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호 목사를 추종하는 자는 지옥갑니다.] 2005-01-10
이근호 목사를 추종하는 자는 지옥갑니다. 김대식 (Homepage) 2005-01-10 06:04:18, 조회 : 435, 추천 : 26
이근호 이단을 추종하는 자는 벌써 지옥 간 자들입니다.
예수님과 나 자신 사이에 칼빈을 두거나/ 성화를 두거나/ 역사를 두거나/ 개혁주의를 두거나/ 교회를 두거나/ 교리를 두거나/ 역사개혁주의를 두거나/ 이근호 목사를 두거나/ 로이드 존스 목사를 두거나/ 스데반 집사님을 두거나/ 나 자신을 두거나/ 신학을 두며는 다 지옥입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입니다.
무지 무지 바쁘게 로이드 존스 목사 챙겨야 하고, 정통 신학도 챙겨야 하고, 칼빈도 챙겨야 하고, 역사 개혁주의도 챙겨야 하고, 성화도 챙겨야지, 삶도 챙겨야지, 교회도 챙겨야지 , 교리 신학도 챙겨야지, 이근호 이단도 챙겨야지, 각 영적 아부지 되신 목사들도 챙겨야 한다면 예수님이 들어갈 자리 없겠죠?
다 쓰레기요, 배설물 이거늘 배설물 안 챙긴다고 저렇게 안달하니 참 어이 없군요.
지옥에 왜 가려하지 않느냐? 라는 지옥의 새생명 삶을 주장하는 저들의 배후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이미 지옥에서 주님이 건져내 주셨는데? 또 다시 들어가야 할까요?
광야교회가 광야같은 세상에서 성화를 외치고 하나님 나라를 외치고 새생명의 삶을 외치고 역사개혁을 외치던 무리들이 장대높이 달린 인자를 무시하며 시체가 산더미 같이 쌓인 모습을 봤다면
미쳤다고 자진해서 애굽(예루살렘 성전)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겠지요.
광야에서 독대하러 오신 주님의 무시하지 말고, 외면 하지 말고
배설물을 다 제거 하는 주님의 사랑에 무릎을 꿇는 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만이 무릎을 꺽어버리시므로 가능하지 스스로 깨달아 무릎 꿇을 재간이 우리에겐 없지요) 저런 사기에 놀아나지 않겠죠.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 나 자신 사이에 수많은 배설물 곧 주님을 사모하고자 하는 순수하고 믿음 뿐인 나 자신, 정통 칼빈, 위대한 설교가 로이드 존스, 성화, 새생명의 삶, 교회(성전), 역사개혁교리, 스데반 집사, 죄인 중의 괴수 사도바울, 영적 아부지로 자처하는 목사, 이근호 이단 등등을 다 제거 하시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믿음 앞에 박살 날 일만 남아 있음을 기뻐해야 겠죠.
그것두 모르고 죽어라 죽어라 못먹어도 고 GO 라고 외치는 배설물 쳐 바르는 자들은 이미 지옥 간 자들입니다.
##############################################################################################신자란 십자가 안에서 자신의 죽음을 당연시 하는 자 (손성식) 김대식 (Homepage) 2005-01-10 08:23:19, 조회 : 340, 추천 : 14
[묵시와 역사]8 손성식 2005-01-09 21:44:32
『묵시와 현실』
【쉐퍼와 오시이 마모루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
오시이 마모루는 현대인입니다. 아주 철저하게 현대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의 문장은 프란시스 쉐퍼의 글쓰기와 유사하지요. 그렇습니다. 프란시스 쉐퍼는 현대인을 제대로 알아본 사람입니다. 그는 절망의 선아래서 분열된 현대인의 자아를 파악했습니다. 쉐퍼의 작품을 읽어보면 제가 언급하고 있는 [오시이 마모루]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쉐퍼가 지금 살아서 오시이 마모루의 작품을 본다면 저와 같이 말할것입니다. [오시이 마모루는 현대인이라고!]
오시이 마모루의 작품 『공각기동대』와 『인노센스』는 현대철학을 이미지화 시킵니다. 어떤 문제일까요? 인간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사람에 대해서 미련을 가집니다. “인간다움”에 기대를 걸어봅니다. 하지만 오시이 마모루는 인간세계를 절망의 절규속으로 내동댕이 쳐버립니다. 인간의 본질은 과연 뭐지요. 데카르트처럼 생각한다는 것일까요? 생각은 로봇도 합니다. 물론 오시이 마모루식 로봇이긴 하지만요. 그렇다면 기억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로봇도 합니다. 그러면 데카르트식으로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인간은 영혼에 육체의 껍데기로 덮여있는 것일까요.
모든 것이 기계로 등질화된 세상에서 인간의 인간다움은 그 본질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주체”로서 신과 자연을 평정했던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분열해 버립니다. 하지만 오시이 마모루에게도 물러 설 수 없는 공간이 존재합니다. 바로 “가족”입니다. 사랑이라는 희망의 장(場)입니다. 과학의 위상아래서도 사랑공동체는 유지될 수 있다는 말일까? 하지만 인간의 가족관계에서 생성되는 사랑은 욕망인데, 그렇다면 욕망을 인간의 본질로 보는 것일까?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매트릭스』처럼 오시이 마모루에게서도 가상과 현실은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뭐가 현실일까? 현실은 reality이죠. 리얼리티란 실재입니다. 여기에는 “참”이라는 늬앙스가 담겨있습니다. “참된것”입니다. 뭐가 참된 것일까요?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얼리티는 현실이 됩니다. 즉 나의 현실이란 내가 보는 것이며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현실이 조작되었다면 어떨까요? 보이는 것이 참이 아닐수도 있다는 얘기겠지요. 이런 맥락에서 두 작품은 동일한 문제를 다룹니다. 무엇이 참일까라는 거겠지요. 여기에 대해서 쉐퍼는 할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뭘까요? 그것은 현대철학이 진리를 상대화시킨 결과라는 것입니다. 욕망의 기계가 되어버린 사태를 지적하는 것이죠.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면 참인 것입니다. 진리의 절대성이 붕괴된 장(場)에서 쉐퍼는 우는 것이죠. 왜요? [말이 안통하니까!]
오시이 마모루가 영혼과 육체의 이분법을 가상과 현실문제로 상정하고 있다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철저하게 신화의 세계로 돌아갑니다. 그는 철저하게 고대인입니다. 마치 어린이들에게 읽어주는 동화의 세계죠. 인간의 주체사상을 해체하면서 분화되지 않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것 같습니다. 생명이 소멸된 자연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동거동락하던 자연입니다. 인간이 돌아가야할 어머니의 품속같은 자연이죠. 미야자키 하야오가 왜 이럴까요? 그것은 현대세계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오시이 마모루는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 같은데 쉐퍼의 입장에서 보면 둘 다 절대 진리에 반대하고 있죠. 즉, 오시이 마모루의 주체로서 인간과 미야자키 하야오의 주체로서 자연은 쉐퍼의 거기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대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의 문제제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현대인이든 고대인이든 인간은 십자가아래에서만 본질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쉐퍼의 명제적인 인격신 개념은 복음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의사소통은 철저하게 십자가의 언어이기 때문이지요. 즉, 설득과 협상의 언어가 아니라 심판과 구원의 언어입니다.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입니다. 욕망하는 인간과 의사소통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욕망하는 인간을 죽이면서 다가오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란 십자가의 내용을 현실로 받아들여 자신의 죽음을 당연시 하는 자들입니다.
##############################################################################################아담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립 - 손성식 목사 김대식 (Homepage) 2005-01-15 16:08:07, 조회 : 179, 추천 : 12
[묵시와 역사]9 손성식 2005-01-11
[아담에 대해서]
저는 예전에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순서대로 차근차근 읽어서 10독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수 있을거라는 희망을 가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의 생각이 엉터리라는 것을 알게 해준 분이 바로 바울입니다. 왜냐하면 다메섹으로 가는 길가에서 주님을 만나기전의 사도 바울의 학식을 보면 그가 얼마나 구약성경에 정통한지를 우리는 그의 고백을 통해서 알게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예수님을 알아보는데 아무 도움이 안됐다는 겁니다. 오히려 방해가 되었지요.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예수님을 알게되었나요? 주님이 찾아오셔서 알게되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이 알려주시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몇해독이 문제가 아니라 바울이 만난 주님을 만났느냐가 성경을 이해하는 관건입니다.
바울을 찾으신 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만나본 적이 없다면 성경은 열린 문이 아니라 바리케이트 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경은 인간의 모든 이성적능력을 거부합니다. 즉, 철학을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서 구약성경을 이해한 사람입니다. 즉, 십자가라는 선그라스를 쓰고 성경을 보고 있다는 것이죠. 저는 이것이 성경을 읽는 모든 교인들에게 제일 중요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라는 색안경을 쓰고서 다음과 같은 대답을 얻어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로마서 5:16-17)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린도전서 15:22)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린도전서 15:45-47)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은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대립시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담이란 그냥 한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죄와 사망아래 놓여있는 인간의 굴레를 대표하는 상징입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는 의와 생명을 대표하는 은혜의 굴레를 대표합니다.
"아담의 세계-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죽음-생명, 땅-하늘, 죄-의라는 이미지로 대립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아담세계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경험했던 세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 그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가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열려진 생명의 세계, 하늘의 세계, 의의 세계를 증거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가 아담에 대해서 알려는 노력의 결과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에덴동산에 있지도 않았는데 왜 나에게 아담과 똑같은 대우를 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십자가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나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의가 나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은 어떠냐 말이지요. 어떻습니까? 우리의 생각과는 상당히 다르지요.
우리는 보통 "나 하나 잘하면 되지!"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네가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소속되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 모르고 그냥살면 그의 행동 여하와 상관없이 사망이지만, 예수님에게 소속되어 있으면 또한 그의 행동 여하와 상관없이 생명입니다.
좀 쉽게 얘기하자면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는 군대에서 부대이름 같은 것입니다. 어느 부대 소속이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아담부대에 소속되어 있으면 죄와 사망이고,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부대에 소속되어 있으면 의와 생명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도의 신앙생활이란 예수 그리스도부대에 소속되었음을 확인해가는 것이지요. 우리는 자꾸 잊지만 부대장님이신 예수님께서 그때 그때마다 좌로굴러 우로굴러, 연병장돌리고, 얼차례하시는 것입니다.
쉽지 않은 대답이지만 결국 신자가 아담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것을 정리하는 것이지 싶습니다.
##############################################################################################교회사는 욕망하는 인간의 배설물 - 손성식 목사 김대식 (Homepage) 2005-01-15 16:09:36, 조회 : 290, 추천 : 15
교회사는 욕망하는 인간의 배설물 - 손성식 목사
『신학과 철학의 굴레』
【교회사는 욕망하는 인간의 배설물】
혹시 한스 큉을 아는지: 그 분을 만난적은 없어. 단지 그가 뱉아놓은 몇 권의 번역서들만 알뿐이지. 예를 들면 『교회란 무엇인가』,『왜 그리스도인인가』,『신은 존재하는가』등 그리고 최근에 읽고 있는 『그리스도교』가 있지. 특별히 『그리스도교』는 시간 많고 할 일 없는 나같은 사람이 딱 읽어볼만한 책인 것 같애. 한스 큉 신부는 이런 방면에 재미를 많이 느끼는 것 같애. 참 열심히 준비했어. 책 1권이 천페이지가 넘으니까 말이야.
한스 큉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스 큉, 그 사람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어. 그는 그냥 카톨릭이라는 제도권 밖에서 계란으로 바위치기 하는 사람이지 뭐. 마치 칼 라너가 제도권 안에서 바위 닦고 있는 사람이라면. 사실 이 사람들의 사상적 흐름속에는 칼 바르트라는 이질적인 요소가 자리잡고 있지. 참 알수 없는 일이지. 예전에 죤 칼빈을 생각해봐. 그의 책 『기독교 강요』를 읽어 보면 재미있어. 나는 사실 칼빈이 어떤 맥락에서는 부러워. 왜냐하면 그는 마귀의 모습을 분명히 봤으니까. 그가 본 마귀는 바로 로마 카톨릭이고 교황이지. 그래서 현재도 칼빈의 영향을 받은 어떤 이들이 교황을 마귀라고 보는 것 같애. 하지만 내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에서 마귀의 세력이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내가 사는 세계와 칼빈이 살던 세계와는 다르거든. 그래서 마귀가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는 방식도 다르다고 생각해. 어떤 특별한 종파를 가지고 마귀다 아니다!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마치 이단규정이 쉽지 않듯이 말이야. 그래도 한 마디 하고 건너가야 겠지. 오늘날 마귀는 십자가의 능력을 거부하는 인간의 모든 몸부림이야. 인간의 가능성이지. 하지만 인간의 가능성은 죄의 가능성이지 은혜의 가능성은 아니거든. 은혜는 십자가의 우발적 현상이거든.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항복시켜서 두손 두발 다 들게 만드는 거야. 그것이 우리의 인생사야. 하지만 현실교회는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것 같애. 환장하겠어.
하여튼 아이러니 한 것은 칼 바르트의 사상이 로마 카톨릭의 중심부와 외부에 위치한 두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거야. 물론 얼마나 칼 바르트와 닮아 있느냐는 생각보다 쉽지는 않은 문제겠지. 한스 큉의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보면 그의 생각이 요즘 말하는 식으로 개혁적인지 놀라워. 그리고 『왜 그리스도인인가』도 읽어보면 사람들의 가슴속에 응어리진 부분들을 풀어 줄지도 몰라. 나는 이런 책들을 대단히 중요하다고 여겨. 왜냐하면 나의 욕망을 풀어서 설명해주고 있거든. 나의 능력부족과 관심부족을 한스 큉은 밝혀 주고 있는 거야. 하지만 그의 책은 십자가가 아니고 욕망이야. 나는 그의 책을 사실 많이 이용해. 인간의 욕망을 밝혀준다는 맥락에서 그렇지.
한스 큉에게도 중심사상은 있지 않을까: 물론 있지. 큉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야. 좀 풀어보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이지. 뭐 별것 아니네! 할지 모르지만 이미 수 많은 실타래들이 얽혀서 미로처럼 되어 버린 신학계에서 이렇게 간단하게 얘기한다는 것은 대단한거야. 너무 무시하면 안돼. 그의 멋진 책 『그리스도교』(분도출판사)를 보면 교회사란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라는 알맹이가 온갖 더러운 쓰레기들로 덮여져서 왜곡되어진 현상이야. 그래서 그는 쓰레기 청소부처럼 2000년 동안 쌓여 온 쓰레기들을 하나 하나 치우는 수고를 하는 거야.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거야.
읽은 느낌이 어떤지: 아! 미치겠고 환장하겠어. 아니, 교회가 이 땅에서 한 일이란 이 땅을 더럽게 한 일뿐이라는 거야. 그러니 미치지 않겠어. 내가 아는 성우교회 김 달원 목사님이라고 있어. 이 분은 등산을 참 좋아해. 그래서 내가 물었지. 산에 가서 뭘 보시냐구? 그랬더니 김 목사님이 말하기를 인간이 얼마나 산을 더럽게 해놨는지 환장하겠다는 거야. 결국 어디에서나 욕망을 발산해서 더럽히는 인간의 본질을 본거야. 참 놀라워. 한스 큉의 『그리스도교』를 보면 딱 그래. 더러워서 못 보겠어. 책을 덮을까 덮을까 하다가 워낙 비싼 책이라 계속 펴놓고 있는거야. 근대 가만히 생각해보면 한스 큉의 얘기는 남의 얘기가 아니라 나의 얘기란 말이야. 결국 나의 못됨이고 나의 악랄함이고 나의 치부야. 그러므로 더욱 읽어야 되는 것야. 인간은 자신의 결함을 본능적으로 숨기려 하잖아. 하지만 그런다고 치료되는 것은 아니잖아. 여기서 나는 재미있는 것을 발견해. 신앙생활이란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의 못남이 드러나고 확인되는 것이야. 은혜란 못남이 확인되는 장(場)이야. 그러므로 들키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돼. 진짜 두려운 것은 주님이 모른 체 하는 거야. 아는 체 하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어. 마지막으로 이것만은 기억해야 돼. 내가 사는 동안 거룩을 생산해내지 못한다는 거야. 단지 십자가 달리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간섭하시므로 거룩을 확인하는 것이지. 성화란 생산작업이 아니라 확인작업이야.
혹시 덧붙일 말은: 2000년 교회사가 그리스도교의 배설물이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의 배설물이야. 그러므로 뭔가 대단한 것을 기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오직 십자가 앞에서 주님의 은혜성을 확인해가는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더욱 열심히 살았으면 좋겠어. 알았지. 회의주의가 아니야. 더욱 열심히 주어진 길을 성실히 살아가는 거야. 참고 인내하면서 말이야. 믿음이란 어떤 맥락에서 하나님나라의 불가시성을 참아내는 것이야.
##############################################################################################욕망의 도주로인 교회사 - 손성식 김대식 (Homepage) 2005-01-18 14:28:00, 조회 : 207, 추천 : 21
137 [신학과 철학의 굴레]5 손성식 4 2005-01-18
신학과 철학의 굴레』
【세력화】
그래, 한스 큉의 『그리스도교』를 읽은 소감이 어때: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어.
뭐가: 교회라는 장(場)에서 발생하는 욕망의 도주로를 알게 됐지.
욕망의 도주로: 맞아, 욕망의 도주로야. 교회사는 인간의 욕망의 흐름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이름이 더럽혀진 역사야.
너무 심한 것: 과연 심한 걸까! 복음은 교회라는 조직화와 세력화 때문에 난도질당했어.
세력화: 그래! [힘 없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던 묵시적 운명 공동체가 힘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한거야.
그래서 어떤 결과: 역사로부터 박해받던 교회가 이제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한거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혹시 종교재판, 마녀사냥: 그래, 교회가 세력화 되니까 한 짓이라곤 사람 죽이는 것. 이것이 문제야.
교회란: 이 땅에서 힘을 가지려고 하지 않아.
왜: 십자가의 정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현실교회는: 자꾸 힘을 가지려고 해. 하지만 힘을 만드는 모든 노력은 복음이 아니야.
그러면: 마귀의 밑천이지. 마귀는 이 방면에서 고수거든
혹시 예수님이 광야에서 맞닥뜨린 실체: 그래. 마귀지. 마귀는 힘을 줄려고 해. 하지만 예수님은 힘을 부인하고 힘 없는 길로 걸어갔어. 십자가의 길이지.
십자가의 길: 그래.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힘 없음으로 활성화 시키셔. 이것을 기억해야 돼.
힘을 가질려는 현실교회: 마귀의 못된 버릇이며 마귀의 열매지.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 힘 없는 장(場)이야! 세력화 하는 것이 아니야.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힘 없는 장(場)으로 만드셔.
그래서: 십자가의 내용을 확인시키므로 은혜를 몸 구석 구석에 각인시키는 것이지.
그러면: 힘 없다고 답답해 하지마. 오히려 힘 없음에 감사해야 해. 알았지.
##############################################################################################어떤 분의 놀라운 고백-1탄 이근호 2005-01-26 11:45:22, 조회 : 244, 추천 : 24
예수를 배우고 듣고 알게 된지 40여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 분을 인식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그분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그 분을 증거했던 제자들을 이야기하지만, 너무나 사실 인식하기 어렵다. 바로 가까이 사는 아내와 아이들도 내가 온전히 이해하고 그들을 깊이 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하물며 2천년 전에 문화도 틀리고 언어도 틀리고 분위기도 전혀 다른 고대 로마식민지 유대땅 에 30년을 살다간 예수란 사람을 어찌 성경 몇장의 장면만을 가지고 우리가 그를 온전히 인식할 수 있을까?
심지어 그의 탄생을 역사적으로만 생각하면 우리가 또한 전혀 알기 힘든 사건이다.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것을 본적도 없고 들어본적도 없이 믿음으로만 알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물위를 걸어가시고, 바람과 파도를 멈추셨고 5병이어의 기적, 수많은 치유의 역사....나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일이기에 2천년 역사의 거리만큼이나 나와 거리가 생긴다. 나와 비슷하게 살아가는 내 앞에 있는 사람도 그 속을 알기 힘든데...어찌 이 예수를 내가 인식하고 알아지게 될까? 인식이 안되고 알아지지가 않는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함께 동행 할 수 있을까? 이 엄청난 거리를 유지한체 어떻게 그와 동행하면서 임마누엘을 찬양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 거리만큼이나 예수를 하늘로 높이 올려놓고 경배하고 숭배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 먼거리에 보좌에 앉으셔서 만유를 통치하시는 절대자로 올려놓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보게된 예수는 나와 같은 자리에 있었다. 그의 수많은 이적도, 기적도 능력의 말씀도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할 수 만 있거든 이 잔을 피하게 해주소서..하시던 그 죽음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었다. 십자가위에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무것도 하실 수 없는 그리고 영혼을 의탁하고 끝나버리신 그 자리...
그 자리가 내 자리로 보여지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소리만큼 나의 어떠함으로는 도무지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지 못한 다는 것이 나의 탄식이 깊게되어 모든 것이 끝나버린 그 자리가 보여질 때 예수가 알아진다.
나는 십자가에 달려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좀더 노력한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돈도 벌 수 있고, 집안일도 할 수 있고, 아이들도 키울 수 있고, 전도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쩔 때는 남보다 잘 할 수 있을것도 같았다. 힘이 딸리면 주께 기도해서 그 분이 힘을 주시고 도와준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외마디의 탄식을 끝으로 끝나버리신 예수는 나도 자신 안에 포함되었음을 알 기를 원하셨다.
내가 할 수 있는 그 많은 일들은 사실, 동물들도 수준이 낮지만 할 수 있는 것들이고 죽어있는 기계들로 대체해도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죽어있는 기계도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진짜 산 사람이 할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제물로 드려지고 하나님이 받으실 향기로 태워져서 살아가야 할 존재들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하셨을때 나는 죽었었다.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수 있는 사람이 죽었다. 아니..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으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생명의 씨를 받아 생명을 산출해야 할 존재로서는 죽어버린것이다.
선악으로 뒤범벅이 되어 살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선과 악을 쏟아내고 선과 악을 저울질 하고 선과 악을 판단하고 좋은것과 나쁜것을 비교하면서 좋아하고 탄식하고 그렇게 살면서 그 선악과의 인생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속고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것이다. 아무것으로도 그에게 올려드릴 수 없는 썩은 것이다.
마치 천둥이 치듯이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죽으리라"는 말씀이 들리는 것같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죽었다. 그 안에 나도 있다. 그 사람이 달려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우리를 그안으로 이끄신다. 내 자신도 그 자리를 외면해 왔다. 그냥 예수는 우리 죄를 위해 대신 죽어서 우리는 그를 믿으면 천국간다고 알았다. 그 분만 달리고 우리는 혜택을 받은 자리가 십자가인줄 알았다. 아니었다. 우리의 운명과 실체를 너무나 처절하고 철저하게 보여주시는 자리이다.
살아있는 아담의 어떠함도 하나님앞에서 죽은것이라는게 드러나는 자리이다. 아 이것이 더욱더 나에게 선명하게 보여진다면....십자가안에서 끝난 내 운명이 더욱더 선명하게 다가온다면...그분의 이끄심이 더욱더 크게 들려온다면....내 눈에 씌우어진 비늘이 벗겨지고 내 귀에 쇠붙이처럼 두껍게 쳐진 장막이 걷힌다면......
십자가는 예수가 흙의 운명이란것을 철저하게 보여준다..더 이상 무슨 잔인하고 처절한 방법이 있겠는가? 무슨 더 이상의 설명이 있겠는가? 옆구리에 창을 찔렀을때 물과 피만 쏟아졌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재만 남았다. 흙만 남았다. 그 죽음의 자리에서 아버지가 기쁘게 받으시고 역사하시기 시작했다.
흙의 자리, 흙의 운명..십자가,,숨이 코에 붙은 인생..죽음.."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외침도 끝나고 그저 내 영혼을 의탁할 수 밖에 없이 끝나버린 그 자리...
예수의 인생의 어디도 나와 합쳐지는 자리가 없는데 여기서 만나게 된다. 내 자리와 운명이 그 안에 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으로는 끝나야 되는 자리...나의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되고 번제단의 제물처럼 활활타올라 재만 남아야 되는 그 자리......
새해에도 이 자리에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이 자리에 있기를 소망한다. 내 눈이 더 밝아지고 내 귀가 더욱 열려져서 그 의 죽으심안에 십자가에 달려 계신 그 분안에 깊이 깊이 포함되길 원한다. 그와 함께 죽고 그 와 함께 부활을 맛보기를 원한다.
##############################################################################################어떤 분의 놀라운 고백-2탄 이근호 2005-01-26 11:47:39, 조회 : 217, 추천 : 19
오전에 시간이 좀 있으니까 아내는 기다렸다는듯이 같이 백화점에 가자고 했다. 세일하는 백화점이 있는데 거기서 아이들 옷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남자들이면 보통 그렇겠지만 아내와 백화점이나 할인점에 가서 쇼핑을 한다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나같으면 대충 가격이 맞고 품질이 괜찮으면 살것인데 아내는 아이옷 하나를 사면서 백화점 전체를 돌아다니는 것 같다. 거의 모든 옷을 뒤져보고 만져보고 들어보고 물어보고 내려놓고 또 다른 곳에 가서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그러다 아줌마들이 우루루 몰려 있는 곳이 있으면 어지 없이 가서 또 들어보고 만져보고 물어보고 맞춰보고 한다. 으아악..이건 정말 고통이다.속에서 복창이 터지는 것 같았다. 와 이것을 웃으면서 즐겁게 함께 해주는 다른 남편들은 도인들인가? 부처들인가? 어떻게 여자들은 이러한 것들을 즐길 수 있단 말인가? 내 안에는 결코 없는 마음이다. 옷을 고르고 가격을 흥정하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싸면서 조금이라도 더 예쁜 옷을 골라서 아이에게 입혀 주고 싶어하는 그 마음은 내게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전혀 다른 마음인 것이다. 여전히 온 매장을 다 뒤집고 다니면서 결국은 잠깐 한 눈 판 사이에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잊어버려 한참을 이산가족이 돼서 찾아다니게 만드는 아내를 보면서 내안에 어떤 감사가 밀려왔다. 전에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인데...바로 아내의 그런 마음으로 인해서 우리 아이들이 깨끗하고 좋은 옷을 사시사철 입게 되고 나도 마찬가지로 아내의 그 마음때문에 인식하던 못하던 좋은 옷을 입고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이 알아졌다.
내 안에는 결코 없는 마음...나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그 마음..그것이 나를 풍요케 하고 가족을 옷입히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생각났다. 예수 그 한 분이 생각났다. 우리안에는 십자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없다. 그것을 본질적으로 피하고 싶어한다. 본질상 육체의 소욕대로 살기 좋아하고 내 본성상에는 십자가를 거부한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면서 십자가로 가시고, 번제단 위에서 재로 태워지시고, 동편에 버린바 된 어린양의 본성...그것은 우리의 개념안에 없던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싫어하고 버리고 차버리고 내 목적에 하나님이 도와 주기만을 바라고 내 계획에 하나님이 조력자가 되기를 원할 뿐이다. 내 목적과 내 계획이 죽고 아버지앞에서 사라져가는 그의 아름다움을 찬양을 하고 경배는 해도 나는 그분의 길을 가기는 싫어한다. 경배는 하되 그와 함께 십자가로 가기는 싫어하는 체질이다.
내게는 없던 그 마음...내가 싫어하던 그 마음으로 나를 살리셨고 내가 도저히 싫어하던 그 자리에 주님이 계심으로 당신의 영광으로 나에게 함께 옷입히셨다. 내가 멸시하고 버린바 되었던 그 십자가자리에서 한 없는 은혜와 축복을 내게 덧입히시고 계시는 것이다. 그가 계신 십자가에서 날마다 나를 살리는 생명이 나오고 나를 정결케 하는 물이 나온다.
그리고 주님은 나를 당신이 계신 십자가 자리로 나를 이끄신다. 버리고 싫어한바 되었던 십자가 그 자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보이시는 것이다. 세상의 높고 낮음 부하고 천하고 강하고 약한 모든 영광이 쓰레기처럼 사라지고 십자가로 죽고 부활하셔서 영광의 보좌에 오르신 그 영광안으로 이끄신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그런즉 이제 내가 산것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것이라.." 그의 십자가의 영광으로 영광으로 이끄심을 받다 보니 나는 그의 품안에 사라지고 내가 사는 것은 없어지고 이제 나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영광스런 인생으로 변화시켜주셨다.
나에게는 없던 자리, 내가 싫어한바 되었던 자리...그 십자가 자리에서 한없는 영광을 보여주시고 나를 이끄시어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아 함께 영광안에서 그의 신부로 살아가게 하신 주님을 영원히 찬양한다....
##############################################################################################참 좋은 글, 잘 쓴 글 이근호 2005-01-30 09:28:38, 조회 : 235, 추천 : 15
아랫 글은 매인교회 '주민자' 성도님의 글을 가져 왔습니다.
잘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제 저녁 암으로 투병중인 친구를 만나고 왔습니다. 일년 전 어느날 갑자기 위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도 “나는 죽지 않는다. 기어코 암과 싸워 이기고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할 것이라”고 자신만만하던 친구-원래 성격이 좋고 낙천적이어서 보는 이로썬 큰 다행이었고 친구 말대로 정말 그렇게 곧 회복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몇 번의 항암치료를 받다가 과감하게 마다하고 자연식과 등산과 기도원을 다니며 정말 회복하는가 했는데 그 친구 가족에게 정말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친구보다 두어 달 전 식도암 진단을 받고 수술 했지만 오래 견디지 못할거라던 오빠가 계셨는데, 어느날 갑자기 60좀 넘기신 큰 오빠께서 주무시다가 심장마비로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식도암 투병중인 오빠도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또 한 두달 쯤 뒤 팔순 넘기신 친정어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불과 6개월 사이를 두고 엄마와 두 오빠와 사별하게 되어 이제 친정 쪽으론 언니 한분만 남게 된 것입니다. 엄마와 사별 후부터 이 친구 심경에 변화가 온 것 같습니다. 그 자신감은 점점 바람 빠지는 풍선이 되었습니다. 같은 서울이라도 친구와 멀리 떨어져 살다보니 자주 찾아가지 못하고 이십여일만에 병원에서 만난 친구는 그새 몸과 마음이 몰라보게 변해 있었습니다. 결혼 후 자주 만나진 못해도 신학교 때부터 가장 친했던 친구로 표정만 보아도 마음을 읽을 만 하였건만 이젠 냉큼 말하기가 힘든 사이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책을 좋아하던 그 친구는 이제 성경도 읽을 수 없다며 씁쓸한 표정입니다. 몇십년 동안 교회 피아노와 파이프오르간 연주를 한 친구니까 그럼 마음속으로 찬송가를 부르라고 했더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고개를 내졌습니다. 마치 기억하기 싫은 것처럼.... 다시 항암주사를 맞기로 하고 입원했는데 상태가 안 좋아 2주가 지나도록 속수무책이었고 말하기도 힘들어하는 친구 머리맡에서 저는 까맣게 다시 자랐다가 또 다시 빠지기 시작한 머리카락만 줍다 돌아왔습니다.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잠을 청해보라고 하고는 병원을 나와 친구남편에게 며칠 후 밤 간병하러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되돌아왔지만 앞으로 몇 번 더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말씀칼럼을 올리며 수없이 읽고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이 은혜가 친구뿐 아니라 사형선고를 받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엘리가문'이 생각납니다 구득영 2005-01-30 12:33:17, 조회 : 171, 추천 : 12
(삼상 4:11)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삼상 4:12) 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에서 달려나와 그 옷을 찢고 그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실로에 이르니라(삼상 4:13) 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곁 자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 마음이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떨릴 즈음이라 그 사람이 성에 들어 오며 고하매 온 성이 부르짖는지라(삼상 4:14) 엘리가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이 훤화하는 소리는 어찜이뇨 그 사람이 빨리 와서 엘리에게 고하니(삼상 4:15) 때에 엘리의 나이 구십 팔이라 그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삼상 4:16) 그 사람이 엘리에게 고하되 나는 진중에서 나온 자라 내가 오늘 진 중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엘리가 가로되 내 아들아 일이 어찌 되었느냐(삼상 4:17)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삼상 4:18)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지 사십년이었더라(삼상 4:19) 그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잉태하여 산기가 가까왔더니 하나님의 궤 빼앗긴 것과 그 시부와 남편의 죽은 소문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삼상 4:20) 죽어갈 때에 곁에 섰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지도 아니하며 관념치도 아니하고(삼상 4:21)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 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 시부와 남편이 죽었음을 인함이며(삼상 4:22)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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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기에, 오늘도 우리는 그분의 용서하심에 모든 것을 다 내어맡기고 용감하게 살아갑니다.신부로서...
(마 19:6)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정암 박윤선박사의 강의록을 읽고... 김홍배 2005-01-30 10:22:03, 조회 : 220, 추천 : 11
한국교회의 장자교단이라 자처하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측의 많은 성직자를 배출해낸 총회신학교(지금의 총신대) 교수로서,(말년에는 방배동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셨지만)평생을 신학도 양성에 몸 바치신 정암 박윤선 박사의 강의록 중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개인적으로 나는 교회의 목사님을, 하나님 말씀을 전하시는 말씀의 사자라고 생각하기에, 구약의 선지자나 신약의 사도직을 계승한 특별한 분으로 생각하고 있다. 기도 중에도 목사님을 ‘하나님의 사자’로 호칭하며, 어떤 말씀을 주시든지 그 말씀의 권위를 존중하여 순종해야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호칭이 잘못되었다는 내용을 처음 접하며, 기도 시 목사님을 어떻게 호칭하는 것이 타당할까라는 고민에 빠졌다. 소위 골동 보수교단의 많은 지도자를 배출해낸 교수님의 아주 개혁적이고 파격적(?)인 강의 내용을 보며, 강단에서 설교자들은,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만을 높여야 된다'라는 바른 가르침을 주신 깊은 속뜻을 엿볼 수 있다. 다음 내용의 출전은 다음과 같다.개혁주의 교리학』-신학박사 박윤선- 정암박윤선목사 유작, 2003,영음사, p.374
......오늘날 목사직이 어느 정도 사도직에 해당되는 것처럼 생각함은 착각이다. 엡4:11에 사도와 목사를 명백히 구분하여 말하기를“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라고 한다. ......현대 교역자가 의식적으로 혹은 부주의하여 사도나 선지자의 위치에서는 과오를 결코 범해서는 안 된다. 목사 자신이 일반 신자들과 다른 위치에 있는 듯이 자처하게 되면 그는 그런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교역자는 평교인과 함께 일반 제사장의 신분일 뿐(벧전2:9) 전혀 차별이 없다. 그는 평교인과 마찬가지로 은사대로 봉사하는 자이다. 교회에는 봉사자가 있을 뿐이고 지배자는 없다. 지배하시는 이는 대제사장(히4:14)이시고 왕(계17:14)이신예수님뿐이다.....‘하나님의 종’이라는 명칭은 평신도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인데(롬6:22) 교인들은 이 말을 주로 교역자들에게 전속된 호칭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교역자가 평신도들로부터 각별한 예우를 받게 된다면 주님의 일꾼으로서 합당한 처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하나님의 사자’라는 호칭에 있어서 ‘사자’라는 말은 “천사”라는 말과 통한다. 계1:20의 “일곱 교회의 사자”라는 말에 있어서 “사자”로 번역된 헬라 원어 ‘앙게로이’는 ‘천사들’이다. 어떤 이들이 교역자를 지칭하여 ‘하나님의 사자’라고 하니 이런 호칭은 마치 ‘하나님께 직속한 천사 같은 사람’인 듯 한 인상을 준다. 수년 전에 필자와 관련된 어떤 글에서 이런 호칭이 사용된 것을 읽고충격을 받은 나는 곧 연락하여 시정을 요망했던 적이 있다......
==========================================================================[re]인간은 자신만 최종 남을 뿐! 이근호 2005-01-30 13:33:32, 조회 : 238, 추천 : 15
>목사들이 유명 신학자를 거론하는 것은 자기 영업에 도움되는 경우에만 도용할 뿐입니다.
인간들은 행함에 의존하는 존재들이기에
자기 행함이 자기 노동으로 이어지고, 그 노동의 대가를 어떤 식으로 실적을 찾는데서
자신의 생존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합니다.
목사는 사업을 벌리는 사업주이며
교회는 영업장입니다.
문제는 간판이니,
신망도가 높은 프랜차이즈 사업에 가입하기 위해 소위 '정통 보수교단'이라는 간판을 문양으로 만들어 예배당 입구에 붙이고,
'이 교회는 이단 교회가 아니니 안심하고 다니시기 바랍니다'라는 주장을 폅니다.
이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만약
그 교회에 그리스도가 와 버리면, 그 때부터 자신은 순교를 강요받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목사짓해서 밥먹고 살려는 자신의 술책은 다 깨어지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정통을 빙자한 영업'을 하되
철저하게
예수를 믿는 자를 교회에서 추방하는 것이 목사의 살 길입니다.
##############################################################################################손성식 목사님의 '새로운 글쓰기' 이근호 2005-01-30 21:08:46, 조회 : 220, 추천 : 13
『묵시와 현실』
【약속】
히브리서를 한 번 봤어: 봤지
어때: 황당해.
왜: 인간의 본능을 거부하기 때문에.
인간의 본능이 뭔데: 믿음의 보상을 지금 요구하고 있는 거지.
조금 구체적으로 말해 줄 순 없어: 약속을 믿음의 현실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야.
더 어려운데: 어렵지. 아마 어려운 이유가 자기보존 본능에 어긋나 있기 때문일거야.
그렇다면: 히브리서는 싸우고 있어.
대상은: 믿음을 보상현실로 오해하고 있는 자들을 향해서.
그런 사람들이 많아: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야.
그렇게까지: 아니 사람들의 움직임을 봐. 다 자기보존을 향하고 있잖아. 자신을 거부하고 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잖아.
그렇다면 이것이: 그래 히브리서가 거부하고 있는 믿음의 내용이야. 믿음은 보상현실이 아니야. 믿음은 약속현실이야. 꼭 기억해야돼.
현실은 만만치 않겠는데: 그렇지. 현실은 고독해. 마치 전쟁터에 홀로 남겨진 고아 같아.
하지만: 약속을 현실로 인정하고 경험하는 거야.
그것을: 그래, 히브리서는 믿음이라고 말해.
오늘날 교회는: 교회 아니야. 히브리서가 거부하는 대상이야. 나는 교회가 없다고 봐. 헌데 재미있는 것은 바로 그때 교회가 눈에 뜨인단 말야. 참 알 수 없어.
그럼 교회는: 신음하고 있지.
뭣 때문에: 가짜 현실 때문에.
그래도 지탱되고 있는 근거는: 믿음의 주도권을 아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또한 온전케 하시는 권한도 아들의 몫이야.
아들이 누군데: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이지.
그래서 하는 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다르게 표현한다면: 약속을 현실로 인정한다는 것이지.
좀 더 적극적으로: 십자가의 현실 안에서 몸부림치는 것.
##############################################################################################설탕 복음과 소금 복음 최종운 2005-02-01 17:21:56, 조회 : 275, 추천 : 13
설탕 복음과 소금 복음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가르치고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자들이라도 그들의 과정과 행태를 보면 알곡인지 가라인지, 정통인지 사이비인지 판별 할 수 가 있다. 그런데 대부분 확신을 가지고 자기는 복음적이고 그 이외는 부정하는 모습은 웬만한 영적 통찰력과 분별력이 없으면 도무지 감을 잡을수 도 없고 헷갈릴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목사와 교인들은 어떤 특정인의 성경해석과 신학논리에 맹목적으로 수용하고 지지할 수 밖에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조폭과 같은 시스템이 구축되고 자연스럽게 거부감 없이 사이비교의 구조적인 모습을 닮아 가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과거의 여러 부흥회 단체에서 부터 지금의 청교도영성훈련원과 같은 교회안팎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사태는 설탕과 소금으로 비유하고 싶다. 설탕은 사탕수수에서 정제하여 여러 가공,정제 과정을 거쳐 백색의 흰 설탕이 된다. 흰 설탕은 5백식품의 하나로 성인병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지만 우리생활 주변과 가공식품에 없어서는 아니 될 주요한 감미료이다. 과자와 빵은 물론이고 인스탄트 가공식품에는 설탕이 범벅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래야만 제품이 잘 팔리게 된다. 왜냐하면 소비자들이 이미 설탕의 단맛에 중독과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설탕을 먹으면 우리몸속의 백혈구는 바이러스를 물리칠 힘이 약해진다. 그리고 세포를 연약하게 한다. 고기에 설탕을 넣으면 고기가 부드러워 지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설탕을 한줌 부뚜막이나 땅에 놓으면 얼마 안 있어 개미가 달려 든다. 개미는 단것을 좋아한다. 개미는 일종의 충(蟲이)다. 벌레라는 말이다. 개미를 비롯한 각종 벌레는 단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소금을 부어 놓으면 개미는 얼씬 거리지 않는다. 소금은 방부제 역할을 하고 자연의 맛을 조절하고 우리 몸의 체액의 항상성을 유지해주어 건강하게 한다. 물론 깨끗한 소금을 전제한다. 설탕은 없어도 되지만 소금은 아니 될 중요한 식품이다. 빛과 소금의 사명은 그래서 중요하다.
현재 한국교회안의 성장이면을 보면 설탕의 복음이 교회의 성장과 부흥의 판도를 지배하였다. 그 결과 성공과 출세와 대형교회의 각종 프로젝트들이 인간의 야망과 명예와 감투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그들의 고유브랜드를 창출하는데 성공했지l만 결과적으로는 비복음적이고 반 성경적인 인간의 행태와 업적과 잡동사니만 남게 되었고 사이비성만 남게 되었다. 그중에 하나가 청교도 영성훈련원이다.
설탕복음은 당연히 그 맛에 길들여진 교인들이 좋이하는것는 불문가지이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소금의 복음은 전하기를 소홀히 하고 설탕복음만을 일방적으로 전하였기 때문이다. 교인들은 우선 먹기에 곶감이 달다는 속담이 있듯이 설탕목음을 먹어서 영적 비만과 성인병만 자초하게 되었다. 그래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설탕중독의 증세를 심화시켜만 가고 있다. 설탕복음이란 성경을 가공,정제 원래의 복음을 자기 취향에 맞게 가공한것이다. 교인들이 좋아하는 복을 강조하고 자기가족의 건강과 샤마니즘에서 강조하는 무병건강과 기복제화를 주 아이템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그 방법도 사마니증에서 하는 테크닉을 옷만 바꿔 입은 채 교회안에서 요란한 굿판을 벌리고 있는것이다. 교인들은 예배란 행의를 빌어 약장사와 무당을 겸비한 굿판에서 심리적인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서는 은혜받았다고 병 고쳤다고 간증하는것은 착각임에 불과하다. 가짜 약장사와 무당이 벌리는 굿판에서도 이와 유사한 현상들이 나타난다. 전혀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하심이 아니다. 성령이 인간의 노리개감도 아니고 도깨비 방망이와 같이 뚝딱 뚝딱 두드리면서 성령공급 바겐세일로 교인들을 현혹 하고 있는것은 성령모독죄이며 사탄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설탕복음에 중독된 교인들은 그것이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고 제비새끼마냥 먹기에만 바빴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아예 되돌아 볼 영적 수준이 미치지 못하였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멸맘의 구렁텅이로 뻐짐이 분명하다. 섵탕복음에 중독된 저질목사와 교인들을 어떻게 해야 치료가 될까? 그것은 격리수용이다. 정신병자, 마약중독환자와 같이 강제 격리하여 치료하지 않으면 치료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교회는 역사적으로 설탕의 복음이 설쳤을때는 성장하였다. 그래서 설탕중독 현상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영적 성인병에 걸려 하나님의 개혁의 손길이 미치고 소수인 소금의 복음 주창자들로 하여금 다시 복음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개혁의 역사가 반복되었다. 자금도 한국교회는 세계선교사상 유례없는 성장과 세계 대형교회가 모조리 차지하고 있다는 영적 자만감에 교회지도자들이 멸망의 문을 스스로 들어서고 현상은 이미 여러 증후로 감지된바가 있다.
이제 하나님의 개혁의 불꽃이 타오르는듯하다. 설탕복음으로 지은 교회를 너무 의지하지 말자. 교회건물은 하나님 관심밖이다. 설탕복음에 중독된 목사를 의지하지 말자 복음장사를 하니 하나님의 진노만 있을뿐이다. 설탕복음 조직을 의지하지 말자 조직에서 권세가 나오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금복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를 회복하자. 순교자의 각오로 설탕복음 중독자의 방해와 협박에도 복음의 순수성을 회복하자. 마틴 루터의 심정으로 개혁을 부르짖자.
==========================================================================[re] 설탕 복음과 소금 복음 이근호 2005-02-01 19:02:38, 조회 : 220, 추천 : 11
교회가 성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단지 인간의 더러운 면이
그럴듯한 거룩의 모습으로 위선적으로 유통된 적은 있었습니다.
(한국 초대 교회들 처럼)
==========================================================================[re] 설탕 복음과 소금 복음 최종운 2005-02-02 08:08:50, 조회 : 195, 추천 : 11
목사님의 지적처럼 교회가 성장한적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표현한 성장의 의미는 기형적이고 왜곡된 성장을 의미합니다. 비만성장과 암세포가 극대로 성장한 결과 숙주의 죽음을 가져오는 성장말입니다.
==========================================================================[re]교회 분석은 이근호 2005-02-02 10:44:30, 조회 : 234, 추천 : 18
교회에 대한 분석은
교회를 감싸고 있는 시대 정신에서 부터 분석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즉
자본주의의 생리에서부터 교회 분석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자본주의란, 욕망의 연쇄적 폭발로 인해 욕망에 충실한 인간상들을 대량 생산하는 체제입니다.
따라서 과다 소비 욕망에 같이 춤추지 않는 자는 자본주의 사회 자체에서 축출입니다.
변화에 따라가지 않는 산 속 독거 노인 같은 사람들은 폐품처리 됩니다.
내놓을 욕망이 없는 자라면 그 어떤 조직에서도 초기 퇴출입니다.
설탕을 생산하든, 소금을 생산하든,
과잉 생산과 과잉 소비의 지속적으로 상호 결합되지 않는다면 같이 망해버리는 운명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떠안게 되었습니다.
쉬면 안된다는 겁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부지런히 움직이기를 요구받습니다.
교회 존립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일이라고 여겨지면 과도하게 덤벼듭니다.
그래서 나도 나도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교회'라는 이미지를 대외적 적으로 홍보하게 됩니다.
따라서 '소금같은 교회'가 기독교를 더욱더 망하게 만드는 촉진제가 됩니다.
방법은 하나,
내가 곧 움직이는 '그리스도 몸'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죽음편에 이미 서서, 살려고 하는 사람을 죄를 지적하고 세상을 떠나기를 촉구하는 겁니다.
건강보다, 죽음을 외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