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모르는 자의 "자기 존재성 구축"] 2004-12-04
[십자가를 모르는 자의 '자기 존재성 구축'] 2004-12-04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십자가를 모르는 자의 '자기 존재성 구축'
이근호 2004-12-04 08:04:25, 조회 : 308, 추천 : 25
십자가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자는 자기 존재성
1. 나는 존재한다.
2. 하나님 때문에 존재한다.
3. 그런데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나는 죄인이다. 무슨 해결책이 없을까?
4. 옳다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 죄 씻어라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구나. 그 점을 이용해야지
5. 그런데 내 힘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니 힘이 들구나. 무슨 수가 없을까?
6. 그렇지,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셔서 성령님의 힘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라고 하는 구나
7. 이로서 나는 가치 있는 존재다.
8. 성령님을 의지하여 마음껏 하나님의 법을 지켜 옛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지.
9. 물론 완벽하고 완전하게 되지는 않겠지만, 군데군데 하나님의 의라고 여길만한 일들이 발생될 것이다. 그것을 점차 늘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최선을 다한 나의 역량에 맞는 만큼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이 점이 중요!
이로서 자신의 체험과 간증거리와 종교적 성과가, 십자가를 대신하여 신앙의 표적으로 등장되는 단계인데, 이 단계가 이 사람을 통한 사탄의 활동이 본격화되는 단계다!)
10 이로서 나는 천국의 시민이 되었구나.
이 절차 가운데 특히 7번, '이로서 나는 가치 있는 존재다'를 근거로 직업 목회자로 나선다.
즉 '나는 가치 있는 존재다'→하나님이 보증했다→이제부터 목회자가 되어야지→나는 주의 종이니 내 말을 들으라→나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함께 있어 너를 건드리는 놈은 저주받는다. 그러니까 날 건드릴 생각 말라 →이렇게 가치 있는 내가 교회 세우니 이 교회가 참된 교회다.→따라서 나와 내 교회는 망할 리가 없다→교인들은 내 말을 들어야 하는 내 소유의 양들이다. 따라서 남이 와서 빼앗간다든지 개입하면 '나의 주의 종 됨'의 가치를 발휘해서 가만있지 않겠다.→노골적인 이단 출현
여기에 비해 십자가로 시작한 성도의 운명은 이렇습니다.
1. 나는 죄인이다.
2. 따라서 당장 죽어도 상관없고 지옥가도 당연하다
3. 그럼에도 하나님은 십자가(새언약)를 증거하기 위한 용도로 활용하기 위해 아직 안 죽이시고 있다.
4.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은 평생 회개만 해야만 하는 인간으로 선택하여 일 시키신다.
5. 분명 아무리 따지도 죄 될 것도 아닌 일 속에서도 성령님은 죄를 끄집어내신다.
즉 은혜를 은혜 되기 위해 죄도 함께 키우시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복음 전파하는 일", "예수님을 믿는 일", "회개하는 일",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일", "성령으로 찬양하는 일", "건전한 신학 체제를 세우는 것" 등 즉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회개거리가 아니라 도리어 선한 '하나님의 의'라고 여겨지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기어이 그 와중에서 '인간의 자기 의(義)'를 유발시키고 발생하도록 의도적으로 조치하신다.
그것은 '십자가의 의'만이 남기도록 하는 조치인데, 이 점을 증거하기 위해 나를 사용하신 것이다.
6. 아무리 퍼내고 퍼내도 계속해서 내 속에서 의(義)라는 것은 손톱만큼도 나오지를 않는다. 계속 회개하라고 닦달 내신다. 이런 일이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7. 따라서 '나'라는 존재는 늘 더 살 가치는 전혀 없고, 더 쓰임을 받지 않고 당장 죽여도 할 말 없고 그 죽음은 지극히 당연한 하나님의 조치다.
8. 내 교인도 없고 내 교회도 없다. 교회 안에서는 오직 "인간은 죄인임"을 증거 할 따름이다.
9. 이런 식으로 쓰임 받는 자가 곧 성도임이 약속에 준해서 믿어지게 된다.
10. 하나님께 영광과 의와 거룩, 그리고 교회 생겨남,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이 홀로 벌리신 십자가 약속이 그냥 은혜로 우발적으로 작용되어 생긴 상황일 뿐이다.
11. 교회는 이런 자의 모임이며 오직 주님이 홀로 하신 일로 감사하기 위해 모여든 무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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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우리의 싸움터가 아니라 주님의 싸움터-손성식 목사님의 글
이근호 2004-12-05 18:51:51, 조회 : 324, 추천 : 36
[우리가 아닌 주님의 싸움]
"종말로(마지막으로 말하는데)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에베소서 6:10-13)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쉽게 괜찮은 사람으로서 누구 나와 잘 지내는 것으로 생각하시면 큰 오해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열심히 사회 사업 쪽이나, 정치 경제 제반문제를 문제삼고 정의사회 구현을 외치는 것도 복음에 대한 왜곡현상입니다. 왜 그렇게 보는데요? 왜냐하면 복음은 이 땅에서 "역사의 안정성"을 추구하지 않고, 묵시적 균열을 일으키기에 그렇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하나님께서 싸움하시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까?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누가 하나님이 싸우시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 한 번도 본적이 없는데요. 그런데 왜 하나님이 싸우시는 것입니까? 혹시 목사님이 잘 못 보신 것이 아닙니까! 사실 하나님이 싸운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은 좀 웃기지 않습니까!
저는 치열하게 싸우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싸움터는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이름을 "십자가 사건"이라고 부르며, 싸움의 성격상 "묵시적"이라고 부릅니다. 왜냐구요? 이유는 [인자라는 묵시적 인격체]가 역사의 배후세력인 마귀를 무찌르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역사의 배후에 사단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현실은 은폐되어 있다가 [인자라는 묵시적 인격체]에게 발각되어진 것입니다.
인간은 마치 붕어빵 같습니다. 아담이라는 욕망의 붕어빵 말입니다. 아담계열에 속한 인간은 사단에게 종속되어 있으며, 인간의 모든 욕망은 사단을 모방하고 있습니다. 즉, 모방욕망입니다. 역사란 내재적으로는 인간의 모방욕망의 모습이고, 초월적으로는 사단의 원초적 욕망의 몸부림입니다. 이들의 역사신학은 "하나님 되기"입니다. 피조물의 존재성으로부터 벗어나서 "신성"의 존재자가 되려는 것이며, 이런 맥락에서 십자가 사건이 유발됩니다.
십자가 사건은 역사를 신성화시키려는 욕망으로부터 발생된 희생양 사건이며, 역사로부터 철저히 죽임 당하신 하나님의 언약사건입니다. 역사의 베일을 벗겨내는 종말사건입니다. 역사란 단지 아담역사가 아니라 원초적인 사단역사라는 것을 알려주는 공개사건입니다. 역사(인간)나 묵시(사단)를 가릴 것 없이 모든 피조물의 파국을 결정짓는 심판사건입니다. 또한 희생당하신 주님의 자기백성을 위한 선택사건입니다. 은혜라는 장(場)의 토대로서 창조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마치 연극이 끝나고 나서 모든 등장인물이 무대 밖으로 나와서 인사하는 것 같이 역사의 모든 내용을 다 드러내었기에 이제 역사는 역사 자체의 목적(역사의 안정성)이 아니라, 은혜를 확인시키는 장(場)으로서 변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진행되는 모든 철학이나 과학, 신학은 이미 파한 장터에서 자기네들끼리 모의장터를 여는 꼴입니다.
하나님은 공격하십니다. 역사를 긍정하려는 모든 욕망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으로 말입니다. 은혜는 두 가지 맥락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하나는 "우발성" 이라는 선택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인격성"이라는 사랑개념입니다. 우발성이란 역사의 모든 인과관계를 차단시키려는 것이고, 인격성이란 역사의 제한성을 공박하는 영원성입니다.
성도는 예수 믿고 난 후에도 욕망 합니다. 하지만 이제 십자가라는 묵시적 장(場)안에 놓여 있기에 그의 모든 욕망사건은 은혜를 확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작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단지 출발점이 아니라, 출발점과 결승점을 모두 포함하는 장(場)입니다. 성도에게 남아 있는 것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도 "고맙습니다"라고 외칠 수 밖에 없는 은혜의 자리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오늘 본문을 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선포는 내가 용사가 되는 싸움이 아니라, 용사로써 싸우신 주님에게 모든 소망을 두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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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음 주 설교원고입니다 !!
구득영 2004-12-07 21:57:23, 조회 : 251, 추천 : 11
두려워서(?) 안 올릴까 하다가 혹시나 필요한 분이 있을까 싶어서 올립니다. 그리고 설교를 할 때가 아직 며칠 남았으니 비판도 환영합니다. 설교때 많은 도움이 됩니다. 너무 아프게는 하지 마시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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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무엘 (삼상 1:19-28)
지난 시간에 우리는 한나의 기도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기도를 본능적으로 쉴새없이 합니다. 하나님의 꿈이 아니라 자기들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도 때문에 참된 기도를 하는 자들이 고통과 박해를 당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한나가 한 기도는, 자기 아들을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나실인으로서 등장하게 될 아들을 위해서 한 기도입니다. 나실인이란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 즉 사람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가꾸고 다듬어서 살아가는 식으로 살지 않는 하늘에 속한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나실인을 달라고 간구하는 한나의 마음속에는 놀랍게도 하나님의 고통스러운 마음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은 제사장인 엘리의 잘못된 기도관 때문에 더욱 더 깊어집니다. 고통을 덜어주어야 하는 제사장 때문에 더욱 깊어진다는 것은 타락한 그 시대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오늘 이 시대임을 잊지 말아야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이 모든 일들이 아득한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웃집 이야기도 아닙니다. 다른 교회 이야기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 집 이야기이고, 우리교회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혹시나 우리들의 잘못된 기도 때문에 이웃을 핍박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일은 없는지 한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결코 한나가 하나님께 자기 자식을 달라고 울먹이면서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한나의 고통은 '자식없음'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식있음'으로 말미암은 자, 즉 그의 대적 브닌나로 인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러한 고통을 잘 아는 한나가 자식을 달라고 기도하겠습니까? 물론 믿음이 없는 이 세상 사람들 같으면 그런 복수의 기도를 하겠지요. 그것은 고통에 고통을 더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한나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응답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9절과 20절의 말씀입니다. 제가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삼상 1:19) 그들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삼상 1:20)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여기에 보면 드디어 한나가 하나님으로부터 한 아들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엘가나가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아들의 이름이 누구인고 하니, '사무엘' 이라는 것입니다. 많이 들어보셨지요?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사무엘이란 아들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부모가 낳은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자기들이 낳은 자식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알아서 합니다. 남의 집 자식을 두고 이러쿵 저러쿵 하면 안됩니다. 자기 자식만 챙키고 돌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부모를 훌륭한 부모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무엘은 그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 세상의 모든 부모들을 공격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 아이의 울음소리는 이미 "너희들은 다 엉터리야" 라고 하는 외침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사무엘의 부모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가 한나에게 임했기에 한나가 자기 자식을 하나님께 바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그렇게 한나의 기도에 대해 가슴 아픈 설교를 했는데, 여러분은 과연 지난 일주일 동안 그 설교가 어떻게 다가오던가요? 혹시 교회당 문을 나서는 순간 그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자기 자식에게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았습니까?
"아니 목사님, 삭도라니요? 저는 이발을 전혀 시킬 줄 모릅니다" 라고 하시겠습니까? 자기 자식인 줄로 알고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아마 저희 집 아이들이 여기 있으면 제가 이런 설교 못하지 싶습니다. 정말이지 남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 없이 살아간다면 당연하게 자기가 낳으면 자기 자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아무리 자기가 낳아도 결코 자기 자식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도 열심히 드리는데, 그런데 왜 자꾸만 자식을 자기 자식이라고 우기면서 살아갑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어떻게 교회에 나와서 자기 자식이 수능시험을 잘 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런 부모들의 극성에 장단을 맞추어서 수능시험만 다가오면 기도회를 여는 교회는 도대체 교회가 맞기는 맞습니까? 실컷 교회 다니다가 지옥으로 갈 사람들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아드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는데, 그런데 어떻게 우리 아들을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해놓고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런 것은 마귀의 유혹입니다. 마귀는 그렇게 항상 우리들의 약점을 파고듭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말입니다. 마귀는 우리들이 무엇을 억지로 하도록 안 합니다. 마귀가 얼마나 지혜로운 놈인데 말입니다. 선악과 나오는 창세기 3장 6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그리고 이러한 마귀의 유혹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남편에게, 그리고 이웃으로 자연스럽게 번져나갑니다. 그래서 마귀는 지금 이 세상을 점령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마귀 손아귀에, 즉 죄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이 세상 현실입니다.
이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는, 자식을 힘들게 낳아서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아니 자기 자식인데 왜 남을 줍니까? 자기의 이름을 대대손손 남겨줄 또 다른 자기 자신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남의 자식은 별 의미가 없고 말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그렇게 어렵게 얻은 자기 자식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정말로 자기 눈 속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말입니다. 아니 죽었으면 죽었지 어머니로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한나는 그런 유혹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식이기에 도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장차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알다시피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백성들을 위해, 백성들의 죄를 씻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걸고 성전에서 일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철저한 자기 희생의 직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나는 자기 희생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희생하는 아들을 만들려는 것입니다.
물론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의 아픔도 엄청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거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를 않습니다. 오직 여인의 희생을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여인의 후손을 제대로 이야기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는 이러한 한나가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리는 그러한 과정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21절에서 24절 말씀입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삼상 1:21) 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삼상 1:22)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삼상 1:23)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선한 대로 하여 그를 젖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그 여자가 그 아들을 양육하며 그 젖떼기까지 기다리다가
(삼상 1:24)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21절에 보면, 한나의 남편 엘가나와 그 온 집안은 해마다 성전에 제사를 드리려고 갔다고 합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온 집안이 주일마다 교회에 나갔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집안이지요.
그런데 한나는 성전에 가지를 않습니다. 왜 그런가요? 어린 사무엘을 젖을 주면서 제대로 키우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아이를 제대로 잘 키우기 위해서 예배시간 빠지는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고, 이 한나는 오히려 반대입니다. 그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소중했기에 성전에조차 가지를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이 아이는 자기 아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식이게 그러합니다.
한나에게는 자기가 성전에 가서 자기 혼자 구원받는 그러한 차원이 아니라, 온 나라를 구원할 제사장을 제대로 양육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때가 되어서, 한나는 젖을 떼고는 자기 자식을 데리고 엘리 제사장에게로 갑니다.
그런데 24절 끝에 보면, "아이가 어리더라" 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직 아이가 어린데, 차마 어머니로서 아이를 떼어놓고 올 수 없는데, 그런데 한나는 이미 자기 자식이 아니기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에게 어린 사무엘을 맡기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울면서 울면서 말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한나의 마음이 이해가 되십니까? 아마 남자들은 잘 모르지 싶습니다. 물론 저도 그렇고 말입니다. 이건 여자로서 할 짓이 못됩니다. 여자이게 이 이상 더 어떻게 가혹한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마치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모리아산으로 올라가는 것도 같은 상황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한나는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빼앗겼습니다. 여자에겐 자식을 빼앗기면 모두 다 빼앗긴 것입니다. 그렇지요? 제 말이 맞지요? 사실 여자에게 남편이란 존재는 자식에 비하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남편이 없으면 돈을 벌어주지 못하니 좀 아쉽기는 하겠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자는 한나처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빼앗기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러한 빼앗김 속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뵙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빼앗김의 아픈 고통의 경험이 없다고 하면, 아직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제 아무리 오래 다녀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진정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내놓으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서 감당해야만 하는 제사장 역할,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만이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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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또 다음 주 설교원고입니다 !!
이근호 2004-12-08 08:32:54, 조회 : 304, 추천 : 24
한나의 고통이란,
하나님의 약속이 빠진 상태라면 모든 것이 빠져버린 무용지물의 세상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고통입니다.
하나님 됨이란, 하늘의 존재로 머물러 계시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약속이라는 것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실제적 활동을 벌리리는 분으로 그 실체를 말하십니다.
그런데 약속이란 자기 백성에게는 '고통'의 양상을 야기시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고통에 자기 백성들 만큼은 합류시켜 그 '하나님의 고통'을 공감하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 세계는 처음부터 하나님만이 만드신 바가 아니라는 겁니다.
엉뚱한 세계를 건설하고 지탱하고 있다는 겁니다. 멸망되어야 될 것에 불과한 속에 숨어들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만들어 놓은 세상만 진실된 세상으로 알고 있다는 겁니다.
소동과 고모라 성에서 롯이 매우 고통스럽게 살아간 것처럼 (벧후 2:7) 성도도, 더이상 기거할 필요조차 없는 세계속에서 억지로 존재하게 되었다는데서 '하나님의 고통'을 맛봅니다.
예수님께서 이 더러운 세계에서 그들로부터 시련과 배척과 배신을 당하는 아품에 성도도 동참시키시는 겁니다.
따라서 성도의 할 일은, 그 고통을 '구원받은 자의 당연한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더 살려고 하지 않는 자가, 더 살고 싶어하는 사회 안에서 겪어야 하는 괴로움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가지고 교인들에게 설교 할 때는, 다음의 사항을 겨냥해야 합니다.
1. 도대체 여러분들이 이 땅에 집착하고 더 살아남아야 하겠다는 근본 의도가 무엇 때문입니까?
맹목적으로 살아남고자하는 욕망으로 인해 점점 더 십자가의 고통이 남의 일이 되어 여러분 자신들로부터 멀어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것이 악마의 노림수입니다.
2. 여러분들이 교회와서 내심 신으로부터 얻으려하는 것이, 인간대 인간의 승부근성의 발로입니까 아니면 십자가에서 뿜어나오는 우리들의 죄을 향한 주님의 용서의 승리입니까?
(신약 때는, 아기가 생기나 안생기나 상관없이 신앙의 표적은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의 사랑으로만 최종적이다)
3. 만약에 '용서의 승리'이라면 이제 우리에게 있어 자랑할 것이라고는 우리 자신의 의로움이나 세상적인 실적이나 착한 행실이 아니라 예수님의 용서해주심 뿐이기에 더이상 스스로에게 자신이 이 세상에서 더 살 가치가 있다고 세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은 '죽어 마땅하다는 회개하는 심정'을 경과토록하시면서 성령님의 자신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신앙고백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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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또 다음 주 설교원고입니다 !!
권범식 2004-12-08 01:33:58, 조회 : 185, 추천 : 11
잘 읽었습니다...^^
저도 동의 합니다...말씀은 결코 모든 것을 빼앗기지 않고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자기것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바락바락 힘쓰면서 하나님의 은혜도 달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정말 많은 것 같습니다...정말 말씀대로 이루어짐을 보는 거 같습니다...
그럼 설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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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본질-손성식 목사님의 글
이근호 2004-12-08 15:02:11, 조회 : 232, 추천 : 18
[이 땅에 흐르는 신학의 두계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그렇게 많은 신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는 두 가지 이질적인 신학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욕망하는 신학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신학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이 두신학이 서로 헤어져서 따로 따로 생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같이 있으면서 충돌하고 있어서 제대로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부신학, 중세신학, 현대신학, 로마카톨릭신학, 개혁주의 신학, 근본주의 신학, 복음주의 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등등 수 많은 이름들의 신학은 그 자체로는 진실을 찾을 수 없고, 이 신학들의 외부에서 이 신학들을 만들어 내는 인간들의 욕망을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신학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현실을 많이 봅니다. 이러한 이유는 신학을 통해서 욕망을 발산하고 있는 자신을 항상 제외시킬려는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항상 자기편입니다. 교회를 다녀도 마찬가지 입니다. 신학자가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100독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에서 평생 기도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살아도 마찬가지 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 삽니다. 항상 자신의 편을 만들기 위해서 신학도 하고 목사가 되기도 하고 장로가 되기도 하고 집사가 되기도 하고 교회봉사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흐르는 주류신학은 욕망의 신학입니다. 미시적으로는 자신의 편을 만드는 신학이고 거시적으로는 이 땅의 평화를 위한 신학입니다. 이것은 신학의 보편사이기에 현실속에서 눈만 뜨면 만날 수 있는 신학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신학은 이러한 욕망의 보편사 신학을 공박하며 다가옵니다. 그리고 신학의 외부에서 작동하는 인간의 욕망을 폭로합니다. 이 땅에서 생산되는 모든 신학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게 폐기처분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확인시키며, 악질적인 욕망의 굴레로부터 회개케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현실화시킵니다.
이런 이질적인 계열의 흐름속에서 성도란 자신의 욕망이 끊임없이 십자가앞에서 발각되어 회개케되는 실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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