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법파괴에 대해서 좀 가르쳐줘요] 2004-02-09
어법파괴에 대해서 좀 가르쳐줘요!! 구득영 2004-02-09 19:45:31, 조회 : 133, 추천 : 11
전 국어국문학과와는 별 인연이 없어서 그런지 '믿음은 예수이다' 라는 것이 왜 어법파괴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아, 옛날에 아는 국문학과 여학생이 한명 있었습니다. 조금 보고 싶네요. 물론 과거의 추억으로만 남아야겠지요. 인터넷 검색사이트에 '어법'에 대해서 검색하니, 순 고기잡는 것만 이야기하네요. '19세 미만 금지' 라고 하는 사이트도 하나 뜨고 말입니다.
그런데 믿음(명사)과 예수(명사)이니, 서로 '=' 하면 어법상으로 문제가 없는 것 아닙니까? 동사와 명사를 동일시한 것도 아닌데도 말입니다. 명사끼리는 서로 가능한 것 아닙니까? 차라리 인식의 틀을 파괴한다고 하면 몰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제 생각으로는 성경해석상의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저는 성경에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부분이 요한복음 1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이거 영어로 된 것을 자동한글번역기에 넣으면 전혀 번역을 못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re] 어법파괴에 대해서 좀 가르쳐줘요!! 정영균 2004-02-09 20:33:14, 조회 : 129, 추천 : 12
'믿음은 예수님이다'라고 말할 때 얼핏 듣기에는 인간의 믿음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강조하고 부각하는 것 같아서 아주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말로 들려지는데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 받는다'라는 말과 비교해 생각해 보면 헷갈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이라고 할 때 즉 예수님이 믿음자체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나요?
==========================================================================[re] 어법파괴에 대해서 좀 가르쳐줘요!! 이근호 2004-02-09 21:17:47, 조회 : 148, 추천 : 11
>그것이 바로 히브리서 11장에서 말씀하시는 사고방식의 대변혁입니다.
'예수의 믿음'이라는 뜻도 아니요,
우리 믿음으로 예수를 믿는 것도 ,'믿음의 실상'이 아니라
믿음 자체가 실상이라는 겁니다.
즉 믿음 자체가 세력화되어 온 우주를 지배해 오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 히브리서 11장의 선진들에 의해서 증거되어 왔는데
그 믿음의 실상은 곧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믿음'이라는 말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으로 예수님의 실상됨을 설명한 것이 히브리서 11장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왜 현실을 '믿음'으로 설명해야 하느냐 하면 (인간들의 믿음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로서 설명)이 세상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허상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믿음'으로 실상의 세상을 접근하려고 하는데 바로 이것이 잘못이라는 겁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자신의 믿음으로 허상의 세계를 뚫고 간 것이 아니라
실상 그 자체인 믿음에 의해서 증거물들을 노출시키면서 인도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 실상이 곧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예수님이 곧 믿음이다'라는 말이 아니라
허상의 세상에서의 작업상 '믿음이 곧 그 실상으로서 예수님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인간의 믿음조차 허상의 세계에서는 무용지물이기 때문입니다.
==========================================================================[re] 어법파괴에 대해서 좀 가르쳐줘요!! 정영균 2004-02-09 22:01:14, 조회 : 116, 추천 : 11
그렇다면 어법파괴가 아니라 사고방식의 파괴인데 왜 '믿음은 예수님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는지.'믿음은 예수님이다'라는 표현은 '믿음=예수님'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거든요. 또 지금까지 논쟁이 이것 때문이었구요. 믿음이 실상이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드러낸다는 말씀으로 설명을 하셨으면 어법 파괴니 뭐니하는 논쟁도 없었을 것 같은데. 그런데 구목사님도 이목사님의 설명과 같은 의미로 '믿음은 예수님이다'라는 말을 이해하셨는지...
==========================================================================[re] 어법파괴에 대해서 좀 가르쳐줘요!! 이근호 2004-02-09 22:33:25, 조회 : 116, 추천 : 11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은 예수님이다'고 설명한 것이 아니라 '믿음은 실상이다'이다고 설명하고서,
히브리서 12장에서는 '그 실상은 곧 예수님'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이 허상의 세계에서 인간들이 지식나 정보를 획득하는 것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아무나 예수 믿는다고 구원될 수 없는 것은,
예수, 혹은 메시야라는 인식 자체가 인간이 나름대로 엉터리로 늘상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성도에게만,
믿음 자체가 작용해서, 그 사람에게는 허상의 세계 안에서 '실상'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방식으로 인도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겁니다.
==========================================================================[re] 어법파괴에 대해서 좀 가르쳐줘요!! 정영균 2004-02-09 23:12:15, 조회 : 114, 추천 : 11
목사님!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은 예수님이다'고 설명한 것이 아니라 '믿음은 실상이다'이다고 설명하고서, 히브리서 12장에서는 '그 실상은 곧 예수님'이라고 한 것입니다.'라고 하셨는데 12장의 어느 부분이 그러한지요. 12장을 아무리 봐도 그런 의미를 찾지 못하겠는데요. 그리고 11장에서 '믿음은 실상이다'라고 말씀한 것이 아니라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실상이 예수님이 되려면 '바라는 것들'이라는 단어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바라는 것들'이란 복수이지 않습니까? 이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요?
==========================================================================[re] 어법파괴에 대해서 좀 가르쳐줘요!! 이근호 2004-02-10 07:51:56, 조회 : 109, 추천 : 11
여러 사람의 '바라는 것들'의 증거물은 모두 예수님을 겨냥하는 겁니다.
##############################################################################################어법이 문제라면...... 강성희 2004-02-09 21:58:21, 조회 : 129, 추천 : 12
성경의 말씀은 문제투성이요 그들에게는 엉터리겠지요.뱀이 사단이라고 했으므로 밭메다가 뱀을보면 처참하게 돌로쳐죽이며 사단을 죽였다고 합니다.(실화)
예수가 "자기가 성전이다"라는 말은 어떻게 할것이며"세상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은 웬말이며 예수가 양이란 말인가!"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말은 뱀파이어에게 하는 말일것이며
도데체 "믿음=예수" 가 어법파괴라면성경전체가 어법파괴요 문법적으로 맞는냐는 말이다.믿음이 예수가 안믿어진다면 믿지않으면 그만이다.그렇지만 어법에 맞지않기 때문에 못믿겠다면그믿음은 위에서온 믿음이 아니요아래서온 믿음임을 스스로 증거하는것이라 믿는다.
그런자들에게는 오히려 이말씀이 더 난해하지 않을까?"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믿지않고 있는 자체로 이미 심판이 됐다고하는이말씀이 예수믿지 않으면 죽어서 심판받아서지옥에 갈것이라 생각하는 종교인들에게 더 난해한 말씀이 아닐까요?
==========================================================================[re] 어법이 문제라면...... 정영균 2004-02-09 23:08:05, 조회 : 113, 추천 : 11
구목사님의 글에 질문한 것과 같은 질문을 하겠습니다. 트집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믿음=예수'라고 하면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요. 믿음=예수라는 등식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믿음이 없는자라고 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밑에 이목사님도 '믿음=예수'라는 말은 아니라고 하셨는데.
==========================================================================[re] 제가 부채도사가 한번 되어보겠습니다!! 구득영 2004-02-09 23:41:22, 조회 : 123, 추천 : 10
이근호 목사님의 답변을 보고 있노라면 동문서답식의 모습들이 종종 있습니다. 뭔가 질문자로 하여금 그 이상의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그리고 단어들도 물론 서로의 약속이기에 어느 정도의 룰은 지켜야 하지만, 때로는 파기하는 모습들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식의 틀을 깨는 것이지, 어법을 깨트리고자 하는 것은 아닌 줄 압니다. 사실 어법이 틀리면 마치 서로 다른 나라 말을 사용해서 대화가 안 되는 것처럼말이 안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서로 코드(?)가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평소 같으면 이 목사님이 '믿음은 예수님이다' 라고 했으면, 그냥 리플 두어번 하다가 그냥 지나갔을 것입니다.그런데 이번에는 그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이렇게 시끄럽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왜 이 목사님이 쉽게 해결하지 않았을까요?그것은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것을 계기로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이것은 이근호 목사나 이곳에 교제하는 분들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논쟁이 생각보다 훨씬 더욱더 격렬하게 진행된 것은, 상대방이 본의든 아니든 간에 '어법'을 꼬투리로 잡아 접근하시는 것을 보시고,이 목사님은 그것이 본인에게는 하나의 유혹이라고 보아서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평소에 술을 하지 않는 사람인데 술 문제를 가지고 누군가가 예수 믿는 것을 시비를 걸었다면, 그냥 원샷으로 마셔 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믿음을 하나의 동사로 생각해서 항상 그 믿는 주체를 자기라고 인식하는 자들에게, 이것이 인격화되면서 어떤 덮쳐오는 실체로 말해버리면 좀 어안이 벙벙하겠지요.물론 대화의 상대자가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이 목사님의 이런 해석의 형태는 자주 접합니다만, 그러나 히브리서 11장과 12장을 연관지어서 믿음으로 그렇게 해석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당연히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 같아서 찬성합니다.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아니라 말입니다.감사합니다.
==========================================================================[re] 제가 부채도사가 한번 되어보겠습니다!! 정영균 2004-02-10 06:53:44, 조회 : 119, 추천 : 10
저는 이 사이트에 있는 이 목사님의 모든 글과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예수님이다'라는 표현은 전혀 없었던 것 같은데요. 물론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를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만을 드러내겠다는 그 의도 또한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의 흐름과 내용에 맞지 않을 때는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목사님은 히 12장이 믿음의 실상은 예수님이라는 것을 증거한다고 하셔서 12장 어디에 그런 내용이 있는가 문의하기도 한 것입니다. 믿음이 동사가 아니라 인격화 되어서 인간에게 다가온다는 의미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제가 질문한 것은 믿음은 예수님이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이다'라는 말이 '믿음 자체가 예수님이다'라는 뜻입니까 아니면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뜻입니까?
==========================================================================[re] 제가 부채도사가 한번 되어보겠습니다!! 이근호 2004-02-10 08:03:13, 조회 : 124, 추천 : 10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이 그리스도임'을 증거하는 허다한 증인들이 히브리서 11장에 소개되어 있는 겁니다.
이 증인들이 나중에는, 자신들이 예수님에 의해서 인도받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 '보이지 않는 증거물'에 대해서 이들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믿음으로 인하여 이들은 갈바를 알지 못하는 세계로 인도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자신들의 각오나 결단력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감정입니다.
그들은 결코
보이지 않는 세계나 바라는 것을 바라게 되는 낯선 감정으로 인도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실상'으로 인도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물 노릇을 절대로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음'의 선입견을 떨쳐버리고,
성도란 '낯선 믿음에 의해서 예수님의 흔적을 지닌채 살게 됨'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re] 제가 부채도사가 한번 되어보겠습니다!! 정영균 2004-02-10 12:43:58, 조회 : 94, 추천 : 12
'성도란 '낯선 믿음에 의해서 예수님의 흔적을 지닌채 살게 됨'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예수님이다'라고 하시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그러한 말씀을 하시는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으신지 그게 헷갈린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양무리 2004-02-10 02:07:15, 조회 : 164, 추천 : 11
실상實狀의 헬라어는 휘포스타이스 입니다.
이 휘포스타이스를 신약에 적용된곳은 약 5구절에 쓰여 졌습니다.
아래는 이 실상의 단어가 사용된곳 입니다.
실상과 같은단어를 번역한곳은 굵은 글 입니다.
고린도후서 9 장 4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고린도후서 11 장 17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히브리서 1 장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3 장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히브리서 11 장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던것" "본체" "확실""실상"으로 각각 번역 되었습니다.
실상이라는것은 어떤 대상이 아니라 나타나는 증거들을 가르키는것 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의 믿음이 그들이 나타난 행위에 믿음이 보이지 아니하는 증거로
증명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생자 이삭을 드리는 행위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런 행하는 믿음 이야말로 죽지 아니한 믿음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야고보서 4:26에서 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편지로 믿음은 반드시 행함이 수반 되어야 한다는
글을 남긴것입니다.
이 실상 즉 휘포스타이스가 행함이라는것을 입증해주는 구절이 히브리서 3장12-14절 입니다.
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re]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이근호 2004-02-10 08:15:57, 조회 : 173, 추천 : 10
자기 '믿음 행위'의 증인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증인들입니다.
키텔 사전에 나오는 식으로 어휘를 분석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인간 행함으로 귀결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행위와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시켜 주는 어휘나 문법이 인간 세계에서는 전혀 존재하기 않기 때문에, 자기 행함에 기초한 거짓 메시야를 산출할 계기만 될 뿐입니다.
그리고
헬라 문법이나 어휘는,
지금 현대보다 훨씬 분화가 덜 된 식의 용어들입니다. (참고 서적 : [언어, 그 미지의 것] 줄리아 크리스테바.)
그래서 문맥에 따라 각양 달리 쓰여지게 마련입니다.
거기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신약 성경에 보면 헬라 문법에 위배되는 대목들이 대단히 많이 나옵니다.
그것은 어법 절대주의로 부터 복음이 얶매이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어휘를 가지고 아무리 다루어도 거기에는 전혀 복음이 나올 수 없고,
마치 일그려진 흐릿한 거울을 들여다 보는 것처럼
인간들은 기괴한 괴물성을 지닌 자기 본질만 초상되어 보일 뿐입니다.
==========================================================================[re] 십자가 마을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것은 그리스도만으로는 안된다고 주장 하십니까? 양무리 2004-02-10 10:11:59, 조회 : 172, 추천 : 14
몇몇분들이 십자가 마을사람들의 공통된 주장인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가르키는것이다." 라고 주장을 하는것에 대하여 반박을 통하여
믿음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는 행위를 통들어 말하는 것이다에 수긍을 하지 못하고
자꾸 언어적 유희로 자기변명만 늘어 놓고들 계시는것 같습니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아래 성경구절을 보시고 사람이 의롭게되는것이 믿음(예수 그리스도)만으로는 안된다고 계속 주장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만으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게 아니라면 또 어떤것들이 첨가 되어야만
사람이 의롭게되어 구원 받습니까?
십자가 마을에서는 야고보서를 성경으로 인정하지 안습니까?
두가지 답변 부탁 합니다.
야고보서 2 장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 이에 경에 이른바 이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참고 :십자가마을은 믿음=그리스도 이시다 라고 주장 하시니윗 성경구절의 믿음을 그리스도로 바꾸어 읽어시면 되겠습니다.
==========================================================================[re] 십자가 마을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것은 그리스도만으로는 안된다고 주장 하십니까? 이근호 2004-02-10 11:30:22, 조회 : 166, 추천 : 10
>야고보서의
행함과 믿음은
자체적으로 개념을 이미 확정지어놓았습니다.
야고보서의 행함이란 로마서에서 말하는 믿음을 뜻하며,
야고보서의 믿음이란, 히브리서 11장에서, '그리스도의 증거물로서 작용하는 믿음'에 부합되지 못한 믿음을 말합니다.
사도들이 환경에 따라 드러나는 가짜와 죄악에 대해서
적절하게 잘 지적해 주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야고보서도 마땅히 주님의 영(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일 수 밖에 없습니다.
==========================================================================[re] 십자가 마을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것은 그리스도만으로는 안된다고 주장 하십니까? 양무리 2004/02/10 14 173 [re] [re] 그렇다면..... 구득영 2004-02-10 11:14:17, 조회 : 138, 추천 : 11
믿음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함도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그런 이야기이지요.진작 그렇게 나오셔야죠.
##############################################################################################정영균님!! 구득영 2004-02-10 09:59:57, 조회 : 178, 추천 : 21
요한일서 4장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요일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아무런 문제가 없지요. 그러니 지금 이 논쟁은 어법의 문제고 아니고 성경해석상의 문제였으며, 그것은 단순히 해석이 아니라 믿음과 행함의 대립구조로 보았기에 이런 논쟁이 일어났습니다.같은 성경을 보면서 왜 한쪽은 믿음만을 이야기하고, 다른 한쪽은 행함을 이야기할까요? 물론 이 행함은 '믿음+행함' 입니다.그러나 이곳에서는'믿음+행함' 을 '행함'이라고 정의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에 행함을 더하는 의도가 바로 믿음을 믿음으로 보지 않기에 그렇습니다.본인들은 아무리 아니라고 부인해도 말입니다. 믿음의 세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지만, 행함의 세계에서는 자기 자신이 증거됩니다. 감사합니다.
==========================================================================[re] 정영균님!! 정영균 2004-02-10 12:29:43, 조회 : 156, 추천 : 10
참 어렵습니다. 목사님 말대로 코드가 맞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서로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에게 있는 의문은 풀어야 속이 시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질문을 계속하겠습니다. 먼저 이것부터 답해 주십시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입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다’라는 말이 ‘믿음=예수님’이라는 뜻입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곧 믿음 자체이며 믿음이 곧 예수님이냐는 뜻입니까? 다시 말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구절과 같은 표현으로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구절을 ‘믿음은 예수님이다’라는 말의 당위성으로 대입하셨는데 그러면 이 구절도 ‘하나님=사랑’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입니까? 제가 생각할 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면(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본질을 알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냥 이렇게 표현하도록 하겠습니다)을 표현하는 구절로 이해하는데요, 그래서 이 구절을 ‘믿음은 예수님이다’라는 말의 당위성으로 대입하기는 적절치 못하다고 여겨집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말함으로써 하나님께 속한 자가 누구인가를 증거하기 위한 말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4:9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은 하나님의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증거함으로써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내어 놓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속한 자를 알 수 있다는 내용같은데요. 그렇다면 이런 내용을 가지고 ‘믿음은 예수님이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는 없다고 여겨지는데요.그리고 믿음에 행함을 더한다는 얘기를 자꾸 하시는데요, 믿음에 행함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존재함으로 믿음에 의해서 행함이 자연히 보여지는 것이 아닐까요? 인간이 만들어 낸 행함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맺어지는 행함말입니다. 이러한 행함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목사님도 ‘사랑은, 모든 것을 주고 그 대상을 자기 것으로 삼는 행위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믿음에 사랑에는 분명 행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행함을 더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에 의해서 맺어지는 것이기에 이 행함은 나의 것이 아니며 따라서 행함으로 자랑할 수도 없고 의로 내세울 수도 없고 구원의 증거물도 되지 못하지요. 다만 내가 말하는 믿음이 참된 것인가 아닌가가 증거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re]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구득영 2004-02-10 12:54:30, 조회 : 139, 추천 : 10
저도 '="로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본질을 말할 때 얼마든지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고 봅니다. 비록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레드카드를 들어도 말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자연히 행함이 따라옵니다.그러면 그것은 더 이상 행함의 차원이 아니라 믿음의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음+행함' 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표현하면 둘 다 동일한 자격을 가지게 되니 말입니다. 결코 행함이 믿음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여기서 제가 공격하는 행함이란, 믿음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받기 위해 노력하는 일체의 행위를 말합니다.그러므로 전도를 해도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이 되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행함이 되는 것입니다.결코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그리고 야고보서의 믿음과 행함의 부분에 대해서도, 정말이지 궁금하다면 '그러면 로마서와는 달리 야고보서는 왜 이렇게 다르게(?) 말씀합니까?' 라고 해야 합니다.저희들은 하도 이런 분들을 많이 접해서 질문하는 태도를 보면 대부분 그 의도를 압니다. 참,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는 구절과 같이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그것은 성경이 어법(?)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re]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영균 2004-02-10 17:56:06, 조회 : 113, 추천 : 12
목사님도 진작 '='로 보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으면 좋았을 뻔 하였습니다. '='로 보느냐는 질문을 제가 이미 했지 않습니까? 상대방이 무엇 때문에 질문을 하고 무엇으로 인해서 혼란스러워하는지를 정확히 파악하셨으면 제 질문이 아니라 이미 다른 사람의 질문에 대해서 '='로 보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비록 믿음의 본질을 말할 때 그러한 표현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러한 표현으로 다른 사람에게 혼란을 줄 수 있음을 감지한다면 미리 '='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을 곁들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믿음은 자연히 행함이 따라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여러 논의를 살펴볼 때 권정희 씨나 다른 분들이 믿음에 행함을 더하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행함 자체(믿음의 차원으로서의 행함을 뜻함)를 아예 부정하는 것에 대한 공박이었다고 여겨집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인한 행함까지 부정하는 것 같은 인상을 심어줬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라고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제가 이해할 때는 그분들은 행함으로 믿음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는 의도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구목사님은 믿음의 차원이 아니라 구원받기 위해 노력하는 일체의 행함을 공격하였다고 말씀하셨는데 구목사님의 공격 대상이 되었던 권정씨라는 분의 글이 행함의 노력이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 것 같지는 않는데요? 이것은 권정희 씨라는 분에게 직접 질문해도 제가 그분의 글을 통해 파악한 바로는 믿음의 차원으로서의 행함이라는 말씀을 하실 것 같습니다. 이것은 권정희 씨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의 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곁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한가지 더 말씀드린다면 '저희들은 하도 이런 분들을 많이 접해서 질문하는 태도를 보면 대부분 그 의도를 압니다'라는 말씀은 조심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더군다나 미약한 글을 가지고 그 사람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어쩌면 '안다'라는 것이 목사님에게 큰 선입견으로 작용하여 목사님으로 하여금 크게 실수하게 할 수도 있음을 정중히 말씀을 드립니다. 행함이라는 말을 한다고 해서 무작정 적으로 몰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행함을 말하면서도 믿음의 차원에서의 행함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내 자랑이 될 수 없고 내 의가 될 수 없는 주님의 행함을 말하면서 주를 따라가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행함'이라는 말만 꺼내도 주님의 반역자로 몰리는 그런 인상을 많이 받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봉사'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상대방의 이해를 배려하는 노력까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사랑아니겠습니까?
==========================================================================[re] 그렇습니다!! 구득영 2004-02-10 19:06:51, 조회 : 131, 추천 : 11
충분히 공감합니다. 하지만 행함의 문제는 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이번에 '어법문제로' 큰 논쟁이 일어났지만, 그러나 결국은 이것이 믿음과 행함의 문제로, 즉 진리문제로 판가름나게 된 것입니다.그래서 두 마을이 마치 어부가 고기를 나누듯이 나뉘게 된 것이지요. 어슬프게 사람을 짐작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저는 어떤 개인을 지칭해서 '당신은 행함주의자이다' 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혹시 그렇게 보였다면 용서를 빕니다. 특정 사람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그런 사고방식을 공격한 것입니다.믿음을 아는 자라면 그런 분별력은 있어야 합니다. 저는 마귀가 우리 인간에게 던진 가장 치명적인 유혹이 바로 이 행함이라고 봅니다.인간이라면 그 누구라도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행함은 교묘하게 믿음이라는 겉포장을 하고 옵니다.그러면서 '봐라, 성경에도 믿음과 행함을 다 가능하지 않느냐?' 라고 합니다.그러니 믿음에다 인간의 행함도 조금은 첨가해야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에덴동산의 선악과 유혹과 같고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유혹과도 같은지 모르겠습니다.처음 아담은 넘어갔지만, 둘째 아담은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아무리 하루에 10시간씩 전도하고 해도 더 이상 행함을 말하지 않습니다.자기는 죽어라고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솔직히 행함을 강조하는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누가 더 열심히 행하는지 한번 내기를 해보자고 말입니다. 하루종일 예수님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을 누가 이길 수 있단 말입니까?예수의 증인으로 사는 것, 더 이상 완벽한 행함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감사합니다. ====================================================================================================================================================
[re] 정영균님!! 정영균 2004-02-10 12:29:43, 조회 : 157, 추천 : 10
[re] [re] 정영균님!! 이근호 2004-02-10 13:46:49, 조회 : 167, 추천 : 10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예수님' 식으로 이해하면 편합니다.
"예수님 ⇒믿음"는 안되지만
"믿음⇒예수님"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어째든간에 '믿음' 자체가 인간에게는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실상을 겨냥한 믿음으로 허상속에 세계를 따지겠다는 것이 히브리서 11장에서의 사도의 취지입니다.
이것을 로마서나 야고보서의 믿음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마세요.
나름대로 전달 취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re] 정영균님!! 정영균 2004-02-10 17:33:55, 조회 : 118, 추천 : 11
"믿음⇒예수님(가능) "예수님 ⇒믿음"(불가)진작 이런 등식을 곁들어 설명하였으면 좋았을 뻔하였습니다. 이런 설명이 결여되었기에 목사님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믿음'이라는 의미로 이해하여 어법 파괴니 하는 말로 질문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말씀드린 대로 저는 이 사이트에 있는 목사님의 글이나 강의, 그리고 여기에 없는 설교까지 몽땅 들어본 사람입니다. 그러한 저로서 목사님이 말씀하시고 사용하시는 단어와 문장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90%정도 이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저도 '믿음은 예수님이다'라는 말에 대해서는 사실 어떻게 이해를 할지 난감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문장을 사용하신 적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예수님'이라는 의미라면 '믿음은 예수님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쓸데없이 오해를 사는 것보다는 다른 표현으로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물론 '믿음은 예수님이다'라는 표현보다 더 좋은 표현을 알려달라고 한다면 초보적인 수준에 있는 저로서는 목사님 마음에 드는 표현을 만들기가 힘들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복음 전함이 사랑이라면 이런 부분까지 신경을 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감사합니다. '믿음은 예수님이다'라는 말에 대한 의문은 풀렸습니다.
##############################################################################################제가 정영균님과 이희진님의 의견에 동의 하지 않는 이유는.... 장병엽 2004-02-11 21:32:28, 조회 : 331, 추천 : 40
그들이 아직도 행함에 사로 잡혀 있다는것입니다.다시 말해서 행함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마치 믿음속의 행함을 이제 알았으니 행하라,너의 믿음말고 주시는분의 그 믿음으로 하라는 거수기 역활을 한다는것입니다.
하소미님의 신앙적 고백이 아시는 목사님의 청으로 이곳에 들어 오지 못할정도의 논리라면 권정희씨의 논리보다 아직 성경공부 더 하셔야 되는 수준입니다.
저는 이곳(십자가 마을)에 들어오는 글을 지나치게 오래 반복해서 읽어보는 습관이 있습니다.하소미(이희진님.)의 몇가지 글에 동의하지 않은점이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정영균님의 많은 질문 답변을 지켜보며 이대목에서 이분이 아직도 이해가 제대로 안된 부분이 있는것 아닌가?란 의문을 가졌습니다.
"1804글-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전반부 중간정도에서 글을 따옵니다,"제가 지금까지 여러 논의를 살펴볼때 권정희씨나 다른분들이 믿음에 행함을 더하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이하-여겨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부분은 과연 권정희씨가 행함을 추가 시키려 한 흔적이 없다고 여겨집니까?라는 역질문을 정선생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두분다 아직 행함에 대해서 저와 진배없이 무지한자로 보임니다.
"행함의 시도가 어떤 때에 치고 나오는지에 대해서는 많이 모르시는분 같으단 말입니다.저 역시 권정희씨의글을 많이(제 차에 실고 다니며 신호 대기시 마다 읽을정도로)관심 가졌던 사람입니다.
이런 정도의 행함은 더 좋은 선배를 제가 추천 해 드릴수 있습니다.(특정 한사람을 이야기 하는것은 아닙니다.)
끝으로,이근호목사님께 질문 올립니다.정영균씨의 제가 지적한 부분을 보실때 권정희씨가 마음만 먹으면 행함이란것이 정리되어 인간에게서는 나오지 않는 부산물이 될수 있냐는 것입니다.만약,아니라면 이 분들이 아직 행함이 뭔지 모르시는분이시고 제가 잘못 보았다면 두분에게(특히,정영균님께 )사과 드릴수 있습니다.목사님 답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re] 제가 정영균님과 이희진님의 의견에 동의 하지 않는 이유는.... 이근호 2004-02-11 22:21:34, 조회 : 313, 추천 : 34
인간 존재성이란, 반드시 행함으로 그 존재성을 드러내게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따로 '행함'이라는 것을 추려내겠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성과 다른 위정된 존재성을 드러내고자 의도할 때 주로 나오는 본능적 습성입니다.
즉 가만있어도 나오는게 행함인데,
의도적으로 '행함'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겠다는 것은 자신을 과신하거나 괴사하고 싶을 때 흔히 나오는 현상이지요.
성도란,
군중들 속에 있어도
주님을 더 의식하면서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성도의 모습은 바로 '주님에 대한 의식'으로 인생을 사는 겁니다.
==========================================================================[re] 이근호 목사님께.... 구득영 2004-02-12 01:23:22, 조회 : 300, 추천 : 40
목사님은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성도의 모습은 바로 '주님에 대한 의식'으로 인생을 사는 겁니다' 라고 말입니다.
왠지 이 부분이 마음에 콱 와서 박혀서 두가지 질문을 하고자 합니다.포에르바하는 '기독교의 본질 - 1장, 인간의 일반적 본질'(박순경역,종로서적) 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인간이 짐승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것은 의식이다(29페이지)'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조금 뒤에 말하기를, '짐승은 내적생활과 외적생활이 합일되어있지만, 인간은 이 둘을 다 (구별되이) 가지고 있다(30페이지)' 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내적생활은 자기 種이나 본질에 관계하는 생활로, 이것을 인간의 사유, 즉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마 내적과 외적을 구별하는 것이 '의식'이 아니라, 이 내적생활 자체가 '의식'을 말하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먼저 포에르바하의 이러한 짐승과 인간의 구별시도(인간이해)가 어떠한지 좀 설명(비평)해주시고-아마 이 인간이해가 이 책의 핵심이지 싶은데-, 그리고 이 책에서 말하는 '의식'과 목사님이 말씀하신 그 '의식'과도 좀 비교해서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re] 이근호 목사님께.... 이근호 2004-02-12 08:12:02, 조회 : 318, 추천 : 24
칸트 이후, 서양의 철학은 주체에 대한 관심을 더욱 심화시켜 나갔습니다.
신을 부정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반대로,
신을 제대로 섬겨보겠다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신이 원하는대로 그런 인간으로 스스로 변모되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리겠다는 겁니다.
이런 욕구가 종교개혁 때부터 이미 정당화되었습니다.
칼빈이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부추겼습니다.
포이에르바하는 바로 이런 인간들의 부질없는 시도를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신이란 인간의 무한한 의식이 투사해서 나온 상상의 산물로 보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기독교란,
인간의 본질이란 의식이며, 의식의 본질은 무한성이라는 겁니다. (이 주장은 이미 칸트에 와서 확정된 바 있습니다.)
종교란 무한성을 본질로 하는 의식을 의식하는 것,
즉 무한자에 대한 경배라는 것입니다.
달라 말하면 종교란 인간이 이미 희구하는 무한성을 무한자로 간주하고 이를 경배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무한자를 이렇게 '대상'으로 의식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인간 자신을 주체로 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발생될 수 밖에 없고,
더나아가 대상이란 결국 주체의 변형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그 무엇을 대상으로 삼을려면 자신을 주체로 확증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겁니다.
포이에르바하는, 바로 이미 주체자가 된 인간의 불가피성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말한, '의식'이란,
나사렛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일관된 행위를 의식하자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이 주는 의미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일어날 수 없다는 고린도전서 2장의 증언을 바탕으로해서,
주체적 의식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비로소 알려진 하나님의 지혜을 믿음으로 수용하고 증거하는 의식을 말합니다.
즉 성도에게 있어 주체자는 성도가 아니라 성령님이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의식이
곧 제가 말하는 '예수님이 의식'입니다.
==========================================================================[re] 이근호 목사님께.... 오상호 2004-02-13 06:12:42, 조회 : 262, 추천 : 29
안녕하세요, 가끔씩 들어와서 목사님의 글을 읽다가, 이번에는 직접 질문을 드립니다.
목사님께서"신이 원하는대로 그런 인간으로 스스로 변모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겁니다. 이런 욕구가
종교개혁 때부터 이미 정당화되었습니다. 칼빈이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부추겼습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가 있습니까? 종교개혁때부터 이미 정당화 되었다고 하셨는데, 종교개혁가들 중 누구의
어떤 글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그리고 "칼빈이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부추겼다" 고 하셨는데, 칼빈의 글들 중에서 구체적인 증거가 무엇인지요?
==========================================================================[re] 이근호 목사님께.... 이근호 2004-02-13 07:52:30, 조회 : 342, 추천 : 24
>종교개혁은,
교회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신이 원하는 모습에서 탈피하여 개인적으로 종교적 역량을 보이고자 시도한 시기입니다.
루터의 경우에는, 십자가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기존 교회 세력에 횡포를 거절하고 제모습대로 정돈시키려는 소극적 태도를 취한 반면에,
후대 인물인 칼빈의 경우에는 적극적이고 본격적으로 , 이상적인 교회를 수립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교회 내에서서, 신자와 불신자를 가려내는 정치 시스템을 가동시켰습니다.
그 기준으로 동원된 것이 스토아 학파의 윤리관이었습니다.
스토아 학파의 윤리관은, 이 세상에는 '통합된 양심'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믿는 윤리관이었습니다.
즉 자연질서의 율법화였습니다.
춤, 카드놀이, 도박, 외설, 심한 음주, 아내 구타, 간음, 교회 불찰 같은 항목을 두고 형제를 징계하는 권한은 목사에게 주었습니다.
이로서 원죄론은 뒤로 미뤄지고, 죄마저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 창출을 주체적 인간 역량으로 가능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제네바에서의 '신정정치'입니다.
물론 이것이 하나의 이벤트인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신앙보다 절대적 완전한 선(善)을 맛보고 싶은 이성적 충동에 있어 이러한 용감한(?) 이벤트는 참으로 회피할 수 없는 시발적인 유혹이 되었습니다.
칼빈을 필두로 이러한 종교와 정치와 결합된 '정치 실험'은 그 후 약 100년간 계속 되었습니다.
나중에서는
자연신론 시대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민주주의 의회 제도와, 국가적으로 차원에서 복지 정책으로 정착하므로서 이 칼빈의 이상은 완전히 행정상 항목으로 굳혀지게 됩니다.
물론, 주제적으로 인간은 스스로 거룩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은 국가 행정력의 동기로서 작용하게 된 것입니다.
==========================================================================[re] 이근호 목사님께.... 오상호 2004-02-15 16:36:38, 조회 : 107, 추천 : 14
이근호 목사님께,
앞서 제가 드린 질문은 목사님께서 종교개혁, 혹은 특별히 칼빈과 관련해서 말씀하신 내용의 근거가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는 너무 전반적으로, 그리고 일방적으로 칼빈과 관련해서 또다시 말씀을 하시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긴 질문들을 통해서 목사님께 구체적인 증거를 보여주십사 요청을 드리는 것은 목사님의 글을 읽고서 혹시나 제가 그동안 배웠고 알고 있던 칼빈에 대한 것들이 너무 일방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올리신 글을 보면서, 먼저 드린 질문과 함께 더 큰 질문들이 생겼습니다. 이 질문들 역시 목사님께서 칼빈과 관련해서 평가하시는 구체적인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부탁드리는 것은 단지 목사님의 “추측”이나 “평가”만을 말씀하시지 마시고 “구체적인 칼빈의 글” 혹은 “칼빈에 대해서 그렇게 평가한 글”에 대한 “인용”을 부탁드립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강요 몇 권 몇 쪽”으로 말이지요. 목사님께는 “구체적인 증거”를 요청드리면서, 아래에서 제가 인용한 몇몇 칼빈의 글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적을 수 없는 상황임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현재 책들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제가 소위 “칼빈주의자”가 아닌가 생각하시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칼빈을 존경하지는 하지만, 결코 칼빈주의자는 아닙니다.
1. 목사님께서 칼빈이 “이상적인 교회를 수립하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구체적인 증거가 무엇입니까?
저의 짧은 지식으로는 기독교강요 4권에서 칼빈은 이상적인 교회(혹은 완전한 교회)를 수립하려는 재세례파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반대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시 재세례파가 엡 5:26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심이라”을 들어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려고 하였지만, 칼빈은 본문에 대한 그들의 해석을 비판하였던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혹시나 칼빈이 “참교회가 존재하지 않은 적은 없다”라고 한 것 때문에, 목사님께서는 역으로 “칼빈이 이상적인 교회를 수립하려는 의도를 가졌다” 라고 추측하시는 것은 아닌지요? 칼빈이 다음과 같은 키프리안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교회 안에 가라지나 불결한 자가 있다고 우리가 교회를 떠날 필요는 없다... 질그릇을 부수는 것은 오직 주께만 맡겨진 것이며 그에게는 철장도 주어져 있다. 아무도... 인간적인 판단으로 모든 가라지를 가르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혹은 다음과 같은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밖에도 양이 많고 안에도 이리가 많다.”
2. “교회 내에서 신자와 불신자를 가려내는 정치시스템을 가동시켰습니다” 라는 목사님의 주장의 구체적인 증거가 무엇입니까?
혹시나 칼빈이 당시 제네바시의 의회를 장악하고 의회 권력을 등에 업고서 교회를 평정하려고 했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까? 혹은 칼빈이 지나치게 당시 교회의 교인들과 제네바 시민들을 엄격하게 치리했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까? 목사님께서는 16세기 사회 정치적 상황에서 “교회와 사회”, 혹은 “성도와 시민”이라는 개념이 분리되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목사님께서 잘 아시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제가 아는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소위 “신정정치”의 과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습니다. 1535년 8월 최초의 개신교 설교가 이루어진 후 제네바 시는 네 개의 평의회, 소의회, 60인회, 200인회, 그리고 시민회를 만들고 이를 통해서 일상사 전부를 결정하고 이 결과 1536년 5월 당시 12000명 정도였던 제네바 시민들 모두가 손을 들어 종교개혁적 신앙을 고백한 사건과 그에 따라 교회의 모든 것, 심지어 성찬까지 시의회가 결정하게 됩니다. 이것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러한 일들은 칼빈의 첫 번째로 제네바에 들어가기 이전에 있었던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련의 상황 속에서 칼빈은 제네바에 들어갔고, 교회의 일-특별히 권징과 성찬-을 시의회가 결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칼빈의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이들과의 논쟁 가운데서 당시 시의회의 결정으로 제네바에서 쫓겨납니다. 그후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로 가서 프랑스 난민교회를 목회하였고, 얼마후 제네바의 시의회는 또다시 칼빈을 청빙하기로 결정을 하고 칼빈에게 “빛을 소망합니다”라는 말로 요청을 합니다. 칼빈은 망설였지만, 결국 제네바로 돌아가지요. 2차 제네바 입성후 문서로 교회 정책에 관한 사항들을 입안해서 관원들에게 제출하고 이를 소의회가 손질하고, 200인 의회에서 수정, 총회에서 채택하는 과정을 거쳐 채택된 것이 후기 개혁교회의 원리들이 고전적으로 표현된 역사적 문서인 The Ecclesiastical Ordinances of the Church of Geneva(제네바 교회의 교회 법령들)이지요.
아주 간략하게 과정만을 요약했는데,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교회 내에서 신자와 비신자를 가려내는 정치적 시스템”이란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칼빈의 어떤 행동들을 가리키는지요?
3. 칼빈이 동원한 윤리관이 스토아학파의 윤리(이 세상에는 통합된 양심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윤리관)라는 구체적인 증거가 무엇입니까? 혹시나 목사님께서는 1532년 4월에 출판된 칼빈의 젊은 시절의 학위논문인 “세네카의 자비에 대한 두 권의 책에 대한 주석”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혹은 강요에서 칼빈이 ‘현세와 내세에서의 “중용”’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 때문에 그렇게 평가하시는지요? 칼빈보다는 루터가 스토아학파의 윤리관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4. 목사님께서는 칼빈이 스토아학파의 윤리를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자연질서의 율법화”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연질서의 율법화를 “춤, 카드놀이, 도박, 외설...교회불참 같은 항목을 두고 형제를 징계하는 권한은 목사에게 주어졌습니다”라고 설명하셨다 고 이해됩니다. 저의 이해가 맞는지요? 그렇다면, 목사님께서는 “춤, 카드놀이, 도박, 외설... 교회불참”등이 “자연질서”라고 이해하시는지요?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서 “교회가 성도들에게 제한하는 것”을 “율법화”라고 생각하시는지요? 혹은 성도들의 삶에 그러한 것들이 있을 때 제한해야 하는 것은 “시의회의 권한”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5.(칼빈은) “이로써 원죄는 뒤로 미뤄지고 죄마저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 창출을 주체적 인간 역량으로 가능하다고 가르쳤습니다” 라는 목사님의 주장의 구체적인 증거가 무엇입니까?제가 아는 바로는 루터보다도 더 칼빈은 인간의 죄인됨을 의식하고 강조했습니다. 죽기 직전 칼빈의 “나의 죄들이 항상 나를 불쾌하게 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나의 마음에 항상 있었다” 는 고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re] 이근호 목사님께.... 이근호 2004-02-15 18:15:41, 조회 : 106, 추천 : 12
>제가 일반적인 이야기를 해 드리는 것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칼빈이 있기 전에 제네바시는 파렐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테러도
서슴치 않았던 인물입니다. 칼빈은 파렐의 부름을 받고 제네바 시에서 새로운 질서를 세울 것을 천명했습니다.
그 때가 1536년 5월 21일의 일입니다.
"설교자는 높은 지위에 있는 자로부터 가장 비천한 자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나 명령"을 한다는 칼빈의 글을 제네바 시의원들은 너무 쉽게 생각한 것입니다.
이 때부터 제네바 공화정은 신정통치의 독재국가로 변모했습니다.
3 개월 뒤에 칼빈은 시참사회에 '제네바교회 신앙문답서'라는 것을 제출했는데, 이것에 칼빈은 무조건 복종을 명령했습니다.
만약 복종하지 않는 자는 가차없이 처벌까지 할 수 있는 의무와 권리가 자기에게 가졌다고 보았습니다.
칼빈은 단순히 신앙 기준을 제시한 한 것이 아니라 국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제네바 시민들은 학교 학생들처럼 열 사람씩 짝을 지어, '장로들'의 인솔하에 교회에 가서 시행정부가 읽어주는 서약문에 오른 손을 들러 선서를 해야했고, 이 같은 서약을 거부하는 사람은 곧바로 제네바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제네바에서는, 종교란 개인의 양심문제라는 루터의 '기독인의 자유'라는 견해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칼빈은 파문권까지 거론했습니다.
성찬식에 대한 자신의 독특한 이론을 창안해서 그것으로 권력과 압력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이 성찬이론은, 신앙이 옳고 그름을 인간이 측정하는 기준과 연결 가능한 성찬이론이었습니다. 성찬식에 임재하는 성령을 훼손할 가능성이 있는 자는 아에 성찬식에 참석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이같은 파문권을 설교자와 장로회가 매일 집행해 줄 것을 주장해서, 무서운 위협이 되는 파문권을 거의 정규적인 처벌로 행사하게 만들었습니다.
1538년 2월 시민투표의 결과, 다수의 시민이 칼빈의 전횡에 대해 거부감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여기에 불안을 느낀 칼빈은 더욱 강하게 나갔습니다.
그에게는 단지 "나는 가르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은 자기에게 배워야 한다'"는 원칙만 고수했습니다.
결국 200인회(대의회)에서는 칼빈을 따르는 설교자를 파면시키고 칼빈은 3일만에 떠날 것을 명령하는 안을 압도적 다수로 가결했습니다.
칼빈은 그동안 18개월동안 제네바의 많은 시민을 위협했던 것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그 어떤 강제권도 복음에 개입될 수 없습니다.
복음 정신이 이런 강제권을 거부합니다.
칼빈의 이러한 행위들은 그 당시 정치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칼빈이 아니라 누구라도 얼마든지 그런 행위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특정 인물의 삶을 긍정하는 것과 복음의 내용을 바로 연결짓는 과오는 계속 저질러 왔습니다.
(소위 초대교회의 순교자들 집단 속에서 복음의 모델을 찾아내는 방식 같은 과오들)
바로 이런 점에 있어 교회사 연구의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스토아 철학의 영향은 칼빈과 루터 모두에게 충분하게 젖어있기에
인간과 인간을 대비하고 비교하는 것은 복음적으로 아무런 의의가 없다고 보여집니다.
==========================================================================제가 정영균님과 이희진님의 의견에 동의 하지 않는 이유는.... 장병엽 2004/02/11 40 332
[re] 정영균님에게.... 구득영 2004-02-11 23:05:10, 조회 : 232, 추천 : 33
저는 님을 장병엽님이 말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님의 글에 답글을 달면서 제가 가진 느낌이었습니다. 님이 이 사이트의 글들을 대부분 다 읽었다는 것도 그렇고 말입니다. 동의하지 않으면 대부분 읽다가 뛰쳐나가고 말겠지요.그런데 님이 왜 그렇게 그분들을 긍정적으로 표현했는지는 좀 궁금했습니다.특히 영국에 계신 아주머니는 처음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영 아니거든요.제가 님을 잘못 이해한 것인가요?답변을 좀 듣고 싶습니다.
이것은 좀 다른 이야기만, 교회개혁에 대해서 좀 이야기하자면 이런 것입니다.여기서는 교회개혁을 부르짖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을 살펴볼 때,굳이 개혁이라는 말을 사용하자면 그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죠.그러면 한국교회를 향해서 퍼붓는 독설(?)은 무엇입니까?'교회는 이런 것이다. 아니면 비켜라'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특정 교회를 향해서 이단이니 아니니 하는 말이 아니고,말씀의 기준에 맞추어보아서 그렇게 외치는 것입니다.그런데 그것이 어떤 자들에게는 왜 교회를 파괴하려는 행위로 보일까요?
교회마져도 고치려고 인간의 무모함,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먹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아담의 후손임을 치열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행함을 주장하는 자들은 무엇을 하나 해도 제대로 하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믿음의 결과는 행함이 아닙니다. 역시 믿음입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