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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사람의 욕망은 과연 악의 축인가?] 2005-03-25묻고답하기-

사람의 욕망은 과연 악의 축인가? 김상욱 2005-03-25 22:46:44, 조회 : 172, 추천 : 23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인들의 열심은 허물어질 돌 성전을 향한 욕망입니다.사울 청년이 대 제사장의 위임장을 받아 다세섹으로 달린 열심은 율법 수호를 위한 욕망입니다.그러한 유대인의 욕망은 몸 성전을 삼 일만에 세우시려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열심과 정면으로 부딪혔습니다(요2장)사울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살기등등한 열심은 그리스도의 빛과 부딪혔습니다.한 쪽은 지식을 쫓지 않은 무지한 열심이며(롬10) 다른 한 쪽은 믿지 않았을 때의 알지 못한 욕심(딤전1:13))이었다고 성경이 진술했습니다. 다 잘못된 욕망입니다. 종교적인 악의 축입니다.
다들 욕망이라고 하면 무조건 나쁜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일반적으로 사람은 동물과 같은 생식적인 욕구, 안전하게 살려는 욕구, 집단에 소속되려는 패거리 욕구, 자신이 인정 받으려는 욕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성취를 위한 욕구가 있습니다.
처음 네 가지의 욕구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곧 육신에 속한 욕구라고 볼 수 있지만 마지막 다섯번째의 욕구는 창1장의 실현을 위한 창조적 욕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것 또는 도덕적인 향락을 위해 자신이 스스로 성취하는 것은 안 되겠지요.지금의 현대교육과 자본주의의 두 괴물을 등에 업은 현실교회는 비난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열심이 비난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처음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만날때는 지난 날의 자신의 욕망이 매우 저주스럽고 가증해서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됩니다(저도 10년 가까이 갈 2:20절을 묵상) 그러던 어느날 제 속에서 거룩을 향한 열망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망이 불일듯이 일어 났습니다. 처음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하던 기본 위에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로 처리하고 그리스도의 빛과 생명과 사랑의 화신이 되고자 하는 바램이 간절해 졌습니다. 로마서 8장은 탄식까지 하며 몸의 구속을 사모한다고 말씀 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붙좇았고, 보아스에게 적극적인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한 절도 없는 룻기가 구원을 가장 정확히 나타내는 성경으로 정경 속에 들어 있습니다. 시편 기자도 목마른 사슴이 시냇믈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다고 표현 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심지어 헐떡거렸다고도 표현합니다.
바울도 붙잡힌 것을 붙잡으려 푯대를 향해 좇아 갔고, 자신의 속에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하는 만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어설픈 욕망을 보이다가 사단이라는 극언까지 들은 베드로는 어린아이 같이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권합니다. 이건 분명히 욕구이며 욕망입니다.
신앙의 과정 가운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 할 때는 아무일도 할 수 없이 단지 저는 다리를 수습해야 합니다(히12장)그러나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잔이 넘칠 때는 그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역사만큼 열심을 내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기도를 육체안에 있는 성도들이 완전한데 나아가는 모델로 제시하고 있습니다(히5,6장)
분명 자아의 실현이나 칭찬을 위한 업무수행에 욕망의 에너지를 쏟아 붓는 일은 종교적인 해악입니다.그러나 성령께서 친히 주장하사 진리로 거룩, 거룩으로 영광, 영광으로 하나, 하나됨으로 온전, 온전함으로 사랑으로 나아가는 일에는 성령의 요구에 합일하는 열심으로 나타나야 합니다(요17장)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를 위한 주님의 기도요 욕구이며, 또 그 분 자체가 바로 열심이기 때문입니다(사9:7)
==========================================================================[re] 사람의 욕망은 과연 악의 축인가? 권범식 2005-03-26 02:40:34, 조회 : 129, 추천 : 13
안녕하세요...
김상욱님의 글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언뜻 보면 상욱님의 글이 맞는 듯이 보이지만...자세히 보면 현재 대부분의 교회라고 주장하는 곳(사실 교회라는 간판만 달았음.)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비슷하다고 생각되네요...
그 이유는
첫째, 자신의 성취를 위한 욕구를 긍정하신 부분입니다. 현재 모든 교회라고 하는 곳에서 왜 이렇게 상욱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현대 교육과 자본주의를 주장하게 됬는지 잘 모르시는 거 같네요...그리고 그들도 그 나름대로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상욱님께서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현재 거의 모든 간판 교회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죠...왜냐면...그 현대교육과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자신의 성취를 위한 욕구 채우는데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실로 복음은 자신의 성취라는 것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왤까요? 그 이유는 아주 기본적인 내용이면서도 대부분의 기독교도들이란 사람들이 언제나 빼뜨리는 하나님의 완전 하심인 것입니다. 특히 사도 바울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라고 하거나, 또한 복음을 위해서 고생한 것들을 서신서에 적었으나 끝으로는 모든것이 배설물 밖에 되지 않다고 고백하며, 죄인중에 괴수라고 합니다. 그것을 가볍게 보셔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냥 겸손함이 아닙니다. 바울의 이모습은 바로 심령이 가난한자의 모습 그대로 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복음을 쫓았지만 그래도 나오는 것은 죄밖에 없다는 고백입니다. 바로 여기가 포인트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는 성도가 복음을 알아갈수록 자신의 성취욕이 얼마나 죄악인지 계속 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죄를 안짓거나 성스런일에 열을 내는 모습 그 자체가 아니고 그 안에서 자신의 성취감이 얼마나 죄성이 있는지 죽을때까지 알아가는 그 모습인 거죠. 이 복음의 내용에서는 어디서도 자신의 성취란 찾을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으로써의 인간한테는 아주 이질적인 것이죠...결국 성령님이 아니시면 이 내용을 느낄수가 없는 것입니다.(왜냐면 인간은 아담이후 계속적으로 자신에게 긍정하는 모습을 띠게 되어졌으며, 그것은 예수님의 성령이 임하신 자만 벗어버릴 수 있기 때문인 거죠.)
둘째,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죄인들의 욕망을 공격하시려고 사람들의 욕망의 방향을 바꿔서 성스런 욕망을 이용하시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사람의 어떤 부분을 바꿔서 이용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을 이용하시는 목적은 사람으로써는 불가능하고 하나님께서만 하실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보실때 절대로 그 사람이 얼만큼 바뀌었다...이렇게 보시면 잘못 보시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현재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성경을 보죠.) 성경은 사람이 이렇게 바뀐다...라는 것을 나타내는 책이 아닙니다. 목적자체가 틀려 있는 거죠...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을 주목해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오고싶어 하는 욕망이 이렇게 크더라도 예수님이 없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셔도 무방할거라고 생각되어 집니다.단적인 예를 들면 다윗은 하나님께 마음에 꼭 맞는 자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드리고 싶어 해서 그의 아들 솔로몬이 거창하게 지어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께 성전을 드리겠다고 했을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내가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과 그렇게 광야를 건넜지만 내 집을 지어달라고 하신적이 없다고 했습니다...그리고 결국 예수님께서 3일만에 허무시고 다시 세우셨죠...결국에는 성경의 모든 일은 예수님으로 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성경에서의 명령문을 명령문으로 보시면 안될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짐을 지우는 책이 아닙니다. 성령이 오시게 되면 그 모든 일이 성도에게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셋째, 마지막으로 성령님에 의해서 주장하셔서 거룩함으로 나가는 것과 그냥 우리가 죄를 덜짓거나 안지을려고 노력하는 거룩하려는 것과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봐선 구분이 안 갑니다. 왜냐면 우리 인간 사회 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희생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도와주거나 돌봐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A형. 나는 주님이 성령으로 요구하신 거룩한 일을 한다...와...B형. 나는 자기희생을 통해서 남을 도와주는 거룩한 일을 한다...와 구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여기서 거룩한 일을 한다...라는 것은 거룩함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그런데 C형인 사람이 있는데...이 사람은 주장이...나는 어떤일을 해도 거룩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말은 자신이 아무리 착한 일을 하고 자기희생을 한다해도 이것은 자신의 속성이 아니며 자기가 할수 있는 일도 아니니 하시는 이는 주님밖에 없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C. 나는 어떤일을 해도 거룩해지지 않으며 오히려 아무일도 안해도 이미 주님의 피로 거룩하다 하심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C라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앞의 A,B사람과는 틀린 주장을 하는 것인데, 왜냐면 앞의 두 사람은 앞뒤나 이유가 어쨌든 거룩함이나 혹은 영과, 온전함 등등에 관심이 있지만 C라는 사람은 오히려 그런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다하셨음에 관심이 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이 성스럽고, 온전하고, 거룩하심에 관심이 있지 자신이 성스러워지고, 온전하고 거룩해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더라는 것이죠...그걸로 끝이라는 것이죠...우리가 무엇을 한다는 것...욕망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이미 C라는 사람에게서는 멀어지는 것일 겁니다. (그냥 자신이 복음에 열심이 생기면 자신을 포함한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비복음적인지 말씀과 대비하시면서 성경을 묵상하시고, 언제나 그런 열심이 생기게 하신 예수님께 감사하시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럼 서툰글 읽어 주시느라 수고 하셨네요...조금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좋은 밤 되세요...
==========================================================================[re] 사람의 욕망은 과연 악의 축인가? 이근호 2005-03-26 07:02:25, 조회 : 154, 추천 : 14
'자기 부인'을 취소시킬 만큼 긍정적인 욕망이나 욕구란 없습니다.
자기 부인까지 해가면서 구원받겠다고 나선 자들이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살해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차지해서, 소유해서 구원되려는 욕망은 하늘 나라 입성과 아무런 상관없는 종교 욕망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구원받고자 하는 것을 적극 막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귀하는 모르고 있습니다.
구원이란 은혜로만 가능한데
은혜란
십자기의 피의 공로만이 유효합니다.
따라서 이 피 앞에서 인간의 모든 속성은 다 부정되어야 마땅합니다.
성령을 받은 자만이 아는 복음입니다.
##############################################################################################믿음과 행함의 함수관계 김상욱 2005-03-26 18:56:56, 조회 : 146, 추천 : 18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명쾌하게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데 있어서 큰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흡사 공식 없이 고등 수학을 푸는 것처럼 신앙 생활이 애매 모호하게 됩니다.
믿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행함을 별로 중히 여기지 않고 반면에 행함을 강조하는 쪽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라는 성경의 근거를 대면서 행함을 중히 여깁니다. 어쩜 교회의 역사와 함께 계속 되어 온 오랜 논쟁이 바로 이 믿음과 행함의 함수관계인 듯 합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논쟁의 원인은 믿음과 행함을 별개로 보든지 아니면 대칭으로 보는 시각 때문인것 같습니다. 이 둘을 별개로 보면 종교 개혁의 선두주자 중의 한 사람인 마르틴 루터가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혹평한 것처럼 되고, 이 둘이 서로 대칭된 것으로 보면 믿음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개혁교회가 사회에 대해 무책임한 반면에, 선한 일을 많이 해서 믿음보다는 선한 행위가 한 수위에 있는 듯하게 보이려는 진보주의 교회의 경우가 됩니다.
특히 여러 종파의 자선 단체를 겉에서만 지켜 본 초신자들은 교회가 그런 일을 마땅히 해야 하는 기관이며 만약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교회 존재 가치 마저 없는 것인 양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 들어와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보다는 실직자들 밥 퍼주는 일이 더 멋있게 보이기도 하는 실정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성장 프로그램 속에 선교나 구제를 끼워 넣어 교인들의 선행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교회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말씀이나 기도는 먹는 것이고 전도나 교제는 운동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설명을 매우 잘한 것 같으나 이것 마저 완전한 표현으로는 미흡합니다. 그 만큼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정확히 설정하고 그 함수관계를 풀어 가는 것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인간이 해야할 일을 구분하고 정립함에 있어서 예정론이니 알미니안주의니 해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양립이 될 양으로 서로 대립되어 있습니다.
요즘은 누이 좋고 매부 좋게 하는 식으로 100% 하나님이 일하시고 100% 인간이 일하는 것이라고들 말하기도 합니다. 이 말 조차 100%의 설명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말하는 자신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헷갈리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설명하는 일은 방대한 내용이기 때문에 논문 하나 정도는 되어야 하겠지만 우스운 말로 홍길동이는 지혜로워서 하나하면 열을 깨닫는다고 했듯이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분들은 짧은 힌트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기에 위험 부담을 느끼면서 조심스럽게 이 글을 씁니다.
사실 믿음과 행함의 관계는 이 글 제목에서 이미 힌트가 나와 있습니다. 함수관계라는 말은 하나의 변수의 값이 달라지면 다른 변수의 값도 함께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간단히 말하면 믿음이라는 변수가 살아서 일을 하면 행함이란 변수의 값도 저절로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이 "나는 믿는다"는 식으로 고정된 개념이면 행함이 나타나지 않든지 따로 행함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지만 믿음이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산 믿음이면 그 믿음과 연결된 행함이란 변수를 움직이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산 믿음이란 몇 가지 예를 들면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주셨으니"(요1:12)하심으로 여기서 믿음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자격)"를 얻는 조건이 됩니다. 사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자격)가 있으면 행함은 저절로 따를 것이라는 것은 쉽게 생각 할 수 있습니다. 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요7:38) 여기서의 믿음은 생수의 강이 심령에 흐르게 하는 수단입니다. 심령에 생수의 강이 흐름에도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그러므로 교회가 행함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믿음이 없기 때문에 행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여기서는 믿음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 안에 나타나 있는 사람이 어찌 하늘만 쳐다보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대상으로만 믿고 그 분이 하신 구속의 사역의 전 과정을 말씀을 통해 온전히 수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 믿음이 역사하여 하나님의 의를 생산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하며, 그 믿음을 발진할 때마다 성령의 역사가 심령 안에서 역동적으로 나타나도록 하는 복을 놓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은 살아 있기 때문에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리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6) 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항상 영과 생각 속에서 활동하므로 언제나 하나님의 영과 생명을 우리에게 나타낼 수 있는 변수입니다. 믿음의 주가 살아 계시므로 믿음 또한 무엇을 생산하는 산 믿음이 됩니다. 이와 같은 실체적인 사실을 확실히 알기만 한다면 그 믿음과 연결되어 있는 다른 변수인 행함이 함께 변하는 것은 수학공식 만큼이나 분명함을 깨달을 수 있을겁니다.
==========================================================================[re] 믿음과 행함의 함수관계 이근호 2005-03-26 22:11:54, 조회 : 144, 추천 : 14
여전히 믿음이란, '자기 행위의 부정'이라는 이 명확한 사실을 거부하고 있군요.
함수관계라면 행함을 변수로 도입하고, 또한 믿음도 변수로 도입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은 믿음과 행함 사이에 아무 것도 설명한 게 없는 셈이 됩니다.
즉 정비례 관계인지 반비례 관계인지 전혀 설명되지를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따지겠다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증거에는 관심이 없고,
소위 '신앙행위'에 대한 납득을 시도해서 그 모습들을 정당화해 주려는 의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행함이 함수관계라는 그 의식조차 십자가 앞에서 부인해야 합니다.
##############################################################################################부활을 부활 시키세요(교회들을 향해) 김상욱 2005-03-27 07:25:14, 조회 : 125, 추천 : 16
인간의 의식 속에 부활의 사상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지난 해 식목일에 대통령이 나무를 심으면서 모든 자연이 봄을 맞아 새 출발하듯이 자연의 순환의 법칙대로 새 마음을 갖고 새 출발하자는 식으로 말을 하는 걸 보면서 그 속에도 은근한 부활의 사상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여성 정치인은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에 비유해서 자신의 희생을 통해 무언가 회복되기를 바란적도 있습니다. 이 또한 민중 속에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는 부활의 의식입니다.
그런 희미한 부활의 사상이 기독교 안에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계시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실제를 약화시키지 않는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그러나 부활은 막연한 기대나 환경과 사정이 호전되는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바로 믿음에 의한 실제적 상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무덤 문을 열고 다시 사신 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아담 안에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는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이 그 확실한 증거입니다. 만일 지금 믿는 자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다면 2,000년 전에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사실은 명명백백합니다.
그 분이 다시 살아나지 못했으면 내가 어떻게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지금 모시고 있을까요? 그러므로 그 분은 분명히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으면 그 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내 영이 영원하고도 새로운 장막을 바꿔 입을 것이라는 소망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부득불 그렇게 될것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소망은 한 세트입니다. 소망은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현재 생명, 현재 천국이 장래의 영원한 나라 곧 천국을 보장합니다. 물론 성령이 그를 보증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의 부활과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모신 믿음에 대한 확신도 없이 내세의 부활만 바라보고 있는 듯 합니다. 그래서 천국은 이 세상보다 훨씬 낫게 새롭게 개선해 놓은 아주 살기 좋은 곳 정도로 생각하며 소망하는 부류도 있습니다.
봄이 오면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어떤 고통의 대가를 치르고 나면 상황이 달라지더라는 민중의 부활 사상이 막연하게 기독교의 부활의 참 영광을 삭감시키고 있는 증거입니다. 이게 바로 세상의 지식과 관념으로부터 들어오는 세상의 신의 영향입니다(고후4:4).
많은 신자들이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도무지 자기 안에 모시고 싶어하지 않음을 봅니다. 그러다 보니 영접하라는 말을 따로 해야만 알아듣는 지경에 이르러 예수 영접, 예수 권세만 부르짖는 단체도 생겨났습니다. 그것 또한 폐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우리의 개인의 구주요, 개인의 부활과 생명의 영이시지만, 바로 개인별로 한 사람씩 그 분을 모셔들이는 것이 아님을 성경은 밝힙니다.
아담과 그리스도 두 대표 주자 사이에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으로 한꺼번에 통째로 넘어 왔다고 말씀합니다(롬5장). 다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복음을 듣고 깨닫는 것은 개인별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대속의 사역으로 이루어 놓으신 사실을 말씀을 통해 그 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영접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행위가 아닌 믿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어지는 말씀이기 때문에 믿으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부활절의 메시지 중에 가장 시급한 것은 성도들의 관심을 골고다나 빈 무덤으로 끌고 갈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의 영으로 지금 여러분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의 역사적인 죽으심과 부활은 신파 보다 더 실감나게 설명하고, 천국의 소망에 대해서는 로또 복권 1등 보다 더 귀하게 말하면서 지금 부활과 생명으로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에 관해서는 왜 구렁이 담 넘듯이 슬며시 넘어가고 마는가?
그러면 안 됩니다. 자신이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맛보고, 만일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있으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으로 이미 결정된 것이지만, 영은 의로 인하여 산 것 곧 영원한 것임을 확신한 다음, 그 사실을 그대로 외쳐야 합니다.
기자는 사건 현장을 생생히 재생시킬 능력이 있어야 하듯 우리 또한 그래야 합니다. 보지도 못한 2,000년 전의 사실에 대한 먼지 덮인 자료를 뒤져보지 말고 자신 안에 지금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성도들의 심령에 확고하게 심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완성된 복음 곧 진리로 깊이 깊이 심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살아있는 예배, 향기 있는 기도, 감동이 있는 찬양, 거짓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 이런 것이 봄기운의 꽃잎처럼 흐드러지게 피어 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과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모신 곳이 의인의 모임이기 때문에 성령의 바람은 그 곳으로 강하게 붑니다. 만약 마르다나 마리아처럼 마지막 날 운운하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하는 항상 살아계신 우리 주님의 말씀을 죽은 사람의 산소 앞에 세우는 정도의 실력이라면 성령과 동행할 생각은 일찌감치 포기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성도들 심령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는 말씀이 부활되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은 부활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부활시켜 그의 생명으로 살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re] 부활을 부활 시키세요(교회들을 향해) 이근호 2005-03-27 07:42:00, 조회 : 135, 추천 : 14
귀하께서는 지금 바알의 종교를 전도하고 계시는 겁니다.
귀하는 바알종교의 전도자입니다.
'부활의 종교=바알 신앙'이 구약 이방민족들의 종교성었습니다.
사도바울 당시 헬라인들에게
'영혼불멸설에 대한 민중 종교가 파다하게 퍼져 있었으며, 게다가 그런 철학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민중의 종교성과 십자가 복음은 접목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그 어떤 지혜나 증거물로서도 결코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인 십자가를 아는데 기초가 되지 못합니다.
만약에 세상의 종교성에서 출발해서 구원이 될 것으면 아예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지론입니다.
귀하께서 말씀하시는 '부활'이란 민간 무속 신앙의 일종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부활이란, 오직 십자가 지신 분의 십자가로서의 이 세상에 대한 본격적인 고발 시대를 여는 의미합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입니다.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의 판단력 자체를 정죄하고 고발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 성령 안이 곧 부활의 세계입니다,
즉
누구든지 살고자 하는 자는 죽게 된다는 원리입니다.
살게 된 자는 오직 긍휼하심을 입은 자 뿐입니다.
##############################################################################################보혈을 지나서 김상욱 2005-03-27 08:16:33, 조회 : 126, 추천 : 13
설교 부탁을 받아 간 어느 교회에서 예배 전에 부르는 찬송 중에 '보혈을 지나서'라는 가사가 흘러 나왔습니다. 귀가 번쩍 뜨이는 느낌이 들면서 참 좋은 찬송이라는 탄성이 나왔습니다.
'보혈을 지나서' ... 얼마나 많은 분들이 이 뜻을 이해 할까 생각해 봅니다.
구약의 성막에 번제단이 있는데 여기서는 죄인을 대신해서 짐승을 피흘려 잡아 태우고, 대 제사장이 그 피를 받아 물두멍을 지나 성소, 그리고 지성소의 은혜의 보좌 까지 나아가야 제사가 완성됩니다. 짐승을 피흘려 잡고 태워서 죄를 처리하는 번제단이 죄를 대속하는 기능이 있긴 하지만 제사의 최종 목표는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으로서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을 왜 섬기도록 하지 못하게 하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히9:13-14).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섬기도록, 다시 말하면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보혈을 지나서 라는 찬송가 가사는 상당한 영적인 깊이가 있는 것이라고 평가를 받아 마땅합니다.
사실 보혈은 죄인을 구속하는 기능을 하며, 십자가는 옛 사람 곧 아담의 후예들을 그리스도의 후예로 넘기는 신기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롬5장,벧전1장).
그러므로 보혈을 지나고 십자가도 지나야 비로소 성령과 만납니다. 그리고 성령은 그리스도와 하나되도록 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하십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길이라고 밝힙니다(요5:39).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십니다(요14:6). 문(요10)에 들어서면 길(방법)이 보이고, 그 길에서 진리를 깨닫고,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얻으면 같은 생명은 그의 형상이므로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합니다(고후3:18 참조).
따라서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인간의 완전 회복은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길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보혈을 성령으로 흘리셨고,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우리를 그 안에서 생명의 보자기에 사들고 건너 가신 다음 나를 따라 오너라고 강력하게 주문하십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전적 타락을 인정하는 육신을 철저히 부인하는 어마어마한 진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 예배는 보혈을 지나고, 또 십자가를 지나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상태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에 나아가는 것입니다(엡2:11이하). 그것도 담대하게 말입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사활의 대속의 은총의 효력을 끝까지 유지해야함은 물론입니다.
이 길에서 생명의 풍성함을 얻고, 주의 형상의 영광의 광채가 심령에 나타나서 확신이 점점 더해가고,안정된 가운데 담대함과 소망의 견고함으로 가득 채워져 가는 것입니다.그러나 자신 스스로가 아니라 피와 십자가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말미암아로 시작이 되어 말미암아로 끝이 납니다.
==========================================================================[re] 보혈을 지나서 이근호 2005-03-27 09:27:10, 조회 : 143, 추천 : 16
피를 지나가다 망해버린 나라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이들은 유월절 피를 지나 홍해 건너 하나님이 기다리던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이 늘 유월절 피 안에 있어야 함을 알지 못했습니다.
곧
'언약'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되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원하시는 것은 오직 '의로운 피에서 나오는 의(義) 뿐이었습니다.
즉 자신들이 구원받은 자라고 학각한 것입니다. (홍해 건너왔고 여리고성 무너뜨리니 그럴 오해를 한 만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늘 피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함을 알지 못했습니다.
신약의 새언약은 오직 예수님의 피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통일되는 것을 원하고 있지, 인간이 신의 세게까지 치올라오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을 원했다면 애초부터 에덴동산에 추방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떻게해서라도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게 하셨을 것입니다.
귀하께서는
인간 구미에 맞는 종교를 성경을 근거로 재조립하고 계시는 겁니다.
##############################################################################################주체가 누굽니까? 김상욱 2005-03-27 15:16:49, 조회 : 222, 추천 : 18
신앙 생활에 있어서 주체의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은혜와 그 은혜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반응이 구분되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하나님의 자녀가 해야 할 일이 분명해집니다.
신앙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예정론과 알미이안주의로 나뉘어져 끝없는 신학적인 논쟁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어느 쪽은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시니 손놓고 그 분의 역사를 기다리는 것이 믿음인 것처럼 변질되어 버리고, 다른 한쪽은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좋은 믿음인 것처럼 간주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 안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나라를 침노하는 일에 있어서 어느 쪽이 주체가 되어 움직여야 하는가를 확실히 규명하는 것은 어렵고도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에게 "너를 복의 근원이 되도록 하겠다"(창12)고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의 근원이 된 것은 아브라함의 노력의 결과로 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만든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밖으로는 아브라함이 그 주체인 것 같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주체 파악이 안된 사람들은 "여러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세요, 왜 본토와 친척 아비 집을 떠나지 못하십니까? 왜 모리아 산에 이삭을 바치듯이 모든 걸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십니까? 아브라함을 본 받으세요" 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금 자신의 신앙의 주체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는 일의 동력은 분명히 하나님으로 부터 나옵니다. 그러나 그 원인으로 인한 행동의 결과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비밀이며 어려운 싸움입니다.
성경 속에 있는 교훈들을 보면 다른 종교의 경전의 내용과 비슷한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나 다른 종교나 다 같이 선하고 착하게 살자는 가르침이 아니냐고 말들을 합니다.
다른 종교의 교훈을 이행하는 주체는 분명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사랑하고 섬기고 참아내는 등의 행동의 주체는 분명히 사람인 그리스도인이지만 그렇게 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흡사 장갑의 역할과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장갑이 움직이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손이 움직이므로 장갑이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손이 주체이고 장갑은 객체입니다. 다만 보기에 장갑이 주체인 것 같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이 장갑과 같은 자신들의 육체가 주체이기를 고집하고 하나님은 그 안에서 실제로 움직이는 손과 같은 실체가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꼼짝 안하고 가만히 감나무 밑에서 입 벌리고 누워서 입으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듯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는 믿음도 좋은 믿음이 아니고 땡감을 떨어뜨리려고 덤비듯 하는 믿음도 제대로 된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리자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라도 감히 머리카락 한 올만큼도 거들 수 없습니다. 오직 그 분만이 주체이십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신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일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그 은혜를 받은 자로서 새로운 주체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는 의무와 책임이 아니라 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주체의식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마5:13-14)라고 할 때에 앞에 있는 여덟 가지의 복이 이루어지면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주체가 된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 속에 녹아진 그리스도의 속성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도와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게 하겠다고 하시지 않고 바로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문제를 풀기가 매우 힘듭니다. 잘못하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가는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됩니다. 그러나 은혜로 시작된 구원은 은혜로 진행되고 은혜로 마쳐야 합니다. 만약 이 문제의 주체 파악이 된다면 그 사람은 받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자신이 진리 안에서 가진 기능과 역할을 깨달은 사람입니다.다. 이런 사람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다 또는 순종 할 수 있다는 식의 말은 하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거나 은혜를 주시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식의 무식한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에 있어서는 철저히 그 분이 주체이시고, 그 은혜를 받아 내 것을 만들어 적용시키는 것은 그 분에 의하여 자신이 주체임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죄 사함을 얻고 구원을 받아 영생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에는 오직 믿음 외에는 자신이 주체로서 투자 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영과 생명이 성령을 통해 자신 안에서 역사하는 순간부터 그 분으로 피동되는 주체임을 자각하게 될 뿐입니다.
거기서부터 무한대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무한대의 빚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장차 주실 면류관 까지도 송구해서 감히 쓸 수 없어 주님 앞에 벗어던지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주체는 주체로되 참 주체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주체임을 깨닫고 경외와 겸손과 순종과 기다림과 그 분과 동행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만이 갖는 유일하고 특별한 구원의 비밀인 것입니다.
==========================================================================[re] 주체가 누굽니까? 이근호 2005-03-27 15:31:15, 조회 : 153, 추천 : 15
일의 주체이신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죄와 용서의 관계가 어디로 갔는지 날라가 버렸군요.
인간과 로봇 사이에는 일의 주체자와 '도구'라는 관계만 성립합니다.
손과 장갑의 예는 이런 관계에만 적절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주님과 성도 사이에는 죄인과 은혜 베푸시는 의인이라는 관계로서 성립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늘 '경건치 않는 자'라는 규정이 따라 붙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에게도 예수님이 계셔야 구원이 성립됩니다.
이를 위하여 아브라함도 언약 안에서 늘 죄인으로 드러나는 존재이지 단지 '하나님께서 쓰시는 자'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
이처럼 주님의 일은 성도 구원의 주체자를 규정하기 위함이 아니라 '언약'을 드러내기 위한 조치입니다.
##############################################################################################제 위치를 확립해야 합니다. 김상욱 2005-03-27 17:01:19, 조회 : 155, 추천 : 13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이유는 자신의 위치의 모호함이 주 요인입니다. 죄인인지 의인인지, 어둠인지 빛인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영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완전한 복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들음이 없으면 믿음이 없고, 믿음이 없으면 주의 이름을 간절히 부를 수 없습니다(롬10)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전도하려고만 덤비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는 고민을 하지 않음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 이 세상의 새 나이가 된 사실은 누구나 다 압니다(예,2005년). 그러나 기독교는 그 분의 오심보다 십자가의 사건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의 기점으로 저쪽 이쪽이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저쪽은 죄와 사망과 어둠의 세계 곧 사단이 다스리는 세상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참예한(메토코이) 하늘에 속한 모든 성도는 일괄적으로 십자가 너머로 옮겨졌습니다(롬5장).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모아져 있습니다. 이 사실을 개인적으로 믿는 것을 영접이라 합니다(요1:12). 이 큰 구렁을 자신이 믿고 넘어 온 곳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활을 통해 하나님이 넘기신 사실을 말씀을 통해 그대로 수용하고 믿으면 감동(영의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성령이 그 일을 도우시고 보증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례를 받는 이유, 그리고 그 일이 죄 사함을 받는 표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자신을 일치 시키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어둠과 사망의 동네에서 의와 빛과 생명의 동네로 넘어 왔다는 확실한 표가 바로 믿고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세례의 의미는 롬6장 참조)
그렇다면 자신이 십자가 앞에 서 있는지 그 너머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는지 자신의 위치를 항상 점검해 봐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 있으면 천하에 둘도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죄인이며, 어둠이며, 사망입니다. 왜요? 죄로 죽은 아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만약 십자가를 자신이 지고 건너 와야 한다면 그건 복음이 아닙니다. 아직 지불할 수고가 남아 있으면 그건 복음이 아닙니다(롬4장 참조). 로마서 4장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다윗의 뒤를 따르는 믿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수용하기만 하면 그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져야 복음이 복음다와 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십자가 앞에 서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회상하고 처절한 죄와 옛 사람을 처리하신 하나님의 업적을 찬양하며, 자신의 구원의 위치와 기능과 역할 수행에 필요한 성령의 감동을 얻기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찬496장 참조)
그러나 하늘에 시민권을 둔 그리스도인들의 위치는 십자가 앞이 아니라 그 너머에 보혜사 성령(곧 진리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집 안에 있습니다(요14장) 그곳은 의인의 나라요, 빛과 생명의 나라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정과 욕심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2:20,5:24 과거)
다만 흙으로 돌아갈 죽은 육체(겉 사람-물론 고기덩어리만 말하는 것이 아님)를 처리하느라고 우리는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을 합니다. 비록 그리스도의 생명(조에)를 받았지만 지긋 지긋하게 말썽부리는 목숨(푸쉬케)의 생명을 부인하기 위해서 항상 십자가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완전한 복음을 듣고 시인하면 그 분의 의와 빛과 생명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은 취소되지 않는 성경속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롬6:23). 그러나 밖으로 드러나는 그 빛의 조도는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만큼 나타날 것입니다.
==========================================================================[re] 제 위치를 확립해야 합니다. 이근호 2005-03-27 17:51:31, 조회 : 157, 추천 : 14
십자가 지고 가는 것과
십자가 능력이 나타나는 것과 분간을 못하시는군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십자가 지고 가는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만이 드러내게 됩니다.
귀하의 글에서 제가 계속 탐색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구원받습니다. 이것만 증거하렵니다."라는 고백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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