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찬을 인터넷에서 몰아내자.VS 패 만들기 경계] 2003-12-30
김인찬을 인터넷에서 몰아내자. 임정수 2003-12-30 16:29:40, 조회 : 180, 추천 : 11
이사람은 자기가 졸업한 곳을 몰라서 두번이나 수정한 사람입니다.
김인찬 (2003-12-23 11:50:08)
안녕하세요. 김*찬 목사입니다. 저는 이미 저를 소개한 것 같은데요?아마 저의 글을 보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소개하려고 합니다.저는 전북 전주 바울 신학원 졸(당시 전주 서문교회 소재) 서울 개혁신학연구원 졸업(제 1차 교단 분열로 청담동에서 졸업=원장님 이진태 박사)졸
그리고 군산노회에서 안수받았습니다(장로교 개혁)그리고 다시 교단이 분열되면서(제 2 차 교단 분열) 저는 양쪽을 거부하였습니다.현재 독립교회로 있습니다. 교회 이름은 하늘 빛 교회입니다.그리고 나누어진 교단들이 다시 하나되길 기도합니다. 많은 기도부탁드립니다.
김목사 (2003-12-27 00:15:31)
정정:저는 청담동에서도 배웠읍니다. 그리고 서초동에서 졸업하였습니다.제가 실수 한 것같습니다. 청담동으로 졸업한 것은 아니고 서초동에서 졸업하였습니다.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찬목사 (2003-12-27 10:45:46)
한가지 빠졌군요. 죄송합니다.교사는 서초동이며 졸업식은 음성에서 거행했습니다.이렇게 부족한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평소의 상태로 돌아가면 어떨까요?
저도 이젠 지쳤습니다. 저를 미쳤다는 사람, 이단 이라는 사람, 온갖 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들과 같이 한번도 인격적인 모독성 발언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본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목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글을 올렸기에 더욱더 책임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떄문입니다. 저는 보수 신학을 했지만 진보신학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이며 모두에게 배울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진보적인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이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진보나 보수 모두가 하나되어서 함께 서로 세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단도 아닌데 저를 추적해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인지....그냥 서로 펀하게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럼 모두 예수안에서 승리하는 형제 자매님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작은자)
추가: 졸업연도는 조만간에 밝히겠습니다. 게시판의 감히라는 표현은 초기에 그런 것입니다.교수님의 조언으로 그 후에는 시정하였습니다.(감사)
이미 이단 판정한 싸이트도 있습니다.
이름 : 관리자 제목 : [성도님들께] 이단성향의 글들에 대하여 [2003/11/19]
할렐루야! 주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요즘 계속하여 글을 올리고 있는 김인찬님(자칭 목사라고 올리고 있으나 확인된 바 없음)은 순복음노원교회와 관련이 없으며, 한국개신교 정통신앙에 위배된 글을 게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박옥수 목사가 운영하고 있는 기쁜소식선교회가 심심찮게 각 교구 및 기관 의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런단체, 이런 분들의 글은 계속해서 차단될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그런 글들에 대하여 리플을 달아 논쟁거리로 삼지 마시길 바라며 꼭 교회 인터넷 관리팀에 즉시 연락하여 조치할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연락처: 933-0739/ 인터넷 관리자: 016-841-0692, 016-9822-7808
-순복음노원교회 인터넷관리팀-
이렇게 한두곳이 차단을 시작했습니다.감사한 일입니다
이렇게 목사라고 주장하면서 졸업학교를 수정하고 교단도 수정하고 다닙니다.실제로 코너에 몰리면 독립교단이라 주장합니다.또한 출신학교에서는 확인이 안됨니다.
글을 올리면서 반응을 보아 수정해서 댓글 쓴사람만 이상하게 만들기도 하지요.또 댓글을 보아가면서 글을 교묘하게 포장 변형하여 신학교수가 감수한것처럼 꾸미기도 합니다.
저는 이단인지 모르겠지만 ....
<<<이사람이 안티 크리스챤이란 확신을 가집니다.>>>>
==========================================================================[re] 자기 패를 만들고자 해서는 아니됩니다. 이근호 2003-12-30 17:48:33, 조회 : 158, 추천 : 7
저절로 패가 되든지, 아니면 외부에서 한패라고 칭할 수는 있어도 스스로 패를 만들고자 해서는 아니됩니다.
조직을 염두에 두는 것 자체가 비복음적입니다. ==========================================================================[re] 마지막 답변입니다. 이제 그만 하세요(해명) 김인찬 2003-12-31 14:05:11, 조회 : 115, 추천 : 12
관리자님께는 정말 죄송합니다. 저를 각 인터넷 게시판에서 조직적으로 몰아내려고 운동하고 있습니다. 저는 목사사례와 십일조와 같은 민감한 문제를 제기한 글로 이렇게 강하게 나올 줄 몰랐습니다.[반론]
위 글은 저의 답변만 가지고 논란을 삽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은 모두 빼버리고 공개한 것입니다. 저는 질문-답변-질문-답변 순서로 성실하게 임한 것을 가지고 논란을 삼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서초동에서 졸업했다는 것은 교사가 서초동에 있기에 말한 것뿐이다. 사실 서초동측에서 졸업했다는 의미에서 올린 것뿐이다.
그리고 후에 이것을 문제 삼자 졸업장소를 다시 올린 것이 음성입니다. 당시는 서초동측, 청담동측으로 불려진 것이 사실입니다. 굿이 실수라면 [측] 이라는 말을 뺀 것일 뿐입니다.이런 것이 이단이 되는 요건이 된다면............글쎄요??
또 일개 순복음 교회의 게시판 관계자 글로 이단을 정죄한다면...글쎄??순복음은 개인적으로 이단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설픈 개인의 주장을 가지고 이단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중세시대에나 있을 만한 일이다.
제 글은 교수님 게시판에서도 게재되고 있는데........진리문제도 아닌 것을 가지고....순복음 교회 관리자 개인의 철저한 오해입니다.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익명으로 올린 자가 원하는 것은 이렇게 싸우는 모습을 보여 저를 게시판에서 추방하려고 합니다. 실재로 제 아이피가 차단당하기도 하였고 게시판에서 글이 지워지기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관리자님 앞으로는 이런 글에 반론을 제가 삼가 하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저의 글은 사실 성경적으로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저의 글에 대한 신학적인 문제로 야기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글은 전통에 대한 환기를 시키려고 시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강한 저항이 있을 줄 예상을 못했습니다. 물론 성경적으로 문제가 아니 되기 때문에 올린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저항을 받았던 중요한 이유는 민감한 부분을 건들인 것이 사실입니다.목사사례와 십일조 등은 교회의 재정과 깊숙이 관계 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게시판에 올리지 못할 것도 사실 없었던 것입니다.저는 이러한 말도 안 되는 반론에 해명하느라 진땀을 쏟고 있습니다. 많은 게시판에서 저를 조직적으로 몰아내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아버지집과 처소(조금 수정했읍니다) 김인찬 2003-12-30 22:59:36, 조회 : 155, 추천 : 8
질문은...요한복음을 연구하다가 처소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소견을 밝혔습니다. 혹시 이러한 저의 생각이 정당한 것이지 혹은 다른 좋은 해석이 가능한지 궁금해서 이렇게 올리게 되었습니다.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그럼 주안에서 승리하세요........김인찬
이 글은 개인적인 소견이며 부족한 글입니다.[요한복음 14장1절-3절에 대한 이해]
이 구절에서 아버지집이나 처소를 신약의 영적처소(성령이 계시는 곳)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재림으로 연결해서 이해하고 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철저히 제자들에게 먼저 약속한 것이고 그들에게 먼저 성취된 것이다. 물론 우리도 그렇게 적용된다. 중요한 것은 예수의 이 말씀이 이미 제자들에게는 성취된 것이라는 것이다. 아버지 집과 처소에 들어가는 때는 재림이 아닌 이미 제자들은 아버지 집에 있는 낙원에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들어간 것이다.
먼저 이 말씀을 하시는 배경은 예수께서 십자가로 죽으로 가면서 제자들을 위로하는 것으로부터 이해해야 한다.(제자들에게 해당되는 것) 예수는 이제 십자가로 걸어가기 전 제자들에게 위로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 14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죽으로 가는 그가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먼저 강조한다.(1절)그리고 자신이 죽어서 아버지께로 가는데 그 곳은 거할 곳이 많다고 설명한다. 자신이 지금 가는 곳은 아버지집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근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죽으러 가는 것은 너희들을 위해 처소를 예비하려고 가는 것이며 이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한다는 것이다. 예비한다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곧 준비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 처소를 예비하러 가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면 십자가로 이 처소(낙원)를 준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한다는 의미는 무슨 뜻인가?
제자들에게 다시 온다고 약속한 이 말은(3절) 재림 때에 찾아온다는 것이 아니며 제자들에게 약속한 말씀대로 제자들에게 나타난 성취된 부활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약속한 대로 세상에서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난 것이다.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를 영접한다는 것은 부활함으로 세상에 다시 와서 너희들을 하늘나라로(나 있는 곳) 영접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들도 그 처소로 인도되게 된다.(이러한 이론과 달리 예수가 부활하여 제자들을 만나 영접한 것이라고 주장되는 것도 있다. 이 이론도 상당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이 처소는 하늘에 있는 처소이다. 여기에서 아버지 집과 처소는 둘 다 장소를 강하게 가리킨다. 장소를 가리키는 아버지 집으로 간다는 것이다. 죽음으로 들어가는 곳이며 하늘나라(낙원 예비하러 간다)라는 것이다.
예수는 비록 내가 장차 죽으면 음부가 아닌 처소(아버지 집)에 가기 때문에 너희들은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자신이 아버지 집으로 가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 2절 상반절의 의미이다. 예수가 육체를 벗으면 그 영혼이 낙원에 가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구약에서 사람이 죽으면 낙원이 아닌 음부로 간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2절 하반 절은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아버지 집으로 가는데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것이다.(여기서는 죽어서 가는 낙원을 말하는 것을 선택했으며(영혼의 처소) 또 다른 이론은 예수가 부활하여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함으로 영접하는 것으로 후자일 가능성도 높다)
이 처소는 구약시대에 없었는데 성도들을 위해 예수의 죽음으로 비로써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3절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다시 온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흔히 이 구절을 재림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재림이 아닌 부활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난다는 의미한다. 부활로 실재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시 찾아 온 것이 사실이다.
28절 말씀은 3절의 다시 온다는 말씀과 연결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역시 28절에서도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과 2절의 아버지 집과 연결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28절에서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한다는 것은 예수의 죽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29절은 이를 확인하게 하는 구절이다.(29절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하는 것에 대한 해석은 그 일이 죽음과 부활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18절의 말씀도 부활로 다시 온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한다.
3절은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약속받는 주체가 제자) 제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신약의 성도들에게 약속하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물론 우리들도 죽음으로 그 처소로 들어간다)
제자들에게 예수가 말씀하는 것은 제자들에게 부활하여 찾아온다는 것이지 신약의 모든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성령으로 거하는 영적인 처소나 재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 제자들에게 예수가 지금 약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말씀한 내용인 처소를 예비하고 다시 온다는 것은 신약의 모든 성도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닌 제자들에게 약속한 것이며 제자들에게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실재로 제자들에게 약속한 대로(2절-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온다는 것)다시 찾아 온 것이 그의 부활이라는 것이다.(3절,18절,28절 성취) 부활로써 예수는 3절의 약속대로 다시 찾아 와서 제자들에게 보이셨다. 그 다음에 예수는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는 말씀대로 제자들도 예수의 처소로 영접된다는 것이다. 이 제자들은 그 처소에 들어가기 위해서 먼저 예수와 같이 육체의 죽음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고 예수는 자신이 먼저 죽음으로 준비한 낙원으로 그들을 영접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적용은 모든 신약의 성도들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씀한 이 내용의 성취는 제자들에 말하고 약속한 것이었다.
4절이 이를 강하게 암시하는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는 예수의 말씀대로 여기에서 너희라는 주체는 신약의 모든 성도가 아니며 일단은 제자들에게 가리키는 말씀인 것이었다. 제자들이 그 곳과 길을 알게 된다는 예수의 말씀은(4절) 재림으로 오는 장소가 아닌 제자들이 살아있을 때에 알게 된다는 것이다.(예수의 죽음의 길과 낙원과 부활)
그리고 3절의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와 4절의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알리라 라는 두 가지 [곳에]를 비교하면 곳이라는 두 용어는 장소가 분명하며 그리고 중요한 것은 4절에서 [내가 가는......] 이라는 말씀은 예수가 어디로 들어가야 되는 것을 강하게 암시해 주고 있다. 예수가 지금 십자가 죽음으로 가는 곳이 어디인가? 그 곳은 십자가로 가는 종착역과 같은 곳(강도에게 약속한 낙원)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가 죽으면 자연히 장소가 있는데 거기가 바로 곳이라는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낙원) 그러나 예수가 오기 전에는 누구도 먼저 아버지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4절 후반 절에서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는 것은 예수의 죽음과 낙원과 부활의 길을 제자들이 안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그 예수가 가는 곳과 그 길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28절에서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알게 된다는 그 때는 제자들이 살아 있을 때에 알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로 제자들은 그 처소(아버지 집)로 영접함을 얻게 되는데 그 때는 제자들이 죽으면 예수처럼(십자가로 죽어서 낙원에 이르듯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예수의 이러한 말씀은 제자들에게 해당되는 곳과 길을 두고서 우선적으로 말씀한 것이며 제자들이 그 길로 인도되어 그 장소인 낙원으로 영접된다는 예수의 말씀이다(신약의 성도들도 해당)
그러므로 다시 온다는 4절의 내용은 재림이 아니며 예수의 죽음으로 이루어지는 장소(낙원)에서 다시 온다는 것으로 부활을 의미한다. 곧 아버지 집에 있는 처소에서 자신이 살아났음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그 처소에서 다시 온다는 것은 재림을 말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예수의 제자들에게 다시 온다는 것은 제자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온다는 것으로 부활을 의미한다.(그러나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살아서 경험하는 것이 아닌 제자들이 죽어서 들어간다는 것)
위와 같은 증거들은 14장 전체가 제자들이 살아있을 동안에 거의 해당될 수 있는 내용이다. 4절 이후에 나오는 내용은 십자가의 길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12절) 이 때에 제자들은 예수의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다가 예수가 죽고서 부활하자 그 내용을 알게 된 것이다.(성경이 증거=29절 말씀대로 부활 후에 믿게 된 것)
14절 이후에 오는 내용에서 성령을 보낸다고 제자들에게 약속한다. 이와 같이 예수로 성령의 약속을 받는 주체가 신약의 모든 성도들이 아닌 제자들이라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약속한 성령을 제자들은 실재로 보혜사가 오게 되는 것을 직접 경험한다. 즉 예수로 성령의 약속을 받은 제자들이(14장) 이 약속의 성취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실재 예수의 부활로 제자들은 예수의 낙원에 죽음(순교 등)으로써 들어간 것이다. 예수 죽음이전에는 누구도 아버지 집에(처소) 거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이 먼저 죽음으로 아버지 집에 들어가 낙원(처소)을 예비하고 그가 부활한 이후에 결국 신약의 성도들이 낙원으로 영접되게 된 것이다.(강도의 낙원=예수로 시작됨)
신약의 성도들은 성령의 약속을 예수의 제자들과 같이 이렇게 직접 받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성도들은 그러한 성취인 부활이나 오순절 등을 직접 경험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약속의 성취도 직접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약속대로 성령의 강림을 직접 경험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14장의 내용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먼저 직접 해당된다는 것은 2, 3. 4절 의 내용이 제자들에게 약속한 내용이라는 것이며 그 성취도 제자들이 경험한 것이라는 것이다.
추가: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한다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언제 해당되는가? 그들이 죽어서 해당된 것이라는 이해이다. 제자들은 이미 아버지 집에(처소에) 있으며, 예수가 말씀하신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는 말씀대로 예수와 제자들이 현재 함께 있는 것이라는 이해이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말씀한 것이고 제자들은 이미 1세기 이전에 죽어서 예수의 낙원에 거한 것으로 본다는 이해이다. 여기에서는 이 논리를 선택하였다.이와 달리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이 죽어서 영접된 것이 아닌 예수가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찾아와 제자들을 성령으로 영접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러한 주장도 상당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아버지 집과 처소는 영혼이 들어간다는 의미라면 계시록의 첫째부활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다.
==========================================================================[re] 귀하의 글은 마치... 이근호 2003-12-31 14:39:57, 조회 : 190, 추천 : 11
>가게 점원이 손님보다 말하기를, "어떻게 오셨어요?" 물으니
"뻐스 타고 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학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해야지만 서울 대학교 들어간다"라고 하니
어떤 덜떨어진 학생이 말하기를,
"뻐스 몇 번 타면 서울 대학교 정문에 도착하는데요?" 묻는 식입니다.
요한복음 14장의 관심사는,
어떻게해서
더러운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가에 대해서 언급한 글인데
귀하께서는 마치
" 예수님의 제자들은 구약 사람들과 같지 않게 그들은 죽어서 음부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곧바로 낙원(천국)에 들어갔읍니다"를 설명하는 대목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어디에 갈 수 있느냐가 성경의 관심사가 아니라,
인간은 아예 당연히 죽어 마땅한 존재인데 왜 자꾸 자신의 불멸성에 대해서 미련을 갖느냐고 도리어 질책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귀하같은 주장을 하면, 곧 임종이 되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경우, 그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부활의 상태에서 새 몸을 입어야 될 요소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그들이 증거하는 부활의 전체 상황과 다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상태'로서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아예 해당되지 않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제자들에게는 이미 부활이 지나간 상황입니다. 그들에게는 마지막 나팔 소리가 아무런 의미가 없이 되어 버립니다. 과연 마지막 나팔소리가 제자들에게는 더이상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데'는 별로 소용없는 나팔소리일까요?
부활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면 안됩니다. 부활의 전체 내용을 다 담아낼 수 있는 문맥에서만 부활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몇 몇 개인의 사후의 상태에만 사용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앞으로 성경 해석을 하실 때에는, 예수님의 공로만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기대치에 부응할 생각을 마시고요)
도저히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인간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와, 그 공로에서 제공되는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도가 하나가 되는 겁니다.
처소란 그러한 관계적 상태를 표현한 말입니다. ========================================================================== [re] 감사합니다. 참고하겠습니다. 김인찬 2003-12-31 17:17:05, 조회 : 233, 추천 : 11
사실 신학교때 제가 이 구절로 고민을 하는 중에 말씀을 잘 가르치는 오성종(얼마전 총신대에 있었는대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교수님의 가르침에 놀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처소로 가는 것이 재림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성종 교수님꼐서 14장 전체 문맥을 배경으로 이 구절의 처소를 재림이 아닌 것으로 해석해서 당황한 적이 있었습니다.(지금은 저하고 달리 이해하지만=이 부분이 사람들마다 차이가 있음)
며칠전 기독교 방송의 설교시간에서도 재림으로 이야기 하는 목사님을 보면서 이 구절의 혼동이 있는 것이 저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습니다.
사실 저의 생각이 옳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제 개인의 소견이며(학설로 인정하는 것 같이..)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이부분을 함께 이해하려고 하였습니다.
저의 글이 마치 공개적인 것같이 나타나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러한 공개가 저를 오히려 풍성하게 한 것은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게된 것도 많았습니다.
목사님의 열정은 제가 얼마전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부족한면을 정확하게 지적해주신 것에 다시한번 감사드리고 목사님 새해가 가까이 오고 있는데 저의 글로 얼마남지 않는 시간을 낭비하게 한 것 같군요.
새해에도 목사님과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함께하길 바라면서............김인찬
##############################################################################################(책소개) 예수는 골고다에서 죽지 않았다 김동진 (Homepage) 2003-12-31 14:41:24, 조회 : 165, 추천 : 9
출판사: 도서출판 한미르지은이: 김 동진발간예정일: 2004. 1. 10.
이 책의 저자는 “나는 말씀대로 믿지 않는다. 말씀대로 믿지 않는 신앙인은 과연 좋은 기독교인이 아닌가?” 라는 조금은 도전적인 물음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끝은 2000년의 기독교를 뒤집는 엄청난 내용으로 그 결말을 맺는다.
“기독교에는 예수가 없다. 예수뿐만이 아니라, 바울도 없다. 기독교는 여전히 우상이나 다름없는 신 야훼의 종교일 뿐, 제2의 유대교일 뿐, 기독교가 아직 아니다. 예수의 종교가 아니라, 모세의 종교요, 바울의 종교인데, 그나마 진짜도 아닌 가짜 바울의 종교이다. 기독교가 기독교다웠던 적은 바울의 시대에 잠깐 있었는데, 그런 바울의 꿈마저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야고보와 베드로의 간섭과 방해에 의하여 산산이 부수어질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의 부정적인 행태를 비판하는 글이 아니다. 기독교의 여러 문제점들을 나열식으로 건드린 흔하고 흔한 기독교 비평서가 아니다. 2천년의 역사를 통하여 교회를 지탱해 온 모든 것들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엄청난 글이다. 교리며, 신관이며, 말씀의 권위며, 교회의 권위며…….
그럼, 반기독교적인 글인가? 작가는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작가는 본래적인 기독교 신앙에, 기독교 신앙의 원형에 더 가깝게 다가가 보려고 이 글을 썼다고 항변한다. 그러면서 감히 근본주의 신학이야말로 적그리스도라고 선언하면서, 종래의 기독교 신앙 및 신학에 대하여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
작가는 먼저, 사도행전의 바울을 죽인다. 그 바울은 교회의 선교전략에 의하여 각본에 짜여져 등장하는 신화적인 인물이다. 진실의 바울은 바울의 서신을 통하여 볼 수 있는 나약하고 이지적인 인물. 병약하고, 무능력하고,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인물. 십자가의 예수를 꼭 닮은 인물. 사도행전의 바울은 이미 거짓이다. 그 바울은 “교회의 신”, “성직자의 신”으로 등장하는 ‘기독교표’ 바울이다. 이어서 그는 바울의 부활신앙을 근거로 복음서의 신화적인 부활을 부정하고……. 가짜 예수, 신화적인 예수가 죽는다. 같은 논리로 모세가 죽고, 아담이 죽고……. 기독교, 아니 유대교의 신화로부터 기인한 원죄를 비롯한 모든 이 종교의 권위주의적인 교리들이 부정된다. 모세의 신 역시 율법의 권위를 보장하기 위하여 율법종교의 사제들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우상일 뿐이다.
동정녀 탄생, 기사와 이적을 행한 예수 등, 복음서의 신화들 역시 그 의미를 잃지 않을 수 없다. 그것들은 기독교가 로마에 입성한 이후로 후대의 적당히 타락한 교회에 의하여 도입된 예수 신화화의 결과이다. 실체적인, 역사적인 예수에 덧입혀진 우상과도 같은 헛된 예수에 대한 믿음이다. 천국과 지옥과 같은 교리와 함께 로마 정통 교회가 세계 선교 전략 차원에서 도입한 장삿속 교리이다. 작가는 스스로의 예리한 판단력에 의하여 신약성서의 모순점들을 들추어내어 이 모든 사실을 밝혀낸다.
그럼, 기독교에 무엇이 남나? 기독교는 그저 헛것이 아닌가? 아니다.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진실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 부활이야말로 바로 기독교 신앙의 태동이요 본질이기 때문이다. 바울 시대의 기독교만으로 기독교는 이미 족하기 때문이다. 시대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바울의 신앙을 오늘날 우리가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의 기독교는 그 시대 바울의 기독교보다도 못하다는 것.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통하여 계시되신 하나님의 인고(忍苦)의 사랑, 그것만으로도 기독교는 이미 차고 넘치는 종교인데, 그만 그 십자가의 예수를 교회가 죽여 버렸다. 그 예수가 뭔가 미흡하다고 착각하여……. 그러고 나서는 예수를 신화화 작업을 통하여, 교리화 작업을 통하여 아주 우스꽝스러운 신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책은 과연 작가의 주장대로 매우 기독교적인 글인가? 아니라면 비기독교적인 글일 수밖에 없는가? 이 책에는 그 양면이 모두 담겨 있으니 말이다. 작가는 기독교적인 십자가의 사랑을 이 책의 정면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종래까지 알고 있었던 기독교 교리를 놓고 볼 때, 이 책은 매우 비기독교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루터의 개혁은 개혁도 아니라고 감히 선언하면서, 작가는 오늘날의 기독교의 문제점을 개혁의 실패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시작으로부터, 기독교의 근본 교리로부터 찾아낸다. 교회가 상업주의에 물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그 교리로 말미암아 상업주의의 근원일 수밖에 없으며, 온상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뭔가 잘못된 교회의 문제점을 교회의 기원,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찾는다.
이 한 권의 책의 위력, 그것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여 그 어디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그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하여 종래의 권위주의적인 기독교를 종식시키고, 인도주의적인 기독교의 역사를 새로 쓰기를 희망하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런 일들이 과연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을 것인지? 한편으로 작가는 기독교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진리와 사랑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하여서라도 이 책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런 일들이 작가의 희망대로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을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그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
작가는 다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믿을 뿐이다.
==========================================================================[re] 기독교를 뒤집는 엄청난 내용이 아니라 2000년 동안 계속 튀어 나온 글일 뿐입니다. 이근호 2003-12-31 16:05:50, 조회 : 202, 추천 : 13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 이들이 평소에 기독교를 보는 관점을 그냥 정리해 놓은 내용들 뿐이네요.
이런 책이 보다 많이 나와서
제발 교회 안에 숨어있는 가짜들이 신자들이 이제는 그동안 믿었던 신을 향하여 봉기하는 그 솔직한 본색을 좀 드러내어 주었으면 합니다.
##############################################################################################"믿음이란,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함" 예병환 2004-01-02 12:41:47, 조회 : 185, 추천 : 13
이근호 목사님의 강의 중에서,
모세가 자기 믿음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어려움을 도우려고 했을 때, 그것을 하나님께서 실패케 하심으로 모세는 바로의 아들됨을 거부한 것이 되었고, 이것이 바로 모세의 믿음이 되었는데, 이것은 모세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믿음이다. 히브리서에서 믿음이란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라는 내용을 보고 참과 거짓의 판별식이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마움과 감격의 소용돌이....
==========================================================================[re] "믿음이란,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함" 강성희 2004-01-03 00:32:02, 조회 : 187, 추천 : 10
아멘입니다.믿음이란 바로 예수그리스도그분이 믿음이라고 믿습니다!
##############################################################################################성경을 진리로 이해한다는 것은! 서성환 2004-01-05 08:00:58, 조회 : 501, 추천 : 26
성경은 진리이지만 성경으로 말한다고 모두 진리는 아닙니다.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시지만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모든 진리를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각자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에는 충분한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깨닫게 되는 말씀이 다를 수가 있고, 그리스도안에 있는 삶이라도 서로 방향이 다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구원받기에 충분히 의로운 사람이 없고, 어느 누구도 결코 구원받지 못할 죄를 범한 사람도 없습니다.그러므로 어떤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을 수가 있습니다.
'새로운 언약'이란 어떤 의미인지도 잘 정의 되어있지 않으면서도 많이 언급되는 글들을 보면서,성경을 바로 이해하는 어떤 비밀스러운 '키(Key)'를 갖고자하는 노력들이 하나님의 뜻을 좁은 틀안에 넣으려는 시도인 것을 깨닫습니다. 성령님이 깨닫게하시는 곳까지 깨닫게 된 것만도 감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만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성경강해나 연구에 리플을 달 수가 없어서이곳에 성령님깨서 깨닫게 하신 곳까지만 적어두고 갑니다.
마태복음을 공부하면서제 1장의 내용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석의을 위한 질문:
Q1.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고 소개하는 의도? 그리고 족보의 시작을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 이유는?(1:1-17, cf.눅 3:23-38)♨ 이는 마태복음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쓴 글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유대인들이‘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할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과 축복을 약속받은 민족이라는 종교적 선민의식(選民意識)을 강조하는 것이다(창12:1-3, 13:14-17, 15:4-5, 17:2-8, 17:15-16, 18:17-19, 22:16-18, cf.눅19:9, 롬4:16, 갈3:7,29, 행3:25, 갈3:8-9),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는 다른 민족들에게 압제 당하고 있는 유대민족에게 다윗의 왕국을 재현할 그리스도(메시아)에 대한 칭호로 생각했으며(삼하 7:12, 13, 사 9:7, 16:5, 렘 23:5, 30:9, 겔 34:23, 24, 37:24), 심지어는 메시아를 ‘다윗’이라고 부른 경우도 있다(렘 30:9, 겔 34:23, 호 3:5). 다윗에게만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은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그리스도가 다윗이 왕이었던 시대와 같은 회복을 원하는 국가적, 정치적인 의미를 잘 나타낸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대망하는 약속된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예수님의 족보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이 알고 있어서 부인할 수 없는 계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음을 확인시키는 의미가 있다.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아브라함의 후손과 다윗의 자손’으로 표현하는 의미는‘아브라함의 혈통을 통한 출생’의 필연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리스도가 오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cf.마3:9).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마태복의 첫 부분에서 (유대인들에게) 소개하는 의미는 유대인들에게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가 약속대로 오신 것을 알려줌과 함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이룩되어질 하나님 나라와 그의 백성(진정한 영적인 의미의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에 대한 시작을 알리는 의미가 있다.
Q2. 족보 속에 나타나는 네 여인(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의 의미는?(1:3, 5, 6)♨ 이는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기 위하여 계보를 기록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자랑스럽게 말하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과연 순수한 혈통인지, ‘다윗의 자손’이 자랑스러운 계보인지를 생각해 보게 하는 표현이다. 남자 중심의 혈통만 따지는 유대인들이 자랑스럽지도 않은 여인들(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을 계보 속에서 언급한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는 유대인들이 자랑스럽게 말하는‘아브라함의 후손’이 ‘근친상간(다말), 성적 타락(라합), 이방과의 교혼(라합, 룻) 그리고 간음(우리야의 아내)’과 같은 불순한 혈통을 통해서 ‘다윗의 자손’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단순한 혈통적이고, 민족적인 차원에서 이루어 가시는 것이 아니라 예비하신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즉 이 여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손과 기업(창12:1-3, 13:14-17, 15:4-5, 17:2-8, 17:15-16, 18:17-19, 22:16-18)을 잇는 사명을 깨닫지 못한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기 위해 사용한 사람들이다. 다말은 유다에게 아브라함을 통해서 약속하신 자손의 씨가 있게 하시는 뜻(창38:8, cf.신 25:5-10)을 깨닫게 하였고,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창 12:6, 7. 15:18. 17:8)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였으며, 룻은 보아스에게 가나안에서 기업을 무르는 책임(민27:8-11)에 대한 실천을 하게 하였고, 우리야의 아내는 다윗으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아들(솔로몬; cf.삼하12:24-25)에 대한 약속(삼하7:5-16; cf.대상22:6-16)을 생각나게 한 여인이다(왕상1:15-31). [추가적인 연구과제 2번 참조] 그리고 이런 여인들을 등장시켜서 요셉의 정혼녀인 마리아를 통한 예수님의 탄생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그리스도임을 자연스럽게 유대인들에게 설명해주고 있다.
Q3.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결국 예수는 누구의 아들(자손)인가? (1:18)♨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육적인 혈통을 따라서 부정모혈(父精母血)으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그 근본은 이미 계셨던 성자 하나님(예수님)이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임을 의미한다. 이미 존재한 생명이 인간의 몸을 입기 위해서 단지 인간의 태만 빌리는 것이므로 당연히 한 여인(마리아: cf.눅1:46-55)만을 통해서 잉태된 것이고, 또한 성령을 통한 잉태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동정녀의 몸을 빌리신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을‘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계보에 기술하고 있지만 다른 조상들의 출생처럼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능동태).’고 표현하지 않고,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부르는 예수가 태어나셨다(수동태).’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결국 ‘아브라함과 다윗’의 계보를 통해서 출생하셨지만, 하나님의 약속대로‘여자의 후손(창3:15)’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결국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 구원을 위한 사명’으로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추가연구 과제
* 시대를 14대씩 셋으로 구분한 의미? (아브라함, 다윗, 바벨론 포로, 예수님)♨ (1)왜 14대씩 구분하였을까? : 14대씩의 구분이 유대인들의 통상적인 족보 암기법에 따른 것이라는 말(정선 주석)이 있다. 이 14라는 숫자는 일곱(안식일)의 배수로 서 거룩한 숫자로 생각하기도 하며, 또한 다윗의 이름과 철자 수(히브리어로는 숫자를 나타내기도 함)가 같다는 사실이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14로 나눈 것과 관계가 있다고도 생각한다. 아무튼 의도적으로 14대씩 구분한 것은 사실이다. 실존했던 세 명(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의 조상들을 빼면서까지 14대씩 세대로 구분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구분된 기간의 의미인 것이다.
(2)어떻게 14대씩이 되는가? : 족보의 두 번째와 세 번째 부분이 14대라고 기록된 이 부분은 사실상 13대이다. 이렇게 실제로는 13대밖에 안 되는 것이 왜 14대라고 기록되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여러 학자들이 답을 제시하였다. '헨드릭슨'(Hendriksen)은 여고냐가 두 번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바벨론 포로 이전의 여고냐(참조, 렘 22:30)와 포로 이후 복권되어 왕위를 회복한 여고냐(참조, 대상 3:17,18)가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슈바이처'(Schweitzer)는 고대적 방식에서 언제나 첫째와 마지막 것을 포함시켰던 관습을 들어 다윗이 두 다윗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 주장은 '벵겔'(Bengel)이나 '알포드'(Alford), '드베테'(De Wette)등에 의해 지지되었다. 또한 '건드리'(Gundry)는 요셉과 마리아를 각각 계산하여 14대를 맞추려고 하였으나 이같은 시도는 족보의 성격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대로 계산하자면 본장에 언급된 여러 여인들도 계수되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14대라는 표현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또 본장의 족보는 요셉의 혈통이지 마리아의 혈통은 아니라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이상 크리스탈 강해 참조)본인의 의견은 두 번째 세대부터는 구분의 경계에 있는 사람(다윗, 여고냐)이 두 번씩 계수된 것이 확실하다. 이는 세대 구분이 단순히 출생이나 인물의 전 생애를 기준으로 나누는데 있지 않고, 어떤 사건을 중심으로 나누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3)그렇다면 세대를 3부분으로 구분한 의미는? : 구분의 기준을 보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첫 세대는 다윗이 태어나서 왕이 된 후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기 전까지이고, 두 번째 세대는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후부터 바벨론으로 잡혀갈 때까지이며, 세 번째 세대는 바벨론으로 잡혀간 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까지이다. 매튜헨리는 그 의미를 ‘처음 14대에서는 다윗의 가계가 마치 아침처럼 새로 일어나며, 두 번째 14대에서는 한낮의 태양처럼 찬란하게 번성하고, 세 번째 시기에 가서는 점점 쇠퇴하고 몰락하여 가난한 목수의 가계로까지 줄어드는 것을 보게 된다. 바로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그 빈궁한 목수의 가계로부터 나와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을 찬란하게 비추신다(매튜헨리 주석).’라고 했다. 위클리프는 이스라엘 민족 역사상의 3기를 ‘신정정치(theocracy), 군주 정치(monarchy), 성직정치(hierarchy)’로 구분하였다(위클리프 주석).매튜헨리나 위클리프는 역사적이나 정치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보는 그리스도의 계보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구속 역사를 이루어가는 관점에서 바라 볼 필요성이 있다. 첫째 세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서 자손의 약속을 하신 시기(창12:1-3)로부터 시작하여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세움을 입은 때(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기 전; 삼하11:1)까지이며, 둘째 세대는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취한 시기(삼하12:2)부터 바벨론으로 잡혀간 시기까지이며, 셋째 세대는 바벨론으로 잡혀간 후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기까지로 나눌 수 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첫째 세대는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하심으로 역사를 이루어 가신 세대로서 결혼과 자손의 번성에도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신 시기이다(하나님의 뜻에 의한 계보).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취함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다윗으로부터 시작하는 두 번째 세대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인간의 의도대로 결혼하고 자손을 번성시켜간 세대이다(인간의 의도에 의한 계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세상을 쫒아간 그들은 결국 바벨론으로 포로가 된다. 바벨론 포로의 시기는 혈통의 순수성과 종교적인 지도력까지도 읽어버린 시기이다(이방의 지배에 의한 계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그들이 민족과 종교의 순수성까지도 읽어버리게 되어서, 이제는 민족적인 신앙이라기보다는 개개인적인 신앙의 차원으로 바뀐 시기가 되었다. 비록 이스라엘이 인간 역사적로는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을 하였지만 하나님의 역사에는 아직도 바벨론의 포로가 계속되는 시기인 것이다. [바벨론 포로의 의미 참조] 바벨론 포로시절 동안에는 그들을 회복시키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구원시켜주실 구원자(그리스도)만을 기다리는 시기 이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리스도는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회복시켜서 이스라엘 땅(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났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사역을 감당하실 분인 것이다. 즉 오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육적인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으로 나서 민족적,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분이 아니라, 영적인 바벨론 포로에서 인류를 해방시킬 분인 것을 말하고 있다. 그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 이라기보다는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 분은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몸을 입으신(임마누엘)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는 “하나님의 계보”가 시작 되는 것이며, 직접 하나님에 의한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른 글들은 'http://bible911.hanmom.com'에서 보실 수가 있습니다.
==========================================================================[re] 질문이 생기는 군요. 이근호 2004-01-05 09:52:37, 조회 : 223, 추천 : 13
1. 왜 밧세바를 가지고 '우리아의 아내'를 묘사했습니까?
2.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이삭 대신 아브라함의 아들로 곧바로 태어나면 될 터인데 왜 42대를 거치게 하게 합니까?
3. 마리아가 동정녀라고 한다면, 구태어 요셉과의 정혼을 꼭 성사시킬 필요가 있었을까요?
오히려 정혼하지 않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임신하는 것이 '쳐녀가 아들을 낳으리니'라는 이사야의 예언에 더 충실한게 아닐까요?
만약에 정혼한 상태라면, '기혼녀가 아들을 낳으리니'라는 예언이 되어야 더 부합되는 것 같은데요?
이사야가 '처녀'라는 예언을 던졌을 때, 누가 '기혼한 여인이 처녀인 상태를 유지한채'라는 의미로 이해하려고 덤벼들 자가 누가 있습니까!
4. 13대-14대-13대로 보셨는데
이것을 14대 -15대-14대로 보면 되지 않을까요? 즉 13대에서 14대도 수정을 두 번거치는 것보다는 15대에서 14대로 수정을 한번 거치는 것이 저자의 의도에 더 가깝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5. 다윗을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단정짓는 이유가 순전히 부계혈통에 준해서 되어진 결과라면 다윗부터 예수님에게서도 부계혈통 유지를 위한 모계혈통의 조정이 왜 불필요한 것일까요?
==========================================================================[re] 질문에 대한 답변 서성환 2004-01-08 01:11:46, 조회 : 310, 추천 : 9
이 근호 목사님,먼저 저의 작은 깨달음에 관심을 가지시고, 말씀이 의미하는 진리가 무엇인가 깊은 관심을 표명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바쁜 삶 때문에 즉시 읽고 답변을 드리지 못하여서 죄송합니다.
저는 어떤 누구의 깨달음이 완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루터, 칼빈, 요한 웨슬레 그 어떤 유명한 신앙의 인물도, 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나는 신앙의 인물들(아담, 노아, 아브라함, 다윗 등)이나 선지자들(이사야, 다니엘, 세례 요한 등)까지도, 물론 저도 당연히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사람들은 그 시대에, 그때에,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역사 속의 모든 신앙의 인물들이 그러했듯이.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구원에 이르는 어떤 깨달음들은 갖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성경말씀의 정확한 의미인 진리의 깨달음이던, 말씀 해석에 의한 적용의 깨달음이던, 생활 속에서의 하나님의 역사를 통한 삶의 깨달음이던 간에.
우리가 성경을 논할 때에는 자신의 의사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기 위해서 대화하면 논쟁이 됩니다. 그러나 말씀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한 지체라는 생각으로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서로 말씀을 나누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저의 깨달음보다 더 좋은 깨달음을 기대하면서 저의 글을 올렸습니다. 어려운 질문들을 받고 보니 걱정이 됩니다. 성령님께서 저에게 깨달음을 주신 만큼만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그 이상 혹은 더 좋은 깨달음이 있으신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1. 왜 밧세바를 가지고 '우리아의 아내'를 묘사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세대를 3부분으로 구분한 의미’ 가운데 언급된 것 같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두 번째 세대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인간의 의도대로 결혼하고 자손을 번성시켜간 세대이다(인간의 의도에 의한 계보).’의 첫 부분에 ‘다윗은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기록하지 않고,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는 표현은 남의 아내를 취했다는 의미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짝 지워 주신 하나님의 계보가 아닌 인간의 뜻에 의한 계보임을 나타낸 것을 뒷받침해주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세대에서는 결혼이나 자녀의 생산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이 개입되고, 그 뜻에 의한 결혼으로 말미암아서 우상 숭배의 길에는 빠지지 않았으나,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취한 이후로부터는 자손들이 결혼의 결과로 아내의 신앙을 따라서 이방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의 죄악으로 흘러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노예의 결과 하나님의 진노를 하심으로 민족적인 노예인 바벨론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이삭 대신 아브라함의 아들로 곧바로 태어나면 될 터인데 왜 42대를 거치게 하게 합니까? ▷죄송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의도에 관한 것인데, 제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답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단지 히브리어에서 ‘zera’ 라는 표현은 ‘씨’, ‘자손’ 혹은 ‘아들’의 의미가 모두 있는 표현이기 때문에 단수로 표현한 ‘여자의 후손’(창3“:15), ‘아브라함의 후손’(창9:9), ‘다윗의 자손’(렘33:22) 은 동일한 표현인데 유대인이나 사람들이 오해를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마리아가 동정녀라고 한다면, 구태어 요셉과의 정혼을 꼭 성사시킬 필요가 있었을까요? 오히려 정혼하지 않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임신하는 것이 '쳐녀가 아들을 낳으리니'라는 이사야의 예언에 더 충실한게 아닐까요? 만약에 정혼한 상태라면, '기혼녀가 아들을 낳으리니'라는 예언이 되어야 더 부합되는 것 같은데요? 이사야가 '처녀'라는 예언을 던졌을 때, 누가 '기혼한 여인이 처녀인 상태를 유지한채'라는 의미로 이해하려고 덤벼들 자가 누가 있습니까! ▷이 부분에서도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가에 대한 답변은 저의 소견을 넘어 서는 것입니다. 단지 구약에서 처녀라는 ‘almah'(창24:43, 출2:8, 시68:26, 잠30:19, 아1:3,6:8, 사7:14)는 소녀로부터 여자 청년까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되는데 ’베일을 쓴‘ 여인으로서 성적인 관계를 하지 않은 여자라는 의미가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정혼한 여인을 사용하셨을까? 제 생각으로는 남편만 인정하면 비난 받지 않고 잉태해서 아이를 낳을 수가 있어서 정상적으로 자녀를 기를 수 있는 위치의 처녀가 정혼한 여인이 아닐까요?
4. 13대-14대-13대로 보셨는데 이것을 14대 -15대-14대로 보면 되지 않을까요? 즉 13대에서 14대도 수정을 두 번거치는 것보다는 15대에서 14대로 수정을 한번 거치는 것이 저자의 의도에 더 가깝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 질문도 이미 ‘세대를 3부분으로 구분한 의미’ 속에서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마태가 숫자를 셀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숫자에 밝은 ‘세리’이기 때문에 13대인 것을 잘 못 세어서 14대로 표현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영감을 주신 것도 이유가 있기 때문이며, 성경에서 구분한 기간으로 계산 하면 비록 의도적이긴 하지만 14대씩이 맞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대 구분은 조상들의 한 세대라는 삶의 기간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아브리함의 자손에 대한 약속,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사건, 바벨론 포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초점인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5. 다윗을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단정짓는 이유가 순전히 부계혈통에 준해서 되어진 결과라면 다윗부터 예수님에게서도 부계혈통 유지를 위한 모계혈통의 조정이 왜 불필요한 것일까요? ▷이는 유대인들의 혈통적 계보의 관습에 의한 기록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마태복음의 전반적인 내용을 보면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유대인의 혈통이나 관습을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중시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마3:9, 산상수훈 등).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의 관습 속에서도 분명히 이루어진 것을 확인시키는 의미가 있습니다. 동방박사의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유대인들이 자신의 관습이나 율법적인 이해를 넘어서서 구약을 보아야 기독교인들이 보는 관점처럼 하나님의 역사를 알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보면 확실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뜻을 모두 거스려도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통해서라도 변함없이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보의 표현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표현인 ‘여자의 후손’, ‘아브라함의 씨’, ‘다윗의 자손’ 인 것을 모두 이루신 것입니다.
==========================================================================[re] 저의 견해 이근호 2004-01-08 07:07:28, 조회 : 229, 추천 : 23
1. 밧세바가 아니라 '우리아의 아내'로 표현 것은, 솔로몬이 육체적인 다윗의 아들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다윗의 신앙적인 후손임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우리아는 솔로몬을 통해서 그 신앙성이 살아있는 겁니다.
이는 곧 육신에 대한 은혜성의 우위를 의미합니다.
그렇게해서 14대-15대-14대가 14대-14대-14대가 되는 겁니다.
2. 왜 예수님 앞에 다윗과 아브라함이 등장되어야 하면, (마태복음에서는 아브라함보다 다윗의 왕권이 더 우선시됩니다.)
새로운 씨와 그 왕적 속성을 모형적으로 미리 열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브라함의 부인은 그 어떤 식으로 결코 '여자의 후손'을 낳을 자격자는 되지 못하지만(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약속의 후손'을 낳을 입장은 됩니다. 마치 마리아의 모형으로 작용합니다. 아브라함의 육신과 상관없기 때문이죠.
바로 이 사실로 인해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모계 조정이('-에게서'라는 단어가 붙으면서 모계조정에 나서는 여성의 이름이 직접 거론됩니다.) 왕적 위상을 드러날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씨가 그 속성을 드러내는 기간, 모계조정을 받는 기간이 14대이기에, 이 대수가 견본이 되어 그 뒤에 나오는 인간 육신의 죄성이 다 공개되는 기간도 14대-14대로 조정되는 겁니다.
3. 마태복음 족보는 유대인 관습이나 족보 계산이나 마태가 세리라는 직업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위상을 증거할 뿐입니다.
4. 마태복음 1장에서의 '처녀'란 남성으로부터 내려오는 육신의 요소가 비록 정혼이라는 관계 속에서도 극복될 수 있는 새로운 처녀성의 탄생을 의미하는 겁니다.
즉 '여자의 후손'은 오직 하나님의 솜씨라는 겁니다.
인간세상에서의 처녀란 기껏 혼인하지 않는 선에 머물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 육신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서 마리아라는 여성은 예수님 탄생에 있어 인간적인 면에서 기여한 바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서 '나시니라'라는 표현이 가능한 것입니다.
'나시니라'가 가능하려면 반드시 정혼이 요청되는 겁니다.