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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사도시대 이후 감독정치시대에서 장로라는 직분이 있었는지? ] 2004-01-28묻고답하기-

사도시대 이후 감독정치시대에서 장로라는 직분이 있었는지..?? 질문입니다. 김인찬 2004-01-28 12:02:56, 조회 : 90, 추천 : 26
초대교회에서 순교자들은 교회의 감독이라는 지역의 대표들이 거의 차지하고 있는데 혹시 감독과 교부들이라는 순교자들 외에 교회의 집사나 일반 장로들의 순교나 그들의 행적은 찾을 수 없는지 궁금합니다.
감독과 다른 성직인 집사나 일반 장로들이 사도시대 이후에 계속 존재했다면 그 문헌이나 기타의 증거자료가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또한 그들의 행적이나 순교의 기록이 남아 있다면 어떤 내용들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re] 사도시대 이후 감독정치시대에서 장로라는 직분이 있었는지..?? 질문입니다. 이근호 2004-01-28 18:12:57, 조회 : 111, 추천 : 12
클레멘트나 이그나티우스나 터툴리안의 서신 가운데 보면, '형제' '자매'라는 호칭으로 주로 쓰면서 장로나 감독들에게 복종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감독직은 장로직나, 집사직과도 분명히 구분된다고 되어 있습니다.(클레멘느 제 1서)
보다 참고 할 수 있는 책은, 피오렌자가 지은 [크리스찬 기원의 여성 신학적 재건] (종로서적 1986년 책에 잘 나와있습니다.)
##############################################################################################그래도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다! 강성희 2004-01-29 20:53:06, 조회 : 101, 추천 : 15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그는 한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으시므로써
많은 열매를 맺게 되시므로 첫열매가 되신다.
이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이 열매가 또한 영생에 이르게하는 씨앗이 되어 바로 우리 인간들 마음밭에
뿌리워진 것이며 이씨가 바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계시된 믿음이시며 선물인것이다.
어법에 관계없이 예수가 자기에게 믿음이 된자들은
이말은 진리이며 아멘이 되는것이다.
믿음은 씨앗이고
소망이 줄기요 잎이라면
사랑은 열매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마21:43)"
예수그리스도의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들은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맺게되며 그열매는 바로 주님이 주신 새계명인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는것이다.
믿음이란 말을 오해하면 자기로써 어떠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믿기에
이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믿음의 행위를 열심히 하므로써
사람이나 교회라는데서 인정받고 목사나 교인들한테
칭찬을 받으므로써 자신의 믿음있음에 안도하며 그것을 믿음이라고
굳게 믿는것이다.
====================================================================================================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래서 열심히 믿는다고 한다. 우리가 열심히 믿으면 된다고
생각할 때 벌써 사단은 그곳에 침투해 들어올 수가 있는 것이다.
믿음이 어떠한 믿음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의적인 믿음인가, 아니면 계시의 믿음인가?
내가 내 힘으로 믿는 믿음이 있고 예수의 믿음이 있다.
전자는 내게서 나온 것이다. 후자는 위에서 온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보라.
만일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면.....
구원이 은혜인가, 내가 믿은 공력의 대가 인가?
이러한 것은 상당히 어려운 얘기이고 미묘한 것이지만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구원은 [우리의 믿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에서 온다면 그것은 벌써 은혜는 아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무엇인가? 과연 그것이 성서적인가?
이 문제는 로마서를 공부할 때 자세하게 되겠지만 오늘은 간단히 한 곳만 찾아보자.
[롬 3: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원어는 그렇지 않다.
원어를 살펴보면,
/ dia. pi,stewj VIhsou/ Cristou/(
이 부분을 위와 같이 번역을 했다.
dia (디아) 전치사 [-로 말미암아]
pi,stewj (피스테오스) 명사 속격 [믿음]
VIhsou (예수) [예수의]
Cristou/ (크리스투)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라는 번역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 다음의 [예수 그리스도를]이라고 대격(목적격)으로 번역을 한 것이 문제이다.
이것을 원어대로 [에수 그리스도의 ]라고 속격으로 봐야 하느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이라고 대격으로 해석을 해야 하느냐 하는데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ICC주석(국제비평주석-필자는 영문판을 가지고 있음)에는 이 말씀을 놓고
두 가지의 견해가 있음을 밝히면서 [예수 그리스도를]이라고 대격으로 보는 사람들이
더 많으니 그것을 취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고 다수결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성서는 결코 다수의 의사에 의해서 좌우되어서는 안된다. 어느 것이 더
복음적이냐 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대격으로 번역을 하면 그 결과는 인간의
능력을 중심으로 번역한 것이다. 그러면 결국은 인간이 [자랑할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니까 인간의 능력이 개입된 것이다.
원어 그대로 속격으로 번역하면 온전히 복음적이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니 거기에는 인간의 자랑이
개입될 틈이 조금도 없는 것이다. 로마서 3장의 앞뒤의 문맥만 잘 살펴도 이 문장은 결코
대격으로 번역해서는 안되고 원문 그대로 속격으로 번역을 해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한다.
[롬 3: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속격으로 번역을 해야 자랑할 데가 없게 된다. 내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이니 자랑할 데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것도 [우리의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원어공부중 김영길 목사님의 레위기 강해중 발췌)
==========================================================================[re] 그래도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다? 권정희 2004-01-29 23:53:39, 조회 : 168, 추천 : 19
죄송하지만, 귀하의 주장이 옳은 것이 되려면, 아래의 질문에 대답이 되어야겠군요. 이 질문은 물론, 귀하의 글의 제목에서도 나타난 것처럼, 믿음의 본질에 대한 것이 아니고, 믿음의 어법에 관한 것입니다.
질문1: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의 주체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믿음입니까? 내가 믿는 믿음입니까? 이 질문은 믿음의 기원에 대한 질문이 아니고, 믿음의 주체에 대한 질문입니다. 곧, 내가 믿는 믿음입니까?라는 질문의 의미는, 그 믿음의 기원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질문2: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가 믿는 믿음이라고 하면, 내가 믿은 믿음이 아니라고 하는 뜻인데, 그렇다면,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대신 믿어주는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 다는 말입니까? 나는 믿지도 않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서 믿어주는 것입니까?
답변의 방향에 따라서 다른 질문들을 계속 드리겠습니다. 제가 제기한 어법의 문제에 대해서 제목을 붙여 놓았기에 관심이 생겨서 질문을 드립니다.
답변 부탁드립니다.
==========================================================================그래도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다! 강성희 2004/01/29 15 102 [re] 그래도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다! 강성희 2004-01-30 08:21:01, 조회 : 101, 추천 : 21
구원이란? 나(옛사람)는 죽고 그리스도(새생명)가
내안에 영원한 생명으로 사는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모른다면 매일 자기(혈과 육)가 구원받는것으로
착각을 하게 되므로 성경에서 말하고 주님이 말하는
구원을 이룰수가 없게 됩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고전 15:50)"
그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수 없게 됩니다.
거듭나는 것이란 위에서 물과 성령으로 다시나는 것이라 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새생명은 나의 생명이 아니라 그분의 생명입니다.
천국은 내나라가 아니라 그분의 나라요 그분의 생명으로 다시 난자들만이 영원히 거할수
있는곳입니다.
이 새생명 만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수가 있는것이며
이것을 가리켜서 성경에서는 "성령으로 하지않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수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죽지않고도 예수를 믿을수 있는 믿음을 가질수 있다고
말하는것은 아직도 종교적인 관념에서 즉, 어두움속에서
더듬더듬 더듬어 주님을 찾고있을뿐 아직 빚으로 나아오지 못한 결과입니다.
빛으로 나와서 예수를 나의 생명으로 영접하면
비로서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게되고 그믿음의 결과로
내가 구원되었음을 알게되므로 앵무새처럼 은혜만 말할수 있을뿐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은혜 정말 놀랍네 라고 고백할수밖에 없게 됩니다.
성경에서 구원을 얻고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지만
정작 구원을 얻기위하여 예수께로 빛으로 생명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예수는 내가 믿는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게 믿음으로 먼저 다가오셔서
내게 믿음이 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분이 나를 떠나시면 나는 당장
주님을 부인하고 제갈길로 가고 말것입니다.
==========================================================================[re] 그래도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다?(재질문) 권정희 2004-01-31 04:48:06, 조회 : 319, 추천 : 34
님의 말씀에 대해서 저도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바로 다음의 말이 나오기까지 말입니다.
"예수는 내가 믿는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게 믿음으로 먼저 다가오셔서
내게 믿음이 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님의 말씀을 위와 같이 말고, 아래와 같이 표현하면 어떨까요?
"그 분이 내게 다가와서 믿음을 넣어주셔서 나로 말미암아 그 분을 진정으로 믿을 수 있게 하시고내게 주님이 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님의 표현은, 믿음의 주격이 나라는 사실을 무시함으로 인해서, 나의 구원이 예수가 믿는 그 믿음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오해하게 할 우려가 있군요. 예수님이 믿는 믿음이라면 도대체 예수님이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도대체 어떤 믿음이 나를 구원하게 하는 것입니까? 내가 앞으로 믿음을 가질 것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믿음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의 주격이 "내"가 아니라면, '"나"는 없어집니다. "나"라는 것이 없어지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실 지 모르지만, 그것은 이 문제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없어지게 되면, 소위, "예수와 내가 하나가 된다"는 식의 "신인합일론"이 나오고, 그것은 곧 "신비주의"로 직행하게 됩니다.
님이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까? 교회사에 있어서, 이런 "신비주의"를 주장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도 이단으로 정죄되었는 지 아십니까?
나를 부인한다는 것은, '나'라는 인식의 주체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는 인식의 기능이 새로워져서 지금까지 알던 '예수"를 새롭게 알게 되고, 전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곧 영적인 차원에서 '예수'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나'라는 인식의 기능이 무시되면, 기독교신비주의가 되고, 그것은 인도의 수행종교의 이론이나, 중세 신비주의이론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운운해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왜, 이 어법문제가 중요한 지 아시겠습니까?
님이 말씀하신 아래의 제일 마지막 말씀에도 제가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무엇을 제가 공감하고 무엇에 반대하는 지 세심하게 유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런 각도에서 저의 질문을 다시 읽어주십시오. 님의 신앙에 더 깊은 정진이 있으시길....
"지금도 그분이 나를 떠나시면 나는 당장
주님을 부인하고 제갈길로 가고 말것입니다."
아멘!
권정희 드립니다.
==========================================================================[re] '어법이 중요하다'는 주장은 타인을 속이는 행위입니다. 이근호 2004-01-31 08:30:02, 조회 : 276, 추천 : 41
신을 이용해서 더불어 인간의 '주체'사상이 강조되고 난 뒤부터 (신을 '무한' 개념으로 처리하고 난 후)
인간들은 자기 분석에 들어가게 됩니다.
물론 주체성을 긍정하기 위한 일환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레게의 '기호논리학' 이후 러셀의 '논리실증주의'이 이르러서는, '주체'가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주체의식'으로 인하여 일상 언어 어법에 모순점이 발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되먹임' 현상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러셀은 이 재귀성(再歸性)으로 인해, '메타논리'를 따로 설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즉 '범주'에 대한 차원 분리를 시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범주 그 자체'가 또하나의 새로운 '범주'로 등장하고 그 범주가 하위의 범주에 침범하고 관계맺는 '재귀성'으로 인해 논란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한 논리적 범주 안으로 처리하는 것을 포기하게 이릅니다.
"모든 명제는 그 자신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인정해 주자는 겁니다.
즉 인간이 내뱉아낼 수 있는 경험들은 결코 하나의 논리로서 다 담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한 것입니다.
이것은 후에 의미론과 가치론에 있어 중대한 전환기를 맞이하게 합니다.
즉 '우발성'에 대해서 인간의 어법이 다 포착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자인한 겁니다.
그 전까지는 '우발성'을 '필연성'으로 전환시킨 후, 그 뒤에 다시 그 필연적에서 의미를 추적하고, 그 의미를 살리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그 논리에 부합되도록 어휘들을 배치, 조정하는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삼위일체 논리에서, '본질'과 '위격'이라는 단어가 그런 취지에서 차용된 것입니다. (결코 '본질'과 '위격'이라는 그 어휘의 개념이 그 어떤 삼위일체의 의미를 담을 수 없습니다.)
마치 길 가던 사람에게 임시적으로 옷을 갈아입혀 연극의 한 역할을 억지로 맡긴 격에 불과합니다.
이로서 언어와 어법이란, 합치성에 준해서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유사성'으로 대체되고 있음을 상식이 있는 자는 누구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사성'이라는 것도 그 자체가 너무나도 임의적으로 '우발적'인 아이디어의 즉흥적 생산물로 간주되었습니다.
신학의 딜레마는, 이런 당연하고 상식화된 현대 논리관을 수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전통과 억지로 맥을 이어야 하는 이중 부담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칸트 이후, 신학에서는 인간의 '주체' 의식을 확실히 신학적으로 (혹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근거하여) 보장하는 권위자 역할을 스스로 떠맡아 인간의 존재 긍정을 유지시켜주는려데 앞장 서 왔기 때문에, 그 사명감을 이제와서 찰학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경쟁의식 및 열등의식이 작용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역사 의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건이 터진 그 때 당시의 사람들이 가진 세계관과 그 사건을 후대에서 보고 있는 후대인의 세계관이 상호 다르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역사가 전면에 나서면서, '역사는 발전적으로 진화한다'는 의식으로 인해 (이런 의식도 19세기 자의로 이 후에서 생긴 것에 불과함) 보다 '발전된 그 무엇'의 증거물을 수시로 현상 속에서 찾아내어 주어야 자기 주장이 정당화된다는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플로티노스나, 플라톤의 입장에서 보면, 마치 자기가 만들어 놓은 사상 체계를 가지고 인류들이 아직도 2500년 동안이나 주물럭 거리면서 노는 꼴입니다.
즉 전혀 발전된 것이 아니라, 이미 플라톤이 완성해 놓은 체제를 아직도 검사하고 살피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 것입니다.
발전된 것이 아니라 플라톤에서 벗어난 이후 도리어, 혼돈과 혼란과 모순만 야기될 뿐입니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 시대의 현황입니다.
이 혼란은 인터넷 시대를 맞이하여, 다차원 연결고리와 채녈로 인해 더욱 확대되어, 타인의 사상을 자신의 '주체 의식'의 기준에 준해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예를 들면, 현대 신학에서 성령에 대한 이해가 가중되면서, 다른 종교 속에 들어 있는, 성령의 창조적 사역을 새롭게 받아내어 구속사 중심의 신학을 해체하고, 생성적 창조론 중심으로 불씨를 지펴나가려고 합니다.
즉 상대방의 '주체'를 인정해주자는 겁니다.
그리고 그 타인의 경험을, 전체를 아우르고 활동을 전개하시는 신의 작업 영역으로 포함시켜 버리자는 겁니다.
이것은 16세기의 스피노자의 재현이며, 이로서 하나의 신 안에서 우리 모두가 형제 됨을 인정하여,
이 시대를 함께 보내는 인류의 행복과 복지에 기여하고 증진하는데 있어 신학과 종교인들의 활동 가치를 재발견하자는 겁니다.
즉 필연성을 깨고, 모든 우발적인 것을 상호 인정하여, 우발성으로 일하시는 신 안에서 서로가 하나의 형제임을 하인정하고 관심갖는데서, 즐거움도, 아품도 같이 나누고, 그런 식으로 관심과 사랑을 실천을 긍정하는데 필요한 이론을 신학이 제공하는 것이 이 시대의 신학자로서 마땅한 도리가 아니냐는 주장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학에서 사용되는, 신학적 어법들이, 다른 영역의 어법들(공학이나 수학에서 사용되는 방정식이나 어법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고유성 안에서만 일단 인정을받아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연합에 기여하는 조건을 소여적으로 갖고 있다는 핑계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으로 이미 시작된 종말적 사건들이 고유의 의미를 전혀 발휘되지 못하는 셈이 됩니다.
플라톤이나 스피노자의 의식이나 칸트 이후의 주체의식은 모두 존재론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이론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신과 인간의 존재를 먼저 설정해 놓고 그 안에다, (마치 샌드위치에 들어가는 햄과 샐러드처럼) 성경적 어휘들을 집어넣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지옥의 실제성은, 이 역사 끝에서는 겅험되지 않습니다. 즉 지옥이 지옥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이름'이 능력이 신학의 고유적 어법 안으로는 침투하지 못하고 작용하지도 않는 것처럼 해석된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 "예수님, 심판을 하시려거든, 교회 밖에 있는 놈들에게나 심판하소서.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종들로서 예수님과 한편입니다"라는 식이라는 겁니다.
이는, 자기 자신조차도 자기가 전하는 복음 외에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사도 바울의 갈라디아서 1:8의 초비약적인 논리적 발언이나 베드로전서 4:17의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심판이 시작된다는 사실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입니다.
왜 제가 모든 교회가 이단이다는 주장을 했겠습니까?
그것은 성경 해석을 이미 존재론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인간들에게는 (교회라는 존재를 견지, 교단이라는 존재를 견지, 나의 구원이라는 그 존재성을 유지 견지하려는 시도, 기독교가 최고라는 것을 유지, 견지하려는 태도) 그런 이해 자체가 이단적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심판이란, 사실상 이단일 수 밖에 없기에 반드시 이단되어야 하는 존재를 지니고 있는 자들에게는 당연히 조치입니다. (즉 복음이 그 지역에 들어오기 전의 인간들은 복음 전파의 기회와 상관없이 반드시 지옥가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원래 '언약 밖'의 인물들이기에 당연히 저주받아야 합니다.)
주의 이름이 벌리시는 모든 일은(구약의 여호와 이름으로 벌리시는 모든 일은) 항상 언약적으로(폐쇄적인 자기 맹세) 에 준해서 알하시기 때문에 개같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논한다는 그 자체가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태도요 건방짐이요 분수에 넘치는 악마의 작태입니다.
이제 그 심판이 새언약 기준에서 본격적으로 개시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사람만 구원한다는 사실에 기초해서, 모든 인류를 심판하십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은혜로 감행되는 겁니다.
이렇게 구원된 사람은, 결코 사건이나 행위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만을 증거하며, 언약상, 그 이유와 근거를 자신의 죄성에 둘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구원받고자하는 죄, 어법의 정당성으로 기독교 신학을 전파한 죄, 아직도 '새로운 피조물'됨을 주체적으로 부각시켜 소유하고 싶은 죄, 바로 이런 자들이 아직도 비구원된 상태에 놓인 자들입니다.
성령님의 일이란,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시는 일입니다."(고전 2:12)==========================================================================[re] '어법이 중요하다'는 주장은 타인을 살리는 행위입니다. 권정희 2004-01-31 23:19:48, 조회 : 128, 추천 : 18
호호호…
저의 글마다 이젠 댓글을 다시기로 작정을 하신 모양이군요. 좋습니다, 좋아요. 제가 기대했던 바지요. “1년후”쯤에나 뵐려고 했더니, 자꾸만 저의 글에 댓글을 다시는 것을 보니깐 목사님의 “인내심”에도 문제가 있군요. 하지만, 그런 것에 시비를 걸진 않겠습니다. 저에게 좋은 기회를 주니, 오히려 감사를 드려야 할 그 “인내심”이지요 뭐.
제가 앞의 분에게 무어라고 질문을 했는 지를 다시 한 번 더 봐주시겠습니까? 그리고 목사님께서 하신 답변글이 그 질문과 어떻게 관계되는 지를 비교해 주시겠습니까? 프레게니, 러셀이니, 칸트, 플라톤을 들먹이면서 난삽하게 설명을 해도, 그들의 철학적 전문용어에 기죽을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그런 jargon들이나 들먹이고 있는 것으로 오히려 이근호목사님이 가지고 있는 “열등감”을 드러낼 뿐이지요. 미사일을 퍼부어대어도, 목표에 정확하게 맞추지 못하면, 소총 한 방 보다도 못한 셈입니다. 비싼 무기들만 낭비하지 마십시오. 저의 질문에 소총 한 방만이라도 제대로 쏘아주십시오.
제가 질문한 것은, 그렇게 목사님이 장황하게 늘어놓으시는 “주체의식”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아시는 “기존신학”은 칸트 이후의 그런 주체의식의 회복을 위한 열등감이나 경쟁의식의 발로라고 보시는 것 같지만, 제가 알고 있는 “기존신학”은, 칸트의 그런 “주체의식” 논의는 훨씬 초월해 있는 것입니다. 이미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질문한 것은, 그런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문법의 주격과 목적격에 대한 것입니다. 이런 것에 뭘 그리도 비싼 대공포를 쏘아대시는 지…장난감 새총으로도 충분한 것을…쯧쯧쯧
다시 저의 질문을 정리해 드리죠. 못알아 들으시는 것 같으니깐요. 위의 분이 “믿음은 예수님”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예수님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그리고는 덧붙이기를 그 “예수님의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믿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의”라는 조사가 목적격 조사가 아니라, 주격조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주격조사라면,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믿는 것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 “신비주의”에 빠져들 위험이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주체”가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나”라는 주체를 강조하는 것이,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주체의식”의 강조가 아닙니다. 제발 착각 좀 하지 마십시오!
글의 말미에, “어법의 정당성으로 기독교신학을 전파한 죄, 아직도 ‘새로운 피조물됨을 주체적으로 부각시켜 소유하고 싶은 죄, 바로 이런 자들이 아직도 비구원된 상태에 놓인 자들”이라고 하셨기에, “예수가 믿는 그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받는다”, 그러므로 “믿음이 예수다”라고 주장하는 그 얼토당토않는 주장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우리가 구원얻는 믿음(saving faith)를 가지게 되는 회심(conversion)시에 우리의 의지(will)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칼빈의 말을 인용하면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What takes place is wholly from God. I say that the will is effaced; not in so far as it is will, for in man’s conversion what belongs to his primal nature remains entire. I also say that it is created anew; not meaning that the will now begins to exist, but that it is changed from an evil to a good will”(기독교강요.II.iii.6.).
풀어설명한다면, 칼빈은 우리의 회심시(구원받을 때)에 우리의 옛의지가 새로운 의지에 의해서 문자적으로 대체된다고 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이고 영적인 변혁을 겪는다고 합니다. 방향의 전환, 곧 이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대로 하자면, “인식의 전환과 단절”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목하십시오. 이런 전환과 단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잘못될까 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in man’s conversion what belongs to his primal nature remains entire.” 우리의 인식적 기능으로서의 자아가 전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믿는 것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고만 하면, 도대체 우리의 그 인식적 기능으로서의 자아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는 영 딴말만 하고 계시는군요.
칼빈이 왜 이것을 강조했겠습니까? 그가 살던 당시에 이것을 강조할 수 밖에 없던 상황이 있었겠지요. 신비주의자들, 소위, 복음과 율법, 은혜와 행위의 관계를 설명할 때, 극단적으로 복음의 논리를 밀어붙여서, 복음 그 자체를 왜곡시켰던 사람들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혹시, 목사님께서, 그리고 목사님의 “추종자들”이 마땅히 칼빈의 비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혹시나 그래서, 칼빈을 스콜라철학의 아류로 치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목사님께 조언을 드린다면, 다독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정독이 아닐까요? 프레게, 러셀,칸트, 플라톤을 들먹이면서 하신 그 분석에 대해서 일일이 댓글을 달 수 없는 바가 아니지만, 저의 질문의 논점이 흐려질까 싶어서, 대강 합니다.
질문 하나를 더 보충한다면, 위의 말을 하면서, 인식의 기능으로서의 자아가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칼빈이 “비구원된 상태에 놓인 자”입니까? 목사님의 논법으로 보면, 칼빈도 지옥간 사람인데….자신의 존재유지를 위해서 발버둥치다가….칼빈이 웃습니다. 허허허허허허…
저에게 답글을 주실려면, “새총”으로만도 충분합니다. 정확하게 쏘시는 그 “새총”. “골리앗”도 날렸다죠?
답글 기다립니다.
권정희
*어법주장은 타인을 속이는 것이 아니고, 살리는 일입니다.
==========================================================================[re] '어법이 중요하다'는 주장은 타인을 살리는 행위입니다. 이근호 2004-02-02 14:36:07, 조회 : 112, 추천 : 15
귀하는 정작 저에게 질문을 다음과 같이 해야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이 무엇입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귀하는 어떻게 질문했습니까?
"믿음이 예수님이다"는 것은 어법에 어긋난다고 했습니다.
즉 무의식적으로 반발하는 가운데 자신의 근본 인식을 귀하는 노출시켜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보기에는,
귀하께서는 어법에 매여있는 자로 보여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그 어법에 매여있는 귀하의 실존의 비언약성에서 공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믿음은 이러 이러해서 예수님입니다"라고 설명해 봤자,
귀하는 보나마나,
"그것은 어법에 어긋나는 초논리성입니다"라고 따지고 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초논리성을 예를 들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0:29절에 나오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는 것이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기가 꽉 찰 어처구니 없는 언어 파괴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개체가 여기 있는데,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또 '하나'가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왜 그런 투로 자신을 소개하느냐 하면, 질문 자체가 바리새인들의 비언약 안에 여전히 놓여 있음을 고발하는 예수님의 고유의 활동의 연속성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 예를 들지요.
길 가는 중이 저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고 합시다.
"예수님은 훌륭하지요?"
저가 답변합니다.
"예 훌륭합니다. "
그러자 중이 하는 말이
"그런데 우리 부처님도 훌륭합니다."라고 합니다.
자 이 둘 사이에 의사소통이 된 겁니까?
전혀 안된 결과이지요.
따라서 귀하께서는
"어법이 틀렸다"라는 말을 저에게 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기본 이유는, 옳은 어법이 성경말씀에서 복음을 창출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고 있는 귀하가 한심스러운 겁니다.
첫째 이유는,
옳은 어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가 이미 몇 차례 해답을 드렸습니다.
논리학에서 '진리치'는 그 사람이 사용하는 용법 안에서만 통하는 겁니다.
둘째 이유는,
어법을 따져서는 복음적 의미가 그 안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세째 이유가 제일 중요한데요,
옳은 어법을 논해서 진리를 보다 근접할 수 있다는 그 발상 자체가 제가 보기에는 전혀 '옳지 않은 사고방식의 사유자', 즉 비성도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길 가는 중에게 제가
"스님, 부처가 훌륭하다는 것과 예수님이 훌륭하다는 것과는 개념이나 어법이 다릅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중은 복음을 떠나서, 어법 자체를 놓고 이야기 할 것입니다.
"당신이 방금 말한 것, 책임질 수 있어요? '휼륭하다'는 그 말 가지고 그 차이성을 따질 수 있느냐 말입니다."라고 화를 낼 것입니다.
마치 귀하가 나에게 화를 내는 것처럼 입니다.
그래서 제가 귀하에게 답변하기를,
"언어란 그 배후에 세계관이 감겨 있기에 결국 그 세계관의 차이이다"고 한 것입니다.
즉
"믿음은 예수님이다"라는 말 속에는,
귀하가 생각하는 다른 믿음을 바쳐주는 세계관과 '예수님'이라는 개념을 바쳐주는 세계관이 있는 겁니다.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 제가
"1년 간 저의 대해서 공부해 보시라"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귀하의 작품이나 주장이나 설교나 접해 본 적 없고, 저는 이렇게 공개적으로 글을 남겼으니 연구해 보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날 귀하는 자신의 세계관을 펼쳤습니다.
즉 '어법' 자체를 두고서 옳고, 그름이 자체적으로 정립된다는 의식과 (이것은 초논리적인 말도 안되는 광신도 격에 해당됩니다. 철학자들이 들었으면 '언어기능인'의 아집이라고 놀릴 것이 뻔합니다)
둘째로, '옳은 어법은 진리를 찾아내는 바른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그 이유를 제시한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새로운 피조물상'으로 부각된 '주체' 의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속으로 ,
"아, 저 분이 저걸 믿기에, 복음을 믿지 않고 신학의 가능성과 효력을 믿는구나"라고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귀하에게 증거할 것은 바로
누가복음 7장의 이야기였습니다.
눈물 흘리면 예수님 사랑하는 여인에게 다가가서, 당신의 신학이 과연 어법상 옳느냐를 따지는 바리새인인 의식의 소유자이구나 라는 것을 알려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과 주체의 관계는 바로, 제가 초반부에 답변했듯이,
'자기 존재성'의 긍정이고,
이것은 전혀 십자가 복음을 모르는, 십자가의 영(성령) 밖에 여전히 놓여 있는 인물인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약해서 말씀드려서,
귀하가 정말
"믿음은 예수님이다"라는 무슨 뜻인지 알고 싶다면,
어법이 옳아야 진리가 진리답다는 그 의식부터 죄악에 사로잡힌 사고방식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즉 어법으로 접근하지 마시고,
'새로운 피조물' 안에 사역하시는 '주의 이름의 언약적 활약상'으로 접근해 보시기 바랍니다.
약 1년 간 말이지요.
##############################################################################################구목사님, 권정희씨, 특히 장병엽씨께 드립니다.(아래 1월29일 쓰신글에 대한 답글 겸해서) 강인해 2004-01-30 09:04:21, 조회 : 228, 추천 : 35
장병엽님!
죄송하지만 저는 목사가 아닙니다. 목사가 제가 쓴 것 같은 그런 자극적인 표현을 쓰시겠습니까? 하기야 요즘은 그런 목사님들도 꽤 많이 발견하곤 합니다만..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님께 감사합니다. 구 목사님께 제가 밝혔듯이 상당히 자극적인 언어를 사용해서 부탁드렸는데도 구목사님께서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계속 글을 올리고 계셔서 답답하던 차에, 마침내 장병엽씨(목사님은 아니시겠죠?)께서 그래도 대신 반응이라도 보여주셔서...
저는 밝힌대로 목사가 아닙니다. 단지 구 목사님과 같은 교단(구목사님이 같은 교단이라는게 챙피해서 교단 이름은 밝히지 않았었는데 구목사님께서 친절하게 또 밝혀주고 계시더군요)에 소속되 있는 한 평신도(?)로서 하도 보기에 딱해서 한마디 거든 것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에 관해서는 그렇게 박식하지 못합니다. 단지 그래도 고등교육을 마친사람으로서(님과 같이) 흐르는 논리를 보고 말도 안되는 딴지를 걸고 계시는 구목사님을 향해서 관객으로서 다소 무례하게 부탁드린 것 뿐입니다. 저는 더이상 십자가 마을 사람들에게 특별한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전혀 대답이 되지도 않고 질문의 핵심조차도 파악하지도 못하고 있는데도 모두들 한목소리로 권정희씨를 향해서 엉뚱한 비판만 하고 계시는 님들에게, 저는 권정희씨와는 달리 전혀 기대(대화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아주 작은 기대)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도 제 시간을 할애해서 이렇게라도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저 같은 관객이라도 좀 제대로 관람할 수 있게 쓸데없는 주변 인물들(님을 포함해서요)은 무식한 소리 좀 그만하고 입 좀 다물고 계시라는 겁니다. 이 요구가 너무 과합니까?
그리고 저는 권정희씨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님의 기대와는 다르게...그렇지만 그녀의 글이 여러분들의 글들과는 다르게 상당히 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십지가 마을 주민이 아닌 사람이 보기에) 전개되고 있고, 적어도 저의 고백하고 있는 신앙과 비슷하다는 생각에 이 사람이 하는 비판을 흥미있게 지켜보고 있을 따름입니다.
다음의 말을 마지막으로 저도 이제 글을 올리는 것은 삼가하겠습니다. (님들이 뭐라고 비판하고 대꾸하든지 간에) 님들을 더 이상 자극할 이유도 권정희씨의 후원자처럼 보일 이유도 전혀 없으니까요. 그냥 구득영 목사님과 권정희씨께만 부탁의 말씀을 남깁니다. 장병엽씨는 솔직히 전혀 관심없습니다.
"구 목사님, 전에 말씀하셨듯이 이제 그만 두십시오. 무지한 제가 보기에도 목사님은 전혀 신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잡다한 상식적으로나 전혀 권정희씨의 상대가 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더 이상 목사님의 무식함을 드러내지 마시고, 또 고신의 치부(고신의 목사님들이 다 무식한 것 처럼 비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나 드러내지 마시고 그냥 조용히 관전하세요. 아니면 목사님도 이근호 목사님이 권정희씨에게 부탁했듯이 한 1년 정도 공부를 더 하시고 여기에 뛰어 들던지요. 구 목사님께서 이러시는 것은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의 깊이까지도 의심하게 만듭니다. 제발 같은 교단의 한 평신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자중하시길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리고,"권정희 자매님! 자매님도 그만 포기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님도 이미 느끼고 계시겠지만 여기 이 마을 사람들(이근호 목사님을 포함해서)은 솔직히 대화가 될 것 같지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전혀 논리 자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은 님의 글을 아주 흥미있게 읽고 있고 어떨 때는 님의 깊이와 논리에 감동(?)하기도 하지만, 그런 걸 보여주기 위해서 여기서 이렇게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요? 몇번 시도해 보시다가 대화가 안된다 싶을 때는 돌아서는 것이 주께서 허락하신 귀중한 시간을 또한 아끼는 것일 것입니다. 오히려 다른 보람되는 곳에 님의 지식과 신앙을 사용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그리고 이근호 목사님의 저서나 글들을 위해 1년 아니 한달이라도 소비하는 것은 정말 시간낭비일 것 같군요. 님의 말대로 쓸데없이 바닷물을 다 마셔볼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올라온 글 들만 봐도 이 분의 글 들이 어떨 것인지는 대충 예상이 되지 않을까요? 한번 신중히 생각해 주시길 부탁드리면서..."
강인해 올림
==========================================================================[re] 십자가마을의 푸른잔디를 위해서 '잡초'를 뽑아야지요 권정희 2004-02-01 08:24:41, 조회 : 174, 추천 : 27
강인해님께 드립니다.
저의 글에 관심을 보여주시고 성원해주시다가, 그만 봉변을 당하셨군요. “거시기”라는, 목사님부터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을 들으시고, 재봉틀로 입을 막으라는 둥의 악다구니까지 들으시고, 또한 무식한 “신앙인”을 빙자해서 “상식적인 종교인”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으셨으니, 얼마나 마음이 상하셨을까….
그리고는 아예 상대 안하시는 것이 마음 편하시겠노라고 아무런 댓글로 안하시고 계시는 그 마음을 헤아리면서, 아무래도 저는 스스로는 이 곳을 떠날 수 없을 것 같군요. 아무래도 저의 글에 관심을 가지시고 공감하신 부분이 많다고 한다면, 언젠가 이 하늘 아래에서 만나게 될 지도….아니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만나게 될 뜻이 있는 지도….아마도 그 때는 제가 “권정희”로 나타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권정희”는 곧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2, 제 3의 권정희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이 말의 의미는 그때가 되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은 일이 우리 인생살이에도 있으려니 하고 저의 말을 귀담아 두십시오).
글을 올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만히 저의 글을 보시기만 해도 좋습니다. 아니, 이곳에 들어오시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분명히 믿기로는 기도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 눈물에 저의 이름을 담아 주십시오.
저를 두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를 두고 이 곳 “십자가마을” 사람들이 비아냥거릴 것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이곳 사람들이 저의 “형제들”임을, 그리고 저의 “신앙의 동지들”인 것을…. 그렇지 않다면, 제가 이곳에 들어와서 이렇게 글을 올리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렇다면 이렇게 비판하고 있는가? 저의 마음을 강인해님은 아실 것입니다. 오히려 형제이고, 오히려 신앙의 동지이기에, 바른 복음을 증거하길 원하고, 그 복음이 왜곡되는 것에 대해서 아픈 가슴으로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교정되기를 원한다는 것을…저의 이런 노력을 주님께서는 아시겠지요?
제가 왜 이곳을 들어오게 되었는 지를 아시나요? 저의 “아들들”이 이곳의 소문을 듣고는 저에게 귀띰해 주더군요. “어머니,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곳에 들어와서 몇몇 글을 보던 중에 모성적 본능으로, 이곳의 글들에 “독”들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답니다. 물론, 좋은 글들도 있지요. 복음의 감격이 있고, 소망이 있고, 핍박에도 견뎌내고자 하는 인내가 있는 것도 발견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그런 것들이 그 “독”때문에 빛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 또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말없이 들락거리는 저의 “아들들”이 그 독을 먹고 마신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머니된 저의 마음은 찢어질 만도 합니다. 그 “아들들”이 저를 욕하고 있는 사람들의 비아냥과 조소를 들으면서, 저를 말리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머니된 저의 마음을 이해해주기도 한답니다. 저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머니께서 욕을 들으시면서도, 자기들을 위해서 아닌 것은 아니고, 맞는 것은 맞다고 하시고 계시는구나…..그 중간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을 이해하고 있지요.
그래요. 님의 말씀을 귀담아 새겨두리라.
이곳에 들리시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이 하늘 아래 어디에서라도 평안하시고 강건하소서. 아멘!
이 하늘 아래에 있는 모든 십자가마을을 위해서, 그리고 이곳 “십자가마을”의 푸른 잔디들을 위해서 “잡초”를 제거하고 싶은,
권정희 드립니다.
ps. 어느 신학자가 했다는 말, "Common sense is one of the best friends of the Holy Spirit."이란 말로 그 "상식적인 종교인"이란 비아냥에 귀를 막으소서! 스스로 무식하다고 하는 그 겸손만큼 큰 교만이 없다우....
==========================================================================[re] 십자가마을의 푸른잔디를 위해서 '잡초'를 뽑아야지요 이근호 2004-02-01 08:42:19, 조회 : 155, 추천 : 21
이런 사고방식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한 여인이 감격의 눈문을 쏟으면서 예수님의 발에 조용히 향수를 붓고 있습니다.
여기에 신학도 필요없고, 주위의 비난 소리도 그 여인에게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사랑 뿐입니다.
그 여인이 완벽한가요?
그 여인이 앞으로 한 치의 오류나 실수나 없이 살까요?
이성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완벽하게 살 수 있을까요?
바리새인들은 그 여인에 대해서 비난 일색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처신에 대해서도 비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단의 특징은 '패싸움'입니다. (마치 한국 교회의 모습과 같이)
즉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소속된 단체의 완전성과 그리고 잡초 제거에 신경씁니다.
이래 놓고도 이단 아니라고 우깁니다.
아무런 생각없이 울면서 향수를 쏟아붓는 그 여인에게
마이크 대고 인터뷰 할 자들입니다.
"당신의 소속은 어디요?"
"당신 단체에서 이해하는 사랑의 폭이 상당히 좁아 보이는군요. 당신도 '새로운 피조물' 되었으니 우리 하고 손잡고 '전도단'이나 크게 만들 의향이 없어요? 세상 개혁하게"
"혹시 당신이 추종하는 예수님 그룹에 독소가 있는 걸 당신이 사전에 알고는 있소? 제가 뽑아드릴까?"
제가 늘 이야기했듯이,
정신 상태가 엉뚱한데 가 있으면서도
마치 남들에게는
복음을 앞장세우는 인상을 보이는 것,
이게 어째서, 성령의 역사란 말입니까!
성령의 역사란, 죄 알고, 그 죄마저 용서받았기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와 피만을 감사하는 그들이
이 시대에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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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