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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하나님의 지옥만들기] 2004-10-06묻고답하기-

[하나님의 지옥만들기] 2004-10-06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하나님의 지옥만들기
이근호 2004-10-06 10:08:28, 조회 : 233, 추천 : 22

처음에도 그러했다.
인간은
차츰 타락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모든 죄를 짓고 싶어했다.

죄지을 것만 가지고 놀려고 한다.
씩씩거리면서 논다.
"내가 못 지을 죄가 또 있을까?"

'자유'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
'언제든지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
이 자유를 사랑한다.

이들이 교회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람의 자유를 숭배하는 집단이다.

인간은 신보다 귀하다고 전도한다.
인간은 예수보다 소중하다고 전도한다.

예수는 가고
인간의 자유만 남아라!

자신들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기 위해
라이벌을 찾는다.
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신에게 내기를 건다.
이 세상에서 누가 더 인기가 있는지!

진 쪽은 군말말고 추방당하기로 정했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 오신 예수님은 사회에서 추방당했다.

인간이 승리했다.
교회에 인간만 남은 것이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치 않다.
이제 신은
인간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

눈 먼 삼손이 맷돌을 돌리는 것처럼
신은 묵묵히
등에 채찍을 맞아가며
사람이 원하는 바를 축복 주기 위해
교회 안에서
맷돌을 돌려야 한다.
집회 때마다 돌려야 한다.
금식철야 기도회 할 때도 돌려야 한다.
인간들이 부르짖을 때마다 맷돌을 돌려야 한다.
더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한가!

그런데
사방에서
지옥에서 내려오는
마지막 커텐들이 쳐져지기 시작했다.

갇혔다!

이로서 지옥은 성공적으로 만들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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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를 읽고
손성식 2004-10-08 22:36:54, 조회 : 220, 추천 : 14

『엔트로피』를 읽고
-21세기의 새로운 문명관-
저자: 제레미 리프킨 옮긴이: 최 현
출판사: 범우사(서울:1998)

하늘의 세계를 열외 시켜 놓고 땅의 세계만을 염두해 두고 현실로 닥쳐오는 위기를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를 묻고 답하고 있는 것이 본 서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장(場)이 이 땅이기에 지구의 존재가치는 무한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지구뿐만 아니라 지구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태양조차도 무한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지구를 삶의 터전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인간들조차 자신들의 욕망의 작동으로 그 유한성을 앞당기고 있다는 것이 더 서글프게 와 닿는 것입니다.

이 땅이 망해가고 있다는 사실이 현실이지만 그저 멍하니 망해 가는 삶의 터전을 보면서 손놓고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저자는 대안을 찾아봅니다. 그렇다면 저자가 이 땅에서 느끼는 위기의 실체를 찾아 헤매고 나서 찾은 정답은 무엇일까요? 에너지입니다. 즉,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가장 큰 문제는 에너지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각 시대를 이끌어온 세계관과 관련되어 있기에 저자는 이전의 세계관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세계관을 내세웁니다. 그것이 바로 본 서의 제목으로 삼은 [엔트로피]입니다.

저자는 [엔트로피]야 말로 위기에 처한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엔트로피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열역학의 제2법칙으로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사용이 가능한 것에서 사용이 불가능한 것으로, 혹은 이용이 가능한 것에서 이용이 불가능한 것으로, 또는 질서 있는 것에서 무질서한 것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저자가 주장하는 [엔트로피]가 진리로 대접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세상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서 질문해볼 수 있겠지요. 세상이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에너지가 부족하다니! 그동안 세상이 얼마나 놀랍게 발전했는데 이해 할 수 없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과학의 세계가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있을까요!

저자가 볼 때 "에너지"라는 맥락에서 세상이 발전했다고 생각이 안 든다는 것입니다. 현대를 낳은 뉴턴의 고전 물리학이 그 당시에는 진리처럼 보였지만, 그 내용이 완벽하게 드러난 지금에 와서는 쓰레기로 수거 당하기에 충분한 해악을 가져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난 산업혁명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유익이 도대체 무엇이며, 물질적인 번영에 의해서 생겨난 근대 문명이라는 거창한 구호는 세상을 에너지 위기라는 궁지에 몰아 넣었다는 반성을 저자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역사의 원동력을 에너지로 봅니다. 모든 상황을 에너지 중심으로 본 다고 할까요!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형태나 움직임은 에너지를 여러모로 집중, 변화시킨 결과가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 빌딩 그리고 자동차나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은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화하는 에너지 양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무기의 발명은 에너지의 집중과 흐름이 높아지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에너지의 흐름을 집중시킬수록 전쟁은 비인간화되며 살육적인 양상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저자는 현대인의 과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물질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진리(엔트로피)와의 합일을 도모하여 여기서 얻는 만족으로부터 비롯되는 인간적인 해방감을 체험하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를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는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과제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본 서는 현대 사회를 과학적으로 종합 진단하여 그 처방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엔트로피만이 살길이라고!]

우리가 사는 이 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욕망의 움직임들이 또렷하게 보여집니다. 찾아오는 죽음을 필사적으로 방어하려고 하지만 결과는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흙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인간의 현실은 이 땅의 역사가 점점 발전해서 문명의 결심을 맺은 것이 아니라, 흙으로 되돌아간 무수한 흙들의 더미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저자가 잘 본 것은 역사가 발전한다는 왜곡된 진실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관점에서요? 에너지라는 관점에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관점에서도 그렇습니다. 역사는 발전이 아니라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의 반복과 은혜성의 반복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존재 이유는 인간의 문명을 유지시키는 에너지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분이 뭘 하시길래요? 자신의 몸을 만드시기 때문에요. 몸은 어떻게 만들어지는데요? 십자가 현장이 현실화되는 것이지요. 아니 너무 거창하게 말하지 말고 좀 피부에 와 닿게 얘기 할 수 없나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가 진실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이 사실은 진실이 아니라 가상 이며, 진실은 십자가의 현실 속에 감추어져 있음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현실 속에 감추어진 것은 무엇인데요?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진 자발적 존재가 아니라 마귀의 통제 아래서 노예로 봉사하고 있었다는 진실이지요. 그러므로 복음이란 예수님께서 마귀를 정복하여서 그의 통치를 이 땅위에서 펼치시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통치는 어디서 볼 수 있는 것입니까? 한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현실 속에 참여되는 것으로 그렇습니다. 좀 쉽게 얘기 해 줄 수 없습니까? 회개할 때입니다. 다른 말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는 고백이 터져 나올 때입니다. 아니, 그것은 예수 처음 믿을 때 하는 것 아닙니까? 저는 반대합니다. 회개란 신앙생활 전 방위에서 터져 나오는 은혜 사건입니다. 자, 정리하겠습니다. 이 땅의 문제는 에너지 문제가 아니라 언약의 문제임을 명확히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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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엔트로피]를 읽고
이근호 2004-10-09 08:09:49, 조회 : 219, 추천 : 14

닫혀진 계(system)에서는 열역학 제2법칙에 준해서 쓸모있는 양질의 에너지가 축소되고 혼돈이 가중되지만

열려진 계에서는 이 법칙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쓸모있다', '쓸모없다' 하는 것도 모두 인간 중심으로 본 견해이지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나 우주가 깨어져도 그것이 딴 데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신선한 우주의 형성하는 원자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분은 어디까지나 전체에 일부로 포함된다고 여긴다면 에너지 제 2법칙이 위기를 조성하는 것처럼 간주되지만, 전체가 이미 부분 안에 함유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일종의 자연스러운 '흐름'과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

특히 열역학 제2법칙을 결정짓는 요소가 '시간'이기에, 그 '시간'을 비가역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가역성을 지니고 있다고 여기면 도리어 우주와 생명의 무한한 반복성과 자생력을 새삼 발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현대 물리학의 발향입니다.

즉

이 우주가 깨어져도
이 우주를 대체하는 우주(초끈 이론에 의하면 옆 우주와 맞닿아져 있다)가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낸다고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새로운 우주 안에서 '그 우주를 보고 감탄하고 해석하는 지성적인 생물체인 인간'이 그 우주로 인하여 새로 발생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우주에 대한 이해는 그 우주 안에서 실제로 살게 되는 그 지성체들의 몫으로 돌리자는 겁니다.(우리가 미리 걱정할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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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와 양
정낙원 2004-10-09 14:44:19, 조회 : 291, 추천 : 14

목자와 양 (요 10:1-10)

사람에게는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이 있고 누가 하라고 강요하여도 하기 싫은 일이 있습니다. 좋아서 하는 일은 누가 말려도 하게 되고, 싫은 것은 뒤에서 떠밀어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면 시간이나, 물질이나, 건강을 투자해도 아까운 생각이 안 들지만 싫은 것을 하면 모든 것이 아깝다고 생각되고 허비한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모든 것을 투자하고 기쁨으로 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자기 삶에 기쁨이고, 의미이고, 활력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싫은 것을 취미 생활로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취미 생활은 그 사람에게는 삶에 의미가 되고, 삶에 힘이 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취미생활은 밤이 새도록 하여도 피곤함을 모르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하라고 하면 금방 싫증을 느끼고 짜증이 나고 의욕을 상실해 버립니다.

이같은 이치로 인간이란 타율에 의해서 하는 것을 싫어하는 존재들입니다. 타율에 의하여 한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의 마음에 일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 역시도 누가 강요하거나 억지로 시켜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힘만 들고 짜증스러워집니다. 목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에 우러나서 하게 되면, 하면 할수록 신이 나고 기쁨을 느끼고 재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 좋은 사람은 할수록 힘을 얻지만, 싫은 사람은 할수록 힘을 잃어버리게 되고 실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이러한 본성을 하나님은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힘을 내세워서 강제적으로 예수를 믿을 것을 강요하시지 않으십니다. 이유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관계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마음도 없는데 사랑하라고 하면 그 사랑은 옳지 않을뿐더러 오래가지도 못합니다.

그런 강요된 사랑은 어떤 조건만 되면 떠나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강제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강요치 않는 이유는 믿음은 강요한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를 주로 믿는 것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 둘은 하나 될 수 없고 본성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고 배척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은 부정함을 밀어내고 부정함은 거룩은 밀어냅니다. 그리고 알 것은 의와 불의가 함께 하면 의가 손해를 입게 됩니다. 즉 깨끗함과 더러움이 만나면 깨끗함이 손해를 입게 된다는 말입니다.
[마치 착한 학생과 나쁜 학생이 사귀면 착한 학생이 나쁜 학생을 닮는 것과 같다고 할 수있지요.] 그럼에도 의와 불의가 만남을 가진다는 것은 의 쪽에서 희생을 감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더러운 죄인을 만나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비하이고 자기 희생이고 자기를 포기하는 낮아지심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를 주라고 하는 것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낮아지심이 있었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내가 주를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낮아져서 찾아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높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비우고 낮아지셔서 찾아오심을 성경은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더러운 죄인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죄인에게 화해의 손을 내민 은혜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믿고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예수를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9절에서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던 자가 살리심을 입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은 자에게만 통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속에서 말씀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받은 자를 찾아내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가 과거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조금 생활한 적이 있는데 한번은 시내에 나가서 동양 여인을 보았는데 사우디아라비아의 풍습 상 낯선 여자에게는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저 사람이 한국 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기 위해서 뒤에서 한국말로 아가씨라고 불렀더니 그 여인이 뒤를 돌아보며 반가워하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우디에서 한국말은 한국 사람을 찾아내는 수단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이 세상에서 하늘에 사람을 찾아내는 것은 하늘에 소리로서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받은 자를 찾아내는 방법이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씀으로 찾아내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35-37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고 하여 예수님이 생명의 떡임을 알고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셔야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44-45절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고 하며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온다고 하셨습니다.

언제 우리가 아버지께 듣고 배웠습니까? 이는 성령께서 은혜로 깨닫게 해 주신 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한번은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순회하시다가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라고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 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예레미야 라고 합니다. 대체적으로 예수님을 선지자 중에 한사람 정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럼 너희들은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묻자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을 받은 자로구나 이를 알게 한 것은 네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게 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이런 신앙고백을 하는 자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언제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가르침을 받았습니까? 이는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장 11-13절을 보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이니라"고 하면서 세상이 예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았는데도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더라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알아보지 못한다고 하고선 그 아들을 믿는 자가 있는데 이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안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서 난자들만이 알아본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입고 불러준 자들만이 모이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불러서 온 자들은 한결같이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자기를 불러주신 분을 자랑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들어 온 자들은 한결같이 자기 자랑이 있을 수 없고 낳아준 하나님 즉 자기를 불러주신 분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확인하자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갈릴리 바닷가에서 부르셨는데 그 바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고기를 잡고 있는 곳입니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만남은 그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야 나를 따르라고 한다고 해서 생면부지 처음 보는 사람의 말 한마디에 지금까지 생명처럼 여기던 배와 그물을 내버려두고 그리고 가족들도 버리고 예수님을 쫓아간다는 것은 이성적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때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수가 있었던 것도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고 따르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셨기 때문에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라는 고백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 분이 메시야이고 그 분이 내 대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몰랐었는데 어느 날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는데 이는 다 성령께서 깨닫고 믿게 해 주셨기 때문에 믿게 된 것입니다. 이를 일컬어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17절을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고 하였는데 가만히 보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고 하여 두 믿음이 나옵니다. 첫 번째 말하는 믿음으로는, 베드로가 갈리리 바다에서 성령의 깨달음으로 예수가 주님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고, 두 번째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라는 믿음은,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 믿음이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를 영접하고 따르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예수를 주로 믿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받은 자는 예수를 믿는 것이 전혀 어렵지가 않고 힘도 들지가 않습니다.
또한 죄인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아들에 영을 받았기 때문에 전혀 어렵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받지 않은 자는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부담스럽고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러한 사실을 양과 목자의 비유로 잘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0장 3-5절을 보면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라고 하여 목자의 음성을 듣는 자가 양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목자란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13-16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라고 하여 예수님의 비유를 못 알아먹는 자는 하나님께서 못 알아먹도록 하셨기 때문이고 예수의 비유를 알아먹는 자는 하나님께서 알아먹도록 귀를 열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의 말씀은 들을 수 있는 귀를 하나님께로 받은 자들만이 들으라고 하신 말씀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6절에서도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고 하여 예수님께서 목자와 양의 비유를 하시니 유대인들이 알아듣지를 못하더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본문 16절에서는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고 하여 유대인들이라는 우리에 들지 않은 이방인 중에서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구원받을 자들이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인 우리가 지금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한 예수를 구주로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귀를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그리스도가 목자가 되셔서 하나님의 양을 찾아내는 것을 성경은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자는 천국 복음으로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자의 음성을 아는 자는 그 음성을 듣고 따라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인의 음성이면 따르지 않고 도리어 도망을 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목자가 양을 찾아 내지 양이 목자를 찾아 나선다고 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6절을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이라고 하여 양들은 그릇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릇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려고 하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떠난 자들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본문 5절에서 증거하기를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고 하여 예수의 양은 예수의 음성을 듣지만 타인의 음성은 듣지 않고 도리어 도망을 친다고 하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타인이란? 강도요 절도를 말합니다. 누가 강도고 절도인가 하면 양을 통하여 자기 이익을 챙기는 자들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본문에선 삯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12절에선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강도와 절도란? 자기 욕심에 붙잡혀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또 간과치 말아야 하는 것은 스스로 예수님의 양이라고 하면서 강도와 절도인 삯꾼 목사들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도 곧 강도요 절도이고 다른 양이기 때문입니다. 지향하는 바가 동일하기 때문에 강도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이렇게 삯꾼이든 삯꾼을 따르는 무리들은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 욕심을 챙기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가 좋아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이용하여 이익을 챙기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자들의 성경 속에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과 축복들만 골라내서 인간들의 소원 성취하는데 이용하고자 합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는 보이지 않고, 떡을 주는 예수, 병을 고쳐 주는 예수, 기적을 행하는 예수만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소 뼉따귀 우려먹듯이 사람들에게 돈을 끌어 낼 수 있는 이익에 재료들로 들먹여서 챙길만한 것들을 우려먹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거짓 목자들이 교회 안에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거짓 목자가 교회에 많다는 것은 그만큼 예수를 이용하려는 가짜 성도가 많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조심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갖가지 표적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 유익여부에 따라서 신앙생활이 달라집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고 할 때는 모든 것을 투자하지만, 손해라고 생각되면 죽어도 안 합니다.
철저히 계산적이기 때문에 자기 손해는 조금도 안 보려고 합니다.

[속된 말로 표현해서 고양이는 쥐를 좋아하지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라이크(Like)와, 러브Love)는 다릅니다. 러브는 자기 유익을 구치 않는 것이고, 라이크는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술꾼들이 술집 아가씨를 좋아하지 사랑하지를 않습니다. 술집 아가씨 역시 동일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이익에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의 것을 빼 먹기 위해 좋아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 시대 거짓 목사와 거짓 성도들이 이러합니다. 거짓 목사가 기도해 주겠다고 하고, 복을 따내 주겠다고 하니 거짓 성도들이 이용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충실히 이용하여 빼내 먹는 것입니다.
서로 손해 볼 것이 없으니까요. 둘 다 똑 같은 인간들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예수님께 사랑을 입은 자들은 이런 자들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은 자들은 예수를 라이크(Like)하지 않고 러브(love)합니다. 즉 예수를 이용하려고 하지 않고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사랑하기 때문에 강요된 신앙생활이 없고 자발적이고 기쁨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목자가 양을 찾아내는 데에 있어 목자와 양 사이에는 강요나 억지가 전혀 없음을 보게됩니다. 목자는 양들이 자기 음성을 알기 때문에 말만하면 따르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강요할 이유가 없습니다.
따라 나오라고 소리칠 이유도 없고 악을 쓸 이유도 없습니다. 조용하게 말만해도 따라 나옵니다. 양들도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강요당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목자를 따르는 것이 전혀 힘이 들지 않습니다. 싫은 것을 하면 짜증이 나고 힘이 들지만 좋은 것을 하는데 왜? 짜증이 납니까?

신앙생활이란? 예수님과 사랑하는 것인데 왜? 힘들어하고 속상해 하고 기분이 나빠해 합니까? 힘들어하고 속상해 하는 것은 마음에도 없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없고 마음에도 없는 것을 하니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일전에 있었던 제 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얼마 전에 주일 낮 예배 시간에 낯선 남자 한 분과 여자 한 분이 참석을 하였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서 교회에서 하는 점심 애찬을 나누면서 이런 저런 대화를 하다가 자신들을 소개하는데 남자 분은 특수 목회를 하는 목사이고, 여자 분은 호주 선교사라고 하였습니다. 자신들은 어제 부산에서 열리는 영성회복 컨퍼런스에 참석하고 왔는데 거기서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받은 보따리를 풀어놓았습니다.
영성훈련을 통해서 받은 은혜 중에서 '자기는 지금까지 성도를 사육하였지 양육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양육이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고, 사육은 사랑 없이 의무적으로 돌보는 것이라고 정의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남자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이 자기 아내는 성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고 하는것 같은데 자기는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원에 들어가 금식기도도 해보고 교회에서 철야 기도도 해 보았지만 성도들만 보면 짜증이 나고 화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화가 나고 짜증이 난다는 것은 성도들이 목사님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기 때문 아닙니까?
설령 기도하라고 하는데 기도하지 않거나,
헌금하라고 했는데 헌금하지 않거나,
주일날 빠지지 말라고 했는데 빠진다거나 하는 등등의 것들 때문 아닙니까?
그러니 목사님이 그렇지요 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목사님도 참 딱하십니다.
성도들이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데
왜? 자꾸만 사랑하라고 강요를 해서 부담감을 줍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교회 오지 말라고 해도 오고,
헌금하지 말라고 해도 헌금 할 것이고,
주일날 놀러가라고 해도 교회로 옵니다.
믿음은 목사가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생기는 것인데
왜? 목사님이 주시려고 합니까?
앉고 일어섬의 권세가 주께 있는데 왜? 목사님이 그런 일로 열을 받습니까?
그리고 왜? 성도들이 목사님 마음에 들어야 합니까?
그리고 성도들을 왜? 목사님 마음에 맞추려고 합니까?

사랑이란? 마음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지 밖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마음 속에서 사랑이 없는 것을 왜? 만들려고 합니까?

없는 것을 만들어 내려니까 성도들도 힘이 들고 목사님도 화가 나는 거지요.
목사란? 자기가 만들어 내어놓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내어놓는 자들 아닙니까?. 그러니 설교를 하면서 나는 이런 사랑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은 어떤 것을 받으셨습니까? 각자 확인해 보십시오. 그러면 받은 것이 있는 사람은 내어놓을 것이고. 없는 사람은 내어놓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목사가 없는 사람에게 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복음이란? 어치피 갈라지는 역사를 일으키게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목사를 하라고 하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으면 될 것 아닙니까?

나는 좋지 않은데 자꾸 하려고 하니 열 받고 몸 상하고 병드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서 제가 복음만을 증거하는 이근호 목사님이라는 분을 소개 시켜 줄테니 크로스 빌리지에 들어가서 한번 살펴보라고 하니 자신은 옛날에 이근호 목사에게 배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면 지금은 교제하지 않습니까? 라고 물으니 조금 배우다가 말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왜요?' 그러니 그 목사님이 하시는 말이 '목회 도움이 안 되겠더라' 는 것입니다. 너무 극단적으로 나가서 자기하고는 취향이 안 맞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저는 이근호 목사님을 통해서 복음에 유익한 교제를 나누는데요' 라고 하면서, 그리고 '복음이 취향에 맞고 안 맞고 가 어디 있습니까? 복음이기 때문에 듣는 것이지요' 라고 하니, 그 목사님이 하시는 말이 걸작입니다.
'목사님 그 분 너무 추종하지 마십시오' 라고 하면서 '이 교회도 보니 성도가 몇 명 안 되는 것을 보아 어려움이 많겠습니다' 라고 하길래 무슨 어려움을 말하는가요?
'교인이 적어서 제정 때문입니까? '라고 하니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는 이근호 목사를 추종하는 것이 아니고 그 분이 증거하는 복음이 성경적이기 때문에 교제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추종할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나도 나를 추종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추종할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리고 '먹고살라고 한다면 세상에 나가 직장 생활하면 되지 무엇 하려고 교인들 눈치 살피면서 목사 합니까?
살기 힘들어도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것이 진리이고, 이것이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제가 복음을 전하면서 깨달은 것은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겐 돈을 주지 않더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는 그만큼 인간은 돈에 약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안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평안하게 복음 전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니, 그 목사님 대답이 또 일품인데 '목사님 가는 길이 뻔하군요' 라고 하면서 더 이상 대화가 단절되고 그 분들은 떠나갔습니다.]
이것은 누가 옳고 그르고를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성도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자들인가를 우리 모두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가시면서 하는 '목사님 가는 길이 뻔하다'는 말의 의중은 그렇게 목회 하다가는 굶어 죽기 딱 맞다는 것이겠지요. 결국 그 목사님은 내가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먹고사는 일에는 신경 쓰지 않게 해 주어야 된다는 논리입니다. 까마귀를 통해서도 엘리야를 먹이신 하나님인데 왜? 복음을 전하는 주의 종을 굶기느냐 라는 것이겠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주리시고 목말라하시고, 12제자들은 거지같이 가는 곳에서 얻어먹어야 하고, 바울 같이 주리고 목마르고 한 것은 어떻게 해석을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서 기뻐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나를 홀로 두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내가 먹을 양식은 따로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살아가신 것은 자기 생존을 위함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생명을 주는 일을 삶에 의미이며 목적이었기에 주림 속에서도 기뻐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12제자가 그러하였고, 바울이 그러하였고, 복음을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러하였습니다. 이는 복음을 받은 성도들의 삶에 자세여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도 복음 전하다가 굶어 죽으면 그것도 영광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미 영생을 얻은 자들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잠시 고난 당하는 것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생존을 위해 신앙생활이든 목회를 하는 분들은 목회가 불만이고 불평이겠지요. 이런 사고를 가진 목사나 성도들에겐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 한 것은 동일한 복음을 가지고도 서로가 생각하는 것이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누가 옳고 그른지는 하나님께서 판단하도록 맡겨 두십시다. 우리는 다만 자기 안에 있는 증거만 증거하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는 하나님께 사랑으로 나아가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자들은 무엇을 챙기고자 나가게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과 장사하고자 하는 자들은 신앙생활을 장사하는 것처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성은 본능적으로 맺어진 관계임으로 누가 임의로 만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이 조금 곁길로 나간 것 같은데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맺어준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자기 양을 찾으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자를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보내실 때는 그 이름에 맞는 일을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이심이라" 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정한 자기 백성이 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 정한 자기 백성을 찾아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이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섭섭해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하니 돌아가라고들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4장 25-35절을 보면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 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자기를 죽이는 일인데 이 일을 누가 할 수 있겠느냐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은 자는 언젠가는 떠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를 따라올 생각을 하지말고 지금 떠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망대 비유와 전쟁 비유를 하신 것입니다. 미리 계산해서 안되겠다 싶으면 일찍이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반대로 거슬리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께 선택을 입지 않은 양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라야 주를 따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보다 주를 더 사랑하는 것도 주께서 그렇게 해주시기 때문이지 인간의 능력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양에게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기를 배척하는 자들을 원망하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보내실 때 이미 구원될 자는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를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 된 자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정해 놓은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대속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정한 백성이 아닌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지은 죄를 예수가 갚는다는 말이냐 라고 비웃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기를 위한 대속이란 것이 믿어지기 때문에 예수의 십자가만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십자가만을 사랑하게 되고 십자가만을 가장 고귀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한 자가 아닌 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은 한낮 한 사람의 죽음에 의미뿐이라고 여깁니다.

선택을 입은 자들은 예수님을 생명의 관계로 사귀지만, 불 택자들은 예수님을 유익의 관계로 사귀고자 합니다. 즉 하나님의 양들은 생명을 위해서 예수를 찾지만, 아닌 자들은 자기 생존을 위해서 찾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에 떡을 위해 나아오는 자와, 영생에 말씀을 위해서 나아 오는 자가 있습니다.
즉 복음을 듣기 위해서 오는 자가 있고, 복음이 증거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표적들을 보려고 나오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떡을 위하여 나온 자들은 떡이 떨어지면 등을 돌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항상 떡을 찾아서 돌아다닙니다. 예수님이 죽게 된 것은 떡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떡도 주지 못하는 자가 자기를 믿으라고 하고 자기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하니 화가 낫던 것입니다.

종교생활과 신앙생활은 다릅니다. 종교생활은 자기 유익을 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종교생활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상이란? 자기 욕심을 위해 신을 찾는 행위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너희는 너희를 위하여 신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을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에 계명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어떻게 하든지 신의 힘을 빌려서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고 신앙은 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시대 사람들의 관심사도 예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떡을 주는 자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선택을 입은 자들은 자기의 죄를 사해주시고 자기에게 생명을 주시는 메시야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택된 자들은 사랑의 관계로 예수를 찾지만, 불 택자들은 손익 관계로 예수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나온 자는 계산이 없고, 그져 만남 자체로 행복해 합니다.
여러분들 연애시절 기분 압니까?
그져 바라만 보아도 좋은 사람,
그져 함께 있기만 해도 좋은 사람,
헤어지면 또 보고 싶은 사람,
만나면 헤어지기 아쉽고,
헤어지면 또 만나고 싶은 사람 이게 연애이고 연인 사이가 아닙니까?
꼴도 보기 싫은데도 만나는 것은 다른 속셈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이해타산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엇인가 해 주고 싶어지고 주고, 주고 또 주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성도와 예수는 연인사이입니다.
하나님께서 맺어준 연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연인 사이가 아닌 자들은 모든 일을 가지고 계산하기에 분주합니다. 나는 이렇게 해 주었는데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해 주었느냐 라고 따지지요.

마치 이 시대 남녀간에 결혼 풍속도와 같습니다. 서로 이해 관계로 결혼하였다가 자기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언제 보았느냐는 식으로 이혼하는 세태가 꼭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과 같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 신앙이 사랑이냐! 계산이냐! 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은 아까움이 없고, 계산은 아까움이 듭니다. 여러분이 주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이 되어지면 종교 생활하는 것이고, 아깝지 않다고 생각되어지면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고, 계산은 자기를 행복하게 합니다. 내가 내 행복을 위해서 교회를 찾은 것이라면 종교 생활하는 것이고, 주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여서 나온 것이라면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할수록 더 잘해 줄려고 하고, 하고 나서도 못한 것 같은 아쉬움이 남고, 또 해준 것은 금새 잊어버리지만, 계산된 신앙은 너무 한 것같이 아까운 생각이 들고 한 것은 오래도록 기억하게 됩니다. 여러분들 마음 속에 지금까지 주께 봉사하고 헌금하고 헌신한 것들이 머리 속에 남아 있다면 종교 생활한 것이고 바울처럼 다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행하여 나아간다면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바라고 한다면 무엇이든지 하지 마십시오. 봉사도 하지말고, 헌금도 하지 마십시오. 금방 후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하는 자는 늘 회개하는 심정이 되지만, 계산으로 하는 자는 항상 자기가 한 것을 우려먹고 또 우려먹고 하며 계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4장 23절에선 믿음으로 하지 않은 것은 모두가 죄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은 자들에겐 예수님이 자기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신 분임을 알기 때문에 사랑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랑은 누가 강요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깨달음으로 비롯되어지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많을수록 사랑의 깊이는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3장 14-19절에서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면서 모든 성도들이 이 사랑을 알기를 소원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로마서 8장 35-39절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입은 예수님의 양들은 그 어떤 조건 속에서도 그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다고 증거해 주고 잇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 질 수가 없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그 누구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죄를 밥먹듯이 짓고 살면서도 끊어지지 않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이 강권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였기 때문에 아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선택된 성도를 구원한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하나님이 택정한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죽음보다 강하였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날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길이와 높이를 깨달아야 합니다. 날마다 성경을 통해서 주께서 무슨 일을 하셨고, 성도를 위해 지금도 어떻게 일해가고 계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에 깊이와 넓이와 길이와 높이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고린도전서 2장 12절에서 증거하는데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할수록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들을 많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에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성령은 날마다 순간마다 성도를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에 관계 안으로 몰아 넣는 일을 행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 사랑을 많이 깨달아야 주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깝지가 않고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린아이가 자라갈수록 부모의 사랑을 깊이 알아 가는 것과 같이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사 속에서도 부모에 대한 효심은 깨달음에 비례하여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한 효란 깨닫는 데서부터 비롯되어지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흔히 속 썩이는 자식들에게 하는 말이 너도 시집가고 장가가서 네 자식낳아 키워보면 부모 마음을 알 것이다 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자가 시집가서 배가 아파 자식을 낳고 키워보면 부모의 사랑과 아픔을 알게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성도가 하는 신앙생활도 깨달음이 없으면 의무가 되고, 깨달음이 있으면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 같은 죄인이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고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깨달음으로 살아가야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범사가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그 고마움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조금 하는 것도 생색을 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목사를 의식하지 말고, 성도를 의식하지 말고 주의 사랑으로 행하시길 바랍니다. 목사가 주일날 교회 오라고 해서 나오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이 강권하심으로 나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목사가 기도해라, 전도해라, 헌금해라, 봉사해라 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마음이 인도되는 대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다니는 것이 부담스러우면 다니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재미있게 사십시오. 그러다가 이게 아니다 싶으면 교회 오십시오. 목사는 여러분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것으로 행하십시요. 그러니 목사의 눈치도 보지 마시고, 더더군다나 성도의 눈치도 보지 마십시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 사랑을 입은 자들은 언젠가는 이 은혜의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어디에서든지 다 찾아서 인도해 내실 것입니다.

인간이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는 족속입니다. 얼마나 고집이 센가 하면 지옥으로 가면서도 떳떳하게 들어가고자 하는 족속들입니다. 그런데 이 인간 보다 고집이 더 세시는 분이 계신데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나서 우리가 실력이 있어서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보다 고집이 더 세신 하나님이 간섭하셨기 때문에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 같은 인간이 복음을 증거하고 듣는 다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또 읽고 또 읽으시면서 하나님께서 나 같은 악당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여 부르시고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심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복음에 배가 불러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들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배고픈 줄을 모른다는 말과 같이 성도는 복음으로 인하여 세상에 대한 배고픔을 잊고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으셔야 합니다.
성도는 주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삶으로 인하여 늘 곤고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랑에 깨달음이 없으면 내 눈을 열어서 주의 기인한 법도를 깨닫게 해달라고 해야 합니다. 성도는 가난해서 불행 한 것이 아니고, 병들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고,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졌기 때문에 불쌍하고 곤고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례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사막에 떨기나무와 같다고 하였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 같다고 한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이 행복하여야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환경이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주의 사랑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으니 참으로 벌레만도 못한 나에게 기적을 일으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그 은혜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찬송과 기도로 배어 나오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긴 설교를 읽으신다고 참으로 수고 하셨습니다.

(저희 교회에는 연세가 드신 분들이 많아서 이해를 돕기 위해서 동일한 내용을 여러가지로 설명하다 보니
설교가 좀 긴 편입니다. 성령께서 다 알아듣게 하실 것인데도 목사가 워낙 믿음이 없어서 잔소리 한답니다.)

이 설교는 울산 목양교회 정낙원 목사님의 주일낮 설교입니다.
잘난 것이 아니라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하여 올린 것입니다.
책잡힐 것이 많지만 은혜될 것들만 취하시고 은혜되지 못하는 것은 흘러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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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목자와 양
이근호 2004-10-09 21:06:32, 조회 : 328, 추천 : 26

설교자에게 가장 위험스러운 면모는, "나는 가르치고 교인들인 내게 배워야한다"는 자세에 강단에 서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즉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그 대신 모범을 보여주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유명한 주기철 목사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류의 목사들은,

마치 자신이 이미 구원받은 사람인 것처럼 그 자체를 교인 앞에서 권위자로 행세하겠다는 겁니다. 자기의 자존심을 걸고 말입니다.

돈을 안 받는 한이 있더라도 이 자존심만큼은 양보못하겠다는 심보로 교인 앞에 서 있습니다.

설교자가 교인들 앞에서 이러한 건방진 마음을 갖는 이유는,

상대방을 오래동안 사생활까지 잘 알고, 교인들의 성품과 성질까지 나름대로 꿰뚫어보고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목사님 말씀대로 성령이 역사로만 믿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상대를 미리 안다는 것이 되레 교인들 눈에 건방지게 보일 것일 것이 뻔합니다.

서로를 잘 안다는 것은, 서로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사이도 되지만, 문제는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장악해도 무방하지 않겠느냐는 안일함이 깔리게 될 수 있습니다.

교주라는 것이 이런 경로로 굳혀집니다.

상대를 '밥' 내지는, 무시해도 좋을 대상으로 보는 겁니다.

교회에서 셜교자는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요.

따라서

목사란 기껏 영적 설교자인 예수님 앞에 그냥 말씀이나 듣는 평교인일 뿐이다. 그 이상으로 계급을 높여서는 아니됩니다.

중간 전달자도 아닙니다.

목사가 중간 전달자로 나서게 되면 마치 목사 없이는 구원이 아니되는 것처럼 되어 버립니다.

목사는 자기 설교를 통해서 교인들 앞에서 '자기 부인'에 대한 고백이 늘 있어야 합니다.

즉 "저의 설교로 여러분이 구원되는 것도 아니요 은혜받는 것도 아닙니다."라는 뉘앙스는 늘 던져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인들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영적 지도자의 존재를 다같이 부각하고 고백으로 드러내는데 방해꾼으로 설쳐서는 아니됩니다.

목사는 앞서 가는 사람이요, 교인들은 목사 뒤를 따라올 사람으로 인식시켜서는 아니됩니다.

목사가 다음과 같은 인상을 심어주어서는 아니됩니다.

즉

"나는 이미 구원의 경지에 들어서서 모든 것이 풍성하게 누리고 있는데 당신네들은 도대체 뭣들 하고 있느냐?"하는 추궁 같은 것 삼가해야 합니다.

목사가 나서서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에게 제일 중요한 사항은

자신은 설교를 통해 예수님에게 고백하고, 예수님에 의해서 변화될 교인이 변화되도록 자신의 영향력을 거두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사의 설교 속에는 자신의 평소에 행동에서 비롯되는 위선과 죄악과 거기에 따른 반성과 하나님의 은혜로운 조치가 어떤 식으로 연계되어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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