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를 읽고] 2004-09-22
『삶의 진실을 찾아서』를 읽고 손성식 2004-09-22 19:00:55, 조회 : 228, 추천 : 13
『삶의 진실을 찾아서』를 읽고저자: 크리슈나무르티 옮긴이: 최 봉식출판사: 홍신문화사(서울:1993)
복음은 이 땅에서 몸부림치는 인간 삶의 진실을 이 땅을 위해서 살다 간 수 많은 위인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으로부터 버림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마이크를 잡게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이 땅의 진실을 말할 자격과 그 실상을 아시는 분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밖에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러면 궁금해지는 것이 다음과 같은 것이겠죠. 인간의 처지를 말할 수 있는 분이 오직 예수그리스도뿐이라면 이런 책을 읽을 필요가 없겠네요? 그리고 이런 책을 읽는 친구들과는 이야기도 못하겠네요? 어떡하지요!. 아닙니다. 제 말은 이런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생산되는 모든 사상은 나의 욕망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즉, 예수 믿는다고 해서 나의 전 삶이 변하여 이 땅에 초월해서 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을 딛고 살기 위해서 욕망하는 나 때문에 희생당하신 예수님의 은혜성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본 서는 나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셔야 합니다. 글 재주가 없고, 말할 자신이 없고, 정리가 되지 않아서, 아니면 먹고살기 바빠서 잊고 있었던 나의 욕망을 저자는 기분 좋게 정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시간 나는 대로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왜요? 나를 발견할 수 있으니까! 어떤 나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거부하는 나입니다. 이것은 나 뿐만 아니라 내 친구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매트릭스1』을 보면 여러 장면 중에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거짓세상, 매트릭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그것은 우리 주위를 온통 둘러싸고 있어. 바로 이 방 안에도 있지. 창 밖을 내다봐도 있고 텔레비전 안에도 있단 말야. 출근을 할 때도 교회에 갈 때도 세금을 낼 때도 느껴지거든. 그것을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자네의 눈을 가리는 세계야...... 자네가 노예라는 진실 말야. 네오, 자네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냄새를 맡거나 맛을 보거나 만져 볼 수 없는 감옥에 태어난 것야. 자네 마음의 감옥 말이야."
어떻습니까? 『매트릭스』와는 다른 맥락이지만 저는 모피어스의 말을 통해서 이 땅에서 예수님의 피의 완전성을 거부하는 왜곡된 진실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만나는 모든 주변세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 당한 것이 우리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신경마비증세 말입니다.
저는 우리가 마치 십자가의 현실을 왜곡시키는 장(場)으로서 『매트릭스』에 살고 있다는 경험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맥락에서 복음이란 왜곡된 진실을 진실인 양 여기고 사는 자들에게 진실을 터트리시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십자가의 현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활성화되는 장(場)이기도 하구요. 진실은 이 땅에서 은폐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실을 볼 수 있는 힘이 이 땅 자체에는 없습니다. 만약에 볼 수 있다면 오직 진실을 아는 예수님이 보여 주셔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계속 강조합니다. 은혜의 우발성이라고.
인간이 하나님과 단절된 뒤에 경험하게 되는 사태가 뭔지 아세요? 제가 보기에는 "두려움"입니다. 이것은 이 땅을 뒤덮고 있는 검은 구름 같은 것입니다. 빠져나갈 수 없는 장(場)입니다. "두려움"은 특정인에 한한 병리적인 증상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해당되는 보편적인 삶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두려움"은 어디서 발생하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리를 벗어나서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왜곡된 진실을 받아들인 데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본서의 저자는 "이성"을 문제삼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경험하는 온갖 부조리한 모습은 세상이 잘못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는 자기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자의 이성의 문제를 좀 더 깊게 에덴동산으로 까지 확장시켜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성"이 뭐가 문제일까요? "이성"은 항상 소유하려고 하고 요구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성"은 모든 관계를 "이해관계"로 몰아가는 못된 버릇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문제는 이러한 이성 때문에 일어나는 폐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책은 없는 것일까요? 저자는 "사랑"에서 그 해답을 찾습니다. 세상이 좀 더 나아지려면 "사랑-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저자는 "이성"의 변화를 해답으로 들고나옵니다. 사실 "이성"이 변한다는 말은 이해하기 곤란하지요. 다르게 표현하자면 흔들리지 않는 이성이라고 할까요. 본 서에서는 그것을 "조용한 이성"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사심없는"이라고 해야할까요!
정리하자면 저자가 보기에 세상의 모든 문제는 "나"의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나와 동떨어진 어떤 구조나 법칙이 아니라 나 자신의 반영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알고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모든 문제를 내 문제로 돌리기에는 뭔가 꺼림칙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내가 아무리 발버둥친다 하더라도 안 되는 것이 많다는 것을 우리는 느끼지 않습니까! 즉, 사회의 구조에 대한 문제입니다. 혹시 박 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나는 아무리 선량하게 살려고 하더라도 사회라는 부조리가 나를 가만 놔두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이 땅을 떠나서 로빈슨 크루소처럼 무인도에 홀로 살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물론 저자도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지요. 이해로 얽힌 관계가 아니라 사랑으로 매듭지어진 관계를 소망하지요. 이런 관계만이 이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 땅에서 고함치고 있는 사랑과 화해라는 구호는 이미 그것들을 찾을 수 없다는 자기 고백이지 않을까요! 우리는 사랑이 없어요. 우리는 도저히 화해 할 수 없어요. 이것이 우리의 처지라는 절규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솔직하게 아무런 희망도 없고 기대도 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해주는 것이 보다 진실이지 않을까요! 이 땅을 딛고 사는 한 희망은 없습니다. 남은 것은 죽음, 곧 심판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죽음 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마세요.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사실이지 않을까요! 그리고 난 후에 혹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고 고백하게 된 다면 그것은 이 땅에서 솟아 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께서 질기게 찾아오신 할 수 없는 은혜라고 말해주는 것이 제가 말해주고 싶은 진실입니다.
"혹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께서 가만 놓아주시지 않으신가요. 은혜아래 있다는 것을 십자가 안에서 확인하시고 고마워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re] 젊은 목회자의 마땅한 도리 이근호 2004-09-23 02:00:46, 조회 : 247, 추천 : 13
손목사님을 보노라면
젊은 목회자들이 어떠한 생각과 태도를 가져야 마땅한지를 거울처럼 비쳐나온다.
첫째,
예수님 앞에 자신이 서 있고,
자기 앞에 예수님만 서 있다.
그 가운데
교회도 없고,
가족도 없고,
신학교 동창생도 없다.
"예수님, 나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라는
물음만 가지고 예수님의 얼굴만 빤히 쳐다 보고 있다.
이것 외에 달리 두리번 거릴 이유가 전혀 없다.
사람을 의식한다든지
사람에게 기대한다든지
사람에게 의지하지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둘째,
진리가 왜 늘 진리로서만 진리인지 이 점에만 묶여 산다.
가난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교인 수가 얼마 안된다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재정 파탄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단지
진리의 진리성에서 시선이 딴데로 돌아가는 일만이 부끄러운 일로 간주된다.
따라서
손목사님은
왜
세상은 진리가 아닌가를 파헤치신다.
너무나 진리의 진리성에 묶여 있기에
진리가 아닌 것들이 큰 함성소리와 더불어 세상을 휘젖고 다니는 광경을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로막는다.
"당신은 왜 진리가 아닙니까?"라고 따져 묻는다.
손목사님은 상대방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답변을 듣게 된다.
"진리가 없기에 우리가 진리를 대행하고 있소"
셋째,
손목사님은
일지(日誌)를 쓴다.
낱낱히 쓴다
빠짐없이 쓴다.
전장(戰場)에서의 기록이다.
일종의 고자질이다.
"하나님, 악마패가 사람들이 원하는 교회를 만들었데요"
아벨의 죽음 이후로
띵의 진리성에 합류되어 있는 자는 고자질하게 되어 있다.
마땅한 성도의 기도이다. (계 8:3-5)
손목사님은
일지를 벼랑을 집어넣고
특별 감사에 나섰다.
인간의 모든 영역을 샅샅히 살피려 한다.
너무나 진리의 진리성에 묶여 있기에
그냥 모른척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인생길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자들은
대부분
진리에 묶여 살지도 않으면서
진리를 운운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교회에 묶여 있다.
자신의 생존에 묶여 있다.
자신의 가족에 묶여 있다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후원자에게 묶여 있다.
교인들에게 묶여 있다.
자기 위신에 묶여 있다.
가짜 일 수 밖에 없다.
사람이
사명감이 없는 순간에는
자기 의(義)를 점검하는 것으로 소일하게 되어 있다.
자기 사수,
자기 방어,
자기 변명,
하지만
그 속에서 내밀고 있는 것은
악마의 얼굴이다.
그렇다.
그는
이미
인간에서
교회에서
악마의 냄새와 얼굴을 읽어 버린 것이다!
##############################################################################################[왜 그리스도인인가!] 손성식 2004-10-01 22:45:41, 조회 : 176, 추천 : 13
[왜 그리스도인인가!]
제가 보기에 복음이란 마치 mbc의 일일연속극 "왕꽃선녀님"에 등장하는 부 용화라는 무녀가 겪는 삶의 몸부림 속에 배태되는 어쩔 수 없음과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라고 했을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 얼마나 질기시게 자신의 몸을 일구어 나가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도의 정체를 새롭게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생각합니다. 마치 제가 사는 마을 사람들이 절에 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분들은 시간날때 한 번씩 절에가서 시주하고 가정의 평안과 무병장수를 기원합니다. 그러면 제가 묻지요? 불교에 대해서 아십니까? 그거 알아서 뭐하게요! 그냥 우리집이 평안하면 그만이지. 그러면 부처를 믿으세요? 믿지요. 아마 우리집을 지켜 줄거예요.
저는 이런 마을 사람들의 신앙을 현실교회에서도 경험합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그것 머리 아프게 알아서 뭐하게요. 십일조 잘 내고 교회충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분명히 분에 넘치게 복주실 것을 믿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이런 대화가 너무 극단적이라고 치부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항상 경험하는 사건입니다.
저는 언제부턴가 내 눈으로 확인하는 십자가라는 교회 간판은 모두 다 가상현실 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눈만 뜨면 항상 보이는 수 많은 교회의 상징인 십자가는 마치 여기 교회 없어!라고 나에게 항변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 주변으로 부터 듣는 교회 이야기는 십자가의 진실과는 거리가 먼 마치 컴퓨터의 오락게임속에 등장하는 아바타 이야기 같았습니다.
저는 해 아래서 인간의 모든 행함은 무의미하다고 확신합니다. 어느 정도까지냐 하면 하나님께 영광돌린다고 행하는 모든 행위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감히 확신하건데 우리의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면 물으시겠지요. 도대체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뭐냐구? 제가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십자가 사건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이 충만한 장(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영광이 가득찼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란 어떤 존재일까요? 이미 가득한 하늘의 영광에 동참되는 자들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그 풍성함을 알게되고, 그것만을 자랑하는 것으로 운명지어졌다는 종말론적 운명 공동체입니다.
성도도 해아래 살고 성도 아닌 사람도 해 아래 삽니다. 하지만 해 아래서 사태를 파악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도란 해 아래서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이미 십자가에서 경험한 자리에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 아닌 자들은 해 아래서 날마다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서 몸부림 치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성도란 해 아래서 날마다 반복되어질 십자가의 은혜에 붙들려진 자리에 있지만 성도 아닌 자들은 날마다 반복되어지는 죽음의 자리에서 떨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란 이미 답안지를 들고 있는 자리에 있지만, 성도 아닌 자들은 답을 찾기 위해서 마치 꿀벌들이 벌을 찾기 위해서 온 산을 찾아 헤메듯이 분주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성도란 이미 십자가의 자리에 매여 있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관심이 십자가로 가야 되지 않을 까요. 혹시 성도라면!
==========================================================================[re] [왜 그리스도인인가!] 이근호 2004-10-02 08:07:12, 조회 : 175, 추천 : 11
신다는 것은 '시간연장책'에 해당됩니다.
그냥 연장하려니까 자기 자신의 정당성 유지에 미안하니
한다는게, 군인, 혹은 장사, 혹은 공무원, 혹은 목사, 혹은 교수 , 혹은 주부, 혹은 연예인 같은 것들입니다.
소위 자기로 인한 '사건'을 따로 만들고 그 '사건'에 올라타서 세월이 가는데까지 가서 끝을 보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금 실시하시는 언약적 사건은
이 세상을 '종말화'하고, 파멸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의(義)을 가지고 공격을 감행하는데 주력합니다.
그 '하나님의 의'가 바로 복음입니다.
이 복음으로 인해 공격 받을 대상은 '인간의 의(義)'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만드는 사건과 '뱀의 후손'이 만드는 사건의 충돌 현장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입니다.
악마가 느껴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
즉
목사님 말씀대로, 그저 편한대로 사는 사람, 싸우지 않고 살고 싶은 사람, 평범하게 조용하게 살고 싶은 사람,(목사 같으면, 그저 조그마하고 아담한 교회 하나 개척해서 가족의 생계만 충족하면 더 이상 욕심이 없이 죽는 날만 맞이하면 그만이다고 여기는 사람)
이런
사람은
현실을 모르는 영적 눈이 닫힌 채 악마에게 속한 소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보고 손성식 2004-10-02 15:33:28, 조회 : 154, 추천 : 10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보고각본. 감독: 김 기덕
묵시를 도외시 한 채, 다른 말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움직임을 무시한 채 해 아래서 꿈틀거리는 역사를 마치 연못가에 앉아서 금붕어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듯이 가만히 지켜보 면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본 영화는 해 아래서 또는 땅 위에서 제일 문제 거리로 물고기도 아니고 개구리도 아니고 뱀도 아닌 인간을 들고 나왔습니다. 인간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김 기덕 감독은 인간을 걸고 넘어갑니다. 즉, 나도 인간이지만 인간을 언제까지 편들어 줄 수만을 없는 일이 아니냐구! 소리지르는 것 같습니다. 인간에 대한 가능성과 미련은 제발 버리라고 고함치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지만 드러내기 싫었던 치부를 발가벗겨서 완전히 까발리고 싶은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그것은 어느 특정부류의 치부가 아니라, 아담이라는 이름의 모든 인간의 치부입니다. 그러면 김 기덕 감독이 발가벗긴 인간의 치부란 무엇일까요? 욕망입니다.
김 감독은 욕망이라는 굴레가 얼마나 질기게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있는 힘껏 몸부림쳐서 빠져 나오려 하지만 점점 더 깊이 들어가게 되는 수렁임을 알려줍니다. 결국 인간이 욕망이라는 장(場)에 소속되어 있음을 김 감독은 설교합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서 김 감독이 주장하는 인간의 욕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집착이며 그리고 그 내용은 사리(私利)입니다. 인간은 결국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타자는 배제한 채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사는 욕망덩어리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정체에 대해서 김 감독은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이 작동하여 해낸 것이 도대체 뭐냐구? 자기 이외의 타자의 아픔을 생각 해본 적이 있냐구? 결국 이 땅에서 배태된 모든 고통의 원인은 욕망 하는 인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욕망 때문에 인간 본인도 고통받을 뿐만 아니라 인간 주변의 세계도 고통 당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감독은 욕망의 종착지인 종교를 부각시킵니다. 여기서 종교란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해서 불교이지요. 그러면 불교의 특징이 무엇이지요! 모든 것을 아(我)의 문제로 귀착시킨다는 것이지요. 그렇지요! 즉, 아(我)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목숨 거는 데가 불교지 않습니까! 이런 맥락이 아마도 불교를 영화 전면에 포진시킨 이유이지 싶습니다. 하지만 불교에 귀의(歸依)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욕망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김 감독은 눈치 챈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我)라는 것이 집합적이 아니라 개별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나의 해탈이 타인에게까지 확대대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김 감독은 좌절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김 감독에게 인간의 역사란 아(我)를 벗어낸 해탈의 흔적이 아니라 벗어나려고, 벗어나려고 발버둥쳐보지만 결국 할 수 없이 고통의 굴레에서 괴롭게 인생을 마쳐야 하는 흔적이 겹치고, 겹치고 겹쳐서 지층을 이룬 욕망의 지질대 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영화의 장점이 있습니다. 즉, 종교조차도 인간의 굴레를 해결하지 못하더라는 김 감독의 솔직한 심경입니다. 종교란 욕망과 단절된 지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욕망의 언저리에 자리한 장(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 감독은 인간의 아픔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드러냈습니다. 즉, "할 수 없다는 것"이며 두 손 두발 다 들 수밖에 없는 인간의 처지를 본 것입니다. 여기서 김 감독은 절망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에서 봄은 희망의 봄이 아니라 절망의 봄입니다. 고통이 끝나리라는 희망찬 가상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되 물림 되어야 하는 고통의 현실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김 감독은 무기력한 긴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끝을 맺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김 감독만의 한숨이 아니라 해 아래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 군상들의 한 숨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세상을 보면 아(我)의 문제가 아니라 아(我)가 속한 장(場)의 문제임이 보입니다. 아(我)가 탈출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구해내셔야 하는 문제입니다. 아(我)가 득도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문제입니다. 내가 싸우는 문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께서 싸우셔서 전리품으로 획득하는 문제입니다. 김 감독은 애써 이 문제를 회피하려고 합니다. 왜?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리에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