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성과 우발성에 대해서 !!] 2004-06-11
[우연성과 우발성에 대해서 !!] 200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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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대와 그 이후에 유행했던 신학자들의 주장
이근호 2004-06-09 16:58:32, 조회 : 345, 추천 : 21
[ 신의 세속화 ]박봉랑 저 대한기독교출판사(서울:1983)
소위 신자라는 자들도 세상 사람들과 대화하고 관계를 맺고 세상에서 통하는 상식과 질서와 가치성을 따른다. 여호와 증인 신자들도 통일교 교인이 재배한 쌀을 먹게 되고, 진화론를 믿는 양복장이가 만든 옷을 걸치고, 일요일날 아침 안식일 신자가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장로교인이 설계하고 불교 신자인 목수가 시공해 놓은 왕국 회관에 저들끼리 모인다. 구멍가게에서 물건 사면서 일일이 어느 종교를 가지고 있느냐를 묻지 않는다. TV 기상통보관이 날씨를 이야기해 할 때, 그 사람의 종교를 따져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자기가 믿는 종교가 이 세상의 일상에서는 별상관하지 않고 오직 자기 사후에 관한 것에만 관여한단 말인가?
그런 뜻이 아니라면 그 다음으로는 어떤 식으로도 세상을 수용할 마음의 태도를 가지게 되어 있고, 적응하고 수용할 준비태세가 마련될 것이며 그리고 이런 일련의 자기 행위에 대해 나름대로의 변명과 타당성을 정리해 놓게 될 것이다. 과연 복음적으로 봐서 무슨 태도가 정답에 해당될까?
여기에 20세기 초와 중반에 등장한 신학자들의 견해를 들어본다.
1. 고가르텐의 세속화 의미
고가르텐은 세속화를 인간의 역사화로 이해했다. 그에게 있어서 세속화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결과'이며, 세상 그 자체에서 그 출발점을 갖는다. 인간과 세계를 해명하는 데 있어서 그의 중심 개념은 '아들됨'이다.
아들 됨은 첫째로 하나님 안에 있는 존재를 의미하고, 둘째는 아버지에 대한 인격적 독립을 의미한다. 이 독립은 또한 어른이라고 부르고 그의 상속으로서 아들에게 위탁된 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자유와 구원을 의미한다.
바울이 사람의 아들됨에 관하여 말하는 두 곳에서 그는 또한 사람을 '상속자'라고 부른다. 이 상속물은 세상이다. 인간은 그의 세상을 가지며 세상의 주가 되고 세상에 대해서 성인으로서 책임을 지기 때문에 그는 아들이지 단순한 어린애가. 그러나 '어린이가 된다는' 것을 제거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까지(엡 4:13)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라서 성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세상은 이미 미성년자를 위해서 가지는 권력의 상징, 신격화된 권력이다. 인간인 세계의 질서들을 신비화한다. 이것은 인간이 인격적 주체로서 세계의 질서와 대립되지 있지 않고 의존적으로 그 속으로 융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인간은 그것들로부터 구원을 기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또한 하나님 대신에 구원을 가져오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법은 세계의 가장 강한 권세 즉 그것이 갖신의 한계 위의 세계가 되기를 원하는 권세가 되었다. 사람은 이 법에 의해서 지배를 받기 때문에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예배한다. 이 미숙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역사에 의해서 종말이 왔다.
하나님은 사람을 아들이 되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이 아들이 됨으로써 세계를 다스릴 수 있도록 그의 소유로 주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어 법 아래 두셔서 법 아래 있던 자들(즉 어린아이로 있던 자들)을 속량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아들됨을 얻었다.
여기서 사람은 그의 아들됨을 경험하고 여기에서 신화로부터 역사로의 걸음(복음이 가져오는)은 인간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낸다. 이 새로운 관계에 있어서 세계는 아들의 책임적인 지배로 옮겨진다. 그러므로 객관화된다. 세계는 더 이상 거룩하지 않다. 그것은 지식과 행동의 대상이다.
신앙이 첫 과업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역사와 지상의 역사를 구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역사는 철저한 상호 관계 속에 유지된다. 한편 신앙은 인간과 세계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구원을 인간의 행동으로서 성취시킬 수 없는 신적 실재로 보존함으로써, 그리고 다른 한편 지상의 사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결단을 인간 이성에게 넘겨줌으로써 식별된다.
인간에 의해서 되어지는 역사적 결단의 지상적, 세상적 특성은 이렇게 해서 보존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의하여 인간과 함께 그 역사 안에서 결단된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예비되었기 때문이다. 신앙은 위의 두 양태의 역사를 연결시킨다.
지상적 역사를 신적 역사로 높이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말로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예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적 역사와 지상적 역사를 완전히 갈라놓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지상적 역사는 죄가 많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요, 세상의 사건들이 역사로서의 그 특성을 상실했고 세상과 그 질서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부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세상의 사건들은 구원과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다만 소극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고가르텐에 의하면 영지주의적 탈선이다.
신적 구원의 실재와 법의 행위를 구별시키는 것이 신앙의 최고의 관심이라고 한다면, 세속화는 신앙 그 자체에 출발점을 갖는다. 왜냐하면 이렇게 구별함으로써 인간은 이 세상에서 행하도록 부름을 받은 모든 것에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과학과 같이 인간의 능력과 지식이 극적으로 확장되는 것을 세상적인 종 살이로부터 구원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인간의 능력의 확장은 교만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께 받은 책임적인 청지기의 직분이라는 것이다.
2. 본회퍼의 세속화 의미
그리스도인이 세계로부터 피할 수 있는 장소란 없다. 거룩과 세속의 두 영역으로 갈라서 생각하는 것을 불가능하고 타당하지 못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궁극적 실재의 계시에 대한 신앙 때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 밖에는 참된 세상적 존재가 있을 수 없다.
이런 신앙을 고백하는 자는 하나님의 현실과 세계의 현실에 대한 신앙이 똑같이 고백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속해 있음으로써 그는 동시에 전적으로 세상 안에 있다. '그리스도의 현실' 위에 있는 세상 긍정, 세상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태도는 본회퍼의 그리스도교 세속화론의 근본 전제, 근본 원리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은 그 자체로서 평가되지 않는다. 세상과 그리스도의 제자의 관계는 직접성이 배제된다. 세상과 나 사이에 '그리스도'가 끼어든다. 성경은 하나님께 원수가 되는 세상에 대한 사랑(야고보서 4:4)를 권한다.
그것은 세상의 본질 자체 때문이 아니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론적 긍정'이다. 세상 그 자체는 세상이 스스로를 이해하는 대로의 세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의 현실에 반항하고 거부하는 세계이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원수성에 대해서 내린 하나님의 판결 아래 있다.
세상은 생사를 걸로 교회와 투쟁하고 있다. 세상 긍정의 근거는 본회퍼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세상 그 자체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위에 있다. 그리스도론은 세상 긍정을 불가피하게 한다.
우리는 인간이 되고, 십자가 죽고, 부활한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보지 아니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고독한 곳이건, 무신의 곳이건 하나님에 의해서 받아지지 않는 곳은 세계 안에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전 세계의 죄를 지고 그것을 처리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세상은 마치 잃어버린 것처럼.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진 것처럼 말할 수 없다. 세상은 그리스도에게 속한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위해서 죽었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가 위해서 죽지 않는 곳은 없다. 그리스도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은 다만 세상 한복판 가운데이다.
3. 로빈슨의 세속화 의미
'신의 죽음' 운동은 구체적으로 1963년 영국 앵글리칸 교회의 감독인 로빈슨이 쓴 '신에게 솔직히'에서 그 출발을 볼 수 있다. 물론 1961년 바아니안은 '신의 죽음'이란 책을 썼지만 로빈슨의 책이 나올 때까지 크게 관심을 끌지 못했다.
로빈슨은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학을 신의 증명 위에 기초하고 있는 '초자연주의'로 본다. 이러한 사고형에 의하ㅑ면 신은 이 세상 '밖에', '위에'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그의 피조물과 '나란히 하여'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계시는 '최고의 존재'로 규정된다.
그래서 로빈슨이 문제로 삼는 것은 자연신론(deism)이 아니라 유신론(theism)이다. 유신론이란 신을 하나의 인격자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은 포이에르바하가 말한 바와 같이 하나의 투사에 불과하다.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하여 있는 '임시응변책으로서의 신'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신은 실용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신은 모든 존재의 무한한, 그리고 다할 수 없는 깊이와 근거이다. 그리고 우리의 궁극적 관심이다. 신은 초자연적 존재도 아니요 밖에 있는 존재도 아니다. 생의 한계 위에서가 아니라 그 중심에서 도달되는 삶의 깊이다.
거기에는 신비가 자리잡고 있다. 신을 넘는 신이다. 초월을 위한 상실이다. 초월은 결코 초자연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자연이 위나 밖이 아니라 깊이 있는 근거로서의 초월이다. 신은 자연과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면서 그 안에 계신다.
그 중의 등장되신 분이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현존하는 초월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말씀이다. 예수는 개인적으로 자기가 신이라고 주장한 일이 없고 항상 완전히 신을 지참하는 것으로 주장했다.
예수는 완전히 그에게 투명함으로써 신을 나타낸 자. 신의 최후의 계시이다. 그리고 예수가 신의 최후의 계시의 지참자일 수 있고 신의 결정적 행동의 구체화일 수 있는 것은 다만 십자가에서이다.
왜냐하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 10:30)라고 말 할 수 있을 만큼 완전히 그의 존재의 근거에 결합된 것은 자아의 궁극적 복종과 '끝까지'(요 13:1) 사랑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은 전혀 보이지 않고 다만 신의 궁극적, 무조건적 사랑만이 보이는 것은 예수 안에서뿐이다.
그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빌 2:5-11)의 지참자, 아버지의 영광의 계시자가 된 것은 자신을 완전히 비웠을 때이다. 그래서 로빈슨은 그리스도의 성육신론과 그리스도의 인역과 사업에 대한 정통적 해석을 신화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그것을 실존적, 윤리적으로 재해석한다.
그것은 첫째로 예수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는 뜻이다. 예수는 '타자를 위한 인간'이다. '끝까지, 죽기까지'의 사랑이라는 이 점에는 우리는 신, 즉 우리의 존재의 궁극적 깊이, 조건지은 것 속에 있는 무조건 자를 만난다. 이것이 로빈슨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는 뜻이다.
둘째로, 예수의 처녀탄생이 의미하는 바는, 그의 탄생은 육의 뜻으로 난 것도 아니요 또한 인간의 뜻에서 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로 난 삶이다는 것이다. 그는 이 세상에서 온 자가 아니라, 사랑에서 난 자이다. 그의 전존재의 근거는 신이다. 즉 그의 삶은 성령에 의하여 전적으로 잉태되고 지지된 삶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는 진실로 '참된 인간'이다. 신의 삶, 사랑의 궁극적 말씀이 완전히 무조건적으로 인간의 삶 속에 몸을 가지고 나타났다. 우리 속에 있는 초월자로서, '사랑의 초월'을 복종을 통해 구체화하신 분이다.
셋째로 그는 속죄론을 비신화화한다. 로빈슨의 속죄론이란 초자연주의적 사고방식에서와 같이 고도의 신화적인 것이 아니고 또한 신과 인간 사이의 거래 같은 것이 아니라 말한다. 이와 같은 주장은 '임기응변책으로 요청되는 신'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의 속죄론은 인간 소외론과 연결된다. '밖'에 있는 신이나, 그 어떤 종교에 대해서 느낌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일반적으로 열려 있다. 그래서 예수는 인간의 실존적 소외와 소외의 극복을 통해서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볼 수 있는 우리의 존재의 근거와 '사랑의 통일'을 그 내용으로 갖고 있다.
로빈슨이 이해하고 있는 '거룩'은 속된 것의 '깊이'로 해석한다. 예배의 목적은 세속으로부터 종교의 영역으로의 도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것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자신을 열어놓는 일이다.
즉 예배의 기능은 우리로 하여금 이 깊이들에 대하여 보다 민감하도록 하는데 있다고 그는 보았다. 예배의 시금석은 그것이 어느 정도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가운데 있는 초월,' 즉 헐벗고 굶주리고 집 없고 포로된 자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좀더 생각하게 하는가'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전통적으로 기도란, 하나님과 같이 있기 위하여 세상의 일로부터 떠나고 벗어나는 것으로 규정되지만, 로빈슨은 그것과는 반대로 우리의 생활 자체가 수도원이 되어야 하고, 그 속에서 선으로써 악을 이기는 증거나 고백의 활동이 곧 기도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떠나감이라기보다는 세상을 통해서 하나님으로 침투하는 것이 성육신의 빛에서 본 기도라고 한다.
4. 바아니안의 세속화 의미
오늘날의 신의 죽음의 시대란. 반 그리스도교적(anti-christian)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지나간(post-christian) 시대라는 것이다. "너 자신을 발견하라, 그러나 너는 신을 필요로 할 필요도 없이 살아가고 있음을 알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이후의 시대에는 우리가 신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얼마든지 신을 얼마든지 넘치게 가질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말이다. 여전히 인간들은 종교적임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상징으로서 '신'의 명령을 붙들고 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속적 분위기 안에서 그리스도는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가? 그에 의하면 비신화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옛날 신화적 세계관을 가지고 오늘날의 메시지로 선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앙이라는 것을 신화적 세계관이나 인간 본질의 신화적 이해와 혼돈되어서는 안되며 또한 거기에 동의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만일 복음이 진리로서 부여되었다고 하면 이 진리는 이제 타당성이 없어진 이 신화적 개념들로부터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우주의 삼층 구조는 과거의 구원론적 관심과 일치한다. 인간과 지구를 빛과 어둠, 선과 악의 상반되는 초자연적 힘의 싸움터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을 한 완전한 인격으로 생각하여 그가 이해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한다.
인간은 신약성경와는 관계없이 성취한 자기이해가 침범당을 하지 않고는 신약성경의 우주관, 구원관, 인간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없다. 이러한 침범은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본질적 진리의 거부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바아니안은 만일 이 진리가 못쓰게 된 개념들과 결합되었고, 그러한 개념들이 현대인의 상황에 타당하지 않다고 하면 그리스도는 이 시대에서 부적당한 것이 된다고 믿었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전할 것인가? 기독교의 핵심은, 신이 자신 안에 있는 자로서의 신에 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 인간의 책임성, 인간의 구원에 의미가 있는 자로서의 신에 관계 한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므로 신의 행동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것은 자기 실존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현대 문화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강한 긍정을 가지고 인간주의적 문화에 봉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5. 알타이저의 세속화 의미
그는 '하나님의 죽음'의 신학을 복음으로 이해한다. 그가 이런 극단적인 표현을 들고 나온 것은 현대인에게 기독교가 너무나도 무력하기만해서 여기에 대한 불만과 반항의 표시라 볼 수 있다. 이런 무력증은 원해 전통적 기독교가 품고 지내왔음을 제대로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오늘날의 신학적인 상황은 모든 전통적인 언어가 무의미하고 진부해져서 그 전통적인 근거를 잃은 시대이다. 이제 거룩의 실재로 돌아가는 길은 하나님의 죽음을 통해서이며, 이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종말을 고백해야 하고, 모든 전통적 신학적 사고는 부당하다고 말해야 한다.
틸리히의 상관의 방법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상징들의 형태의 보존을 요구했기 때문에 부적절하다고 보았다.
그동안 기르시도교는 종교와의 대화 속에 있지도 않았고 종교의 전망을 무시해 왔다. 전통적 그리스도교는 이 그리스도교의 특이성을 종교와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일반적 문화에서 허용된 용어들에 의해서 형성해왔다. 그런데 그 문화는 지금 붕괴해 버렸다.
동양 신비주의란 알타이저에 의하면 '세계 부정의 길'이다. 이것은 세계 안에 나타난 직접적, 그리고 실제적 실재의 절대 부정을 찾는 종교의 형태이다. 동양적인 부정의 길들은 개인적이고, 고립된 인간의 의식에 현재하는 모든 실재의 극단적인 부정에 의해서만 그의 전적 구원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알타이저는 이 '부정의 운동'에서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공통점을 발견한다. 다만 동양 신비주의에 있어서 '뒤에로의 운동'이라면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이 '부정의 운동'은 종말론적 목표를 향한 '앞으로의 운동'으로 이해된다.
동양의 신비주의는 현재의 순간에서 본래의 패러다임의 반복을 찾는다. 동양 신비주의의 부정의 운동은 퇴화과정이다. 이 운동에서 모든 것은 원래의 형태로 돌아간다.
동양 신비주의의 부정의 운동은 공간적 장소와 시간적 지속을 무로 만드는 완전히 신비적인 과정이다. 이 운동은 우주 이전의 또는 시간 이전의 전체성의 나타남에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동양신비주의는 이 '전체성'을 무시간적 영원, 무(無) 또는 진공으로 말한다.
동양 신비주의의 언어는 철저하게 변증법적이다. '거룩'은 다만 속(俗)의 의미를 거꾸로함으로써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의 '거룩'의 상징들은 항상 실제적 그리고 직접적으로 현존하는 존재의 전적인 해소, 또는 도치에 관계한다.
동양 신비주의의 언어는 침묵의 언어이다. 변증법적 과정은 언어의 중지에서 절정에 이른다. 전적 침묵은 절대적으로 침묵한 전체성에 대한 유일 타당한 증언이다. 신비가는 마침내 모든 상징, 모든 언어, 모든 훈련, 모든 의미를 버린다.
동양 신비주의는 시간을 영원으로 변화시키고, 타락된 세계의 형태에서 타락되지 않는 '전체성'의 도피적 가면, 세게 안에 나타나는 존재의 전적인 부정을 찾는다. 여기에는 세계의 단순한 부정으로 보이는 것은 근본에 있어서는 태초의 전체성의 에피파니(현시 顯示), 걍신, 반복이다. 변증법적으로 '속(俗)'의 절대적 부정은 '거룩'의 전적 긍정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반대의 일치의 상징이 동양 신비주의의 중심에 있다. 반대의 일치는 속의 절대적 부정에 의해서 결과하는 폐기로서-그것들의 반대를 폐기함으로써 그 반대를 동일화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일치는 마침내 비변증법적 동일성을 의미한다.
만일 종교가 본래의 거룩에로 돌아가는 뒤를 향한 운동으로 이해된다면, 기독교의 특이성은 어떤 한가? 기독교의 말씀은 원시적 형태나 영원한 형태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육이 된 말씀. 즉 인간의 육체와 하나가 되는 한에서만 참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교의 말씀을 보존하려고 하면 성육신을 최후적이고 유일회적인 과거의 사건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반대로 성육신은 동적이고 앞으로 움직이는 과정으로서 지금도 만물을 새롭게 하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처럼 그리스도교의 특이성은 '성육신'에 있다. 즉 계시가 인간의 형태를 갖는 데 있다. 그러나 성육신의 운동, 즉 영이 육이 된다는 사상은 그리스도교에만 유일한 것이 아니다. 동양 종교에도 있다. 거기서도 영이 육이 된다. 그리고 그 육은 그것 자체의 본질적 형태를 잃지 않고 영은 육과의 반대 속에 있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는 성육신에서 영은 완전히 그리고 철저히 육이 되고 육으로서 존재한다. 육이 된 영, 영이 완전히 육이 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완전히 인간이 된 것이다.
니케아 신조의 '참 인간이며 참 하나님'이라는 인카네이션(성육신) 고백도 알타이저에 의하면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형태의 잘못된 표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카네이션 속에 영의 요소. 하나님의 아들, 초월이 남아 있다고 한다면 아직 그리스도교적 인카네이션이라 볼 수 없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학이 역사를 통해서 실패한 것은 초월적이고 무감각한 절대적 하나님을 고집했기 때문이고, 영원한 움직이지 않는 존재로서의 희랍적 형이상학적 하나님 개념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이고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말씀 속에서 성육되었다. 완전히 육신이 됨으로써 그의 본래의 하나님의 형태로 존재하고 현재하는 것을 완전히 중지했다. 예수 안에는 신성이나, 부활, 승천은 없다.
예수에게는 하나님은 '사실로' 죽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그의 초월적 영광과 그의 본래의 거룩을 잃었다. 그리고 완전히 육신이 되었다. 십자가, 그 위에서 하나님 자신이 죽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의하여 무(無)가 되는 것은 피조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세계, 즉 타락한 인간에게 나타나고 실재하는 우리 자체의 세계이다. 비록 우리의 세계가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유일한 세계, 우리가 인간으로서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실재라는 것을 인정한다고해도, 신앙 안에서 우리는 바로 이제 그것이 다만 옛 세계로 나타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서 나타나는 한에서만 우리의 세계는 종말이 된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의 나라가 저 '위'나 혹은 '저 아래' 있다고 주장하는 한 하나님 나라는 아직 우리 안에 나타나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는 이 실재 속에서만 나타난다. 하나님은 여기에서만 나타나고 저쪽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삶을 살아야 하며, 이 삶의 모든 충만과 공허, 기쁨과 두려움을 같이 나누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지금 산다고 하면 우리는 인간의 필요와 고통의 저항을 피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여기에서 살아야 한다면 신앙의 비약을 핑계삼아 이 조건에서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신앙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니르바나)의 현재화를 말한다. 인간의 모든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의 명령을 듣고 이웃에서 사랑을 줄 수 있는 그런 세계를 말한다.
6. 해밀턴이 말하는 세속화의 의미
"우리 솔직하게 말하자. 하나님이 무력한 것이 맞잖아!"라고 그는 외친다. 하나님은 이 세상으로부터 사라졌다. 그러나 해밀턴은 도리어 이것을 믿는 것이 참된 신앙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만 죄인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회의와 의심을 갖는 사람도 신앙을 통해서 의롭게 해주신다.
회의(懷疑)와 의심을 신앙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면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정열적인 회의는 정열적인 신앙과의 유사성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양자는 모두 진리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없다' 또는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없다'는 것이 실제로 '당신의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와 같은 의미를 갖게 되는 필요한 과정이다. 하나님에 대한 회의도 하나님에게부터 주어진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 쪽으로 끊을 수 없는 현상이다. 모든 진지의 의심과 회의는 진리 자체에 대한 신앙심이다.
해밀턴은, 하나님의 죽음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지시함으로써만 이 상황을 넘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전통적인 전능하신 하나님이 되면 안되고 무력한 하나님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약한 하나님, 고난 받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오늘날 요구되는 하나님은 추상적 초월이나 신성이 아니라 도리어 이런 하나님에 항거하는 고난받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주 예수 안에서 비로소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물어 보아야 한다.
그것은 능력과 권세와 지배의 모든 요구를 거부하고 스스로 세상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의 희생물이 되는 것을 허락하는 하나님상이다.
예수님의 생애는 관용과 분노의 모범이다. 마음이 상하고, 거부를 당하고, 잃은 사람에게는 가방과 사랑이 있으며, 교만하고 안일한 사람에게는 그의 분노와 경멸이 주어진다. 즉 관용 이상을 바라는 모든 소원을 친히 부정하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내가 무엇을 할까?"를 생각하지 말라. "나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까?"를 생각해야 한다. 여기에 그 어떤 종교적 행동도 필요치 않고 오직 세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전부이다.
'신앙으로 의롭게 된다'는 의미는, 우리가 우리의 상태 그대로, 우리의 죄와 회의 속에 있는 우리 그대로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의 부름을 들을 때 자신을 잊어버리고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것, 새로운 존재, 정의, 사랑, 진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에게는 사죄나 예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는데 있어 그 어떤 형식이라도 필요치 않다고 한다. 삼위일체적 방식을 따르지 않아야하고 종말론적인 방식으로 주님을 따라야 하는데 그 이유는. 앞으로 올 세계에서 고난받는 주권은 그 자체로서 종말을 맞이하여 끝이 날 것이며, 우리는 그를 승리자로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낙관주의자'로 불리워진다. 그의 중심 사상은 '주 예수에의 복종'이다.
7. 하비 콕스의 세속화의 의미
그는 인류의 역사를 신화적 시대→존재론적 시대→기능적 사고의 시대로 바뀌었다고 했다. 이 기능성 사고의 시대에서는 뭐든지 실용적인 개념만 통용이 가능하다. 도시 문화 시대에서의 신-인 관계는 수직적 관계가 형성될 수 없고 나와 너의 평면적 관계이다.
실은 구약의 하나님도 그러했다. 구약의 계약에 의하면 야웨 신은 인간과 같이 나란히 하여 일할 수 있을 만큼 낮추어 내려왔다. 비록 인간이라는 상대자가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한 팀으로 일하기 위해서 신이 인간 곁에 내려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나사렛 예수에게서 미완성된 계약의 인간의 면을 취하려 하였고, 높이 올리우신 그(하나님)는 예수의 생애 안에서 그가 한 그룹 안에서 일하고, 그의 친구들의 발을 씻고, 다른 사람으로 그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는 입장에 자신을 두려고 했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 강하게 암시되었듯이, '인간은 아들과 상속인이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의 신은 그저 침묵과 숨은 격언 뒤로 후퇴될 수 없는 신이다. 즉 인간의 말이 지시할 수 없는 그런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말로 지시될 수 있는 신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 그 자체의 이름을 우리가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어떤 것은 우리의 역사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고백하고, 알 하실 장소를 지정해 주는 것이다.
신의 이름이란 특수한 사회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불러야 한다. 그 어떠한 이름이나 언어도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다. 이름은 변천되어 한다. 사회적 문화적 변천과 연관되어 있다. 같은 사람에게 있어도 그 이름을 어디에서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와 같이 신의 이름도 현재 인간들이 갖고 있고 기억이나 의미들을 통해서 불러야 이 시대에 함께 하는 신이라고 할 수 있다.
8. 반 뷰렌의 세속화 의미
반 뷰렌은 '신의 죽음'을 말하지 않고 '신'이란 말의 죽음을 말한다. 그는 신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전해주지 않기 때문에 그 말이 말하고자 하는 실재가 과연 의미가 있는가 의심한다. 그래서 '신'은 세상 밖으로 밀려나지도 않고 역사적 사건으로 죽지도 않는다. 우리는 신이란 용어를 쓰지 않고서 신학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신학에서 통용되는 말은 오늘날의 지성의 교환의 시장에서는 '현금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복음의 세속적 해석의 요구는 복음의 세속적 표현 언어 속에서 초월적 요소를 제거하고 복음을 순수한 경험적 영역에 속하는 언어로 고쳐 말하려는 의도가 있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복음의 세속화의 시도이다.
복음은 관념이 아니라 역사이기 때문에 본래부터 복음은 세속적 존재 형태를 갖고, 똑 복음은 세속적 언어 양식으로 선포되어왔다. 그러므로 복음의 언어는 세속적 언어이다. 따라서 칼 바르트의 신학은 그가 보기에 교회라는 배경 속으로 너무 제한되어 있고 문화적 배경에서 너무 멀어져 있다고 불평한다.
반 뷰렌은 오늘날의 문화적 상황이 신앙의 언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도록 요구하고 있다고 보았다. 초자연적인 것의 언어(종교적 언어)가 죽은 오늘날의 '성숙한 시대'에 있어 '신앙의 언어'는 현대인에게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신학자들의 언어 사용은 그만 특수한 용어들이 되고 말았다. 그것을 실존적 만남에 대한 자기 이해로 전환시킨다면 보다 타당한 표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종교적 진술이 옳으나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라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을 어떻게 알려질 수 있느냐의 문제로 변한다. 예를 들면, 만일 하나님이 없었다면 세계 또는 우주의 과정은 어떻게 달라졌을 것인가에 대해서 대답이 주어질 수 없는 한, 혹은 만일 양자가 달랐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으니라 는 사실이 인정되지 않는 한, 종교적 또는 신학적 명제들은 경험적일 수가 없다.
즉 엘리야의 경험적인 텍스트가 허락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때는 엘리야의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경험적으로 행동했다는 주장도 허락될 수 없는 법이다. 이것은 그 어떤 진술이든 나름대로 사용 용도가 따로 있게 마련이다는 것이다. 즉 특수한 방식으로 사용하기 위한 주장자의 의도가 담겨 있는 채 텍스트가 주어지게 되어 있다.
이처럼 모든 언어 사용은 사용자의 태도를 반영한다. 이것은 신앙에 있어 신앙적 언어의 인식론적 접근을 거부한다. 그저 신학적 이유에서 그 때 그 때마다 선택할 뿐이다. 하나님에 관해서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정도까지 타당한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은혜로만 다가오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더욱 은혜 되기 위해서라도 신앙언어에 대한 인식론적 접근은 불가하다. 하나님- 진술이 인간-진술들로 바뀔 수는 없다.
9. 죌레의 세속화 의미
죌레는 대리는 말의 언어적 연구에 있어서 '대리'와 '대체'를 구별함으로써 시작된다.
대리는 점장적으로 어떤 사람의 책임이다. 대리의 결정은 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대리가 내 자리에 끼여드는 것은 항상 임시적인 데 지나지 않고 그 자리를 영구히 소유할 수 없다.
대리자는 절대적으로 다른 사람의 자리를 대체하지 못한다. 그는 한 역할을 한다. 그는 그것을 잘할 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한 역할이다. 그는 다름 사람의 이름로, 또 그 이름을 위해서 나타난다. 비록 그가 대리적으로 담당하고 있는 그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진짜 대리자는 결코 그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
그러나 대체는 영구성을 요구한다. 단순히 임시적 신분이 아니다. 대체는 완전히, 무조건적으로 타자를 대신한다. 그는 그 자신의 이름으로 행동하고 결코 그가 대신하는 그 사람의 이름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대체를 당한 자는 죽은 사람이다. 대리는 죽은 사람에 관하는 것이 아니고 산 사람에 관한다. 어떤 사람이 당분간 병이 났다든지 일을 할 수 없게 된 경우에 대신한다. 대리는 이 산 사람의 기억을 생생하게 가진다. 비록 죽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아직 그를 기억하고 있는 한 대신할 수 있다. 대리의 특징이 시간적이라면 대체는 무시간적이며 시간에 무관심하다.
그러나 죌레에 의하면 오늘날에 와서 대리와 대체의 사용에 있어서 구별이 없어졌다. 그것은 '비인간화된 세계'를 말해준다. 여기서는 사물들과 인격들은 서로 바꿀 수 있다. 시간의 차원의 상실은 이 비인격화의 한 표지이다.
여기서 나의 정체성 문제가 일어난다. 나는 과연 대체될 수 있는가? 인간은 대체될 수 없다. 인간이 사는 한 그는 대체될 수 없다. 대체는 죽은 비인격적, 또는 비인간화된 존재의 궁극저 교환이고, 대리는 인간을 위한, 인간의 임시적인 간섭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대리가 있을 뿐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죌레는 신의 죽음 이후 시대의 '대리자 그리스도상'을 신약성경의 개념이나 전통적 속죄론의 형태에서 찾지 않고 그가 예비적 해명에서 요구한 '대리의 인간학적 구조'에서 찾는다. 대리의 구성 요소는 그녀의 분석에 의하면 잠정성, 동일성, 의존성이다.
죌레는 이제 이 세 요소 들이 그리스도론 위에서 어떤 빛을 던져주는가를 보려고 한다. 신약성경의 대리의 개념의 특징으로서 죌레는 바울의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고난의 개념을 든다.
죌레의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속죄론'에 대해서 사정없이 비판을 가하는데, 초대 교회의 속량설(ransom theory)은 마법적 종교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의 대리는 완전히 마법적 '교체'가 되고, 안셀름의 보상설은 율법적이며 객관적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신적 존재의 관심 때문에 인간들의 인역적 존재가 격하됐다. 칼 바르트의 화해론도 일방적으로 객관화되었다. 즉 바르트는, '우리를 위해서', '우리 없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고, 사람들의 '하는 것'이나 사람들의 동의나 의사와 관계없이 유효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리자 그리스도와 인간의 관계는 인격적 관계가 아니다. 죌레는 바르트가 강도 바라바까지도 그리스도의 대리의 한 예로서 인용하는 것을 불평한다. 이런 의미에서 죌레는 바르트의 화해론을 '계시 실증주의'라고 부른다. 계시 실증주의란 개인을 바꿀 수 있는 한 기계의 한 부분과 같이 보는 일반적 실증주의의 확증을 의미한다.
본회퍼의 경우에는 바르트와는 반대로 '책임성'의 일방적인 강조 때문에 '의존의 요소'가 희생되었다고 한다. 결국 죌레에 의하면 전통적인 속죄론은 인간의 자율을 침해, 말살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벌을 가하는 그 사람이 그가 과하는 그 벌을 받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고 죌레는 보고 있다. 따라서 대리적으로 행동하는 스승의 동일화는 스승과 생도 사이의 구별을 폐지한다. 이와같이 그리스도는 우리를 잠정적으로 대리함으로써 자신이 당하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벌한다.
그녀의 주장에 의하면, 다리는 자동적으로 유효한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다만 조건적으로 우리를 위해서 행동한다. 다른 모든 대리자와 같이 그리스도는 우리의 '예'와 '아니', 즉 우리의 동의에 의존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순히 '대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우리의 동의에 의존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우리들 때문에 고난을 당함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스토아 철학에 있어 인내란 타자들을 위한 고난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있어 고난과 인내란 남김 없이 자신을 내어 준 대리자의 의존만이 있다.
부활의 상징에 있어서도 이 십자가는 잊어버려 질 수 없다. 그는 자신을 우리의 손에 맡긴다. 그것은 그가 하려는 하는 일의 성공과 실패가 우리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손에 맡김으로써 바로 그것으로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넘겨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의존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 있는데 그것은 스스로를 인간에게 의존하게 하는 바로 그것이다. 죌레에 의하면 오늘날 성도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같은 인간에게 내어 주는 떼에만 하나님께 내어주는 것이 된다. 이로서 그리스도의 대리는 양면을 포함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대리'와 '사람들 사이에서의 하나님의 대리'이다. 죌레에 의하면 그동안 , 그리스도의 하나님 대리는 항상 다만 하나님 편에서 시작하는 입장에서만 신학적 취급의 제목이 되어 왔고, 그럼으로써 그리스도론에서 한 차원을 잃었다고 본다.
즉 대리론은 배타적으로 우리를 대신하는 그리스도의 행동과 고난에 한정되고 하나님을 대신한 그의 대리적 행동과 고난은 무시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그녀에게 있어 '하나님은 죽었다'라는 말은 '하나님은 대리되어야 한다'는 요구로 바뀌어진다.
10. 브라운의 세속화 의미
브라운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존하는 자로서는 한 종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동기되어 있는 것의 근원'으로서 이해되어야 하고, '나의 이웃으로부터 오는 안전과 의무에 의해서 동기가 되는 근원으로서 이해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하나님은 착한 양심, 확신, 신뢰를 가지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의 현상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권위적 선포란 없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 자체로서 타당하고 확신을 주는 것에 수반하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그의 이웃 속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무신론자는 인간을 잘못 판단한다. 즉 무신론자는 이 의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는 휴머니즘으로 해소된다.
브라운은 우리의 이해의 전제로서의 '유신론'과 신약성경의 저자들의 전제였던 '유신론' 사이를 구별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은 해석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을 유신론을 확인하기 위해서 신약성경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라는 말 대신에, 그동안 자신이 유지되어 왔던 행동을 낳은 모든 초월적 근원에서 나오는 경험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기독론적 용어들은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가?"에 관한 방식이라고 보고 있다.
산약 성경에 나오는 신학의 문제에 나오는 하나님은 '거룩하게 주어진'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할 수 있다"와 "나는 해야만 한다"는 병치(竝置) 체계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더 이상 객관화 되거나 대상화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누구든지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곧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하나님이란, '아웃 사람과의 일정한 관계의 한 형태'이다. 그는 예수님의 안식일에 대한 언급을 예로 들면서, "인간은 안식일을 위하여, 즉 하나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인간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제부터는 인간이 종교의식을 통하여, 즉 안식일 지켜서 섬기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것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요, 곤궁한 가운데 있는 인간을 섬기는 것이다"고 해명했다.
평가
사람이란 뭔가 손에 잡히고, 눈에 띄고, 변화의 조짐 안에서 하나님의 활동을 보고 싶어한다. 세상이 달라지고 교회가 달라지고 자신이 달라짐으로 하나님의 분주한 활동에 접촉하려 한다.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의 특징이 이러하다.
진정 성령을 받은 자라면 외부를 향해 마음껏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난 하나님의 언약 완성을 전파하게 된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해야 했던 그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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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성과 우발성에 대해서 !!
구득영 2004-06-11 13:31:01, 조회 : 196, 추천 : 10
우연성과 우발성에 대해서
우연성이란, '상식적으로는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에 대한 인과관계가 분명하지 못한 사건에 대하여 쓰는 개념입니다. 아마 진화론을 설명할 때 이런 용어들이 등장하는 줄 압니다. 하지만 사전적 의미는 거의 비슷하지만, 이곳에서 말하는 우발성은 어떤 사건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어떤 사건자체를 부정할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우발성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상상도 못할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항상 이런 우발성의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지, 한국교회처럼 필연성을 소유하고 있으면 교회가 우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필연성을 소유한 교회에서 아무리 개혁을 부르짖어도, 그것은 마치 해적선을 타고 있으면서 그 안의 불합리한 룰들을 없애는 것이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아래는 손성식 목사님의 글 두 개와 다른 글 한편입니다. 비교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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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교의학』1/1 저자: 칼 바르트 옮긴이: 박 순경
§6 하나님 말씀의 인식 가능성
안녕하세요. 참 오랜만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려는 주제의 핵심은 죄 아래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제가 그냥 [인간]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죄 아래 있는 인간]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 주셔야 합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썼을까요? 왜냐하면 인간을 독립된 존재로 볼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인간이 독자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거나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다르게 말한다면 인간이 마귀아래 소속되어 있어서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죄 아래 있는 인간]이라는 표현과 [마귀아래 있는 인간]이라는 표현은 같은 맥락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과 관련시켜서 말한다면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인간 상태]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금 더 쉽게 표현하자면 [시체로서의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제가 너무 복잡하게 이야기 한 것 같지요. 그렇더라도 한 문장속에 이렇게 다양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하여튼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죄 아래 있는 인간이 알아먹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인간은 시체라는 것이죠. 아시겠지요! 이것을 바르트 목사는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폐쇄된 죄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던지는 질문을 무엇이지요.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먹는 것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하는 것이겠지요. 고린도전서 2장 12절입니다.
"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무엇으로 가능하지요?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을 받는 무슨 비법이 따로 있을까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르트 목사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자유한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이며 하나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움직임에 대해서 죄인이 하나님에 대들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시체이기 때문이지요. 살리시는 것은 주님마음 대로입니다. 죽은 자는 입을 떼지 못합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 말씀의 심층부로 들어가면 복잡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무엇일까요? [언약사건]입니다. 여기서 [언약사건]이란 [십자가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을 언약사건으로 지칭한 이유는 구약성경을 통해서 일관되게 진행되어 온 언약적 싸움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밝혀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언약적 싸움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배후세력인 마귀적 사고방식을 죄로 공격하시는 하나님 이름의 싸움입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사항은 죄인은 그냥 시체가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창조해 내는 본능을 가지고 있더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만의 이름으로 죄인이 창조해내고 만들어내는 모든 이름의 신학을 우상으로 규정하여 공박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언약]을 보면 단지 하나님의 약속-성취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배후세력과 치열하게 투쟁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식가능성에 대해서 제대로 밝히려면 [여호와 전쟁]의 진면목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 논의에서는 잠시 접어두도록 합시다.
자, 그러면 여기서 앞에 제기된 문제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먹는 것이 무엇으로 가능한가?라는 물음의 대답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으로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려운 점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을 받는데 대한 무슨 비법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요. 단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사대로 행하실 뿐입니다. 내 의사나 계획이나 사전모의없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을 [은혜의 우발성]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성령이 누구에게는 오고 누구에게는 오지 않느냐 말이죠. 그것은 주님의 권한이기 때문에 죄인의 범주를 떠나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오늘날 이런 [은혜의 우발성]을 정형화된 틀속에 가두려는 부류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니겠지요. 참 그리고 [은혜의 우발성]은 한 개인에게서 사건화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언약사건으로서 십자가 사건의 재현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언약이라는 구조 안에서 죄와 의를 동시에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논의에서는 [언약사건]의 내용과 [은혜의 우발성]이 혼잡하게 엮어졌고 [하나님이름의 전쟁]이라는 특이한 신학적 논제까지 제시되었는데, 보충설명은 다음번 강의를 통해서 박영선 목사의 [계시의 인격성]문제와 연관시켜서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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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을 보며
인간의 죄된 본성중에 하나가 끊임없이 조직을 세우고자 하는 점이다. 그러면 왜 조직을 만들려고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조직에는 [힘]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전모의해서 행하고자 하는 모든 일들은 바로 [힘]에 의해서 달성된다. [힘]의 장점은 추진력이 있다는 점이지만 단점은 바로 이 [힘] 때문에 소외당하고 아픔을 겪는 현상들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결국 [힘]은 [힘]자체의 유지를 위해 소외당하고 아픔을 일으키는 현실을 지속시킨다. 이러한 현상은 조직이 만들어지는 장에는 어디서나 필연적으로 발생된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문제를 제기해본다. 왜 [힘]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소외된 현실을 경험당하며 탈주에 성공한 분들이 도로 [힘]을 만들기 위해서 회귀하려는 것일까? 봉사를 하기 위해서 란다. 이것은 참 아이러니 한 명분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해 왔던 봉사를 [힘]안에서 할 봉사와 질적인 차이를 가지고 구별하려는 움직임 때문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봉사 말고 왜 굳이 낯선 봉사를 하려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다. 바라기는 일상적이고 우발적인 봉사 안에서 [힘]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소외당한 자들과 함께 하기를 소원한다. 필자의 주장을 명확히 전달하기 위해서 몇가지 신학적 명제를 마지막으로 제시해본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성은 우발성이다. 여기서 우발성이라 함은 인간의 사전모의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돌발적인 개입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둘째. 성도란 탈영토화를 지향하는 종말론적 운명공동체이다. 여기서 탈영토화란 영토화(조직, 관료화)하려는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자기부정의 몸짓을 나타낸다. 그리고 종말론적 운명공동체란 기존조직의 세력권으로부터 단절된 경험속에서 묵시적 생명의 띠로 묶여진 공동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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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주의 우발성
이언 바버(lan G.Barbour) 저/ 이철우 역/ 김영사/2002.3.5.
현대우주론에서의 우주는 다음과 같은 네 종류의 우발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1. 우발적인 존재 도대체 왜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신학자들은 이 질문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 질문은 이미 언급했던 무로부터의 창조가 지니는 종교적 의미와 일치한다. 우주가 시간적으로 무한하느냐, 유일하느냐에 관계없이 우주 전체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현재로서는 빅뱅이 모든 것의 시작이 되는 단 한번의 사건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과학자들이 윤회적인 우주 또는 무한한 시간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찾아낸다고 해도 우주가 존재한다는 우발성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과학적 우주론들의 세부 내용은 이 세계의 우발성과는 상관없다. 어떤 이론이 우주가 단 하나만 존재함을 입증할 수 있더라도 그 우주는 여전히 가능성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 과학 이론의 어떤 부분도 하나의 우주가 실제로 존재한다거나 그 이론이 실증될 수 있음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스티븐 호킹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가능한 단 하나의 통일이론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몇 개의 규칙과 방정식의 집합에 불과하다. 그 방정식에 숨결을 불어넣어 그 방정식과 규칙들이 설명하는 우주를 만들어 내는 것은 무엇인가? 수학적 모델을 세우는 과학의 일반적 접근 방법으로는 그 모델이 설명하려는 '왜 우주가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
2. 우발적인 경계 조건들 지나간 시간이 유한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것은 과학이 다룰 수 없는 하나의 특이점이 과거에 실재했음을 뜻한다. 그러한 시작은 비록 교부들의 주요한 관심사는 아니었으나, 교부들에 의해 전통적인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 안에서 가정된 것이다. 아퀴나스가 말했듯이 그러한 시작은 하느님에 대한 의존성을 인상적으로 보여 주는 예이다. 한편 시간이 무한한 것임이 판명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우발적인 경계 조건을 지니게 된다. 우리가 아무리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 본다고 해도 설명되지 않는 주어진 조건을 다루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호킹은 무한대의 시간이나 시간의 시작, 그 어느 것도 가정하지 않는 양자 중력에 대한 이론을 내세웠다. 그 대신 시간은 역설적이지만 유한하면서도 경계지어지지 않는다. 초기 우주에 대한 그의 방정식들은 가상의 시간(허수 시간)을 필요로 하는데, 이 허수 시간은 세 개의 공간 차원과 구별되지 않는다. 마치 지구의 2차원 표면이 유한하지만 가장자리가 없는 것처럼, 3차원의 상대론적 공간은 유한하지만 경계지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호킹의 공간적이고 가상적인 시간 차원들은 모두 유한하지만 경계지어지지 않는다. 그런 가상적인 허수 시간의 틀 안에서 실제 시간이 점차적으로 출현한다.
호킹은 허수 시간 속에서 사건들을 해석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음을 인정했고, 일부 학자들은 출현이란 실수 시간에서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시간이 출현한다고 말하는 것은 일관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시간이란 초기 단계에서는 명확하지 않았고 시작이라고 불릴 만한 뚜렷한 경계가 정해질 수 없다 하더라도 호킹의 이론은 시간과 공간이 생성되도록 주어진 구조, 즉 물리적 관계의 구조를 자명한 것으로 가정한다.
3. 우발적인 법칙들 우주론의 법칙들 가운데 여러 가지가 임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가운데 몇몇은 좀 더 근본적인 이론들의 필연적인 함축으로 밝혀지기도 한다. 그러나 통일이론이 발견된다면 그 자체가 우발적인 것이며 위에 언급된 종속 관계가 한 단계 더 생기게 된다. 더욱이 생명의 출현이라는 더욱 높은 수준에 적용될 수 있는 법칙들은 물리학의 법칙들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과 의식이 물리 법칙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둘을 물리학의 법칙들로 설명될 수 없음을 나중에 설명하겠다.
물리학에서의 통일이론을 만유이론이라고 부르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왜냐하면 통일이론은 이 현상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다양성과 개별성, 그리고 하위 수준의 조직화로부터 더 더욱 복잡한 상위 수준의 복잡화가 출현되는 점 등을 모두 무시한 고도의 추상 과정을 통해서만 수립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통일이론이 우리에게 아메바에 대해 훨씬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줄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기대할 수 없다. 그런 통일이론이 셰익스피어, 베토벤 또는 뉴턴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줄 것이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4. 우발적인 사건들 다음 장에서 나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은 이 현상 세계의 확정 불능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단순히 인간 지식의 한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겠다. 어떤 의미에서 우주는 유일하고 비가역적인 사건들이 발생한 순서이며, 그 사건들 속에서 완전한 새로움이 등장했다. 그런 우주에 대한 설명은 일반적인 법칙들로만 구성되기보다는 역사적인 모습을 갖추어야만 한다. 진화 역사에 영향을 주었던 돌연변이, 유전자 재조합, 그리고 환경 조건들 가운데에서조차 우리는 유사한 우발성을 생각하게 된다.
오늘날 많은 과학자가 순전히 과학적인 문제들만 다루려고 노력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학자들은 유물론적인 철학을 따를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주론을 좀 더 폭넓게 검토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던 한계 질문들을 다루는 중요한 방법으로 볼 수 있다. 천문학자들은 흔히 개인적인 입장에서 빅뱅을 통해 풀려 나온 힘에 대해 신비감과 외경심을 느낀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경험과 표현 능력 그리고 사고의 극한에서나 상상할 수 있는 현상의 발생에 대해 그렇게 느낀다는 뜻이다. 우주론은 시간과 공간, 법칙과 우연, 필연성과 우발성에 대해 가정하는 전제 조건들을 고찰하도록 한다. 무엇보다 우주의 이해 가능성은 과학 안에서 제기되었지만 과학 자체로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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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우연성과 우발성에 대해서 !!
이근호 2004-06-11 14:40:40, 조회 : 248, 추천 : 28
간단하게 말해서
'우연'이 과학적 개념이라면, '우발성'은 존재론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연이 인과론적 메커니즘을 찾아내지 못할 때 성립하는 개념이라면,
우발성은 형이상학적 이유를 찾아내지 못할 때 성립하는 개념입니다.
이 세상은 숱은 원인-결과의 계열로 나름대로 따로 따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번개가 치는 것도 먹구름이 모인 원인에 의해서 생긴 겁니다.
그리고 그 밑은 어떤 사나이가 식당에 들어가는 것도 배가 고픈 원인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침 이 두 개의 '원인-결과' 계열이 서로 만나서 그 배고픈 사나이가 그 자리에서 번개에 맞았다면,
이것을 '우연한' 결과라고 하는 겁니다.
반면에
왜 그런 '원인-결과'의 계열들이 꼭 생겨나야 하는가 하는 점을 따질 때는 우발성이 아니면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즉
"이 우주는 왜 꼭 이런 식이어야 하는가?"하는 점은 '우발적'이라는 표현말고는 없습니다.
성령의 거듭남을
'우연'과 '우발성'으로 구분해서 설명드리자면,
어떤 인간이 거듭나기 위해서 기도원을 1000번을 찾아갔는데, 확률적으로 우연히 그 중에 한 번에 성령과 맞아떨어져 구원되었다고 한다면 이것은 우연, 그 자체의 가치를 간직하려고 할 것입니다. (물론 이단 신학입니다! 새로운 '원인-결과'의 계열을 만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이것을 '논리화된 신학으로 굳히게 될 공산이 큽니다.)
그런데 그냥 평소에 모든 일에 자기 가치와 의(義)만 추구하면서 열심이 살아갔을 뿐인데 어떻게 예수님을 알게 되었을 때, 이것은 우발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차후라도 그 어떤 '원인-결과'의 계열에도 연결시킬 방도가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