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양의 의미] 2004-12-27
희생양의 의미-손성식 목사님의 글 이근호 2004-12-27 07:41:49, 조회 : 206, 추천 : 12
『신학과 철학의 굴레』
【희생양】
아담역사의 장(場)은 욕망 하는 장(場)입니다. 아담-욕망은 모방-욕망입니다. 자아욕망이 아니라 타자욕망입니다. 내 소유의 대한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소유에 대한 욕망입니다. 이런 욕망의 삼각관계에서 폭력의 유혈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즉, 미시적인 내적 폭력으로부터 거시적인 집단살해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런 맥락의 중심에서 작동하는 것이 "희생양 메커니즘"입니다.
아담역사를 들추어보면 상반된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언약적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비언약적 방식입니다. 언약적 방식은 하나님의 선택으로부터 비롯된 내용이고, 비언약적 방식은 사탄에 의해 조작된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역사를 통하여 전혀 이질적인 "희생양 메시지"가 전개되고 있음을 눈치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언약의 장(場)에 자리잡고 있는 "희생양 메시지"란 흠 없는 의인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구원 얻는 방식이라면, 사탄에 의해 조작된 "희생양 메시지"란 타자의 소유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생겨난 집단의 와해를 모면하기 위해서 한 사람을 집단살해 하는 방식입니다. 전자에는 십자가의 복음이 담겨있고, 후자에는 자기보존이라는 인류학적 과제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열어보면 "희생"이라는 방식으로 인간의 죄를 들추어내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는 반면에, 아담의 역사를 들추어보면 집단을 보존하기 위해서 발악하는 욕망의 자국들이 선명하게 찍혀 있습니다. 전자가 이 땅의 역사를 심판하려는 하늘의 움직임이라면 후자는 이 땅의 영원성을 확보하려는 사탄의 허위과장 광고입니다.
언약의 장(場)에서 유발되는 "희생양"은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특이한 사건으로부터 비롯되는 묵시적 현상이지만, 비언약적 장(場)에서 생성되는 "희생양"은 욕망의 선택이라는 보편적 사건으로 연결되는 역사적 현상입니다. 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종결되는 반면에 후자는 인류의 보편적 구원이라는 종교적 욕망으로 귀착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양 사건의 심층부에는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희생당하신 예수님의 피를 기반으로 해서 생성되는 하늘나라가 우발적으로 사건화 되고 있는 반면에, 수 없이 많은 이름 모를 아담들의 희생의 밑바탕에는 하나님의 뜻에 반발하면서 역사를 자신의 무대로 영원히 유지시키려는 조작된 사탄과 그 배후세력의 노림수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희생양 메시지"를 통해서 본 이 땅의 역사는 욕망하는 아담들의 독무대가 아니라 아담을 둘러싼 하늘의 세계와 그 대적자인 사탄의 싸움이 본격화되고 있는 장(場)입니다. 하늘의 세계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힘을 쏟고 있는 반면에 사탄은 아담의 욕망을 부채질하여 이 땅에 천국을 리모델링 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바탕 위에서 성도란 욕망의 포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들려진 종말론적 운명공동체의 일원입니다
##############################################################################################교회별 종교단체 등록방법-강남노회 서기 강세창 씨의 글 이근호 2004-12-28 21:52:10, 조회 : 312, 추천 : 11
교회별 종교단체 등록 방법
1. 등록번호등록증명서 교회는 비영리단체이기 때문에 수익사업은 할 수 없고 이 때문에 상가임대차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 활동만 하는 단체가 어느 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면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됩니다.
등록하는 방법은 아래와 같습니다.
1. 각 구청이나 군청 속은 면사무소을 찾으셔서 종교단체 등록을 하러 왔다고 하시면 어디로(지적과) 가라고 할 것입니다.
2. 담당과를 찾으셔서 필요한 서류가 무엇인지 문의하시면 자상하게 가르쳐주고 신고서 용지도 배포해 줍니다. (1)종교단체 등록신고서 (구청이나 군청이나 면사무소에서 배포) (2)종교단체의 결성을 증명할 수 있는 회의록 (예를 들면, 제직회록 제시) (3)임대계약서 (4)대표자 신분증
각 구청마다 요구하는 서식이 다를 수 있지만 요구하신대로 제출하면 등록번호등록증명서가 나옵니다. 이 때 교회 이름이 동일한 교회가 구청 관할에 먼저 등록을 필한다면 접수 되지 않습니다. 이점 유의하려야 합니다.
2. 고유번호증(종교단체의 실체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신고가 끝나면 하루 이틀 후 "등록번호등록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습니다. 일단 한 통을 발급받으신 다음 관할 세무서를 찾아 교유번호증을 발급받아야 합니다. 세무서를 찾아 가실 때 아래의 서류를 준비해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1)등록번등록증명서(구청이나 면사무서 발급)(2)법인 설립호가서(노회서기 발급)(3)가맹교단 증명서(노회서기 발급)(4)교회소속 증명서(노회서기 발급)(5)목사소속 증명서(노회서기 발급)(6)교회 직인 (사각도장 큰 것을 말함)(7)본인 신분증 및 본인도장 (8)임대계약서
바로 이 임대계약서에 확적일자 인을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모든 신고를 하고 고유 번호증을 소유하였다고해도 임대계약서에 확정일자 인을 받지 않았다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위의 서류를 들고 세무서를 찾으시면 "법인으로보는 단체의 신고서"를 줄 것입니다.이를 기록하고 교회의 직인을 찍어 세무서에 제출하면 발급 교부증을 줍니다. 물론 임대계약서에 확정일자 인도 세무서에서 찍어 줍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교부증을 들고 가시면 종교단체의 고유 번호가 나와 있습니다.
고유 번호증(수익사업을 하지 않는 비영리 법인 및 국가기관을 뜻함)
고유번호 : 503-82-62379
번호증이 나오면 국가에 종교 단체라는 존재를 신고한 것입니다. 국가에서 요구하는 모든 공문서는 이 고유번호로 증명합니다. (교회의 등록번호지요)
3. 무엇에 사용되는가
첫째 :상가임대차 보호를 받아 교회당 임대보증금 떼이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미 대출을 받은 다음 건물을 임대하셨다면 순위상 보호를 못받게 됩니다. (임대하시기 전에 등기부등본을 필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늦었더라도 일단 동록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둘째, 연말 세금 정산을 받으실 때 고유번호만 연보확인서에 기록하여 제출하시면 됩니다. 여러 장의 증명서가 필요없습니다.
셋째, 국가가 인정하는 종교단체란 기본적인 입지를 확보합니다.
넷째: 교회가 대지를 구입하거나 건축하고 허가받을 때 항상 제출서류로 사용합니다.
다섯째: 교회가 은행을 상대로 담보대출을 얻고자 하신다면 이 고유번호증 사본을 먼저 제출하라고 합니다.
==========================================================================[re] 복음적인 평 이근호 2004-12-28 22:10:34, 조회 : 226, 추천 : 14
첫째: 연말 정산은, 세무서 인터넷에 들어가면 비영리단체 공제에 대한 양식이 나와있습니다. 교회마다 그 양식을 프린트해 내어 그 양식이 요구하는대로 제울하시면 됩니다.
둘째: 예배당 임대는 개인 명의로 하면됩니다. 자칫 교회 명의로 하게 되면, 위임 목사들이 노회를 등에 엎고 퇴직금을 무리하게 강탈하거나 아니면 원로목사 명분을 달라해서 아무 것도 안하면서도 전의 봉급의 3분지 2를 정기적으로 탈취하는 명분을 그럴사해 보이는 법을 동원해서 무식한 교인들을 향해 완벽하게 사기칠 기회를 제공하는 바가 되니 주의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목사들이 모여 교회를 추상화시키는데 교인들이 말려 들어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들의 교인들을 밥으로 봅니다.
예배당 부동산 명의는 그 교회에 제일 많이 투자한 공로자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공평합니다.
세째 복음적인 면에서
교회는 국가의 덕을 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물론 덕을 주겠다면 마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국가의 실체는 이 영토에 같이 사는 이웃주민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웃 주민들이 마음이 하나되어 교회를 도와주겟다는데 싫어할 이유없습니다.)
교회는 있다가도 복음을 거부하면 곧장 사라져야 마땅한 단체로서 만족해야 합니다. 복음은 사라져도 교회 전통과 건물을 덜렁 남아있다면 그 단체는 도리어 사람들을 지옥으로 회유하여 강제로 집어넣는 단체가 될 뿐입니다. (애초부터 교회 유지할 생각은 아예 말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교회라는 것이 복음에 죽고 죽음에 사겠다고 다짐하고 나선 모임인데 국가가 이런 교회의 본질에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도리어 교인들로 하여금 복음보다는 사회에서 '교회'라는 좋은 이미지를 지닌 단체가 뿜어내는 영향력을 어떻게 활용해볼까 라는 불신앙적 발상에 의존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리고 교인들도 교회 헌금했으면 그만이지 그 헌금을 근거로 세금 공제에 눈독 들이는 모습도 교회를 마치 부활하신 주님이 운영하는 곳이 아니라 목사나 인간들이 운영하는 것이 간주하는 불신앙적 작태입니다. (하지만 이웃 주민들이 공제해 주겠다고 나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줄 아시고 꼬박꼬박 챙겨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교회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사람을 건집니다. 따라서 교회가 교회를 먼저 생각할 모든 여지를 교회부터 부정하는 자세를 보여야 마땅합니다.
참으로 주님으로 시작되어 복음을 외치는 교회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사회에서 교회라고 알아주나 안알아주니 신경쓰지 말고 다니엘서에 나오는 것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과 세상 멸망이나 외치시기 바랍니다.
괜히 교회가 법적으로 안정이 되면 좋아라하니 이는 목사들 뿐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영원히 밥그릇이 되니까....
##############################################################################################서경수 목사님의 설교 이근호 2004-12-30 08:34:55, 조회 : 197, 추천 : 17
Name 서경수
Subject 고린도후서 6:1-10절
‘은혜는 받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살 수 없어’라고 하면서 ‘다른 것도 있어야 살지’라고 주장하는 자는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는 성도에게 충족한 것이지 결코 다른 무엇이 첨가되어야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구원을 위해서는 영적인 은혜가 필요하고, 이 땅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육적인 은혜가 있어야 한다고.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되지 못하게 하는 발상이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택한 백성을 건지기 위한 계획은 완벽한 구원이지 그것 외에 다른 필요한 것이 따로 남아있는 것이 아님에도 사람들은 그 은혜로 족한 줄 모른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것이 되고, 그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이다.
바울은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살아간다. 그리고 주께서 맡기신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온 생애를 던진다. 아니 주께서 바울을 그런 방향으로 끌고 가신다. 그래서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조금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어려움들 속에서도 그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 그리고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놀라운 은혜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허락하시는 분이다(출33:19).
성도의 생애는 현재가 늘 은혜 받을 때이며, 구원의 날이다. 현재의 은혜를 감사할 줄 모르고 나중에 은혜 받기를 바란다거나 과거에 은혜 받은 것만 자랑한다면 그런 자는 은혜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이다. 다시 말하건대 성도를 향한 주님의 은혜는 지금 현재 임하고 있다. 그래서 늘 감사하고 찬양하며 살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은혜 받은 자들을 보면 초라하고 우습게 보인다. 속이는 자 같고(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허무맹랑하게 들리고), 무명한 자이고(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혼자 떠드는 자), 죽은 자 같고, 징계를 받는 자 같고, 가난한 자 같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고, 근심하는 자 같이 보인다. 그러나 실은 참된 진리를 말하는 자요, 산자요, 모든 것을 가진 자요, 기뻐하는 자이다.
어떻게 이렇게 정 반대로 볼 수 있는가? 사실을 왜곡해도 어찌 이런 정도로 왜곡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다.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하게 하신 탓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육안으로는 도무지 진리를 발견할 수 없고, 인간의 이성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성령이 찾아오셔서 눈을 열어주시고 귀를 열어주셔야 참 진리와 복음을 깨달을 수 있다.
대중들의 여론이 진리일 수 없고, 지식층의 안목이 참된 복음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의아한 일이 아니다. 이 땅의 모든 이들은 진리 앞에 다 소경이요 귀머거리이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모든 인간들에게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차단되고 말았다. 그러기에 그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영생의 길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쉽고 평탄한 길을 찾아 걷는다고 해서 그 끝에 영생이 있는 것이 아니다. 또 험난한 가시밭길을 헤치며 나아간다고 해서 그 종착지에 영원한 안식이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인간 스스로 어떠한 길을 선택해도 그들이 택한 길은 하나님과 무관한 멸망의 길이며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는 말씀을 기억하는가? 이 구절에는 두 가지의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첫째는 우리들의 어리석음과 그 결과 제멋대로 살아가는 삶을 지적하고 있고, 둘째는 이런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사 우리의 죄악을 자기 아들에게 담당시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담고 있는 것이다.
복음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옳은 길을 찾아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끝까지 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내 욕심에 따라 내 갈 길로 가는 우리들을 대신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 허물을 도말하시는 그 사랑.
과연 우리는 어디에 기대를 걸 것인가? 내 올바른 행위인가, 아니면 나의 허물을 대신 담당하신 그분의 행위인가?
##############################################################################################희망사항-순교자를 위하여 김재국 2004-12-30 11:01:24, 조회 : 145, 추천 : 11
새해를 앞 둔 2004년의 막바지에주제넘으나마 십자가마을을 향한 희망사항을 두서없이 적어봅니다.
십자가마을에서도 순교자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종교적 아집에 빠져 스스로 소외당해 죽는 것 말고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사람들에게 잡혀 죽는 진정한 순교자말입니다.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이 순교의 죽음이었듯이 말이지요.
웬지 십자가마을은 순교자의 냄새보다는은둔자의 향기가 서려있는 것 같습니다.세상은 은둔자를 핍박할 이유가 없지요.전혀 도전하지 않는 상대를 피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예수님은 은둔자가 아니고 세상문화에 대한 혁명의 소용돌이의 대장이셨습니다.혁명군 사령관을 세상은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사도들과 순교자들은 모두 혁명분자들이었습니다.세상에 엄청난 폭발력을 보여주었습니다.십자가마을은 세상문화를 뒤집을 혁명사령부입니까?제가보기에 세상은 전혀 십자가마을에 총알 한개 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세상문화와 세상권력에 의해 융단폭격을 맞고 순교한 성도들의 피의 기록입니다.그 폭격맞은 마을과 순교자의 반열에 포함되기를 기원합니다.
==========================================================================[re] 희망사항-순교자를 위하여 이근호 2004-12-30 11:26:07, 조회 : 172, 추천 : 21
"내가 내게 있는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것도 유익이 없느니라"(고린도전서 13:3)
자아를 발산하고 싶어 환장한 인간들은, 어찌 하든지 자신이 이 세상에 엄연히 존재함을 과시해 보려고 합니다.
이런 정신머리의 배후에는, '자신은 어쨌든 의미있는 존재이고 가치있고 보람있는 인간이다'라는 교만이 덩이줄기처럼 엉어리져 있습니다.
'나 자신은 이 세상에 있으나마나 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다'라는 의식은 없는 작자들이 곧 불신앙인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고, 그러기에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인간들은 그저 세상에서 자신을 알아주기만을 원하는 기회를 탐내는 욕망의 화신이 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악마의 활동을 제한적으로 허락하시는 걸까요?
이런 인간들을 포섭하여 한껏 지옥을 가득 채워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 지옥에는, 순교라는 미명하에 자기 자신의 명예에 평생을 헌신한 인물들이 가득차 있습니다. 안중근씨도 거기가 있을걸요. (죽기 전에 회개 안했으면)
그리고 혹시 압니까? 칼빈, 존 스타트, 주기철, 손양원, 한경직 등 등의 인물들이 지옥에서 자신의 불신앙에 후회하고 있을지...(죽기 전에 개인적으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며 전혀 하나님의 일에 보탬이 안되었으며, 오히려 방해자였으며, 순교를 시도할 가치조차 없는 인간임을 십자가 앞에서 파악되면 지옥에서 천국으로 빠질 수는 있겠지만...)
귀하의 지옥 발언을 아직도 허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존중합니다.
##############################################################################################신윤식 목사님의 설교 이근호 2004-12-30 19:59:23, 조회 : 239, 추천 : 12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한일서 4:11)
<설교>10절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 사랑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버리지 못하고 기어코 미련을 두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받아야 베푸는 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복을 받기 위해 열심히 자기 것을 내어 놓으려고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이면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는 아무도 할 말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반대인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미워하십니까?’라고 물으면 아마도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못해도 미워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굳게 들 것입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면 교회도 나오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께 욕도 해야 하는데 나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평소에는 하지 않던 원망을 드러낸 것입니다. 없던 원망이 생긴 것이 아니라 자신만을 사랑하는 인간의 내면에 이미 신에 대해 항거하고 미워하는 본성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하늘의 뜻’으로 돌리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불가항력적인 부분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전개되기를 원하는 욕망으로 신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불리하고, 고통이 되는 쪽으로 전개되었을 때 신을 찾으며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자신에게 벌어진 고통의 상황으로 인해 ‘신이 있다면 이럴 수가 없는거야’라고 외치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에 대한 인간의 단단한 오해인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이 생각하는 신은 자신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해주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좋지 않은 상황에서는 원망과 불평이 나오는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내면에 있던 본성이 그들이 원하지 않은 환경과 형편으로 인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미워하고 원망할 어떤 상황과 여건이 주어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거부한 우리들에게 사랑을 나타내신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사랑은 신자에게는 절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나타내신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서는 이웃 사랑 역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은 아들을 화목제로 보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본문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11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신자에게 서로 사랑하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안해도 되지만 사랑을 행하면 더욱 신자답게 보여지는 덕목의 문제도 아닙니다. 지금껏 사도가 말한 대로 사랑이 없으면 아예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없다는 것이지요.복음은 단지 입술에 걸쳐져 있는 장식용이 아닙니다. 맞는 말을 한다고 해서 그가 복음을 믿는 자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의 모습이 삶을 통해 보여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일하심은 분명 여러분의 삶에서 그 활동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님의 일하심이 행함으로 나타나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의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를 덮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을 전하고 증거하는 자로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을 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우리가 여전히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보게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서로 사랑하지 않는 우리 자신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전혀 변함이 없이 우리를 감싸고 계십니다. 이런 놀라운 사랑에 우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완전히 눌려 버린 그런 신자에게서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보여질 것입니다. 사실 날 위해 존재하는 인간이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건방진 말입니까? 예수님의 용서를 증거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씀을 드리긴 하였지만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용서를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용서를 증거하기는커녕 나조차도 예수님의 용서에 감사하며 살아가지를 못하는데 그런 우리가 예수님의 용서를 증거한다고요? 사실 이 모든 것은 빛 좋은 개살구처럼 한순간 듣기 좋은 말로 끝나버릴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어떻게 하란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가 의지할 것은 예수님 밖에 없음을 내 속 깊이 알고 또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책망하시고 고치시면서 예수님의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사랑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지독히도 사랑이 없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내놓을 수도 자랑할 수도 없는 쓰레기였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한 악한 나를 감싸고 있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앎이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렇게 만들고자 하십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음을 자각하며 하나님의 사랑만 바라보는 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이 보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신자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가 보여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똑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 만납니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서는 잘난 자와 못난 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멸망에서 헤어날 수 없는 존재였을 뿐입니다. 성도는 이러한 관계로 만납니다. 예수님의 용서로 기뻐하는 사람으로 만나는 것,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관계에서 사랑이 나타난다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사랑하겠다고 하기 이전에 자신이 누구인가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만나게 하신 형제는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어떤 관계에서 만나는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냥 사람들의 만남이나 모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의 모임인 것입니다.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이 마땅한 것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이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도록 하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셔서 책망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기를 힘써야 합니다.
##############################################################################################나의 십자가 김대식 (Homepage) 2004-12-31 08:28:58, 조회 : 288, 추천 : 14
군대에 있을 때에 받아보던 것을 우연히 발견하여 올려봅니다 여러분들이 글을 보시고 평을 한번 해주시길 바랍니다. 93년도 글이라 저자의 생각이 지금도 그러한지는 모릅니다만 이런 류의 글을 평가해 보는 것도 공부가 되지 않나 싶어서 한번 올려봅니다.
나의 십자가
1993년 9월 1일 양무리서원에서 발행한 비매품 격월간지 양무리초장 제 7호에서 발췌
나의 십자가 - 이중수 목사 [양무리서원 고문. 프랑스 파리 모리아교회 담임목사]
(막 8:27-38)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여짜와 가로되 침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성경에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반면에 마음을 퍽 불편하게 해주는 말씀들도 적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양편 말씀들이 독같은 성경책에 다같이 포함됐기 때문에 한편으로 치우치면 균형을 잃어 극단이 되거나 성경의 가르침을 온전하게 제시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를들어, 다음 말씀들은 우리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익숙한 본문들입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이 같은 위안의 말씀들에 근거해서 복음을 전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됩니다.1. 예수님이 나의 죄를 지고 십자가로 가셨다.2. 이 사실을 믿고 회개하면 죄의 용서와 함께 구원을 받는다.3. 구원은 나의 행위로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받는 선물이다.
그러나, 복음을 이렇게만 소개하면 기독교가 퍽 안일한 종교로 오해되기 쉽습니다. 십자가만 있으면 곧 구원이라는 식의 공식화된 복음은 결코 복음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그저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얻고 의롭게 된다는 단순 논리의 기독교가 십자가의 순종이 결여된 수 많은 명칭만의 교인들을 양산시키는 오늘의 현실에 쐐기를 박는 충격적인 말씀을 복음의 한 핵심으로 적시 합니다. "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 기독교 신자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십자가를 스스로 지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믿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자는 신자가 아니며, 십자가의 길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쪽 복음이며 절름발이 교리입니다. 예수님은 한 부자 청년이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막 10:17-21). 그런데 그 때 예수께서 가시던 길이 어디였습니까? 그 때로 말하면 두 번째 수난 예고가 있은 후였고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십자가의 길에 오르신 후였습니다.
Ⅰ. 메시야의 가는 길예수님은 지금까지의 사역에서 자신이 가는 궁극적인 목적지에 대해서 직접적인 언급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사역 초기에 금식에 관한 질문을 받고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막 2:20) 고 힌트만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이제껏 가리워져 있었던 셈이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人子)라고 부르고 메시야가 오셔서 행할 것으로 예고됐던 일들을 하셨습니다. 즉, 인자는 귀신을 쫓아내며 참된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으며, 모든 질병을 고치시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바다를 잔잔케 하시며, 죽음까지 정복하시는 분이심을 증시하셨습니다(1:34;2:5,28;4:39;5:41,42;8:25).
이러한 메시야의 뚜렷한 사역들을 먼저 행하신 후에 예수님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시고 이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제자들에게 직접 물으셨습니다(8:27-29),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하자 예수님은 메시야가 가는 궁극적인 길이 십자가임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셨습니다(8:31). 이 가르침의 내용은 인자가 배척을 받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한 후 사흘만에 부활하고 다시 재림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인자가 수난의 십자가 길을 거쳐서 영광을 받으시며, 그 수난의 십자가 길로 예수님이 또한 제자들을 인도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길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으로서 메시야가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길이었습니다(사53:4,5).
Ⅱ. 제자들이 가야 할 길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기겁을 하며 한사코 말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를 꾸짖으셨습니다. 이 문맥에서 주신 말씀이 제자직에 대한 예수님의 충격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실을 믿는 것만으로 구원이 다 끝난 것이 결코 아님을 34절의 말씀이 증명해 줍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했지만 자기 욕심을 버린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배척받는 메시야가 싫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한 자였습니다. 그는 자기를 부인한 자가 아니었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막아섰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길에 동반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길이십니다. 그 길은 진리와 순종과 고난의 길입니다. 그 길은 좁은 길이며 찾는 이가 적은 길입니다(마 7:14). 그러나 그 길은 생명의 길이며 하나님께 속한 길입니다. 이 길을 선택하고 따르는 것이 곧 자기 부정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십자가의 이미지는 사형 선고를 받은 자들이 자기가 못 박힐 십자 기둥을 지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육신에 속한 나의 욕망들을 처단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왕권에 자신을 넘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신자라면 모두 그리스도의종이며 그리스도의 뜻에 복종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를 지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을 가리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도 순종의 사건이었습니다(빌 2:8). 이같은 순종의 삶은 고난을 수반하지만 구원의 삶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두 가지 실제적인 예시로써 설명하셨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당시 로마 제국에서는 씨저 황제가 주(主)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주(主)라고 주장하면 어떻게 됩니까? 법정의 문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로마의 박해 밑에 있던 마가복음서의 독자들에게는 씨저가 아닌 그리스도가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곧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법정에서 풀려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며, 주님이 아닌 세상을 따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베드로처럼 그리스도를 대신 부인케 되고, 그리스도를 주로서 인정하고 따르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구원이란 단순히 입으로만 예수는 주님이라고 시인한다고 해서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롬 10:9).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어서 의롭게 되는 것과 십자가를 지는 것은 동일한 구원의 내용들입니다. 칭의가 없는 구원도 없지만 십자가를 지는 삶이 없는 구원도 없습니다(35절). 예수님은 두 번째 예시에서 이 점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36-37절을 보십시오. 무엇을 얻고, 잃으며, 주고, 바꾼다는 것은 상업적인 용례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36절).
사람이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지 않는 것은 온 세상을 손에 넣어도 결코 아무런 이익을 남기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인정하지 않는 길이므로 멸망으로 이르는 넓은 문입니다. 예수님은 이같은 삶을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 연결 시키고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삶이 재림주로서의 오실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38절).
Ⅲ. 싸구려 기독교오늘날 대중을 상대로 한 복음의 전형적인 특징은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이므로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기에 내가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근거는 물론 인간의 행위가 아니며 율법의 준수가 결코 구원의 방편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내 죄를 다 지시고 대신 죽어 주셨다는 것을 믿고 그저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이 구원은 아닙니다. 현대 사회는 안락과 편리 위주로 삽니다. 그것이 사실상 인간 문명의 추구이며 대중의 인생 목표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삶의 방식을 "사람의 일" 또는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와 일치시켰습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십자가를 지는 고난이나 순종은 불필요하며,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의 생각은 자기를 부인하기보다 긍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십자가는 대속의 방편으로써 내가 믿는 것일 뿐 아니라 나도 스스로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는 곧 자기 부정이며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제자직의 본질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방식대로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유일한 구원의 방법임에도, 우리의 소원은 십자가 없는 부활과, 십자가 없는 승천과, 십자가 없는 재림의 영광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 나야"(31절) 했듯이 "우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행14:22)입니다. 이 방법이 싫으면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구원이란 결국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의 삶의 방식을 따라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십자가의 길을 막았을 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호령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34절) 엄숙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이 '무리와 제자들' 속에는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훈에서 특별히 제외 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라 가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반드시 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누가 과연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야)와 '주님'으로 믿고서 자기를 그분의 다스림에 내맡긴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의 구원자라거나 십자가의 대속자라는 정도로만 믿으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함께 믿어야만 그분의 다스림에 복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主)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는 것이 복음이며(고후4:5) 그리스도의 발 아래 모든 무릎을 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의 완성입니다(빌 2:10,11).
나의 십자가를 지는 일은 자아의 죽음과 직결된 것입니다. 그것은 값없이 편안하게 자동적으로 이루워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피땀이 흐르는 영적 싸움이며(엡 6:12, 빌 1:30) 자신의 달려갈 길을 달려가는 인내와 믿음의 경주이며(딤후 4:7; 히12:1) 날마다 자기 몸을 쳐서 복종케 하는 극기의 단련입니다(고전 9:27). 그런데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삶이 애처럽게 보이지는 않습니까? 십자가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눌려 넘어 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주인이 가신 길을 바라보는 자들은 넘어진 채로 계속 누워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격려가 있기 때문입니다.(히 12:12,13). 십자가를 지는 삶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귀한 특전이며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은혜의 길입니다. 내 어깨에 나의 십자가가 지워져 있을 때 나의 일그러진 옛 모습은 점차 퇴색되고 그리스도의 자녀로서의 새 모습이 드러납니다. 십자가의 삶은 가장 큰 승리와 가장 큰 이득을 향한 새 생명의 길입니다.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익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심판날에 영벌에 들어가는 것은 무한대의 손실입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먹고 사는 것이 인생살이라면 '얻고', '잃고', '이익'을 내며 '주고' '바꾸는' 상행위에 대한 예수님의 예시들은 (36,37절) 다시 한번 우리 각자의 삶을 되돌아 보게 합니다. 나는 영생이라는 절대치의 이윤을 내는 가장 가치있는 일에 자신을 던지고 사는 자입니까? 내 몸에는 날마다 지고가는 십자가의 흔적이 얼마나 뚜렷합니까? 나의 십자가를 지는 고난과 순종의 흔적이 없다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관련된 사이트는 한무리 교회 http://www.hanmoory.or.kr/ 메뉴 말씀의 샘 안에 음성듣기에 몇편의 강의도 있습니다.
==========================================================================[re] 나의 십자가 이근호 2004-12-31 12:57:51, 조회 : 331, 추천 : 22
세상의 모든 책의 저자는 인간이지만,
성경의 저자는 십자가 지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세상 책을 읽고 해석하는 식으로 십자가를 이해하면 기껏 자신의 죄성을 되받아낼 뿐입니다.
예를 들면,
교회 부흥을 염두에 둔 인간이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하면 기껏 남는 것은 어떤 절차를 많이 밟더라도 결국 돌아오는 것은 '그러니까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라는 쪽으로 결론내립니다.
이웃 사랑에 관심을 두고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하면 기껏 마지막에 돌아오는 것은 "그러니까 이웃 사랑은 참 좋은 일이요 마땅한 할 도리입니다"라는 식으로 귀착됩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십자가 없이는 나의 구원이 없기에 우리가 성경을 통해 십자가도 알고 구원의 방식을 알아챕시다" 라는 식으로 나간다면 결국 돌아오는 것은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십자가를 알았고 주님의 뜻을 알았으니 구원은 일단 챙겼습니다"라는 식으로 귀결됩니다.
위의 세 가지 성경 관점은,
모두다 참으로 살아계신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전혀 세우지 않고 있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이 평소에 바라고 원하는 바를 성경 속에서 정보를 채택해서 장바구니에 담는 형식으로 성경을 이용물로 삼는 겁니다. 할인마트에 가서 원하는 물건 구입하듯이 성경을 일반 종교의 경전이나 백과사전 대하듯이 하는 겁니다. 모든 게 자신을 살리겠다는 의욕에 넘쳐있습니다.
이처럼 육은 가만있는 성질이 아니라 육에서 영으로 자아를 구원하려는 열망으로 가득찬 구원을 향한 활화산입니다.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나 사두개인들이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나머지 모든 인간들은 그들의 후배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의 주님의 뜻은, 인간이 도저히 못하는 그 경계선 밖의 원칙을 경계선 안에 갇혀 있는 인간에게 통보하는 양식입니다.
즉 십자가 질 수 있기에 '자기 십자가 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또한, 거듭난 자에게는 '자기 십자가 질 수 있는 자질이나 능력이 발생되었으니 앞으로는 알아서 스스로 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왜 그런가 하면 '십자가' 자체가 지닌 능력이 이제는 무효화되는 식으로 인간에게 닿게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본격적으로 이 사건에 준해서 인간과 세계를 절대적으로 판단해 버리겠다는 선언을 뜻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그 당시에 가담한 군중이나 인물들만 죄인으로 가담된 사태가 아니라 아담 안에 속한 모든 인류가 동일한 입장에서 가담한 사건으로 규정하겠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하나님은 타협이나 흥정이나 거래를 터겠다는 식, 즉 마치 하청업체에 부품 제조를 위탁하는 식으로 자기 백성과 관계하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고 그 대신 동남아 해일처럼 제대로 싹쓸이 할 수 있게 되어서 비로소 십자가 안에 담긴 하나님의 진심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게 되어서 속이 시원하다는 말씀입니다.
즉 '자기 십자가 지고 주를 따라가는' 인간은 인간 세계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기에, 그 불가능한 일을 가지고 십자가 사건을 앞당겨 통보해 주고 있는 겁니다.
이 중수씨는, 설교에서 큰 착오를 일으키기를,
'악마의 일=악한 사람의 일'이라고 보고 있는데,
주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라 '악마의 일=사람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모든 일=악마의 일'입니다. 인간의 일 가운데 악마의 일이 아닌 일이 없습니다.
본 설교를 보니, 이발소에 들어가서 머리 깍히지도 않은채 곧장 뒤 돌아와 놓고서는 "어머니 이발소에 다녀왔습니다. 이발소는 이렇게 생긴 것을 보고 왔습니다"라고 거짓말하고서는 홀짝 자기 방으로 뛰어드는 말썽꾸러기를 다시 대하는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