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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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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수련회를 대비한 공부 - 사회론의 기초 2] 2004-12-15묻고답하기-

C. 에밀 뒤르께임
뒤르께임에 있어서 사회란 본질적으로 도덕적 또는 규범적 현상이며, 이들 현상은 가치와 규칙들을 강제해주는 바 부과적이거나 또는 외재적인 제도를 통해서 개인의 행동을 규제해 간다. 다시 말해서 도덕체계로서의 사회는 무엇보다도 개인들이 아무리 자발적으로 그러한다 하더라도, 언어와 법률과 자기 사회의 관습들에 따라서 수행해 가지 않으면 안되는 의무들로 표명된다. 1789년의 혁명을 통해 프랑스 내에 촉진되었던 혼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격하였던 무정부주의적이며 무원칙적인 '개인주의'에 대해 그는 적대적 입장을 취한다. 개인이 준수해야 되는 모든 것들은 그가 창조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또한 그가 순응하여야만 하고, 순응하지 못할 때에는 사회적 비난과 처벌이라는 결과를 맞이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뒤르께임에 의하면 인간 행동의 유형들을 정리하고, 어떻게 하여 일정한 행동 유형으로부터의 일탈이 빚어지는지, 행동 유형을 재확립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정방식이 도모되어야 할 것인지 등을 추구하는 것이 사회과학자의 과제라고 보았다. 뒤르께임은 전체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의 인성론을 그의 사회론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하면 잘못을 저지르기가 쉽다. 그러나 뒤르께임이 두드러지게 인간적인 모든 것들, - 언어, 도덕, 종교 및 경제 활동 따위-은 사회로부터 말미암아 또 사회에 의존해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홉스가 개인주의적 요청에 의거하고 있다고 하여 그에게는 사회론이 없었다고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뒤르께임에게 인간론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에 있어서 뒤르께임은 현대 사회 내의 개인의 위치에 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간의 양극화는 그의 연구에 있어 거듭거듭 등장하는 주체이다. 그것은 바로 사회 질서와 인간의 자기성취에 대한 그의 관심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개인을 현대 국가으 집단성 속으로 흡수하는 것에 대해서는 완강히 거부하다. 그것은 봉건제의 붕괴 및 산업생활의 발전을 통해 이룩되어 온 인간 체험의 독립성과 다양성을 손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뒤르께임은 진정한 개인주의- 개인들 간의 차이와 인격적 자율성이 만개하는- 결국 노동조합주의자들이 보는 비혁명적 사회주의를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회주의에서는 개인들이 경제적 또는 직업상의 집단을 형성함으로써 국가로부터 보호받게 되며, 또한 개인들은 국가의 옹호 하에 있는 한 시민으로서 지니게 되는 바 저항의 권리를 통해 짐단 생활이 갖는 강압적 영향력으로부터 방어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현대생활의 두드러진 특성을 이루고 있는 것- 자율성과 상호 의존성-이 현실적임과 동시에 인간적으로 만족스러운 하나의 이상 속으로 통합될 수가 있다. 어느 정도 역설적이게도 이 같은 규범적 개인주의는 단호히 개인주의를 반대하는 방법론에 입각해 있다. 사회현상들에 설명은 여하한 것이든간에 개인의 심리 안에서 찾아질 수가 없다. 이는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인간적 특성들을 총칭하는 것으로서의 홉스적 의미에서건, 아니면 인간에게 보편적인 일련의 욕구와 능력이 있으며 이것들을 기반으로 하여 인간의 사회적 성경이 그때그때의 사회적 체험을 따라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가게 된다고 보는 스미스적 의미에서건간에 인간에게는 개별적 성격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뒤르께임은 마르크스의 많은 생각들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바 인간의 천부적인 잠재태라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인간이란 미분화되어 있으며 순응적이고 무규정적인 실체로서 사회의 세력들이 이를 규정시키고 또 변형시켜 간다. 아마도 뒤르께임의 인성론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한 최상의 방법은 그것을 지각과 반성과 본능들로 이룩된 다발(bundle)이라고 보는 홉스주의의 견해를 따르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중요한 두 가지 점에서 홉스주의의 견해로부터 수정이 도모되고 있다. 첫째, 개인은 독자적으로는 이성을 지니지 못한다. 둘째, 인간은 불가피하고도 필연적으로 자기보존 및 영광 따위와 같은 특정한 목표들을 지향해 가지 않을 수 없는 어떤 고정된 구조의 욕구나 욕망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개개인 안에는 이성이나 본능에 의거해서 자신의 욕구의 범위와 강조를 제한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홉스가 생각하고 있었던 인간본성의 보편적 성향이란 사실상 과도적이며 편향적인 것이다. 홉스는 말하기를, 모든 존재는 운동하는 물질이다. 따라서 욕망들이 인간의 육체를 계속 운동하게 하고 또 그렇게 하여 죽음을 회피하고자 하는 욕구와 연계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각가의 정념(passion)도 분석하여 보면 이기주의적 욕망이나 또는 수비적 자세를 취하게 만드는 혐오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는 것이다. 즉 '획득하고자 하는 욕망'과 '대상으로부터 상해를 받는다는 생각의 혐오감' 등이다. 전자는 인간으로 하여금 사회를 지향하게 하고, 후자는 오히려 사회로부터 이탈하게 한다. 어느 쪽이든 이기주의적 태도이다. 또한 비이기적인 모든 동기들은 우리들 자신의 이익을 신장하기 위한 간접적 방법이다. 도덕적으로 된다는 것은 타산적으로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인간은 그들이 상대방으로부터 친절을 되돌려 받을 수 있을 경우에만 서로 친절을 베푼다. 인간의 삶은 자기 욕구 충족을 위한 끊임없는 투자이다. 이 투쟁의 과정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인간은 이성을 부여받았으며, 그 이성에 의하여 경험을 통해서 만족을 얻거나 또는 실망을 회피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 방법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 여기에서 귀납법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식활동도 인간 행동과 마찬가지로 물리적 용어로 모두 설명될 수 있다. 인식활동은 관념 또는 '개념'이라는 형태로 마음 속에 보본되어 있는 감각적 지각의 생리학적 운동의 결과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지각작용의 직후에는 선명하지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점점 희미해져서 아무 것도 남지 않고 소멸된다. 의식이라는 것은 육체적 운동이 마음 속에 '나타난 것'이며. 상상력은 감각을 쇠퇴 또는 소멸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기억력이라는 것은 소멸되어 가는 감각적인 이미지를 추종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모든 사실들을 종합하면, 인간의 사고는 이와 같은 기본적으로 생리학적인 과정에 대해서 단지 낱말들을 추가하는 과정일 뿐이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귀납적 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서로 연결된 동일한 사건들에 대한 빈번한 지각을 통해서 소멸되어 가는 이미지를 강화시킴으로써 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들이 더 빈번하게 지각하는 것에 대해서 더 많은 주의를 하기 때문이다. 욕구는 인간 행동의 목표를 제공하고, 이성은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을 암시한다. 홉스는 개인의 목표들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을 권력이라 하였으며, 그것은 '미래의 어떤 명백한 선을 획득할 수 있는 현재의 수단'이라고 하였다.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권력 추구 욕구의 표현 과정이며, 그것은 죽음에 이르러 비로소 중단된다. 그러나 그 권력은 투쟁 없이는 획득될 수 없다. 첫째로, 사람들은 희소한 자원을 얻기 위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둘째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방어하고 그들이 축적하여 둔 권력을 다른 사람들이 탈취하지 못하도록 예방하게 된다. 셋째로, 자원이 희소하지 않을 경우 또는 그들의 소유물에 있어서 걱정이 없는 경우에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월한 권력을 갖는 데서 나타나는 우월감을 추구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싸움의 원인'은 사람들을 서로 대립하게 하고, 외부의 통제가 없는 경우에는 그들을 서로 지속적인 '전쟁상태'에 빠져들게 한다. 그렇지 때문에 홉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반대로 그 본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이란 전체적으로 사회생활에는 적합지 않다고 주장한다. 자연상태(사회제도나 정치제도가 없는 상태) 하에서 인간은 누구나 물리적으로 거의 평등하기 때문에, 한 개인이 살아 있다는 것은 끊임없는 전쟁의 결과임이 분명하며, 고독하고, 가난하다, 불결하고, 잔인하고, 짧은 삶일 뿐이라고 홉스는 주장한다. 모두가 궁극적으로 패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뒤르께임은 이러한 홉스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어떤 사회에서는 그러한 성향들 중의 일부를 전혀 찾아 볼 수 없으며, 그러한 성향들 중에 그 어느 것도 구체적으로 사회적 조건을 규정해 줄 수 있을 만큼 충분하게 보편화되어 있고 또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고 보았다. 뒤르께임은 인간의 본성을 실제의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현실적 사람들의 행동으로부터 거의 전반적으로 추상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방법론상으로 볼 때, 뒤르께임에 있어서 '개인'이란 잉여의 범주이다. 그가 말하는 잉여의 범주란 사회를 통해 인간의 삶에 제공되는 일체의 것을 제외하고 남는 것을 의미한다. 이같은 잉여는 미분화되어 있는 기체(基體)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집단이 어떻게 하여 이같이 유연한 원료를 조종하고 또 주조하며, 또한 어떻게 하여 추상적인 개인을 자기 집단의 전형적인 고유의 특성을 지닌, 한 집단의 성원으로 전환시켜 줄 수가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다. 선택하고 추리하는 능력을 포함하여 우리가 통상적으로 인성의 보편적 특성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사실상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환경적 상황의 산물, 즉 어떤 부류의 사회집단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의 결과적 산물이다. 뒤르께임은, 인간의 마음 안에는 선천적인 범주(공간과 시간이라는 구조적 틀 안에서 우리의 지각들을 배열시키며 또 그것들을 상호간의 인과적인 지속으로 연결시켜 줄 수 있는 능력)가 있어서 이를 통해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는 칸트의 사상을 받아들여, 이러한 능력들이 사회의 작용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이해함으로써 위에서 말한 바의 생각을 인간의 사고과정에다 적용시킨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세계를 일정한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은 바로 사회이다. 예컨대 사람이 사물들을 분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출발하여 사물들을 서로 다른 부류나 또는 특성의 것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이 씨족이라든지 또는 여타의 집단들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사물들 일반을 분류해 낼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뒤르께임은 씨족이 지닌 영토상의 성격이 인간이 지니는 공간개념의 기반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북아메리카에는 공간을 거대한 원의 형태로 지각하고 있는 집단들이 있게 된 까닭을 설명해 준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형을 이루고 있는 캠프 내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믿는 것이다.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이 같은-개인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전도된 견해는 뒤르께임의 이론들에 있어 매우 전형적인 것이다. 인간이 관찰되는 사태들을 위해서는 숨겨져 있는 원인들이 있어야 한다고 추론하게 됨으로써 종교적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종교적 체험이 원인과 결과라는 하는 그런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달리 말해서, 우리가 비도덕적인 것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것을 비난하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가 비도덕적인 것으로 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그는 인간 존재가 지닌 관찰 가능한 성질이 사회조직을 설명해 주거나 또는 사회조직의 기원을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 생활이란 이처럼 외관상으로는 개별적인 속성들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의 원인임과 동시에 '목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이같이 전도된 견해의 대표적 패러다임은 사회적 현실이 언어에 의거하여 의사소통해 갈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선행하며, 각 개인들은 상징들에다 의미를 부여해 주는 사회적 규칙을 학습함으로써 의사소통의 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는 견해이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뒤르께임은 일체의 사회적 규칙들이 갖는 형식과 내용은 사회생활 일반의 요건 및 그러한 사회생활 일반의 요건을 자체의 규칙으로 삼고 있는 각 사회사회들의 또다른 독자적 요건들 등을 반영한다는 이론을 구축한다. 사람들이 대상을 분류하기 위해서 활용하는 용어들이 사람들 자신의 집단 내에서 스스로를 분류하는 방식으로부터 기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반적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사회의 전체적 통일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를 반영해 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도덕적 선택이라는 영역에 있어서, 개인이 도덕적 기준을 마련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도덕적 행위를 전개시키며, 그리하여 자신의 사회적 상황 안으로 들어가고, 자신의 사회적 상황을 유지하며 비판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가치라든가 도덕적 성실성이란 사회적 기원을 가질 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능까지도 지니고 있는 집단적인 세력을 자신에 의하여 표명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가치 및 도덕적 성실은 개인이 그 속에 위치해 있는 바 현행의 사회집단을 유지해 가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칸트의 철학적 관념론을 사회학적으로 해석한 것이다.뒤르께임의 '아노미anomie' 개념, 즉 사회적 규제가 없는 인간의 생활상태에 대한 설명이 사회화되지 않는 인간본성이란 무형적이며, 비합리적이고, 그리고 인간 이하의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그의 견해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아미노는 사회이론에서 뒤르께임이 도모한 가장 두드러진 개념상의 쇄신이다. 그는 사회질서를 분석함에 있어서 사회생활의 도덕적 힘이 분산되면 개인들은 완전히 어떻게 할 바를 모르게 되어, 만족스러운 삶을 위한 어떠한 목표로 또한 어떠한 방법도 알지를 못 한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아노미는 종교와 통치와 도덕이 각기의 효율성을 잃어버리고 (홉스의 자연상태와 같은 어떤 것), 아무런 삶의 목적도, 따라서 여하한 지속적 성취도 욕구해 가지 못하는 좌절한 개인들의 심리적 상태, 말하지만 마르크스가 언급하고 있는 소외의 상태와 비슷한 결과를 가져오는 바의 사회상태이다. 사람들이 한 집단에의, 소속감을 잃어버리고 그 집단이 자신들의 삶에 부여해 주는 형식과 절연하게 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의 정체감(正體感)을 지니지를 못하고 그들의 위치를 망각해버리며, 따라서 의미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어떤 실질적인 기대를 가짉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현대의 산업도시들이 갖고 있는 바 무질서와 불행한 상태로 표현되고 있는 아노미상태이다. 현대적 산업사회로의 이행기간 동안에 빚어진 사회적 해체의 심리적 결과들에 대한 뒤르께임의 설명은 인간의 필요와 욕구에는 여하한 자연적 한계도 없다고 하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본능에 지배되고 있는 동물들은 비교적 고정되고 결정되어 있는 욕구를 지니고 있어서, 정상적으로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와 같은 내재적 규제가 없기 때문에 사회적 집단의 통제가 없으면 인간의 삶은 '무한한 열망이라는 질환'을 결과하는 식을 줄 모르는 욕구의 삶으로 된다.그 결과는 지루함과 환멸감과 공허감이다. 다시 홉스와 비교해 보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는 용의하다. 아노미상태의 인간은 홉스가 보편적 인간성을 표상해 주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쾌락주의적 경쟁적인 개인과 유사하다.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는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자신들의 욕구를 관리하여 그것을 일정한 한계 안으로 국한시킬 수 있는 능력은 지니고 있지 못한 산업사회 도시인들의 생활현상에서 우리는 홉스가 말하는 자연상태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갖게 된다. 이점에 있어서 홉스와 뒤르께임 간의 결정적 차이는 현대인의 생활에서 볼 수 있는 합리성의 잔재란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라 유지작용을 해주는 사회적 세력이 지닌 잉여적 효율성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보고 있는 점이다. 뒤르께임은 사회를 재조직하여 인간 개개인을 재구성하고 나아가 아노미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렇게 재구성된 개인은 순전히 외재적이며 자기이익 중심의 사회관계들을 지닌 홉스적 인간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는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인간은 그의 사고와 느낌과 행위 등의 전반에 걸쳐 상대적인 자율성과 개별성을 사회적 현실로부터 분리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본성이라는 하는 무질서한 감각론적 원료가 일단 주어지게 되면 사회만이 인간의 삶에다 형식과 의미를 부여해 주는 원리를 마련해 줄 수가 있다. 사회란 도덕적 질서이며, 물질적 현실성보다는 오히려 관념적 현실성을 지닌 일련의 규범적 요건들로서, 이것들은 개인의 의식에 표상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는 개인의 의식에 대해 외재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념적 실재성이 어떻게 하여 순전히 개별적인 의식의 요소들 가운데서 확인될 수 있으며, 그리고 무엇이 그러한 관념적 실재성에다 그것이 자체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독립성과 영향력을 부여해 주는가?이것들은 바로 뒤르께임이 자신의 전생애를 통해 씨름하였던 문제들이다. 만약 인간이 자기 자신의 원천으로부터 도덕적 질서를 창출해낼 수가 없고, 그리고 그러한 몫을 수행할 수 있는 신이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여기서 뒤르께임은 너무나도 안이하게 도덕의 기원과 권위를 그가 '사회'라고 명명하고 있는 매우 애매모호한 어떤 것에로 관련시키게 되는 결과를 불러온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회적 실재에 대한 자신의 해명을 위하여 상호 연결되어 있는 두 개념을 제시한다. 집단의식과 집단표상이 바로 그것이다. 뒤르께임이 말하는 집단의식의 개념은 그가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적합한 기반을 개인들의 자기이익을 위한 상호작용에서 찾고 있는 일체의 사회관들을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배경으로 하여 관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뒤르께임은 영속적 사회관계들이 인간상호간의 이해관계에 바탕을 둘 수 있다고 하는 사상을 가장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그리고 최대의 확신을 가지고 비판한다. 이점에 있어서 그는 아담 스미스의 입장을 넘어선다. 스미스는 아직 어떤 기본적인 정의의 개념들이 주어지기만 하면 사회란 큰 규모에 있어서 돈을 목적으로 하는 교환을 통해 결합을 유지해 갈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르께임에 있어서는 "이해관계가 유일한 주도적 힘인 곳에서는 각 개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전쟁상태에 놓이게 된다. 여하한 것도 그런 자아를 수정해 줄 수가 없으며, 또한 이와 같은 영원한 대립에 있어서 그 어떤 휴전도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해관계에 근거해 있는 협력이란 그것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이해관계만큼이나 불안정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해관계보다 덜 지속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은 그것이 나를 너에게로 통합시켜 주나, 내일이면 그것이 나를 너의 적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이 불안정으로 사회는 구성될 수 없다. 단순사회들의 결속력은 그것이 지닌 부분들의 상호 유사성 및 상호간의 교환 가능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복잡사회에서 전개되는 유기적 연대는 부분들 간의 유사성으로부터 아니라 오히려 상호 의존성으로부터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결속이 근거해 있는 것으로서의 개개인들 간의 차이들은 상호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보완적인 것이다. 전문화되어 있는 각각의 역할은 그것의 수해을 위해 여러 가지의 직업과 활동들 안에서 상호 연결되어 있으면서 각기 다양한 유형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제활동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들 활동의 그 어느 것도 독자적으로 자족적일 수 없다. 따라서 유기적 연대는 전체 사회를 통일시켜 주는 것으로서, 그 사회의 부분들은 각기 다르면서도 또한 상호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각각의 부분들이 전체의 목적에 기여해 갈 수가 있다. 분업의 기능은 우리들이 단순히 기대하거나 또는 아담 스미스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생산성을 증대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통합된 사회적 존재를 가능케 해준다. 그리고 그 통합된 사회적 존재는 그 체계의 부분들이 갖은 엄격한 동질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점에서 그는 마르크스의 견해를 같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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