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법에 민감한가?] 2004-10-21
인간은 왜 법에 민감한가? 구득영 2004-10-21 23:37:03, 조회 : 174, 추천 : 12
참 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오늘 '신행정수도 건설특별법'에 대해서 헌법 재판소가 위헌이라고 판결함으로 나라가 온통 벌집을 쑤신 듯 시끄럽습니다. 사실 제게는 보스턴이 뉴욕 양키스에게 승리한 게 더 뉴스거리인데 말입니다. 다음은 '국가 보안법' 차례인가요? 아무튼 무 자르듯 판결하니 시원시원해서 좋습니다. 아니, 도대체 '법'이 무엇인데 이렇게 우리를 함부로 가지고 노는 것입니까? 법이 먼저인지, 인간이 먼저인지 좀 혼란스럽네요. 이런 법에 대해서 궁금하신 분은 이근호 목사의 지난 18일자 부산강의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11일자도 함께 하시면 좋겠죠. 우리교회(www.woorich.net) 사이트에 있습니다. 그리고 보너스로 '교회를 넘어서'를 읽다가 함께 나누고 싶어서 올립니다. 저는 자꾸만 이런 내용이 더 마음에 와 닿습니다. 정말이지 남 이야기가 아니군요. 혹시 이 목사님의 경험담은 아닌지... 너무 실감이 나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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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예수님의 사랑은 힘이나 돈으로 전환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도리어 '나의 마시는 고난의 잔을 마셔야 한다' 고 하셨다. 하지만 교회사업을 염두에 두는 자에게는 이런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들은 예수님의 희생과 자비나 죄사함 마저 힘이나 돈으로 전환시킬 방도를 발굴하게 된다. 그렇지 아니하면 교회라는 사업체의 형성이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여기서 수익성 사업이냐, 비영리성 사업이냐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그 방도는 이러하다. 예수님의 추상적인 이론을 믿을 만한 문제로 간주해서 하늘에 도로 올려보내고 교회를 통해서만 제공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때만 사랑이 얻어진다고 가르쳐서, '믿음주기'와 '돈 챙기기'를 상호 연관시키는 방식이 유효하도록 하는 것이다. 즉 구원이란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기에 추상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그 '믿음'을 교회가 주체자가 되어줄 테니, 믿음이 생긴 자들은 그 믿음이 제공한 교회측에 기부금을 내는 것이 사랑을 받은 자의 마땅한 열매라는 인식이다. 만약에 헌금을 하지 않는 믿음이라면 이는 돈을 사랑한다는 증거요, 따라서 천국에 갈 수 없는 가짜 믿음이라고 규정해버린다. 이르듯, '사랑→돈'이 되는 논조가, 교회의 모든 추상적인 교리에 실제적 가치를 실어주는 주된 성격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다음의 예수님 말씀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교인들에게는 돈을 사랑한다고 정죄하면서 정작 교회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Page13)
(눅 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에 대해서!] 손성식 2004-10-23 12:11:52, 조회 : 287, 추천 : 30
[선택과 예정에 대해서!]
에베소서 1장5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여기서 언급된 "예정"이라는 말은 많은 설명이 필요한 단어입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왜 예정이 필요한가하는 것입니다. 즉, 예정 없이는 교회가 만들어질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추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신약 자체에서 찾을 수 없으므로 이스라엘 선택이라는 구약의 장(場)에서 찾아야 하지요.
구약을 들여다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선택했다고 해서 무조건 영원한 구원으로 가지 않는 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은 철저히 인간실패의 장(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선택-구원-이제 됐다!"라는 순진한 도그마가 아니라, "선택-실패-남은자-왜 남게 되었을까"라는 뿌리깊은 성찰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스라엘의 선택은 왜 "예정"이 있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선택된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실패의 결과물로서 "남은 자"개념이 도출되기에, 어떤 일이 벌어졌기에 남은 자가 생기는 가를 주된 초점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남은자"의 장(場)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희생"이라는 묵시적 흔적이 담겨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언약적으로 표현한다면 "야곱의 선택의 정신"입니다. 이삭의 가족사는 "선택"이라는 개념 속에 [버림-구원]이라는 언약적 구조를 리얼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선택의 섭리를 구원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야곱과 선택의 섭리를 불합리하고 부조리하다고 치부하는 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의 가족사는 평범한 축복의 흐름이 아니라 언약 내에 위치한 구원의 정체성에 대한 지적입니다. 구원이란 그냥 건져내었다는 것이 아니라 버림 가운데서 되찾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되찾게된 이유의 중심에 하나님의 희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희생 때문에 살리심을 받았다는 깊은 기억입니다. 이는 야곱의 "얍복강가의 사건"에서 표현되고 있지요.
사실 이 사건은 야곱의 전 생애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주제적 표현입니다. 그의 전 생애가 하나님의 축복을 얻어내기 위한 삶이었던 반면에 실제로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와는 거리가 멀어진 삶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야곱은 깨닫습니다. 그리고 축복은 자신으로부터 희생당하신 그 분으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그 분에게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환도뼈가 이골되는 아쁜 상처를 경험하면서! 여기서 이름이 바뀝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그러므로 이름의 변화는 하나님의 언약적 현실이 각인되는 지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언약의 흐름 속에서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구약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선택된 자(메시아) 예수에 의해서 재편성 됩니다. 즉, 이 메시야가 이스라엘에 의해 버림을 당하므로써 새로운 신앙공동체가 버림받은 메시야를 중심으로 새롭게 탄생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새 언약의 선택 원리는 공간이나 혈통을 넘어서 새 언약 자체가 되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나라"라는 새로운 질서의 창조를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선택된 장(場)에 있는 모든 자들은 그들의 관심을 오직 그리스도의 나라에다 쏟아 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1장 4절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 되었다는 말은 선택된 자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은혜를 향하여 살아가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5절의 "예정"이라는 개념은 이런 맥락에서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즉, 나의 구원을 집중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등장되고 있기보다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새롭게 통일된 세상을 키우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들의 참여를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정의 관심사는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머리되시는 그의 몸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도 자신의 구원 챙기는 데만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깊이 인식하여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이 있는 쪽으로 날마다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럴 때 궁극적으로 우리들의 눈앞에 전개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요 충만 인 것입니다. 아시겠지요.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교회를 넘어서]라는 기계 손성식 2004-11-03 13:29:43, 조회 : 252, 추천 : 11
『교회를 넘어서』를 읽고 저자: 이 근호 출판사: 대장간(서울:2002)
본 저서는 "진짜 교회인가? 아니면 가짜 교회인가?"를 칼질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장합니다. 저자는 마지막 싸움을 하려는 듯이 비장한 각오로 칼(언약)을 들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필자가 저자에게 교회론을 왜 이런 방식과 내용으로 전개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저자에게 실례일까요? 저자는 현실 속에서 교회 아닌 것들이 교회인체 하는 것이 꼴 보기 싫어서 칼을 들었을까요? 어쨋든 본 저서는 비장함이 감돕니다.
도대체 무엇이 저자로 하여금 교회에 대해서 이러한 시각을 갖게 했을까? 아마 본 책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언약"이라는데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자에게 있어서 "언약"은 뭔가 아주 특별한 의미를 주는 것 같습니다. 마치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바로 이 "언약"때문에 성경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저자가 말하는 "언약"을 제대로 모른다면 사실상 신앙생활이란 불가능한것 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저자는 [언약]속에서 무얼 발견했길래 이다지도 흥분하는 것일까? 그것은 [십자가 사건의 의미]입니다. 저자에게 있어서 십자가 사건은 단지 인간의 구원을 위한 발판이 아니라, 십자가 지셨던 주님에 의한 새로운 창조활동이며 또한 분리작업입니다. 또한 십자가 사건은 이 천년 전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일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 사건화 되고 있는 묵시적 현상입니다.
인간의 죄(욕망)가 분출되는 현장 속에서 주님의 은혜성으로 인한 회개가 일어날 때 마다 교회는 묵시적 존재로서 살아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자에게 있어서 교회의 역사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자가 말하는 교회란 날마다 밀려오는 하나님의 은혜성으로 인하여 회개하는 묵시적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저자가 제목을 붙인 "교회를 넘어서"라는 것은 부조리한 현실교회를 넘어서서 뭔가 괜찮은 교회 해 보자!라는 교회의 개혁이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간섭하시는 주님의 은혜성 안에 놓여 있는 묵시적 공동체로서 교회임을 잊지 말자는 외침인 것입니다. 이것을 저자의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교회란 주님에 의해서 마지막 때에 말씀 성취의 차원에서 생겨난 모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는 것입니다.
저는 위의 명제를 중심으로 본 서를 통해서 저자가 제시하는 중요한 개념들을 몇 가지 소개하려고 합니다. 1. "주"개념입니다.이 말을 이해하려면 저자가 구약성경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저자는 "주"개념을 구약성경에서부터 추적합니다. 그래서 나온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에서 "주"개념은 약속된 바를 오직 주님 자신이 벌리시는 거룩한 전쟁을 통해서만 성취해내시는 분으로서 "주"라는 것입니다. 상당히 난해한 설명입니다. 우선 놓칠 수 없는 부분은 "주"라는 개념이 존재론적 위상의 내용이 아니라, 활동해 나가시는 기능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좀 쉽게 말하면 자리에 앉아서 안식하고 계시는 장(場)이 아니라, 자신의 약속을 홀로 이루고 계시는 장(場)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거칠게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위에서 말한 약속이란 무엇일까요? "의의 나라", "거룩의 나라", "은혜의 나라", "아들의 나라"를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하나님이 만드시려는 [의와 거룩]이 아담의 세계에서는 싸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전쟁이냐 하면 주님의 거룩한 전쟁입니다. 이러한 전쟁이 왜 필요한 것입니까? 이유는 아담의 세계가 이미 하나님과 단절된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로 [선악체제]입니다. 이것은 설사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생명유지를 위해서 이용하고 있더라는 현실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발산하기 위해서 하나님조차도 수단시하는 죄의 굴레이며, 마귀와 한 통속이 되어 버린 장(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벌어지는 거룩한 전쟁은 하나님의 "의와 거룩"이 아담의 힘과 지혜로 달성되지 아니함을 증명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홀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해 내셨음을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을 통해서 인간이 지닌 육의 그 죄악적 전모와 더불어서 그로 인해 하나님 편에서 어떤 희생을 치루었는지도 드러나게 됩니다.
2. 성전의 누락사상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왜 성전을 짓도록 하셨을까요? 즉, 이스라엘에 성전은 왜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전을 인간의 손으로 지은 건축물로서 표현하게 하신 의도가 무엇일까요? 이유는 인간의 한계성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지은 성전에는 하나님이 안계시더라!. 인간이 지은 성전은 거룩의 장(場)이 아니더라!.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전의 누락사상"입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연결시켜서 생각해 보자구요. 성전의 모퉁이 돌 되시는 예수님은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는 성전사상으로 인해 버림당한 돌이 되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바로 예수님이 버림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성전이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만으로 조성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생겨난 거룩한 자리가 바로 성전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가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규정할 때 그것의 의미는 성도가 십자가의 현실속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이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건물적 개념이 아니라,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현장입니다.
그러면 현실교회가 자신들의 모이는 건물을 가지고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뭡니까? 그것은 엉터리이지요. 성전을 멋있게 꾸미려는 거룩한 충성은 예수님과 하등 상관없는 인간의 종교놀이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니까요. 마치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는 것 처럼요. 성전이란 주님의 활약상을 죄인의 회개를 통해서 드러내시는 장(場)이지요.
3. 선택이 모든 흐름은 하나님의 선택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인간이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해 나가신 것입니다. 인간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이루어 내신 결과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의 모든 물음들은 폐기처분 당합니다. 왜 아벨은 선택했고 가인은 그렇지 않았나요. 왜 이스라엘은 선택했고 이방은 그렇지 않았나요. 왜 예수님만 언약을 이루시는 분인가요. 왜 우리 조상은 선택하지 않았나요. 왜 나는 선택했고 내 가족은 선택하지 않았나요. 등등 수 많은 질문들은 하나님의 선택 앞에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입니다. 거기에 토를 달아서는 안됩니다. 어느 인간도 빠짐없이 지옥에 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이 나에게 다가온 것에 대해서 충격을 받으셔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우발적 사랑에 저는 졸도합니다. 마치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요. "내가 죄인중의 괴수니라"
==========================================================================[re] 그렇습니다. 이근호 2004-11-03 17:04:42, 조회 : 206, 추천 : 12
신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언약에 의해서 제한되어집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내려는 그 언약의 능력은 그 능력을 받은 자 외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진정으로 하나님인 줄 알지 못하게 배제되는 것은 언약적 원칙입니다.
만약 어떤 이가 언약의 능력을 받아 제대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그 성도는 오직 언약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일하심을 이해하게 됩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행한 기도처럼.
그 언약이 최종점이 십자가입니다. 언약이 그것으로 다 이루어지니까요.
따라서
구원받은 자라면 십자가를 비켜갈 수 없습니다. 제쳐놓을 수도 없습니다.
십자가를 뒤로 돌리고 새로 뭔가 시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그대로 받은 그 죽음 속에 놓여 있는 상태에서 비로소 생명을 말해서 해석해내고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기 백성의 죄로 기인한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이미 죄인인채로 계속 가는 겁니다. . 죄인된 자신을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따로 뽑아내어 그것으로 뭔가 새로 시작할 입장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게되면 죄인으로써 예수님의 공로와 무관한 절대적 죄를 마구 온 우주에 살포하는 것이 됩니다.
성도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분리되지 아니한다면 예수님의 의로 인해 의인으로 살아갑니다. 자신이 그 안에 이미 죽은 자인고로 자신이 왜 죽을 수 밖에 없는가와 연관되는 죄를 보이게 되며 동시에 (주님의 대속의 죽음과 분리되지 않았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의인인 것은 예수님의 공로에 근거한 의임을 온 우주에 살포하게 됩니다.
이 현상이 구약부터 내려오는 '언약민'의 삶의 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절대로 임의로 죄를 지을 수 있는 입장이나 권리가 없습니다.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다만 평생을 다가도록 죄가 자신을 통해서 계속 새어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성도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게 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니 내가 아니요(이점이 대단히 중요함)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 15:10)
이로서 성도는 자신을 증거하는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만을 증거하는 인생을 삽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심은 산 자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아가페와 에로스]라는 기계 손성식 2004-11-06 10:31:35, 조회 : 320, 추천 : 13
『아가페와 에로스』라는 기계저자: 안더스 니그렌 옮긴이: 채 위출판사: 신태양사(서울:1980)
「아가페」란 언약의 물줄기 속에 자리잡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아가페란 독자적인 사상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흐름을 통해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내포적 사상입니다. 이에 반하여 「에로스」란 욕망 하는 인간의 자연스런 발로입니다. 언약 없이 진행된 아담의 고유한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현실 속에 자행되고 있는 모든 방향의 사랑에 대한 선포는 「에로스」의 투영입니다.
「아가페」와 「에로스」의 만남은 하나님의 언약이 [선택]이라는 방식으로 이스라엘 역사속에 현실화 될 때부터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맥락에서 보면 성경은 「아가페」와 「에로스」사이의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의 장(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다툼은 이스라엘을 넘어서 복음이 전파될 때 필연적으로 지속되어온 혈투이기도 합니다. 본 서의 특징은 「아가페」와 「에로스」사이의 긴장상태를 복음이 이스라엘을 넘어서 헬라지역에 선포되었을 때부터 어떻게 변모되어 왔는지를 추적하려는데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참 훌륭한 작업이지요.
「아가페」의 특징은 하나님의 "자발성"과 "무동기성"입니다. 제 표현으로 하자면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좀 거칠게 만한다면 하나님 마음대로입니다. 인간의 의사와 상관없이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계시한 것입니다. 하늘의 세계가 이 땅에서 그 진면목을 형상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사다리가 이 땅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택"을 목적으로 언약의 흐름 속에 내포되어 이 땅에서 "죽임 당하심"이라는 방식으로 작렬합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 어린양의 계시의 복음입니다.
「에로스」의 특징은 "소유하려는 의지"이며 "욕망"입니다. 인간의 노력이며 오로지 자신의 공로와 업적에 의존합니다. 이 땅에서 조작된 사다리로 하늘 세계에 도달하려는 도발입니다. 구원은 인간하기에 달려있다는 종교입니다. 영혼불멸을 부르짖는 이 땅의 몸부림입니다. 언약과 단절된 아담세계의 본능입니다. 하나님도 인간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악질입니다. 분리해서 누구는 천국 보내고 누구는 지옥 보내는 편협한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회복시키는 보편적인 하나님임을 천명합니다.
「아가페」는 묵시세계이고 「에로스」는 역사세계입니다. 이 두 세계가 이 땅에서 충돌합니다. 그것은 언약 사건이며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아가페」와 「에로스」의 만남의 화해의 장(場)이 아니라 치열한 격전 장(場)입니다. 사랑은 보편적인 사상이 아니라, 피터지는 싸움을 벌여야 하는 선택적인 사상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 죄인을 찾아오셔서 피어오르는 것이 「아가페」이고, 인간들끼리 서로 얼싸안고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모든 노력으로부터 피어나는 것은 「에로스」입니다.
「에로스」는 일상적인 현실이지만, 「아가페」는 우발적 현실입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현실은 단면의 「에로스」이지만, 성도가 경험하는 현실은 두 가지 면을 동시에 경험하기에 현실에 대한 딜레마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현실을 현실로 이해하면서 「아가페」에 설복 당하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복음이란 「아가페」가 현실화되는 장(場)이며,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사랑에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드는 현상입니다.
##############################################################################################! ~~(묵상 후~) 정경의 2004-11-08 23:14:06, 조회 : 353, 추천 : 12
어느 광인의 이야기
내가 어쩌다 미친 사람이 되어 버렸는지 물었지?사연은 이렇다네.
어느날 아주 곤하게 자다 깨어나 보니내 가면이 모두 없어졌지 뭔가.내 가면은 모두 일곱 개였는데,내가 직접 만들어 일곱 평생 동안써왔던 거였다네. 나는 북적대는 거리를 가면도 없이헤집고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러댔어."도둑이야, 도둑! 빌어먹을 도둑놈 같으니라구!"
그러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비웃기도 하고,또 어떤 사람들은 무서워서 제각기자기 집으로 뛰어들어가 버리더군.그렇게 법석을 떨며 시장까지 갔을 때,어느 집 옥상에 서 있던웬 꼬마 녀석이 "미친 사람이다"하고 소리를 질렀어.난 고개를 들어 그 녀석을 올려다 보았다네.
그러자 아무것도 덮어쓰지 않은 나의 맨 얼굴에태양이 입을 맞추는 게 아닌가!그것은 내 생애의 첫 경험이었고,내 영혼은 태양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라더 이상 가면 생각은 나지도 않았어.얼마나 황홀했던지 나도 모르게 이렇게 외쳤지."내 가면을 훔쳐간 자에게 축복이 있으라!"
이리하여 난 미친 사람이 되었다네.그리고 이렇게 미치게 되자오히려 자유롭고 편안해졌어.고독에서 비롯되는 자유를 알게 되었고,또 이해받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자 안심이 된 거지.누군가가 우리를 이해하게 되면우리 속의 무언가가 그 사람에게 얽매이게 되니까.하지만 내가 이렇게 자유롭다고 해서너무 자만하지는 말아야겠어.감옥에 있는 도둑도다른 도둑으로부터는 안전할테니까.
- 칼릴지브란-
칼릴의 "어느 광인 이야기"는 한 사람의 거듭남을 비유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가면을 도둑맞으므로 광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사실은 가면을 벗는 것이 정상이고 가면을 쓰는 것이 미친 짓이지만세상에는 가면을 쓰야 살 수 있기 때문에 가면을 쓰는 것이 정상이고가면을 벗은 것을 미쳤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아버지, 어머니, 선생님, 사장님, 심지어 부르는 이름까지도 알고보면 가면입니다. 칼릴은 일곱개의 가면이라고 표현했는데 일곱은 완전 수이니까사람이 살기위해서 만든 모든 가면을 상징하는 수로 보면 되겠습니다.
세상에서 살려고 하면 가면을 쓰야 합니다.가면을 벗는 사람이 있다면 미친사람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지금 당장 누구라도 가면을 한번 벗어 보십시요!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정신병자 취급당할 것이며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 할것입니다.
그래서 가면을 벗는 것은 미친 짓이며, 또 스스로 가면을 벗는다는 것은자신의 의지로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그래서 칼릴은 가면을 도둑맞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밤중에 신랑 예수께서 도적 같이 오셔서 내가 잠든 사이에 가면을 훔쳐 가버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가면을 벗는 것은 우리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하는 일은 가면을 쓰는 것인 율법의 행위 뿐입니다.자기 의를 세우기 위하여 자기의 부끄러운 곳을 가리는데 온 인생을 허비합니다.옷입고 화장하고 머리하고 또 지식축적, 명예, 부귀, 심지어 종교까지 가면으로 쓰는 것이 우리의 삶의 전부 입니다.
벌거벗으면 안되기 때문에 가면을 만들어 쓰는 일 외에는 가치있는 일이없습니다. 가면을 벗는 길은 누군가가 훔쳐가야만 가능합니다.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와 허물로 부터 벗어날 수 있고우리 스스로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것은 택한 백성들의 가면을 훔쳐가기 위함이었습니다.가면을 쓰고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가면을 도둑맞으면 광인이 됩니다.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사람이 되며아담의 후손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족보에 속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세상사람들의 기준으로 볼때광인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내가 만들어 쓴 가면은 도둑맞지 않으면 벗을 수 없습니다.어떤 사람은 예수를 하나님을 성령을 교회를 가면으로 쓰기도 합니다.절대로 벗을 수 없고 벗으면 안되는 가면인데 이것도 도둑맞는 날이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철석같이 믿었던 메시야 예수를십자가에서 두둑맞았습니다. 그 때 광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느날 가면을 도둑 맞은 사람들은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배설물이 되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가면을 도둑 맞았을때 없어진 가면때문에 근심하고실망했지만 찬란한 태양을 맞으면서 내 가면을 훔쳐간자 복 받으라 외치는 자유와 평화가 찾아옵니다.도둑맞은 사람만이 아는 평안이며 자유며 기쁨입니다.
여러분 쓰고 있던 가면 도둑 맞은 적이 있습니까?가면을 도둑맞은 자만이 벗게 되고 벗은 자만이가면을 훔쳐간 도둑에게 감사할 수 있습니다.
==========================================================================[re] ! ~~(묵상 후~) 이근호 2004-11-09 07:42:50, 조회 : 301, 추천 : 16
>광인 이야기는 이미 니체가 이야기했고, 디오게네스가 유명한 원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인이란 비주류가 주류에 대한 염원에서 비롯된 일종의 도취일 수 있습니다.
즉 자기 존재성을 타인을 객체로 삼아 정립하려는 노력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복음 속에 놓인 사람은 자기 형편이나 처지에 신경쓰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죄됨과 십자가로 통한 주님의 용서하심에 대해서 감사하고 그런 자세로는 엄연히 살아계신 주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사람입니다.
##############################################################################################[언약적인 사랑] 손성식 2004-11-16 22:38:19, 조회 : 243, 추천 : 16
『언약 적인 사랑』
사랑에 대해서 알려면 두 가지의 이질적인 흐름을 포착해야 합니다. 하나는 아담의 세계로부터 피어오르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다가오시므로 형성된 내용입니다. 하나는 아담세계의 보편적인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언약 적인 특이한 흐름입니다. 언약 적인 사랑은 아담세계의 보편적인 흐름을 가로질러 오면서 충돌을 일으킵니다.
아담의 세계로부터 생성된 사랑은 욕망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조차도 소유하려는 수많은 계열의 몸부림으로부터 만들어진 하늘욕구의 사다리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보편적 사랑으로 끝을 냅니다. 어느 누구하나 제외됨이 없이 모든 아담의 세계가 회복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아담세계의 선언입니다. 그래야 하나님답다는 인간 편에서 농성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 쪽에서 제공된 사랑이 있습니다. 언약 적 사랑입니다. 언약이라는 장(場)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를 공박하며 다가섭니다. 인간의 의를 끝장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작심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희생당하심 속에 내포된 죄인의 죽음이 잔존합니다. 오직 언약을 통해서 자신의 사랑을 펼쳐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선포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언약 적 사랑은 선택적 사랑입니다. 그 분의 자유로운 사랑입니다. 그 분 마음대로 베푸시는 우발적 사랑입니다. 이것은 경험하는 당사자만 아는 그런 사랑입니다.
언약 적 사랑을 조심스럽게 파헤치면 그 속에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란 인간 스스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마귀의 권세아래서 종노릇하는 현실입니다. 빼도 박도 못한 현실, 그것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본질이란 인간의 행위문제보다 더 근본적으로 인간이 마귀에게 붙잡혀서 자신의 욕망을 발산하더라는 죽음의 행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승리입니다. 버림당하셨기에 승리하신 분, 죽임 당한 어린양의 승리입니다. 그 분의 승리에 의해서 생겨난 부산물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규정할 때는 철저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피 흘리신 흔적이 완벽하게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십자가의 흔적이 지워진 교회라면 이미 주님과 상관없는 아담세계의 사이비 종교집단에 불과합니다. 이름만 남아 있을 뿐, 주님의 능력은 찾아볼 수 없는 고약한 몸뚱이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혹시 오해가 생길까봐서 한마디한다면, 제가 지금 십자가의 흔적을 가지자고 요구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란 십자가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는 선포이지, 십자가의 흔적을 가지기 위해서 노력해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아시겠지요.
언약 적 사랑이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수여된 것입니다. 그것은 "저 사람은 받았는데 왜 나는 못 받았느냐!" 고 따질 성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나는 받았는데 저 사람은 왜 못 받았을까!" 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언약 적 사랑이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혹시 받았다면 그것으로 인생의 모든 문제에서 자유케 된 것입니다. 왜요? 이미 죽었으니까!. 어디에서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마치 말기 암환자가 모든 일상생활을 정리하듯이! 좀 더 거칠게 말하자면 십자가 앞에 서 있는 몸처럼!
############################################################################################## 성령 훼방죄에 대하여 김광민 2004-11-20 11:52:05, 조회 : 147, 추천 : 15
목사님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정말 이해가 잘되며쉽게 설명해 주셔서 많은 도움이 됩니다저번주 저희 교회에서 설교 시간에 성령 훼방죄란 말씀이 나왔습니다두리뭉실하게 지나가서 이해가 되진 않았습니다
마12:31~32절에 ㅁ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란 말씀입니다
* 성령 훼방죄는 어떤것이며 *말씀대로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 서 사함을 받지못하는지 (성령으로 회개하면 사함을 받는 다고 해서 헷갈리네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도 성령 훼방죄 인가요
좋은 답변의 말씀 기대 합니다
==========================================================================[re] 성령 훼방죄에 대하여 이근호 2004-11-20 12:29:10, 조회 : 233, 추천 : 25
>성령은 훼방이 되지를 않습니다.
인간은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그 증거가 바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이 막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성령받는 분을 모독하고 배척하고 싫어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예수라는 분이 성령으로 사시는 분인지 아니면 자기 기분에 살아가는 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충분히 이해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사하심의 능력이 십자가를 근거로 삼고 성령께서 그 효력을 자기 백성에게 실시하기 전까지입니다.
어느 세상에서 성령이 활동하게 되면 그 때부터 성령받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자가 등장하면, 그것으로 세상은 영원히 두 부류로 갈라서는 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어느 한쪽이 성령받았다는 말은 다른 한쪽은 자동적으로 멸망입니다.
둘 사이의 이동은 성립되지 못합니다.
정말 구원된 자라면 오직 성령님에 의해서만 예수님을 구주로 알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시의 능력으로는 예수님을 구주로 알 재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원을 성령님의 공로로 돌리지 않고 여전히 자기 행함에 골몰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함을 받지 못하는 자입니다.
==========================================================================마 12:30-32 (인자와 성령)
인자와 성령
2003년 11월 31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2:30-32
12: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뭔가 자꾸 싸우시는 분입니다. 그 싸움의 여파가 십자가 죽으심으로 번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싸우시는 그 대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갈 수가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12:14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을 상대로 싸우고 있습니다.
이미 21세기에 접어든 우리들 눈으로 볼 때, 이 둘 진영 가운데의 싸움은 다 사소하고 부질없는 자존심 전쟁처럼 보입니다. 차라리 예수님편에서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그 모든 적들을 용납해 주어서 그 시대와 그 사회에 평화가 찾아드는 것이 더 선한 일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전쟁을 그런 안일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심판주로 오셨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심판을 내리시기 이전에 먼저 심판의 기준부터 통보하려 오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하심입니다.
오늘 본문 31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깜짝 놀란 이유는, 하나님쪽에서 먼저 '용서하심'을 제안하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즉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생각해봐도 너무 죄가 많아 신의 진노가 무서워서, 하나님에게 집단적으로 하소연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지못한 용서를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 아예 애초부터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용서함을 얻되'라는 방침이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하나님 편에서 주어진 그 무수한 지시와 거기에 따라 등장되는 형벌들은 다 무어란 말입니까?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가차없이 저주를 퍼부어시는 그 하나님의 엄포는 그냥 무기력한 엄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그렇지않다면 하나님의 새로운 면을 접하고서는 제가 놀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얼마나 무수한 죄를 짓습니까. 그런데 그 죄에 대해서 유일하게 심판 권한을 가지신 심판주의 입에서 '용서'라는 용어가 튀어나왔다는 것은 참으로 반갑고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용서 방침'은 확정적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확정적인 것에다 남은 목숨을 섞어 넣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죠. 사람은 평소에 늘 흔들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흔들임이란 다름 아닌, '욕망이 요동침'입니다.
사람의 행동이란 욕망의 요동침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으로 인해 마음은 '욕망의 지형도'가 됩니다. 욕망은 밀림의 하이에나처럼 먹이감을 노리면서 덤벼듭니다.
욕망이란 물침대와 같은 한 쪽으로 누르면 다른 쪽으로 황급히 쏠리게 마련입니다. 욕망의 에너지가 어디론가 빠져나가지를 않고 늘 우리 안에서 춤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평소에 인간들이 자신의 욕망을 어떤 법칙에 준해서 조종하게 됩니까? 그것은 바로 선악체제에 의해서 조정하게 됩니다. 즉 스스로 판단해서 악한 욕망이라고 여기면 눌려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그 욕망이 아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딴데로 그 에너지를 몰리게 되어 있습니다.
소위 악한 욕망에서 선한 욕망에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조종술입니다. 하지만 뭐든지 과한 것은 아예 아니한만도 못하다는 상식처럼, 아무리 착한 일이라도 과도한 욕망이 집중되어 실시하면, 짜증이 나게 마련입니다. 자기 자신이 불편해 합니다. 여기서 공자의 이론이 도입됩니다. 소위 '중용', 혹은 '평상심'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욕망이 아니지요.
가만히 있는 욕망은 욕망의 속성상 굶주림을 느끼게 됩니다. 새로운 먹이감을 찾아 욕망은 자체적으로 해소와 발산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렇듯 인간은 평생을 살면서 불안정에서 오는 불편함을 겪습니다. 이것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는 없을까요?
예수님의 싸움은 바로 이런 선악체제와의 싸움입니다. 즉 인간의 근본은 선악체제가 되면 안된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누구나 할 것없이 하나님이 주신 방석을 깔고 앉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노아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은총성입니다.
하나님은, 노아 방주에 들어 있었던 정결한 제물을 받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시는 물로서는 이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이것은 인간들의 생각하는 것이 모두 악함이니라"고 말입니다.
즉 노아 이후의 세상은, 인간의 잘, 잘못과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내려지는 은총 속의 세계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노아언약입니다. 무지개처럼 세상을 하나님이 은총으로 아우려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악인이 횡행하고 설쳐서, 계절의 안정된 변화와 무상으로 주어지는 햇빛과 단비가 제공되기 마련입니다. 우리 인간은 지금도 이런 은총 안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 사실도 모르고 은총이라는 방석 위에 앉아있으면서도 그 위에서 선악 체제에 준해서 자신의 올바름과 정당함을 마음껏 과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심판주로 오신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에 앞서서, 이런 세계에 향하여 바른 심판의 기준을 먼저 제시해 주시고자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2:22에 보면,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말하며 보게 된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의 자질이나 인격을 아예 보시지 아니하시고 일방적으로 귀신을 물러가게 하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충돌은 이런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방적인 '용서의 사건'이라는 발화지점으로 비롯됩니다.
그동안 바리새인들은 인간들이 해낼 수 있는 최고 경지의 윤리와 도덕을 신봉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면 그것 외에 또다른 심판이 기준은 없을 거라고 확답하고 있었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모든 체제를 뭉개버리려고 이런 '용서' 사건을 우발적으로 일으키시는 겁니다. 천국의 기준은 이미 확정되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기준은 바로 예수님의 손에 달린 용서의 법칙입니다.
이 용서의 법칙은 기존의 선악 법칙을 축출해 버립니다. 아담이 선악과 따 먹고 난 뒤, 인간들의 욕망은 이 선악체제에 의해서 다스려 왔습니다. 욕망의 교통정리는 선한 욕망과 악한 욕망으로 분리시키도록 했습니다. 악마의 얼굴과 천사의 얼굴을 놓고서, 천사의 얼굴을 갖는 것이 심판에서 구원되는 길이라고 다들 그렇게 알고 삽니다. 왜냐하면 달리 다른 대책이 없기 때문이죠.
바리새인 뿐만 아닙니다. 모든 인류가 다 이런 선악체제에 준해서 그동안 자녀 교육과 공교육을 시켜왔습니다. 모든 교훈과 훈계도 이 차원에 준해서 실시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 말씀까지 이 법칙에 준해서 해석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악 체제는 용서체제의 원수입니다.
마태복음 8:11-12에 보면,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소위 '나라의 본 자손'들이 쫓겨나야 비로소 참되게 예수님의 용서체제 안에 있는 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작업을 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입장에서는 뭐든지 선악체제로 이해하기 때문에, 현 율법 준수 이외에 다른 용서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병고침은 약령이 저질른 일어야지만 앞 뒤 논리가 맞다는 겁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결정적으로 그들의 악마성을 들추어내는 논리를 준비하셨습니다. 선악체제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발언을 하시는 겁니다. 즉 이 땅에서의 사건은 그 원인에 의해서 생긴 결과들입니다. 원인없이는 절대로 못일어나는 결과들입니다.
이 말은, 하나의 결과는 오직 하나이 전 단계의 원인이 있을 뿐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결과는 하나인데 그 결과를 낳게 하는 바로 전 단계의 원인은 결코 둘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자들에게 의도적으로 헷깔리게 하십니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추방하는 일에 대한 원인을 둘도 나누고 계신 것입니다. 과연 성령님이 하신 일까요 아니면 인자 되시는 예수님 자신이 하신 일일까요? 둘 중의 하나를 찝어야 할 판입니다.
'인자'란 다니엘 7장에 의하면 하늘에서 나타나시는 심판주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심판주가 선악체제와는 다른 오직 '용서하심'이라는 방식으로 심판 할 줄은 아무도 알지 못한 사태입니다.
왜 인자되시는 분이 이렇게 오셔야 합니까? 그것은 이사야 53:1-4에 의하면 인자되시는 분은 아무도 이해 못하는 못하는 식으로 오셔야지만 말씀이 완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인자의 이러한 고난성과 이해불가성은 모두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에 그것을 용서하시겠다는 차원의 완성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따라서 인자를 지금 이 시대에서 못알아보는 자는 용서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성령님이 오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가 최종적으로 다 드러난 시기입니다. 따라서 그런 시기에 성령이 하시는 일을 막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즉 예수님이 보시는 죄란,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를 시시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 대신 선악체제에 의한 자기 정당성과 의로움을 그대로 유지하는 자가 지옥하는 식의 심판입니다.
이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당함에 속아넘어서는 아니됩니다. 자신의 욕망의 교통정리를 정당화 하는 것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으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모든 기초는 무너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용서의 세계 안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싸움을 우리도 하게 하옵소서. 죄인을 무조건 용서하시는 그 사랑만이 감사하고 즐거워하면서 지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