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호님께 25가지 질문?] 2004-08-31
[이근호님께 25가지 질문?] 2004-08-31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이근호님께 25가지 질문?
최성욱 2004-08-31 04:22:39, 조회 : 195, 추천 : 13
전에 '열매'라는 이름으로 들어왔던 청년입니다. 실명가입이 아니어서인지 다시 들어 올 수 없어서 부득이 이름을 노출시켜야 하네요.
우리를 이끌어 가는 주체가 누구인가? 분명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 못지 않게 중요한 부분은 인격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인격'이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신앙인격, 신앙인격의 변화...
이런 말들을 쓰면서 때로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왜곡되기도 하고 변질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숫자 채우기식의 전도, 경쟁주의식의 전도, 물량주의, 기복주의 등등이 나타나는게 아닐까요. 자신을 포기하지 못해서요. 그래서 한 때 나마 이근호님의 신학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주체가 누구인가를 보게하니까요.
그러나 사람은 언제나 양면이 있습니다. 장점이 있는 있는가 하면 단점도 함께 있습니다.
이근호 님의 글들을 읽으면 그 주체가 어떤 분인가 하는 생각들을 해 보게 됩니다.
그 분은 사랑은 빠진 아버지 같습니다. 인격을 무시하고... 우리의 신앙고백을 무시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선한 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여 율법주의화 된다 하더라도 그렇게 변질된다 하더라도
그런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아시고 부르신 하나님을 보면서... 그런 나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죄로 인해 완전히 단절되었을 때(이 때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저 단절이었습니다) 나 자신이 아직 죄인되었을 때 오신 예수 그리스도...
오셔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그 말씀... 이것은 '예정'인 동시에 '사랑의 확증'입니다.(여기서는 이근호님의 말처럼 성경은 '계시용'이기만 하고 '구원용'은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말씀에 대한 해석으로는 불충분한 데가 있습니다.)
그 말씀을 대할 때 사랑의 차원에서 반응을 보이며 달려가는 것이 그토록 잘못된 것입니까?
오히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앞에서 부족한 나이지만 그런 작은 반응에도 기뻐하시지 않으실까요?
이근호님께
미약하나마 문제를 내겠습니다.
1.당신은 누구를 사랑하십니까?
1)하나님
2)사람
3)하나님과 사람 둘 다
2.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태복음 22;37~40)
또 다른 문제?
3.하나님은 인간을 어떻게 사용하실까요?
1)기계 다루듯이 사용하신다.
2)나를 설득하셔서 사용하신다.
3)기타
4.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는?
1)항상 대립된다.
2)대립 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3)기타
5.주체(성령님)는 인격을 무시하고 행하시는가? 주체만 중요하고 인격은 중요하지 않은가?
1)그렇다(주체만 중요하다)
2)그렇지 않다(둘 다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6.기존교회의 모든 신앙고백이 잘못되었는가?
1)예수 그리스도만 맞기 때문에 인간이 고백하는 신앙고백은 틀렸다.
2)모든 신앙 고백이 틀린 것은 아니다.
3)기타
7.인간의 회복은 항상 훌륭한 자아상을 만들기 위한 것인가?
1)그렇다.
2)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되어 있다.
3)기타
8.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의 뜻은?
1)점점 더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만 의인으로 고백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의지를 발동할 때는 못 하게 강조하고 막는 것이다. 의지를 발동하는 것은 살아있는 거니까...
2)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그런 것이라고 공식화 할 수는 없지만 주님을 위해 사랑의 차원에서 의지를 동원하는 것이다.
9.본인은 전혀 철학이나 신학의 영향력이 없는가?
1)그렇다
2)아니다
10.철학이나 신학의 영향력이 있다면 주관주의가 아닌가?
1)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독단적(주관적)이다.
2)그렇지 않다.
11.언약과, 십자가 지신 분의 의, 오직 구속사적 관점만이 절대적 진리인가? 아니면 다른 관점도 수용할 수 있는가? (안식, 하나님의 나라 등,,,,)
1)수용은 타협이며 구속사(언약과 십자가) 이외의 모든 관점은 유대신학이다.
2)구속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관점인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의 관점이다.
12.본인은 본인의 구속사가 성령께서 열어주셔서 알게된 계시이며, 즉 위에서 떨어지는 차원이며
다른 사람들은 성령께서 열어주시지 않았기에 단지 신학이나 철학적으로 배워서 안 것이라고 주장하는가?
1)저는 계시받았고(성령께서 열어 주셨고) 저들은 배워서 알았습니다.
2)계시는 성경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에 배워서 아는 자들을 모두 성령받지 못한 것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3)기타
13.본인은 본인과 성경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을 성령이 없다고 믿는가?
1)조그만 차이도 인정할 수 없다. 언약과 십자가는 완벽하기에...
2)큰 부분(주체가 부정되지 않는다면)만 일치한다면... 어느 정도는 봐 줄 수 있다
14.하나님은 인간에 대해서 단지 심판주이실 뿐이다. 그러한가?
1)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왜곡하기에 그러하다.
2)하나님께는 공의와 사랑의 두 차원이 있음으로 한 부분만으로 하나님의 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
15.믿음에는 믿음의 대상만 있고 인간의 신앙고백이나 가치는 별 필요없다. 맞는가?
1)'믿음은 예수그리스도'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음으로 그렇다.
2)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예수님 때문에 연약한 인간도 포함된다.
16.인간론은 언약과 십자가에 대 보았을 때 '죄론'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론을 타락과 구속의 두 차원에서 보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가?
1)그렇다
2)아니다
17.신학이라는 잣대로 인간을 판단할 수 없으며 신학 속에 담긴 역사성도 십자가 앞에서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역사성을 크게 의지할 수 없고 신뢰의 기준도 될 수 없다. 역사, 보편은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심판의 죄인일 뿐이다. 이 말이 맞는가?
1)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다 안다고 말할 자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본다 한들 자신의 죄인된 한계로 말미암아 다 볼 수 없기에 나타내 주신 만큼만 알 수 있기에 역사, 보편을 인정치 않으면 자신의 한계로 말미암아 주관주의에 빠짐으로 이 말은 틀렸다고 볼 수 있다.
2)역사도 보편도 신학도 결국 인간 산물이다. 그러므로 가치를 크게 두지 않는 것이 맞다.
18.'전도' 나 '선교'도 다 참된 신앙이 아니라 종교행위인가?
1)물론 그렇게 보여지는 부분도 많이 있지만 모든 것을 종교행위라고 비판할 수는 없다
2)이 모든 것이 '언약'과 '십자가'를 모르는 다 종교행위인 것이다. 인간 자체를 살려두면 안된다.
19.내가 거룩한 것 같이 너희도 거룩하라는 누구를 대상으로 말하는 부분인가?
1)예수님
2)제자들
3)기타
20.성경이 말하는 참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를 보시면서도 우리가 회복되어 가는 것을 보시면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우리와는 상관없이 그저 자신의 나라(하나님의 나라) 챙기기에 급급한 독재자인가?
21.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없이 하나님의 주되심만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인가?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되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나라인가?
22.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의 속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신다하더라도 인간은 그 두 속성을 다 담아 낼 수 없기에 결국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가? 하나의 가르침을 전해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에게 부족함이 있다 하더라도 한 부분만을 전함으로 왜곡되어지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균형을 잡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균형 잡힌 신앙인으로 살아야 맞는가?
23.목사(설교자)는 선지자적 요소가 강한가? 목자의 요소가 강한가? 둘 다의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가? 결국 균형을 잃어버릴 것을 알기에 한 쪽만 택해야 하는가? 균형을 잃어버릴 것을 알고도 온전히 균형잡지 못할 것을 알고도 균형을 잡아야 하는가?
24.지금의 기독교회에 대안은? 점점 더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인됨만 드러내면서 그렇게 의지를 동원하는 것을 종교적 행위로 규정하여 막는 것이라 믿는가? 아니면 또 다른 대안이 있는가?
아주 유치한 질문 하나?
25.내가 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오직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라면 밥 먹는 것도 성령께서 하시는 일인가? 혹 밥 먹는 것은 성령받지 못한 나의 육이 하는 것으로 본 다면 밥 먹는 것은 선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자신 안에 영지주의적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닌가? 밥먹는 것은 선한 것이 아닌 것으로 보는 영지주의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이와 비슷하게 성령님께 죄송한 말이지만 똥 누는 것은 어떠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본다면 이런 것들을 어떻게 볼 것인지... 누가 하는 일인가? 성령님인가? 우리인가? 이 쯤에서 인격을 인정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 성령님께서 우리 인격을 무시하지 않는 다는 데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격에 부족함이 있어도 주체 못지 않게 중요한 부분은 인격입니다.
중요한 두 가지 사실; 1. 주체가 누구인가?
2.주체가 인격(인간의 존재 자체와 의지)에 대해 어떻게 일하시는가?
제가 보기에 이근호님이 첫번째 사실은 잘 설명하시는 듯 합니다. 그러나 결국 성령님께서 인간을 사용하실 때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기계적으로 사용하시는지 인격적으로 사용하시는지를 잘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부분이 결국 문제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이근호님을 반대하는 것도 이 부분이 저랑 틀립니다.
저는 신앙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속에서 보자는 데는 동의할 수 있지만 '주체가 누구인가'하는 차원이 상당히 크다고 생각하지만 인격이 무시되고 우리의 신앙고백이 무시되는 부분에 있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겁니다.
인격을 강조함으로 주체를 상실하는 경우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차원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주체 못지 않게 인격이란 부분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속에서 주체를 강조하면 인격은 자동적으로 따라올까요? 그렇다고 칩시다.
그러면 반대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삶을 외면하지 않고 참된 변화를 세상에 보여 준다면...
인격과 주체는 분리된 것이 아니기에 인격 속에서도 주체가 드러나는 것 아닐까요?
어떤 사람은 많은 성경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 속에 적용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사도행전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간증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적용이라는 측면을 크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간증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적용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간증, 적용의 부분에서 부정적인 측면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못된 성경의 적용, 자기 삶을 정당화 시키는 왜곡된 간증은 없겠습니까? 모두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참된 적용은 성경 속에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두 차원이 모두 중요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 삶 속에 펼쳐질 사도행전을 보는 일... 물론, 이근호님은 예수 그리스도만 전하면 거기에 따라 나오는 것이 참된 성도의 삶이라고 생각하신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어찌하여 주체 속에 딸려 나오는 인격은 맞고 인격 속에 드러나는 주체는 틀린 겁니까? 사실은 분리될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이 아닙니까?
제가 보기에 많은 분들이 이근호님께 충고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균형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계속 한쪽 면만 강조 되고 그 차원을 넘어서서 다른 쪽을 아예 무시한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제기되는 질문이 대표적으로 '자유의지'부분일 수 있다고 봅니다. '인간자체'에 대한 부분일 수 있습니다. 저는 인간 자체를 강조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삭감시키자는 취지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인간자체를 놓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을 너무 강조하시다 보니 인간 자체를 놓치고 계신 겁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하시는 일들... 그러나 그 일들에도 성경적인 방향성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방향이죠.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강조하고 싶으신 것은 알겠으나 그 방향이 어디를 가고 있는지 놓쳐서는 안됩니다. 주체를 강조함으로 인격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비록 부족한 인격이라도 하나님이 사랑의 대상으로 구별한 인격이라면 사랑의 대상으로 구별한 이것이 거룩이라면... 하나님이 부족한 죄인을 의롭다 칭하셨다면... 하나님 보다 앞서서는 안됩니다.
인간론을 '죄'론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 실체가 죄인이라 하더라도 타락과 구속의 양 차원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그 이후에도 여전히 죄만 고백하고 있을 존재이며 회복이 없는 존재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속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예수의 이름의 뜻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할 때 그 구원이 단지 죄만 회개하는 그런 대속이란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죄에서 자유케 하고 구원하신다는 것이 죄만 회개하고 나는 죄인입니다만 고백할 존재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예수가 예수를 예수의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다고 성경이 기록하는데 계시용이기만 하고 구원용은 아닙니까? 예수의 대속의 죽음의 목적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완전한 데 나아가기를 기뻐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죄인됨만 고백하는 것이 내가 거룩한 것 같이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과 일치합니까? 죄인됨만 고백하는 것이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의 목적과 일치합니까?
제가 볼 때는 이근호님은 예수님의 대속의 목적을 그리스도의 통일된 세상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면서 인간 구원용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계시용, 그러나 인간 구원용 아님 하지만 성경은 ...
예수님을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로 소개하며 화목제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죄에서 구원하는 것은 죄만 고백하는 것으로 끝난다는 뜻입니까? 그래서 한 쪽만 보고 계시다는 겁니다.
주체는 생각하지만 인격은 간과하시는 것 같습니다.
부족함이 있고 연약함이 있는 것을 아시지만 이 모든 것을 알고도 부르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나의 완악함에 포기하지 않으시고 설득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내가 아니면 더 빨리 일하실 수 있고 돌들로도 외치게 하실 수 있지만
나를 통해 일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그 하나님을, (인간 편에서 본다면) 더 늦어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굳이 설득할 필요가 없으신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설득해 가시는 그 하나님을
이근호님은 한 번도 경험해 보신 적이 없는가 봅니다.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역사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보이시고 그리스도의 충만함 앞에 나의 연약함을 보며 그 날을 소망할 수 밖에 없게 만드시는 하나님이 계시며, 내 삶 가운데서, 사람들을 통해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물론 말씀 이외의 모든 것은 말씀으로 분별되어야 마땅하지만...)
인격적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말씀을 통해, 삶 가운데, 사람들을 붙이셔서, 그리고 나를 설득하셔서 결코 기계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이 아니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분 자신이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잘 났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나를 쓰시기를 원하셔서 설득하시는 그 하나님이 사랑으로 충만한 그 하나님이 찬송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주어진 현실과 상황이 어두워도 크리스챤이 낙심치 않는 것은 그 삶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결코 그 하나님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논리로만 이해하려는 그 사람은 모릅니다.
정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그 하나님이 결코 나를 죄인으로만 몰아가시는 분이 아닌 것을 발견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으니 그 믿음을 의로여기신지라....
나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어떤 뚜렷한 직장이 있는게 아닙니다. 지금도 신학교에서 공부 중인데 아직 어디로 인도하실 지도 미지수입니다. 그러나 제 삶 가운데 감격이 있습니다. 제가 죄를 범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날마다 죄를 범하고 돌아서서 또 죄 짓는 인생이지만 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주신 믿음의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의 눈은 주어진 현실과 상황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참된 비전을 보고 멀리 보고 있습니다. 그 비전은 직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저는 제가 십자가에 달렸어야 마땅한 그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가 달리신 것을 보며 죄인된 나의 부족함을 봅니다. 충만한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서도 여전히 죄인된 나의 모습... 그러하기에 소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참된 회복의 때를 요. 하나님은 회복된 당신의 백성을 나 이상으로 소망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정말 소망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아니까 나 역시 소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통치를 바라는 삶... 이보다 행복한 삶은 없습니다. 세상의 돈과 권력과 명예로 살 수 없는 소망입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바라는 삶...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제 남은 삶입니다. 아니 저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한 때는 이것이 고백되어 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고백되어집니다.
한 때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맞는지 그리스도 밖에서 사는 것이 맞는지 많이 고민했었는데 말이죠.
하나님이 왜 아브라함을 옮기셨는지 갈대아 우르에서 왜 가나안 땅으로 옮기셨는지 조금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갈대아 우르에도 우상들이 가나안 땅에도 여전히 가나안 족속들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르치고 싶으셨던 겁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약속을 따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고 약속을 따라 죽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 비전... 제 남은 삶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꿈꾸어 보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인격적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아니까...
영원한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 압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삶, 이것이 참된 삶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영원한 생명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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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근호님께 25가지 질문?
이근호 2004-08-31 12:11:51, 조회 : 205, 추천 : 15
>1.당신은 누구를 사랑하십니까?
>홀로 언약 완성에 해당되는 행하심을 예수님
>
>2.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이웃 사랑에 대한 율법은 예수님께서 성도 안에서 이루신 말씀
>3.하나님은 인간을 어떻게 사용하실까요?
>
매일 성도를 죽이시면서 사용하십니다.(고린도후서 4:10-11)
>
>4.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는?
신의 주권은 인간의 의지를 통해서 구현됨
(단 여기서 '하나님의 주권'이나 '인간의 의지'는 성경과 상관없는 철학적 사상임)
>
>5.주체(성령님)는 인격을 무시하고 행하시는가? 주체만 중요하고 인격은 중요하지 않은가?
>
> 신은 인격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양쪽 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두 비성경적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6.기존교회의 모든 신앙고백이 잘못되었는가?
기존 교회라는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교회란 오직 그리스도 몸만을 의미하고 그 외의 모든 교회는 사이비입니다.
그런데 참된 교회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
>7.인간의 회복은 항상 훌륭한 자아상을 만들기 위한 것인가?
>
'인간의 회복'은 성경에 없는 내용입니다. 단 인간의 회수만 있을 뿐입니다.
>
>8.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의 뜻은?
인간은 자신의 성질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의지를 꺽을 위인은 없습니다.
선택 문항 자체가 오류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씀은
달리 부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성도를 실정을 그대로 표현한 겁니다.
>
>9.본인은 전혀 철학이나 신학의 영향력이 없는가?
인간은 태어나면서 스스로 신학과 철학을 만드는데 타인의 신학과 철학을 참고해서 자신의 욕망으로 만들어냅니다.
따라서 자기 죄에서 초연할 사람은 없습니다. >
>
10.철학이나 신학의 영향력이 있다면 주관주의가 아닌가?
주관주의란 말은 무의미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주관주의가 아닌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11.언약과, 십자가 지신 분의 의, 오직 구속사적 관점만이 절대적 진리인가? 아니면 다른 관점도 수용할 수 있는가? (안식, 하나님의 나라 등,,,,)
용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그 당사자가 문제입니다.
>>
>12.본인은 본인의 구속사가 성령께서 열어주셔서 알게된 계시이며, 즉 위에서 떨어지는 차원이며
>
모든 것을 은혜라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통하든지요
>>
>13.본인은 본인과 성경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을 성령이 없다고 믿는가?
예수님을 우선하지 않는 사람을 성령이 계신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
>14.하나님은 인간에 대해서 단지 심판주이실 뿐이다. 그러한가?
>
하나님은 먼저 심판의 하나님으로 다가오시기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심판이 성도에게는 사랑으로 이해됩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자신이 마땅히 심판받아야 함을 수용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
>15.믿음에는 믿음의 대상만 있고 인간의 신앙고백이나 가치는 별 필요없다. 맞는가?
> 인간의 모든 고백이나 행위는 그 밑바닥에 나름대로 믿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옵니다.
따라서 필요없다, 있다가 아니라 필연적입니다.
>16.인간론은 언약과 십자가에 대 보았을 때 '죄론'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론을 타락과 구속의 두 차원에서 보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가?
다
>
인간론은 타락과 구속의 두 차원이 아니라 오직 '언약'이라는 측면에서만 해석이 가능합니다.
>
>17.신학이라는 잣대로 인간을 판단할 수 없으며 신학 속에 담긴 역사성도 십자가 앞에서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역사성을 크게 의지할 수 없고 신뢰의 기준도 될 수 없다. 역사, 보편은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심판의 죄인일 뿐이다. 이 말이 맞는가?
'역사'라고 말하지 말고 그 원천적으로 파고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시간 의식'이 밑에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시간 의식을 통해서도 인간의 죄를 지적하십니다.
>
>18.'전도' 나 '선교'도 다 참된 신앙이 아니라 종교행위인가?
용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열매가 예수님의 홀로 공적으로 나타나지 아니하면 죄라고 볼 수 있습니다.
>
>19.내가 거룩한 것 같이 너희도 거룩하라는 누구를 대상으로 말하는 부분인가?
> 성도들입니다.
>
>20.성경이 말하는 참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를 보시면서도 우리가 회복되어 가는 것을 보시면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우리와는 상관없이 그저 자신의 나라(하나님의 나라) 챙기기에 급급한 독재자인가?
성경에 회복은 없습니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으로 회수할 뿐입니다.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로 통치받는 세계가 천국입니다.
>
>21.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없이 하나님의 주되심만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인가?
>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군요.
하나님의 나라는 백성의 존재 여부로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기 위한 백성인가를 통해서 드러냅니다. 즉 백성이 있다고 해서 천국이라고 말 할 수 없는 겁니다.
>
>22.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의 속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신다하더라도 인간은 그 두 속성을 다 담아 낼 수 없기에 결국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가? 하나의 가르침을 전해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에게 부족함이 있다 하더라도 한 부분만을 전함으로 왜곡되어지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균형을 잡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균형 잡힌 신앙인으로 살아야 맞는가?
>
성도는 균형잡을 일도 없이 매일같이 십자가에서 죽으면 됩니다.
주께서 쓰시도록 맡기는 겁니다.
>23.목사(설교자)는 선지자적 요소가 강한가? 목자의 요소가 강한가? 둘 다의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가? 결국 균형을 잃어버릴 것을 알기에 한 쪽만 택해야 하는가? 균형을 잃어버릴 것을 알고도 온전히 균형잡지 못할 것을 알고도 균형을 잡아야 하는가?
>
목사는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만 발휘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발휘를 통해서 자신이 매일 죽어야 될 죄인 인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물론 성도인 목사에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24.지금의 기독교회에 대안은? 점점 더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인됨만 드러내면서 그렇게 의지를 동원하는 것을 종교적 행위로 규정하여 막는 것이라 믿는가? 아니면 또 다른 대안이 있는가?
교회가 아니라고 보고 매일같이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면 그 무리들이 곧 교회의 현시입니다.
>
>25.내가 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오직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라면 밥 먹는 것도 성령께서 하시는 일인가? 혹 밥 먹는 것은 성령받지 못한 나의 육이 하는 것으로 본 다면 밥 먹는 것은 선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자신 안에 영지주의적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닌가? 밥먹는 것은 선한 것이 아닌 것으로 보는 영지주의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이와 비슷하게 성령님께 죄송한 말이지만 똥 누는 것은 어떠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본다면 이런 것들을 어떻게 볼 것인지... 누가 하는 일인가? 성령님인가? 우리인가? 이 쯤에서 인격을 인정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 성령님께서 우리 인격을 무시하지 않는 다는 데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모든 것을 주님이 주신 은혜로 생각하지 못한다면 신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살아있으니 산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겁니다.
"죽든지 살든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은혜를 모르는 자는 관심이 엉뚱한데 두게 마련입니다.
세상은 결국에는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에게 관심있는 자만이 천국으로, 자기에게 관심두는 자는 지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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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근호님께 25가지 질문?
김대식 (Homepage) 2004-08-31 12:21:00, 조회 : 184, 추천 : 10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제가 이근호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 님들이 하도 깝깝하게 보여서, 제 성깔에 못이겨 답변을 합니다. 이근호 살리기 운동을 하지 마시고요 이근호는 죽는 죄인이라 라고 말해주시길 바랍니다. 죄인을 왜 살리나요?
차후에 이 목사님이 답변하든 누가하든 상관 없겠지요?
한 번 제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답변 해봤습니다.
최성욱 씨 무엇이 당신을 분노케 하는가요? 그 주체가 님 자신입니까? 아니면 성령 입니까? 아니면 예수님 입니까? 아니면 이근호 입니까? 아니면 마귀입니까? 아니면 주변인이 님을 부추겨서 입니까?
님이 죽어가는 이근호를 살리고파서 안타까워 애달아하는 모습을 보니 참 답답하네요. 당신에게 있어서 이근호 목사는 죽어가는 죄인입니다. 이근호 당신은 죽어가는 죄인입니다 라는 말을 왜 용기 있게 못하고 죽음을 애써 막고 살릴려고 애쓰는지 도통 이해가 안가네요. 모든 이는 죽어가는 죄인입니다 라는 것을 말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인격이란 죽어가는 죄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만, 오히려 제가 알기론 죄가 없는 자에게만 해당 되는 줄 압니다. 인격을 너무 소홀히 여기는 것이 아닌가요?
죄가 늘 솟아 나오는, 죽음이 가차이 다가오는 입장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챙겨서 자기포장 할려고 해도 죽음을 못 넘어서기에 화딱지가 나겠지요?
그러니 님이 인격이라는 법으로 님 자신을 포장하고픈데 괜히 안되니까 심술을 부리는 것 같네요. ( 이근호 살리고픈데 왜 죽어가지 라고 하듯 말이죠. )
1. 여기에 대한 답변은 모든 성도는 같습니다. 예제에 빠졌습니다 예수님 입니다.
2. 님이 언급한 구절은 바리새인이 질문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그리고 끝나야? 아니지요 예수님이 다시 묻지요?
(마 22: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마 22:43)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마 22: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마 22: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마 22:46)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이 말씀에 근거해서 답변 드리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주 이십니다. 주란 사랑을 실천합니다. 님의 질문에 완전히 빠져있는 원수 문제를 해결 하는 분입니다. 님은 그 원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지만요. 자꾸 죄 죄 죄인 죄인 이라고 몰아 붙이지 말라는 식이지요.
그래서 님에겐 주 가 필요 없는 겁니다. 사랑만 따지겠다는 심뽀입니다. 떡줄 사람은 생각치도 않는데 김칫국 부터 마시고 있으니 말이죠.
3. 이것은 어린아이도 다 아는 문제죠. 하나님은 인간과 상대 안하십니다. 예수님 하고만 상대 하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인간을 사용하지 않고요, 오로지 죄인만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거든요. 의인 사용하면 골치 아픕니다. 얼마나 자기를 자랑하는지 자기를 건드리면 다 죽여버리거든요. 의인이었던 바리새인들 유대인이 그러했지요.
4. 하나님은 숨어 계신 하나님이기에 주권이란 인간들이 만들어낸 철학에 불과합니다. 온갖 좋은 것을 신에게 포장해 두어야 경배의 대상으로 삼기에 딱 좋지요. 거기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포함되면 금상첨화 입니다.
님들의 의문은 이겁니다. 내 운명 내가 개척해야하는데 말이지요. 여기에 대한 변증을 안병철 신부가 기가막히게 설명하는 것을 봤는데요. 인간의 자유의지가 없으면 로보트 되는 줄 착각하고들 있어요. 인간은 한번도 로보트 된 적이 없고, 또 되고파도 될 수 없지요. 그저 자유의지가 없다는 말에 화딱지만 유감 없이 발휘하는 죄성의 품성만 만방에 떨치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인간 갖지도 않는 더러운 인간들만 모으십니다 바로 죄인이지요. 나 자유의지 있어본들 늘 죄만 짓더라 라고 자기자신의 죄에 마음 아파하는 상한심령들만 모으시는 겁니다. 물론 이것까지 연기를 하는 우리이기에 예수님만 가려내지 그것을 못기다려서 이렇게 질문하고 답변하는 우리의 딱한 모습입니다.
5. 주체 곧 성령은 인격(인간인가 본데요) 무시하고 일하시는가? 전혀 아닙니다. 인격은 예수님뿐이거든요. 그러니 성령님이 오로지 예수님의 영으로서 예수님의 형상만을 닮도록만 일하시기에 모든 성령의 활동은 예수님에게 초점이 맞추어 졌지요. 님은 그 사이에 인간도 인격이니 자꾸 한 다리 걸치고파서 사람도 인격에 포함 시켜 달라는 모양인데.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를 원하십니까? 독립된 자유의지인 인간 인격을 원하십니까?
6. 기존교회라는 말이 어패가 있지요 교회는 딱 하나 뿐이거든요 예수님의 피로 세운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하나이지 기존교회가 아니지요. 왜 자꾸 교회 아닌 것을 교회라고 하는 것일까요? 수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사라졌습니다. 계시록의 7교회도 포함되고 카톨릭 교회 사이비교회 이단 교회 등등 수없이 많지요.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 기존교회입니까? 정통교단이 교회라는 증거가 있나요?
차라리 간단하게 교회를 어떤 종파에 소속된 교리로 무장화된 단체로 보실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녀를 두고 교회라고 보시면 아주 간단합니다. 그들이 교회생활의 재미에 빠진 자들은 아닐겁니다. 예수님과의 사귐 속에서 살다간 자들입니다. 예수님과 사귐이 없는 자를 왜 억지로 교회라고 붙이고 싶어 하는지요? 이해가 안됩니다.
그 예수님의 자녀들의 고백은 이미 죽었던 살아있던 미래인이든 상관없이 지금도 성령을 통해서 지금도 교통하고 있습니다. 님이 만약 예수님과의 사귐이 없는 자들의 고백은 어떻게 하냐고 물으신다면 그야 님도 잘 알기에 답을 할껍니다. 마귀도 믿고 신앙고백하고 벌벌 떠는 판국에 .......
7. 오 마침 위의 답변들 중에 연관이 되니 연결이 되네요. 인간을 회복하고픈 것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을 회복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러 오셨지요. 여기에 모든 피조물들도 그 아들의 형상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고대하며 동참합니다. 만약 마귀가 있다면 인간의 훌륭한 자아상을 만들기 위해 마귀가 불철주야로 열심히 뛰지 않겠나요? 만약 있다면 말이지요. 온 사력을 다 할껍니다.
예수님은 인간만 딸랑 챙기시지 않습니다. 인간 때문에 모든 피조물이 고통 가운데에 허덕이는 것을 창세때에 부터 쭈욱 계속 되었기에 그들의 소원처럼 원수 문제 죄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겁니다. 예수님 만이 해결할 문제이지요.
님이 언급한 2번 예제 하나님 나라를 제시한 이유는 하나님 나라 중심 신학이 기존 신학의 흐름이기에 언급하신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중심 신학도 결국 교회론 중심으로 흘러가지 않나 싶어요 신학을 모르지만 제 사견입니다. 하나님 나라 신학은 바리새인들도 주창한 모습이라봅니다.
8. 그 말의 뜻은 예수님과 사귐을 갖는 자만 아는 의미입니다. 그 사귐을 시기하는 자가 있다면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 어떤 방해에도 그 사귐이 변치 않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속에 와서 다 장악을 하시는 겁니다. 그 장악으로 나에게 표출 되는 것이 나의 죽음입니다(고전 15:31). 그래서 나는 죄인(내 믿음 때문에 나온 고백이 아닌 성령 때문에 나온 고백)이었는데 예수님이 나를 용서 했다고 외치는 증인인 겁니다. 전혀 낯설은 주장을 본인이 하게 되는 겁니다. 그 낯설음은 날마다 죽음을 통감함으로 나타나지요. 그런 자들로만 성령으로 교통케 합니다.
1번 예제는 뒷부분을 의도적으로 삽입 하셨구요, 2번 예제는 나라는 존재를 예수님은 반드시 사랑해야할 의무를 의도적으로 강요하는 듯 합니다. 나를 빼버리시고 주님이 그렇게 찾고 찾아 다니시는 죄인을 삽입 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이 무슨 말인 줄 아실껍니다.
9. 인간이란 날때부터 자아 중심적입니다. 그렇기에 철학과 신학은 본능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활동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지 이근호 라는 죄인이 해결책은 아닙니다. 마치 님이 그렇게 보는 것 같네요. 어서 이근호라는 죄인에게 탈피 하시길.
10. 인간에겐 객관성이 없습니다. 죄가 가입 됨으로 그 주관성은 더욱더 땅 속으로 감추어진 상태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공인된 것을 붙잡는것이 본능으로 작용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율법 또는 성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공인한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독선이 그 공인 된 것을 찢으시고 무너뜨리시고 다시 세웠습니다. 율법은 사랑으로, 성전은 예수님 자신의 몸으로 교체 작업을 하셨지요. 이 독선적인 활동에 누가 시비 걸던가요? 인간은 주관을 모아서 권력화하고 조직화해서 객관화시킬 따름이지요. 그렇기에 객관화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어패입니다. 다수주의를 늘 경계하라는 말씀도 있지요. 그리고 독선도 사이비나 이단들에게서 자주 나타납니다. 또 그 독선이 우리를 살리는 예수님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이단으로 몰리시고, 유대인임에도 사마리아인으로 취급받는(요 8:48) 유대의 객관화가 예수님의 독선으로 몰아붙인 사례입니다. 제가 답변하는 것도 주관화인지? 객관화인지 따져 보실 필요도 있겠죠.
방금 말한 입장에서 볼 때에 하나님의 일은 바리새인에게는 객관화 였어야 하는데, 예수님에게는 주관적이었으니 바리새인이 아무리 낮은 마음으로 객관화의 눈으로 예수님에게 접근해서 사귐을 가져 볼려고 무지 애를 썼으나 예수님의 주관은 허락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힐문 할 자 있으면 어떻게 답변하실 건가요?
11. 이 질문은 신학적인 답변을 요구하네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 왜 그리 신학을 잡을려고 용쓰는지. 포착한다고 잡힐 분도 아닌데 말이지요. 다만 신학이란 발전하는 것으로 압니다. 죄가 더 한 곳에 은혜도 넘칩니다. 죄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이지요. 은혜도 마찬가지.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라는 카피도 있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 신학도 사라지거나 발전할 테고, 언약 신학도 사라지거나 발전 할 것입니다. 나중에 역전이 될 수도 있구요. 그래서 자랑할 것은 신학이 아니라 십자가 아닙니까?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왜 바른 신학에 대한 욕심을 가지시는지요? 십자가란 그 바른 신학도 배설물로 여길 뿐인데 말이지요. 바른 신학 자랑해서 무엇할려구요? 아무 쓸데 없는 똥인데
12. 그 답은 간단합니다. 님의 질문이 위에서 떨어진 질문으로 질문하나요? 배워서 한 질문 인가요? 이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만 압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라는 질문을 통해 답변을 구지 들어서 꼬투리 잡을 것이 아니라 답변을 자기 자신에게 맡겨두세요. 이근호라는 죄인에 집착을 하다보니 그렇게 보시는 겁니다.
당신은 선택 자인가? 아닌가 라는 질문은 자기 자신에게 하고 자기 자신이 답변하도록 맡겨야지 입으로 하는 말에 무슨 신뢰가 있겠습니까?(왜냐 인간은 자기선택을 배제한 언어를 발휘한 적이 없겠죠) 다만 예수님만을 시인하는 입술로만 사용하면 됩니다. 이것도 배운 것일가요? 위에서 떨어진 것일까요?
13.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누구든지 가지는 모습이지 이근호라는 죄인에게만 특정적으로 가지는 성향이 아니지요. 님은 그렇지 않나 봐요? 같은 울타리라고 생각하니 그런가 본데요. 카톨릭과 논쟁을 해보면 님도 똑같은 식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인간의 육의 싸움이 아니라 배후세력 끼리의 싸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 질문을 배후세력인 예수님께 해보세요.
14. 님들이 가진 편견이 구원만 있고, 사랑만 있고, 좋은 것만 있는데 그것에 동의치 않고 전제된 것을 집어넣기에 짜증을 내는 겁니다.
심판 속의 구원이고, 죽음 속의 생명이고, 원수 속의 사랑이고, 지옥 속의 천국을 증거 하니 마치 앞엣 것만 강조하고 뒤엣 것을 간과하는 냥 몰아붙이기 식인데요? 심판의 주를 만나질 못했는데 구원의 주를 만났다? 성경에 어디 있는지 한 번 알려주세요. 제가 알기론 심판의 주를 만남으로 구원의 주와 사귐에 들어간 것으로 압니다만. 님들 성경과 제 성경이 다른가 봐요?
인간이란 공의를 좋아하지요. 공의 적인 모습은 없고 늘 모순 속에서 이중적인 삶을 살지만 공의는 매우 좋아합니다. 바로 그런 인간을 부서뜨리고 새피조물로만 사귐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러니 공의를 자기 자신에게 바로 적용하지 마시고요 헌 피조물을 박살내시는 예수님에게 적용시키세요. 그러시면 새피조물이 예수님의 손에서 탄생 됩니다.
15. 14번과 연결 되네요. 자꾸 창조자 한 분 만으로 족하지 피조물의 존재성을 당연시 정당화 해본들 창조자 마음 아닙니까? 믿음의 주체가 예수님이면 예수님의 자녀들은 든든할 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자는 불안합니다. 그럼 내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겁을 먹지요 그래서 가인처럼 확증을 주는 표를 요구하지요. 아벨의 족보는 그 이름 앞에서 모든 권한도 포기 한 자들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맛이 끝내 줄텐데, 그것이 보통 기쁨이 아닌데요? 아마 못 느껴보셨길래 불안하신가 보네요. 예수님을 딱 한번만이라도 믿어보세요 든든합니다.
연약함에 대해서 정당성을 가지고 따질 수 없지요 내 연약하니까 책임을 예수님이 져라? 그 연약함을 감당하시기 위해 자기의 살과 피를 찢으시고 내어주신 공로가 더 큰 겁니까? 아니면 내가 연약함의 조건 때문에 예수님의 구원의지와 일치하여 맞아떨어지니 감당하지 않고서는 못베길껄이라는 구원의 당연성입니까? 어찌 보통 믿음이 아니신가봐요? 대단하신 믿음이신가 봐요? 성경의 어떤 믿음의 조상보다도 더 위대한 믿음을 가지신 듯.
16. 여기에 대해 목사님이 답변 하셔야 겠군요. 제가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읽어보니요. 인간론만 죄론이 아니더라구요! 모든 교회론 신론 기독론 종말론 성령론 등등 다 죄론이더군요. 이왕 따지실려면 좀 더 넓게 따지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읽어보니 쉽더군요 사이트 중에 있으니 한 번 보시길 제가 느낀 것이 아마 맞을껄요. 14번의 답변과 연관되기에 그것을 충분히 읽어보시면 알껍니다.
17. 님의 말대로 가치를 둔다 칩시다? 성령이 곧 예수님의 영이 찾아와 전혀 다른 시각을 보여주신다면 어떻게 하실껀가요? 그 예로 유대정통에 능통한 사도바울입니다. 또 구약의 이사야가 그러합니다. 분명 과거에는 그들이 역사와 보편성 다 중시하고 그것대로 행했으며 절대로 손 놓지 못하던 자들이 졸지에 어떻게 되었나요?
그래서 위에서 떨어지는 해석과 배워온 것에 대한 갈등이 남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서 일어나겠지요. 12번의 답변을 참고하세요.
18. 예수님이 등 떠밀어서 말씀을 증거 하신 적이 없으신가 봐요? 만약 기적적으로 그런 등 떠밀림을 당해보셨다면 자신이 한게 아니라 주님이 한 것에 낯설음을 느낄 것입니다. 자기자랑과 자기 행동에 연연하지 않고 왜 등 떠밀려서 증거 하는지 고민하게 될 겁니다.
종교에서 포교나 도를 전하는 것은 기본 사항이지요. 그러니 종교는 마약이지요. 설마 기독교도 마약으로 만들고픈 것이 아니시겠지요? 이미 마약으로 된지가 오래 되었지만 요. 이 놈의 전도 땜시 ㅋㅋㅋ
19. 거룩이라는 말을 얼마나 시시하게 봤으면 자꾸 지켜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마귀는 놓치지 않고 부여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거룩치 못해 땅을 거룩케 하실려고 쫏겨납니다. 만약 한 사람도 지킬 수 있었던 자가 있었다면 구지 쫓아내고 다시 돌아오게 하고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칠 필요 없었겠지요.
또 거룩함이 인간에게 가능하다면 예수님이 직접 오실 필요도 없구요. 성령을 약속할 필요도 없지요. 성령은 도우미로만 취급 하지 않고 주체로써 일방적으로 장악해서 이끌어 가시니깐요.
자 그렇다면 거룩한 백성이 된 자들은 뭡니까? 아직도 모르셨나요? 그들이 잘났다고 고백한 적이 있던가요? 믿음의 대표자가 이렇게 답변을 합니다.
(롬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아브라함도 믿음이 와야 구원이지요. 그 믿음이 미래에 오실 예수님이었듯. 의로와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거룩이 공짜로(이것을 자꾸 거부하시는데 자존심 상해서 그럴껍니다) 덧입혀져서 거룩한 것이지 자기 도취적인 거룩은 거룩으로도 취급도 하지 않습니다.
20. 질문도 저런 질문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대단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나 못하지요 은사 받은 사람만 하는 질문이 아닌가 싶네요.
14번 답변에도 언급했는데요. 제가 실로암교회 박준태 집사님에게 이런 말을 들은 것이 기억납니다. 사람은 연약함을 늘 무기화 한다는 말입니다. 연약한게 자랑이 아니거든요? 오히려 미안스럽지요. 그러나 그것마저도 사랑스럽게 보신 주님의 사랑이 대단한 것이지 나의 연약함이 대단한 것은 아니다고 봅니다.
즉 연약함 뿐만 아니라 뭐든지 조건화로 삼는 겁니다. 구원이든 사랑이든 뭐든지 잡히는대로 조건화 시키고 정당화 시키고픈 것이 인간인가 봅니다.
연약하든 연약하지 않든 따지지 않으시고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끊을 수 없다는 독선적이고 독재적인 사랑 님이 끊을 자신감이 있으시면 한 번 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럴 끊을 수 있는 재주, 재간을 자유의지로 선택해 보시길 발휘해 보시길 바랍니다. 얼마나 독선 적입니까? 우리에게 묻지도 않고 말이지요. 자기 멋대로 아닌가요? 일방적으로 사랑해 버리겠다는 그 고집과 아집이 예수님 혼자 북치기 박치기 아닙니까?
21.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조건에 꼭 인간이어야 합니까? 돌덩어리도 있습니다. 무시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인간과 그리스도의 형상은 딴 차원의 것입니다. 인간의 것을 그리스도의 형상과 연관시켜 연장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새피조물이란 님도 모르고 저도 모르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그 새피조물이 인간인지 돌덩어리인지 모르기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 새피조물을 만드는 주체자를 바로 보시면 되는 겁니다. 예수님 아닙니까? 왜 우리는 예수님 만으로 만족 못하는 것일까요? 왜 자꾸 후속으로 들어오는 혼수품에만 관심을 가질까요? 신랑 되신 예수님 만으로 족하시면 어떤 혼수품이든 상관 없겠지요.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자 중에 마귀도 있음을 아세요. 천국이라고 다 같은 천국이 아니니깐요. 그들이 주장하는 천국이 어떤 것인지도 공부하시면 좋을 것 같네요.
22. 참 질문이 너무 위대해 보입니다. 마치 인간이 한 개라도 가능한 것처럼 보시는 것 같습니다. 아예 둘 중에 하나라도 전혀 감당 할 수 없는 심각한 죄성에 놓여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셨나요? 그래서 신학이 교만한 겁니다. 신학은 그런 가능성을 탐구로써 뚫어보겠다는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그런 자들이 많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고민하는 자들을 알아주지도 않고요 일자 무식한 죄인 창기 세리 한마디로 개 같은 더러운 자들하고만 어울리시지요.
님이 그런 고민을 한다면 믿는 자로 인식되기 쉽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고민한다고 믿는 자로 보시질 않습니다.
그런 대견한 고민을 하는데도 말이지요.
하나님의 공의는 커녕 불의함이 가득하였고, 사랑은 커녕 분노(원망)로 가득찬 인생을 늘 뿜어내며 살아갑니다. 이 심각성에 젖어 있는 자들이 님과 저 그리고 창녀 세리 강도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에게 다가오는 예수님을 가로막고 깝죽대는 자들이 있으니 바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넘치도록 발휘하는 바리새인들 아닙니까? 참 그들도 원해서 그러했겠습니까? 예수님 가는 곳마다 시비 걸고 방해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들도 예언된 대로 움직이는 것이니깐요.
공의를 담는 그릇이든, 사랑을 담는 그릇이든 이 그릇 자체가 깨어져 있음을 왜 모르십니까? 그릇에 바닥이 뻥 뚫혀져서 무엇을 담든 자기자랑만 나오는 게 우리의 죄성의 심각성인데 말이지요? 담기는 뭘 담아요? 차라리 그릇 하나 이 기회에 새로 장만 하시길 바랍니다 10개월 할부도 아마 해주실 겁니다. 카드도 가능하겠죠.
조화와 균형은 그릇으로 결정 되질 않고 보석 그 자체로 됩니다. 아무리 믿을려고 해도 안 믿겨 지시겠지만 우짭니까? 보석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보석을 말릴 그릇을 아직껏 못 봤거든요.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4: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사도들의 이런 담대한 믿음도 하나님께 있다고 하지 자기 자신의 균형과 조화에 있다고 하질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라는 그릇을 하나님은 가차없이 깨뜨리십니다.(12절) 그릇은 깨뜨리기 위해 있습니다. 깨어지는 그릇에 연연하는 자는 부자였고, 깨어져도 상관없이 연연치 않은 자가 거지나사로 였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후손 차이겠지요.
23. 이것은 목사들에게 들으면 하도 사기를 치기 때문에 일반성도와 대화를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목사란 치리하는 장로 ruling elder 가르치는 장로 teaching elder 의 합성어 인 줄 압니다. 결국 섬김이 목적이지 무리의 우두머리가 목적이 아니지요. 그렇기에 "나 아니오 주님"을 늘 되풀이 하는 자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 곧 주인임을 늘 상기 시키는 자이고, 그럼으로 인해 자기 자신은 성도와 예수님 사이에서 중간에 알짱거리거나 가로막아 방해를 해서 안목을 흐르게 하면 안되기에 자꾸 예수님을 제시하고 자신은 뒤로 빠지는 누락시키는 습성을 가진 자가 목사입니다 이것이 섬김이지요. 섬김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 적 요소와 목자적 요소를 목사에게만 강요하시면 안됩니다. 성도들이면 누구나 선지자적, 목자적 인 모습을 예수님을 앞세우고 자신은 누락시키면서 어떤 무리 속에서든 펼쳐지는 겁니다. 가정에서 목자적 요소를 발휘하면서 정작 목자되신 주님을 제시하고 뒤로 빠지고, 직장에서 선지자적 요소를 발휘하면서 정작 선지자 되신 주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권력화 되고 계급화 되었기에 서로 그 자리가 마냥 좋은 듯이 하고파들 난리인데 그 똥푸는 일을 왜 하고픈지 이해가 안되네요?
24. 예수님은 실패할까봐 쥐구멍 만들어 놓고 일하신 적 없습니다. 죽으면 죽는거지 그 대안이 없다는 겁니다. 대안을 바라고 일한다는 자체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항상 믿는 댓가 곧 보상을 염두하지 않나 싶네요. 교회 자체가 대안이 없는 영적인 무리입니다. 교회란 타락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애초부터 가짜를 자꾸 연연하여 개혁할려고 하니 웃끼는 일이지요. 예수님의 몸이 타락하던가요? 그런데 왜 대안을 제시할가요? 자유의지의 시각에서 봤을때에 타락 할수 있다고 그 가능성을 선택한 것일까요?
자꾸 예수님의 일을 구하지 않고 자기 일을 구하기에 대안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빌 2:21)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복음 증거에 대한 수고 보다, 그 댓가에 보상에 따라 자기의 선택을 발휘 하겠다는 겁니다. 지금 있는 그 현장에서 복음으로 수고하시면 됩니다. 아무리 엉터리 같은 사이비 집단 속에서도 복음은 증거 됩니다.
아주 유치한 질문 하나?
25.내가 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오직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라면 밥 먹는 것도 성령께서 하시는 일인가? 혹 밥 먹는 것은 성령받지 못한 나의 육이 하는 것으로 본 다면 밥 먹는 것은 선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자신 안에 영지주의적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닌가? 밥먹는 것은 선한 것이 아닌 것으로 보는 영지주의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이와 비슷하게 성령님께 죄송한 말이지만 똥 누는 것은 어떠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본다면 이런 것들을 어떻게 볼 것인지... 누가 하는 일인가? 성령님인가? 우리인가? 이 쯤에서 인격을 인정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 성령님께서 우리 인격을 무시하지 않는 다는 데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는 이 질문이 제일 마음에 들고 제일 솔직하게 느껴지는 질문입니다. 차라리 제일 먼저 1번에 두시면 참 좋았지 않나 싶네요.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죽는 것도 말이지요 죽는 짓이 뭡니까? 늘 똥을 싸대는 우리들 아닙니까? 치매 걸린 할머니를 보살펴 보면요 자기의 선함은 며칠 못 갑니다. 사람들이 많은 병원에서 말고요 집에서, 아무도 없구 단 둘 만이 있다면 말이죠. 미치고 환장합니다. 온갖 뒷치닷꺼리를 해보시면 알게 됩니다. 그 속에 영광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 속에서도 간섭 하십니다. 바로 이런 우리들을 뒷치닷꺼리 하시며 온갖 허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