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 2005-02-18
[신학과 철학의 굴레]6 손성식 2005-02-18 08:33:34, 조회 : 140, 추천 : 16
『신학과 철학의 굴레』
【무신론】
무신론이 뭔데 이렇게 앞에 내세우는 거야: 무신론이란 말은 딱 뭐라고 단정하기 힘들어. 왜냐하면 어떤 때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무신론자라고 규정하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국가종교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을려고 했던 사람들을 무신론자라고 규정하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신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자신의 역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무신론자라고 규정하기도 했지. 그러므로 무신론이라는 언어는 동일하게 작용하지만 그 내용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차이가 생기지.
좀 더 얘기해 줄 수 있겠지: 고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에게 있어서는 민족 또는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이 있었어. 그러므로 그 신들을 멸시하는 자가 무신론자였지. 따라서 그 시대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제국에서 무신론의 혐의를 받았지. 16세기에는 재세례파와 삼위일체를 거부하던 자들이 때때로 무신론자들이라고 불렸지. 사실 이런 상황이 애매해. 왜냐하면 이것은 이미 "정형화된 틀"속에서 틀렸다 맞다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야. 사실 신학은 정형화된 틀이야. 사람들이 자신의 합리성으로 고집한 거지. 하지만 사람들마다 욕망의 흐름이 달라서 합리성의 내용도 차이가 나. 그러니까 신학의 싸움으로 들어가면 복음의 싸움이기 보다. 자기 밥그릇싸움이 강해. 이것을 좀 고상한 말로 [카리스마와 권력]의 싸움이라고 해.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이지. 레오나르드 보프신부가 교회를 향해서 소리지른 것 아니야. 읽어 봐. 교회가 마냥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인 카리스마와 그 힘을 틀 속에 가두어 두려는 욕망의 집결체인 권력의 싸움이라는 거야. 이것을 알아야 해. 좋은게 좋다는 것은 무식한 말이야. 그렇지 않아. 이 땅의 현실은 항상 왜곡된 현실이야. 그것을 잊으면 안돼. 이 땅에서 잘 된다고 너무 좋아하지만.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이 이 땅에서 잘 안되었으니까. 그러니까 예수님 덕택에 잘 되려고 하는 사고 방식은 마귀의 사고방식이야. 알았지. 기억해.
그러면 현대는 뭘까: 하나님 없는 인간,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 없이 살고 행동하는 자가 현대적 의미에서의 무신론자이지. 현대를 요즘 상용화 되고 있는 포스트 모던이라고 하자구. 여기서 기억하자구. 포스트 모던을 구성하는 모든 철학의 흐름은 무신론이야. 복음과는 단절되어 있는 상태지. 근데 재미있는 것은 포스트 모던 사상에는 복음에서 죄로 규정하고 있는 인간의 욕망을 구체화 시키고 있다는 거야. 아주 긍정적인 흐름으로. 이것이 재미있어. 이런 면에서 철학은 철저하게 인간의 존재 기반이야.
하여튼: 현대 무신론을 알려면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를 알아야 해. 이 사람은 인간 외부에 위치하고 있는 신을 인간 내부의 마음으로 보고 말았지. 혹시 이전에 "계시"에 대해서 내가 쓴 글을 읽어봤어. "계시"는 인간 외부에서 오쟎아. 그런데 포이어 바흐는 그것을 완전히 거부해버리고 말았어. 계시가 아닌 인간의 정신세계가 신을 창조했다고 보는 거야.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신을 만들었다는 거야.
이런 내용이 어디에 있어: 아직 [기독교의 본질](까치)을 안 읽어 봤구나. 읽어 봐야 돼. 왜냐하면 포이어바흐가 아담의 종교적 욕망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야. 욕망하는 인간이 교회에서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이름을 들먹일 때 그의 마음에는 항상 선악과를 따먹는 아담의 욕망이 잠재해 있거든. 그러므로 그의 책은 기독교인에게 금지 도서가 아니라 죄아래 욕망하는 인간의 종교로를 그리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중요하지. 내가 하나님을 어떤식으로든 등쳐먹을려고 하나님을 만들어내는 공장인것을 이 책이 알려주거든. 교회는 절대 철옹성이 아니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활동성으로 날마다 은혜를 확인받는 사람들이지. 그것을 알아야 해. 인간은 언제나 자신만의 놀이공원을 만들어. 교회조차도 그래. 그러니까 좋은 교회니 뭐니 하면서 자신만만해 하지 말라구. 왜냐하면 좋은 교회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야. 알았지.
그래서 나온 명제가 "신학의 비밀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이구나: 그래, 신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투사야. 여기서 투사라는 말은 포이어바흐의 전문용어지. 이 말을 이해해 볼까. 인간의 뇌를 영사기로 생각해보자구. 그리고 그것을 영화관의 스크린에 비쳤다고 가정해보는 거야. 그러면 화면이 나올 것 아니야. 이 영화의 제목이 바로 [기독교의 본질]이야. 어때, 영화 한 편 보는 셈치고 한 번 사보는 것이 좋지 않겠어. 물론 책 장사는 아니야. 그냥 내가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그래. 나중에 마르크스는 이것을 사회비판적으로 극단화하여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까지 했지. 어쨌든. 신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영상을 신성한 존재의 온갖 속성들로 눈부시게 장식하여 구상화한것에 불과하다는 거야. 결국 신이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신이었다는 거지.
좀 더 쉽게 설명: 아니 이만큼 쉽게 얘기 했으면 되지 도대체 얼마나 쉽게 하라구. 할 수 없지. 혹시 매일 매일 거울을 볼 것 아니야. 신학이란 거울을 보는 것 같은 거야. 거울은 누가봐. 내가 보는 것 아니야. 그러면 거울에 투사된 것은 뭐야. 나 잖아. 그러므로 인간이 신학을 한다는 것은 신의 존재 유무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 속에 있는 것만 끄집어내면 되게 된거야. 이것은 베르나를 베르베르의 소설[뇌]를 읽어보면 좋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꺼야. 마치 나의 뇌를 거울에 비쳐놓은 것 같거든.
여기서 도대체 뭘 느껴야지: 아니 느끼는 것 까지 이야기 해줘야 해. 사실 포이어바흐는 종교를 비판하려는 거야. 기존의 모든 기독교 사상을 공격해. 너희가 믿는 신은 진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조장해 내었다는 거야. 종교를 이만큼 철저하게 비판할 수 있을까? 포이에르 바흐 이전의 철학자들은 사상은 진보적이라도 신은 건드리지 않았거든. 데카르트도 그렇고, 베이컨도 그렇고, 헤겔도 그렇고, 굵직 굵직한 철학자들의 유럽적 토양은 종교적이었어. 한데 포이에르 바흐가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만거야. 마치 프로이드가 생각지도 않았던 인간의 무의식을 의식의 수면위로 떠올린것 같애.
혹시 포이어 바흐가 노린 것이 있어: 이전의 종교를 봐. 어떤 싸움이었어. 사회 정치적으로는 종교싸움이었고, 신학적으로는 신 존재증명의 싸움이었고. 그래서 포이어바흐가 깃발을 들은거야. 종교라는 검은 구름을 치우고 광명한 세상을 만들려는 거야. 인간을 억압해왔던 종교의 어두운 면을 이용한 모든 반인간적 세력의 희생물, 노리개가 되는 것을 중지시키고, 이성의 빛으로 종교의 어두운 본질을 밝히는 일이었어. 종교라는 환상적 허깨비에 대한 부정으로 인간의 현실적인 존재에 대한 긍정에로 나아가게 했지.
이게 어디까지 가는 거야: "하나님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이 살기를 바란다." 라는 니체의 선포로까지 치닫지. 니체의 사유를 보면 마치 네피림을 양산하는 것 같아. 히틀러 같은 미친 네피림 말이야. 하나님을 죽여버린 터에는 영웅들만 남겠지. 힘 있는 자들, 힘 있는 자들의 세계가 니체의 세계야. 하지만 요즘은 달라. 요즘은 힘의 차이를 인정하는 흐름이야. 들뢰즈 가타리가 그 선봉에 섰지. 혹시 "똘레랑스"라는 말 들어봤어. TV의 프로그램 제목이기도 해. 차이를 인정하자는 거야. 정상인의 입장에서 비정상인을 규정하지 말자는 거야. 왜? 정상과 비정상은 단지 차이에 지나지 않는 거니까. 사실 이것은 니체로부터 나온 철학인데, 니체를 거부하기도 하는 것 같애. 폐일언하고 이들 철학은 힘의 우열관계를 없애서 행복한 사회를 만들자는 거야. 어때 멋지지 않아. 이것은 우리가 익히 보아오는 모습이잖아.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물결은 상대주의야. 우리식으로 따지자면 다원주의이지. 기독교와 불교와 이슬람교등등 모든 종교는 배타적이 아니라 조그만 차이일뿐이라고. 그래서 화해하자는 것이잖아. 이것이 이 땅의 경향이라구. 혹시 SK의 광고들 봤어. 이 땅의 이미지야. 하나되자는 거지.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앞에서 뭘 어떻게 하나가 되자는 건지 환장하겠어. 예수님을 손 잡고 잘 죽였다는 거야. 뭐야. 근데 들뢰즈 가타리나 현대 철학자들이 모르는 것이 있어. 이것이 이땅의 한계이지만. 그들의 죄 아래 갇혀 있다는 거야. 인간은 절대 하나가 되지 않아. 이미 그들은 각자 자신의 소견대로 하는 욕망의 개체이기 때문이야.
그래서 뭐 어떻다는 건데: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없앴다는 거지. 결과는 이 땅에 인간만이 덩그라니 남게 된거지. 하나님의 시체를 앞에두고 인간은 이 땅의 현실을 경험해. 실존주의자인 까뮈가 경험한 "부조리한 인간현실"이야.
그래서 말하고 싶은 것은: 아무리 종교를 비판하더라도 종교는 사라지지 않아. 여기서 포이어바흐도 틀렸고, 마르크스도 틀렸어. 그들은 인간이 욕망한다는 것을 감안해 넣지 못한거야. 즉, 인간이 아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지 않은 거야. 인간은 무신론적이지 않아. 욕망하는 인간은 신론적이야. 알았어.
왜 그럴까: 이유는 죽음의 굴레를 혼자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야. 그래서 철저하게 신을 향해 가는 거야. 인간은 신론 중심이야. 자신을 보면 알잖아. 문제는 욕망하는 인간의 종교성을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 거부하고 있다는 거야.
왜 그럴까: 그건 아담과 동질의 계열사건이기 때문이야.
그렇다면: 십자가 사건은 아담 욕망을 폐기하는 사건이지.
언제까지: 인간이 살아있는 한.
성도란: 자신의 죽음을 고마움으로 받아들이는 묵시적 운명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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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에르바흐가 주창하는 이론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말하면,
1. 인간의종교적 대상은 인간이 스스로 대상화할 수 있는 자기 본질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인간이 종교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한 것은 인간이 자기를 대상화하고서도 그 대상이 자기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 인간들은 이런 인간적 기원을 은폐하기 위하여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대립관계로 보는데
사실은 이런 대립은 인간의 보편적 본질과 개체적 실존 사이의 대립이며 결국 투사와 현실 사이의 차이일 뿐이다.
3. 그럼에도 인간들은 계속해서 신에 관해 일정한 표상을 만들게 되는데 그 표상의 만드는 주인이 인간이기에 신에 관해서는 인간적 표상 외에 그 어떤 표상도 나올게 없다.
즉 결론적으로 말해서 포이에르바흐는
'그 자체의 신'과 '인간과의 관계에서의 신' 사이의 구별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은 사랑이다"라는 명제에서
'신'이라는 주어는 '자체적인 신'에 해당되고 '사랑'이라는 술어는 '인간과의 관계에서의 신 또는 신적 본질'에 해당된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술어가 의인적 표현이라면 그 술어의 주어도 당연히 의인적 표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노릇이다.
결국 신을 믿는다는 것은 , 인간이 자기 자신의 무한한 비밀스러움을 자꾸만 탐색하는 행위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어차피 대상이란 주체의 변형이니까!
##############################################################################################영화 '콘스탄틴' 평 이근호 2005-02-18 18:26:48, 조회 : 172, 추천 : 12
'콘스탄틴' 영화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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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콘스탄틴(키애누 리브스)은 지옥에 다녀왔다. 인간의 형상한 천사와 악마의 혼혈 종족을 알아보는 능력을 타고난 그는 자신의 그런 저주스런 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다시 세상의 삶속으로 던져진다. 잠시동안 덤으로 생명을 얻은 그는 지상의 천국과 지옥의 경계를 넘나들며 악마의 하수인들을 지옥으로 돌려보내는 임무에 몰두한다.
그것만이 자신의 구원의 길이기에...그러나 그는 성자가 아니기에, 세상에 현혹되고 악마에게 조롱당하며 술, 담배에 쩔어 산다. 자신이 맡은 임무에 대한 성스러운 사명감따윈 없다. 인간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악과 싸우지만, 그 댓가로 인간들의 감사를 바라지도 않는다. 동정은 더더욱... 그가 원하는건 오직 하나, 자신의 구원일뿐이다.
어느날, 여형사 안젤라 도슨(레이첼 와이즈)이 쌍둥이 동생(1인 2역)의 죽음의 의혹을 풀기 위해 콘스탄틴의 도움을 청하러 찾아온다. 그후 두 사람은 현대 L.A. 도심속에서 악과의 싸움을 시작하는데....
무저갱에 영원히 갇혀 있어야 할 악마의 아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찌른 창(숙명의 검)이 멕시코 의 한량한 외딴 광야에서 발견되므로서, 예수님의 피를 통해 지상에 등장되려고 한다.
그 매개인으로 선택된 것이 쌍둥이 자매 중의 언니인 여형사 안젤라(여주인공)이다. 그녀는 한 때 영체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나 그동안 사용하지 않아 퇴화되어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이미 악마 쪽에서 그녀를 가만두지 않고 매개인으로 표적 삼은 이상, 이 영적 전투에 얽히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 여주인공을 사랑하는 콘스탄틴은 그녀를 언니의 운명같이 지옥가도록 방치할 수는 없다. 신사도를 발휘해서 그녀를 악의 제물이 되는 것에서 보호해 주어야 한다. 도대체 영적 세계에서 누가 악마의 아들로 하여금 세상에 등장하도록 조치했는가? 놀랍게도 선한 천사인 가브리엘이다. 가브리엘 천사의 전략은 이렇다. 악마의 아들이 안젤라의 배를 통해 세상에 등장할 때, 예수님의 피가 묻어있는 '숙명의 검'으로 찔려서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콘스탄틴이 사랑하는 여인 안젤라는 지옥가고 만다.이것을 방지하는 비책은 없는가? 이런 위기촉발의 순간에 콘스탄틴은 손목의 혈관을 짤라 피를 내어 그 피로 시계를 덮쳐서 시간을 영원히 멈추게 한다. 가브리엘의 손에서 안젤라의 배를 향해 내리꽂은 칼은 공중에서 무한대로 멈추고 만다. 이 사이를 노리고 진정한 궁극적인 적인 악마의 우두머니인 루시퍼가 나타나서 콘스탄틴의 영혼을 지옥으로 영원히 회수하려 한다. 이렇게 되면 콘스탄틴은 그동안 자신의 처리해서 지옥에 보낸 악령들을 지옥에서 만나 영원히 시달리게 된다. 그동안 자신도 나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콘스탄인의 시체를 끌고가는 루시퍼의 작업이 원활치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를 지옥이 아니라 천국으로 데려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콘스탄틴은 지옥이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것이다. 즉 아무리 콘스탄틴이 살아오면서 많은 죄, 특히 자살이라는 지옥에 꼭 가야만 하는 죄를 지었더라도 '희생' 정신을 발휘하게 되면 그동안 모든 죄를 다 용서가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원칙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작전이 실패한 루시퍼는 콘스탄틴의 되살아 놓는데 그 이유는, 콘스탄틴 같은 인간은 앞으로 더 이 세상에서 살게 되면 계속 죄를 지을 가능성이 많은 인물이다는 점을 나름대로 고려한 조치였다. 그 대신 천사 가브리엘은 루시퍼한테 호되게 당한다. 이제 천사로의 직위에서 떨어지고 날개로 불타버리고 실패한 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되는데 이런 수모를 당하는 이유는, 천사는 지성적인 면만 알았지, 인간과 인간 사이에 흐르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고통이라는 감정을 모르고 함부로 인간에게 굴었기 때문이다.마지막으로 영화는 다음과 같은 자막을 흘러 보낸다. "세상의 모든 계획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고.
이 영화를 본 기독교 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호기심으로 갖게 될 수가 있다.
1. 과연 실제로 귀신을 추방하는 능력인이 아직도 이 현실 세계에 있을 수 있는가? 2. 과연 악마는 지금도 이 세상에 출현 못하도록 무저갱에 묶여 있는가? 3. 과연 악한 귀신은 자신이 천국으로 구원받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고 오로지 지옥 가기만을 소원하고 있는가? 4. 과연 성직자의 권위를 가지고 시행되는 죄사함의 의식으로 인해 죄사함이 실제로 이루어지는가? 5. 과연 물리적 주술방식에 영적인 존재들이 반응을 보이게 되는가? 6.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선한 영과 악한 영들은, 하나님에 의해 시도되는 '함의 균형 맞추기'에 시책에 준해서 존재하고 있는가? 7. 과연 가브리엘은 인간의 감정과 희노애락에 무관심하는가? 8. 과연 루시퍼는 사단의 이름인가? 9. 귀신이 추방되는 모습이 실제로 눈으로 확인될 수 있는가? (주위 사물이 비정상적으로 흔들린다든지 동반하는 하는 현상을 통해서)10. 과연 마귀가 설치면 인간은 물리적으로도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는가? 11. 과연 태어날 때부터 남달리 영적으로 예민한 감각을 가진 자가 따로 있을 수 있는가? 그 예민성이 실제로 영적인 세계와의 접촉을 가능케 하는가?
사람이란 보이지 않는 세계 때문에 움츠리면서 살게 된다. 보이는 세계만이 전부라고 주장해도, 그 말은 곧, '보이지 않는 세계'가 엄연히 존재함을 전제로 한 궁색한 변일 뿐인데 그 이유는, 보이는 세계가 무한대로 자꾸만 확장되면서 덩달아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세계가 인간에게 의식된다는 말은 그 세계를 그냥 놔두어서는 아니되고 어떤 시나리오를 동원해서라도 내용물을 채워놓는 것이 당분간 안심이 되는 양상이다. '종교 만들기'와 거기에 필히 따라다니는 신령한 하늘의 계시와 경전책은 이런 인간의 고충을 충족시키기 위함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일어난다. 신의 계시책이 어떤 내용이 되었던 이미 인간들의 마음 속에는 나름대로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의 구성물을 세상적인 경험과 체험과 논리로서 구조를 형성해 놓고 있다는 점이다.
즉 "하나님, 영적 세계의 사회는 이러이러해야 하고 등장 인물도 이러이러해야 하고 이런 대립 구조와 배치를 해주어야 현재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오묘한 일들이 다 해명됩니다"라고 대충 틀이 잡혀져 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존재말)
그렇다면 성경이나 경전이 어떤 식으로 이야기해도 귀에 안 들어오고 요한계시록이나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도 이미 자신들이 마음 맞추어놓은 논리의 틀이 일방적으로 집어놓는 해석법을 펼치게 마련입니다.
즉 개별적인 욕망과 욕구들이 모여 기독교라는 종교와 교회를 만들다보니 그 안에서 설교되고 호응을 받는 영적 시나리오가 대략 하나로 공통점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 누구는 죽어서 좋은 나라(천국)에 가야하고 누구는 나쁜 나라(지옥)에 가야하며, 따라서 영적 세계에서 활동하는 귀신들과 영물들은 이러한 인간의 움직임에 호응할 때만 납득이 되는 영적 신앙이다고 일방적으로 우기게 되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는 자기 자신은 마땅히 좋은 나라 갈 사람으로 따로 모셔놓게 됩니다.)
이러한 오류가 바로 '구원론적으로 본 성경 해석'입니다. 즉 '성경책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책'이다는 겁니다.
이 자체가 성경을 곡해하는 대표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성경에서 참으로 말하는 바른 해석은, 성경은 인간 구원위주로 쓰여진 책이 아니라 예수님이 과연 누구신가를 보이는 책이라는 겁니다.(요한복음 5:39)이렇게 되면 천국이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의 자비가 통하는 나라이며, 지옥이란 일방적으로 에수님으로부터 외면당한 세계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전혀 인간의 노력 여하와 상관없는 것이 실제 이 현실세상입니다.
왜 그러야만 하는가 하면, 신약의 모든 성경은 구약의 언약의 완성 안에서만 논의되지 결코 구약의 언약 밖의 것은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언약 안에서만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지 언약 밖의 것(인간들의 호기심 같은 것)과 상관 없습니다.
언약에 의하면 모든 이방인들은 마땅히 지옥가야만 합니다. 아무리 천국가고 싶어도 못갑니다. 단 미리 언약백성이 된 이스라엘들이 메시야를 배척하여 구원에서 제외 되었을 때 그 빈 자리에 TO가 생겼고 그 빈 자리에 이방인들 가운데 일방적인 은총으로 봅혀 나온 사람들만 채워서 그래서 온 이스라엘만이 페쇄적으로 구원시킨다는 것이 주님의 작전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영적 세계의 정보를 알아 그것으로 구원을 따내겠다는 노력을 아무리 시도해도 그 결과는 지옥행입니다.
본 '콘스탄틴'이라는 영화는 지옥갈 사람들이 모여 머리를 짜낸 영화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개념(천국, 지옥, 악마, 천사)은 전부다 비성경적인 발상의 산물임을 놓치시면 안됩니다.
그냥 인간 내부에 욕망이 어떤 영적인 옷을 입고 밖으로 출현하는지 구경하는 기회로 삼으면 됩니다.
##############################################################################################[그리스도교] 손성식 2005-02-19 19:38:25, 조회 : 136, 추천 : 12
[그리스도교]
이 땅에서 양산된 [기독교]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할까: 가능해. 바티칸 교황청의 눈 밖에 나 있는 한스 큉 신부가 대단한 열심을 내서 책을 한 권 냈지. 바로『그리스도교』야.
기존의 교회사와 한스 큉의 저작이 차이가 뭐지: 기존의 교회사 책도 많고, 보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왜 힘들게 한 몫 거들었나 말이지. 한스 큉의 교회사는 역사적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기독교의 본질이 역사의 흐름속에서 갈등하는 연속적 층위와 불연속적 층위를 파악하고자해. 즉,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을 [그리스도교]의 역사흐름에 대입시키는 거지. 이게 기존의 교회사와 다른점이야.
혹시 패러다임이 뭐야: 아, 그거. 특정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신념.가치.행동방식들의 총체적 위상으로 사회,종교,신학의 거시모델이야. 좀 쉽게 말하면 틀이나 구조같은 거야. 특정한 시대를 점유하고 있는 사상적 권력이라고 할까. 하여튼 한스 큉은 이천년 교회사를 패러다임으로 찍어내.
어떤 내용인데: 그리스도교의 패러다임 전환이야. 그 내용을 말해줄께. [원그리스도교 묵시문학 패러다임]-[고대교회 헬레니즘 패러다임]-[중세 로마 가톨릭 패러다임]-[종교개혁 개신교 패러다임]-[근대 계몽주의 패러다임]-[현대의 일치운동 패러다임]. 어때. 한스 큉은 6개의 거시 모델을 가지고 그리스도교의 흐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패러다임이라는 틀 속에서 파악하고 있어.
그러면 기독교의 흐름에서 연속적인 것은 뭐고 불연속적인 것은 뭐야: 연속적인 것은 신앙의 본질이야. 즉,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메시지. 나사렛 예수의 오심으로 인한 이스라엘 역사의 전환이라는 결정적 계시사건. 예수는 하나님의 메시아요 아들이라는 그리스도교의 특징. 이것은 역사의 흐름에서도 변하지 않는 기독교의 본질이야. 지금까지의 흐름을 알아먹겠지. 내가 쓰는 "흐름"이라는 말을 주의깊게 읽어줬으면 좋겠어. "흐름"을 좀 쉽게 파악하려면 댐 같은 것을 생각하면 돼. 물의 흐름이 새롭게 바뀌는 장이잖아. 불연속성이란 이 땅의 역사흐름으로 부터 생겨나는 사상사적 단절현상이야. 예를 들어볼까. [원 그리스도교 묵시문학 패러다임]과 [고대교회 헬레니즘 패러다임]의 흐름 사이에는 로마제국-헬레니즘 문화라는 이 땅의 흐름이 자리잡고 있어. [고대교회 헬레니즘 패러다임]과 [중세 로마 가톨릭 패러다임]의 흐름 사이에는 로마 교황들-게르만 황제들이라는 권력의 갈등이 자리잡고 있어. [중세 로마 가톨릭 패러다임]과 [종교개혁 개신교 패러다임]사이에는 르네상스-개혁공의회들이 자리잡고 있고. [종교개혁 개신교 패러다임]과 [근대 계몽주의 패러다임]의 흐름 사이에는 근대철학-자연과학-국가론이 자리잡아. [근대 계몽주의 패러다임]과 [현대의 일치운동 패러다임]흐름 사이에는 산업화와 민주화가 자리잡지. 너무 길었나. 하여튼 기독교 사상의 단절의 현상 아래에는 이 땅의 역사 흐름의 단절이 자리잡고 있음을 기억해줘. 이것이 패러다임의 불연속적인 측면이야.
꼭 이렇게 봐야 되는 거야: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이것은 한스 큉의 노고야. 그렇다고 그의 책을 무시할 필요는 없잖아. 왜? 내가 못만드는 것을 그는 결혼도 하지않고 오직 책만 보면서 생산해 낸 것 아니야. 그러면 고마워해야지. 그리고 너무 색깔론을 내세우면 안돼. 현실교회를 보면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맨날 적군 아군 색출작업만 하는 것 같애. 이렇게 생각하면 어때. 나는 내가 영화를 못 만들기 때문에 영화를 봐. 그리고 너무 고마워해. 그리고 내가 책을 못쓰기 때문에 책을 봐. 그리고 고마워해. 그들의 수고에 박수칠수 밖에 없어. 이렇게 글같지도 않은 글 하나쓰는데도 3-4시간 걸리는데 천페이지를 쓸려면 목숨 걸어야 될 것 아니야. 그리고 가격도 이만 구천원 비싼것 아니야. 그러니까 좀 사봐. 뭐, 한가한 소리하고 있다고. 아니 현실교회를 보면 머리는 텅비어 있는데 입은 더러워. 뭐 아는게 있어야 이야기 하지. 여호와 증인 오면 무서워서 얘기도 못하고. 출입을 삼가하고. 이게 뭐야. 신앙의 견고함은 어디로 가버리고 매일 떨고만 있잖아. 그리고 기도 많이 하는 것으로 떼우고. 모든 것을 목사에게 위임해서 넣어주는 것만 먹겠습니다. 그러니 알맞게 잘라 주십시오. 이게 뭐야. 이렇게 말하면 꼭 신학교에 가야겠네 라고 뒷북치는 사람있지. 아니야. 지금 일상적으로 살아가는데서 좀 생각하면 살란말이야. 이 세상 흐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알아야 될 것 아니야. 너무 윽박질렀나. 나나 잘하면 되는데.
알았어, 열심히 생각하며 살게. 근데 뭘 생각하란 말이야: 교회라는 장(場)이 역사의 흐름을 통해서 발생시키는 욕망의 선을 알아야 해. 내가 보기에 한스 큉의 패러다임은 욕망의 패러다임이야. 복음의 본질이 욕망의 흐름과 갈등하며 생산해낸것이 바로 기독교란 말이지. 이것을 내식으로 표현해볼게. 복음은 묵시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 묵시성이란 이 땅에서 피어오르는 욕망의 흐름들을 죄로 규정하고 심판하시겠다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위상을 고려해놓고 있다는 얘기야. 그러므로 역사라는 장과 그 흐름은 발전과 희망의 지평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확인하는 조사현장이야. 우리는 지금 조사받고 있는 중이야. 성화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사과정에 있는거야.
그러면 패러다임의 전환은 욕망의 변경이겠네: 그래. 기독교의 흐름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욕망에 의해서 치욕당하고 수난당하는 역사야. 욕망하는 인간은 복음의 본질을 항상 왜곡시키게 되어있어. 자신의 보존본능을 위해서야. 그러므로 교회사를 제대로 읽어내려면 욕망의 패러다임아래서 복음이 어떻게 외면당하고 있는가를 읽어내야 하는거야. 즉, 인간이 어떤식으로 복음을 욕되게 하는가를 밝혀내야돼.
그게 도대체 뭔데: 세력화야. 복음은 교회라는 조직화와 세력화 때문에 난도질당했어.
세력화: 그래! [힘 없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던 묵시적 운명 공동체가 힘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한거야. 그래서 역사로부터 박해받던 교회가 이제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한거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혹시 종교재판, 마녀사냥 같은 거야: 그래, 교회가 세력화 되니까 한 짓이라곤 사람 죽이는 것. 이것이 문제야.
복음이란: 이 땅에서 성도에게 힘을 주려고 하지 않지. 힘을 가지고 있는 자를 힘 없게 해서 항복하게 만드시는 것이 성령의 역사야. 그런데 교회는 이상하게도 힘을 가지려고 해. 예수님을 빽으로 말이야. 이것이 바로 욕망의 흐름이야. 현실교회를 봐. 욕망의 작태가 난무하잖아. 어디 주님이 들어설 자리가 있겠어. 욕망이 왕노릇하고 있는데 말이야. 그러므로 힘을 만드는 모든 노력은 복음이 아니야.
그러면 뭐야 : 마귀의 밑천이지. 마귀는 이 방면에서 고수거든. 욕망의 배후세력은 마귀야. 철학은 이것을 거부해. 왜냐하면 역사적 토양을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그들은 묵시적 세계를 믿지않아. 묵시세계가 이 땅에서 펼쳐내는 흐름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지. 이것이 그들의 어두움일꺼야. 그래서 그들은 묵시세계를 조장하지. 신화라고. 어리석은 거라고. 현재를 살아가는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것은 빛을 보지 못한 그들의 하소연일뿐. 욕망하지만 욕망이 죽음을 넘어서지 못하는 현실을 보며 그들을 자살하지. 영원회귀를 바라면서. 하지만 한낱 흙덩어리에 불과한 것을.
혹시 마귀라면 예수님이 광야에서 맞닥뜨린 실체: 그래. 예수님은 오셔서 마귀와 만나셨지. 왜 그랬을까? 이 땅의 흐름의 배후세력을 아신거지. 욕망하는 인간은 마귀아래 종속되어 있는거야. 아무리 잘나도. 마귀는 힘을 줄려고 해. 그래서 인간의 욕망을 부채질해 왔지. 하지만 예수님은 힘을 부인하는 은혜의 체제를 이 땅에 심어난거야. 바로 십자가의 세계지. 힘 없는 방식이야. 마귀가 거부하는 차원이지.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이 땅에 계시된 하나님의 세계야. 그러므로 하나님의 세계는 이 땅에서 힘 없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놓치지 마. 이런 의미에서 기도야. 내 욕망을 충족하려는 도구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에만 시선을 두는 거야. 이런 의미에서 신앙이야. 주님의 활약하심으로만 견디어 낼 수 있다는 거지. 이런 의미에서만 전도야. 힘 없는 세계야 말로 주님이 만드신 세계랍니다의 고백이지. 사람 끌어 모으는 것이 아니야. 그건 장사꾼이지. 이런 의미에서 묵시야.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자진해서 나올 수 없는 장이기 때문이야. 오직 은혜만이야.
그러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십자가의 내용을 확인시키므로 은혜를 몸 구석 구석에 각인시키는 것이지.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이란: 힘 없다고 답답해 하지마. 오히려 힘 없음에 감사해야 해. 알았지.
##############################################################################################윤동균 씨의 글 이근호 2005-03-01 09:32:06, 조회 : 178, 추천 : 19
얼마전, 사랑의 교회에서 메일이 날라왔다아마 회원전체에게 보내는 메일인가 본데, 내가 언제거기 가입했지?"Leadership Letter" 제목부터 영 거슬리기 시작한다"선한 사마리아인" 무슨 말 할지 대강 감이 오누만..내용 까보니 역시나.. 이 어려운 시대에 사마리아 인의 정신을닮아 시대를 짊어지고 가는 일군이 되자나 어쩌자나..아찔하다.. 불과 1,2년전만 했어도 아멘 했을껄 ..누구보다 큰소리로
이 말씀이 사람에게 기대를 걸고 인간의 행위를 겨냥한 말씀이라면왜 구태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겠는가 !!도대체가 죄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고 은혜도 모르고 거룩도 모르고 그저 흉내내기에만 급급하다.큰교회 세워놓고 목사는 교인들 종교욕구 채워주고 교인들 하나둘늘어나니 목사는 유능한 목사 소리 들어좋고, 짝짝꿍 아주 죽이척척 맞네 그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왔다. 율법사: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늘 사람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입장을 견지하고 예수님은 항상 "내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 입장을 고수하신다. 어찌 충돌이 안생기랴! 이런 충돌이 십자가 사건을 일으켰고 이 십자가 사건을 오늘도 계속 재현된다.)예수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율법사: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나이다예수님: 니 말이 맞다 니도 가서 그렇게 해라(고마 가면 될낀데.. 기어이 예수님 입에서 의롭다 소리 함 들어볼라꼬)율법사: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지요?(자, 여기서 예수님의 쌩뚱맞은 대답 들어갑니다 빠져 봅시다)예수님: 강도만난자가 있는데 다 죽어가는걸 제사장도 보고 지나가고 레위인도 지나갔는데 (아니, 그냥 사람들이 지나갔다 하면되지 꼭 그렇게 콕집어 말해서우리들 자존심을 긁어놔야 되겄습니까? 그리고 이웃이 누군지 물어봤는데 강도만난자는 왜 튀어나옵니까? 이 양반 참 알 수 없는양반이네..)한 사마리아인이 그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더라(아니, 우리도 그냥 지나가는데 저 사마리아 인이 도와준다고?우리보다 낫다고? 아 미치겠네 진짜...)예수님: 니 생각에는 누가 이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겄노?율법사: (내도 자존심이 있지...) 흠.. 흠.. 자비.. 자비를 베푼자입니다. 예수님: 가서 니도 그렇게 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율법을 지켜내라는 말씀도 아니고 윤리도덕적으로 살라는 말씀은 더더욱 아니며 오직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사건을 염두해 두신 말씀이다 즉, 진정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 될수 있는 자는 예수님 자신밖에 없으며 누가 과연 강도만난 자와같은 심정으로 예수님의 긍휼을 원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다.강도만난자와 같은 심정을 가진자라야 비로소 예수님의 이웃되심이 보이는 것이다 한번 해보겠다고 나서는 자에게 예수님은 걸림돌일 뿐이다."그런즉 우리가 무슨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롬 9:30~32
예수님도 믿고 윤리도덕 선한 행위 찾아내서 내 몫도 챙기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0,21
이 말씀 앞에서 누가 감히 핑계 대겠는가.
##############################################################################################한국에서의 들뢰즈 이해논쟁 - 김재원:이진경 구득영 2005-03-05 02:48:13, 조회 : 134, 추천 : 13
느슨한 대중성 VS. 뻑뻑한 엄밀함흐름 : 들뢰즈 철학개념 둘러싼 논쟁
2004년 06월 16일 강성민 기자 (교수신문)
季刊 '문학동네' 봄호에 '『천개의 고원』이 『노마디즘』에게'라는 특이한 제목의 글이 실렸다. 사정을 모르면 암호 같은데 사정을 알면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다. 들뢰즈 철학개념을 둘러싼 두 학자의 오랜 물밑대결이 드디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이 글은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적 시도의 종착점으로 운위되는 '천개의 고원'을 국내에 번역소개한 철학자 김재인이 '천개의 고원'의 해설서인 '노마디즘'의 저자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사회학)에 대해 '공격적 반론'을 쓴 것이다. 김 씨가 반론을 펼친 까닭은 간명하고도 분명하다. 첫째, 이 교수가 '노마디즘'에서 '천개의 고원'을 번역한 김재인 씨를 '심하게' 비판한 것이 1차적 원인이다. 둘째, 이번 글의 앞머리에 밝혀진 것처럼 '노마디즘'을 통해 들뢰즈의 사상이 왜곡 유통된다는 것에 대한 김 씨의 판단 때문이다.
"이진경, 철학적 개념 엄밀히 읽지 못했다"
김 씨의 글은 세토막으로 나눠서 읽을 수 있다. 우선 이진경이 '노마디즘'에서 틀렸다고 말한 자신의 번역어 '고른판'(plan de consistance)과 '도주'(fuite)이 왜 정확한 번역인지를 꼼꼼히 옹호하고, 이진경의 번역어인 '구도'와 '탈주'가 왜 잘못된 번역인지를 지적한다. 다음으로 이진경이 '노마디즘'에서 들뢰즈 철학의 '실천철학' 및 '정치철학'적 뉘앙스를 捨象하고 '추상성'의 틀 속에 들뢰즈를 가둔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김 씨는 '계열화'에 대한 이진경의 해설은 "들뢰즈가 하지도 않은 말을 과잉해석한 것"이며, 철학적 개념을 엄밀하게 따지기보다는 '은유' 같은 유비적 장치를 도입해서 이해함으로써 추상화의 길로 빠질 뿐 아니라, '무위사상' 같은 반들뢰즈적 지대로까지 나아간다고 비판을 펼친다. 마지막으로 김 씨는 '노마디즘'의 들뢰즈 이해가 '수유연구실' 등에서의 대중강연을 통해 대중적으로 퍼지고 있음을 문제삼는다. 김 씨는 '대중화'의 미명에 붙잡혀 한 철학자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뒤로 젖히고, 어설픈 '전도'가 계속된다면 이 땅의 들뢰즈 읽기는 영원히 '국내용'에 머물 것이라고 진단한다.
아쉽게도 비판을 받은 당사자는 묵묵부답이다. 이 교수는 "해당 논문을 읽어볼 생각도, 반론의 필요도 못 느낀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관련 학계에서는 김 씨의 이번 비판이 매우 적절한 타이밍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 교수의 정당한 답변이 있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하다.
박성수 한국해양대 교수(철학)는 논문을 읽은 후 "김재인이 이진경의 잘못된 이해를 철학적으로 지적한 부분(스토아 철학, 계열 등)에 대해서는 김재인이 전적으로 옳다"라고 말한다. 진태원 서울대 강사(철학)도 "'사건'과 '도주' 개념을 설명하는 김 씨의 논리가 흥미로웠다"라면서 비판의 정당성에 표를 던지고 있다. 양운덕 고려대 강사(철학) 또한 "정당한 비판이라는 생각이 든다"라는 입장을 보여 들뢰즈와 관련된 많은 학자들이 김 씨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하지만 김 씨의 비판 방식에 대해서는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박성수 교수는 "이진경의 '노마디즘'은 철학전공자도 생각해내지 못할 정도의 뛰어난 사례설명을 보여주는 책이라는 점이 간과되고 있다"라는 점과 "이런 비판을 가능하게 한 들뢰즈에 대한 국내의 관심의 場을 일군 것이 역설적이게도 이진경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양운덕 씨는 "이진경이 거칠지만 크고 넓게 본다면, 김재인은 작은 것을 본다. 김재인의 지적이 물론 날카롭고 정확하더라도 둘이 '아귀'가 안 맞아서 시비거는 것으로 오해를 살 수 있다"라고 말한다. 정형철 부산외대 교수(영문학)는 "둘 다 일장일단이 있으며, 이진경의 '노마디즘'이 들뢰즈·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을 장황하고 험하게 왜소화시켰다는 지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이런 학자들의 반응에 대해 김재인 씨는 "논쟁의 초점이 '정확한 독서와 설명' vs '대중적 이해의 도모'로 가면 곤란"하다며 "철학적 논의에서 '정확성'이 결여된다면 들뢰즈의 이름은 다만 '고가 상표'이되 '위조 상표'가 될 뿐"이라는 단호함을 보였다. 아울러 그는 자신의 문제제기가 "외국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초보적 번역논쟁"이며 "이런 저간의 사정을 무시한 채 이진경의 선험적 권위에 의거한 채 본질을 흐리는 논평이 오간다면 생산적이지 못할 것"이라고 반발했다. 김 씨는 또한 "대개의 국내 들뢰즈 논자들이 원전을 접하지 못했다"라는 단언까지도 던졌다.
개념 해석 둘러싼 풍요로운 대화 기대
이정우, 서동욱 등 다른 들뢰즈론자들은 '비판받은 당사자'의 답변이 중요하다며 이런 왈가왈부에 대한 논평을 거절했다. 이 논쟁이 보여주는 긍정적인 풍경은 한국의 들뢰즈 수용이 '철두철미한 이해'가 쟁점이 될 만큼 숙성될 조짐이 보인다는 점이다. 철학에 대한 이해는 개념에 대한 견고한 장악 없이는 '헛것'임을 '근대 학문'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긍할 것이기 때문이다. 박성수 교수는 "김재인이 들뢰즈 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설서를 쓰는 게 논의를 생산적으로 이끌어갈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라고 지적함으로써 전망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비판을 받은 이 교수의 반응이 나오지 않는다면 이번 논란은 한 철학자의 독백에 가까운 외침으로 머물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학계에서 이진경 번역의 부정확함은 어느 정도 공인될 것이다. 그리고 대중들은 두 학자가 갈라지는 철학적 심연으로 내려가지 못한 채 유행하는 몇몇 언어들을 인용하는 것으로 들뢰즈를 소비해갈 것이다. 이번 비판이 국내에 나온 유일한 들뢰즈 해설서에 대한 것이었고, 다시 들뢰즈를 나름대로 해석하고 설명한 책이 나오고 나면 들뢰즈는 (국내 풍토에 비춰볼 때) 이미 잊혀진 뒤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뉴스엔죠이'에 나온 어떤 분의 글 이근호 2005-03-05 10:11:28, 조회 : 195, 추천 : 12
조규철의 주장은 로마 카톨릭 구원론의 변종에 불과하다.
결론은 조규철의 주장은 이단사상이다.
믿음에 대한 정의가 완전히 왜곡되어 있어서 과연 ‘믿음’이란 무엇인지, 신자를 살리는 유일한 근거가 무엇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조규철님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의 문을 열고 들어가고 그 다음에 구원 안에 머무르려면(끝까지 머물러 천국에 가려면) ‘의인의 삶=행위'을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성경적인 주장이 아니다.
2000년 역사상 구원의 유일한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이고, 인간에게는 털끝만큼의 조건도 없다는 것이 교회의 대답이었다(이것은 구약시대에서도 동일하다).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규철은 이것을 부정하고 구원에서 인간에게 일말의 조건을 부여한다. 두 사람이 똑같이 구원으로 들어가더라도 거기서 ‘의인의 삶’을 행한 한 사람만 마지막까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데, 이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공로(행위)로 구원을 받았다는 이론에 귀결하다. 왜냐? 쟤는 의인의 삶을 살지 않아서 중간에 탈락했지만 나는 의인의 삶을 끝까지 행해서 천국에 갔으니까. 그래서 이런 이단사상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돌아갈 영광을 중간에서 탈취하는 악독한 독이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믿음이라는 방편(수단)을 통해 사람에게 전가될 때 구원을 받는다. 의인의 신분을 얻은 신자는 성령께서 안에 계시기 때문에 살아있는 믿음으로 사랑을 행한다. 그러나 결코 그 사랑은 구원의 조건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사랑은 이미 구원 받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당연한 결과물인 것이다.
'오직 믿음'은 성경을 아주 정확하게 요약한 모토다. 전혀 헷갈릴 것이 없다.
##############################################################################################'뉴스엔죠이'에 나온 또다른 어떤 분의 글 이근호 2005-03-05 10:23:56, 조회 : 229, 추천 : 14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믿음에 대한 단어 해석이 중요한게 아닌데요~ 본문 문맥상 의인과 믿음이 따로 따로 있는게 아니고요 즉 다시말해 의인이 별개로 존재하고 또한 별개로 존재하는 믿음을 필요로 한다는게 본문 기사의 취지인데요~ 그건 아주 잘못된 문장 해석이네요~
그럼 영문을 볼가요? 한글로 표현하면 말 그대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이지만본문 기자의 주장대로 하자면 위의 영문성경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합니다~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a faith-- 이제 아시겠습니까?
영문성경을 보면 의인은 이미 믿음을 그 속에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는 성경말씀!! 의인이 되기 위한 조건이 믿음이란 것이죠~
그런데 본문 기자는 의인과 믿음은 별개의 개체로 보고 있군요~ 그래서 믿음 외에 의라는 것이 또한 필요 하므로 칭의구원만 가지고는 안되고 완전히 구원 받을 때까지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취지인데 여기서 말도 맞지도 않고 실제로 그렇게 이룰 사람이 몇명이나 되겠어요?
그렇게 주장하는 기자분은 자신있습니까?
주님이 이세상 오실때 믿음을 보겠는냐 하셨는데 그말은 없다는 뜻 아닙니까? 맞습니다! 없습니다! 고로 기자가 주장하는대로 인정한다해도 아무도 구원 못받습니다! 고로 주님의 십자가 돌아가심은 헛사입니다.
고로 기자의 주장은 결론적으로 주님의 십자가 공로를 헛사로 만드는 주장이 됩니다! 실제로 믿음을 볼 수가 없으므로 주님이 필요한 것 입니다
##############################################################################################김형희씨의 글 이근호 2005-03-05 10:44:12, 조회 : 215, 추천 : 11
성경이 쓰여진 목적은 오직 하나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집약됩니다.[요한복음5:39] 아부라함부터 요셉까지 이들 성경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 사용된 자들입니다.성경에서 나오는 모든 용어들도 예수님을 증거하는 그 목적 하나로 귀결되는 것입니다.이 외의 목적이란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사랑이란 단어도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겸손도 예수님 것이요, 성령의 열매도 모두 예수님 것입니다.반석도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 예수님을 지칭하는 것이요,인자도 임마누엘도 율법도,선한 싸움도 예언도 순종도,신령과 진정도, 감사도,은혜도, 산을 옮길만한 믿음도 지혜도 모든 것들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나타내기 위해 존재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예수님의 것이건만 인간들의 욕망에 의해 자기 것으로 간주하고 탐심을 내어 소유한 것 뿐입니다.신이되고픈 인간의 욕망은 세상이 발전하면 할 수록 바벨탑이 높아지면 질수록 극에 달합니다.
사랑도 슬픔도 미움도 정성도 인내도 믿음도 거룩도 모두 하나님께 귀속 될 때에 만이 참된 진리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허나 욕망이 가득한 인간들은 자신이 신의 역활을 하고자 합니다. 나도 신처럼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나도 신이 될수 있다고 도전해 보는 것입니다. 신이 하는 일을 해서 신처럼 선과악을 분별하고 능력을 맘껏 펼쳐 보이고 싶다는 것이지요.나의 능력과 재주를 실컷 신앞에 뽑내고 그것을 빌미로 구원까지 보장 받겠다는 심보 이지요.이런 인간들의 자존심을 깡그리 뭉개 뜨리고 다가오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십자가의 믿음이란 한치의 양보나 미덕도 없습니다. 인간의 자아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아무것도 할 수없는 무력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고서야 믿음이 무엇이며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이것은 실로 인간으로서는 상상조차 할수없는 기적중의 기적입니다.산산이 부서진 자신의 자아를 보면서 자신이 이루어 보겠다고 발버등치던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욕망이요 헛되고 헛된 것인지를 자각하게 만듭니다.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주님이 사시고 주님이 하시는 일만이 진리가 될 수 있다고 믿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아가 남아있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죄인의 괴수같은 모습앞에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애통한 인생을 날마다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산산이 부서져 버린 자아앞에 참그리스도인들은 은혜의 값어치를 모르는 기득권을 지닌 행위론자들인 정통 종교인들로[바리새인] 부터 멸새와 비난 조롱을 받습니다.그러나 아무리 누가 뭐라고 해도 변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이 사는 것은 결코 의가 될수없다는 사실이요, 오직 주님이 사시는 것만이 참된 성화임을 증거합니다.그 때문에 사랑도 믿음도 순종도 논란이 되고 잇는 성화도 주님 것임을 증거 하게 됩니다.나의 노력으로는 결코 믿음이 생길수 없고 사랑을 할 수없고 순종할 수없고 성화될 수없고 예배드릴 수도 없고 기도드릴 수도 없고 교회가 될 수도 없다는 사실에 애통해 하고 감사 하면서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애통하게 살수밖에 없는 인생에게 다가오시는 성령의 은혜를 느끼면서 감사하며 자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도 사랑도 성화도 순종도 믿음도 세상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 행위로는 죄밖에 나올것이 없는 처참하고 더러운 몰골을 보면서 애통해 하고 상한 심령이 되면서도 주님의 은혜 덕분에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보면서 할렐루야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요, 인간의 소원대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삶의 역사를 날마다 목도 하면서 믿음을 고백하고 복음을 증거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뜻대로 무엇을 할 수있고 자유의지로 선을 행할 수 있다는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맞서 복음을 외치다가 떠나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사랑도 믿음도 순종도 성화도 기도도 예배도 노력만 하면 잘 드릴수 있고 쟁취할 수 있다는 자들과 나는 아무것도 할 수없는 죄인이로소이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 인해 선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요, 이모든 것이 은혜 그 자체입니다. 라고 고백 하다가 떠나는 부류가 있을 뿐입니다. 세상것이얼마나 헛되고 헛된것인가를 절감한 사람과 문자로 받아들인 사람과의 삶이 차이가 없어 보일지는 몰라도 그 심령은 완전하게 다른 것일 겁니다.세상것을 자기 소유로 알고 사는 자들에게 그 무익함을 증거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값진 것임을 알기에 그리하지 않고는 못배겨서 터져 나오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일 것입니다. 사랑도 예배도 순종도 믿음도 성화도 재물도 풀도 짐승도 돌멩이도 그 모든 것들이 주님의 것이라고 증거 하다가 떠나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일 것입니다
목사를 대단하게 여기는 자나 대통령을 대단하게 여기는 자나 설교를 대단하게 여기는 자나 기도를 대단하게 여기는 자나 성경을 대단하게 여기는 자나 이런 나를 별볼일 있는 자로 여기는 자나 그어떤 것도 잘못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이 없이는 성화도 성경도 믿음도 순종도 세상 그 무엇도 의미가 없습니다.모든 것이 은혜라고 생각하는 자는 은혜 외에 그 어떤 말도 덧붙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로인해 십자가가 자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그 십자가 조차도 은혜임을 알기에 감사하며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서비용 컴퓨터를 구입하도록 도와줍시다. 이근호 2005-03-08 22:27:39, 조회 : 216, 추천 : 22
회원수가 1955명이라 했으니
1인당 100만원 씩 하면
1955×1,000,000= 19억 5천 500만원이라는 거금이 됩니다.
이렇게 하면 약 100년 간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데….
문제는 100만원 씩 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결론은 이것입니다.
1년 간만 버틸 비용 10000원을 제공하면
1955× 10,000원 =1955만원이 됩니다.
일단 이렇게해서 얼마나 오래 버티는가 실험해 들어가 보기로 합시다.
계좌번호는
국민은행 800002-01-060391 (손무성)
우체국 700203-02-013241 (손무성)
==========================================================================[re] 서비용 컴퓨터를 구입하도록 도와줍시다. 권범식 2005-03-09 00:30:00, 조회 : 211, 추천 : 15
죄송합니다만...1955명이라고 목사님이 말씀하신게 크로스빌리지 회원을 말씀 하신건지요?
==========================================================================[re] 3월 9일 현재 십자가마을 등록 회원은 1959명입니다. 손무성 (Homepage) 2005-03-10 00:03:00, 조회 : 168, 추천 : 14
십자가마을 홈 관리자 손무성목사입니다. 2005년 3월 9일 현재 십자가마을 등록 회원은 1959명(오늘 4명 등록추가)입니다. 매일 하루 평균 등록회원은 4-5명 정도입니다.
==========================================================================[re] 서비용 컴퓨터를 구입하도록 도와줍시다. 이창섭 2005-03-10 00:23:51, 조회 : 173, 추천 : 16
개인이 서버를 관리하기란 무척힘이 듭니다. 많은 지식이 필요로 합니다.동시접속자 인원을 확인해봐야 하고..한통이나 하나로 등에서 고정 ip를 받아서 운영을 할려면 속도가 엄청 느려집니다.등등 해서
그래서 만약 문제가 자료를 위한 것이라면 이런 방법도 있습니다.엑스톡이나 파일나라 등등 자료 공유하는 곳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물론 유료입니다.
십자가마을 홈은 이대로 운영을 하고자료는 유료 파일교환(p2p)을 이용하는 것이 최소한의 경비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봅니다.
7일 모임에 나갈려고 했는데...아침에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21일날 뵙도록 하겠습니다.
##############################################################################################2339 서비용 컴퓨터를 구입하도록 도와줍시다. 이근호 2005/03/08 22 217 2338 [re] 서비용 컴퓨터를 구입하도록 도와줍시다. 이창섭 2005/03/10 16 174 2337 이창섭 목사님, 안녕하신지요. 구득영 2005/03/10 17 166 2336 [re] 서비용 컴퓨터를 구입하도록 도와줍시다. 권범식 2005/03/09 15 212 2335 [re] 3월 9일 현재 십자가마을 등록 회원은 1959명입니다. 손무성 2005/03/10 14 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