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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여호와증인에 대한 복음적인 반박] 2004-09-07묻고답하기-

여호와증인에 대한 복음적인 반박(구자근 사모님 글) 이근호 2004-09-07 20:13:32, 조회 : 270, 추천 : 14
"파수대"를 건네준 친구에게
<내가 너에게>
진짜 오랜만에 만났었어. 그치? 따져보니까 17년째 우리의 만남이 지속되고 있고(나에게는 좀 드문 관계다), 이번처럼 2년 만에 만났어도 똑같은 느낌 때문에 아주 편안하고 좋았어. 못 만나는 동안 너의 변화된 모습에 조금은 놀라워했지만.
지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실용적이고, 무엇보다도 주관과 소신이 뚜렷하고 무엇하나 부족한 것 없이 자신의 의지로 인생의 당면한 문제들을 풀어가는 동시에, 강원도 봉평에서 태어날 만큼 소박한 휴머니스트인 네가(아부가 너무 심했나~^^ ?) 어찌 <여호와 하나님>을 떠올리게 되었는지 그것이 참 흥미진진했어. 네 자신도 그런 표현을 한 것 같다만.
이렇게 편지 쓸 생각은 없었는데, 너와의 만남 후에 그날 밤부터 잠을 푹 잘 수 없었어. 네 생각이 계속 나서... 자다 깨면 생각나고, 그러다가 계속 잠은 안 오고 해주고 싶은 하나님 말씀들이 머리 속에 빙빙 돌고 그러다가 날이 밝아오고...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때그때 메모해두었었는데, 일주일 이상 가지고 있다가 이렇게 글로 옮기게 되었다.
헤어질 때 너가 건네준 ‘파수대’ ‘깨어라’ 잡지(당시 유대 사회에서 모든 학문에 박식하고 율법으로도 흠이 없으며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고전2:20)”고 고백했지. 이 말씀 앞에 동일하게 ‘예’로 화답된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 외에는 모든 것을 ‘잡지’로 부르는 습관 때문에 이렇게 ‘잡지’라고 부른다)를 그날 밤 바로 읽었다.
앞에 써있는 목차를 읽으면서 무엇을 말할 것인지 한 눈에 들어왔지. 그러면서 내가 너에게 “도덕적인 인간의 행위를 하나님 앞에서 가치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 뿐 만 아니라, 더 고상하고 괜찮은 인격체로 다듬어 나가고자 하는 것은 성경의 내용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만을 믿는다는 개신교단의 어디에서도 다 가르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교회가 아니래도 왕국회관이 아니래도 세상 어떤 종교, 아니 아무것도 안 믿는다는 사람들에게서조차도 쉽게 가르쳐지고 들을 수 있는 말들이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 무엇하러 또 괜찮은 인격자가 되라고, 그것 잘하면 기뻐한다고 그러겠냐... 그런 것을 가르치는 것은 네 말대로 필요하다. 사회의 질서를 위해서... 그러나 그냥 가르쳐야지, 그러한 행위들을 점점 잘할수록 하나님이 더 기뻐한다면서 성경의 하나님을 끌어오면 안 되는 것이다... ” 등등 떠들어댔었지.
<<왜냐하면 사람들이 찾는 하나님과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야. 사람들이 찾는 하나님은 여러형태로 뻗쳐있는 자신의 소원(건강, 명예, 형통, 쓸 만큼의 돈, 봉사자, 온유한 자, 친절한 자, 사랑많은 자, 지식습득, 기능습득, 구원소망 등등)을 만족시켜 주시는 하나님이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자신의 입으로 내신 맹세(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만을 이루시는 쪽으로만 일하시는 분이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복 받기 위해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려고 노력하고, 시간 바쳐 돈 바쳐 몸 바쳐 자기 한 몸 죽이면서 헌신하고자 애쓰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반대로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의 하나님은 무조건 덮쳐오는 형태로 나타나.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만 움직이시기 때문이지. 열매를 내는데, 언약의 하나님이 계시하신 그 한 분만을 가리키는 열매를 내는 거야(마 7:15-20). 그러니까 전자는, 하나님을 만나고 복을 받기 위해서 자기가 생각한 각본대로 (열매라고 확신하는 어떤것들) 열심히 행하는 것이고, 후자는 조건 없이 찾아오신 언약의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소유당하면서(자신의 모든 걸 빼앗긴 채) 그 분이 내시는 열매들을 순간순간 맛보는 것이다. 이미 천국의 맛을 보는 거지. 또한 전자는 능력자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이 땅에서 자신의 소유가 점점 더 늘어나고 보기 좋은 형태로 쌓여가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따라서 그렇게 된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증거 하려 해. 후자는 받은 열매를 보면서 자기에게 주신 그 분만이 모든 것을 다 이루셨으니, 겉으로 보이는 인간의 어떤 상황이나 행동에 관계없이 언약의 하나님이 지시하신 그 한 분 만(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을 증거하는 쪽으로 나타나게 되는 거야.>>
그때 네가 그랬어. “우리도 전도라든가 그런 행위가 핵심은 아니야...”라고 말이지. 그런데 내가 이 책들을 보니, 전부다 그런 내용들뿐이구나? <희망이 필요한 이유, 어디에서 진정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백성은 친절해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성서의 도움으로 유혹을 물리치라, 모세-그의 삶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나쁜 습관을 극복하는 것은 가능한가, 청소년-나이트클럽에 가는 것은 어떠한가...> 그 외에 우리의 실생활에 유익하게 써먹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과학정보, 유용하고 똑똑하게 만드는 지식들... 이 전부였지.
그러니까 독자란을 읽어보면,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알고 율법을 잘 지키고 있었던 유대인들까지도 모두 다 죄인이라고 심판했던, 그러면서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건져내시려고 그 죄를 대신 담당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고마움은 하나도 안 보이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대신에 자신들에게 ~을 일러주어서 고마웠다, 일련의 기사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교수인 나도 몰랐던 것을 여러분은 간단명료하게 제시하는 능력이 있어서 참 감탄했다, 친절한 여호와 증인의 이야기 덕분에 당뇨병에 대해서 미리 알고 대처하게 되었다, 지렁이에 대한 경탄할만한 기사를 읽고 지렁이의 가치에 대해서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등등 인간이 해놓은 일에 대한 경탄이 글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어. 성경의 인물을 탐구하면서도 ~~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 있어서 대단한 결단력과 열정과 정성이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이래야 한다... 면서 인간중심으로, 문자 중심으로 써놓은 글들뿐이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고 하나님의 오른 손으로 들려 올려져서 모든 입으로 <주>라 시인하게 만드신 그 예수님을 알고 난 후 나의 사고방식은 ‘내 자신이 지렁이만도 못한 존재’인 것을 알아가고 있는 것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단지 용서받고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주 되심만을 증거하게 됨을 기뻐하게 되었거든. 나는 예수 알기 전이나 후나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데, 성령께서 불뚝불뚝 그 분 마음대로 그 분의 열매를 내신다는 것도 알았고. 그러니 위와 같이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니. 재미는 있어. 그리고 분명 훌륭한 잡지야. 그림도 좋고. 꼭 예수 처음 믿을 때 감동적으로 보았던 ‘리더스 다이제스트(세계인의 기독잡지)’ 같다. 그러나 이러한 아름다운 지식과 정보라도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되어있는 걸 어쩌겠니(고전 2:1,2)?
내가 너에게 오늘날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여호와 증인’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이나, 잘못된 개신교단의 가르침들과 비교할 때 그 차이점이 뭐겠느냐고 물었지. 얼른 보면 비슷하잖아. 인간의 행위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애쓰는 모습들은 똑같고. 네가 대답했지. 개신교는 삼위일체를 믿고 너희는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왕국을 믿는다고. 나는 삼위일체를 믿는 게 아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했지. 삼위일체는 교리일 뿐이야. 그래서 교리 믿으면 지옥 가고, 성경대로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거든(요 17:3). 교리는 인간 자신들이 속한 조직을 결속시켜 나가고 하나 되게 만들려는 인간이 만든 의도적인 산물이야. 그러니까 교리를 붙잡고 있으면 인간을 붙잡고 있는 것이지. 죄인이 죄인에게서 나오는 것을 붙잡고 있으면 아무리 유익한 것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그 마지막은 저주라고 되어 있잖아.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갈 1:8)
그 밑에 10절을 보면 ‘사람에게 좋게 하고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는 것’이 <다른 복음>인 것을 알 수 있지. 인간의 지상낙원에 대한 희망을 주고, 인간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일러주고, 양심에 거리낌 없는 도덕적인 삶으로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온갖 제스춰들은 많은 사람들을 좋게 하는 일이고 기쁨을 주는 일이야. <영생>조차도 여호와를 믿고 예수를 믿어줘서 ‘내가’ 취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한 사건이라고 가르치지. 그러니까 설사 믿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렇게 가르치는 자를 미워하지는 않아. 인간의 가능성을 인정해주고 더 잘할 수 있다는 존재로 박수 쳐주는데 그게 왜 기분 나쁘겠어. 물론 자신을 너무 귀찮게 하면 미워하지. 그러나 이것은 십자가 지신 예수 때문에 미워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이거든.
그러나 성경대로 (갈라디아서 3:22.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인간의 모든 행위를 죄 아래 가두고(부인하고) 오직 모든 언약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만 <주>로 높일 때, 택한 백성이 아니고는 기분나빠하게 되어있어.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 되고자 하는 ‘악’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야. 아니, 자신이 최대한 노력하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확신해.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다(요 1:1)’ 하면서 그 분이 하신 일만 내세우고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토해내면 기분 나쁜 거야. ‘내가 왜 배설물이야. 하나님이 나를 자녀로 삼으셨는데...’하고 말이지. 자신의 구원이 중심이기 때문이지.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쁨의 아들은 오직 예수 한 분이다. 바로 그 아들을 드러내고 높이시려고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고,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들을 도구로 쓰시고 있을 뿐이야. 그러니까 성경은 인간 구원에 관한 증거가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내신 맹세(언약)가 아들 예수를 통해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드러나는가(계시)-가 중심이지. 그래서 <성경은 내게(예수)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 성령 받고 예수를 <주>로 알게 된 사람은 주어진 환경 가운데서 자연스럽게(성령께서 기회주실 때) 예수만이 믿음의 실체라고 증거할 뿐이야 그러니까 무엇에 매일 필요가 없는 것이지. 그러니까 인간구원이 중심인 사람은 어떻게 해서라도, 한 명이라도 교회 다니게 하려고 온갖 정성을 드리고 싶어 하고 (‘교회’는 곧 ‘구원’으로 아니까), 한 명이라도 여호와 증인을 만들고 싶어서(그게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그리스도인은 도덕적이어야 하고 감동을 주어야 하고 어떻게 어떻게 살아야 되고... 가 계속 따라붙게 되는 것이지. 믿음은 <끝>을 보여주시는 건데, 위와 같은 종교성은 이 세상 죽는 날까지 계속해서 나머지가 붙게 돼. 끝이 안 난 게임은 근본적으로 피곤하지. 그리고 그게 곧 이 세상의 모습이고.
예수님이 만약에 인간의 가능성들을 인정해주시면서 천국을 선포하고 다니셨다면, 그 당시 성경을 잘 알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로 내몰리지는 않았을 거다. 그러나 오히려 그 반대로 하나님에게서 나온 나를 몰라보는 너희는 마귀의 자식이다, 회칠한 무덤이다, 독사자식들이다... 하면서 저주받은 죄인으로, 그들의 지금까지의 행위를 다 부정하고 다니셨거든. 그들의 율법적인 행위와 완전히 반대되는 일들을 하시면서 (내가 성전이다, 내가 하나님이다,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나를 믿으라...)약속의 성취자로 오셨음을 자기백성에게 드러내고 다니신 거야. 오늘날도 이렇게 복음이 선포될 때, 믿음을 선물로 받은 은혜의 사람들과, 무언가를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두 세계가 깔끔하게 갈라짐을 볼 수 있어. 지옥 갈 사람이 지옥 가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마음아파 하시지 않거든. 이미 창세 전에 끝난 이야기니까.
세리와 창기들에 관한 신약성경을 읽어본 적이 있지? 예수님이 그들과 친구처럼 대했던 것을 알 수 있어. 남을 속이면서 돈 뜯어내고, 음탕한 눈을 흘겨야만 겨우 먹고 살 수 있는 이 부류의 사람들을 향하여, <깨어라> 잡지는 어떤 해석을 내릴까? 평생 아무런 도덕적인 일을 한 일이 없이, 강도죄로 사형당하기 직전에 있었던 예수님 옆의 강도에 대해서는 또 어떻고. 예수님은 그 강도에게도 낙원을 선포하셨거든. 또 예수님의 공생애동안 자신들의 <주님>이라 고백하며 계속 따라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나버린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은 한결같이 다시 찾아오셔서 성령을 부어주셨거든. 그리고 자기를 증거하라고 부탁하시지(행 1:8).
그런데 그 잡지에는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부도덕한 일(음탕한 분위기에 함께 있는 것, 속임수, 정직하지 못한 것 등)을 하고 살면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잖아. 그래서 행위와 믿음을 연결시키면 예수님과 반대로 나가고 있는 것이고, 결국은 성경과는 아무 상관도 없게 되는 것이지.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부정하고 뒤집고 있어.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택한 자기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것이라고 말씀(요 6:39)하셨거든.
앞에 나와 있는 목차들을 봐봐. 모두 그 중심이 ‘인간’을 말하고 있는 거야. 성경의 중심내용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에서 떠난,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것과 아주 비슷하지 않니? 그래서 내가 그랬지. 나는 무슨 종교, 무슨 종파... 그런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이 과연 예수의 행하심을 최고로 여기는가’에 초점이 있다고. 다른 많은 것들을 말하고 재미나게 놀고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고 자신의 일들을 자랑해도, 말씀 앞에 서면 우리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을 쓰레기로 보면서 예수님의 피 값만을 유일한 공로로 높이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그 순간에 성도인가 아닌가는 식별이 되는 거라고.
네가 ‘왕국’이라는 말을 이따금씩 인생의 궁극적인 희망이요 구원의 종착지처럼 이야기했는데, 구약에서 <왕>이라는 의미는, 선택된 이스라엘은 왕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나라라는 거야. 그 왕 ‘한 분’에게 모든 백성들의 삶과 죽음이 통째로 들어있다는 의미지. 구체적으로 다윗이라는 왕이 등장하고 있어. 그러나 인간 다윗은 실패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언약완성자인 아들을 향하여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음을 그 뒤에도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어. 이것들은 율법(말씀을 실천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근거. 계명)을 이룰 수 없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주는 동시에, 하나님 자신이 계시하신 말씀을 스스로 완성시키고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이지.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 3:23-25)
성경에서는 이와 같이 <왕>으로 오신 <예수>를 <믿음>의 실체로 나타내고 있지. 그래서 <믿음>은 <예수>라는 거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속성인 거룩함, 의롭다 함을 단번에 얻게 되는 것이지. 그래서 더 이상 우리는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음을 알게 되고. 그래서 행위로가 아니야. 행위로 하면 은혜가 가려지거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가려지거든. 그리고 하나님이 제시하는 거룩함에 이르기 전에 다 죽고 말지. 아니, 이미 죄와 허물로 죽은 자(엡 2:1)이기 때문에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거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망의 몸에서 무엇이 나오겠어. 그래서 선택된 자기백성에게 은혜로 거저 주시는 것이지. 선물로 말이야. 그러면서 ‘이것이 누구 때문인지 아느냐, 내 기뻐하는 아들 예수로 말미암은 죄사함의 공로로 주어진 것이다’를 알게 해. 십자가 지신 아들을 내세우시는 거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이 십자가의 은혜만 자랑하고 나타내게 되어있음을 알 수 있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7)”
그러니까 진짜 <왕>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고, 왕국은 다른 나라가 아니라, 곧 <예수님 나라>임을 알 수 있지. 그 분이 <주>가 되신 거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를 따르는 무리가 소리 질러 외쳤다고 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 21:9)” 골로새서 1장에서는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기록되어 있지. 아들의 나라는 아들이 주인이야. 여호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고 되어 있어(마28:18).
예수님이 오신 이후의 신약성경은 어디를 보든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하고 있지. 사도행전 같은 복음서는 사도들이 핍박을 받는 이유가 여호와를 증거해서가 아니고, 예수 이름으로 가르치고 그 이름이 그리스도라 전도하기 때문임을 보여주고 있다. (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4:1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21,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4:18,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5:41,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5:4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하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9:22,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9:29... ) 이 외에도 일일이 셀 수 없이 많아. 한마디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고 가르친다는 이유로 순교 당한 것이거든.
네가 예수를 인정한다고 하면서, 그러나 그보다 큰 자가 그의 아버지 ‘여호와’라 토를 달았어. 한번 생각해보자. 아버지가 종들에게 “너희는 내 아들 말만 들어라, 내 아들을 너희의 주인으로 세웠다. 내 아들을 만나야 나를 만나는 것이다. 다른 높은 곳에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아들 안에 내가 있다(고후 5:19-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라면서 부탁하셨어. 그런데 종들이 이 말에 기분이 나쁜 거야. 그래서 “내가 왜 저 별 볼일 없는 아들 말을 들어야 됩니까. 나는 더 크고 높으신 여호와 하나님, 당신 말만 듣겠습니다” 그렇게 고집한다고 생각해보라고. 그렇게 원망하고 고집을 피워도, 선택된 자녀이면 끝까지 이 진리를 알게 애쓰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하심이 계속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아들 안에서 함께 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만 확인될 거야.
택함 받은 자녀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가리워주시기 위해서 어린양의 피로 제물이 되신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야. 부활하여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셨고, 그 예수의 영을 받은 자마다 예수의 <주 되심>을 알게 되는 것이지.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되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심(롬 8:16)”을 믿게 돼. 그러니까 내가 전도를 하고 있는 것도 그 분의 영이 친히 하고 있는 것이니, 자기 체험이나 경험을 내세우지 않게 돼. 아니 내세우는 것처럼 보일 때, 자신은 금방 ‘아, 내가 또 예수를 수단 삼아서 내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서 안달이구나...’를 깨닫지. 그러니 또다시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내세우기를 원하는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이 죄를 용서받으며 살고 있음은 순전히 은혜구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율법은 행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지. 롬7:7-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그리고 계속해서 예수가 <주>임을 믿고 증거하게 되고 그 자체가 또 성령의 인도임을 알게 되고...... 그러니 내 남편, 내 자녀, 내 가정, 내 나라, 내가 속한 이 세계... 의 어떤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근본적으로 즐거워한다거나 크게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사람들(요 13:1)을 끝까지 죄 용서하심으로 영생에 이르도록 이끄시는 <예수 그 이름>으로 인하여만 감격하게 되고 참 기쁨을 얻게 돼.
그러니까 예수를 알고 믿게 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상황이나 인간 됨됨이가 (사람들 보기에 좋은 쪽으로) 크게 달라진다고는 볼 수 없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아. 화내고 거짓말 하고, 속이고 낙심하고, 자기의 기쁨을 위해서 달려가고, 죽을 병에 걸리고, 쇠하여 가고, 실수하고, 비참해질 때도 많고 ... 그의 결국은 죽음이고... 그러나 다른 것이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만>을 믿는 믿음 안에서 떨어지지 않고 그 분 만을 <주님>이라 부르는 걸 보니, 끊임없이 용서받고 있다는 것을 점점 더 크게 크게 알아가게 된다는 거야.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8)”
그러니까 죄는 여전히 있지만(그리고 어떤 것으로도 그 죄를 없애지 못하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이기에(롬 3:24) 그 죄를 가리우심 받은 복 있는 자가 된 것이지. 아예 죄에 대한 생각 자체가 근원적으로 뒤집어 지는 거야. 죄란 뭘 잘하고 잘못하는 내 행동여하에 따라서 죄가 되고 안되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 내가 책임지겠다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죄라는 것이고, 어린아이처럼 한없이 받아 누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로 말미암은 용서, 사랑이 바로 우리의 의(거룩)인 것이지.
네가 준 잡지들에 있는, 또는 여러 기독 잡지들에 있는 것과 같은 그런 땅에서의 복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3-5)을 말하는 거야. 그 복을 받은 사람은 안개같이 지나가는 이 땅의 것들에 대해서 그다지 요동칠 필요가 없게 되지.
그런데 사실, 말씀대로 이웃 사랑도 많이 할 때가 있고, 전도(그리스도에 대한 비밀을 말하는 것-골 4:3)도 하게 될 때가 때때로 있고, 또 화 안낼 때도 많고 친절하고 온유할 때도 많이 있어. 이 때 ‘성도’라면,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이 정도로 사랑이 많아지고 성품과 인격이 괜찮아지고 있구나...’하면서 뿌듯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째 나 같은 죄인의 몸에서 이 열매가 터지고 있을까, 역시 성령의 열매(갈 5:22,23)는 놀랍구나’ 하면서 예수님의 일하심에 또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지. 몸의 컨디션에 따라서 변덕이 죽끓듯이 하는 이 죄인의 몸에 주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야.
경애야!
내가 참 말이 많았다. 사실 말로 하면 얼마 안되는 분량인데, 글로 쓰니 이렇게 잡다하게 늘어지게 되었구나. 이것도 다 내 욕심이야. 인간의 욕심까지도 그 분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인다는 것은 알지만. 더 욕심을 내자면,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성경에 있는 하나님을 믿고 성경 말씀에 관심이 있다면, 성경의 증거대로 새언약의 실체로 오신 예수에 대해서 깊이 있게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것이야. 그래서 측량할 수 없는 그 은혜의 길이와 높이와 넓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는 역사가 우리에게 동일하게 일어나기를 소원하게 되는구나.
새언약은 옛 것이 아니고 새 것이며, 문자가 아니고 영이라고 하시거든. 문자(의문)는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며 (고후 3:6), 옛 것은 그림자이고 모형이며 장차 올 새 것을 가르키기 위해서 있는 거라고 해. 문자는 돌에 새긴 모세언약 때의 율법을 말하지. 육신으로 행해야 되는 법. 반대로 영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를 말해. 성령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만 있어. 그리고 이것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그의 자녀들을 해방시킨 것이고(롬 8:2). 해방 당한 자는 한 일이 없어. 그냥 일방적으로 택하심을 따라 되는 은혜로 알게 되는 것이지(롬 9:11). 죄와 사망의 법은 뭐냐면, 그 위 7장 마지막에 잘 나와 있어.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곤고한 죄와 사망의 법... 그러니까 7장 전반부에 걸쳐 쓰여 있는 대로, 율법대로 말씀대로 지켜서 생명에 이르게 할 것으로 알았던 그 계명이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인 줄을 알았다는 거야. 즉 우리가 무슨 선한 일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되는 줄 아는 지식이 곧 사망의 법이라는 말씀이지. 나도 너도 그 누구도 이 사망의 법에서 한 발자국도 스스로 헤어날 수 없다는 거야. 살면 살수록 그것을 더욱 확인하게 돼. 예수만 믿는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행하지 않으면 도대체가 살 수가 없다니까! 그냥 이 사망의 몸이 알아서 이미 내 몸에 좋은 대로 행하고 있어. 이런~!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선 자의 진짜 고통이고 절망이라는 것이지. 그래서 어떤 복음 전도자는 기가 막힌 진리의 한 토막을 말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만, 십자가 지신 예수님 앞에서만 진정으로 절망하게 된다. 절망의 동기는 십자가다!> 캬아~! 이렇게 가슴 저미면서도 후련할 수가--- 그러니까 이 절망을 맛 본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인고! 하늘에서 찾아오신 자의 사랑을 받았다는 뜻이니까. 죄를 알았다는 것이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았다는 것이니까. 끝도 없이 책임져야 할 나머지 딸린 짐 덩어리의 깊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니까. 진리가 주는 자유를 알았으니까......
그러므로 7:25처럼 예수의 영, 성령을 받고 보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고, 8:1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육신의 생각과 행위에 대하여 죄를 정하는 것: 내가 왜 이렇게 행동했지? 더 기도해야지, 더 최선을 다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등등 양심의 죄를 정하여 받는 것)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 마귀는 끊임없이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선 악간에 판단을 시도하게 하거든. 그러나 성도는 정죄함이 없는, 진리가 주는 이 자유함으로 끝까지 가게 됨을 고마워하게 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내 육체에 채워지는 사건(골 1:24)을 당연시하며 살아가게 되고 말이야.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1:12)
잡지 몇 개 읽고 나서 이렇게 쏘아댔으니, 너를 다시 만나기가 수월치가 않을 성싶다. 예수 믿고 확실하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렇게 잘난 척하게 되었다는 거야. 그러나 아무에게나 이러는 것은 아니다. 잠 못 자도록 생각나는 사람들에게만 이래. 나의 사랑의 표현이라고나 할까. zzz... 이상하게도 내가 사랑을 표현하면 끊어질 때가 많아서 그렇지. 사람은 누구나 그렇잖아. 자기식대로 사랑하거든. 솔직히 <내가 너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쓰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그래서 나도 신기해. 어쨌든 볼 기회가 있다면, 또다시 허심탄회하게 나누었으면 한다.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했어. 아주 질려버릴까봐서. *^-^* 하하하...
가족 모두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평안을 전하며~ 안녕!
2004년 8월의 막바지로 접어든 날들 가운데서... 오늘밤은 유난히 바람소리가 크다.
* 추신 *1. 나도 주고 싶은 책이 있다. 성경적인(예수로 시작해서 예수로 끝나는) 신학서적으로 내가 아주 고마워하는 책 중의 하나. 하나님이 직접 구원하시지 않고 왜 ‘예수 그리스도를 세웠는가’에 대한 일관성 있는 해석이다. 재미있으면서도 심오하게 읽을 수 있어. 이상한 것이 있으면 말하기를.
1. 발령 났다. 여기서 1시간 30분 걸리는 <땅 끝 해남>으로. 점점 더 먼 곳으로---
1. 일단은 가족과 일주일씩 헤어지게 생겼으니 슬퍼서 울었다. 하루 종일... 이렇게도 복음보다 남편과 자녀들에게 애끓는 사랑을 가지고 있었음이, 말씀 앞에서 또 들통 나는 순간이다. 잠시잠깐씩 헤어지는 일도 이렇게 싫은데, 장차 이 세상을 어찌 떠날 것인가? 그러니 내가 끊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여기저기 뿌리시고 거두시는 분의 뜻대로 될 뿐이다. 오는 것도 내 맘대로 안 되고, 가는 것도 내 맘대로 안 된다는 것을 또 알았다. 그래서 예수만 믿는다는 것은 기적이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
==========================================================================[re] 여호와증인에 대한 복음적인 반박(구자근 사모님 글) 정경의 2004-09-21 22:25:04, 조회 : 167, 추천 : 11
> 참으로 오랳만에 무언가를 하나 본 느낌이군요!
한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지향하는 바가 아름답다고 생각이 되는군요
이 땅ㅇ을 순례하는 나그네의 삶이 혹 어렵게 할찌라도 푯대만을 바라보고 달려 갑시다~~~~~
즐거운 여행이 되시길^^^^^^^^^^^^^^^^^^^^^^^^^^^^^^^^-*
##############################################################################################요한 계시록 세미나 안내(성서 유니온 독자 세미나) 장동관 2004-09-07 23:28:30, 조회 : 180, 추천 : 12
--요한 계시록을 쉽고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할수 있도록, 매일성경 독자와 일반 성도를 위해
이필찬 교수(한국 웨스트민스트 신학 대학원 신약학 교수)를 모시고 세미나를 개최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권합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나 평신도 지도자좀 더 깊이있고 수준 높은 성경 연구를 원하는 사람들설교나 강의를 준비하는 목회자나 신학생 등
일시:2004년 9월9일(목) 저녁 7시30분
10일(금)오전10시30분-12:30분 11일(토)오후2시-4:00
장소:가음정 교회(강영식 목사 시무) 교육관(T.285-1181-3)
문의:성서 유니온 마산지부(T.247-0714)
주위에 계시는분들에게 서로 권하여 많은 도움 받으시기 바랍니다.
==========================================================================[re]일방적인 광고만으로는 곤란합니다. 이근호 2004-09-08 08:32:20, 조회 : 194, 추천 : 12
이 필찬 씨의 요한계시록 강해의 핵심이나 내용의 특징을 미리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복음적인 것 같으면
오히려 두루 장려할 것이요
만약에
복음에 위배되면
여기에 싣기가 곤란합니다.
==========================================================================[re]일방적인 광고만으로는 곤란합니다. 송태준 2004-09-08 10:16:00, 조회 : 175, 추천 : 11
이필찬님의 요한계시록에 관해 쓴 책이 성서유니온에서 발간되어 나와있습니다.참고하시기 바랍니다.이미-아직의 구도로 보고 접근하고 있습니다.십자가 마을의 접근하고는 다르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읽고 손성식 2004-09-08 12:09:14, 조회 : 297, 추천 : 13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읽고 저자: 이 필찬 출판사: 성서유니온(서울:2001)
요한계시록의 해석은 특별한 안목이 요구되는데, 이는 그것이 묵시문학의 형태를 띄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다양한 해석의 결과를 낳게 되었구요. 그 내용을 크게 본다면 하나는 세대주의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개혁주의 해석입니다.
전자는 계시록을 시대적인 순서로 보자는 것이고 후자는 계시록을 개괄된 구원사건이 반복되면서 여러면들이 구체화되고 있음(단순한 사건 전개 방법이 아닌 점층적 반복에 의한 표현 기법)을 놓치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는 계시록의 묵시문학의 성격을 받아들임으로 나온 해석이지요.
그렇다면 우선 계시록의 '묵시'적 성격을 파악해 봅시다. 잘 알다시피 성경은 종말론적인 목표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격을 달리하는 두 가지 맥락이 있는데, 하나는 예언자적 종말론이고 다른 하나는 묵시적 종말론입니다.
예언자적 종말론과 묵시적 종말론은 동일한 내용과 차이점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동일한 점은 앞으로 다가 올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차이점은 그 사건을 다루는 차이인데, 예언적 종말론은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역사를 인정하면서 앞으로 다가오는 사건을 기다리고 있는 반면에 묵시적 종말론은 지금까지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편에서 다가오시는 '인자'에게 다가올 사건을 기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언자적 종말론은 역사를 인정하기 때문에 연속성이 존재합니다. 즉 앞으로 다가 올 사건도 이스라엘 역사를 새로 되새기고 부흥시키는 것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아들', '이새의 씨',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등의 표현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묵시적 종말론은 역사와 불연속입니다. 그러므로 묵시적 종말론에서 등장하는 '인자'란 역사를 부정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분이지요. 이 부분의 논의를 좀 더 끌고 가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묵시적 존재가 역사속에 침투 하시므로 묵시의 세계가 현재 존속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으로 일까요? 답은 '죽임당하는 모습'으로 존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묵시적 표현들 속에서 [죽임당하신 어린양의 승리]라는 숨겨진 의미들을 제대로 찾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중요한 차이점은 예언자적 종말론이 하나님의 말씀하심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묵시적 종말론은 하나님께서 직접 보여주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직접 보여 주시는 걸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움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필설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장엄하기 때문에 보여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환상과 상징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너무나 장엄해서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가슴 벅찬 감동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기초로해서 저자는 요한계시록의 주제를 '교회'로 보고 있습니다. 즉 교회를 영광스럽고 아름답게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추적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 21장의 새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교회의 아름다움인 것이다.
@ 평가 @ 본서는 계시록을 해석하기 위한 교과서 같은 책입니다. 왜냐하면 워낙 엉터리들이 많으니까 더욱 그렇습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의 사건 전개방법이 일직선이 아니라 나선형으로 구성되어 있고, 점층적 반복 기법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은 계시록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본서를 통해서 묵시적 공동체인 교회가 왜 역사(노아언약)위에 존속하고 있는지를 알게됩니다. 하지만 계시록의 주제를 '희생당하신 어린양의 승리'가 일구어낸 완벽성으로 추적해 나가지 않고 그 부대효과에만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이근호 : 계시록이 나선형 구성으로 쓰여졌다는데 대해 반대한다. 나선형 구성이 아니라 구약 선지서 구성이다. 즉 은혜가 더할 수록 더욱 광분하면서 그 본질을 드러내는 악에 대해서 추가적으로 가해지는 어린 양의 심판성과 구원성의 심도를 더해가는 식의 구성이다. 그러니까 연결된 나선형 식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사건 위주로 내용이 전개된다.
손성식 : 연결된 나선형이라니까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냥 연속성이 아니라 완벽한 하나의 묵시가 세 단락으로 구체화되면서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연속성입니다.
==========================================================================[re]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읽고 이근호 2004-09-08 14:15:38, 조회 : 310, 추천 : 17
역사와 묵시에 대한 이해는 예수님로부터 출발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이 세상을 해석해 내십니다.
요한복음 10:18에 보면,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역사관은
자신이 처해있는 그들의 존재 자리에서 나오기에 '예수님은 죽임을 당했다'라고 해석하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자리에서 나온 해석으로 인해 역사성이 형성 됩니다.
즉 '죽임을 당하는 형식'을 갖추시고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 됩니다.
이로서 이 세상에 갖추어놓고 있는 '죽음'의 의미는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합니다. 여기서 불연속성이 생겨나고 단절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살릴 권세' 부여받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되면
이 단절된 면을 예수님 타넘고 오셔야 합니다.
이로서 인류의 역사는 묵시와 만납니다.
이 만남의 영역에서는 오로지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는 취지'만이 인정받습니다. 그 외 것은 용납되지를 못합니다.
사도 요한을 통한 예수님은 '요한계시록 제시'는, 역사와 묵시와의 '이유있는' 불연속성을 말씀하기 위함입니다.
즉 인간들의 역사 이해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스스로 버린다'는 원칙이 구원의 권세로서 역사를 배경으로 적용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인간들의 역사관은 이 앞에서, (요한계시록 앞에서) 엉망진창이 되고 맙니다.
분명히 주님의 손에 놓여 있다고 한 7 교회가 그 어느 교회 할 것없이 오늘날 다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왜 주님의 손에 잡힌 바 되었다고 하면서 그 잡힌 바 된 교회가 망하고 마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망하는 하시는 그 권세 자체가 곧 '살리시는 권세'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역사 속에 있는 교회나 성도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와 무관한 초월적인 묵시적 교회를 역사 속에 모습을 드러낼 때는
꼭 인간들의 역사관과 반대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묵시에 속한 성도는 '죽임을 당하는 죽음'으로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겁니다. 그것도 '주를 위해서' 말입니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 12;11)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 유일하게 '산 자'가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1:1-8)
그런데
이러한 '스스로 버리시는 권세'를 가지고 자기 백성을 '살리시는 권세'로 전환하시는데는 그만한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 근거를 위해 동원된 집단들이 있습니다.
천사 집단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 양'의 죽음에 대한 해석을 놓고서
저희들 끼리 싸웁니다.
여기에 역사 발전적 순환론(나선형 역사관)이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역사 발전적 순환론이란
처음 자리와 원래 되돌아온 자리가 비록 강도는 강화 되었지만 속성은 동일한 속성을 지닌채 질적으로 같은 좌표에 점유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는
요한계시록 15:3-4에 나오는 '유리 바다를 건너가는 백성들의 '모세의 노래'는 마치 출애굽 상황을 리메이커 한 듯한 모습을 보이는 대목에서 깨어집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실제로 떨어지는 이 역사적 상황에서 성도는 그 진노로 인해 오히려 혹독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패배를 의미합니다.
발전이 아니라 공중 해체된 상황을 의미합니다.
복음의 맥을 이을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반응하는 악마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쪽'으로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요한게시록에서 7인, 7 나팔, 7 대접은
결과적으로
더욱 혹독하게
성도로 하여금 세상에 대해서 포기하게 만들어 버리는 쪽으로 전개됩니다.
즉 성도를 죽이는데 있어 하나님의 진노가 주도적으로 일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긴다'는 말은
살아남았다는 말이 아니라
이제 제대로 예수님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이유를 알고 죽어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일을 가능케 하는 전권은
오직
'어린 양'에 의한 '살리시는 권세'에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 부활 이후에 역사란, 단지 '역사'가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질질 끌어야 될 역할만을 담당해야 하는 사건의 우발적 집합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역사'를 추구하는 환상가들에 의해
핍박받는 형식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더 이상 역사라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
##############################################################################################. 양병구 2004-09-10 12:42:49, 조회 : 215, 추천 : 13
[re] 하나 빠졌네요 이근호 2004-09-10 13:11:26, 조회 : 240, 추천 : 16
주님의 영이 임한 성도는
주님이 일하시니
항상 전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성도에게는
'자포자기'가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지 상관없이
심지어 백수가 된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성도에게 전도를 시키시는 이유는,
성도의 무가치함을 더욱 더 외부로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만약에
전도를 안하게 되면
그 인간은
자신을 더욱 더 가치있는 인간 덩어리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게 됩니다.
자기 방어적인 자세로 인생을 살게 되지요.
전도하세요
자신이 얼마나 하잘것 없는 존재인지를
그 와중에서 철저하게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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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19 묻고답하기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를 보고 나서 ] 2004-04-02 로마서 최고관리자 07-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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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