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 2004-11-24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 2004-11-24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십자가의 도
이종철 2004-11-24 11:15:45, 조회 : 175, 추천 : 19
샬롬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어떠한 영혼에서 어떠한 영혼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십자가의 도를 예정하신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알지 못하면 결코 죄에서 벗어날수가 없고 율법에서 벗어날수 없는 것입니다
진리는 원인과 결과가 일치가 되므로 원인을 알지 못하고 결과만을 가지고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다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세상신에 속고 가는 것입니다
갈3장22절에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라는 말씀안에서 죄아래 가두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원인을 알지못하므로 결과만을 가지고 속는 믿음으로 육신의 옳은 생각으로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므로 여전히 죄아래 가두어져 있음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2장15-여호와는 영이 유여 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경건한 자손을 얻기 위하여 한영을 지으셨는데 이 한영이 바로 창1:28에 한영입니다
이 한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진리의 형상인 율법의 형상을 지으신 것입니다
영의 하나님께서 영으로 진리의 영의 형상인 율법의 영의 형상을 지으신 것입니다
이 한영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영의 말씀으로 밝혀주심이 바로 이 한영이 비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예정하신 십자가의 도는 이미 아담이 지음받기 전에 예정하신 십자가의 도를 따라 (엡1장4절.딤후1장9절)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구원받을 자들을 택하여 주시고 창1장28절에 한영으로 말미암아 태어날 율법의 영혼들중에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택한 세상 끝날까지 앞으로 태어날 율법의 영혼들을 지시고 세상신(한영)의 음부에 들어가셔서 고통을 받으시고 고통받으시는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살리시므로 하나님우편에 앉게 하시고 그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시고 안식하시므로 영적으로 십자가의 도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 주심으로 율법의 영혼을 진리의 영혼으로 거듭나게 하신것입니다
이렇게 거듭나게 해주신 영적인 십자가의 도는 아담이 지음받기 전에 이미 인자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정이란 말씀은 그냥 예정하셨다가 아니라 이미 진리의 영혼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택하여 주셨음이 예정입니다
창1장에 나오는 창조는 영의 창조요 보이는 창조가 아닌것입니다
창1장에 나오는 창조는 6일 동안에 세상에 속한 것을 영으로 창조하셨고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7일째)하늘에 속한 영으로 새역사의 창조를 마치신 것입니다
새역사의 창조가 바로 인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적인 십자가의 도를 이루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으로 영적인 십자가의 도를 마침으로 하나님께서 그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시고 안식하신 것입니다(창2장1-3.히4장1-5.마12장8절)
영적인 창조를 마치시고 창2장에 와서 육의 창조가 시직되는 것입니다
거듭나게 하신 진리의 영혼들과 세상에 속한 율법의 영혼들이 세상신을 받고 태어남으로 구약에는 그리스도께서 여호와의 성호로 신약에서는 육신의 모양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육적인 십자가의 도를 온전히 이루심으로 진리의 영혼들이 세상신을 받아나온 죄를 영적인 십자가의 도를 이루신 인자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모양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셔서 육적인 십자가의 도를 온전히 마치심으로 진리의 영혼들이 진리의 영혼몸으로 온전하게 거듭나게 하셔서 아들로 삼아주심이 십자가의 도요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이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는 먼저는 영적으로 십자가의 도를 먼저 이루어 주시고다음에는 육적으로 십자가의 도를 이루어주시므로 두번 이루어 주신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들을 먼저는 육적으로 이루어 주신 십자가의 도를 깨닫게 하셔서 육의 믿음으로 자라게 하시다가(성경이 모든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때가 되어서 영적인 말씀을 온전히 드러내 주심으로 아담이 지음받기전에 영적인 십자가의 도를 이루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 육적인 십자가의 도를 이루심으로 예수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는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므로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하게 구원의 섭리를 이루어 주셨고 동일하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주신 것입니다(히13장8절)
영적인 신령한 말씀은 계시해 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알수 없으므로(갈3장23절) 종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해주시는데 이세상에는 계시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있으나 누가 이 마지막때에 진리의 말씀으로 대언을 하시는지 알수가 없으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으로 믿게 하십니다
이 마지막때에 영의 말씀으로 밝혀 주시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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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십자가의 도
이근호 2004-11-24 11:43:38, 조회 : 188, 추천 : 11
>창세기 1장의 '영의 창조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이기에 결코 깨어지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피조물이 탄식할 리 없고, 노아 홍수 때 모든 땅의 짐승들이 피해를 입을 이유도 성립되지 못합니다.
짐승들은 분명히 창세기 1장의 제 6일에 인간과 더불어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3장에서 아담보고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나님께서 이야기가 하실 것이 아니라 "너는 이제 죄로 말미암아 흙이 되었으니 이제는 창세기 1장의 영으로 돌아가라"라고 해야 앞 뒤가 맞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이 아니라 (롬 8:3) '죄 없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육신을 벗고 창세기 1장의 영으로 되돌리는 일을 하셔야 될 분이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는, 죄 때문에 생긴 사건이 아니라, 창세기 2장을 무효화해서 창세기 1장으로 되돌리기 위한 육신적 장애요소 때문에 생긴 사건이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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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십자가의 도
권범식 2004-11-25 01:52:24, 조회 : 134, 추천 : 13
안녕하세요...
글은 잘 읽었습니다...그런데 의문이 좀 있어서 문의 드립니다...이종철 님께서 쓰신 내용중에서 육적인 믿음(성경
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좀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그럼 예수님이 현재 성도들을 육적
으로는 구원 하셨으되 영적으로는 구원을 아직 안하셨다는 뜻인가요?(혹은 영적으로 현재 구원하시는 중인 것인가
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두번의 과정을 거쳐서 우리를 구원하신 다는 건가요?
만약에 그렇다면 성경에서 예수님의 몸을 단번에 드리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요...?
제가 글을 읽고 본문중에 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어서 질문드리니 귀찮더라도 답변 부탁드립니다...^^
그럼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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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설교원고입니다 !!
구득영 2004-11-25 00:03:45, 조회 : 221, 추천 : 21
설교원고가 예상보다 빨리 준비되어서 서로 나누려고 함 올려봅니다. 내용 중에서 잘못된 정보나 너무 알레고리한 부분이 있다면 좀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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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나의 고통 (삼상 1:1-8)
이제 이스라엘은 사사시대를 지나서 백성들이 그렇게도 바라던 왕정 시대로 접어듭니다. 하지만 우리는 왕정시대가 결단코 순탄치 않음을 이 사무엘서를 통해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인간 왕이 다스리는 이방나라가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왕이 되는 매우 독특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으로, 왕이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이 있어야 하는 제사장 나라에 그만 실제로 두 눈에 보이는 왕이 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왕의 자리에서 탈락이(?)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을 밀어내고 그 초대 왕으로서 사울이라는 사람이 왕이 되고, 그 다음이 다윗 왕, 그리고 솔로몬 왕으로 이스라엘의 역사가 진행이 됩니다. 그것을 이 사무엘상하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무엘상하는 제목이 보여주듯이 왕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사무엘' 이라는 사람 말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본 따서 책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면 이 사무엘은 누구입니까? 그는 왕을 기름을 부어 세운 사람입니다. 그 직책은 제사장이고 말입니다. 대단하지요? 왕을 세울 정도이니 말입니다.
그러면 사무엘이 어떻게 등장해서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고,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전달하는지 우리가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도 이 사무엘상하를 다 살펴보려면 일년은 족히 걸리지 싶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느긋하게 잡수시고, 하지만 매 시간은 좀 긴장을 하고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인 이 사무엘 1장을 보면, 한 명의 여인이 눈물을 뿌리며 등장합니다. 누구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한나' 라는 여인입니다. 앞서 살펴본 룻기도 그렇고 이 사무엘서도 그렇습니다.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힘있는 남자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여인의 후손을 통해서 일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약한 여인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사무엘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웁니까?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다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오늘본문 1절과 2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삼상 1: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삼상 1: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
여기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 라는 남자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남자에게 아내가 두 명입니다. 아마 처음 아내가 아이를 제대로 낳지 못하자 또 다시 아내를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둘째 아내가 그만 아이를 덜거덩 낳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집안 분위기가 어떻게 될지 짐작이 되지요?
원래 이스라엘의 법은 아내를 한 명만 두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엘가나 라는 남자도 사실상 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경외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자기 편한 대로만 하는 것입니다. 하긴 이 남자도 사사시대라는 그 어둠의 마지막을 살았음을 기억한다면 그렇게 이상할 것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만.
아무튼 슬퍼서 우는 여자는 아이를 낳은 여인이겠습니까, 아니면 낳지 못한 여인이겠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해 우는 여인일 것입니다. 아이를 낳다가 아파서 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낳지 못해서 모멸과 괄시를 받아 흘리는 눈물입니다.
누구로부터 말입니까? 신랑으로부터입니까? 아닙니다. 굴러 들어온 둘째 여자에게서 라는 것입니다. 그 여자 이름이 바로 '브닌나' 라는 것입니다. 좀 이해가 되시죠? 브닌나, 이름에도 그런 못된 분위기가 좀 풍기지 않습니까? 물론 브닌나 라는 뜻은 '붉은 진주'로서 그런 의미가 없어보입니다.
사실 한나의 남편은 이 한나를 너무나도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아마 이 못난 남편의 그런 행동이 더 이 브닌나를 더욱 못된 심술을 부리는 여자로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남자는 그 책임을 도저히 면할 길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남편이 잘 하고 못하는 차원이 아니라 전혀 다른데 있습니다. 왜 이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본문 6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삼상 1:6)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좀 놀랍지요? 누가 이 한나로 하여금 아이를 낳지 못하도록 했다는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부러, 즉 고의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한나가 신체적으로 타고난 불임여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지금 뭔가 나름대로 뜻이 있어서 그녀의 태를 임시로 막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브닌나는 그런 이유도 전혀 모르고, 그녀의 대적이 되어서 자기가 자기 힘으로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전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교만하고 건방지게 본 아내인 한나를 놀리고 비방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일부러 한나가 그러한 큰 고통의 지경에 이르도록 조치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뭔가 나름대로 준비하고 계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룻기에서, 하나님은 나오미와 룻을 통해 기존의 아들을 버리고 새로운 약속의 자녀를, 즉 여인을 후손을 통해서 일을 하시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슨 일을 계획하고 계실까요?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힌트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삼상 1:3)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
여기에 보면 제사장 엘리와 아들이 등장합니다. 제사장은 아들이 그 직분을 이어받게 되는 세습제인데, 그런데 나중에 이 엘리의 두 아들이 불레셋과의 전투에서 그만 죽게 됩니다. 그러면 엘리가문의 제사장의 직분이 그만 끊어지게 됩니다. 자식이 없으니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자리에 누군가를 집어넣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한나의 아들로서 태어나게 되는 그 이름도 유명한 '사무엘' 이라는 것입니다. 일이 그렇게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룻기에서,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의 두 아들이 죽고 난 뒤 대신 그 자리에 '오벳' 이라는 약속의 자녀가 들어가는 것과 그 구조가 너무나 흡사합니다. 그렇지요? 먼저 '이것(남자의 후손)은 아니다' 라고 하면서 나오는 것입니다.
진도가 너무 많이 나갔는데,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지금 집안에서 두 여자가 이렇게 싸우고 있는데, 아니 한 여자가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데, 그런데 여기에 대해 한 집안을 책임지고 있는 엘가나 라는 남자는 사실 별로 할 일이 없어 보입니다.
엘가나 라는 이 남자는 나름대로 한나를 엄청나게 사랑하기는 하지만 어떻게 그녀를 제대로 위로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껏해야 물질이나 말로서 그렇게 무마시키고 해결하려고 합니다. 요즘은 물질이면 다 O.K. 입니다만, 그러나 한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엘가나는 나름대로 노력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가서는 특별히 한나에게 두 배의 제물을 그녀의 몫으로 나누어주면서, 그렇게 아주 특별한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이 한나에게는 그러한 것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남편의 특별한 배려는 브닌나의 질투심을 더욱 유발시켜서 이 한나의 마음을 더욱더 아프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7절에는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삼상 1:7)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그러자 남편이 또 그녀를 위로합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말은 최대한 동원합니다. 자기가 있으니 열 명의 아들이 있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8절에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삼상 1:8)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이런 것을 두고 '속보인다' 라고 합니다. 아니 그렇게도 한나가 좋으면 그냥 살면 되지 장가는 왜 또 갑니까? 그리고 이렇게 둘째 마누라가 온 집안에서 평지풍파를 일으키면 쫓아내던지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제 말이 맞지요? 요즘도 이런 남자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자식욕심은 타고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됨으로 엘가나의 집안에는 편할 날이 없습니다. 한쪽은 날마다 울음이고 다른 한쪽은 날마다 웃음입니다. 이제 이 한나와 브닌나 사이에는 점점 더 적대감이 형성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이 한나의 한 맺힘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풀어주실까요? 사실 하나님 때문에 유발된 것이니, 결국은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대단히 죄송하지만 그것은 다음 시간을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한나는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주신 사명 때문에 이렇게 애매한 고난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다말과 라합과 룻과 우리야의 아내처럼, 그리고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 또 여자만세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여러분들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에게는 과연 이러한 하나님으로 인한 고난이 있습니까? 이러한 아픔과 고통의 흔적이 있어야 성도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흔적이고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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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다음 주 설교원고입니다 !!
이근호 2004-11-25 07:29:10, 조회 : 200, 추천 : 13
>남편인 엘가나가 평소에 자기 아내를 한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4-5절에 잘 나와있습니다.
자녀가 있는 브닌나보다 자녀없는 처 한나에게 갑절이나 제물의 분깃을 주었고 또 '그를 사랑함이라'라고 분명히 나와있습니다.
따라서 남편이 한나 사랑은 단순히 '속보이는' 행동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부일처제는 근대 사회에서나 결혼 윤리로 정착된 것이지 옛날에는 일부다처제가 하등 흠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일부다처제가 아니면 그당시 여인들이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여성을 대량으로 소비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남자가 능력이 되면 얼마든지 많은 여성을 데리고 살아서 여성을 구제할 필요성이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사무엘상 1장에서의 이슈는,
가정까지 침투된 왜곡된 하나님상은 일개 가장의 능력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더라는 분위기를 남기는 것 같습니다.
즉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고 하고 문제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판정의 권위를 쥐고 있는 가장도 더 이상 손 쓸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고
그저 '자식이 있음'과 '자식이 없음'으로서 한 쪽이 다른 한쪽의 가치성을 모독하는 형편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성경에서는 '브닌나'에 대해서 '대적'이라는 나쁜 이미지를 제공하므로서, 브닌나의 태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적대적인 품성에서 도출된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을 가지고 오늘날 교회에 적용시키면 이렇게 되겠지요.
누구든지 교회에서 '많이 소유했음'을 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자로 자처하다가는 그것이 곧 '하나님의 원수'노릇을 자청하는 바가 된다는 겁니다.
가진 게 없다고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홀대받는 것이 아니라 되레 소위 '가졌다'고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복받은 것이라고 여기는 그 인간의 '악마적 속성'을 뽑아내기 위한 '하나님의 세워주심'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언급되어야 합니다.
교회적으로 봐서도, 교인수가 적고 예산이 적더라도 결코 교회 아닌 것이 아님을 교인들에게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총체적으로 이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적이 되어 움직이는 형국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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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다음 주 설교원고입니다 !!
정영균 2004-11-25 20:04:15, 조회 : 213, 추천 : 9
지적하라고 하셨으니까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생각에 설교는 다음을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오늘 그 자리에 나와있는 사람들의 내일을 누가 보장할 수 있습니까? 내일 또 만날 사람으로 보지 않고 오늘 끝날 사람으로 보고 설교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늘 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복음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이 설교에서는 복음을 볼 수가 없습니다. 물론 다른 본문을 하게 되면 십자가를 말씀하시겠지만 적어도 이 설교에서 복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황추측만 난무합니다. 사실 성경에서 언급하지 않는 내용에 대해 지나친 추측은 금물이라고 봅니다. 그런면에서 목사님의 설교는 쓸데없는 상황추측으로 귀중한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같은 본문의 설교 한편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삼상 1:1-8(1강) 한나와 브닌나
2002.7.21(오전)
오늘부터 사무엘상을 말하겠다. 주일오전에 구약을 말씀드리면서 룻기까지 강해를 했었는데, 구약만 계속 말씀드리는 것보다 신약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그동안 빌립보서를 말씀드렸었다. 지금 생각으로는 사무엘상을 마치고 나며 다시 신약을 강해하고, 신약을 마치면 다시 구약을 강해하는 식으로 하려고 하는데, 나중에 또 생각이 바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오늘부터는 사무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배울수 있기를 바란다. 저는 성경을 연구해서 여러분에게 말을 하는 입장이고, 여러분은 제가 연구한 성경에 대해서 듣는 입장에 있는데, 저는 가르치고 여러분은 듣기 때문에 성경을 알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저와 여러분이 차이가 날 수 있다. 하기사 성경만 전문으로 연구하는 사람하고, 그냥 와서 듣기만 하는 여러분하고 같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차이가 나면 안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뭔가 하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다. 이것만큼은 성경은 가르치는 사람이든 듣는 사람이든 차이가 있으면 안되는 것이다. 저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 중에 하나로 설교하는 것이고, 여러분 역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 중 하나로서 듣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다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진리를 알고 배우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말씀을 사랑하는 신자로서,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알고 싶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그런 마음으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말씀을 대할 때, 오늘 시작하는 사무엘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배울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룻기까지 말씀을 살펴봤었는데, 룻기까지 보면 이방 나라에는 있는데 이스라엘에는 없던 것이 하나 있다. 이방 나라에는 있는데, 이스라엘에는 없는 것, 그것은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인가를 보여주는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과연 그게 뭐겠는가? 바로 왕이다. 룻기까지 보면,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다. 왕이 없다가 사무엘상에 와서 왕이 세워진다.
하지만 왕을 세우는 그것도, 이스라엘은 원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세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우리도 왕을 세워달라고 아우성을 쳐가지고 하나님이 왕을 세워주셨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8장을 넘어가면 나오니까 그때 생각해 보기로 하고, 방금 말한대로 왜 이스라엘에 왕이 없는 것이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인가를 보여주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스라엘에 왕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왕을 세우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지 않았는가? 혹시 그 이유를 아는가? 그 이유는 이스라엘에는 왕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바로 하나님이 왕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왕이 존재하고 게셨던 것이다.
왕이 계시고, 그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에 따로 왕을 세워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면서도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지도자는 세우신다. 하나님이 다스린다면 따로 이스라엘을 인도할 지도자도 세울 필요가 없을 것인데, 왜 지도자는 세우면서 왕은 세우지 않는가? 단순히 하나님이 왕이라는 그 자리를 사람에게 주지 않기 위해서 왕을 세우지 않은 것인가? 모세를 지도지로 세웠다면, 차라리 모세를 왕으로 세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왕을 세우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신다는 것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인간이든 왕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 때문에 그렇다.
왕이란 다스리는 사람이다. 결국 사람이 사람의 다스림을 받아가지고는 천국갈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왕을 세우지 않으시는 것이다. 오로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어야 천국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셔야 했던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그들을 다스려서 천국으로 데려가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왕을 세우지 않았던 것인데, 나중에 이스라엘은 천국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 나라처럼 크고 힘있는 나라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천국을 생각한다면 왕이 필요가 없었는데, 그저 하나님만 계시면 되고 하나님의 말씀만 잘 따르면 되었는데, 우리도 세상에서 큰 나라가 되보자는 유혹에 빠졌을 때는 왕이 없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천국만 생각한다면, 세상 것을 가지고 못가지고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닌데, 나도 남들처럼 잘 살아보고 싶다는 유혹에 매이게 되니까, 세상 것이 없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나를 붙들게 되고, 결국 '하나님 나도 잘되게 해주십시오'라는 요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지금 우리들의 삶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지 않는 그 이유에서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재물을 채워주시는 식으로 다스리지 않으시는 것은, 천국을 가는데 있어서 재물은 전혀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이처럼 하나님은, 오직 천국만을 염두에 두고 일하시고, 또 우리에게도 오직 천국만을 생각하라고 하시는데, 우리의 생각에서는 '잘살고 싶다'는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자꾸 다른 것을 필요로 하게 되고 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에서 벗어나게 되는 이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문제가 굉장히 어려운 것이다. 천국은 보이지 않는 나라다. 하나님도 보이지 않는 분이다. 물론 천국의 희미한 흔적은 말씀을 따라사는 신자들을 통해서 볼 수 있겠지만 천국의 실체는 보이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이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황당하다고 할 수 있는 얘기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인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고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고, 그래서 우리는 왕이 필요없다고 한다면, 이방 나라가 보기에 얼마나 우습겠는가?
사람에게는 눈이 있다. 근데 이것이 신앙생활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눈이 있어서 보이는 것이 있다. 보이는 것이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을 믿고 보이는 것을 의지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니까, 보이는 사람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눈이 있어서 보고 사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기 보다는, 보이는 것을 더 의식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보이는 것 때문에 신앙생활을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없다. 사람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모두가 다 보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내 마음에 들기 때문에 그것을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 손에 잡히기 때문에 나에게 어떤 느낌을 주기 때문에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비록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라고 해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손으로 만지고 냄새로 맡고 느끼면서 뭔가를 좋아하고 사랑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실체를 확인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되어지는 일인 것이다. 근데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눈에 보이는 것이 우리 앞에서 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어도, 우리들의 눈에는 여전히 세상 것들이 보여지고 있다. 세상 것을 보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또 장님이 되어서 아예 세상 것을 보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한대로 보지 못한다고 해서,그 실체를 느낄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 것을 안보고 산다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서 전혀 가치를 두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 것을 날마다 보고 만지고 또 그것을 소유하고 살아가되, 보이는 세상 것을 사랑하고 집착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 이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시각에서 세상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그들을 다스리신 것처럼, 하나님은 나를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나를 다스린다는 그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천국에는 이 세상 것들이 필요가 없다는 이 생각이 항상 내 속에 살아있을 때, 우리는 보이는 것을 위해 사는 것은 되지 않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천국을 생각하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은 온통 보이는 것에 붙들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살아가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무엘상이 바로 이 문제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사무엘상 맨처음에 등장하는 사건이 뭔가 하면, 여자들이 서로 싸우는 것이다. 자식문제로 여자 둘이 티격태격하는 것이 본문 얘기다.
본문에 보면 남자 하나와 여자 둘이 등장을 한다. 남자는 엘가나라고 하는 사람이고, 여자는 한나와 브닌나라고 하는 사람이다. 한나와 브닌나는 엘가나라고 하는 남자의 아내다. 그런데 브닌나라고 하는 부인에게는 자식이 있는데, 한나라고 하는 부인에게는 자식이 없다.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에게 있어서 자식은 힘으로 존재한다.
여자가 어떤 집안으로 시집을 가서 자식을 낳지 못하면, 기를 못편다. 항상 죄인처럼 기가 죽어가지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살다가, 자식만 낳아 놓으면 큰소리 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여인천하를 보는가 모르겠는데, 여인천하를 보면 여자에게 있어서 자식, 그것도 아들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임금의 부인이고 또 중전이라고 해도, 아들을 낳지 못하면 힘이 없다. 오히려 아들을 낳은 후궁이 중전보다 더 큰소리를 치는 것이다.
오늘 본문도 그런 상황이다. 자식을 낳은 브닌나가 한나보다 더 큰소리를 치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한나가 자식이 없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4-5절에 보면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라고 한다. 여기보면 엘가나가 브닌나보다 한나를 더 사랑한 것을 알 수 있다.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께 바친 제물 중에서 시람이 먹을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을 가져다가 나눠주는데 브닌나보다도 한나에게 갑절을 줬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나는 남편의 사랑을 더 받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이상하게 브닌나에게는 자식을 주면서 한나에게는 자식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나가 자식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일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그런 분위기가 남아 있겠지만, 엣날 같으면 자식이 많은 것을 복받은 것으로 여긴다. 반대로 자식이 없으면 복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한나도 하나님에게 복을 받지 못한 것인가? 한나가 무슨 잘못 한게 있어서 하나님이 한나를 벌주려고 자식을 주지 않은 것인가? 이러한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우리들의 사고방식에는, 일이 잘되면 하나님의 은혜고 잘못되면 은혜가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남아 있다.
내가 뭔가 잘못한게 있으니까, 나에게 좋지 않은 일이 있게 하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이 잘 안되고 안좋은 일이 있으면, 내가 하나님께 잘못한게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에 깊이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생각이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데 유익이 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생각에 집착하게 되면, 한가지 소홀해 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쓰신다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은 한나에게 자식을 없는 역할을 맡긴 것이다. 브닌나는 자식을 주고, 한나에게는 자식을 주지 않아 가지고 인간에게 어떤 약점이 있는가를 드러내시는 것이다.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고 한다.
브닌나가 한나를 심히 격동케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은 자식이 있고, 한나는 자식이 없다는 것을 내세워서 한나를 심히 핍박을 한 것이다. 여인천하에서 중전의 동생인 윤원형에게 부인이 둘 있다. 본부인에게는 자식이 없고 첩에게 자식이 있다. 그런데 그 첩이 본부인이 자식이 없다고 얼마나 핍박을 했는가? 윤씨 가문에 들어와서 자식도 못낳았으면서 무슨 정실부인 자격이 있냐고 하면서 본부인의 마음을 심히 격동케 했던 것이다.
브닌나가 한나에게 한 것이 꼭 그와 같은 것이다. 나는 자식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복을 받았고, 너는 자식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인간의 생각인 것이다. 받은 것을 가지고 복을 계산하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도무지 알지 못한 철없는 인간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가진 것이 있으면 복을 받은 것이고 없으면 복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복을 소유가 많아지게 하는 것으로 일하지 않으시는데,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으로 멋대로 하나님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항상 자기 소유를 의지하고 소유를 바라보고 살아가기 때문에, 복도 소유를 가지고 따지는 것이다.
그래서 소유가 많은 사람은 복받았다고 하면서 큰 소리치고, 없는 사람은 기가 죽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인간의 잘못된 사고방식을 드러내기 위해서 한나에게 자식이 없게 하시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은 자식이 있는 것을 복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브닌나를 세우시고, 반대편에는 남편의 사랑을 받되 자식이 없는 한나를 세우신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묻기를 과연 우리는 어느 것을 원하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신자로서 비록 세상의 서유는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 사는 것을 원하느냐 아니면 사랑을 받지 못하되 소유가 많은 자로 사는 것을 원하느냐는 것이다. 과연 어느 쪽이 여러분 마음에 드는 것인가? 참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분명히 이론상 옳은 것은, 소유가 없다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 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결국 천국으로 끝나는 길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것이 옳다. 그런데 그게 옳다고 하면서도 자꾸 소유가 많은 쪽으로 고개가 돌려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하는 것이 뭔가하면, 하나님의 사랑도 받고 소유도 많은 자로 살면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다 잡기 위해서 열심히 봉사도 하고 충성도 한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오늘 본문은 결코 그러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분명히 사랑을 받으나 자식이 없는 한나가 등장한다. 그것 때문에 자식이 있는 자에게 핍박을 받는다.
이러한 난처한 상항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잘되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일이 잘되고 다른 사람보다 많이 소유하는 것을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로 여기고, 반대로 일이 안풀리고 소유를 받지 못하면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죄를 지어서 벌 받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한다면 사랑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많이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한나를 미워해서 자식을 낳지 못하게 했는가? 한나를 미워했다면 왜 남편이 한나를 더 사랑하게 하시는가? 하나님은 남편이 한나를 더 사랑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한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한나가 왜 자식이 없게 해가지고 그런 핍박을 받게 하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인 것이다.
욥기서에 보면 욥이 재앙을 받을 때 욥의 세친구가 찾아와서 네가 죄를 지어서 그런 일을 겪는 것이니까 하나님께 회개해라고 한다. 그때 욥이 말하기를 나에게 있는 이 재앙이 내가 죄를 지어서 받고 있는 벌이라면, 너희는 나보다 더 많은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너희가 벌을 안받는 것을 보니까 나에게 있는 이 고난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되어진 일들이다고 한다. 신자가 이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누가 어떤 일을 겪든지 욥의 세친구처럼 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 사람의 고난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되어진 일이고, 바로 나 자신을 가르치기 위해서 다른 형제를 그렇게 쓰신다는 생각을 잊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생각을 잊어버리면, 우리에게서는 브니나와 같은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브닌나가 한나를 핍박을 했다. 이런 브닌나를 두고 6절에서는 대적 브닌나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대적이라는 것은 한나를 대적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라는 차원에서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한나가 자식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러한 한나를 핍박을 한다면, 결국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대적하는 것 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한나와 같은 입장의 사람을 세워놓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서 어떤 사고방식이 나오는가를 보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우리가 내가 소유한 것을 힘으로 삼아가지고 나보다 소유가 적은 자를 무시하고 내게 있는 것을 자랑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브닌나처럼 나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힘으로 삼아서 다른 사람을 핍박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이다. 사람을 봐가면서 사랑하지 않으신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만이 가졌다고 해서, 내가 그 사람보다 더 낫다거나 신앙이 좋아서 다 많은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그 생각 자체가 하나님을 떠나있는 것 밖에 안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는 보이는 세상 것을 생각하는 불신앙에 지나지 않는다.
신자는 절대로 세상 것을 가지고 비교하거나 경쟁해서는 안된다. 또 세상 것을 가지고 저울질 해서도 안된다. 신자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 있으면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천국에 있게 할 것이기 때문에, 오직 사랑만이 최고인 것이다. 7-8절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한나가 브닌나 때문에 속이 상해가지고 울면서 밥도 안먹으니까 남편 엘가나가 하는 말이,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자식이 없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 아무리 자식이 열이면 뭐하냐, 여자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큰 불행이라는 것이다.
사실 여자에게는 열 아들보다 남편의 사랑이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제가 아직 자식이 벌어다 준 돈을 받아보지 못해서 모르겠는데, 여자가 남편의 돈을 누워서 받는데, 아들의 돈은 앉아서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며느리 돈은 서서 받는다고 한다. 말이 맞는가 모르겠다. 어쨌든 여자가 배아파 낳은 자식이라고 해도, 남편보다는 못하다는 그런 얘기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비록 한나가 자식이 없아도 해도 남편의 사랑이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면 되는데, 왜 자식이 없다고 브닌나가 핍박한다고 해서 밥도 안먹느냐는 것이다. 이게 뭘 말하는 것인가? 우리가 신자로서 천국을 소망하고 살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집 열채보다 낫고, 돈 10억보다 낫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가진 것으로 인해서 밥도 안먹을 정도로 마음이 상해 있느냐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만 생각하는 신자라면 누군가가 내 앞에서 그 무엇을 가지고 자랑한다고 해도 마음은 그저 덤덤해야 한다. 그게 옳다. 누가 몇백몇천만원짜리 다이아 반지를 자랑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천국갈 수 없음을 잊지 않는다면, 그 자랑으로 인해서 마음 상해하지 않을 것 아닌가?
우린 너무 자주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말은 잘하는데,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천국을 향한 길이고 영생을 향한 길임을 아예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자랑하는 세상 것 때문에 때로는 밥맛도 잃어버리고 신세한탄하면서 남편 탓만 할 때가 많지 않겠는가? 한나의 남편은 한나가 아이가 있고 없고 상관없이 한나를 사랑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이라고 했다. 이 사랑에 도전하는 자는 하나님의 대적이라는 판단을 받을 뿐이다. 무조건 적인 사랑에 도전하는 것이 뭔가? 나는 하나님께 봉사를 잘해서 많은 복을 받았는데, 당신은 믿음도 없고 죄만 지어서 그런 벌을 받는다는 그런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사랑에 도전하는 것이다. 소유한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것을 내세우고 자랑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도전하는 것이다. 세상 것을 많이 가진 것이 복이 아니다. 남보다 더 많이 가졌다면, 그것은 남보다 많이 맡은 것 뿐이다.
맡고 있으면서 여기저기 나눔으로써 하나님이 공급하심을 보여주라는 것이다. 그럼데 맡은 것을 자기 소유로 여기고,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삼고, 하나님은 나를 더 사랑한다는 생각을 벗어버리지 못한다면, 다시 말하지만 그것이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로 살아가는 것 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소유를 보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며 살아가기 바란다. 세상의 것을 보지 말고 예수님의 그 크신 은혜를 보며 살아가기 바란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 때문에 천국에 갈 사람들이다. 세상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 천국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상 것 때문에 마음에 근심이 있고 때로 밥맛도 잃어버릴 정도로 마음이 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만 바라보면서, 내가 소유한 것 때문에 남을 무시하지도 말고, 소유하지 못한 것 때문에 마음 상해하지도 말고 살아가기 바란다. 이것이 진심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아는 신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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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다음 주 설교원고입니다 !!
이근호 2004-11-25 21:08:58, 조회 : 207, 추천 : 12
귀하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1. 사사시대에는 '왕이 없음으로 사람들이 자기 소견대로 행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처신했다가 아니가 아니라 도무지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상 초반의 설교는 '하나님이 왕이시니 왕 제도는 절대로 허용되지 말아야 한다'는 식으로 도입될 문제가 아니라 '왜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꼭 이스라엘에 투입되어야 하는가'라고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운이 떼어져야 나중에 사무엘-사울-다윗으로 연결되는 노선에서 이탈되지 않는 겁니다.
2. 한나의 남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의 모본이라고 보셨는데 이것은 크게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만약 귀하의 발상 대로라면 그 뒤의 전개과정은 , '한나는 오로지 하나님 사랑 같은 남편 사랑만을 의지하면서 지독한 브닌나의 구박을 극복할 수 있었다'라고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뒤늦게 자식달라고 하나님께 떼를 씁니다.
앞 뒤가 안 맞지요.
3. 한나가 '자식 없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원수로부터 공격을 받는 표적이 되었으니 성도 여러분들은 세상 것 소유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된다고 주장하셨는데,
'없음'이라는 결핍성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벌충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없음' 자체를 그 무엇으로 채워야 한다는 그 인식 자체를 본 성경 말씀은 문제삼고 있는 겁니다. (사사시대이기에 사람들이 제 소견으로 움직였는데 그 중에 걸러든 한 사람이 한나 라는 아줌마입니다.)
본문에서 이런 발상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귀하께서 한나를 드라마의 선한 여주인공으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입니다.
4. 구원이란, 인간이 스스로 구원될 능력이 없기에 달리 대안이 없어 오로지 하나님에 매달리면 성사되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한나를 긍정적으로 보면 안됩니다.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그 인간을 언약대로 어떻게 다루시는가 하는 그 관계의 장(場)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 가운데서 언약의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고유의 언약의 실체를 드러내면서 홀로 성취해 나가시는가를, 인간의 죄악을 발췌해 가시면서 보이시는 겁니다.
5. 따라서 설교의 결론은,
"가졌다고 까불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이나 기대하자" 가 되어서는 아니되고
"우리의 원수가 곧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가 될 수 있음을 압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우리를 용서하신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자기 성취성에 있습니다. 이점을 믿습니다"라고 되어야 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려서,
구득영 목사님은 한적한 조그만 시골 교회의 담임목사입니다. 그래서 설교의 흐름을 대략적으로 적은 것임을 참고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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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다음 주 설교원고입니다 !!
정영균 2004-11-25 22:07:26, 조회 : 211, 추천 : 11
고맙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참고 삼아 설교를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하신 같은 본문의 설교 내용에 한나의 남편이 하나님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시고, 또한 설교의 결론이 소유를 보지 말고 주님의 사랑을 보라는 것으로 끝났음을 기억하시는지요?
굳이 목사님을 긁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해석이 수시로 달라질 수 있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내 해석을 고집할 수 없겠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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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무신론의 드라마' -손성식 목사님의 독후감
이근호 2004-11-25 13:32:37, 조회 : 162, 추천 : 11
『현대무신론의 드라마』
저자: 앙리 드 류바크 옮긴이: 김 동효
출판사: 신태양사(서울:1980)
기독교라는 이름의 종교는 언제부턴가 인간 욕망의 투기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땅의 부조리를 경험하면서 내뱉는 하소연의 터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는 "욕망의 7일장"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場)이 아니라, 인자라는 묵시적 인격체를 제거한 뒤에 생겨난 욕망의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입니다. "주일성수"라는 "7일장"은 자신을 찾기 위한 욕망의 프로그램입니다. 예배라는 명목 뒤에는 죽음의 그림자를 제거하기 위한 치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