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구원파. 김기동 목사. 류광수 목사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2004-07-22묻고답하기-

[구원파. 김기동 목사. 류광수 목사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2004-07-22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구원파. 김기동 목사. 류광수 목사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임용갑 2004-07-22 23:27:17, 조회 : 264, 추천 : 30

요즘 제 주위에 구원파, 김기동. 류광수 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의 성경관에 대해서 설명을 좀 부탁 드립니다.
혹시 참고가 될 책이 있으면 소개좀 부탁 합니다.

==========================================================================
[re] 구원파. 김기동 목사. 류광수 목사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이근호 2004-07-23 07:01:18, 조회 : 630, 추천 : 37

책은 그들을 비판한 책을 보지 마시고 그들 진영에서 나온 책을 직접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사상은 오늘날 일반 목사하고 동일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당연히 이단들입니다.

그들은 민중들의 종교관을 파고듭니다.

그들이 파악한 민중들의 종교관은 이러합니다.

1. 민중들은 구원받기를 원한다

2. 민중들은 이미 나름대로 구원관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눈에 보이는 목사없이는

눈에 보이는 교회를 안 다니고서

눈에 보이는 성찬식과 세례식과 직분이나 달란트 없이는

아마 구원이 되지 않을 것이다' 라는 구원관이다.

3. 따라서

목사가 귀엽고 존경해서 돈을 교회에 갖다 바치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은 죽어서 좋은 나라 갈려고

눈에 보이는 목사와 눈에 보이는 교회가 시키는대로 울며 겨자먹는 식으로 하라 하는대로 다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

예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목사한테 불만 품고 교회 하는 일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교인들이 각자 벌리는 있는 세상 속의 사업이 신의 저주를 받아 거덜날 일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민중들의 의식을 근 150년 동안 노하우로 철저하게 간파한 이들 목사들은 교인들의 돈 지갑과 금고와 은행구좌를 향하여

진격 또 진격! 앞으로 또 앞으로!

목사 그룹이 집단적으로 돈되는 교인들에게는 융단 폭격을 하고 무식한 자들에게 푼돈을 주어 자기 사람으로 유인하여 표싸움에서 유리한 진지를 구축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진 돈, 교회 재정을 몽땅 다 털어내어 놓을 때까지 온갖 구실과 핑계 만들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바퀴벌레가 음식물을 향하여 예민한 후각을 능숙하게 발휘하듯이 말입니다.

목사들은 지기 교인들이 여유 돈을 즐겁게 쓰는 꼴을 못봅니다.

강단에서는 천국이 더 좋다고 사기를 치면서

실은 세상 사람들의 부귀 영화가 더 부러워서 질투에 이글거리는 눈총을 주곤 합니다. .

"너희들 끼리만 좋은 것 즐기냐 이 의리없는 놈들아 목사가 얼마나 무서운 인간들인지 어디 한 번 당해봐라!"

따라서 이들 목사들의 목회 전략은 이러합니다.

목사나 교회가 시킨대로 하지 않아서 저주받아 망한 사례를 있는대로 다 동원하고 그것도 모자라면 지어내서라도 옴팡 그런 간증들 속에서 교인들이 허우적대며 못 빠져나오게 합니다.

칼 대신 칼이나 총보다 더 무서운 성경책과 간증집을 쥐고 돈을 강탈해 가는 떼 강도들이 목사라는 직업인들입니다.

이들 세 사람의 도둑들도 민중들이 이런 선입견으로 갖고 있는 구원의 원리를 다듬어서 다음과 같은 이론들을 만들어냅 겁니다.

그것이

귀신론이며(김기동), 병고침 의 사역론이며(류광수), 직방 구원론(박옥수 및 구원파)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원리는 그동안 기존의 모든 목사들이 큰 150년간 써먹어온 것입니다.

이 원리를 가지고 거대 교단이라는 것을 이미 만들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미 기존의 목사들은 이 원리에 대해서 이 사회에서 정통 보수 개혁주의 참된 복음주의라고 정평을 획득해가지고 있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불교화)

따라서 어릴 때부터 일반 평범한 기존 교단에서 아무 생각에서 자라온 자들은 기존 교단과 차이점이 뭐냐를 가지고 이단이냐 이단아니냐를 따지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상 차이성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세 사람이 이단 취급받느냐 하면,

이들의 특징은

기존 교단에 "무릎꿇어!"에 복종하지 않았던 죄(?) 때문입니다. 단지 이것 때문에 이단으로 몰린 억울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봐도 기존 교단들의 사상과 동일하고 오히려 그들보다 더 이웃 사랑에 관심두고 오직 하나님만을! 오직 교회만을! 오직 선교만을!(류광수나 김기동 집단)! 외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사람보다 더 개판으로 이단짓을 해도 이단이 안되는 무리들이 많이 있는 것은 그들은 기존의 교단 앞에 무릎을 꿇고 아부하고 타협하고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제가 왜 이들을 비판하는 책을 보지 말고 이들 진영에서 나온 책을 직접 보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마 보게 되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이 한국 교회를 타락에서 건져낼 참된 주의 종(?)이라는 감동과 감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단 십자가를 모르고 눈에 보이는 한국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에게만 말입니다.

==========================================================================
[re] 구원파. 김기동 목사. 류광수 목사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송태준 2004-07-28 14:21:04, 조회 : 342, 추천 : 23

김기동 목사에 대해 알고 싶은 분을 위해 도서관에서 찾은 가장 최근에 쓴 글을 올려드립니다.

이근호 목사님의 글에서 처럼, 직접 읽고 보시고 한국교회의 신학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의도로 본 성령이해(김기동)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다. 이성은 생과 사에 대해 철학적으로 이해하기에 다른 동물과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다르다. 이러한 철학적 이해의 동기가 곧 종교성이다. 생이라는 현실적 감각에 있어서는 다른 동물과 별 차이가 없어도, 사에 대한 철학적 공포증은 다른 동물이 갖지 못한 인간만의 두려움이다. 즉 죽음에 대한 공포증은 무한 상상력을 유발하고, 그래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인간 한계 그 이상을 추고하게 하는데 이것이 종교다. 영원히 죽음이 없는 신의 속성에 대한 흠모로 발전하고, 더 나아가 신에 대한 무한 상상력을 통해 위로를 받으려 하는 이것이 종교 심리다.

하나님이 흙으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에게 생기, 곧 영을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다. 이때부터 사람은 생령이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생령이 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마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고 명하셨다. 이를 통해 영원전부터 영원까지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갖게 하셨고, 이로써 종교적 개념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으로 죽음을 영원히 극복할 수 있는 진리를 깨닫게 하셨다.

인간이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영생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얻게 된 것이 오늘날 기독교회의 신앙이다. 기독교회의 신앙은 철저히 성경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의심하거나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면, 기독교회의 신앙 자체는 존재할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영계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돕는다. 그러므로 성경의 권위를 어떻게 줄 것이냐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성경을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들의 문학으로 취급할 것인가, 아니면 어리석을 만큼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성경을 초월하여 자기 신념으로써 신앙하려 한다면 이는 분명히 기독교회의 신앙이 아니며, 진리를 감당할 수 있는 믿음도 아니다. 초보 단계부터 장성한 신앙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무식한 자들이라는 비판을 감수하더라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가 그의 영으로 쓰신 것이라는 확신과 주장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성경이 주장하는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가 승천하신 후에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성령에 대한 이해를 능히 할 수 있으니 성경은 영계를 보는 창문이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근거다.

본래 하나님은 아무도 본 자가 없다(요1:18). 또 볼 수도 없다(요6:46). 그러나 유일무이하게 그에게서 나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를 보았고 또 그를 안다. 그리고 그가 알고 계신 아버지와 아버지가 보내신 자신을 앎으로 마침내 영생을 얻게 하는 진리를 알게 하는 이가 곧 성령이심을 이미 증거하셨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역사 속에 들어온 인자를 영접함으로써 하나님과 나의 영원한 관계가 이루어졌음을 직접 체험케 하시는 이가 성령이시다. 이 또한 사람의 눈으로 절대로 볼 수 없고(요14:17) 체험으로 알 수 있는 보혜사이다. 보혜사란 가장 가까운 의미로는 '돕는 이'란 뜻이다. 즉 변호자, 경호자, 봉사자란 뜻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알 수 있어도 결코 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영도 볼 수 없다. 하물며 하나님의 성령을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가 성도 안에 들오오실 때 각양 은사로써 체험을 주시기에 능히 그를 알 수 있다. 성경은 사람의 눈 앞에 있으며 사람의 문명에 의하여 그 기록이 존재하는 것으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 그렇지만 성령은 살아 있는 성도들의 심령에 들어와 성경을 한가지로 믿게 하는 능력을 발취함으로,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돕는다. 성령의 큰 체험은 성경을 믿게 하는 능력에 있다. 그러므로 성령을 존중하고 겸손히 그가 하시는 일에 대한 권위를 인정할 때 성령의 힘을 알게 되고, 역시 그에게서 나오는 초인적인 능력과 은사와 이적을 체험하게 된다.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가 말씀으로 온 세계를 지으셨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마침내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에 나타나신 인자를 역사적, 과학적 존재로 확인하여 그를 주라 시인할 수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 이처럼 우리 눈으로 전혀볼 수 없는 성령을 전적으로 존중하여 인정하고 그에게 순종해야만 우리가 믿는 진리가 확실히 증거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확신함으로 그가 말씀하는 하나님을 알고, 성령을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받는다(고전12:3).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성령을 받아서 그의 도움으로 예수를 아는 능력이 그리스도 교회의 능력이다.

성령에 대하여는 성경을 보는 것만큼 체험이 있어야 한다. 성령의 권위를 무시하는 분량만큼 신앙도 파괴되고, 성령의 능력도 소멸된다. 비록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그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들에게는 능력으로 증거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실존적 능력을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것은 곧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인류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은 그를 이 세상에 보내신 그의 아버지 곧 하나님을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

성령은 하나님의 신으로 성부, 성자, 성신 삼위 중 일위가 되신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의지와 아들의 의지와 함께 독립적 의지가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한 분으로서 유일하시다(요17:3). 하나님 아버지는 무소부재하시고 아들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낮추시고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함께 되신 이시니'(빌2:6-7), 이는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다(히2:9). 이들은 마침내 부활로써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다. 그러나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나오셔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도들 안에만 계신 분이시다. 성령은 자기 뜻대로 역사하시나(고전12:11)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신다(롬8:27-28). 성령은 자의 로 말씀하지 않으시고(요16:13) 들은 것을 말씀하신다(요14:26).

다만 말씀하시는 이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니 하나님 아버지만이 말씀하신다. 아들이 하시는 말씀 역시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 듣고 하시는 말씀이며(요12:49), 성령도 자의로 말슴하지 않고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가르치신 것을 생각나게 하여 그 뜻을 알게 하신다(요14:26). 하나님은 유일하신 한 분이시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일체이시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만이 아쉬움이나 부족함이 없어 간구하지 않고 그 이상도 없는 분이다. 아들은 자기를 위하여(히5:7)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는 이시요(롬8:34), 성령은 자기를 위해서는 간구하지 않으실지라도 성도를 위해 간구하는 이시다(롬8:27-28).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기까지 아무에게도 계시지 않았으나(요7:38-39), 그가 하늘에 가신 다음 비로소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이시다(요15:26).

성령은 보혜사다. 그는 예수를 변호하시며, 성도를 보호하시고 도와주시며 거듭나게 하시고 감동과 감화하심으로 성도를 온저케 하신다. 성령은 한 번 임하시면 영원히 떠나지 않고 함께 계시며(요14:16), 현재도 은사들과 능력과 이적들로써 자신을 나타내릴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의 본질을 증명하신다(행1:8). 그러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온전할 수 없다.

한국신학 제24호 2004년 여름호로부터/베뢰아센터

==========================================================================
[re] 구원파. 김기동 목사. 류광수 목사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이근호 2004-07-28 15:08:05, 조회 : 283, 추천 : 18

>김기동씨는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가 말씀으로 온 세계를 지으셨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마침내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에 나타나신 인자를 역사적, 과학적 존재로 확인하여 그를 주라 시인할 수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 "
라고 했는데

왜 인간이 꼭 구원을 얻어야 하느냐 에 대해서 그의 성령론에서 찾을 수가 없군요.
예수님을 역사적, 과학적 존재로 확인해서 과연 예수님의 '주'되심이 나올까요?

진짜 성령님이 임하게 되면,
우리들이 구원받고자 하는 본능이 결코 정당화 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예수님은 오직 십자가 중심으로 일하심을 알게 됩니다.

참고로,

김기동씨나 류광수씨나 박옥수씨는

"한국 교회야, 너희들의 신학을 가지고 나를 이단으로 몰아넣기 위한 모든 수를 다 쓰는 모양인데
너희들 쪽의 신학의 대가들이 소위 정통 개혁신학가지고 우리 쪽을 아무리 공략하려해도 그 정도 신학은 이미 우리 쪽에서 충분히 소화하고 있고 그대로 수용하고 있으니 너희들이 아무리 우리의 약점을 찾아 이단 만들려고해도 다 헛사로 끝날 것이다"라는 하면서

신학 논리에 대해서 그 어떤 헛점도 보이지 않기 위해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억울해합니다.

한국 교회가 요구하는 신학을 다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기존 교단에 무릎을 꿇지 않는다는 때문에 이단으로 몰아붙이고, 반대로 말도 안되는 신학을 구사하는 자라도 기존 교단의 권위에 굴복하면 정통 개혁주의라고 보호해 해주니 세상이 이런 억울한 일이!" 라고 하면서 개탄해 마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기존 교단들도 할 말이 있습니다.

순복음 같은 것은 기존 교단을 이단시하지 않고 교인들을 뺏아 가는 반면에 이들 김기동, 류광수, 박옥수는 기존 교단 전체를 아예 이단이라고 간주하고 교인을 뺏아가니 정당방위로 무조건으로 교인들을 뺏긴 입장에서 이단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인들=돈'이 되는 마당에서

누가 많이 수완껏 교인(=돈)을 강탈하느냐의 싸움입니다.

==========================================================================
[re] 구원파. 김기동 목사. 류광수 목사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송태준 2004-07-29 09:12:11, 조회 : 256, 추천 : 23

김기동씨는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가 말씀으로 온 세계를 지으셨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마침내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에 나타나신 인자를 역사적, 과학적 존재로 확인하여 그를 주라 시인할 수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 "
라고 했는데

왜 인간이 꼭 구원을 얻어야 하느냐 에 대해서 그의 성령론에서 찾을 수가 없군요.
예수님을 역사적, 과학적 존재로 확인해서 과연 예수님의 '주'되심이 나올까요?

진짜 성령님이 임하게 되면,
우리들이 구원받고자 하는 본능이 결코 정당화 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예수님은 오직 십자가 중심으로 일하심을 알게 됩니다.

베뢰아센터 편집부의 김기동의 신앙과 신학에서

김기동의 성령이해1에서 편집부의 주장하는 내용은 제외하고 김기동씨의 글만 옮김.

한국신학 제24호 2004 여름호로부터 / 베뢰아센터

김기동의 성령이해

한 인물의 신앙이나 신학을 평가하려면 그의 신앙고백과 신앙생활에 이르는 신앙관에서부터 저서와 설교 등, 신학
적 해석에 이르기까지 종합적인 검증을 거쳐야 한다. 또한 특정 개인이 이단 분별을 주도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며, 신학적 소양을 갖춘 신학자와 목회 일선의 목회자 등으로 구성된 협의체에서 정확한 연구와 분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에 본지 편집부에서는 한국교회 특정교단으로부터 이단 정죄를 받아온 김기동 목사의 '신앙과 신학'을 소개함으로써 그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자 한다.

1. 삼위 하나님의 일 위가 되시는 성령(본영으로서의 성령)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라 영이시다. 영이 아니시면 하나님이 되실 수 없다. 그래서 본영으로서는 성령이 되신다. 이렇게 본질, 본영은 위계질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냐?' 할 때 그 하나님은 본질을 말하는 것이기에 아버지이시며, 그가 나타나셨을 때는 본체이시며, 영으로 오셨을 때는 본영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그는 유일하신 자존자로서 아버지이시며, 모든 피조물에게는 본체로 나타나셨다. 삼위를 이렇게 이해해야 위계를 뛰어 넘어서 하나님을 바로 알수 있다. - 김기동/성령을 알자/도서출판 베뢰아,1999.p.10.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한 분이다. 따로따로 분리해서 하나님이라 하지 않는다. 성부 성자 성령은 삼위이시고 또 일체가 되신다. 아버지의 의지나 아들의 의지나 성령의 의지는 독립적이며 하나님으로서 동등하다. 삼위 하나님은 동등한 분이지만 하나님의 아들도 보냄을 받은 분이요, 성령도 보냄을 받은 분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소유하듯이 그를 영접하여 모셔 들인다. 또 성령도 소유하듯 모셔 들인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보낸 자가 없다. -하나님을 알자,2000,pp141-42.

삼위가 일체 된다 해서 아들이 아버지가 되었다가 다시 아버지가 아들이 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각각 위를 가지고 계시지만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삼위가 되시나 한 분이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면 본질로 영원 전에 자존하신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고, 아들 하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속하신 구속주를 말하는 것이고, 성령 하면 아버지의 일과 아들의 일을 증거하시는 이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실 때도 성령을 통해서 오셨고 그가 죽으실 때도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하셨다. 아버지도 아들도 성령을 초월해서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말은 아니다. - 성경에 나타난 세 영적 존재,1999,p.25.

요한복음 17장 3절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분이시요 유일하신 분이심을 말하고 있다. 영생 즉,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오직 하나님을 유일하신 분으로 믿어야만 한다. 성경은 이미 우리에게 믿음의 방향과 믿음의 정석을 말했기 때문에 성경대로 믿어야 한다. 즉 하나님은 유일하신 한 분이시고, 성부,성자,성령으로 삼 위가 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 성령은 이렇게 역사하신다,1989,pp.14-15.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시며 삼위가 되신다(마28:19-20, 고후13:13). 성경은 성부, 성자, 성신이 삼위로서 한 분이신 하나님이심을 말한다. 성경은 성부, 성자, 성신에 대해 많은 부분에서 이야기한다.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말씀은 없으나, 삼위가 일체되심을 여러 곳에서 말씀한다. 삼위는 위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거룩한 무질서라 한다. 하나님은 삼위가 되시나 어느 한 위를 빼놓고 하나님을 말할 수 없다. 삼위가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삼위이시며 유일하신 분임을 말씀한다. - 베뢰아아카데미 20기 "성경을 보는 안경" 제9강.
대부분의 신자들은 삼위에 대해 성부가 제일 위이며, 성자가 제이 위이고, 성령이 가장 나중인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물론 세상적인 질서로 본다면 아버지가 먼저이고 아들이 그 다음이 될 것이다. 그것 때문에 성령을 아들 다음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사이에 위계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을 다 포함하듯, 삼위를 대할 때도 그래야 한다. 우리는 성령은 가장 하위에 속하는 분이라는 잘못된 관념을 버리고 질서라는 틀을 깨야 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는 어떠한 질서가 없기에 "거룩한 무질서"할 할 수 있다. 성령과 성부와 성자라 해도 무방하고, 성자와 성령과 성부라 해도 무방하고, 성자와 성부와 성령이라 해도 괜찮다. 이렇게 삼위 하나님은 거룩한 분으로 질서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 성령을 알자,pp.45-41.

하나님은 거룩한 무질서이시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은 위계가 없다. 그러나 위치를 가지고 있다. 성부의 위치, 성자의 위치, 성령의 위치가 분명하시다. - 성경에 나타난 세 영적 존재,p.24.

어떤 분은 '성부,성자,성령'을 인간적인 눈으로 보아 서열로 생각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제일이고 아들이 그 다음이고 성령은 맨 나중으로 순서를 정한다. 내가 '성령을 알자'란 책 속에 '성부 성자 성령은 거룩한 무질서이시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난잡하고 무질서하다'라는 말이 아니라 거룩한 분이시되 '서열이 없는 분이시다'하는 뜻에서 한 말이다. 인간에게는 아버지와 아들의 서열이 있지만 성경에서는 성부?성자?성령의 서열을 말하고 있지 않다. 즉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삼 위로 동등한 영광과 동등한 권리와 동등한 하나님으로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 성령은 이렇게 역사한신다. 16.

예수께서 오셔서 아버지의 일을 공개해 놓았지만 그 길은 사정을 아는 사람은 지극히 적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아버지 사정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의 영만이 아신다.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셔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비록 예수를 보내어 하나님의 계시를 알려 주었어도 그 사정을 알게 하시는 분은 성령 밖에 없다. 율법 아래서는 하나님의 사정을 알지 못하고 자라게 되어 있다. 오직 성령으로 난 자만 아버지의 심정을 알 수 있다.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아버지의 깊은 사정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사정을 아시고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고 계시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신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믿는 자라면 누구든지 성령을 받아야 한다. 성령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사정을 아는 성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위,35-38

예수를 시인하는 것은 신앙이다. 예수 하신 일을 믿는 자는 신자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성령을 받아,예수를 보내셔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그 사정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성도가 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할 수 없다. 우리가 성령충만 하려고 하는 것은 아버지의 사정을 아는 철난 신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성도하는 말은 쉽게 말하면 철난 자식과 같다. 예수를 믿는 일반 신자는 철없는 자식과 같다. 부모는 어린 자식이나 큰 자식이나 다 사랑하지만 자식들은 그렇지 않다. 어린 자식이 부모를 아는 것과 철난 자식이 부모를 아는 것은 확실히 다르다. 신자는 하나님의 어린 자녀들과 같아서 자기만을 알고, 성도는 철난 자식 같아서 하나님의 깊은 사정을 알고 섬기고, 알고 봉사하고, 알고 순종한다. - 위,41

성신은 하나님과 아들과 함께 계신 신으로서 하나님의 본영이시다. 하나님은 영이 아니시면 하나님이 되실 수 없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오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돕고 보존하시는 분이다. 성신은 하늘의 뜻과 땅에서 이루어진 뜻을 보존하신다. 아버지와 아들 모두 성령을 절대 초월하지 않으신다. 성령이 없이는 아버지의 뜻을 아들에게 전달할 수 없고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뜻을 한 가지도 이룰 수 없다. - 성경을 보는 눈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할 때 성령을 초월하지 않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전하신다. 성령은 아버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말씀으로 표현하시는 역할을 담당하신다. 그리고 아들 예수는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의 실상을 보여 주시는 분이다. 주님은 그의 행하심으로 아버지를 나타내 주셨지만, 성령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그대로 표현하시는 일을 하신다. - 하나님을 알자, 142-43.

성부는 뜻을 가지셨고 아들은 그것을 성취하시고 성령은 이를 돕고 보존하신다. 성령은 하늘의 뜻을 보존하시고, 땅에서 이루어진 것을 보존하시고, 또 그 뜻을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성령이 없이는 뜻을 아들에게 전할 수가 없고, 아들도 성령이 없이는 아버지의 뜻을 성취할 수 없다. 아버지도 성령을 초월하지 않으시고 성자도 성령을 초월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성령은 아들과 아버지의 사이에서 오신 분이시다. - 성경에 나타난 세 영적 존재 ,14.

성령은 누구신가? 아버지와 아들의 일을 보존하시는 분이시다. 곧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뜻을 보존하시는 분이시고, 또 그 아들의 성취하신 일을 보존하시는 분이시다. 아버지의 뜻과 아들이 이루신 일을 영원토록 보존하시는 분이시다. 성령은 영원 전에 정하신 하나님의 뜻, 곧 예수께서 2,000년 전 말세의 시작에 나타나셔서 성취하신 것을 그대로 보존해 주신다. 성령은 우리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믿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아버지의 일과 아들의 일을 기념하도록 보존하시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을 인치시고 영구히 보존하시는 것이다. - 성령은 이렇게 역사하신다. 379.

==========================================================================
[re] 구원파. 김기동 목사. 류광수 목사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이근호 2004-07-29 10:28:19, 조회 : 210, 추천 : 24

>그러니까 제 말이

십자가가 빠진 성령론이라니까요.

그 성령론에다 십자가만 집어넣어 보세요

그러면 그 성령론이 다 깨어집니다.

다 허구인 것이 드러납니다.

##############################################################################################
산삼과 복음
최종운 2004-07-25 10:33:33, 조회 : 364, 추천 : 23

산삼캐는것을 채심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미 일찍부터 대체의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언젠가 한번은 채심하러 가야 겠다는 생각을 가진적이 있었습니다만 늘 실천은 하지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소원이 얼마전에야 비로소 이루어졌습니다.

모든 영역이 그렇지만 새로운 영역에 도전한다는 것은 쉽지도 않고 또한 기존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순순히 편입되기를 꺼려 하는 폐쇄성 때문에 채심정보를 접하기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한분과 연결되어 그분이 또 다른분을 소개해주어 그분과 함께 난생 처음 산행을 하였습니다. 여름 태양빛이 내려죄는 산속에서 어디 있을지 모르는 산삼을 찾아 헤매는 것은 말 그대로 고행이었습니다. 그것도 길이 아니라 숲을 헤치고 다니니 그야말로 개척자의 끝없는 행진과 같았습니다. 산속에는 갖가지의 식물들이 많이 자라고 있습니다. 도라지도 있고 더덕도 있고 다른 약초도 있지만 그러한것들은 관심밖이었습니다.

뱀과 독충, 벌들의 위험도 무릎쓰고 오로지 산삼만 눈에 띄기를 눈에 심지를 켜고 둘러보는 것 뿐입니다.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산삼은 눈에 띄지않는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더군다나 난생처음 산행하는 초보중에 초보 이제 갓 태어나 고개도 못돌리는 갓난 아이같은데 감히 산삼을 발견하기란 언감생심이지요. 다른 심마니들이 캐는 것을 구경이라도 하면 잘 하는것이지요.

그날 3명이 갔는데 서로 연락이 되는 상태로 일정한 간격을 두면서 산속을 다녔습니다.때로는 서로 연락이 안되면 조난을 당하기 때문에 서로 위치를 알려가며 다녀야 하는 일종의 팀웍이 있습니다.
산행이란 일종의 우리의 신앙생활과 같은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복음과 진리를 찾아 헤메는 그러한 모습 말입니다. 어떤때는 산삼잎을 발견하고는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가만히 잎과 줄기를 살펴보면 그건 산삼이 아니라 오가피잎인 것을 알고는 이내 실망에 빠지고는 하지요. 잎은 산삼과 100% 똑 같은데 줄기가 틀리고 뿌리는 완전히 틀립니다. 상수리나무잎도 많이 닮았지요.

이세상에 성경과 복음을 외치는 교회가 많이 있지만 과연 산삼과 같은 진짜 복음을 외치는 교회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 갑니다. 마치 오가피와 같은 교회가 많은 사람들을 속이고는 있는 않는지말입니다. 더군다나 상수리잎을 닮은 이단들도 많이이지요. 오가피 같은 잎을 가지고 복음인 것 처럼 위장하여 복음을 외치는 회칠한 무덤같은 목회자들이 있음을 있게됨을 산행을 하면서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산삼캐는 사람들을 심마니라고 하지요. 심마니들은 20번 정도 산행을 하면 1-2번 채심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말그대로 산삼이지요. 나물과 같이 흔하다면 비쌀 이유가 없지요. 그래서 귀하기도 하지만 값도 비싸게 거래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렇게 산속을 헤매고 산등성이를 몇번 넘기를 하다가 2시간만에 드디어 꿈같은 현실이 닥아왔습니다 산삼잎이 우두커니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4구산삼이었습니다.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선배 심마니를 불러 확인을 요청했습니다. 곧장 와서 확인을 하니 산삼이 맞다는것이었습니다. 모두들 축하를 해주었습니다. 초보인 나에게 산삼을 발견하게 하시다니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조심스럽게 캐보니 뿌리가 잘 생겼습니다.흥분과 감동이 늘 감돌았습니다.그러면서 한편 동행했던 선배심마니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먼저 채심하게 되었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니 괜찮다며 하늘이 준 복인데 감사하다며 축하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날은 제 혼자만 심을 봤습니다. 소위 <심봤다> 말입니다.

그곳은 이미 사람들이 많이 왔다간 흔적이 있는 산속이었습니다. 전문심마니들이 수십번 다녀갔던 그런 자리였는데 그 전문가에게는 눈에 띄지 않고 내가 발견하라고 18년동안 기다려준 산삼이 고마웠습니다. 소위 인연이란게 이런 모양입니다. 같이 가다가 앞사람은 못보고 뒷사람은발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앞사람이 밟고 간 산삼을 뒷사람이 채심한 경우도 있습니다. 복음도 이와 같지 않겠습니까? 이미 앞서간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길을 먼저 걸어 갔지만 그들이 발견하지 못한 참 복음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먼저된자가 나중되고 나중된자가 먼저된다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우리가 목사로 장로로 집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초신자가 참복음을 발견할수 있을것입니다. 그럴 때 과연 우리가 축하하고 인정할 수 있을까요? 어디 감히 초신자인 주제에 우리도 발견하지 못한 복음을 감히 발견할 수가 있느냐고 핀잔을 주지는 않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모든 조직과 집단속에서는 일종의 메너리즘이 있습니다. 그집단과 조직속에 익숙해진 관행과 타성에 함몰되어있는 사람들에게는 느껴지지가 않지만 총롱한 신입사원들에게는 발견되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유능한 경영자들은 이러한 신입사원들에게 예리한 자문을 많이 경청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러한 피드백이 되지를 않고 있습니다.

산삼의 가치는 인삼과는 비교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날 제가 채심한 산삼의 감정은 18년생정도 된다고 합니다. 정말 복이 떨어졌지요. 그러나 그게 우연한 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단 제가 오랫동안 공부해왔고 그마음이 오랜 세월지나서 실천에 옮겨져서 성취된 결과인것이기 때문에 노력의 산물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러한 인간적 노력을 하지않고서는 도깨비방망이식으로 복을 주시지는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처음 산행에 채심했다고 해서 계속 산삼을 캔다는 것은 보장 못합니다. 또 다시 끝없는 산속을 헤매면서 자기와 싸움에 승리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았다고 해서 계속 복음이 그데로 계속 발견되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이 계속 발견되어지도록 하고 유지되도록 노력하지 않고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장로니까 목사니까 내보다 복음을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하면 오산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채심하였다고 하니 아무도 믿지를 않는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증거를 보여주었지요. 사진을 보여 주니 그제서야 믿는것이었고 그다음에는 배가 아프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있는것처럼 ,,,,,,,,,, 참으로 아이러니 합니다. 축하를 해주어여 하는데 자기와 똑같은 처지의 사람이 일생 한번도 보지도 직접 못했던 전설적인 산삼을 캤다니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입니다.

앞으로도 저는 기회가 되는데로 산행을 할것입니다.마음을 비우면서 하나님과 기도하면서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캐는 산행도 계속할것이구요.

==========================================================================
[re] 산삼과 복음의 차이점
이근호 2004-07-25 20:02:49, 조회 : 280, 추천 : 36

>산삼은 인간이 자기 것으로 소지할 수 있지만

복음은 그 복음으로 인해 있는 것까지 주님에게 다 강탈당합니다.

산삼은 인간에게 이롭지만

복음은 인간을 망하게 합니다.

산삼은 운이 좋은 사람에게 찾아지지만

복음은 운이 나쁜 사람에게 찾아집니다.

산삼을 권하면 세상사람이 반기지만

복음은 권하면 도망칩니다.

산삼은 인간의 가치를 높여주지만

복음은 그동안 그 인간 가진 가치도 포기하게 합니다.

산삼은 인간이 찾지만

복음은 복음이 알아서 자기 사람을 찾게 됩니다. (아무리 피해 달아나도 소용없습니다.)

산삼은 사람을 더 살게 하지만

복음은 그 사람은 더 살 이유를 없게 합니다.

산삼은 산에 있지만

복음이 이 세상 어디에도 없고 단지 성령 안에서만 있습니다.

산삼은 전에 찾아 본 사람의 뒤를 따라가면 얻을 수 있지만

복음은 소위 복음을 알았다는 사람을 평생을 따라다녀봤자 그 사람이 주는 일은 없습니다.

산삼은 좋다는 것을 천하가 다 알지만

복음이 쓸데없다는 사실은 천하가 다 압니다.

산삼은 한 뿌리 얻고는 더 얻기 위해 애쓰게 만들지만

이왕 붙어버린 복음은 아무리 뗄려고해도 떨어지지 않는 진드기와 같습니다.

산삼은 보약이지만
복음은 먹고 죽어라고 하나님이 내리시는 사약입니다.("이놈-, 네 죄를 알렸다!")

그래서

산삼을 권하면 칭찬받지만

복음을 권하면 핍박을 받습니다.

##############################################################################################
'주의 일'과 '교회 사업'의 차이점
이근호 2004-07-28 09:01:14, 조회 : 371, 추천 : 25

주의 일은 주님이 하십니다.
교회 사업은 인간이 합니다.

주의 일은, 희생과 봉사로 이어집니다.
교회 사업은 교회 번창과 번영을 목표로 이어집니다.

주의 일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사도행전 20:35)의 원리를 유지합니다.
교회 사업은, '받는 것이 주는 것보다 더 낫기에 구제사업도 더 받아내기 위한 밑천일 뿐입니다.

주의 일은, 잃어도 실패가 아닙니다.
교회 사업은 잃으면 그것으로 곧 실패입니다.

주의 일은,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합니다.
교회 사업은, 하지도 않는 일도 한 것처럼 부풀립니다.

주의 일은, 복음만 전파되면 대만족입니다.
교회 사업은 목사만 배부르면 대만족입니다.

주의 일은, 종사자를 죄인으로 드러나게 합니다.
교회 사업은, 종사자를 영웅으로 드러나게 합니다.

주의 일은, 사람들의 인생관 변화에 유념합니다.
교회 사업은, 교인들의 재산 항목에 유념합니다.

주의 일은, 주님의 용서에만 매달리게 합니다.
교회 사업은, 인간들의 경쟁력에 매달립니다.

주의 일은, 죽을 수 있는 힘을 주시지만
교회 사업을 사는 함을 이야기합니다.

주의 일은, 죽음으로의 초대입니다.
교회 사업은 장사입니다.

##############################################################################################
십일조는 맏물로 오신 그리스도의 모형과 그림자라는 사실을 정리해서 올려주실 수 없는지요?
장동관 2004-08-01 21:14:54, 조회 : 167, 추천 : 18

십일조는 맏물로 오신 그리스도의 모형과 그림자라는 사실을 정리해서 올려주실 수 없는지요?
정리해서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re] 십일조는 맏물로 오신 그리스도의 모형과 그림자라는 사실을 정리해서 올려주실 수 없는지요?
이근호 2004-08-02 08:20:54, 조회 : 401, 추천 : 11

>[ 십일조에 대해서 ]

[97 목회자 수련회] 강의(이근호), 정리(구득영)

먼저 레위기 27장 26절을 한번 보자.

(레 27:26) 오직 생축의 첫 것은 여호와께 돌릴 첫 것이라 우 양을 물론하고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구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

* 장자개념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사람의 맏물이 있고 짐승의 맏물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민수기 3장 12절과 13절을 한번 보자. 성경을 이렇게 자꾸만 찾아보아야 하는데, 그것은 성경신학이란 얼마나 많은 성경구절들을 규합해서 그런 상황을 만드는가에 있기에 말이다.

(민 3:12)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 이라
(민 3:13)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

* 레위지파가 이스라엘의 처음난 자로서, 즉, 장자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12지파에서 13지파가 되는 것은 요셉지파가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13지파이면서도 12지파로 불려지는 것은, 이 1지파가 나머지 지파들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 레위지파 - 출애굽 때는, 나머지 지파를 대신하는 장자지파이다

* 계시가 이렇게 가면서 발전이 되는데, 출애굽을 할 때는 처음난 자가 하나님의 것이었는데, 그런데 13지파가 되면서 어떻게 하면 13지파 전부를 하나님의 것으로 삼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법론으로, 13지파 중에서 1지파를 하나님의 것으로 삼는 대신에, 이 1지파가 나머지 12지파를 대신하는 것으로 삼으면 된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① 처음난 자가 하나님의 것이다. ②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 되려면 처음난 자가 나머지를 대신하면 된다." 라는 것인데, 이 '대신'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민수기 3장 12, 13절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 출애굽 때는 레위지파에서, 다윗시대에는 유다지파로

* 그래서 레위지파는 사람으로 보면 장자가 되고, 짐승으로 보면 맏물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에서의 장자의 개념은, 처음 출애굽 때의 하나님의 마음가짐과 속성을 고스란히 담고있는 지파가 장자지파라는 것이다. 그것이 출애굽 때는 레위지파이고, 다윗시대에는 유다지파라는 것이다. 그래서 호세아를 보면 다윗 왕이 하나님의 은총의 의미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 레위지파에서 유다지파로 바뀐 이유는? - 처음부터가 유다지파이다 !!

* 그러면 이렇게 지파가 바뀐 이유는 무엇인가?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가 레위지파인데, 갈라디아서를 보면, 아브라함이 온 뒤 430년 이후에 율법이 새롭게 첨가된 것은 아브라함의 의미를 새롭게 부각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원래 아브라함의 계열은 유다지파이고, 그래서 유다지파가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더욱더 부각시키기 위해 그 사이에 레위지파를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레위지파는 나중에 왕 밑에 있는 제사장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갈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 지금 계속해서 말하는 것은 '맏물'에 관한 것인데, 처음 난 것은 나머지를 '대신'한다는 것은 이미 지파의 형성과정에서도 나타나 있고, 십일조에도 나타나있다는 것이다. 생축의 처음 난 것은 여호와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축의 처음 난 것만 그런가? 아니라는 것이다. 땅의 모든 곡식이나 나무 열매도 10/1은 여호와의 소유라는 것이다.

(레 27:26) 오직 생축의 첫 것은 여호와께 돌릴 첫 것이라 우 양을 물론하고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구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
(레 27:30)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 맏물에 장자의 의미가 덮쳐진다 !!

* 이렇게 땅의 10/1은 여호와의 것인데, 이것이 레위지파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즉, 장자가 맏물을 취득함으로 말미암아 맏물에 장자의 의미가 덮쳐진다는 것이다.

* 땅의 10/1은 이렇게 나누면 되는데, 그러면 양과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가? 양의 무게를 달아서 나누는가? 만약에 것들 중에서 처음 난 한 마리를 드린다면, 그래도 이 한 마리는 10/1은 아니지를 않는가? 그것이 민수기 27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레 27:32)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 이렇게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게 해서, 열 번째로 잡히는 것은 그것이 열 한 번째가 되어도 여전히 처음 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도, 땅의 것으로 말하면, 처음 것으로 간주해주겠다는 것이다. 양과 소는 열 번째라고 해도 말이다.

* 사실 이것은 단순히 십일조의 문제가 아니라, 기존 교회에서 배운 데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 그런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가르침이 왜 잘못이냐고 시비를 거는데, 과연 잘못이 아닌가? 전통이 문제가 아니고 말씀에 비추어보아야지 말이다.

* 그렇다면 이제 민수기에 들어와서, 이 십일조의 의미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계시는 자꾸만 확대되니까 말이다.

(민 18:12)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첫 소산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
(민 18:13)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그 땅 처음 익은 모든 열매는 네 것이니 네 집에 정결한 자마다 먹을 것이라

* 첫 소산이 어떤 의미인고 하니까, 단순히 처음 난 것이 아니고, 제일 좋은 것을 드린다는 것이다. 장자에게 십일조가 돌아간다는 말은, 맏이에게 맏물이 돌아가는, 그렇게 해서 맏이의 의미가 그 땅이 대속케 되려면 레위인 땅이 되어서, 사람도 대신하고, 땅도 대신하고, 곡식도 대신하고, 양도 대신하고, 소도 대신하는, 그런 법칙이 바로 십일조 법칙이라는 것이다. 즉, 복의 계통도라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장자가 희생됨으로 말미암아 나머지는 더불어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10/1이 희생됨으로서 나머지 10/9가 더불어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에서 소경들이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하는 것이다. 왜? 다윗의 자손은 하나님의 아들인 장자이기에 말이다. 이것이 바로 '다윗언약' 이라는 것이다.

◈ 왜 양자인가? -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

* 그러니 우리는 이 장자를 우습게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장자 하나 잘 만나서 나머지가 구원받는 관계를 '양자관계' 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로마서 8장에 양자(養子)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필 왜 양자인가?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이렇게 로마서 8장을 설명하면서, 십일조와 레위지파를 말하는 신약학자들이 없다는 것이다.

요하킴 예레미야스, 헤르만 리델보스, 오스카 쿨만 등, 내어놓으라는 신약학자들이 여기에 대해서 침묵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구약과 신약을 나누어서 보는가? 다 같이 보아야지 말이다.

(민 18:28)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는 모든 것의 십일조 중에서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여호와께 드린 그 거제물은 제사장 아론에게로 돌리되
(민 18:29) 너희의 받은 모든 예물 중에서 너희는 그 아름다운 것 곧 거룩하게 한 부분을 취하여 여호와께 거제로 드릴지니라

◈ 계시는 가면 갈수록 확실하고 자세하게 진행된다 !!

* 여기서 '아름다운 것' 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제사장인 아론에게 '맏물'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십일조란 무엇인가? 제일 좋은 것의 처음 것을 드린다는 것이다. 즉, 장자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계시가 여기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신명기 14장을 한번 보자.

(신 14:22)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신 14:23)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 분명히 십일조라고 말해놓고서,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일조가 바로 맏물이라는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십일조가 맏물로 나타났지만, 이렇게 계시가 진행되면 될수록 점점 더 확실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렇게 신명기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레위기를 보고 민수기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계시의 발전을 보게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여기에 머무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까지 나아가는데, 예수님을 십일조, 즉, 맏물(맏이)로 본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장자로서,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복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히 7: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을 가졌으나
(히 7: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히 7:7)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제사장이 아닌데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레위인들이 태어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제사장이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났다는 것을 보아도, 아브라함은 제사장과 분명히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받은 제사장적 요소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것은 바로 하늘에 있는 멜기세덱의 족보라는 것이다.

* 그러니 제일 위에가 하늘의 사람인 멜기세덱이고(실제로 멜기세덱이 땅의 사람이라고 해도 상징적 의미로 하늘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밑에 아브라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고 복을 빌었는데, 그런데 이것이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복을 빌어준다는 것이다.

◈ 십일조란? - 복의 계통도를 보여준다 !! : [멜기세덱→아브라함→레위지파]

* 그러니 십일조는 무엇인가? 복의 계통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멜기세덱→아브라함→레위지파]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되는가? 멜기세덱의 족보를 따라서, 이 멜기세덱의 자리에다 예수님이 들어가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로 십일조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 속에도 이미 레위 직분이 들어있는데, 율법이 그러니까 말이다. 이 율법은 아브라함을 증거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이다. 십일조는 율법인데, 율법의 완성자는 누구인가?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일조이고, 복이고, 그래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 말라기의 십일조 - 모세언약의 유지를 위해서 !!

* 그래서 말라기에 나오는 십일조의 개념은, 하늘의 창고, 즉, 하나님의 성전을 완성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십일조가 없으니까 제사가 반복이 안 된다는 것이다. 고아와 과부에게 양식이 안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일조를 바침으로서 원활하게 모세언약이 돌아가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라기에서 십일조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재정을 위해서가 아니고 말이다.

(말 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말 3: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말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 그런데 새언약 시대는 어떠한가? 모세언약을 대신해서 새언약이 되는데, 율법이 이루지 못한 것을 주께서 자기의 의(義)로 다 이루셨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의 피와 살 안에 십일조와 안식일 지킴이 다 들어있는데,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한꺼번에 이 모든 것을 몽땅 다 선물로 받았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의 복을 받았다는 것이다.

* 그러니 멜기세덱으로 시작해서 결국은 멜기세덱으로 끝이 났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 십일조를 드렸는데, 멜기세덱은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제사장은 멜기세덱인데, 그런데 이 멜기세덱의 자리에 예수님이 나타나서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제사장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복 빔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 그래서 히브리서는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예수님이 단번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염소나 양의 피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그분이 성소에 단번에 들어가심으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히 7: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히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 여기서 히브리서 10장을 한번 보자. 이것이 바로 십일조의 하이라이트라는 것이다.

(히 10: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히 10: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히 10: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히 10: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히 10: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히 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히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 5절에서, 하나님께서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않을 때는 언제인고 하니, 예수님이 세상에 임할 때라는 것이다. 즉, 율법을 계속해서 지탱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폐해버리고, 종결시키는 의미인 것이다. 물론 이 예물 속에는 십일조도 들어가고 말이다.

* 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는다고 했는데, 이것은 율법을 따라 드렸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즉, 율법은 이제 폐해 버리겠다는 것이다.

* 9절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 하나님의 뜻은 첫째 것은 폐하고, 둘째 것을 세우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즉, 처음 것이 없어져야 둘째 것이 세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둘째 것은 처음 것을 대신하는데, 그래서 처음 것을 없애야만 한다는 것이다. 두개 다 있으면 좋은 것이 아니고 말이다. 처음 것인 율법은 이제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 그래서 이제 율법으로서의 구약은 없어지고, 복음으로서의 구약,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구약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가 그 율법의 기능을 하는데, 십자가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이제는 '술 취하지 말라', '형제를 사랑하라' 라는 것은, 구약의 율법적 기능이 아니라, 십자가의 정신으로 그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그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이다.

* 10절에서, '이 뜻을 쫓아' 라는 것은, 9절의 '첫번 것은 폐하고 두 번째 것은 세우는 것'을 말하는데,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노력해서 취득한 것이 아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49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4,942 묻고답하기 [십자가를 모르는 자의 "자기 존재성 구축"] 2004-12-04 [신학] 최고관리자 07-03-13
4,941 묻고답하기 [죄인이면?] 2004-11-26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07-03-13
4,940 묻고답하기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 2004-11-24 디모데후서 최고관리자 07-03-13
4,939 묻고답하기 [인간은 왜 법에 민감한가?] 2004-10-21 - 최고관리자 07-03-13
4,938 묻고답하기 [하나님의 지옥만들기] 2004-10-06 - 최고관리자 07-03-13
4,937 묻고답하기 [너희 인생이 무엇이냐!] 2004-10-02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07-03-13
4,936 묻고답하기 [『삶의 진실을 찾아서』를 읽고] 2004-09-22 - 최고관리자 07-03-13
4,935 묻고답하기 [안식교보다 '주일교'를 무너뜨려 보세요] 2004-09-11 - 최고관리자 07-03-13
4,934 묻고답하기 [안식교보다 "주일교"를 무너뜨려 보세요] 2004-09-11 - 최고관리자 07-03-13
4,933 묻고답하기 [여호와증인에 대한 복음적인 반박] 2004-09-07 - 최고관리자 07-03-13
4,932 묻고답하기 [한스 요아킴 크라우스의 『조직신학』] 2004-09-04 - 최고관리자 07-03-13
4,931 묻고답하기 [다시 이근호님께 질문 드립니다] 2004-08-31 - 최고관리자 07-03-13
4,930 묻고답하기 [이근호님께 25가지 질문?] 2004-08-31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07-03-13
4,929 묻고답하기 [이근호 신학 = 주관주의 신학] 2004-08-16 - 최고관리자 07-03-13
열람 ➜ 묻고답하기 [구원파. 김기동 목사. 류광수 목사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2004-07-22 - 최고관리자 07-03-13
4,927 묻고답하기 [이근호목사님! 악마 목사입니다.] 2004-07-01 - 최고관리자 07-03-13
4,926 묻고답하기 [하나님의 중심이 되십시오,이근호 목사님.! ] 2004-06-19 - 최고관리자 07-03-13
4,925 묻고답하기 [우연성과 우발성에 대해서 !!] 2004-06-11 [신학] 최고관리자 07-03-13
4,924 묻고답하기 [박길현: 이근호 목사의 신학을 반성하며] 2004-06-06 - 최고관리자 07-03-13
4,923 묻고답하기 [천국에 가는 것인가.. 아니면 천국이 오는 것인가] 2004-05-27 - 최고관리자 07-03-13
4,922 묻고답하기 [구원의 야망] 2004-05-08 갈라디아서 최고관리자 07-03-13
4,921 묻고답하기 [이상하고 복잡한 어법파괴의 말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 2004-05-08 - 최고관리자 07-03-13
4,920 묻고답하기 [하나님형상 창조부인과 인간 구원이 아닌 예수님만 구원한다에 대한 반론] 2004-05-06 호세아 최고관리자 07-03-13
4,919 묻고답하기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를 보고 나서 ] 2004-04-02 로마서 최고관리자 07-03-13
4,918 묻고답하기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를 보고 나서 ] 2004-04-02 [신학] 최고관리자 07-03-13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