒤집으면 의가 됩니다. 그럼 먹으라고 하는 것을 먹고사는 것이 바로 의가 됩니다. 그 외의 인간의 여러 죄의 유형은 하나님과 분리되므로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 그 자체가 죄의 전부는 아닙니다. 복음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면 믿음의 능력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그 의를 앞세우고 행하십니다.
로마서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의”입니다. 사람이 자기 열심으로 자기가 믿는 것을 스스로 의로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과 충돌이 생기는 것입니다. 고급 유대교인들은 금식과 십일조와 기도로 하나님에게 자랑합니다. 그러나 세리는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내가 죄인이로소이다 합니다. 그 때에 세리는 의롭다함을 얻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죄와 의”의 개념을 잘 이해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의를 수용하려면 내가 죄인임을 먼저 인정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의를 수용하지 않으면 내가 의인임을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 됩니다. 로마서가 “믿음으로 의로워진다”고 하는 것은 복음의 말씀을 그대로 수용하면 그 의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의인”이란 사람이 깨끗해져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임하면 의인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로마서 10장의 말씀을 이해가 안된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10장은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그런 헛수고는 하지 말아라. 말씀이 가까웠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의가 다가온다 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르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수치를 당치않고 부요 하게 하시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나옵니다. 믿음은 그 사람의 열심이 그 척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대한 지식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에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를 생략하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친근히 부를 수 있는가 이 믿음을 항상 점검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음은 공허하며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괴로운 것이며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은 암탉이 병아리를 모음같이 -“여호와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이렇게 구원의 길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씀 속에 들어가면 여호와의 신이 역사 하십니다. 그래서 목마른 자, 주린 자는 다 물로 나오라고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공허는 아무리 집어넣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열등감, 우울, 두려움 모든 것이 다 여기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는 것은 “여호와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그리고 빛이 있으라 하시고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습니다. 그 구원 속에 그 빛 속에 내가 발견되는 것 이것이 바로 로마서가 주는 비밀스런 축복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축복을 약속하시고는 “내가 하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피의 언약을 맺을 때에도 하나님이 홀로 지나가셨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스스로 이루시겠다는 결심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어야 되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의 믿음을 우리가 받아들이도록 성령으로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 다음 그 말씀을 수용하면 믿음이 됩니다.
창12장-22장까지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을 보면 아브라함이 위대해서 이삭을 바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그 안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믿게 하시고 약속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의 복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놓으시고 지금도 여전히 성령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자신의 사랑을 역사 속에 전시해 놓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 말씀을 수용하면 처음엔 겨자씨처럼 작게 다가오지만 그 말씀이 자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 우리 속에 나타납니다. 나중엔 말할 수 없이 풍성하고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발상은 로마서부터입니다. 교회사적으로 많은 논쟁을 벌여왔습니다만 로마서를 여전히 악평하는 자들은 기독교는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바울교라고도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모세오경과 사복음서이고 그 외는 사람들이 기록한 책이라고도 합니다.
아닙니다. 사복음서는 예수님이 직접 일하심을 보여주시는 말씀이요 교회서신도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인 것은 실제로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우리에게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적용하게 하기 위해 교리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복음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받아들이고 믿고 그 원리를 알려고 해도 사도들이 기록한 교회서신을 통해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적용되기 매우 힘이 듭니다. 많은 비평가들은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 그리스도를 꾸민 것이라고도 악평합니다.
그들은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가 말하기도 합니다. 현재의 기독교를 예수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바울이 해석한 바울교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로마서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사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은 병 고치시고 이적을 행하시는 정도로만 알게 됩니다.
바울은 실제로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하신 일의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로마서와 교회서신을 통해 철학적인 언어로 성령의 간섭 안에서 진술했습니다. 우리가 단단하게 무장하지 않으면 스스로 무너지게 됩니다. 로마서나 그 외 교회서신을 통해서 보면 바울의 뜨거운 열정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울 안에 있는 성령의 열정이며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성령의 역사는 받을 때 단번에 오십니다. 그러나 점진적으로 성장이 되어 갑니다. 삶을 통해 적용하며 계속 자라갑니다.
사도행전의 성령의 역사와 로마서의 성령의 차이는 오순절 성령은 바깥에서 나타나는 역사로 볼 수 있으며 로마서의 성령은 생명의 성령으로서 겨자씨처럼 우리 안에 작게 오셔서 우리의 묵상과 실천을 통해 확대되는 것입니다. 이 성령의 역사는 소리 없이 임하시고 소리 없이 밖으로 흘러나오게 됩니다. 또 많은 이들은 영원히 사는 것만 영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생을 시간의 길이로만 보지 말아야 합니다. 영생은 길이와 높이와 넓이와 깊이가 있습니다. 참깨 씨 한 알도 입방체이며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인데 그 영생이 과연 영원히 사는 것뿐이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복이 이 영생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 영생이 우리 안에서 확장되어 가면 하나님 앞에 아주 담대하게 나아가는 믿음으로 발전됩니다. 이것이 기도와 찬송이 되어서 구원을 계속 이루어 가게 됩니다. 기도의 진정한 목적도 말씀이 이루어지도록(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할 때는 진리와 성령이 자세히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해 주십니다. 유대인이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희들이 목소리를 내게 상달케 하려고 하느냐 내 손이 짧아서 너희를 구원 못하는 것이냐 너희 죄가 가리워서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냐”(사59:1-2)고 하셨습니다.
선지자 엘리야, 엘리사의 활동시대는 왕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표적과 기사를 통하여 깨우치셨습니다. 그러나 왕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 할 때는 죄를 지으면 나단 선지자와 같은 사람을 보내어 죄를 지적하게 하시어서 깨우치셨습니다. 다윗과 같은 경우에는 그 선지자의 말을 듣고 통곡하며 회개하였습니다.
로마서는 1장에서 8장까지 전개되는 가운데 표적이나 기사가 없습니다.
신앙의 본궤도에 들어가기 전에는 표적과 기사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다음에 로마서가 있음을 기억해야 됩니다. 복음을 전 할 때의 역사와 그 복음을 잠잠히 이룰 때의 성령의 역사를 구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성경저자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온 천하 만물은 다 물과 성령으로 되어졌습니다. 하늘 것은 성령으로 땅의 것은 물로 되어졌습니다. 우리 자신의 재창조도 물과 성령으로 됩니다(거듭남) 그러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복을 입은 것은 파티 장에 들어가기 위한 것이지 전부가 아닙니다. 로마서는 로마서 안에 바울의 정신이 들어있습니다. 그 당시 로마는 지금의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합쳐 놓은 것보다 더 센 나라였습니다.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은 복음을 통해 그 센 로마를 복음화 시켜 전세계를 복음화 시켜야겠다는 바울의 열정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를 통해 성령의 정신, 하나님의 정신을 우리가 물려받아야 됩니다.
우리 인간은 세상의 어떤 사물보다 복잡한 존재입니다. 거듭난 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니라 우리 사상이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로마서와 교회서신을 통해서 우리 사상을 바꾸지 않는 한 절대로 우리 삶을 바꿀 수 없습니다. 아니 그대로 두면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생각이 주님의 생각으로 가득히 채워져서 하나님의 창조의 뜻에 의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한 것으로 되어져야 합니다.
4장은 다윗과 아브라함의 믿음을 실례로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선진들의 뒤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성경의 공인을 받는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만이 진정한 구원입니다. 1장-11장까지의 원리를 따르지 않고 12장의 산 제사로 바로 들어가면 문제가 생깁니다. 천주교가 행함이 곧 구원이라 말합니다.
산 제사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부터가 아니고 받아들이는 것부터입니다. 예를 들면 결혼한 뒤에 시부모를 모셔야 합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신랑도 받아들이지 않고 시부모 모시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의에 의한 그리스도인들의 섬김이나 봉사를 하나님이 보신다면 “네가 한 것이지 내가 언제 요구하였나” 하고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사1:12)
5장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었고 화평을 얻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5:1-11까지는 완전한 구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구원의 모든 것입니다. “평화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말입니다 죄 때문에 막힌 하나님과의 사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화평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평강과 희락이니라” (롬14:17)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은 교훈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이렇게 저렇게 해야되는 조건적인 말씀입니다만 그 아들의 음성은 그 말씀을 들으면 우리 심령 속에 베어듭니다. 베어들어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말씀을 증거 하는 자의 권위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이란 말은 그분 앞에 엎드려 듣는다 입니다. 들으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진수입니다. 5장 12정-7장 14절까지는 원리 문제입니다.
5:12-21은 아담과 그리스도, 6장은 죄와 의, 7장은 전남편과 다시 살아나신 새 남편에 대한 말씀입니다. 구원은 소속부터 먼저 확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안되면 사단의 참소를 끊임없이 받게 됩니다. 아담 안에서 구원받지 못한 신사가 있고 그리스도 안에 구원받은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 안에는 어둠이요 사망이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빛과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은 목사 장로 체면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이 보낸 것을 가지고 있는가 없는가를 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의의 대표인 그리스도의 소속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대표인 아담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죄에게 종노릇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언제든지 이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결국 믿음이 사상화 되어야 행함이 됩니다. 죄도 권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죄도 왕 노릇합니다. 의도 권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의도 왕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효력은 말씀을 받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를 나타나게 합니다. 십자가를 내가 통과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이 통과하신 것을 그대로 믿으면 구원이 되고 그리고 나서 포기할 것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소급되어 적용되어집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은 소급법 입니다. 그리스도안에 들어온 후에야 뒤돌아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6장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길은 오직 세례밖에 없음을 분명히 제시합니다. 7장은 인간의 갈등(인간의 심리학)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갈등은 내가 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할 때에 옵니다. 신령한 생활은 자기 자신의 잘못을 분별하고 나 자신은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닫고 주를 붙잡는 싸움입니다. 세례의 참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시42편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불안하여 하는고”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해결책은 바로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산 자의 고백은 할례나 무 할례나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 지음 받은 자뿐이로다”가 되어야 됩니다.
로마서는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서신입니다. 우리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어도 육신은 다시 나타납니다만 육신이 나타날 때의 처리 방법에 따라 영의 사람인가 육의 사람인가를 알게 됩니다. 처리 방법이 곧 십자가의 도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죽을죄를 지어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도망가면 아무도 우리를 빼앗지 못합니다. 그 길만이 유일하게 사는 길이요, 구원의 길입니다. 율법의 사람은 율법을 들을 때 “아 해야지”그러나 바로 돌아서서 “아 안 되는구나”입니다.
본성이 죽지 않은 사람은 동기를 부여하면 달려듭니다. 그러나 초지일관이 안됩니다.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